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없는 사회

사회 2019. 10. 18. 13:03

- 일차적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혹은 그러기 전에도, 인간은 강렬하게 욕망하나 무엇을 욕망하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존재, 빼앗겼다고 느끼는 어느 존재이자 다른 누군가가 박탈해간 것 같은 자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 성장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인간은 존재의 고뇌를 모면하는데 이 성장이라는 종교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 오늘날 경제사는 경기확장과 위기가 불길하게도 끝없이 교체되는 형국으로 나타남. 풍부한 자원이 인구를 해방시켜 줄 때에는 경기확장이, 인구팽창의 동력이 자원의 품귀현상과 맞물릴 때는 위기가 나타남. 그러나 모든 경향은 그 자체의 반경향을 발생시킴. 비록 인간은 너무 많아졌지만, 그 인구수조차 가능성의 한계를 넓히는 새로운 생각들을 도출시켰다. 덴마크 경제학자 이스터 보스럽은 65년 '농업성장의 조건'이라는 저서에서 인구압력이 창의성을 자극해 과잉인구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임. 인구가 많을수록 더 많은 아이디어, 더 많은 자원이 창출됨. 농업특유의 수익감소 법칙을 피해가는 역학이 자리잡은 것이다.
- 나는 전반적으로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온갖 형태의 사치스러운 에너지 낭비만이 존재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겠다. (바타유)
- 인류학자 고든 차일드는 주조화폐가 도입됨으로써 개인이 집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을 피할 수있다고 보았다. 두번 다시는 보지 않을 미지의 인물에게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셈이다. 사실 이 인물을 두번 다시 보지 않을 것 같다면, 반드시 화폐로 지불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는 빵을 구하려고 제빵사에게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되는 것은 화폐 덕분이라고 말했다. 화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해방되도록 해준다. 문제는 이후 관계를 재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폐거래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이러한 모순의 선 위를 걸어왔다.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허용하지만, 그런 관계는 특정 집단내의 연대적 관계만큼이나 효과적일 수 없다.
- 로마가 몰락한 후 서양은 기나긴 동면기에 들어감. 동면에서 깨어난 서양은 나머지 세계가 끝없이 변화해왔음을 발견. 11-13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는 동양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했음.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유럽을 꿈에 부풀게 했다. 베네치아는 동방교역으로 번영을 이뤘고, 이후 이를 본보기 삼아 거대 상업도시들(제네바, 암스테르담, 런던)이 부를 축적. 콜럼버스는 인도로 떠나 항로를 발견했다. 어느 유라시아 민족이든 이 항로를 발견했다면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이 했던 것만큼이나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름. 예컨대 1405년 정화는 300척의 배, 27000명의 선원, 180명의 의원을 이끌고 난징에서 스리랑카와 아프리카로 출발했다. 정화는 나침반을 이용했고, 식수보급용 선박을 보유했다. 콜럼버스는 단 세 척의 배, 90명의 선원에 식수가 부족했으며, 나침반도 없었다. 하지만 중국은 항해를 중단했다. 중국은 유럽으로 향하는 새 항로를 발견하는 데 딱히 관심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서양세계가 약진을 거듭하게 해준 위대한 발명품들은 바로 나침반(항해용), 인쇄술, 종이(지식전파), 화약(전쟁수행)이다. 이 모두 중국에서 온 물건들이다. 실제로 이미 14세기에 중국은 유럽이 그로부터 4세기 이후에 발전시킨 산업혁명과 유사한 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모리스에 따르면 11-12세기 당시 송대의 중국은 로마를 초월하여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당시 시장에는 농산품뿐만 아니라 종이, 삼, 비단, 닥나무 종이 등 새로운 상품들이 속속 등장했음. 그러나 이러한 르네상스는 14세기 몽골족의 약탈이라는 외부 요소로 산산조각 났다. 더욱이 서양세계 약진의 원인 중 하나는 16세기에 러시아 이반 4세가 러시아 대초원이라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고속도로 같은 공간을 봉쇄함으로써 몽골족의 위협이 종식되었다는 점이다. 몽골의 약탈은 중국이 산업에 치명적으로 작용. 이후 중국은 14세기 때보다 더 쇠퇴했고, 명대에 이르러 제국을 수복했음에도 과거의 속도를 결코 되찾지 못함. 포메란츠에 따르면 중국의 산업적 쇠퇴는 지리적 파란 때문이었다. 중국의 석탄탄광은 주로 북부에 위치했는데, 몽골의 침략으로 중국의 학문적, 정치적 중추가 남쪽으로 밀려난 것. 이 석탄탄광은 영국 역사에서 매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바 있다.
