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득의 분배가 모든 계층이 그들의 욕망을 효과적인 상품 수요로 치환 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에는 과잉 생산도 없고, 자본과 노동력의 불완전 고용도 없고,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싸울 필요도 없다. ... 시장 쟁탈전, 구매하려는 소비자보다 판매하려는 생산자들의 열망이 더 큰 것은 잘못된 유통경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다. 제국주의는 이러한 거짓 경제의 결실이다. ... 국가의 유일한 안전은 소유 계급의 불로소득 이 늘어나는 것을 없애고, 그것을 노동 계급의 임금 소득이나 공공 소득 에 추가함으로써 소비의 수준을 높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존 홉슨, 『제국주의론』(1902년))
- 세계 경제가 심화된 불평등으로 인해 왜곡된 사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 다. 오늘날의 상황은 많은 면에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세계와 닮았다. 그 당시 부유한 유럽 국가들에서 극도로 불평등한 소득분배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생산품을 소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으며, 반면 부자들은 투자할 돈은 많았지만 국내에서는 마땅한 투자 기회를 찾기가 힘든 상황이었음을 의미했다. 현지 소비자들이 더 많 은 상품을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공장을 더 짓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소 득 분배가 덜 불평등하게 이루어졌더라면,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것을 살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부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투자 수익을 창출하기가 더 수월하게 그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엘리트들은 덜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선택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거부로 인해 혁명을 조장할 수 있을 정도로 실업률 이 높아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해결책은 과잉 생산량을 해외의 전속시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제국의 점령지와 반독립국 내의 외국인들은 현 지인들이 살 수 없는 물건을 구입하고, 군대와 포함(砲艦)을 점령함으로써 보장된 비교적 높은 이율로 대출을 받아 그 물건 값을 지불했다. 영국, 프 랑스, 네덜란드, 독일 투자자들은 호주, 라틴아메리카, 캐나다, 아프리카,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했다. 그들은 또한 철도를 건설하고 기계에서부터 군용 하드웨어나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수출했다. 난폭한 정복은 극심한 불평등이 초래한 거시경제 왜곡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당시 명민한 관찰자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영국의 경제학자 이자 사회 비평가인 존 홉슨은 국내에서 건전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는 잉여 자본이 흘러갈 배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설명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잉여 자금을 금권정치의 손에 쥐어 주는 경제·정치 시스템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러 한 소득이 한 계층에게 집중됨으로써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소비력을 부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는 결국 소비만으로도 자본이 활성화되고 이윤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자멸로 가는 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은 수익성 있는 투자와 투기를 할 새로운 지역을 해외에서 찾아 야 했다. 결국, 이러한 탐색은 국내의 강력한 이익단체들을 부추겼고, 그 들의 경제적 자원의 커다란 부분을 점차 현재의 정치적 영역 밖에다 두 면서, 새로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확장 정책을 펼치도록 촉진시켰다.
- 결핍은 인류 생존을 위한 대부분의 문제를 규정해왔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단순히 기아 방지를 위한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오랜 결핍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은 생산적인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유한한 자원을 사용할지 아니면 즉각적인 수요(소비)를 충족시킬 지를 선택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소비가 이겼다. 증가하는 인구는 항상 부가적인 생산량을 다양하게 소비했고 이는 부의 창출을 제한하고 생활 수준을 결정했다. 과거에는 가치 있는 투자에 자금을 댈 수 있도록, 소비 되는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소비를 억제(저축을 권장)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러나 자원이 풍부할 때, 덜 소비하고 저축하는 것은 일종의 낭비이자 역효과만 낳는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는 바 로 그 순간에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배고픈 사람들이 굶주린 채 들판에 드러누워 있다. 공장과 기계는 사용되지 못한 채 녹슬어간다. 투자할 수 있도록 흑자를 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소비를 줄이는 데만 힘쓰면 생산량 감소로 이어질 뿐이다. 게다가 초과 용량은 결국 신규 투자를 저해하고 궁극적으로 생활수준을 떨어뜨린다.
- 국가 저축률을 높이는 방식은 대체로 퇴행적이며,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나 고도의 중앙집권화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다음은 18세기 영국에서 처음 시행했던 방법이다. 우선, 귀족 지주들은 근근이 살아가는 농부들을 공권력을 이용해 쫓아낸 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폐쇄된 사유지에 통합시켰다. 농촌에서 도시로 강제 이주한 농민 들의 희생으로 농업 이익이 증대되었다. 시간당 생산량이 증가했지만, 늘 어나는 농민들의 수는 도시 고용주와 협상할 때 불리하게 작용해 실질적 인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그 결과 제조업체들의 수익이 증가했고 제조업 체들은 그렇게 불어난 수익을 추가적인 생산능력을 개발하는 데 재투자 했다.
