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유하자면 트럼프는 꽉 막힌 변기이고 우리는 구식 변기의 배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미국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미셸 오바마조차도 반박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처해 있는, 혹은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가혹한 삶의 현실을 부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낙관적인 거짓말은 현실의 고통을 악화시킨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문제의 해결책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는 리얼리티 TV쇼 <판사 주디>의 유행어인 “내 다리에 오줌을 싸고는 비가 내리는 거라고 우기지 말라”는 말로 명쾌하게 요약할 수 있다.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 대략 6,300만 명의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오줌을 맞아 왔다. 이들은 끔찍한 우산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클린턴이 일반 유권자들의 표를 더 많이 얻었다고해도, 트럼프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무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트럼프는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이 거짓말쟁이의 말에 혹해 투표소로 향했다. 그의 사상이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마르 크스주의자들에게는 '민중은 멍청하다' 또는 '민중은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과 별다를게 없었다.
- 클린턴이 표를 늘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 사는 게 경제 적으로 참 엿 같다고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민주당 대부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민주당의 거물인 척 슈머Chuck Schumer는 서민들의 표를 애써 잡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거듭 표명하기까지 했다. 2016년 서민층에서 클린턴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우려되지 않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에서 블루칼라 민주당 표 하나를 잃을 때마다 필라델피아 교외에서 온건 공화당 표 둘을 얻을 것이다.”
- 소득이 감소하면 민중은 누구든 소득 증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두 대선 후보 중 이를 약속한 유일한 후보가 바로 트럼프였다. 그래서 수많은 민중들이 트럼프를 찍었다. 소득이 감소할 때 왜 민중이 언제나 진보화되지 않는지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척 슈머는 히틀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단 한 편도 본 적 없는 유일한 미국인임이 분명하다.
- 버니 샌더스를 제외하면 트럼프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계급이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발언한 유일한 미국 대선 후보다.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절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트럼프는 보통 파시스트로 불리는데, 이 명칭이 그의 광적인 신국가주의 neo-nationalism에 대한 정확한 설명 같지는 않지만, 일단 그를 파시스트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게 부르는 게 기분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파시즘의 부상은 실패한 혁명에 대한 목격자를 낳는다라는 딱 좋은 문구를 인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구는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발터 벤야민의 말을 옮긴 것이다. 유대인이었던 벤야민은 히틀러의 선거 유세 중에 조국의 파시즘을 피해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사람이다. 이 친구야말로 파시즘을 직접 겪었다. 그는 독일 국민들이 1933년에 겪었던 것과 같은,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대규모 경제 침체 시기에 대중이 보이는 두 가지 반응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 두 가지 반응이란 경제가 침체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고자 혁명을 꾀하거나, 어떤 시끄러운 얼간이가 등장해서 '이건 다 유대인/무슬림/멕시코인/동성애자/공산주의자/건방진 여성들 때문’이라고 큰 소리로 비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 역사적 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특정한 경제적 조건이 특정한 정치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빌어먹을, 마르크스가 옳았다. 마르크스식 역사 해석에 따르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 말이 된다. 관념론적 관점(사상이 역사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해석)에 따르면 트럼프의 부상은 비정상적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보기에 이는 욕지기가 나오지만 논리적이다. 관념론자들은 계 속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응수한다. 지금까지 이 말을 아껴 뒀는데, 이제 카를 아저씨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할 때가 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 도널드 트럼프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교리 중 하나, 즉 물질적 조건의 변화가 정치적 견해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개념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트럼프 선거 연설을 들어보면 매우 미약하기는 하지만 트럼프가 버니 샌더스의 대형 금융기관 반대 정서에 공명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하에서 지내는 젊은이들의 삶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과시했다. 이것이 현대판 파시스트의 모습이다. 그들은 누구나 삶에서 물질적 조건이 가장 우선하며, 이상은 그다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마르크스주의자처럼 이야기한다. 악마의 똥구멍을 핥는 용도로나 쓰는 게 나을 혓바닥으로 인종차별주의를 조장하지 않을 때면 말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다 해도 별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 많은 이들이 처해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개선해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업과 불완전고용은 계속 증가할 것이고,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의 고위 경영진 출신들이 백악관 안팎 모두에서 여전히 모든 걸 좌지우지할 것이다. 트럼프에게서 우리는 최악의 정치적 조합, 즉 극도로 불공정한 경제체제를 감추는 극도로 편협한 연설을 본다. 한편 클린턴에게서는 극도로 불공정한 경제체제를 감추는 관대한 연설을 본다. 자유주의자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옳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들은 클린턴 버전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 경우 ‘음, 이 상황은 흑인 동시에 백인데’라고 평할 것이다.
