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자서전

인문 2020. 7. 29. 08:25

1. 알렉산더의 솔선수범
- 알렉산더 대왕이 '불패의 신화를 쓸 수 있었던 밑거름에는 그가 전 장의 선봉에서 보여준 모범의 리더십이 있었다. 알렉산더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기에 전사戰史에 두드러지는 탁월함을 남길 수 있었다. 알 렉산더는 천부적인 행동인' 이었다. 그는 결코 탁상공론만 일삼는 '의 자에 앉아만 있는 장군Armchair General'이 아니었다. 전투를 말하기' 보 단 '행동' 했고, 병사들과 함께 뛰고 험한 곳에서 자며 거친 음식을 먹 었다. 알렉산더의 솔선수범은 그가 후대의 다른 주요 지도자들과 대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군대의 사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알렉산더는 늘 전투에서 선두에 섰다. 그 결과 알렉산더는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도끼에 찍혀 죽을 뻔했고, 인더스 계곡에서 벌어진 말리족과의 전투에서는 폐에 부상을 입어 사망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옥수스강을 건넌 직후에는 더러운 물을 잘못 마신 탓에 매우 아픈 상태였음에도 마케도니아군을 공격 해온 유목민 부대를 직접 격퇴하고 추격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알렉 산더가 유일하게 최전방에 서지 않은 전투는 기원전 327년의 소그드 요새 공방전뿐이다. 성벽을 올라타는 전문 기술을 지닌 정예병 300명을 총동원했지만 병력의 10분의 1을 잃을 정도로 치열한 공성전이 벌 어졌던 전투였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알렉산더가 최전선의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 았기에 일반 병사보다 더 많은 부상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로 알렉산더는 생전에 최소 스물한 번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 며 학자들은 그가 수하의 장교보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더 많이 겪 었을 거라고 설명한다.
- 모든 것이 공개된 개활지에서 알렉산더가 다리우스와의 정면 대결 끝에 승리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중요했다. 이는 알렉산더가 다리우스를 대신해 아시아의 합법적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모든 것이 조직화, 서열화되었고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가진 페르시아에서 권력의 중심인 다리우스가 제거된 일은 상징적, 실질적 의미가 상당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중과부적인 페르시아 대군의 규모에 부담을 느낀 마케도니아군의 참모들은 알렉산더에게 야밤의 기습 공격을 제안 했다. 이에 알렉산더는 "나는 승리를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호언하며 다음날 아침 정면 대결을 선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인들에게 그는 승리를 도둑질한 침략자로 수천 년간 각인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에게서 유래한 이란어 이스칸더iskander'는 도둑을 의미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결전에서 마케도니아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산더의 빠른 결단력과 페르시아의 지연된 의사 결정 체제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미국의 장군 조지 패튼은 "좋은 계획을 빨리 실행하는 것이 완벽한 계획을 나중에 시행하는 것 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알렉산더의 리더십을 그대로 표현 해준다. 또 19세기 군사전략가 앙투안 앙리 조미니가 “집단지도체제 에서 지도부의 결정은 구성원의 최저 수준에 맞춰 이뤄진다”며 “전쟁 의 천재가 중앙 집중 방식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 데 부합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전투다.
- 알렉산더의 리더십은 한계가 분명하다. 그는 사익과 공익을 구분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이를 두고 독일의 역사학자 한스 요아힘 게르케는 "알렉산더의 제국은 항상 알렉산더 개인이 중요했다”며 제국의 정체성을 '에고크라티Egokratie'로 평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중 요하게 여기는 명분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정했 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례로 그가 처음 페르시아를 침공하며 “페르시아에게 억압받는 그리스인의 자유를 회복해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페 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실익을 챙기며 살았던 많은 그리스인은 알렉산더의 주장에 시큰둥했다. 알렉산더가 수많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구축했던 부하들과의 '신뢰'도 결국 자신의 사익을 앞세우다가 금이 갔다. 그가 세계의 끝 까지 가겠다며 인도 갠지스강을 건너려 하자 병사들이 항명 조짐을 벌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알렉산더는 세계가 우랄산맥과 인도의 벵골 지방 사이쯤에서 끝난 다고 믿었다. 게다가 인도까지의 정확한 거리 정보도 모르고 있었다. 이탈리아반도에서 시리아 해변까지 선박으로 50일, 육로로 125일 소요되었던 것에 근거하여 몇 년 안에 세계 정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부하들은 고난이 이어지고, 위험이 계속 커지는 것을 보면서 알렉산더에게 한없이 동의하기가 어려워졌다. 디오도로스는 “끝없는 행진으로 말발굽이 닳아 없어지고 무기는 무뎌졌으며, 옷감은 다 해져서 타향의 의복으로 기운 누더기를 입어야만 했을 때 알렉산더와 군대 공동의 이해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더 이상 알렉산더의 사익과 마케도니아군의 공익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여기서 되돌아간다면 그동안의 노고는 헛된 것이 되고 모두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알렉산더의 연설에 원정군의 핵심이었던 마케도니아 엘리트 군단의 베테랑 장병들은 침묵으로 항의했다. 알렉산더와 군대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하면서 유대감은 급속도로 약해졌고 더 이상의 제국 확장이 불가능해졌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대제국이 허망하게 붕괴된 이유는 조직의 운영을 시스템이 아닌 알렉산더 개인에게 맞추었던 측면 때문이기도 하다. 알렉산더의 솔선수범 리더십이 창업創業’에는 효율적이었는지 몰라도 수성成에는 부적합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살아 있을 당시 그의 제국에 이미 반란과 분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알렉산더 리더십의 장점은 두드러진다. 오늘 날에도 어떤 조직에서든 솔선수범하는 리더의 마력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대다수의 지도자가 알렉산더 대왕이 가졌던 확고한 결단력과 솔선수범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는 상사, 책임을 회피하고 불명확한 지시를 내리는 리더, 지시만 하고 행동 하지 않는 지도자,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상관 등이 현실에서 접하는 리더들이다. 잭 웰치 전 GE 최고경영자는 “리더란 길을 아는 자이고, 길을 가는 자이며, 길을 보여주는 자다”라고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솔선수범 의 리더십을 보여줬던 알렉산더야말로 역사에서 '길을 알고, 길을 가고, 길을 보여줬던 인물이다.