- 1740년 영국에서는 생산량의 단 4퍼센트가 국내에서 소비되지 않고 저축되었다. 1820년대까지 국가 저축률은 14퍼센트로 증가했고 영국은 과잉 제조된 생산량을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 특히 제국 식민지와 급성장하는 미국으로 수출하는 산업 초강대국이 되었다. 강제 저축으로 인해 생산적인 투자가 가능했는데, 이 추가 생산은 추가 투자를 창출하는 데 사용되었다. 저축만으로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이 투자 자금 을 조달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에 부의 창출 과정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농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배타적으로 제외시켜 그들에게 산업화의 첫 수확을 지불하지 않았다. 산업화는 또한 고임금 모델의 요인들을 활용해 발전했다. 농민들은 산업혁명 동안 그들이 생산한 것의 가치에 비해 점점 더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영국노동자들은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 있는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임금을 달라고 계속 요구했다. 그들의 높은 생산성과 우호적인 사업 환경 덕분에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들였고, 이로써 투자 지출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때까지 국민 저축을 지속적으로 초과했다. 이러한 차이는 네덜란드인들 이 만회해주었는데, 이들은 18세기 영국 총 투자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추정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 정책들(보호관세와 오늘날 지적 재산권 침해 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해)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투 자하는 것보다 영국에 투자하는 것을 더 선호했으며, 당시 네덜란드는 투자가 더 필요 없을 정도로 성숙한 경제상태이기도 했다.
-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저축 모델을 더 인간적으로 변형시켜 개발했다. 노동자, 기업, 정부는 서구와 함께 수십 년간의 급속한 성장과 경제적 융합을 일으키자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에 동의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지 않고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기로 합의했다. 기업들은 국내 역량과 기술 개선에 수익을 적극적으로 재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국내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규제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저축하는 사 람들의 희생으로 제공되는 저리 대출을 회사들에게 지원하기로 합의했 다. 일본 내에서는 소수의 대기업들이 소비자를 희생시켜 과점 경제권을 장악했다. 해외에서는 그러한 똑같은 회사들이 서로,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생 산자들과 시장 점유율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이로 인해 그들은 효율적이고 혁신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노동자, 소비자, 퇴직자들은 모두 상품과 서비스 비용을 과다하게 부담하고, 서구의 노동자, 소비자, 퇴직자들보다 국가생산량에서 더 낮은 몫을 집으로 가져가며, 구매력을 가계에서 기업으로 이전하기 위해 고안된 금융 시스템을 사용함으로써 산업발전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일본 기업들은 제조업의 기반을 개선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생산성 증가라는 이익을 전달하며, 과도한 임원 보수는 자제하는 식으로 보답을 했다. 정부는 일류 사회 기반 시설에 투자했다. 게다가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출은 계속해서 다른 나라에서 들여오는 수입을 초과했다.
일본이 서구의 생활수준으로 성장하면서 일본식 개발모델은 문제점들을 야기했다. 교육받은 근면한 노동자가 풍부하지만 충분한 물리적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사회일 때, 명백하게 투자할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들이 많다. 따라서 구매력을 노동자에서 기업과 국가로 이전하면 국가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본은 소비에 대한 투자를 선호하는 제도적 편견이 있어서, 최고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에도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래서 가계 지출을 제한하고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전쟁 후에 개발되었던 메커니즘을, 그 유용성이 떨어졌는데도 1980년대 초까지 계속 지속했다. 추가 투자로 증가되는 이익은 꾸준히 감소했고, 가계지출에 부과된 체계적인 제약은 투자수익을 감소시켰다. 일본 사회는 결 국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와서 적응했지만 기업 투자가 급감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며 가계저축률이 '0'으로 떨어지는 등 불필요하게 고통스러운 방식을 통해서였다. 일본이 개발 모델을 좀 더 일찍 벗어났더라면 이 런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수세기 전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시골 에서 도시로 유입될 수 있었던 하나의 원인은 새로운 기회 덕분이며, 또 한 도시 중심이 급격하게 확장됨에 따라 지방정부들이 토지를 몰수하거 나 전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에 비해 체계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았는데, 이는 상 당한 잉여금을 발생시켜 물적 자본에 투자하는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투 자는 항상 소비보다 우선시되었다. | 한편, 19세기의 미국인들처럼 중국은 외국 기업들에게 높은 수익과 국내 시장에 대한 접근을 약속함으로써 현대 기술과 전문지식을 끌어모 았다. 일본이나 한국처럼 중국도 국가가 관리하는 은행 시스템을 통해 가계저축을 우선순위 기업들에게 쏟아부었다. 또한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차별적인 규제와 도덕적 권고를 통해 비중국인 생산자들보다 소위 국내 챔피언(우수업체)들을 선호한다.
- 오랜 세월 동안 이러한 접근 방식이 중국에서는 상당히 잘 작동한 것 처럼 보인다. 국내에 심각한 환경 문제들을 야기하긴 했지만 말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불행히도 고저축 성장 모델은 오래전에 그 유용성이 이미 다 한 상태였고, 중국과 전 세계에 점점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충족되지 않는 소비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투자가 가치 있 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투자는 다른 곳에 더 잘 쓰일 수도 있는 자원 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소비 비용을 희생해서 투자 자금을 조 달하는 일은, 과도한 생산능력과 빈곤해진 노동자들(정확히 2000년대 초반 이 후 중국의 상황)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경우 자멸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중국 총리인 원자바오가 2007년 3월에 밝힌 바와 같이, 중국 경제에는 불안정하고 불균형적이며 부조화스럽고 지속 불가능한 발전을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들이 있다.”