- 노동자로서 우리 물질적 삶의 조직 방식, 예컨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고, 노동을 통해 얼마나 즐거움을 얻는지가 우리의 삶과 그에 대한 사고방식을 조직한다. 즉 물질적 조건이 노동자의 사상과 삶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이는 자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자는 물질적 부의 추 구를 가장 우선적인 동기로 삼고 움직인다. 결코 그 반대 방향으로는 작용하지 않는다. 만약 어느 자본주의자가 오로지 노동자들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는 순수한 도덕적 당위를 따르는 방식으로 사업하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는 곧 자본주의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 이전에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베이조스의 도덕률은 부에 의해 형성된다. 포드가 비즈니스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 행세를 그만 두기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이조스의 도덕률 역시 180도 태세를 전환했다. 베이조스는 부자 상위 8위 안에 들어가기 전, 오바마케어를 비롯해 정부가 개입하는 정책에는 모조리 반대하는 (대부분은 부자의 부와 빈자의 죽음에 대한 정부 개입에 반대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싱크탱크인 리즌 재단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던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전 세계 부자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를 축적하자, 베이조스는 한 신문사를 매입했다. 우리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흑과 백에 대한 이 억만장자의 새로운 도덕률을 볼 수 있다. 이제는 오바마가 그의 영웅이 되었다. 이 신문은 예비선거 기간 중에 버니 샌더 스를 심하게 비꼬는 등 미국 대선이 끝날 때까지 힐러리 클린턴을 아낌없이 지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도널드 트 럼프의 신임을 떨어뜨리기 위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인들”이 “선거를 해킹했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베이조스가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 들이 클린턴의 전통적 자본주의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이 해킹 주장에 주목한다. 과거 '표현의 자유'를 주 창하던 자유주의자였던 베이조스는 위키리크스'를 공공연히 비난했으며, 그의 신문인 워싱턴포스트는 클린턴이 월스트리트를 대상으로 했던 연설을 출판함으로써 위키리크스의 대표인 줄리언 어산지, 즉 러시아에서 흘린 정보를 기반으로 선거를 해킹했다고 의심되는 인물에 대한 인신공격성 보도들을 계속 쏟아냈다. 덧붙여 말하자면 베이조스 재단은 클린턴 재단에 기부금을 내왔고 클린턴이 수장인 국무부는 아마존에 직접 자금을 지원했다. 자본주의자의 도덕률은 이처럼 전적으로 이윤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우리의 도덕률이 되는 것이다.이 비도덕적인 이야기의 교훈은, 자본주의자의 도덕률을 알고 싶다면 그의 돈을 들여다보면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이를 지탱하는 도덕률에 대해 알고 싶다면 마르크스를 읽어라.
- 모든 단단한 것은 공기 속에 녹아 사라지고, 모든 신성한 것은 더럽혀지고, 인간은 마침내 맨 정신으로 자신의 삶의 실제 조건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마주해야만 한다. (공산당선언)
- KKK보다 온건주의자가 더 두려운 이유 : 마틴 루서 킹이 1963년 수감 중에 동료 흑인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한중 내가 아주 좋아하는 글이 있다.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좌절에 대해 묘사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백인 온건주의자들에게 심히 실망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자유를 위한 우리 흑인들의 발걸음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 가 아니라 정의보다는 '질서'에 헌신하는 백인 온건주의자들이라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이들은 항상 이야기하죠. "당신들이 추구하는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당신들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한 시간표를 지정할 수 있다는 온정주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 다. 그들은 시간에 대한 신화적인 믿음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우리 흑인들에게 '더 유리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 합니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얄팍한 이해가 악의를 가진 이 들의 절대적 오해보다 더 절망적입니다. 미적지근한 수용은 노골적인 거부보다 훨씬 당혹스럽습니다."
이 당시 킹이 교도소에서 매우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며 자신의 불가분적 기본권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저열한 KKK 스타일의 온갖 잔혹 행위를 당하는 중에도 그는 꼭 필요한 말을 찾아서 전달할 수 있었다. 킹은 가장 파괴적인 권력은 쉽게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우리 인류의 슬픔을 개인의 욕심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우리가 직장 에서, 또는 정부에서 주는 소득에 대해 (사회보장급여 수급자들은 소외 의 무기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느껴 봤을 소외감을 어떤 나쁜 인간이나 그들의 성향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또한 집필 생활 말년에 이른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 우리 스스로를 위한 희망을 생산양식에 짜넣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희망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희망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르크스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것을 생산양식에 짜넣어야만 한다.
- 현대 의학의 공식적 창시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우울증을 외부적 요인이 있는 우울감과 내부에서 유래하는 우울감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이 중요한 구분이 상실되었다. 지금 시대의 정신의학은 이 오래된 구분 방식을 폐기해 버렸다. 어쩌면 이 사실이 우울해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 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혁신의 종말, 이 경우에는 정신의학 내 혁신의 종말을 의미한다. 우울 증 환자 중 일부에게만 효과가 있는 의약품을 더 많이 팔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우울 질환을 가진 모든 이들을 동일하게 분류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울 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되고 연구된다.
-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하는 권위 있는 지침서 《DSM-5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전 편집자이자 지금은 이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는 앨런 프랜시스 박사를 비롯하여 많은 저명한 정신의학자들이 오늘날의 이런 접근법이 연구와 치료를 모두 저해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삶에 혹독하게 당한 결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인을 전혀 파악할 수 없음에도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을 의학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증상 자체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심각한 소외감에 시달리는 한 노동자가 의사를 찾아가 진찰받는 다고 가정해 보자. 의사는 이 노동자가 여유로운 삶을 만끽해 온 다른 환자와 같은 증세를 보인다고 진단하고 다른 이들과 동일한 치료법을 제안할 것이다. 현기증 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 “혹시 방금 회전목마를 타고 왔다거나 하지는 않나요?"라고 물어 보지도 않고 당장 뇌졸중으로 진단하는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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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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