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의 미래

사회 2019. 11. 13. 08:25

 

- 그동안 우리는 교육과 훈련으로 숙련된 기술을 갖추는 것이 좋은 일자리를 얻는 최선의 방법이라 배워왔다. 그러나 이런 지침은 완벽하지 않았다. 진보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 인공지능과 관련한 사실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기계가 하기에는 어려운 작업이 있는 반면, 인간에게는 어렵지만 기계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점. 예컨대 손톱이나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일이나 식당 테이블에 물잔을 놓는 일은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기계로서는 난도가 높은 작업에 속함. 이와 반대로 부기, 회계, 법률분석처럼 높은 수준의 논리추론이 요구되는 일은 인간에게는 어렵지만 기계입장에서는 쉬운 작업. 이런 이유로 기술이 발전할수록 저임금 일자리보다는 나름의 기술역량을 요구하는 중간수준의 임금의 일자리들이 크게 감소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는 중산층이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
- 일자리라는 썩 내키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고통을 받지 않거나, 아니면 고통을 보다 적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피곤하고 괴로운 세월을 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샤를 보들레르)
- 샤론은 이스라엘 노동자들과 미국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발견. 샤론은 미국인들이 이스라엘 출신 동료들에 비해 자신들의 직장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훨씬 적게 행사한다고 지적. 회사의 법률팀이나 재무팀처럼 극심한 압박을 받는 부서에서조차 고용조건 협상에서 이스라엘인들이 훨씬 더 나은 상황에 있고 일과 삶의 균형을 훨씬 더 잘 맞추고 있다. 샤론에 따르면 두 나라의 가장 결정적 차이점은 고용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일자리에 지원했다가 퇴짜를 맞으면 사회시스템을 탓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미국에서는 지원자들이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었다.
- 구직자의 태도에 나타나는 이런 차이점은 상당히 상이한 고용정책을 펴는 두 나라의 고용전략에 기인. 이스라엘에서는 직장에 지원한 사람들의 기술과 성과에 초점을 맞춘 매우 객관적 과정을 통해 우선 한번 걸러지게 된다. 다음은 샤론이 스펙게임이라 부르는 과정을 통해 지원자들은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능력을 시험받기도 하는데, 이때 나이와 같이 업무와는 굳이 연관성이 없는 요인 때문에 탈락하기도 함. 이런 경우 지원자들은 분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자부심까지 갉아먹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공정하기도 한 시스템의 잘못이며, 이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샤론이 케미스트리 게임이라고 이름 붙인 시스템과 싸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구직자들이 제출하는 이력서가 면접까지 이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통상 이것만 갖고는 거래를 마무리하기에 뭔가 부족하다. 여기서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케미스트리라고 부르는 마법을 부려야 하는데, 말하자면 단순히 그 일자리 자체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그 조직에 대해서도 몰입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일자리를 원하고 그것이 필요하다거나 그 일자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온라인 일자리 사이트 한 곳에서 내건 광고문구와 같다. "동등한 자격을 갖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어 일자리를 얻어내는 것이 적임자가 되는 길입니다."
-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세운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우려는 불안이라는 씨앗을 뿌리게 된다. 세계보건기구는 미국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나라이며, 그 원인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이 직장에서 어떤 동력이 결여됐다고 느끼는 데서 기인한다고 보고했다. 미국 스트레스협회에 따르면 지나친 직업적 스트레스로 인해 미국 경제는 건강관리, 업무상 손실, 스트레스 절감치료 등의 형태로 연간 3000억불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 놀라게 되겠지만 이 돈은 모든 부문에서 최종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부담된다. 쉴 새 없이 일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백해 보이는 반면, 주방 수석요리사, 공장노동자, 간호조무사와 같은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얼핏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욱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오퍼 샤론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노동수준은 매우 높은 반면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유해한 환경이 계속해서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벅찬 일자리가 꼭 병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하는가의 지침을 주지 않고 그저 고되기만 한 일자리는 질병을 몰고 오기 십상이다.