금융위기 전까지 이 전략의 비용은 무역수지 흑자 증가와 대규모 금 융 유출을 통해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전가되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주로 중앙정부와 관련된 중국 거주자들이 매년 7000억 달러 이상의 외 국 자산을 사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유출은 생산능력 저하와 가계부채 증가를 감수하고 미국과 여러 다른 부국들이 흡수했다. (메커니즘에 대해서는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금융위기 동안 중국의 주요 수출 시장 특히, 미국의 수요 붕괴는 중국 의 경상수지 흑자를 급격히 위축시켰고, 중국 정부는 국내 생산 감소를 허용(실업 증가를 유발)하거나 국내 지출을 늘려 국내 수요를 상승시키는 방 안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수요를 늘리는 것이 분명히 더 나은 선택이었지만, 더 높은 투자나 더 높은 소비로 이어질 수도 있다.
투자 수준이 매우 높고 이미 대규모로 잘못 할당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정부는 더 높은 소비를 선호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장 뒷부분 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중국의 무수한 제도적 제약 때문에 가계 대출이 급증하는 것 외에는 소비가 충분히 빨리 증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중국 지도부가 미국에서 목격했던 일을 봐서는 유사한 경험에 대해 관심 이 없는 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것이 정부가 투자 활성화에 집중하기로 한 이유다. 세계 금융위기 에 대처하는 가장 직접적인 대응은 외국인 지출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기반 시설과 주택 투자를 대대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오랜 불균형을 일제히 내부로 이동시키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중국은 유 례없는 중국 부채 급증이라는 희생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감소했음에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비생산적인 투자는 비용을 충당하지 못했다. 빚을 내서 하는 투자를 통해 고속으로 성장하는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중국 정부는, 무역흑자와 금융 유출을 통해 경제 모델의 비용을 전 세 계에 전가하려고 다시 한번 시도할 위험이 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은 투자보다 가계 소비가 우선되도록 중국 경제를 재조정하는 것 이다. 이는 구매력을 중국 노동자와 퇴직자에서 기업과 정부로 이전하는 기존의 모든 메커니즘을 뒤집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1978년 덩샤 오핑이 시행한 개혁만큼 극적이고 정치적으로 어려운 개혁이다.
불행하게도 중국은 지난 수십 년간의 선택들이 정치적으로 고착화되 어 있다. 반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이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고 소비력을 소비자에게서 대기업으로 전환하기는 쉽다. 결국 스탈린이 그렇게 했다. 문제는 수년 간 국가가 지원하는 소득 집중 정책이 소비자들에게 소비력 을 되돌려줄 어떤 개혁에도 격렬하게 저항할 강력한 기득권’ - 리커창 총리가 선호하는 용어 - 그룹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성공적으로 조정하려면 정부와 국민 그리고 엘리트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최근 몇 년간 환경보호, 금융개혁, 건강보험 등 중국 서민 들의 안녕을 증진시키기 위해 진실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1989년 이래로 지속된 장기적인 추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국 정세에 알맞은
해답을 찾기가 막막한 가장 큰 문제는, 공산당이 정치적 독점을 잃지 않 고도 중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이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느냐다. 중국이 왜 이런 상황에 빠졌고 왜 이 과정을 뒤집기가 그토록 어려웠 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40년간 중국의 성장 궤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석가들이 중국의 발전에 대해 이해하면서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덩샤오핑이 역사적인 개혁을 시작한 이후 거의 40년의 세월을 하나의 지속적인 성장 모델로 융합한 것이다. 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결론 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누군가의 성공에서 말이다.
- 우크라이나 태생의 경제학자 알렉산더 거친크론은 1951년 그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 경제 후진성(Economic Backwardness in Historical Perspective)에서 개발도상국들은 역사적으로 두가지 주요 제약조건에 직면했다고 주장했다. 첫째, 불확실한 부동산 권리 와 신용할 수 없는 법체계 그리고 불안정한 금융·정치 시스템 때문에, 투 자에 자금을 댈 만큼 충분히 국내 저축을 하지 못한다. 둘째, 같은 이유 로 민간 부문은 생산적인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못한다.
거센크론의 결론은 이러한 제약들을 정부의 개입으로 극복할 수 있 다는 것이다. 거센크론에 따르면, 국가는 민간 부문의 자원을 모아 절실 히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과 제조 시설을 건설함으로써 개발을 가속화할 수 있다. 투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가계 소비가 억제될 것이다. 실제로 이는 노동자와 퇴직자에게 직접적이고 간접적으로 세금을 부과해 중앙 당국이 지시한 투자를 보조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며, 이는 유권자들에게 해명할 필요가 없는 권위주의 체제에 적합하게 발전한 개발 전략이다.