- 서양이 급부상한 원인은 궁정식 사랑도, 내적 규범도 아니 유럽 강대국들이 몰두했던 상시적 전쟁에 있었다. 모든 강대국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여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리라는 동일한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예로 라이프니츠는 '유럽이란 무엇인가? 치열하게 서로 싸워대는 이웃들의 모임일 뿐'이라고 적었다. 로마를 모방하려는 현혹에 하나같이 사로잡힌 유럽 강대국들이 몰두했던 준내전이야말로 서양사회의 특수성인 셈이다. 봉건전쟁에서는 일부 제후가 1년에 40일 동안만 군주의 전장에서 종군했는데, 이제 용병 군대가 점점 더 불어나 과거의 봉건전쟁을 완전히 대체했다. 고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군주들의 자금 필요성은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다. 용병군대를 고용하느라 생겨난 빚으로 이미 옴짝달싹하는 국가들은 한없이 늘어만 가는 공공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금융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이 공공부채는 자본주의 구성요소 중 당시의 유럽이 고안해낸 보기 드문 요소가운데 하나다.
- 유럽의 경제변혁을 이끌어낸 상황적 요소를 고른다면, 14세기의 흑사병이 될 것이다. 29년 대공황이 서구 자본주의에 야기했던 만큼의 여파를 흑사병은 봉건제도에 야기했는데, 이 병은 모든 것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농민 수의 급감으로 인구와 토지사이의 균형이 흔들림. 이 같은 위기 덕에 농민들은 예속된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는데, 최고 입찰자들에게 고용되어 자신의 용역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 흑사병의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임금인상을 촉발했으며 평균임금은 평소수준에 비해 두배로 오름. 그렇지만 식량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잠시뿐이었다. 금세 인구가 다시 증가한 유럽은 흑사병 유행 이전의 인구수준을 되찾음. 인구회복과 함께 시작된 임금의 정상화는 17세기 동안 거의 전 유럽에서 이루어짐. 하지만 네덜란드와 영국만큼은 이러한 퇴보현상에서 벗어남. 두 국가의 임금은 흑사병 이후 도달한 정점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경제사가 로버트 앨런은 18세기 영국의 시민들은 흰 빵과 소고기, 맥주뿐 아니라 거울, 설탕, 차 같은 사치품도 살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피렌체 서민들은 15세기에는 빵을 먹었으나, 18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갓 수입해온 옥수수 죽밖에 먹을 수 없었다.