-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이렇게 밝힘. "노동에 대한 명배갛ㄴ 절제, 이것이 상위소득을 달성한 사람들의 전통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상황이 바뀌어 오래 일하는 것이 권력의 상위계급을 상징하게 됐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2차대전 이후의 경제호황기와 소비자중심주의가 대두한 것과 같은 깊은 관계가 있음은 확실해 보임. 이 시기부터 노동자들은 여가와 추가임금을 맞교환하기 시작했기 때문. 그렇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는 고소득 임원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화이트는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웠다. "요컨대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하는 일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어서 일과 삶의 나머지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해서 행복한 것이다."
- 경영이론가 제임스 바커가 규모가 작은 제조업을 세심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이 회사의 고용주는 자기 회사를 계측적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분산주의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팀들의 집합체로 만들겠다고 선언. 바커는 팀 구성원들이 경영자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됐을 때 과거 그들의 상사들이 했던 것보다 더욱 심하게 서로를 통제하는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스스로 계급을 만들고 학대를 가하기 시작해, 자신이 그 팀의 일원으로 보다 가치있게 보이기 위한 열망으로 근무시간을 늘리고, 자신의 시간과 가족들의 시간을 희생했으며 건강까지 희생. 이에 대해 바커는 이렇게 썼다. "동료들의 압박과 합리적인 규칙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조합은 새로운 강철우리를 만들었는데, 그 우리 안에 수감된 노동자들은 그 창살을 거의 보지 못했다."
- 현대 인류는 자신의 무제한적인 욕구와 충분하지 않은 충족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노예화한 조건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마샬 살린스)
- 1868년 호레이쇼 알저는 구두닦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뉴욕의 거리생활을 널리 알렸다. 이 이야기에서 가난한 백인 소년은 인내와 노력으로 곤궁에서 벗어나 부를 이룬다. 알저는 파문당한 성직자 출신으로 이 주제에 관해 거의 100권에 달하는 소설을 썼다. 소설의 메시지는 그 시대 부유한 사업가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자수성가 개념에 대한 근거를 제공. 프랑스 역사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냉정하게 관찰한 결론으로 미국인들은 이렇다. "다른 어떤 사람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려하지 않는데,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독립돼 있다고 생각하는 습성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모든 운명은 자기 손에 쥐어져 있따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전적인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는 성행이 사랑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것임을 알아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어쨌든 그들 스스로가 부자가 될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 큰 행운은 적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또 일을 많이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불분명한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토크빌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모두 아직까지는 열심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진정한 차이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의 문제와 상당히 깊게 얽혀 있다.
- 그루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사회과학자들이 기술과 좋은 일자리에 대해 연계시켜 놓은 이론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봤다. 그들이 자신들이 발견해낸 결과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루스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 관련 기술이 최고일 거라 생각했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실제로 드러난 것은 분석능력인데, 말하자면 비판적 사고, 논리 및 추론능력,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루스키는 이런 분석능력을 연마하는 데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하게 이런 기술들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말한다. 분석능력이란 활용가능한 정보를 바탕으로 증거를 평가하고 형식을 식별해 개념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어떤 사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그 규칙을 깨는 방법과 시기까지 발견한다는 점에서 계량적 기술과는 차이가 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컴퓨터 기술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늦었으며 이런 능력만 갖고는 충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적 기술 그 이상의 능력이 필요한데, 그런 기술을 실제 상황에 맞춰 어떤 방식으로 적용할 것인가 더불어 어떤 문제에 어떤 기술을 적용할 것이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분석적 기술에는 여러 시나리오와 다양한 관점을 설정하고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 전략을 생각해낸 다음 각각의 대안에 대한 타당성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보면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이 같은 도전적인 사고방식을 경험하거나 그런 사고방식에 노출될 기회가 훨씬 많은데, 그 이유는 그들이 누리는 부 덕분에 일상생활에서의 시급한 욕구 이외의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 그루스키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주어진 기술의 틀 안에서 훈련을 받는 게 단기적으로는 별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볼 때는 한때 그런 기술만으로 받을 수 있었던 정도의 보수를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 요구되는 역량은 확고한 기술을 갖추는 게 아니라, 기회를 찾아내고 그것을 움켜잡아 최대한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입니다."
