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이나 국가는 완전히 변할 수도 없고 과거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런 변화는 바람직하지도 않음. 위기를 맞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는 정체성 중 제대로 기능해서 바꿀 필요가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바꿔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히 조사해야 함.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부분이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며 적정성을 유지하는지 알아낼 수 있음. 그런 부분은 당연히 보존하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찾아내는 용기도 필요. 동시에 개인과 국가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관에 양립하는 새로운 해결책도 찾아내야 함. 물론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정체성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해야지, 그 부분까지 바꿀 이유는 없다.
- 위기란 무얼까? 먼저 어원론적으로 정의하면 영어에서 위기를 뜻하는 crisis는 그리스어 명사 krisis아 동시 krino에서 파생. 이 단어들은 분리하다, 결정하다, 구분하다, 전환점을 의미. 따라서 위기는 중대한 고비 혹은 결정적 순간으로 해석가능. 달리 말하면 그 순간의 전후 조건이 많은 다른 순간의 전후조건과 확연히 달라지는 전환점이라는 의미
- 아무런 전조도 없이 위기가 닥치는 경우는 거의 없음. 개인과 국가의 경우 대부분의 위기는 오랜 기간 축적된 점진적 변화의 결과임. 오랫동안 갈등을 겪은 부부는 이혼하기 마련이고, 칠레의 쿠데타도 정치적이고 경제적 어려움이 축적되어 나타난 결과다. 위기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압력이 갑자기 폭발할 때 닥친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고프 휘틀럼은 이런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던지, 72년 12월 19일 이후에 중대한 변화를 도모하는 전격적인 프로그램을 구상했지만,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을 이미 발생한 사건의 인정이라고 겸허하게 표현했다.
- 처음 위기상태에 빠지면 누구나 삶에서 모든 것이 잘못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힘. 그렇게 좌절에 빠진 상태에서는 한 번에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쉽지 않음. 따라서 첫 상담에서 심리 치료사의 일차적 목표는 울타리 세우기라 일컫는 방법을 동원해 그런 마비를 해소하는 것임. 우리가 혼자 혹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위기극복을 시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 달리 말하면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잘못된 것을 구체적으로 찾아내, "내 문제는 이 울타리 안에 있어. 바깥쪽에 있는 것들은 모두 정상이고 전혀 문제가 없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함. 이렇게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곧바로 안도감을 느낀다. 다음 단계에서 심리 치료사는 환자가 울타리 안쪽의 문제에 대응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도록 도움을 준다. 환자는 그렇게 선택적 변화를 시작한다. 얼핏 생각하면 전체적인 변화가 필요할 듯 하지만, 그런 변화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고 환자에게 압박감만 더해줄 뿐이다. 하지만 선택적 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 개인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된 요인
* 위기상태의 인정
*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책임의 수용
*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개인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 다른 사람과 지원단체의 물질적이고 정서적 지원
* 문제 해결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사람의 사례
* 자아강도
* 정직한 자기평가
* 과거에 경험한 위기
* 인내
* 유연한 성격
* 개인의 핵심가치
*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 케코넨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파시키비아 자신의 정책에 대해 설명. "핀란드 외교정책의 기본과제는 핀란드의 지정학적 환경을 지배하는 이해관계에 핀란드의 실존을 맞추는 것이다. ... 핀란드 외교정책은 예방외교다. 예방외교의 과제는 위험이 코앞에 닥치기 전에 미리 감지해서 그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눈에 띄지 않게, ... 입장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작은 국가는 군사와 정치 분야의 향후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미리미리 정확히 인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 국가라면 당연히 독립독행해야 한다. 전쟁을 통해 우리는 이런 점에서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작은 국가는 외교정책의 해법에 공감이든 반감이든 감성을 뒤섞을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배웠다. 현실적인 외교정책은 국제정치를 결정하는 요인들, 즉 국가간 권력관계와 국익에 대한 자각에 기초해야 한다."
