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본인은 자신의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승리는 정치경제사상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하고 대척적인 두 개의 접근법 사이에 그를 위치시켰다. 하나는 뷰캐넌이 연구를 시 작했을 때 정점에 올랐던 접근법으로, 대표적인 경제학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다. 케인스는 현대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가 번성하려면 한 나라의 경제에서 발생된 이득을 국민 모두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경제가 규율되는 방식에 국민 모두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케인스에 따르면, 시장 시스템에는 매우 많은 장점이 있지만 내재적인 오류도 적지 않으며 이것을 고칠 역량이 있는 것은 정부뿐이었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어서 케인스의 이론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있 는 입장에 있지 않다. 케인스의 견해에 대한 상세한 논쟁은 다른 이들에 게 맡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학자로서 나는 케인스의 사고방식이 대공황 시기에 대중에게 선출된 공직자들에 의해 정책으로 실행되었고, 그 럼으로써 재앙에 직면한 미국의 자본주의를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력한 두 대안이었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서 지켜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나는 전후에도 경제적·사회적 질서가 케 인스주의에 기초해 구성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집단으로서 힘을 모아 행동하고 정부가 조세를 거둬 공동의 목적에 필요한 일들을 진행함으로 써 모든 이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에 없이 광범위한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 케인스주의와 두드러지게 대척점에 위치한 접근법은 뷰캐넌이 창시한 버지니아 정치경제학파의 접근법이다. 이에 따르면, 공공재 운운하는 그 모든 이야기는 “탈취자”가 “창출자를 착취하는 것을 가리는 데 쓰는 연 막에 불과하다. 탈취자들은 더 나은 삶을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 라 “투표를 통해서 얻기 위해” 정치적인 결탁과 연합을 이용한다. 방법에 서는 이견이 있었어도 밀턴 프리드먼과 F. A. 하이에크 모두 시민의 압력으로 정부 당국자들이 옳은 일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 었던 데 반해, 뷰캐넌은 정부가 행위자들의 부정직함 때문에 실패하게 된 다고 보았다. 활동가든 유권자든 공직자든, '공익'이니 '공공의 이해'니 하는 것을 운운할 때는 진정으로 공공의 이해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일 뿐이기 때문이다.30 뷰캐넌의 냉소주의는 너무나 독성이 강해서 이것이 널리 믿어지면 염산처럼 시민적 삶을 부식시켜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뷰캐넌은 1970년대 이후로 한술 더 떠 국민과 국민의 대표자들이 공적인 권력을 민주사회에 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영구히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민간의 재산을 갈취해가려는 정부의 손에 영구적으로 수갑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 오늘날 미국 정치 시스템을 뒤엎으려 하는 사람들은 두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군의 사상의 후예다.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주의 에 대한 부유한 지배층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이 사상이 처음 일관된 형태로 개진된 것은 1820년대 말과 1830년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존 C. 칼훈John C. Calhoun에 의해서였다. 지배계급의 전략가로 서 너무나 명민하고 수완이 좋아서,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는 칼훈을 “지배계급의 마르크스”라고 불렀다. 역설적인 위트가 담긴 호프스태터의 명명은 칼훈의 전략이 가진 혁명적 속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칼훈의 전략은, 어떻게 하면 당대의 가장 부유한 1%(사실 1%도안 되었을 것이다)가 입헌공화제 국가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것인가와 관련이 있었다. 부통령을 지냈고 그 전략을 세우던 당시에 상원 의원이었던 칼훈은 미국 최초의 조세저항 운동 전략가였고, 아마도 극단 주의자 중에서 미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기원이 아니다. 제임스 M. 뷰캐넌의 몇몇 학문적 후 예도 뷰캐넌의 정치경제학파가 존 C. 칼훈의 사상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찰스 코크가 돈을 대고 진두지휘한 급진우파 공작의 핵심인물인 조지 메이슨 대학의 경제학자 알렉산더 타바록Alexander Tabarrok과 타일러 코언은 남북전쟁 이전 시기의 상원의원이었던 칼훈이 “현대 공공선택이론의 전조”라고 말했다. 