지난 세기에 있던 거의 모든 투자 주도형 성장의 기적은 이러한 규정을 따랐다. 스탈린 휘하의 소련은 1930년대에 거센크론 모델을 사용해 산업화되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중국은 1958~1962년의 대약진 기간 동안 비슷한 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브라질의 군사 독재 정권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러한 모델로 상반된 결과를 얻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모델을 구현한 유일한 주요 민주주의 국가다. 이후 한국이 군사독재 시절에 채택해서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 불균형 성장 모델의 효과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의 세 번째 성장 단계는 199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기저의 경 제 잠재력은 생산성 향상, 높은 투자,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자가 계속 이 주한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실제 중국의 생산량은 기본적인 잠재력보다 훨씬 더 많이 성장했다. 2008년 정도까지는 무역흑자 증가를 통해 그 차이를 해외에서 상쇄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정부는 중국 제조업에 대한 외부 수요 붕괴에 대응해 국내 투자를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가 적절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국내 부채 부담만 급격히 증가시킬 뿐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GDP 성장 목표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스템 산출로서의 GDP 성장과 시스템 투입 으로서의 GDP 성장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제에서 GDP는 가계, 기업, 정부가 창출한 생산량을 측정하는 척도로, 이러한 모든 수치 들은 그들이 얼마나 지출할 수 있는지에 한계를 긋는 역할을 한다. 공식 통계학자는 해당 기간 동안 GDP가 확대되거나 축소된 양으로 보고되는 관련 활동 변화를 측정한다. | 하지만 이것은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GDP 성 장률이 이 시스템에 들어가는 투입 요소 중 하나다. 그것은 그 해의 GDP 성장 목표로서 연초에 설정되고, 사회적·정치적 목적을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성장량을 나타내며, 그러한 과정에서 물론 실업률을 낮게 유지하 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따라서 그것은 표준 경제 제약을 수정해 지방정 부가 민간·부동산 부문의 경제 활동과 함께, GDP 성장 목표를 높일 수 있는 경제 활동을 충분히 창출하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강력하고 위험한 동기가 생성된다. 중국 지방과 시 정부가 은행 시스템 내에서 신용창조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고, 중국 은행들은 빚을 상환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거의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무원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국영 은행들에게 우대받는 기업에 대출을 해주어 필요한 만큼 사회 기반 시설, 제조,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투자가 가치가 있는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출의 양이 중앙정부의 목표를 충족하기에 충분한, 보고한 대로 GDP를 발생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사회 기반 시설과 제조능력이 너무 부 족했기 때문에 이 제도는 중국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산적인 투 자에 유일한 제약은 저축이 증가할 수 있는 속도였다. 거의 모든 투자가 프로젝트 비용보다 훨씬 더 생산성을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금융 시스템은 가장 빠르게 확장하는 금융 시스템이었는데, 이는 필연적 으로 프로젝트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차별이 덜한 금융 시스템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이 당의 기본적인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어떤 것이든 자금을 지원받을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얻은 금융 시스템이다. 자본을 정교하게 관리해주지는 않지만, 국내 저축의 급증세를 포착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투자 프로젝트에 싸게 대출해주는 것은, 정부의 규제 덕분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중국 경제와 대부분의 다른 경제 사이에는 두 가지 큰 차이점이 있는데, 이것이 지방정부들이 분기별 연도별 성장 목표를 정확하게 달성할 수 있게끔 해준다. 첫째, 지방정부는 엄격한 예산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 즉, 그들은 결제할 필요성에 제약받지 않고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지방자치단체가 은행 시스템 내 대부분의 신용창조를 통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둘째, 대출이 직간접적으로 보장되기 때문에 은행들은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사업에 들어가는 대출을 기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GDP 성장 목표 달성에 필요한 활동에 자금을 대기 위해 지방정부가 요구하는 만큼의 신규 여신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까지, 몇 년 동안 엄청나게 빠른 투자 성장으로 인해 생산적인 투자를 명확하게 식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중국 은행 시스템의 오랜 결함들이 심각한 제약이 되었다. 압류된 가계저축에 서 나온 저리 융자는 실제 비용보다 경제적 가치가 덜 추가된 투자에 보조금을 주었다. 중국은 투자 붐이 점점 더 비생산적으로 변하는 포화 단계에 이르렀다.
- 높은 부채 수준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더 생산적인 행동에 영향을 준다.
첫째, 높은 수준의 부채는 채무불이행과 상환 비용의 배분에 불확 실성을 야기한다. 이것이 법인금융에서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전통적인 거시경제학의 일부는 아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경제 인 구가 나쁜 부채의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 행동방식을 바꾸면, 이러한 변화들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즉, 부자들은 자신의 돈을 국외로 빼돌리려고 하고,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노동자들은 비협조적이 되고, 중산층 저축자들은 계좌에서 돈을 빼서 실물 자산을 사려고 한다. 중국의 부채 수준은 이렇게 재정적으로 좋지 않은 진행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을 만큼 충분히 높다. 부채가 평가 절하되기 전까지 생산성을 촉발시키고자 하는 방식의 개혁은, 다른 방법보다 부를 덜 창출할 것이다. 이전에는 중국의 지방정부가 경제의 실질 성장 능력을 초과하는 차입으로 GDP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게 싸게 빌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GDP는 훨씬 더 느리게 성장했을 것이다. 이 말은 부채 수준이 안정되기만 한다면 성장률이 크게 둔화될 것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중국의 부채 수준은 이미 너무 높기 때문에, 우선순위는 단순히 부채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력을 포함해서 모든 자원들을 충분히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경제 상황인 경우 외에는, 부채의 증가나 감소는 성장률의 변화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성장 충동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던 상황을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이는 GDP가 훨씬 더 느리게 성장할 것이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중국 은행 시스템은 대출이 초래한 경제적 손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국의 GDP는 악성 대출(회수 불능 융자)의 원 리합계로 인해 실질적으로 과대평가되어 왔다. 투자는 투자비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미래의 소비와 생산을 만들어내는 경우에 만 가치가 있다. 투자 자금으로 사용되는 대출은 경쟁금리로 상환 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투자들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성장을 증가시키지 않고, 노동자와 퇴직자에게서 추가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갚을 수 없는 금융 시스템에 악성 대출을 더함으로써 장기적인 성장을 축소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악성 대출과 불량 투자의 비용은 조정기간 동안 분할 상환될 것이며, 과거 GDP에 과대평가되었던 금액만큼 향후 보고되는 GDP를 반드시 낮출 것이다.