-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임금이 높게 유지되었던 것은 여러 요인에서 기인한 결과다. 이 두 국가는 16-17세기 대항해 시대에 탄생한 무역흐름의 덕을 더 많이 봤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국가의 농업은 윤작법을 비롯한 새로운 농법을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훨씬 더 빨리 경험했다. 앨런은 역사상 일반적으로 관찰된 이처럼 낮은 임금은 산업발전에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고 봤다. 노동의 가치가 이토록 낮은데 어째서 굳이 노동을 기계화하겠는가? 노예 노동에서 벗어낮지 못했던 로마의 경제적 종말을 파헤친 이 질문은 17-18세기 유럽에도 여전히 근본적 사안으로 남아 있다. 흑사병의 발생으로 생겨난 단절이 분기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산업혁명 이전의 영국 평균임금은 프랑스의 평균임금보다 60% 더 높았다. 이런 상황은 노동의 기계화를 장려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임금인상이야말로 산업혁명의 원인이지 산업혁명이 임금인상의 원인은 아닌 셈. 일례로 앨런은 영국 면공업의 변혁을 이끌어낸 핵심적 기제, 바로 아크라이트가 발명한 최초의 상업적 면 방적기를 분석. 앨런의 계산에 따르면 영국에서 아크라이트 방적기를 도입할 경우 투자자본 수익률이 40%에 달했지만 프랑스에서는 9%에 불과. 임금이 낮은 만큼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경우의 수익률이 덜 높았던 것이다. 19세기에 들어 이 기발한 기계들이 개선되었고, 원가도 낮아져서 프랑스 같은 저임금 국가에서도 기계를 도입하는 편이 더 유리해짐
- 자본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학혁명을 17세기 유럽이라는 무장을 갖춰 솟아난 하나의 영감으로 보는 것은 무의미함. 그리스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숙달했지만, 항해술 같은 실용적 목적으로는 적용하지 못함. 그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지만, 돌멩이의 탄도는 이해할 수 없다고 봤다. 이 감각세계를 사유의 영토로 인정하여 실험적 확인이라는 수단으로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가능성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사고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유라시아 세계의 저편에서 중국인들은 탁월한 깊이의 과학을 발달시켰고, 이를 조지프 니덤은 일곱권의 두꺼운 저서로 상세하게 분석. 그러나 중국의 과학은 실용적 문제의 해결에 좀더 기울어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말도 안되는 만남이란 이 두 전통의 결합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서양은 관념세계에 대한 믿음과 개인적 강박을, 동양은 세계의 기술적 이해에 관한 실용주의를 가져다 주었다.
- 비참한은 물건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에 대해 생겨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루소, 에밀)
- 18세기 말 영국에서 태동한 산업혁명은 오랫동안 독특한 사건처럼 묘사돼 왔음. 영국이 누렸던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적 요인에 의한 사건이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각에 안심이 되기도 함. 즉, 부의 축적이라는 프로테스탄트적인 독특한 기벽이 쉽사리 방향을 바꿔 자본주의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경제성장은 인류 역사의 시공간 속에서 오래도록 성숙하여 생겨난 산물로 보는 편이 더욱 합당함
- 모라벡에 따르면, 이 역설은 진화의 결과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인간이 감각 및 지각능력에서 우위를 갖추기까지 수백만 년이 걸렸던 반면, 수학적 추론의 진보는 훨씬 더 최근에 일어났으며 그럴만큼 복제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놀라운 아이러니 덕분에, 기계에 대한 인간의 비교우위는 초창기에 인류가 그 사촌인 영장류의 우위에 섰을 때 작용했던 바로 그 능력들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논지를 따라간다면, 컴퓨터는 자발성, 창의성이 주가 되는 업무로 인간을 밀어내고 있다. 과거 전기의 시대와 라인공정이 정반대 경향을 요구했떤 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예컨대 베니딕트와 오스본은 컴퓨터가 그럴싸한 농담을 생각해낼 수 있는지를 자문해봤다. 컴퓨터가 세련된 농담을 구사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기존에 존재하는 농담을 모두 망라한 거대한 색인을 갖춘 후, 그중 유효하지 않는 농담들을 걸러내는 알고리즘을 갖추어야 한다. 이 과정이 당장에는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혹은 정서적 지능을 요하는 업무들은 아직 디지털화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인간 뇌의 스캔화 및 지도화, 디지털화는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현재로서는 그저 이론적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독자를 안심시킨다. 거대한 데이터 뱅크 덕분에 비반복적 업무의 다수가 디지털화될 수 있기는 하지만 사고능력과 조작능력을 아울러야 하는 업무나 창의적, 사회적, 정서적 지능을 요하는 업무는 당장으로서는 디지털화로부터 안전하다고 말이다.