- 2012년 경제정책연구센터 소속 경제학자 존 슈미트와 재널 존스는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좋은 일자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은 연간 보수가 3.7만불(이 책이 나온 시점 기준으로 3.89만불) 이며 건강보험과 퇴직연금까지 모두 보장되어야 함. 이 기준을 적용하면 전체 미국인 가운데 25% 이하만이 좋은 일자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국 국민의 대략 절반은 저보수-무복지-무연금이라는 불운의 삼형제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슈미트와 존스는 자신들이 조사한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미국경제가 79년 이후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3분의 1 이상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음. 그 원인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힘을 잃은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최소한 장기적으로는 그렇다. 19세기 전반과 20세기 초반까지, 즉 증기기관에서 시작해 내연기관, 철도, 자동차,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혁신이 꼬리를 물고 지속되면서 단기적으로는 일자리가 줄기도 했지만 이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됌. 예컨대 내연기관이 발명되면서 말 조련사, 대장장이, 마구 제작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는 수송, 생산 판매, 보험, 도로건설 분야 등 자동차 산업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수천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초석을 깔아줌. 윌리엄 모리스가 가치 있는 일자리라 불렀던 것들의 축소는 일시적이며 기술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피해에 불과하고 장기적으로 보면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가 큰 폭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된 이유도 이 때문. 하지만 비록 산업화 시대의 혁신들이 명백한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 경우가 빈번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법칙이 디지털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되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상황임
- 약간 비극적인 점은 인간이 자신의 일을 대신할 기계를 발명하는 즉시 그의 일은 굶주림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오스카 와일드)
- 미국은 전반적으로 새로운 사업기회를 만들기 위해 도박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무척 선호하는 편. 유럽은 학생들에게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치지만, 미국의 학생들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일론 모스크와 같은 기업가들을 떠받들도록 교육받음. 사업의 영웅들이라는 말 그 자체가 지극히 미국적 표현. 산업계에서 영웅은 일반적으로 혁신가를 의미. 그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개인적 측면에서든 사회적 측면에서든 무엇을 준비해 줄 수 있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어떤 혁신'인 것이다.
- 조지프 슘페터가 혁신이 새로운 기술이나 사업, 일자리를 만들면서 동시에 과거의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용어가 바로 창조적 파괴. 여기에 대한 고전적 사례는 자동차였는데, 자동차는 공장노동자, 관리자,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팅전문가, 판매원 등 다양한 부문에서 엄청난 숫자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으나 이와 동시에 편자를 만드는 대장장이나 마구 생산자와 같은 오래된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듬. 이런 상황은 수많은 혁신과정에서 반복됌. 50년에 사망한 슘페터는 혁신이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힘이며, 이런 혁신들을 상업화시키는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라고 주장. 그는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의 구절을 소개했다.
외국에서건 국내에서건 새로운 시장을 여는 일, 공예품 상점에서 US스틸과 같은 회사로 변화하는 조직적 발전은 모두 동일한 산업적 변이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생물학적인 어휘를 사용해 설명하면, 경제구조는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예전의 것들을 파괴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끊임없는 변혁이다. 이런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핵심적 요소다.