- 핀란드가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을 고수해서 얻은 구체적 보상은 소련과 지금의 러시아가 지난 70년 동안 핀란드에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이다. 즉 소련은 핀란드를 침랴갛지 않았고 핀란드 공산당이 존재했지만 그 당을 통해 핀란드를 탈취하려는 공작을 전개하지 않음. 또 핀란드가 소련에 약속한 전쟁 배상금의 총액을 줄이고 기간을 늘려줌. 게다가 55년에는 헬싱키에서 16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포르칼라의 해군기지를 철거하고 포병대를 철수함. 소련은 핀란드가 서구세계와 교역을 확대하고 소련과의 교역을 줄여가는 것을 용인. 그리고 핀란드가 유럽경제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유럽자유무역연합에 가입하는 것도 묵인. 이 모든 것을 금지하느냐 않느냐는 전적으로 소련의 권한 내에 있었다. 소련이 핀란드와 핀란드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고 불안하게 여겼다면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경제성장이란 점에서도 핀란드는 작은 나라로서 현신을 직시해야 했다. 지금도 인구가 6백만에 불과한 핀란드는 인구가 9천만인 독일이나 3.3억인 미국처럼 규모의 경제라는 이점을 앞으로도 누리기 힘들 것임. 또 유럽과 북미 밖의 여러 국가처럼 저임금 노동자를 제공할 수 없어 낮은 생활수준에 의존하는 경제권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세계 기준에 따르면 핀란드는 노동인구도 적지만 한결같이 고임금을 기대하는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핀란드는 가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고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을 예부터 개발해야 했다. 전 국민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핀란드 교육제도는 모두를 잘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핀란드 역사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핵심가치, 즉 어떤 강대국에도 예속되지 않겠다는 독립에 대한 굳은 신념을 엿볼 수 있다. 핀란드는 다수의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그 핵심가치를 지키기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 운 좋게 그들은 살아남았고, 독립도유지. 그런 고민스런 딜레마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답은 없다. 39년의 폴란드, 41년 유고슬라비아, 56년 헝가리도 차례로 독일과 또 독일과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고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핀란드처럼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세 국가 모두 점령당했고 점령된 상태에서 잔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반대로 체코슬로바키아는 38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39년, 일본은 45년 8월에 군사적 상황이 절망적이라 판단해 차례로 독일과 소련과 미국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였다.
- 일본 정부는 중국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서구 열강이 일본에도 유사한 조약으로 항구의 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두려워했다. 1853년 마침내 일본의 걱정은 현실화되었고 일본의 문을 두드린 서구 강대국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48년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인수한 후 금광을 발견하며 태평양 연안에서 해상교통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때문이었음. 태평양을 무대로 한 포경선과 무역선도 크게 증가했으며 필연적으로 일부 미국 선박이 난파됨. 당연히 일본 주변의 바다에서 난파되는 선박도 있었고 적잖은 선원이 일본의 구조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쇼군의 쇄국정책에 따라 살해 또는 체포됨.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그 선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기를 원했고, 더 나아가 미국 선박이 일본에서 석탄을 구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미국 대통령 필모어는 메슈 페리 제독을 4척의 군함과 함께 일본에 파견. 그중 두 척은 대포를 장착한 증기선으로 당시 일본의 어떤 전함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 1853년 7월 8일 페리제독은 일본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함대를 이끌고 에도만에 들어섬. 당장 떠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며 페리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고, 이듬해 다시 올 대 답신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알림.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페리의 느닷없는 출현가 압도적 전력을 앞세운 공개적 위협은 위기와 맞아떨어짐. 즉 기존의 대처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페리가 떠난 후 쇼군은 필모어의 편지를 다이묘들에게 돌리며 최선의 대응책에 대한 의견을 구함. 이런 조치조차 이례적인 것이었다. 다이묘는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쇄국정책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강력히 피력하면서도 페리의 전함에 대적해 일본을 지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구의 대포와 첨단무기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타협을 제안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음
- 1854년 2월 페리가 이버에는 아홉척의 전함을 이끌고 다시 왔다. 이때 쇼군은 일본이 서구 국가와 최초로 맺은 조약에 서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무역협정을 맺자는 페리의 요구를 연기하는 데 성공했지만 215년 동안 지속된 쇄국정책을 끝내는 이런저런 양보를 해야 했다. 예컨대 미국 선박이 정박할 곳으로 삼을 항구 두 곳을 개방했고, 그중 한 곳에 미국 영사가 거주하는 걸 허용했으며, 조난된 미국인 선원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는 데 동의. 일본과 미국이 그런 협정을 맺자 영국과 러시아와 네덜란드의 극동지역 해군 사령관들이 앞다투어 일본과 비슷한 협정을 맺었다.