공공선택이론은 뷰캐넌 이 창시한 정치경제학파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 타바록과 코언에 따 르면, 뷰캐넌과 칼훈 모두 “민주주의가 자유를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을 몹시 우려했고 “세금 생산자와 세금 소비자 사이에 일종의 계급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또 둘 다 정치를 착취와 강압의 영역으로, 경제를 자 유로운 교환의 영역으로 보았고 이미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수많은 재산권 보호 조항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소수자(수적으로 소수인 부유층]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창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했다. 칼훈과 뷰캐넌 모두 소수의 경제적 지배계층을 다수 시민의 착취로부터 영구히 보호하 기 위한 헌법체제를 고안했고 (타바록과 코언이 정확하게 짚었듯이) “그것과 동일한 목적과 효과를 갖는 소수자(부유층의 거부권을 옹호했다. 또한 칼훈과 뷰캐넌 모두 민주사회에서 유권자들이 집합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가장 부유한 계층도 동의할 수 있을 법한 것들로만 제한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 실제로 오늘날 부유한 소수가 밀어붙이고 있는 급진우파 운동은 칼 훈 시절부터 죽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다. 1865년 4월 (남군을 이끄는 로버트 E. 리 Robert E. Lee 장군의 북버지니아 군대가 애퍼매톡스에서 패배한 이후, 칼훈의 개념은 한 세기 가까이 심연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남부의 식자층 엘리트 중 일부는 언제나 칼훈의 개 념이 갖는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주들 사이의 전쟁War Between the States"(남부에서는 남북전쟁을 이렇게 불렀다)에 대해 신화화된 버전의 이야기 를 소중히 여겼고, 남부가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지키 기 위해서 전쟁에 나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칼훈 및 이후의 추종자들이 생각한 남부는 실제의 남부가 아니었다. 실제의 남부에는 백인뿐 아니라 흑인 인구도 존재하고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과 중산계층 백인도 존재했 으며, 이들은 이제까지 민주사회에서 조세를 통해 제공된 공공 서비스로 혜택을 보았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미국에서, 역사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다는 이 지역에서, 부유한 백인 지배층은 극단적인 부와 불평등이 야기하는 위험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반민주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통치 전 략을 사용했다. 남부의 자산 소유자들은 인종차별에 기반한, 그리고 고 도로 착취적인 이 지역 특유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지키겠노라 결연하게 결심했고, 따라서 이들은 민주주의를 억누르기 위한 계획을 고안하는 데서 최전선에 나섰다. 칼훈을 비롯한 대농장주들이 성립에 크게 기여한 그 정치경제 체제는, 처음에는 속박 노예에 기초한 체제였고 나중에는 투 표권이 박탈된 저임금 노동력, 인종분리제도, 그리고 매우 빈약한 공공 영역에 기초한 체제였다. 미국에서 독립선언문에 대한 표면적인 지지와 경제적·정치적 권력의 현실이 이렇게 극명히 벌어진 곳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불의를 막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연방 정부뿐이었다. 물론, 이는 널리 합의된 미국의 이상이 침해되는 것에 맞서 연방 정부가 나서게 할 만큼 강한 대중의 압력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따 .라서 남부의 백인 지배층은 전국적인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자신의 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 어느 곳의 그 누구보다도 전략적이고 의식적으로 고민했다.
- 1950년대 무렵이면 소수 지배층이 다수 대중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할 정교한 규칙들을 만들어내는 일의 실험실은 버지니아 주가 담당하고 있 었다. 올드 도미니언Old Dominion'(버지니아 주의 속칭 - 옮긴이)은 정치적 리더십에서 존중받을 만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첫 다섯 대통령 중 네명을 배출했고, 남부 연맹의 수도가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상원의원 해 리 F. 버드 시니어 Harry F. Byrd Sr의 고향이었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와 뉴딜의 주적수인 버드는, 20세기 중반의 버지니아 주에서 마치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버 드의 동료들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맞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칼훈의 정부 이론을 재발굴하고 있던 바로 그때, 경제학 박사 제임스 뷰 캐넌이 버지니아 주를 대표하는 대학에 경제학과장으로 부임했다.