- 경제학자 로버트 고든은 내생적 성장이론의 팽창주의적 이념들에 대항하는 지적 캠페인의 선두에 섰다. 고든은 아이러니하게도 50-60년대의 과학소설에서 예상되었던 대변혁 중 그 어느것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 우리는 평소 비행체를 타고 이동하지 않으며, 텔레포트도 존재하지 않고, 화성을 정복하지도 않았다. 20세기의 비범한 혁신들과 마주하여, 오로지 스마트폰만이 과거의 충격에 비견될 만큼 근원적 혁신처럼 보임. 고든은 인터넷 버블이 독보적 사건이기는 했으나 그 영향은 이미 사라졌다고 본다. "삶은 더욱 윤택해진 데다 소비할 물건은 더 많아졌지만, 물질적 진보의 속도는 지난 두 세대 혹은 세 세대 동안 경험했던 것에 비해 더뎌졌다." 고든은 20세기의 흐뭇하기 그지 없는 성장이 21세기에는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교통수단을 예로 들면서 58년 이후 교통수단들의 속도가 정체되었거나 심지어 느려졌다고 지적. 비행기는 40년전보다 더 빨리 날지 않는다. 과거에 비해 연료 소비량와 소음이 적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비행기 자체가 유발하는 공해를 바로잡았다는 뜻은 아님. 새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고든에 따르면, 사회의 정보화는 규모가 상당하나 일시적 동요만을 만들어냈다 소비자 관점에서 위대한 발명은 잡스라는 인물과 그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시리즈를 중심으로 돌았을 뿐이다. 이 발명품들은 근사한 외관에 손에 쏙 들어올만큼 작아졌고 유희적 기능을 지녔으나, 그 영향력은 이전의 발명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앞선 두 차례의 산업혁명은 그 성장 잠재력이 사라지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렸으나, 이번 정보혁명의 잠재력은 훨씬 더 빨리 사라지는 중이다. 고든은 다음과 같이 도발적 주장을 펼침. 대중소비라는 20세기적 의미로서의 성장개념은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중이라고.
- 1900년 미국에서는 경제활동 인구 중 40%가 농업부문에서 일했는데, 오늘날은 2%에 불과. 이러한 이동은 성공적 방출 모델이다. 왜 성공적인지가 이해되는데, 우리 사례 속 A 부문에 해당하는 농민들이 B 부문인 산업직으로 이동했지만 제시된 사례와는 달리 이 B 부문 자체가 생산성 증대의 국면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 이처럼 20세기의 혁명은 농업생산성과 이를 교대한 산업생산성이라는 두 가지 활력이 병합된 것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경험중인 이동은 이와 다르다.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이미 산업부문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옮겨갔고, 바로 이 서비스 부문 내에서 모라벡의 역설이 그들에게 내맡긴 일자리를 향해 이동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문제는 이 이동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되느냐다. 예컨대 피자 배달부 일자리처럼 이들의 생산성이 정체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성장 잠재력이 상당히 감소하는 것이다.
- 70년대 이후, 우리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깨뜨린 대변혁의 시대에 들어섰다.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사회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진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진단은 사회의 상태에 관한 현대적 고찰을 요한다.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에게 헌정된 저서 '변화와 변화의 사유들'에서 인용)
- 다른 대부분의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는 위기가 (지난 40년전부터 계속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위기라는 용어가 아직도 의미가 있다면) 특히 중산층을 덮쳤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박탈해갔다. 카스텔은 이렇게 덧붙였다. "60년대에 노동자 계급은 의기양양했다. 그들은 사회변화의 계획들을 구현하고 고취시켰다. 현재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과거 노동자 계급의 사회비판적 관점이 지녔던 흡인력은 오늘날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노동자 계급을 논한다는 것은, 더는 혁신적인 변화 가능성을, 심지어는 사회적 진보조차 연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높은 실업률, 고용불안정성의 증가를 강조하는 셈이다." 물론 불안정한 고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산업자본주의의 초창기 특징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 고용불안정성과 맞서 싸우리라고 여겨지던 복지국가의 한복판에 불안정성이 엄연히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 인간의 결정이란 언제나 기준점에 대비하여 이루어지며, 이 기준점은 자신이 속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이 아니라, 어느 기대치에 비해 부유하거나 가난하다. 덥든 춥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현실이 결국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보통이라고 간주하는 기준점에 비해 행복하거나 불행한데, 결국에는 현재 처한 상황이 언제나 새로운 기준점이 되기 마련. 행복은 늘 평균적 안정성을 찾게 된다는 성질 때문에, 행복추구를 가리켜 쾌락의 쳇바퀴라 비유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늘 같은 출발점에 머무른다.