- 어떤 식으로든 중국이 경제를 재조정할 것이고, 모든 불균형은 결국 복원될 것이지만, 특정 계획은 몇 가지 경쟁적 제약 속에서 정치 시스템 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중국 경제가 계 속 둔화하는 가운데 베이징에 있는 중앙정부는 중국의 다양한 엘리트 집 단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은 세기 동안 중국 경제성장의 성격을 결정할 새로운 기관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기관들이 어떤 모습일지 누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소득이 엘리트들에게서 일반 가계로 옮겨간다면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될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중국의 부족한 내수를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 강제로 떠넘길 필요성을 줄여주는 자산균형 재조정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든 성장 기적에 필수적인 조정 기간은 언제나, 특히 겉으로 가장 명백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상을 항상 뒤엎었으며, 심지어 가장 심한 비관론자들이 두려워했던 것보다도 경제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해도 무방하다.
- 유럽 중부와 동부에서의 혁명들은 소련이 개입할 자원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대부분 성공했다. 소련은 1956년(헝가리), 1968년(체코슬로바키아), 1979년(아프가니스탄)과는 달리, 1980년대 후반에는 위성국가들을 침략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괴뢰정권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이 망설였던 이유는 일부 재정상의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중이었지만 소련은 유럽과 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의존했다. 에너지 수출과 때 로는 금 보유고를 팔아 벌어들인 소득으로 대금을 지불했다. 1960년대에 석유와 가스의 가격은 밀의 가격에 비해 50퍼센트 이상 올랐다. 1970년대에 에너지 가격은 밀 가격에 비해 4배나 올랐다. 소련은 증가하는 국제 구매력으로 공세를 취하는 게 가능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내부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으며, 정부는 추가 수입품에 지불할 거액의 달러표시 부채를 서방 은행들에서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유가는 밀 가격과 달러 대비 3분의2 수준으로 폭락했다. 금값도 급락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서방세계에서 군사 태세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되는 전쟁비용을 지불하고, 1970년대에 발생한 외채를 상 환했다. 어떤 추가 지출이든 국내 전선에는 잔혹한 압박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생활수준을 무너뜨려야 했을테고, 스탈린은 결국 그렇게 했다. 그러나 1985년에 당 지도부의 최고 자리에 오른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탄압에 무관심했으며 아마도 그럴 수 없는 규모였을 것이다. 대신 고르바초프의 우선순위는 정권의 권위주의를 누그러뜨리고 서방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동유럽인 들에게 기회의 창이 되었다.
- 이 책이 주장하는 핵심은 한 사회 내의 구매력 분배가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구매할 여 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러한 생산물이 필요한 외국의 수요에 의존해야 한 다. 해외 수요나 내수가 충분하지 않다면, 더 적게 생산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한 나라의 소득 중 많은 부분이, 버는 것의 대부분을 쓰는 기업들 에서 버는 것보다 적게 쓰는 기업들로 옮겨갈 때, 그 국가는 더 큰 경상수 지 흑자 또는 더 작은 경상수지 적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중국과 독일의 예를 들어 보여 주었다. 1989년 이후 중국과 독일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너무 많이 저축 하고 너무 적게 소비하게끔 되었다. 그들이 겪은 일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일본, 네덜란드, 싱가포르와 같은 다른 주요 흑자 국가들에서 일어났던 일의 많은 부분을 함께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이 필요한 이상한 점이라면, 미국이 전형적인 흑자 국가의 많은 특성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경상수지 적자를 끈질기게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 기 전에, 왜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운영했어야 했는 지(그런데 왜 그렇지 않은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가계 부문을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미국의 불평등은 1970 년대 후반부터 급증했다. 세금과 정부 이전을 감안했을 때 국민 소득의 분포 상위 10퍼센트 안에 드는 사람들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30퍼센트 에서 40퍼센트로 증가했다. 상위 1퍼센트 이내의 초고소득자들이 그 증 가의 대부분을 견인했다. 그들의 소득은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희생에서 나온 것이었다. 분포의 하위 절반에 속하는 미국인들은 세금, 물가 상승 그리고 정부로부터의 현금 혜택을 고려해볼 때 1970년대 후반 이후 본질 적으로 어떠한 소득도 증가하지 않았다.
- 소득이 가장 높은 사람들은 소득의 약 40퍼센트를 저축하는 반면 대 부분의 다른 가구들은 저축이 '0'에 가깝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미 국의 총 가계저축률이 상승하도록 야기했어야 맞다. 그러나 가계저축률은 1970년대 후반의 가처분소득의 약 10퍼센트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5퍼센트로 떨어졌는데, 그 주된 이유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저축을 훨씬 적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설명이 필요한 수수께끼다.) 금융위기 전날까지 미국 가계의 평균 저축률은 겨우 3퍼센트로 떨어졌는데, 이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저축률이 마이너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을 빌렸으며, 자신들이 버는 소득보다 더 많은 돈을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고 이자를 지불하는 데 소비했던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전체 가계저축률은 1990년대 중반과 비슷한 약 6~7퍼센트로 되돌아갔다.