- 예속의 길은 경종을 울리기 위한 책이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은 그보다 앞선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적 경향의 필연적인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주 장했다.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특징은 중앙 정부에 의존한 다는 점이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추종한 사람들이 개인 의 자립과 자기 의존이라는 개념에서 결별한 것이 이 막대한 질병을 일으 킨 병균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치즘을 혐오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이 실현되면 곧바로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던 압제로 이어질 또 다른 이상을 위해 맹렬히 나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는 이유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스스로에 게 기망되어, 실상은 완전히 대척적인 두 개념인 "사회주의와 자유가 결 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이에크는 정부가 커지면 곧 모든 자유를 갉아먹고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에 의존하는 것이 예속의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고전적인 자유주 의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이 길을 “버려진 길”이라고 불렀다. 멸망의 운명에서 스스로를 구하려면 서구 세계는 개인의 자유, 특히 경 제적 자유를 사람들이 다시 존중하게 해야 했다.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이 단지 경제 발전에 효과적인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자유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는 가격이라는 신호는 “자생져 인 질서를 통해서 수백만 수천만 개인들이 정부의 강압 없이 자신의 열 망과 행동을 조절하게 하는, 현재까지 인류가 알아온 유일한 방법이었다. "경제적 자유가 없다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도 유지될 수 없 었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사회주의는 노예제를 의미할 뿐 이었다" 당연하게도 예속의 길은 학계의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우파 기업인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이들은 오래 유지되어온 자산가 계급의 특권이 상실된 것에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노조와 협상을 하고 새로운 규제 당국의 기준에 맞추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도입된 일련의 개혁은 부당하고 비합법적인 “혁명을 의미했다. 뉴딜에 맞서기 위해 설립된 미국자유연맹American Liberty League 의 설립자 중 한 명은 뉴딜을 “사회주의 원칙을 일컫는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 책에서 하이에크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언급했지만 그 선 을 어디에,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동료 경제학자이자 학문적인 호적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가이 책에 대해 지적한 핵심적인 취약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이면 하이에크는 도금시대의 자유방임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또 하이에크를 비롯해 스위스의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수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에 발끈했다. 예속의 에서 하이 에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단지 기존의 것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코먼웰스 클럽에서 한 유명한 연설에서 '경제적 입헌질서economic constitutional order'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조직적·집합적 노력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미국인들에게 다시 설명해주기 위해서였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이 “경 제적 과두제”를 향해 가던 구조적인 변화의 정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입헌적인 개혁으로 경제 안정성을 보장 해 대공황과 같은 "아나키 상태”를 사전에 막지 못한다면 거대 기업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스스로와 사회 전체를 파괴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뷰캐넌은, 대의제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다수의 유권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입헌적인 개혁으로 경제적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하지 않는다면 대의제는 자산가 계층(의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자본주의를 파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 64년 남부경제학회 회장으로 선출된 뷰캐넌은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취임연설 기회를 '경제학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처방을 설파하는 데 사 용했다. 경제학자들은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이른바 배분 allocation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불평등이 나쁜 것이 라는 개념 자체가 불평등을 고치고자 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이끌게 되 고, 이는 경제학이 “사회공학이라는 (응용) 수학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었 다. 뷰캐넌은 경제학자들이 모든 연구에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급진적으 로 적용해 경제에서나 정치에서나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가정에서 분석을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와 동시에, 뷰캐넌은 시장은 선하고 정치는 악하다고 보았다. 