2. 공자의 비전
- 중국학을 연구해온 학자 아사노 유이치는 공자가 쇠퇴해가는 주 왕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고 스스로 천자天子(임금)가 되려 는 야망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상천上天(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 지는 신)이 자신에게 명령할 날을 꿈꿨다는 것이다. 아사노 유이치는 가난하고 천한 필부였던 공자가 왕이 되려는 망상을 품었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교주의 좌절과 원한을 풀기 위해 후학들이 만든 '복수심 의 종교가 유교라고 설명했다. 공자는 “봉황이 날아오지 않고 황하에 서 상서로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끝났구나鳳鳥不至 河不出圖 音已矣夫”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공자가 야망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을 한탄한 것으로 해석한다
- 이렇듯 현실적으로 세습군주제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공자는 군주들에게 “덕德이 있고 유능하며 적절한 교육을 받은 대신들에게 정부의 기능을 위임하라”고 설득했다. 군주의 권력을 공적 기준으 로 선발된 대신들에게 부여하라는 주장은 무혈혁명無革命이나 다름 없었다. 공자는 정치를 하는 인물이 반드시 군주일 필요는 없으며 관 리들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정부의 기능을 소수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에서 백성의 행복 과 복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한 것은 혁명적인 사고였다. 서 구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주정, 과두정, 참주정, 민주정 등 다양한 정치 형태를 목격한 뒤 이상 사회를 꿈꿨던 것에 비하면 군주정 외에는 다른 정치 형태를 상상할 수 없었던 환경의 공자가 전혀 다른 사회를 꿈꿨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모습을 보면 동년배보다 젊은 세대와의 관계가 더 좋았던 듯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 사명감을 가진 개혁가의 독선적 태도는 젊은이의 감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는 개혁적 인사를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의 혁신적 주장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인보다는 원칙에 충실할 것과 폭력이 아닌 설득을 통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런 까닭으로 당대의 군주들은 공자의 제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더라도 유혈혁명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유교의 내용이 혁명적이었음에도 지도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카이사르의 행운
-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행운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전혀 없 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됐 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자신감과 행운에 대한 확신은 결국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왔다. 고대 사료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죽음을 앞두고 불 길한 전조가 이어졌다. 플루타르코스는 기록에 “며칠 동안 하늘에서 불덩이가 보였고 피의 비가 쏟아졌다”고 남겼다. 이는 모두 죽음과 파괴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점술가는 카이사르에게 "3월 15일을 조심하라"고 직설적으로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 마에서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그는 파르티아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게 하라. 나는 나의 길을 가 겠다”라며 일관된 입장을 보였다. 카이사르는 끝까지 자신의 행운을 믿었던 것이다. 최후의 날 카이사르는 호위병 없이 24명의 릭토르ictor(파스케스를 들고 행정관을 위해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 수행원)만을 대동했다. 측근 히르티우스 아울루스 등이 스페인 군단 출신 경호원들을 대동할 것 을 권했지만 “영원히 경호원을 두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그것은 공포의 상징일 뿐이다”라며 거절했다. 일설에 의하면 “죽음을 예상하고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고도 한다. 카이사르는 죽기 전날 진행된 만찬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죽음"이라는 말을 남겼다. 고대 사료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던 당일에 그의 행운이 힘을 다 했다는 징조가 이어졌다고 전한다.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 또한 남편이 살해당하는 꿈을 꿨다. 당시 로마에는 원로원 회의 전에 염소 를 제물로 잡아 그 내장으로 길흉을 점치는 절차가 이뤄졌다. 아피아 노스에 따르면 카이사르 역시 원로원으로 가다가 길을 멈추고 점을 쳤는데 점괘가 나쁘게 나오자 다시 제물을 잡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재고하라”는 점괘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3월 15일을 조심하라는 점괘를 낸 점술가에게 오늘이 3월 15일이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네자 점술가가 “그렇군요. 하지만 아직 날이 다 지나지 않았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결국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 들어선 카이사르는 그 자 리에서 23번의 공격을 받고 생을 마쳤다. 사료에 따르면 암살자 세르 빌리우스 카스카를 향해 “이런 무례한 짓을, 이 악당 같은 놈”이라고 외쳤으며, 암살을 주모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는 "아들아, 너마저!”라며 분노했다고 한다.