- 메이지 유신은 크게 두 관객을 향한 것이었다. 하나는 일본 국민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외의 서구인이었다. 유신의 궁극적 대상은 일본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하게 키워내고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이념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것이 유신의 일차적 목표였음. 유신의 또 다른 목표는 서구 세계가 일본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대하도록 하는 것. 서구가 존중하는 제도를 일본도 도입했기 때문에 그런 목표는 당연한 것이었다. 서구식 헌법과 법 체제 같은 기본적 통치도구, 서구식 의복과 머리모양 같은 외관, 서구식으로 한 명의 부인과 결혼하는 황제 등이 새롭게 도입한 제도의 일부였다.
- 메이지 시대 지도자들은 서구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일본을 강한 국가로 키우자는 전반적 목표에는 동의했지만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청사진을 갖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메이지 유신은 단계에 따라 단편적으로 기획하고 채택했다. 국군 창설, 세수확보, 국가 교육체제 확립을 먼저 시도했고 다음 단계에서 헌법 및 민법과 형법을 제정했음. 전쟁을 통한 해외진출은 한참 후에 이루어짐. 또 이런 모든 개혁을 순조롭게 한목소리로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도 내분은 있었음. 사무라이의 반란과 농민폭동이 대표적 사례
- 요컨대 메이지 시대 일본의 군사정복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음.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매 단계에서 일본과 상대국의 힘에 대한 정직하고 현실적이며 신중하고 정확한 평가와 일본이 현실적으로 해낼 수 있는 수준에 대한 냉정한 자기평가가 있었기 때문.
- 메이지 시대 일본이 1868년부터 현실적이고 성공적인 군사팽창을 단계적으로 시행한 반면, 1937년 이후의 일본이 그처럼 비현실적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군사팽창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실수를 범한 이유가 뭘까?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한 전쟁,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환멸, 29년 수출이 주도하던 일본 경제성장의 붕괴 등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 또 하나의 이유를 추가할 수 있음. 즉 지도자들의 정직한 자기평가 역량에서 1930-40년대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일본과 달랐다는 점이다. 메이지 시대에는 군부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일본인이 해외를 방문하고 여행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독일 및 그곳의 육군과 해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또 서구 열강의 힘과 일본의 힘을 정직하고 냉철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공격. 그러나 30년대 아시아 본토에 주둔한 일본군 지휘관은 나치 독일을 제외하고 해외 경험이 없는 젊고 성급한 장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도쿄에 있는 노련한 지도자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그 젊고 고집스런 장교들은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에 대한 직접경험이 없었으며, 일본의 잠재적 적국들에 대한 직접벅 지식도 없었음. 그들은 미국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미국을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장사꾼 나라라고 착각했다.
