고백

etc 2021. 5. 7. 19:46

 

https://www.youtube.com/watch?v=RJpJiEz7K7k

 

평소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서, 안도현 시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로 유명한 '너에게 묻는다' 정도까지 아는 수준이다. 

이 책은 안도현 시인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사유의 잠언들이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는 잠언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부제인 '안도현의 문장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겸손하게 표현한 것 같다.

일상의 고민과 성찰을 통해 우려낸 짤막짤막한 문장들도 백미지만, 책 전체를 통해 은은한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사진들도 문장들 못지 않게 아름답다. 사진을 보고 글을 지어낸 것인지, 글에 맞는 사진을 찍은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어디로든 데려다 준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긴 하지만,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안도연 시인은 아래와 같이 썼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눈,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상상력은 우리를 이 세상 끝까지 가 보게 만드는 힘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입맞춤이 맞닿기 직전까지의 상상력 때문이다."

이 책은 장 그르니에의 글로 시작한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 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러면서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거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해, 시를 쓰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기 시작하던 나의 스무 살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어쩌면 과거의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스무살 청춘에게 바치는 글이기도 할 것이다.

곧 신록이 우거지는 여름이 올 것이다. 봄에만 잠시 느낄 수 있는 풍경들이 있다. 바로 연두색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
짧은 봄이다. 그리고 짧은 인생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잠잠히 지켜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 본 리뷰는 출판사 지원을 통해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썼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 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이 세상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의 아련한 기대와 다 짐을 이보다 더 신비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대한 꿈이란 겸허한 마음없이 이루어지지 않고, 가난과 남루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사람은 당당해진다. 수없이 꽃이 피었다가 지고 눈보라가 퍼붓다가 그치고 강이 넘쳐 벌판이 되고 길이 산을 뚫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거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해, 시를 쓰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기 시작하던 나의 스무 살에게 이 책을 건넨다.
-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꿈이랄까,희망 같은 것 말 이다.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거슬러 올라 가기 때문에.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눈,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눈, 상상력은 우리를 이 세상 끝까지 가 보게 만드는 힘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입맞춤이 맞닿기 직전까지의 상상력 때문이다.
- 인간의 귀는 인간의 목소리 이외의 소리를 듣는 데 매우 인색하다. 인간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다.
- 비 그치면 고추밭 매러 가려고 큰맘 먹었 더니 또 비가 오네. 호미야, 처마 밑에서 빗소리나 듣자
-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
- 별똥별이 아름다운 것은 빛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떨어진 곳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이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고 회의하는 자만이 위험한 생을 즐길 수 있지. 하지만 삶 자체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될 때는 다시금 안전한 쪽 을 바라보는 게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생이지. 생 이란, 위험과 안전 사이의 줄타기.
-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 길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반드시 길이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 앞에서만 없던 길도 생기는 법이다. 뛰어오르라고, 도전하라고 벽은 높이 솟아 있는 것이다.
- 세상한테 떼쓰며 대들던 소년은 가출을 하고, 세상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은 출가를 한다. 가출과 출가, 이 두가지 여행 중에 더 진정성을 갖는 여행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출가보다 가출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훌쩍 건너가 버리는 출가는 이 세상에 대해 책임지려고 하지 앉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돌아오는 가출은 그날까지 세상속에서 부대끼며 전전긍긍할 것이 뻔하다. 이런 전전긍긍 없는 여행, 전전긍긍 없는 생활, 전전긍긍 없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속임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는, 나는 앞으로 끊임없이 전전긍긍해야 할 것이다.
- 삶이란?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책이 쌓이는 것. 오래전에 받은 편지의 답장은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 또 편지가 오지 않았나 해서 우편함을 열어보는 것
-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 저기 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면 내리막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보자, 자기 자신을 달래면서 스스로를 때리며 페달을 밟는 발목에 한 번더 힘을 주는 것.
- 어머니에게 카네이션이나 용돈 대신 선물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잘 늙어가는 50대의 건강한 아버지, 술 마시지 못하는 아들들, 바퀴벌레 나오지 않는 아파트, 수술하지 않아도 되는 튼튼한 무릎, 늘 잔고가 백만 원쯤 되는 통장, 돈 잘 쓰는 생활습관 등등
- 교훈을 받아들이는 일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풍잎들이 강을 수놓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교훈을 생각하고, 이름 없는 꽃을 하나 발견하더라도 식물도감부터 뒤적인다. 그 꽃이 몸에 해로운지 이로운지를 먼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별을 바라보면서도 교훈이 될 만한 일을 찾을지도 모른다. 꽃은 꽃대로 아름답고 별은 별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고통이 왜 아름다운 것인지, 상처가 왜 아름다운 것인지는 관심도 없다.
-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 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가. 떠날 때 보면 안다.
- 도토리는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가? 갈참나무 가 지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것으로 도토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나무에서 떨어진 후에도 새로운 삶을 시 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 길에 모퉁이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모퉁이 저 쪽을 상상할 일도 없고, 비행기 활주로나 고속 도로처럼 인생은 황막해졌을 것이다.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들었다. 모퉁이가 없다는 것은 곡선이 없다는 것, 막막하고 뻣뻣한 직선이 세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모퉁이가 없다면 골목길에서 자전거 핸들을 멋지게 꺾을 일도 없었을 것이 고, 연인들이 담벼락에 붙어 서서 키스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별 후에 돌아서서 숨죽여 흐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핍이 모퉁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퉁이는 아쉽고 그리운 것들을 낳았다.
- 외로울 때는 사랑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사랑 에 빠진 뒤에는 외로움을 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사랑하고 싶거든 외로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외로워할 틈이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이 세상에 외로워지고 싶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외로움이라는 특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 외로움 때문에 몸을 떠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외로움 을 느껴볼 시간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외로워할 틈이 있는가, 먼저 돌아보라.
- 빈둥거리고 어슬렁거리고 게을러져라. 적막을 사랑하라. 적막에 사로잡힌 적막의 포로가 돼라. 적막 속에서 빈둥 거리다가 보면 문득 소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다. 고 세상의 소란 속으로 단번에 뛰어들지 말고, 가능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라. 그러다 보면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봄날에 눈부시게 피어난 꽃잎을 보며 경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꽃잎의 눈부심을 위해 혹한의 겨울, 꽃잎의 언저리로 눈보라가 지나갔음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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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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