4. 살라딘의 신뢰
- 살라딘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88년 전인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을 정복한 프랑크족이 희생자들의 피로 도시를 채운 반면 살라딘은 예루 살렘의 건물 하나 파괴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위병들에게 거리와 관문을 순찰하게 했으며 기독교도를 위협하지 못하게 했다. 여러 교회의 십자가를 제거했지만 시리아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성 무덤 근처에서 계속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동방의 기독교 신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었다. 멜크 수도원 출신 수사들이 맡았던 성 무덤holy sepulcher 관리는 시리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위탁됐다. 이들은 살라딘에게 인두세를 지불한 사람들이었다. 몸값을 내면 프랑크인도 안전하게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40일 안에 몸값을 내야 했는데 성인 남자는 10디나르, 성인 여자는 5디나르, 어린아이는 2디나르를 내면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성안의 기독교도들은 몸값을 마련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지배자 살라딘의 자비를 믿고 의지했다. 이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몸 값을 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안전하게 해안가까지 대피할 수 있었는 데 살라딘은 아이를 등에 업고 나이 많은 부모와 함께 떠나는 프랑 크인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짐과 노부모를 실을 동물을 살 돈을 나눠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가난하거나 몸이 아픈 사람들은 몸값을 내지 않고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당대의 사료들은 프랑크인의 몸 값으로 받은 돈이 살라딘의 금고에 10만 디나르나 쌓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살라딘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관대한 군주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기 독교 왕국들이 그에 의해 큰 시련을 겪었기 때문인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살라딘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슬람 군주는 없다. 1732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바하드 웃 딘의 살라딘 전기가 라틴어로 번역됐고 1758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수아 루이 클로드 마랭이 근대 최초 의 살라딘 전기를 저술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는 살라딘을 관대함과 관용의 상징 적인 인물로 삼았다. 실제로 살라딘은 유대교와 기독교 출신 의사를 자신의 주치의로 고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각지에 거주하는 동방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과 결탁할 위험이 상존했음에도 그의 치세 중 기독교도를 박해하는 일은 없었다. 극단적인 종교 대립이 있던 시기에 '종교적 관용을 베푼 셈이다. 독일의 작가 고트홀트 레싱은 살라딘을 1799년 극작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의 모델로 그렸다. 영국의 시인 월터 스콧 역시 가장 모범적인 기사상으로 살라딘을 꼽았다. 1898년, 살라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쌓이자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무덤을 방문해 수많은 무슬림 앞에서 화환을 바쳤다. 거기에는 한 위대한 황제가 다른 황제에게'라는 글귀 가 적혀 있었다. “위대한 술탄 살라딘은 시대를 초월한, 용맹하고 완전 무결한 기사이며 적에게조차 기사도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인물”이라는 평도 남겼다. 1950년대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대립이 거세지자 자신을 살라딘에 비견했다. 살라딘이 태어났던 티크리트에서 태어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도 자신과 살라딘의 공통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살라딘이 지켰던 신뢰의 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큰 성과를 이끌었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역사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5. 칭기즈칸의 개방
- 칭기즈칸의 군대는 군사 기술의 혁신이나 마법 같은 신무기로 전투 에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몽골군이 불패의 신화를 쌓을 수 있었던 것 은 결정적으로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유연하고 개방적으로 생 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칭기즈칸을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며, 전쟁과 선전술에 능하고, 승리를 위해 외교적·경제적·무력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여겨왔지만 그는 누구보다 배 움에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칭기즈칸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반 백성이든 단순한 방문 자든 상관없이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 1206년, 몽골의 정책결정 최고기관인 쿠릴타이를 열고 테무친remuchin 이라는 이름 대신 '칭기즈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대칸大汗에 취임했을 때도 “게르에 사는 모든 이의 칸을 표방했다. 몽골족뿐 아니라 몽골 평원에 사는 모든 유목 부족이 그의 휘하라고 선포한 것이다. 