- 메이지 시대에 성년이 된 지도자 세대의 역사적 경험은 30년대 일본의 지도자가 된 세대가 전혀 달랐다. 메이지 시대에 지도자들은 강력하고 잠재적인 적의 공격 가능성에 노심초사하던 허약한 일본에서 인격형성기를 보냈지만, 30년대 지도자들에게 전쟁은 러일전쟁의 황홀한 승리를 뜻했다. 이때 일본해군은 아르투르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급습해 파괴했고, 쓰시마 해전에서는 러시아 발틱함대에 완승을 거두었다. 이때 얻은 허망한 자신감이 훗날 진주만의 미국함대를 급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 메이지 시대 일본은 인내, 처음의 실패를 용인하는 너그러움, 효과적 해결책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끈기의 표본이었다. 1850-60년대 외세의 위협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처음엔 외국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애썼고, 외국인이 일본의 특정한 조약 항에 거주하는 걸 허용한 후에도 외국인을 쫓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유효하지 않고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게 점점 분명해졌다. 따라서 일본을 서구에 개방하고 서구로부터 배워야 일본이 강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막부와 시시 및 메이지 시대 지도자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법 체제와 국가교육 체제, 헌법을 확립하는 데도 수년의 실험과 수정이 필요했다. 세 영역 모두에서 메이지 정부는 처음부터 하나 이상의 외국모델을 시험하며 일본상황에 부적절한 것은 폐기했고 최종적으로 적합한 외국모델을 채택했다. 예컨대 민법을 제정할 때 처음에는 프랑스와 영국 것을 본보기로 삼아 초안을 작성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독일 민법을 기초로 삼았다.
- 67년에 만난 칠레 친구들이 나에게 전해준 "칠레는 라틴아메리카 다른 국가들과 무척 다르다. 우리 칠레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은 지금도 많은 칠레인에게 통용되는 듯하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의 여느 국가들과 다른 길을 걷고,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무척 노력해왔다. 다른 계통의 칠레인을 같은 조상의 후예로 받아들이지 않는 칠레인이 많고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칠레 국민은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를 건설하자는 구호를 예부터 충실히 지켜왔다. 이런 국가정체성이 없었다면 칠레는 정치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가장 부유한 국가로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임. 칠레는 정직하고 현실적인 평가만이 아니라 현실주의의 상실을 보여준 전형적 예이기도 하다. 73년 피노체트와 군부 지도자들은 칠레와 해외에서 적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 한편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칠레에 민주적으로 접목할 수 있을 것이란 아옌데의 믿음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됨. 선의의 온화한 사람에게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사악한 사람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서글픈 진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차이다.
- 서독은 유럽의 한복판에 위치하며 공산국가인 동독과 체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서유럽의 자유를 지키려면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국가였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차단할 방벽으로 서독을 다시 강하게 키워낼 필요가 있었다. 또 1차대전 이후에 그랬듯이 좌절에 빠진 독일이 정치적 극단주의에 다시 빠져드는 위험을 줄이고, 경제적으로 허약해진 서독을 물질적으로 계속 지원해야 하는 경제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서구 연합국은 독일을 다시 강하게 키워낼 필요가 있었다. 45년 이후 이런 견해의 변화가 서구 연합국 사이에 무르익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고, 그 기간에 서독경제는 계속 추락하고 악화되었다. 마침내 48년 미국이 다른 서유럽 국가에 47년부터 제공하기 시작한 마셜플랜에 다른 경제원조를 서독으로 확대. 이때 서독은 가치가 폭락한 통화를 새로운 도이치마르크로 교체. 서구연합국은 세 점령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면서도 서독의 입법행위에 대한 거부권을 유지. 하지만 서독의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을 교모하게 활용하는 수완을 발휘하여 연합국이 권한을 줄여가고 서독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묵인을 끌어냈다. 아데나워 시대의 경제장관이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수정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했고, 마셜플랜의 원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놀라운 경제회복을 이루어냈다. 이런 경제회복은 훗날 경제기적이란 뜻에서 비르트샤프츠분더 혹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짐. 배급제도를 폐지했고 산업생산량이 급증했으며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결과, 서독인에게는 자동차와 집을 구입할 수 있다는 꿈이 실현되었다.