- 새로운 창업회사들이 번영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 막강한 사례다. 기업가 정신과 기술적 혁신은 경제학자들이 포상금이라 부르는 성과를 거둔다. 문제는 그 포상금이 점차 좋은 일자리라는 형태로 분배되지 않기 시작했다는 사실. 미국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미국 노동자들의 3% 미만을 고용하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며, 이는 경제를 튼튼하게 세우기에는 너무나 약한 기초다. 우리 일자리의 미래를 기업가 정신에 대한 보상을 통해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한다면, 경제학자들이 비생산적 기업이라 부르는 것들의 위험성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다. 비생산적 기업은 가치를 거의 부가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거나, 만든다고 해도 몇 개 되지 않는 기업들을 의미. 우리가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위축시킬 수 있는 효과적 기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무한한 듯 보이지만, 인간의 사고에 대한 시장수요를 없애버리고 있는 디지털 기술의 개발능력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님. 우리는 지금 전환점에 다다랐다. 여기는 과거의 경험이 미래를 위한 좋은 안내자가 되지 못하는 중대한 교차점이다. 우리는 일자리의 전망과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무거운 임무를 맡게 됐으며, 될대로 되라는 식의 해결책이 아니라 증거에 입각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 계획의 첫번째 단계는 우리가 일 중에서 꼭 보존해야 하는 요소들을 분류해내는 것인데, 이 요소들은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좁은 범위의 탐색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근본적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파악됨. 우리가 하는 일 안에서 그런 결정저긍로 중요한 요소들은 명확하게 분류해서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경제나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 자체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 사람은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생산적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함 그의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바로 그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랭던 길키)
- 모든 직업에 있어서, 하고 있는 일의 의미란 어떤 것을 해냈느냐에 있기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얼마나 성장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하워드 그릭스)
- 마르크스는 언젠가 시민들이 인간으로서 생산을 수행하는 유토피아를 그린 적이 있다. "우리가 일해서 얻는 제품들은 우리가 거기에 반사되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본심을 볼 수 있는 수많은 거울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와 다른 사회비평가들은 산업화에 대해 노동자들과 노동의 사이를 크게 벌림으로써 그런 반사를 흐리게 하거나 왜곡한다고 비판. "노동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다른 모든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기계 역시 상품가격을 낮추기 위한 것이며, 하루 중에서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부분을 줄여서 다른 부분을 그만큼 늘리기 위한 것인데, 이 부분은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본가에게 주는 부분이다. 기계는 이런 식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견해가 정당하고 심각한 우려라는 사실을 명백함. 19세기 말 조지 하웰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베틀 직조공의 격렬한 반대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베틀은 섬유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그의 가정에서 생계수단이기 때문이다. 얼마뒤 재봉사들은 이 산업 내 그들이 속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재봉틀에 대해 반감을 표했다."
- 몰입이라는 아이디어는 오락적이고 생산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니체로 부터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수적인 것은 단순히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니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되는 이야기일수도 있는데, 보다 긴 그의 글에서 확인 가능.
일에 대한 칭송 속에서, 일의 축복이라는 지치지도 않는 이야기속에서, 나는 이와 같은 쓸모는 있지만 비인간적인 행동을 찬양하는 것들 가운데 언제나 숨어 있는 은밀한 생각을 본다. 그것은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다. 근본적으로 이제 사람들은 일의 본모습을 알게 됐다. 일이란 언제나 이른 시간부터 늦게까지 강요되는 엄격한 근면함이며 이 일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다. 그것은 모든 이들을 경계선 안에 잡아두고 강력한 힘으로 이성의 계발, 탐욕, 독립에 대한 갈망을 억누른다. 일이란 엄청난 양의 신경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반성하고 고민하고 꿈꾸고 걱정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거부되는 것이다. 일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작은 목표를 설정하며, 쉽고 정기적인 만족을 보장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회는 더욱 많은 안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며 안정성은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 니체가 말하고자 했고 칙센트미하이가 인지했듯이,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이 점이 모든 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이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현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책감까지 갖게 되는 요인이다. 모든 도서들을 데이터로 만들어 책속에서 사용된 특정 단어의 전체 사용빈도수를 알아볼 수 있는 구글 북스의 엔그램뷰어는 "당신의 열정을 따르라"는 구절이 80년대비 08년에 무려 450배 더 많이 사용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은 편안하면서도 대담하게 들린다. 부정적 느낌은 전혀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경구는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이 조언은 마치 우리가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시에 그 관습적 측면에서도 얼마든지 열정만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 이와 같은 조언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열정이 미래의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라는 매우 잘못된 가정을 전제로 함.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성공의 씨앗인 열정을 갖고 태어났다는 전제다. 그러나 열정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그리 흔하지 않음. 열저잉 고용주에게 좋은 것만큼은 확실하다.
- 열정에 관한 사전적 정의는 강력하면서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감정이지, 우리가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보기를 원하는 무엇은 아니다. 열정적 사회사업가는 어떤 고객을 지나치게 파고들어 그 고객에게 손해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고, 열정적인 엔지니어는 앞서 나가려는 욕구 때문에 동료의 일을 방해할지도 모르며, 열정적인 경찰관은 어린 아이의 물총을 진짜 권총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몰입을 해야 하는 일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열정만은 가슴의 문제로 아껴두는 것이 옳다.