당시 몽골어에서 '국가'를 의미하는 '울루스ulus'라는 단어는 오늘날에 비해 사람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몽골의 백성'에는 혈연이나 언어적 측면에서 몽골족과 가까운 사람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편입된 사람도 있었다. 마치 다양한 인종이 모여 역량을 발휘해 '용광로라 불리는 오늘날의 미국과 비슷하다. 비록 원래의 몽골 부족은 몽골 초원에서 활동하는 부족 중 일부에 불과했지만 이후에 모든 몽골고원의 부족이 몽골족이라 불리며 칭기즈칸의 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각 부족의 강점과 인재는 통합된 몽골족을 위해 활용됐다. 칭기즈칸이 가진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는 후대에게 전승되어 이후 몽골족이 타민족을 대할 때도 적용됐는데, 이는 그들이 대제국을 건설한뒤 피지배 지역의 자치권을 상당히 인정한 사실로 보아 알 수있다. 동쪽의 고려부터 서쪽 러시아의 공국들, 아나톨리아고원 지대의 키르기스·아르메니아 왕국, 캅카스산맥의 조지아 왕국 등이 몽골 치하에서 독자성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몽골족에게 부족 하거나 필요한 기술을 외부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몽골 초원을 활동 공간으로 삼을 때만 하더라도 유목민에겐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한 각종 지식이 중요했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기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 칭기즈칸은 전통적인 전술 중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차 없이 버렸고 유용한 전술은 언제 어디서든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교활하면서도 효율적으로 군대를 지휘했던 그는 실효성 없는 과거의 전술에 얽매이지 않았다. 호레즘을 정복할 당시에도 유목민의 주특기인 평야 전투를 하지 않았고, 견고한 성벽 밑에서 적이 지치기 를 기다렸다가 승리를 낚아챘다. 초창기의 칭기즈칸은 여느 유목민족 지도자들과 달리 강력한 적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퇴각 같은 전술을 활용할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 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된 1170년부터 몽골 전역을 통일해 칭기즈칸으 로 즉위한 1206년까지 목숨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고 주변 유목 부족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그럴수록 더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했고 이것은 그가 전략적이며 유연하게 사 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생각을 발전시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말 꼬리에 나뭇가지를 묶고 먼지를 일으키거나 수천 명의 주민을 군대 앞에 두고 행군하여 군 사가 더 많아 보이도록 하는 전술은 몽골군이 정주 지역의 군대로부터 배운 전략을 활용한 것이었다.

6. 이성계의 야성

7. 마키아벨리의 학습
- 지난 500년 동안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교활함'과 '이중인격' '불신'의 대명사로 통했다. 악마, 전제 군주, 독재자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악의 교사' 혹은 '악마의 인도를 받으며 사람을 파멸에 빠뜨리는 존재'였다. 또 '이아고(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등장하는 악인) 의 원형’ ‘악랄한 박사Le docteur de la sceleratesse'로 불렸다. 셰익스피어가 잔혹한 마키아벨리 murderous Machiavel'라고 언급한 뒤 이 표현은 엘리 자베스 시대 이후 400년 동안 영국 문학사에서 관용적으로 마키아벨 리를 수식하거나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사람들은 도덕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급진적 혁명가를 가리지 않고 마키아벨리를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에게 미움을 받은 인물도 드물다. 플라톤이나 루소, 헤겔, 마르크스처럼 마키아벨리도 수없는 오해와 오독誤讀을 낳은 사상가다. 하지만 그는 플라톤 처럼 먼 옛날에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방대한 분량의 난해한 작품을 남긴 인물도 아니다(오히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명료하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이를 고려하면 마키아벨리에 대해 많은 오해가 빚어진 것은 분명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피사와 나폴리 같은 도시국가들도 피렌체를 호시탐탐 노리며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 피렌체를 노리는 도시국가들의 위협은 사실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위상은 매우 허약 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마키아 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인들을 비열하고 궁색하며 허파에 바람만 든 사람들”로 묘사했다. 반면 마키아벨리의 주요 외교 대상이었던 프랑스 는 유럽 최강국으로 군사력, 외교력, 경제력 모두 상당한 수준을 보유 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상대했던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등의 각국의 지도자 모두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주변엔 잔인한 정책 조언을 마다하지 않는 똑똑한 참모들이 득시글거렸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아마추어적 활동이 강대국들의 숙련된 외교 정책과 대 비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목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보며 “샤를에게 유린되고, 루이에게 약탈당하고, 페르난도에게 짓밟히고, 스 위스에게 모욕받은 것이 바로 이탈리아" 라고 요약했다. 이런 배경 속 에서 마키아벨리는 유럽 강국들과 대적할 수 있는 '통일 이탈리아를 갈구했고, 강력하면서도 교활한 군주가 등장하기를 꿈꿨다.