- 독일인이 어느 해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68년 독일에서 폭력적인 학생시위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68년의 시위자들은 45년경, 즉 전쟁이 끝났을 무렵에 태어났음. 그들은 나치로 성장하기엔 너무 어렸고 전쟁을 경험하거나 전쟁 후의 혼도과 가난을 기억하기에도 너무 어렸다. 독일이 경제를 회복한 후, 즉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대에 그들은 성장했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 힘겹게 투쟁할 필요가 없었으며 저항과 시위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고 안전한 삶을 누렸다. 68년 그들은 20대 초반이었고 프리츠 바우어가 그들의 부모세데인 평범한 독일인이 나치의 부역자로 저지른 범죄를 폭로하던 50년대와 60년대 초에는 10대였다. 4년에 태어난 시위자들의 부모는 대체로 1905-25년에 태어났다. 달리 말하면 45년에 태어난 세대의 부모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선택했고 히틀러의 명령에 순종했으며, 히틀러를 위해 싸웠고 히틀러 유겐트라는 청소년 조직을 통해 나치의 이념에 세뇌된 사람들로 자식들에게 비쳤다.
- 모든 10대는 부모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경향이 있따. 60년대에 프리츠 바우어는 자신의 조사결과를 널리 알렸지만 45년에 태어난 세대의 부모는 나치 시대에 대한 언급을 피하며 자신의 일에 몰두했고, 그 결과 전후 경제기적을 이루어냄. 자식이 "엄마와 아빠는 나치 시대에 무얼 했나요?"라고 물으면, 61년에 나이가 더 많은 독일인이 나에게 "자네 같은 젊은이는 전체주의국가에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네. 신념대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아"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변명에 젊은 층은 만족하지 못할 것임. 따라서 45년 전후에 태어난 독일인은 자신의 부모와 부모 세대를 나치 부역자로 불신했다. 이렇게 해석하면 2차대전의 두 침략국, 이탈리아와 일본에서도 학생시위가 폭력적 성향을 띤 이유가 설명됨. 반면 미국에서 45년생의 부모는 2차대전의 전범이 아니라 전쟁영웅으로 여겨졌다. 그렇ㄷ다고 60년대에 미국의 10대가 부모세대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부모세대를 전쟁 범죄자로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 흥미롭게도 독일은 각각 21-23년이란 기간동안 참담한 패배를 당한 후 그 패배를 딛고 금세 일어서는 네번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첫째는 1848년의 실패한 통일시도부터 통일에 성공하는 1871년까지 23년의 기간, 둘째는 1918년 1차대전 패전부터 그 패전의 조건을 뒤집기 위해 2차대전을 시작하는 39년까지 21년의 기간이다. 셋째는 45년 2차대전 패전부터 45년경에 태어난 대학생들이 시위하며 저항한 68년까지 23년의 기간이고, 넷째는 68년 대학생 시위부터 독일이 재통일된 90년까지 22년의 기간. 물론 네 시간과 관련된 사건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고 그기간, 특히 68년부터 90년까지의 기간을 결정하는 데는 외부요인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기간의 유사함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는 듯하다. 21-23년은 대략 인간의 한 세대. 1848년, 1918년, 1968년은 당시 청소년 혹은 성년기에 접어든 독일인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 그로부터 20년 후에 그들은 독일 지도자로 성장했고 청년기에 경험한 사건을 궁극적으로 완료하거나(1871, 1990) 뒤집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39), 1968년의 학생 시위에 참여한 주역과 시위를 이끈 지도부는 당시 40대나 50대이던 노련한 정치인이 아니라 20대이던 미숙한 급진주의자였다. 하지만 68년의 학생시위를 경험한 한 독일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1968년이 없었다면 1990년도 없었을 겁니다."