- 성장은 현재의 심리적, 사회적 상태보다 더 상승하고자 하는, 덧없지만 늘 새로이 경신되는 희망을 만인에게 선사한다. 성장의 실현이 아니라, 그러한 성장의 약속이 불안을 잠재우는 셈이다.
- 벤자민 프리드먼은 '경제성장의 도덕적 결과'라고 명명한 것을 분석하면서, 미국 및 유럽 정계의 큰 흐름을 경제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면밀히 조사.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위대한 진보주의적 시기는 강력한 성장세와 거의 늘 맞물렸다. 1865년부터 1880년, 이후 1895년부터 1919년까지 이어지는 진보주의적 시기, 혹은 전후의 시민운동 시기가 좋은 예이다. 반대로 경제위기는 포퓰리즘적 운동의 부상(1880-95), KKK단의 급증(1920-29) 혹은 위기기간의 보수혁명(1973-93)을 촉발시켰다.
- 프랑스에서 제3공화국의 개혁기, 전후개혁, 68년 5월의 문화혁명은 모두 경제적 팽창기에 발생. 반대로 불랑제 장군 지지운동, 악시옹 프랑세즈(40년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반공화정 우익단체), 파시즘적 폭력, 비시정부, 국민전선의 부상은 경제적 위기와 동시에 발생. 독일에서 시민적, 사회적 권리의 팽창기(독일 통합, 빌리 브란트의 개혁)는 성장기에 발생했다. 1930년대 나치즘의 급부상, 반이민 정서의 악화는 심각한 침체기에 일어났다.
- 포드주의 모델의 해체에 이어, 기업들은 스트레스를 통한 관리라는 새로운 동기부여 방식을 고안. 이 새로운 관리방식은 필리프 아스케나지가 선구적 저서 '현대적 성장'에서 인용한 국립노동 환경개선청의 어느 보고서로 요약된다. "우수성을 기준으로 하는 관리방식(품질 분임조, 의견표명집단)은 기업을 근로자가 성장해나가야 하는 행동장소처럼 내세운다. 개인의 우수성과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가장 힘든 부서의 교대근무를 늘려가는 식으로 관찰되는 다양한 근무형태는 파괴적 영향을 가져온다. 낙담, 소외현상, 은밀한 경쟁, 경쟁관계의 팽배가 그것이다" 번 아웃 증후군은 21세기의 새로운 병이다. 현대세계에서 이제 더는 기계가 아니라 인류자신이 작동 불능이 된 셈이다. 이러한 고뇌의 주원인은 이미 르네 지라르가 분석했던 이중구속이다 근로자를 향해 "주체적으로 살아라, 주도권을 잡아라'라고 말하면서도, 프로그램이 끼어들어가는 공정을 점차 늘려서 근로자의 자율성을 사실상 일절 금지한다. 무기를 돌려줄 마음이 없는 권위적 사회의 이 절충적 제도를 이제는 노동계가 경험하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를 패러디하자면, 위계적 모델은 약화될수록 더더욱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비슷한 부류 사이에서 폐쇄적으로 지내는 것이 후기 산업사회의 생활방식이라면, 이런 생활방식은 최소한 경쟁,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부담감을 줄여준다는 장점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스털린의 역설 속 여건들을 설명해주는 핵심인 인접효과가 줄어들었다면, 사회는 어느정도 진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회적 족내혼은 또 다른 비극을 예비함.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일수박에 없는 세상에서, 유사성은 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저주가 됨. 유사성이 일종의 감옥이 되어, 그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사회적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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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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