- 마키아벨리는 당시의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이며 불신 가득한 외교 현실에서 배운 것을 『군주론』의 교훈으로 정했다. 약소국의 이해관계 와 명분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는 강력해야 하고 이 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이다. 마키 아벨리는 근대 세계에선 오직 군대와 돈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직시 했다. 생사를 걸고 투쟁할 때 약자는 '벨트 아래를 때려야 한다'는 교 훈도 얻었다. 1500년 외교사절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나 1502년 체 사레 보르자를 만났을 때 똑같이 반복되던 상황들이 마키아벨리에게 이런 교훈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무장하지 않은 도시국가는 멸 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배웠다. '행운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명제와 '행운의 여신은 여성이기 때문에 과단성 있고 공격적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러므로 행운을 얻고자 한다면 거칠게 다뤄야 한다(『군주론』)는 표현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이어서 치러진 몇 차례 외교사절 임무를 통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가 강해져야 한다는 명제를 다시 명확하게 인식했다. 국가는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라 '탈도덕적인 존재'라는 생각도 이때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철과 독약, 살인과 배신의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에 자신을 한번 살펴보고 중용해달라며 『군주론』을 집필했다. 마키아벨리 전문 연구가인 크리스티안 가우스 는 『군주론』을 '정치권력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과서'라고 명명하기도 했는데 1513년에 집필을 시작해 오랜 인고의 기간 끝에 1532년 출간된 이 작품은 마키아벨리의 인생처럼 행복과 불행, 꿈과 현실, 저열함과 위대함이 뒤섞여 있다. 그가 평생 온몸으로 배운 교훈 이 이 책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메디치가에 바친 헌정사에서 마키아벨리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 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운명의 여신은 저항할 수 없는 큰 적의를 악의 에 담아 갑작스럽게 내리찍었다.” 그는 메디치가에게 자신이 충성스러운 신민이며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지만 큰 효과는 볼 수 없었다.
- 가혹했던 고문은 마키아벨리에게 '권력의 본질은 끝없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그리고 고문은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숨어있던 권력 본능을 일깨우는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평생 동안 그는 직접 경험한 것을 학습하여 거기에서 배운 교훈을 뽑아냈다. 14년이 넘는 공직 생활과 이후의 고난 그리고 유배 생활에서 배운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교훈은 마키아벨리를 당장 관직으로 복귀시켜주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치유' 역할을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군 주론』 서문에 적은 말년의 심경과 일화가 그 증거다. 마키아벨리는 선술집에서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술 마시는 일 을 낙으로 삼았다. 과거 각국의 원수와 저명한 정치가, 귀족, 장군들 을 상대하다 낙향한 그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제 나무꾼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외교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오후 늦게 집으로 돌 아가면 의관을 정제하고 독서를 하며 고대의 현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 가르침을 구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포르투나를 받아들였다. 책을 읽으며 가난과 굴욕을 잊고 죽음을 두려워하 지 않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그 결과 마키아벨리는 리더들의 스승으 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당시에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 실패의 결과물이 응축된 『군주론』은 쓰디쓴 책으로 남았지만 그 고난의 눈물이 담긴 군주론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각종 교훈을 담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군주론』의 유명한 표현처럼 이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8. 펠리페 2세의 근면
-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소탈했던 통치자는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국 정에 임했지만 제국은 너무나도 방대했고, 다뤄야 할 일 또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만 갔다. 관료 조직은 점점 정교해지고 동시에 비 대해졌다. 관료화의 부작용이 나타났던 것이다. 1560년대에는 1500여 명의 인력이 왕을 보좌했고 그 외 수백 명이 각종 정부 조직에서 세분 화된 업무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특수 정무를 전담하는 100명 이상 의 전문 관료가 있었고, 79명이 프랑스 관련 업무를 보는 식이었다. 또 53명은 카스티야를 맡았고 39명은 아라곤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했다. 이탈리아 전문가는 25명, 기타 분야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력이 배치됐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보좌하는 인력까지 합치면 4000명 이상의 관료 조직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들이 생산해내는 산더미 같은 현안 자료를 처리하느라 펠리페 2세는 움직일 시간조차 없었다. 관료 제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심각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당시 흔한 일이었다.
- '공무원의 수와 일은 필요도와 중요도에 관계없이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은 펠리페 2세의 관료 조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일의 양과 관료의 수는 비례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증가했다. 역사상 책임감이 가장 강했고 열심히 일했던 왕 펠리페 2세는 '책상에 앉아서' 제국을 통치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유럽 각지에 흩어 져 있는 수많은 영지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편지들을 읽고 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영지에 있는 신하에게 행정과 사법, 재정 문제를 비롯한 각종 일상 업무, 개개인의 사면이나 승진, 평 가, 포상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직접 지시하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줄지어 있는 외교사절들은 펠리페 2세의 시간을 끊임없이 잡아먹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는 사실 알바 공작이나 산타 크루스 백작,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같은 '힘 있는 부하들을 펠리페 2세가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 다(펠리페 2세는 유순하고 자신의 말을 잘 들었던 루이 고메스, 메디나 시도 니아 공작, 비서였던 마테오 바스케스 같은, 상대적으로 하위직 인사들을 더 총애했다). 또 과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치적 · 개인적 걱정에서 탈출시켰던, 문서 더미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펠 리페 2세를 사람들은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한 군주라는 수식어로 불렀다.