- 영국의 EEC가입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반응은 싱가포르 포기에 대한 반응과 거의 같았다. 영국의 EEC 가입은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것이며 벨리볼루에서의 배신,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의 위해 희생한 한 세기에 대한 배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전통적 국가정체성에 내재한 영국의 유산에 대한 배신이란 비난이 퍼부어졌다. 달리 말하면 그 충격이 구체적이기도 했지만 상징성도 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이 곧이어 닥쳤다. 영국의 1962년 영국연방 이민법은 인도제도와 파키스탄에서 영국연방으로의 이민을 차단하는 게 실질적인 목적이었고,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해 영국연방의 시민이면 영국에 입국해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자동으로 부여하던 원칙을 폐기함으로써 인종차별의 돌출을 원천적으로 방지. 또 영국의 68년 이민법은 조부모 중 한쪽이라도 영국 태생이면 자동으로 부여하던 영국 입국권을 폐지. 따라서 많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졸지에 외국인이 되고 말았다. 결국 72년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을 외국인이라고 선언.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모욕이었다. 요컨대 영국을 어머니로 섬기는 자식이던 오스트레일리아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먼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영연방 국가들과의 유대관계를 느슨하게 풀며 자식들과 인연을 끊음 셈
- 현재 그레이트플레인스는 세계에서 가장 드넓게 펼쳐진 생산적인 농지다. 결국 쐐기모양의 북미에서 빙하작용이 반복되고 적절한 강우가 더해진 덕에 미국은 높은 농업생산성을 자랑하며 세계최대 식량수출국이 됨. 반면 중국은 그러잖아도 비옥하지 않은 땅이 침식으로 크게 훼손된데다 평균인구밀도가 미국보다 네배나 높아 식량 순수입국이다.
- 이민의 근본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한 국가의 국민을 두 집단으로 나눈다고 가정해보다. 한 집단은 젊고 건강하며 대담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근면하고 야심차면서 혁신적 사람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보자. 앞의 집단은 다른 국가에 이주하고, 뒤의 집단은 본국에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선택적 이주는 결국 성공을 향한 열망의 표출이다. 따라서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인 중 3분의 1 이상이 외국 태생이고 , 절반 이상이 이민자거나 이민자의 후손이란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노벨상을 수상할 만한 연구에도 대담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정신, 근면성과 야심, 혁신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와 그들의 후손은 미국의 미술과 음악, 요리와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 40세를 넘긴 미국인이라면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유심히 보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모두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타려는 사람이 자주 눈에 띈다. 또 교통예절도 크게 퇴보해서 다른 운전자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산책로와 도로에서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달리 말해 40세 이후 미국인은 낯선 사람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온갖 종류의 욕설이 많은 영역에서, 특히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영역에서 이런 현상은 크게 증가했다.
- 정치학작 로버트 퍼트넘이 '나혼자 볼링'에서 정의했듯, "사회적 자본은 개인의 관계, 즉 사회적 네트워크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호혜성과 신뢰성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자본은 몇몇 사람이 시민적 품성이라 부르던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자본은 북클럽과 볼링클럽, 교회모임과 공동체 조직, 사친회부터 정치조직, 전문가 모임과 로터리 클럽, 주민회의와 노동조합, 재향군인회까지 온갖 종류의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입해 회원이 됨으로써 얻는 신뢰와 우애, 소속감,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가리킴. 이런 단체에 가입하면 일바노하한 호혜성이 형성됨.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회원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됨. 그러나 얼마 전부터 얼굴을 대면하는 오프라인 모임의 기회가 줄어든 반면, 상대를 만나지도 않고 목소리를 듣지도 않는 온라인 모임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퍼트넘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이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직접적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하고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 전화는 1890년 처음 등장했지만 1957년경에야 미국시장에서 포화됨. 라디오는 1923-37년에, 텔레비전은 1948-55년에 포화상태로 보급됨. 가장 큰 변화는 인터넷과 휴대폰 및 문자메시지의 등장이다. 우리는 지금도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정보를 얻고 오락물을 즐긴다. 또 전화와 그 이후의 전자매체는 앞의 두 목적, 즉 정보와 오락물 외에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도 사용한다. 그러나 문자를 발명하기 전 모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은 대면접촉으로 이루어졌다. 요컨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나란히 앉아 웅변가와 연주자 그리고 배우들의 공연을 보았다. 1990년 이후에 등장한 영화관은 대면 오락물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들에게 집에서 나와 사회적으로 어울릴 기회를 제공. 하지만 극장은 연주자와 배우의 현장공연을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많은 오락거리, 예컨대 스마트폰과 아이폰, 비디오게임은 사회적이지 않고 혼자 즐기는 것임. 개개인이 정치적 틈새정보를 선택하듯 이런 오락거리도 개별적으로 선택하는 틈새 오락이다. 텔레비전은 미국인에게 여전히 가장 보편적인 오락거리로 사람들을 집에 머물게 하며, 가족과 함께하는 명목상의 도구에 불과. 실제로 미국인은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보다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이 3-4배 많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총 시간 중 3분의 1 이상을 혼자 보낸다.