- 미국의 가계와 기업과 정부가 선택해온 것들로는 미국이 왜 광범위한 경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운영해왔는지를 이해하기는 충분하지 않다. 한 부문이 지출을 줄일 때마다, 다른 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개입한다. 미국의 가계와 기업, 정부가 해외에서 유입되는 금융에 대응해 행동을 조정하는 등 경상수지를 독립적인 변수로 생각하 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사채와 공채, 또는 기업 자본 지출과 주택 건설 사이의 특정한 혼합은 주로 미국의 국내 조건과 정책이 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총결산 결과는 미국의 국경 밖에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독일과 매우 비슷한 특성이 많은데도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운영하고 있는 이유다. 미국과 독일의 주요 차이점은, 미국은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가 아니어도 외국인들의 미국 자산에 대한 욕구가 왕성하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미국 자산을 향한 욕구는 미국의 국가 부채와 그에 관련된 의무들이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수행하게 된 특 별한 역할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스템이 어떻게 진화 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다소 놀랍게도 국제 통화 시스템은 지난 2세기 동안 많은 핵심 특징들을 유지해왔다. 달러의 우위, 즉 미국의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수긍하게 하는 근본적인 변화는 대공황 기간에 벌어졌 던 금본위의 붕괴다. 그 후 90년 동안 거듭 노력했지만, 어느 나라도 적절 한 대체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좋은 대안은 세계 준비자산 으로서 달러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었다.
- 제1차 세계대전 전날, 잉글랜드 은행은 세계 금 보유량의 겨우 3.4퍼센트만 갖고 있었고, 그리고 지폐의 5퍼센트도 안 되는 금액만이 다시 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수입과 외채를 충당하기 위한 준비자산으로 영국 파운드화를 보유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4대 경제대국(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외에 다른 정부가 발행한 통화는 전체 준비자산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금괴였다.) 프랑스 프랑화와 독 일의 라이히스마르크가 더 성행했던 유럽 대륙과 미국 달러로 준비자산 을 가지고 있는 캐나다를 넘어, 파운드화가 단연 지배적인 준비통화였다. 예를 들어, 1913년 일본이 보유했던 준비자산은 금이나 다른 외화보다는 거의 영국 정부와 은행들이 발행한 금융 청구 형태를 취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을 제외한 모든 강대국들은 종이 화폐를 물리적 금으로 전환하는 것을 유예했다. 각국 정부는 전쟁 물자들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돈을 인쇄하고 있었고, 만약 그들이 지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폐를 금과 교환하도록 허용했다면 금은 금세 고갈되었을 것이다. 1922년 제노바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전쟁 전의 금본위제와 유사 한 상태를 회복하기로 합의했다.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금본위제에서 각국의 국내 신용공급은 자국 정부와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에 따라 제한되어야 했다. 민간 대출업자들은 무제 한으로 서면 청구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청구가 궁극적으로 한정된 금과 교환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무제한 서면 청구를 단념했다. 이러한 제약은 1913년 잉글랜드 은행의 제한적인 정화(正貨)준비금에서 증명되었듯 이, 약하긴 했어도 그것이 현실이었다. 금의 유입은 추가 대출과 지출을 장려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는 금괴를 더 많이 받는 나라에서 가격과 생 산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한 결합은 지속적인 글로벌 불균형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했 다. 흑자 국가들은 국내 신용공급을 늘리고 임금과 물가를 부풀리면 금 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출 가격이 비싸지고, 수입과 지출은 늘 어나게 된다. 적자 국가들은 신용공급을 줄임으로써 수출 가격을 낮추고 수입에 대한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무역 흐름의 변화는 금의 흐름을 역전시켜 흑자 국가들의 호황과 적자 국가들의 부진을 종식시킬 것이다. 조정은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도록 해줄 것이다.
- 복원된 금본위제는 1920년대에 실패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미국의 국 내 경제들이 금의 유입에 대해 통상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상당히 유연한 시스템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쟁 전보다 훨씬 낮게 프랑화의 금 가치를 재설정했고, 이는 수입에 대 한 지출을 억제하고 수출품의 가격을 낮추게 했다. 미국이 달러의 금 가 치를 바꾸지 않는 동안, 유럽에 비해 금의 환율이 실질적으로 평가절하 되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전쟁 기간 동안 인플레이션을 훨씬 덜 경험했고 또한 전쟁 후에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성공적으로 역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 중이나 전쟁 후의 국내 수요에 비해 미국의 생산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미국의 수출 수익을 증가시킨 반면 수입에 대한 지출을 감소시켰다. 미국인들은 전후 독일에 대한 대출뿐만 아 니라 전시 동맹국들에게 해주었던 대출에서도 상당한 이자를 받고 있었 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와 미국 모두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결론은 프랑스와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서 많은 금을 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금의 유입으로 프랑스와 미국은 소비력이 증가하고 프랑스와 미국의 수출품은 세계 시장에서 더 비싸게 거래되었어야 했다. 불균형은 스스로 바로잡혀야 했고 결국 금의 유입을 역전시켰어야 했다. 