- 결과적으로 펠리페 2세에 대한 모든 평가는 “유럽에서 가장 큰 두뇌를 직간접적으로 가졌던 황제” 혹은 “유럽의 '서류왕'”이라는 표현 으로 귀결된다. 그의 업무 효율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마다 평가가 다르 겠지만 부지런함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펠리페 2세는 엄청나게 유능한 인물도, 비범한 인물도 아니었지만 무능하고, 게으른 인물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 경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물려받아 통치해야 하는 제국은 너무 컸고 당시의 제도와 인력, 기술 수준에서 다뤄야 했던 문제 는 지나치게 복합적이었다. 결국 그의 재위 기간에 합스부르크 스페 인 대제국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잃고 쇠퇴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게 좋은 것이 가톨릭교회에도 좋은 것이란 생각에 강고한 종교 정책을 폈지만 이는 적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는 여 전히 독립적이며 잠재적으로 위협이 되는 존재였고 영국에게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배권을 되찾지 못했고 오스만튀 르크는 여전히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스페인 정부는 막 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제국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부담이 너무 커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고백했다. 재위 기간 내내 누구 보다 쉴 틈 없이 열심히 일했던 펠리페 2세였지만 결과는 의도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꽤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모든 것을 결과로 냉정하게 평가받는 거대한 조직의 지도자였고 그렇기에 역사의 평가는 가혹했다. 리더의 자질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가 아니라 성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는 부하들을 바쁘게 하는 사람이고, 최악의 리더는 본인의 몸이 고달픈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펠리페 2세는 정확히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9. 발렌슈타인의 공포
- '악마'라 불린 사내가 있었다. 이름은 알브레히트 벤젤 에우세비우스 폰 발렌슈타인 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1583~1634). 당대에는 발트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는 프리틀란트 공작이자 근세 초 독일을 휩쓴 30년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 총사령관을 맡았 던 인물이다. 크고 작은 전장에서 아군과 적군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포의 대 상이었던 발렌슈타인은 '전쟁의 신'으로 불렸다. 당대인들은 그를 '전쟁의 천재'라고 부르는 데 이견이 없었다. 발렌슈타인은 “병사 없이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무서운) 영웅”으로 평가되었고, 사람들은 황폐화 된 유럽 각지의 상황을 특정 인물로 형상화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이는 적군이었던 신교와 한때 우군이었던 구교가 ‘흑색선전'을 퍼부은 탓이기도 했다. 이렇듯 같은 편이든 상대편이든 모두 발렌슈타인을 '운명처럼 잔인한 존재'로 여겼다. 18세기의 한 역사학자는 “주변이 모두 폐허가 되고 공기가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을 때, 부상당한 사람의 신음과 죽은 자의 고통이 귓전을 울리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비로소 그는 말없이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라고 표현했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 러는 발렌슈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극『발렌슈타인』을 집필하며 이렇 게 묘사했다. “프리틀란트의 별은 오직 한밤중에만 빛을 내비쳤다.” '어 둠은 발렌슈타인을 표현하는 핵심 요소였으며 '공포'는 그를 설명하 는 유용한 도구였다.
- 결론적으로 발렌슈타인 등장 이전의 유럽에선 어려운 물품 보급과 용병에게 지불하는 대가에 대한 부담, 부족한 주거지, 고단한 병참 지원 탓에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군 병력의 최대치가 3만 명 정도였다. 발렌슈타인은 이 고정관념을 깨버린 최초의 인물이다. 그리고 시스템 을 유지하기 위해 군율 유지가 중요했던 발렌슈타인은 1625년 북부 독일 지역에서 도적질을 했다는 이유로 병사 15명을 공개 교수형에 처 했다. 같은 해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로 진군했을 때는 도시의 지 배층과 시민들에게 병사들이 먹을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한다면 건드리 지 않겠다고 포고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발렌 슈타인의 잔혹함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의 주 변에 폭력과 파괴 본능이 맴돈다고 여겼다. 이후 수세에 몰리고 30년 전쟁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그가 참혹한 황폐화 전략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발렌슈타인을 둘 러싼 공포 이미지는 오랜 세월을 거쳐 누적된 것이었다.
- 그의 사후, 황제 측이 펴낸 각종 선전 팸플릿에서 발렌슈타인은 거칠고 무례하며 항상 앙심을 품고 살았던 미친 사람으로 묘사됐다. 그는 점성술에 의존해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고, 비교할 수 없이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었던 만큼 재판 없이 죽이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이 제 기되었다. 한때 대중은 발렌슈타인이 어둠의 힘'과 계약을 맺고 불패의 존재가 됐다고 믿었다. “승리를 그의 군기에 묶어버렸다”는 표현도 널리 퍼졌다. 불사의 존재, 공격당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던 발렌슈타인의 이미지는 뤼첸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는 소문이 돌면서 증폭됐다. 발렌슈타인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악마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그려졌기에 그가 일개 병사의 창에 찔려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 실을 많은 사람이 믿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사체는 썩지 않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발렌슈타인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막상 그가 죽자 공포는 연기 처럼 사라져버렸다. 조직원을 윽박지르고 겁박해 목표를 달성하는 리더십은 단기간의 효험은 있을지 모르지만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발렌슈타인의 사례가 그 길지 않은 공포의 유효기간을 잘 보여준다.