-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방해하는 다른 장애물도 주마다 다름. 일부 주는 유권자에게 투표 당일에 등록하는 걸 허용하고, 유권자가 투표장에 반드시 찾아갈 필요 없이 투표용지를 우편으로 발송하는 것을 허용하며, 투표소를 저녁과 주말에도 열어둔다는 점에서 유권자 친화적임. 한편 선거일 전 짧은 기간에 유권자 등록을 끝내도록 요구하고, 근무시간이나 주중에만 투표소를 열어두는 유권자 비친화적인 주도 많다. 하지만 흑인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유권자 등록을 위해 하루를 결근하고 긴 줄을 서서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다. 이렇게 유권자 등록을 방해하는 선택적 조건 때문에 연 소득이 15만불을 넘는 미국인의 투표율은 80%가 넘지만, 2만불 이하는 50%를 넘지 않음. 이런 장애요인은 대통령과 의원선거뿐 아니라 매년 박빙으로 치러지는 주와 지역단위 선거결과에도 영향을 미침
- 투표율이 낮은 이유가 유권자의 자발적 선택이든 아니든 유권자 등록을 위한 까다로운 유권자에게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행동하도록 만들며,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장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림. 민주주의의 장점은 국민에게 모든 제안을 토론하고 평가한 후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며, 국민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고 의견을 평화롭게 표현할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또 시민폭력의 위험을 줄이고 타협을 장려하며 정부가 일부 국민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장점이다. 결국 투표는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수단. 따라서 미국인이 적극적으로 투표하지 않고 , 투표하더라도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장점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짓과 다를 바 없음을 명심해야 함
- 어떤 국가든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첫 단계는 국가가 실제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내고, 위기와 관련한 문제를 다른 쪽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며, 무엇이 제대로 작동하고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에 대해 정직한 자기평가를 시도하는 것임. 미국은 이런 첫 단계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미국인은 미국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지만,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아직 이루어내지 못했다. 정직한 자기평가도 턱없이 부족함. 근본문제가 양극화, 투표율과 까다로운 유권자 등록, 불평등과 쇠퇴하는 사회경제적 신분이동, 교육과 공공의 목적에 대한 정부투자 감소라는 폭넓은 합의도 없다. 대다수 미국 정치인과 유권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명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또 압도적 다수가 미국 문제를 미국인 자신보다 다른 쪽 탓으로 돌리며, 그 비판의 화살은 중국과 멕시코 및 불법 이미자에게도 향한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소수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현상 자체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방증임.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와 영향력을 할애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과 가족만이라도 미국사회의 문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고 발버둥칠 뿐이다. 요즘 선호하는 탈출전략은 뉴질랜드에서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미국 땅에서 폐기된 지하 미사일 격납고를 고가에 매입해 호화로운 방어시설로 꾸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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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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