그러나 프 랑스 은행(프랑스 국립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국내 인플레이션 을 억제하고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금 수입을 무력화시켰다. 프랑스와 미국에 유입된 금은 돈과 신용 거래를 확대하기보다는 세계금융 시스템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러한 결정은 프랑스와 미국의 준비 자산 보유량을 극적으로 증가시켰고, 세계 경제를 왜곡시켰으며, 결국 제 노바에서 합의한 통화 체제를 파괴했다. 균형을 잡기 위한 채권자들의 조 정은 없을 것이다. 1920년대에 적자 국가들은 국내 경제 상황을 희생시키면서 금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지키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대공황이 닥치자 이러한 선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금 본위제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에 굴복한 첫 번째 나라는 1931년 9월에 페 그를 포기한 영국이었다. 그해 말에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과 일본이 그 뒤를 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금 보유고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 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미국 정부가 1933년 금과 연결된 달러의 고리 를 끊을 때까지 신용 조건을 까다롭게 하고 지급유예 사태를 악화시켰다. 프랑스가 가장 오래 기다렸고, 몇 년간의 국내 약세와 무역 경쟁력의 감소를 겪은 이후인 1936년에 마침내 프랑화를 평가절하했다. 독일은 연합 국에 패배할 때까지 금에 대한 페그화를 엄밀히 지켰지만, 이는 외채를 경화로 지불한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국외로 돈을 빼내는 행위 에 대한 가혹한 통제를 통해 얻은 결과였다. 국제 금융 시스템과 단절된 나치 정권은 물물교환식 무역에 의존했는데, 표면적으로 이념적 적수인 소련에서 원자재를 얻기 위해 첨단 제조물들을 팔아 자신들이 필요한 것 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대가 저물어갈 때, 전쟁 전 금본위제와 전 쟁 중의 금환본위제의 마지막 자취는 모두 사라졌다
- 1997~19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수년 동안 인도네시아,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은 북미, 유럽, 일본의 저축자들에게서 상당한 재정적 유입을 끌어왔다. 한국의 생활수준은 이미 뉴질 랜드와 스페인의 생활수준에 다다랐고, 말레이시아는 발전 중인 중앙유럽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1990년대에는 모두 미국 달러에 대해 안정적 인 환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7년 상반기가 되자 다양한 이유 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 특히 IMF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IMF의 정책 검토부장이었던 티모시 레인이 회고하면서 분 석해 말했듯이, 아시아 위기 국가들은 재정흑자, 높은 민간 저축률, 낮은 인플레이션을 가지고 있었다. 레인과 그의 동료들이 보기에, '환율이 지나친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들의 은행과 기업들이 국내 자산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외화를 대규모로 빌렸다는 사실이었다. 설상가상으 로 부채는 단기적인 경우가 많았다. 돈이 계속 유입되는 한 환율은 보합 세를 보였고, 주식과 부동산 시장은 계속 상승했으며, 상황은 지속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작은 변화가 자산 가격 하락, 통화 가치하락과 실질 금리 상승이 자체 강화로 연속해서 이어질 수 있고, 실제로 이어졌다. 이 국가들이 개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해외에서 돈을 빌린 것이 실수가 아니라, 붕괴되기 쉬운 방식으로 채무를 구조화했다는 점이 실수였다.
- 정부가 지급하는 일시적인 노동 불능 급료는 실직 노동자들의 생계를 도왔으나 분실 소득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이는 소매업, 식당업, 회계사.. 변호사 등 고액 연봉 업종에 관계없이 해당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모든 사 람에게 해외 수입의 영향이 확대된 것이다. 미국의 그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재앙이었다. 직업이 없는 남자들은 결혼할 여자를 찾 을 수도 없고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다. 직업과 가족이 없는 남성들은 음 주, 마약, 특히 자살로 내몰렸다. 지방정부는 세수가 고갈되고 복지제도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분투했다. 지난 20년 동안 전국적으로 범죄율이 급감했지만, 비용이 저렴한 수입품들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지역의 범죄율은 약간 증가했다.
문제는 달러표시 자산에 대한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의 탐욕스러운 수요였다. 수조 달러의 비경제적 자산 매입이 주택담보대출 버블을 부풀리는 것은 물론 미국 환율을 왜곡하면서, 과도한 대외금융 역시 미국의 교역조건을 무참하게 약화시켰다. 1997년 초반(아시아 금융위기 전날)과 2002년 초 사이에 달러는 교역 상대국 통화에 대해 20퍼센트 이상 절상되었다. 그때부터 2008년까지 달러는 하락했지만, 1988~1996년 평균치를 훨씬 웃돌았다. 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달러의 과대평가는 미국 소비자들이 국내 제조업을 희생시켜가며 해외에서 만들어진 상품 을 사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주요 흑자 국가들의 계층 전쟁과 아시아의 금융위기 이후의 자기보험 에 대한 열망 탓으로 전 세계가 소비를 꺼리게 된 것은, 미국의 부채 거품 과 산업공동화 둘 다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외국 금융의 유입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일자리와 소득을 희생하면서 제조 능력의 과잉 상태를 흡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외국인 저축자들은 달러표시 자산을 사들이면서 미국 지출에 미치는 일자리 감소의 영향을 완화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금리가 내려가고 신용이 확대되고 가계 대출이 급증했다.
2017년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발표한 세심한 연구는 이러한 세력들을 분명히 연결시켰다. 연구원들은 값싼 제조 수입품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에 근거해 미국의 다른 지역들을 비교했다. 대외경쟁에 가장 취약한 곳 은, 절대적인 조건에서 보거나 소득 대비해서 볼 때 가장 가계부채가 많 은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수입으로 인해 국내 생산이 이전함으로써, 손실 임금을 대체하기 위해 신용 거래가 증가했다.