10. 그루시의 맹목
- 유명한 워털루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 것은 '전 쟁의 신' 나폴레옹의 지략이나 영국의 용장 웰링턴의 전술이 아니었다. 그 결과를 좌우한 인물은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 에마뉘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1766~1847) 원수였다. 그루시는 성실하고 충성심이 강했으며 용맹했지만 융통성과 본능적인 판단력, 자율성은 거 의 찾아볼 수 없는 맹목적이고 시야가 좁은 인물이었다. 충실함과 옹 고집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루시를 두고 “오스트리아의 총탄, 이집트의 폭염, 아랍의 단도, 러시아의 혹한으로 유능한 선임자들이 제거된 덕에 원수로 승진했다”고 비꼬았다. 19세기의 군사작가 찰스 체스니 콘월리스도 “나폴레옹 황제가 웰링턴에 대항하여 사력을 다해 싸울 동안 (그루시는 수많은 병사를 데리고 엉뚱한 곳만 헤매고 다녔다”고 평가했다. 우매함과 옹고집이 결합된 그루시의 단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조직의 생존에 부담이 되었고, 나폴레옹을 최후의 대결 에서 패배자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왜 별 볼일 없는 그루시를 중용했을까? 그루시는 능력이 출중한 것만으로 승진한 것이 아니었다. 유능했던 그의 선임자들이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거나 군을 떠났기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 과거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원수 중 절반은 지하에 묻혀 있었다. 특히 1812~1813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 고 라이프치히 등에서 뒤이어 패전하여 유능한 장군 상당수가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야영 생활에 지쳐 진절머리를 치며 살거나, 나폴레옹을 배신한 전력이 있었다. 나폴레옹 밑에서 출세했던 장군 중 적지 않은 인물이 러시아 원정 실패 후 파리에 입성한 적들을 호화롭게 대 접했다. 모두 나폴레옹이 준 직위와 부를 바탕으로 살길을 찾아 나섰 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루시 이외에 원수 직위를 맡길 만한 장군은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대로 그루시는 “최고의 길을 공략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것 이 아니라 20년간의 전쟁 경험 덕에 저절로 길이 열린 셈이었다. 수동적이고 자율성이 부족한 점은 그루시 혼자만의 단점이 아니었다. 1804~1814년의 소위 '대제국의 시대에 나폴레옹은 총사령관부터 참모장, 외무대신, 일선부대 사령관의 역할까지 도맡았다. 그런 체 제 아래서 프랑스군 장교들은 독자적인 판단 능력과 자율성을 상실해갔다. 게다가 대다수는 구식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이 시계를 보고 시 간을 파악해 작전을 짤 때 장교들은 여전히 '동틀 무렵' 같은 구시대 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추측했다. 반면 그루시가 믿음직하고 충직하 며, 용감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나폴레옹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에게서 영웅적인 면모나 전략가적 기질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11. 로스차일드의 혁신
- 나탄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가를 일으킨 암셀 메이어 로스차일 드Amschel Mayer Rothschild의 셋째 아들이다. 훗날 로스차일드가가 금력 金力으로 유럽 각지의 경제력을 장악하자, 암셸 메이어가 '선견지명'으 로 런던, 파리, 빈 등 유럽 주요 요충지에 아들들을 보내 미리 자리 잡도록 했다는 신화가 생겨났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생각과 거리 가 있었다. 아버지와 형의 '보수적 경영 행보에 불만이 있었던 삼남 男 나탄은 가출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경제 중심지 영국에서 비약적으로 사업을 키웠다. 다시 말해 로스차일드 가문을 거물로 성장시킨 사람은 바로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던 나탄이었다. 그야 말로 그는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세계 최대의 거대 금융회사를 세우고 일군 주인공이었다. 나탄의 아버지 암셸 메이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ghetto(유대인 거주 지역)의 가난한 유대인 금융가였다. “돈이야말로 유대인을 구원하는 단 하나의 무기”라는 좌우명을 가졌던 그는 유럽 금융계의 큰 '돈 줄' 중 한 명이던 헤센카셀 대공국의 백작 빌헬름 9세와 거래를 하며 사업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그때까진 국제적인 금융 거물이 되기에 크게 모자란 수준이었다. 가문의 위상은 암셸 메이어의 자식대에 이르러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자식 중에서도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와 크게 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있었다. 외향적이고 성공적인 해외 진출을 하는 전 형적인 최고경영자상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썼던 장남 암셸은 신앙심이 깊고 평생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나지 않았 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그저 선대의 수준을 유지할 뿐 혁신이나 발전을 일으키진 못했다. 넷째 아들 카를은 일찍이 이탈리아 나폴리에 보내졌지만 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 프랑크 푸르트를 자주 드나들었다. 나탄의 형 살로몬과 막내 제임스는 아버 지의 사업을 일찍부터 도왔지만 장사 솜씨가 특출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반면 나탄의 '독립성'과 '넓은 시야'는 형제 중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한마디로 '타고난 반항아'였다. 그는 키가 작고, 붉은 얼굴에 뚱뚱했으며 늘 활력이 넘치고 성질이 급했다. 야망과 상 상력이 굉장해서 좁고 제약이 많은 게토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집 중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이었던 나탄은 프랑스 대혁명 등으로 야기된 18세기 말 유럽의 혼란이야말로 사업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12. 스탈린의 변신