- 자신이 '일자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근무시간은 대부분 하루 중 일의 시작과 끝을 의미. 그리고 일자리 밖에서 삶을 지탱해줄 무언가를 갈구함.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일자리를 통해 야망, 관심, 목적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욕구는 다른 곳에서 채우려고 모색함. 또한 이들은 스스로를 평가할 때 고용주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과는 대도적으로 자신의 일을 '경력'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측정할 때 직장에서의 직위나 성취를 기준으로 삼음.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많은 투자를 하며 그것이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반영한다고 믿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소명(또는 생업)'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삶과 일이 영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이나 성취감에는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 일의 목적과 임무 그리고 그 일 자체가 형성하는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 소명을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의 부름과 유사한 신학적 울림이 있다.
- 대학진학률 세계 1위의 한국은 전세계에서 대학 졸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인데,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실업인구 가운데 50% 이상이 대학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교육 프리미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학 졸업자들의 평균 평생소득은 최근들어 고등학교 졸업자의 소득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
- 취업기회나 일의 실적을 향상시킬 수 잇는 것은 대학 졸업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졸업장이 표현하고 있는 지식과 능력이다. 이런 논리라면 실제 세상에서의 성공은 그 학생이 성고억으로 마친 각 과정의 양과 질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학위 취득 그 자체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논리를 실제롤 적용되지 않는다. 노동통계국의 보고자료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했다가 졸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실제로 전혀 대학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보다도 낮은 소득 전망치를 보이고 있다. 대학교 입학이 평생소득을 감소시킬 잠재성이 있다는 사실은 대학수준의 지식은 고용주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과는 꼭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함. 그 대신 최소한 일부의 고용주들이라도 대학의 학위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확률이 더욱 높으며 이는 공정한 것이 아니다. 고소득 가정 출신의 학생들인 24세 이전에 학사학위를 취득할 확률이 저소득 가정 출신의 학생들에 비해 8배나 높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분류용 도구는 거의 필연적으로 저소득 일자리 지원자에게는 차별로 작용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계층간 소득격차를 만들어내고 영속시키는 요인인 것이다.
- 그(가난한 자의 아들)는 한평생 내내 어떤 인공적이고 품위 있는 평안을 찾아 헤매지만, 그곳은 그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는 이것을 위해 진정한 평온을 희생했던 것이다. 이런 기만은 인간이 하는 산업의 세계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계속되는 일이다. (애덤 스미스)
- 사람이 하는 일로부터 받는 최고의 보상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이 되는가다. (존 러스킨)
- 문제가 생겼다는 인식과 같은 수준이라면 그 문제를 풀 수 없다. (아인슈타인)
- 핀란드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핀란드인들의 국민적 기질을 일컫는 용어 시수(sisu)는 '절망에 맞서는 인내' 정도로 해석 가능. 그들은 갖가지 도전에 엄청난 끈기와 노력으로 단호하게 임한다. 미국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일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믿고 있다. 세계경제가 요구하는 핵심사안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핀란드에서 만난 경제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일축한다. 사회변화에 맞게 시민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새로운 현실에 따르도록 설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게 그들의 입장. 그들은 '사회자체가 모든 시민의 욕구와 능력과 재능에 맞는 기회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나라도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핀란드인들은 낮은 임금을 변명하고자 사회적 지위 상승을 약속하는 것 따위는 신뢰하지 않으며, 모든 일자리가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간에 그 자체로 마지막이라 여김. 올바른 하루 일에 대한 올바른 하루치 보수라는 말이 핀란드에서는 진리로 통한다.
- 핀란드의 기적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기적이 아니에요. 미국인들은 시장을 믿지만, 핀란드인들은 정부를 믿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때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의 성공신화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신뢰라는 바탕위에 세워진 것. 이는 국민을 하나의 목표로 엮어주는 접착제다. 사회적 신뢰수준이 낮으면 기업은 계약에 대한 절충과 소송으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고, 정부는 이념논쟁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회적 신뢰수준이 높을 때는 기업과 정부 모두 더욱 민첩하게 변화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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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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