- 준비통화를 발행하는 것이 좋다는 통념이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경제보다는 심리학에 기반을 둔 오해다. 보유고 발행자가 세계 경제를 압도적으 로 지배하지 않는 한, 보유고의 국내 수요와 글로벌 수요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있을 것이다. 미국은 60년 넘게, 자국 노동자들을 희생해서 전 세 계의 저축자들을 만족시켜왔다. 달러가 가진 최고 지위는 프랑스가 잘못 표현한 '지나친 특권이 아니라 '지나친 부담'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러한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10퍼센트 미만을 차지했지만, 인도와 영연방의 저축자들이 매입한 스털링(영국 화폐 제도) 자산의 가치를 보호하 기 위해, 1920년대에 터무니없이 강한 환율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케인스가 영국 정부의 경제 고문으로서 강력하게 반대했던 그 결정이 영국 산업을 희생시킨 것이다. 영국의 수출은 1920년대 내내 1913년보다 약 25퍼센트 낮았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값싼 수입품들이 국내 생산을 대체했다. 영국 노동자들은 거의 10년 동안 극도로 높은 실업률을 견뎠다. 세계 주요 준비 통화 중 하나를 발행하는 일이 특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대중이 국제적 합의보다 국내의 일을 더 우선시하기로 했던 시기인 1930년에서 1932년 사이 상황은 바뀌었다. 영국은 국제적인 합의를 버리고 금 대비 자국의 통화를 평가절하하고, 국내 금리를 낮추 며, 관세를 부과했고, 그 후 1920년대에 생겼던 나머지 경제 부국들과 자 국 사이에 생활수준의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그 이전에 영국 정부는 파운드스털링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 으로 자국민들에게 고통을 부과했다. 그것은 파운드스털링의 지위를 유지하게 될 수도, 아니면 그 반대로도 될 수 있던 정책 선택이었다. 미국 정 부도 이와 비슷하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제 금융 시스템을 달러에 묶는 선택을 했다. 처음에는 준비통화 발행이 부담이 되지 않았다. 미국 생산량이 세계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치 에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후 초기 몇 년은 이례적이었다. 1971년까지 브레턴우즈에서의 선택은 유지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닉슨 행정부는 금과의 연결을 끊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저축자들은 어떠 한 공식적인 합의에도 구애받지 않고, 달러를 국제적인 준비자산으로 결 정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 유입된 재정을 미국 정치와 금융 시스템이 수용했으며, 이는 미국인들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 외국인 저축자들이 미국 자산을 살 때, 산업공동화로 인한 소득 감소와 수입에 대한 지출 증가의 결합을 통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증가한다. 미국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수조 달러 가치를 지닌 투자들이 없다면(그런데, 없었다), 상승하는 지출은 낭비적인 투자나 추가소비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그에 상응해 부채 발행을 증가시킴으로써 외국 중앙은행으로부터의 구매를 완전히 상쇄하지 않는 한, 미국 민간 부문은 자산을 매각하거나 지분을 내놓거나 돈을 차용함으로써 추가적인 외국 금융 유입을 흡수해야 할 것이다. 다른 그럴듯한 결과는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흑자 국가의 제도적 왜곡이 만성적인 소비 부족 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결과는 생산능력의 과잉, 과도한 저축, 미국 금융 자산에 대한 과도한 수요다. 거래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이러한 왜곡을 제한하기 위한 균형 잡힌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그러한 제한을 금본위제가 했다. 금을 잃은 적자 국가들은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는 반면, 금이 유입된 흑자 국가들은 내수를 진작시키는 식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금을 버렸고, 금이 부과했던 규율을 잃었다. 케인스는 글로벌 준비자산 역할을 할 새로운 통화로 국적 없는 통화인 방코르를 내세우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어떤 나라도 세계의 불균형으로 인한 대가를 홀로 부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케인스는 브레턴우즈 회의의 논쟁에서는 패했지만 그의 예리한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다시 시도할 때다. 대체 가능한 방법들은 국내 불균형을 조정하 려는 흑자 국가들의 자발적인 약속이나, 적자 국가들 특히 미국의 일방적 이고 파괴적인 대응이다.
- 중국이 미국산 비행기를 몇 대나 사고 미국산 콩을 몇 톤이나 사겠다고 약속했다든가, 또는 미국 이 대중국 무역에서 양측의 적자가 얼마나 줄어들었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앞서 중국으로 이전했던 미국 기업들이 얼마나 미국으로 돌아가는지조차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반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거의 보유하지 못하는 한, 이는 반드시 상품과 서비스에 대 한 지출을 감소시킨다. 그러면 중국은 무역흑자를 운영해야 하고 막대한 양의 저축을 수출해야 한다. 독일, 일본, 네덜란드, 한국, 대만, 스위스, 싱 가포르 그리고 다른 주요 흑자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자 국가들이 이 러한 외국 자본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는 한, 그들은 불가피하 게 다른 나라들의 과잉 저축과 과잉 생산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 최대 소비 시장과 최대 자본 시장을 점진적으로 폐쇄하는 등 세계 무역에서 손을 떼게 되면 처음에는 나머지 국가들에게 상당한 비용이 부과되고, 결국에는 미국 자체에 상당한 비용이 부과될 것이 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새로운 규칙 에 합의하지 않고 이제껏 해오던 역할에서 물러난다면, 각국이 조정의 부담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면서 세계 무역은 불안정해지고 점점 더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평화적 세계화라는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시기 대신, 세계는 1600년대부터 20세기 전반까지의 무역을 특징짓던 무정부 상태 그리고 잠재적으로 폭력과 유사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틀림없이 비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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