- 스탈린은 1878년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1898년에는 이상주의적 신학생으로 생활했다. 1907년에는 은행 강도, 1914년에는 사람들의 뇌 리에서 잊힌 시베리아의 사냥꾼에 불과했지만 1917년엔 그루지야에 민족적 뿌리를 두고 러시아에 충성하는 국제주의자로 살았다. 그러다 스탈린은 소비에트에 속한 4중 국적자의 특징을 가진 혁명 지도자로 거듭났다. 1930년대에는 광신적 마르크스주의 대량 학살자로 사람들 의 머릿속에 각인되었으며 1945년에는 히틀러의 침공을 물리치고 독 일을 정복하는 주역이 됐다.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를 “세상에서 가장 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나라지만 통치하기는 가장 어렵 다"고 평했는데 스탈린은 이런 러시아를 30년 가까이 홀로 지배했다. 한편에서는 그를 인간적 품성이 결여된 무자비하고 잔혹한 폭군 이 미지로 인식했고, 다른 쪽에선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앉고 싶은 무릎 을 지닌 인자한 사람"(미국 특사 조지프 데이비스)으로 평가했다. 전 세 계를 공산화시키려는 야욕에 사로잡힌 '악마'로 보는 이도 있고, 세계혁명'을 단지 과거의 슬로건으로 격하시키고 소련의 국가적 이익에 사 회주의 혁명의 대의를 종속시킨 '혁명의 배반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빛나는 약속을 화석화시킨 장본인이라는 것 이다. 스탈린은 조심성 있는 사람이었으나 불안정하고, 잔인하며, 끊임없이 의심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이 현대의 정치인이라기보다 로마 시대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의 『열두 명의 카이사르 The Twelve Caesars』에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인물과 가깝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혁 명을 기록한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스탈린을 '형체가 흐릿한 회색의' 사람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시시각각으로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그의 변신에 쉽게 속아 넘어가곤 했다. 신봉자들에게 스탈린은 '오류 하나 없는 완벽한 인간이었고, 모든 잘못은 부패하고 사악한 측근 탓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1945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스탈린의 정적들은 그를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평가절하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인스턴트 볼셰비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물(레온 트로츠키)'이라며 경멸을 담아 비아냥거렸던 인물 대부분은 훗날 스탈린의 칼날 아래 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레닌조차 한동안 스탈린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1917년 10월, 레닌은 그를 정부요직에 앉히면서 “(이 일을 하는 데에는) 지성이 필요 없기 때문"이라는 말로 임명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당내에서 서류 정리함 동지'라는 별명을 얻는 등 시류에 편승한 '우둔한 관료 이미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스탈린은 레닌이 "스탈린을 주의 깊게 경계하시오. 그는 언제든 당신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주변에 자주 얘기할 정도로 변모했다고 한다.
- 스탈린의 끊임없는 변신의 배경에는 냉혹한' 마인드 컨트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제정 러시아 정보 당국에 9번 체포됐다. 그리고 8번 이나 탈출했다.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감옥 생활 중 동료 수감자들은 그에 대해 “냉담한 스핑크스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시베 리아 유형지에서 스탈린은 '빈틈없는 유혹자' '사생아 생산자' '연쇄적 싸움꾼' '강박적인 말썽꾼'이라는 평을 들으며 최악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혁명 동료가 약탈 행위 중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쩌겠어?? 가시에 찔리지 않고 장미를 꺾을 수는 없잖아?”라고 무심하게 내뱉었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라" 라는 발언도 했다. 이런 냉혹함을 바탕으로 그는 권력을 확고하게 다져나갔다. 스탈린의 궁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10년 넘게 살펴본 소련의 정치가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은 “스탈린은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누구나 쇠막대기로 다스렸 다고 요약했다. 몰로토프는 훗날 회고록을 통해 “스탈린 앞에서 우리는 모두 10대 같았다"고 인정했다. 스탈린은 자신이 '암살' 당할 가능성을 인식하고 철저하게 대비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뒤에 누가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커트 끝 항상 잘라놓았다.
- 스탈린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전 러시아 사회를 공포에 몰아 넣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의 성공과 집권에 대한 확신이었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이 아내 크루프스카야에게 “우리 가 살아 있는 동안 혁명을 볼 수 있을까”라며 혁명을 의심할 때조차 스탈린은 “혁명은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해가 떠오르지 않게 막을 수 있는 것인가"라며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17년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했던 사회주의 정당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과의 관 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1930년대가 되어서는 『프라브다』에 “하나의 공통된 의견, 하나의 공동 목적, 하나의 공동의 길”을 요구하는 글을 실을 정도로 '혁명'의 성공과 집권욕에 대해 변 함없는 집착을 드러냈다. 스탈린은 “나는 오직 인간의 의지력만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변신 을 거듭하면서도 변함없이 본질을 유지하던 그에게는 이 같은 '강철'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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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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