경제 영역에서는 개인 이 자발적으로 교환에 참여하지만 정치 영역은 정부의 권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가 “강압적인, 혹은 잠재적으로 강압적인 관계”라는 것이었다. 뷰캐넌은 그의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방법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배분allocation과 분배distribution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자원 “배분”의 문제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생산에서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로, “분배의 문제는 생산된 것을 어떻게 형평성 있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 연설문에서 뷰캐넌이 말한 것은 “자원 배분의 문제”이며, 뷰캐넌은 이렇게 배분의 “문제”로 경제학을 접근하면 “최적화 혹은 "극대화"의 해법을 고르는 “기술적인” 차원으로만 범위가 협소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뷰캐넌은 이렇게 최적의 것을 “선택”하는 데 집중하는 접근법보다 인간들 사이의 자발적인 “교환관계에 천착하는 접근법을 취하자고 제안하고 있으며, 이는 사회계약을 통한 집합적 규칙의 구성도 포함한다. 이 논의는 “재분배”나 “불평등 문제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입헌경제학의 개념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인다. 옮긴이)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시장'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지적인 추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많은 노력이 필 요했다(실제 시장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 내내 사람들은 시 장을 만들어왔고, 정부는 그 시장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왔으며, 거기에서 늘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이득을 얻었다. 역사에서, 또 일상에서 날마다 보게 되는 것들 모두가, 막대하게 부가 불평등하면 사람 들이 시장에서 상호 만족스러운 해법에 도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의 실상을 알려면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의 소설만 읽어봐도 충분했다. 제약 없는 경제권력은 일부 사 람들이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뷰캐넌이 하고 있었던 일은 경제학의 과학적 권위를 지렛대 삼아 사회과학, 인문학, 법학 분야에서 수세대의 학자들이 드러내온 사실, 즉 19세기의 순수한 시장이라는 개념은 허구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일이었 다. 과거에 이 허구는 떠오르는 기업 지배층이 법과 규칙을 자기에게 유리 하게 기울이고 막대한 부와 그 덕분에 갖게 된 권력을 통해 다른 이들 위 에 군림하면서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 터 현대경제학의 창시자들은 사회적 권력이 시장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이와 다르게 시장의 자생성을 주장하던 학자들(가령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을 논박했다.
- 뷰캐넌과 데블리토글로의 처방은 마치 오늘날 우파가 대학을 급진적 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조치들의 청사진처럼 보인다. 주립대학 을 경영진의 엄격한 관리하에 놓고, 교수진의 의견은 거의 반영하지 않으며, 납세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해서, 저항적인 학생들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 훈련소로 만드는 것이다. 뷰캐넌과 데블리 토글로의 주장은, 주립대학을 학생들이 거의 공짜로 다닐 수 있게 해주 는 지원을 멈추고 전체 비용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비를 책 정하면, 학생들이 대학 개혁이니 사회 개혁이니 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 고 공부에만 관심을 쏟을 경제적 인센티브가 생기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데 이들의 논의가 담고 있는 주장이 하나 더 있었다. 사실상 대학 교육을 훨씬 더 적은 수의 학생만 받게 하자는 것이다.
- 뷰캐넌은 뮌헨에서 열리는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모임에서 교육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 다. 학자, 기업인, 후원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뷰캐넌은, 부가 널리 퍼진 현대사회는 이제 그 부를 쌓는데 기여는 하지 않았으면서 그것을 뽑아 먹 으려고만 하는 “기생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기꺼이 허용하는 지경이 되 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학생 계층이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간단한 해법이 있다고 말했다. “기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닫는 것”이었다. 1970 년대가 지나기 전에, 뷰캐넌은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보조를 받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이와 동일한 주장을 펴게 된다.
- 그의 계획에서 또 한 가지 핵심적인 부분은 10명 정도의 설립자 그룹Founders Group'을 만들고 다시 이들의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200명에게 접근할 수 있는 블루 북Blue Book'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작 업의 핵심은 학자들뿐 아니라 정치인과 잠재적 후원자들도 참석하는 펠 로우 소사이어티Society of Fellows'라는 모임을 꾸리는 것이었다(그가 개인 용도로 적어놓은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격식 있고 공식적으로 들리는 준학술용어를 사용하되 모임에 들어올 사람을 뽑는 데 학문적인 기준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인센티브 구조를 연구하는 학자답게, 뷰캐넌은 “개인의 자유를 촉 진하기 위한 연구에 학자들이 관심을 갖도록 노벨상에 맞먹는 큰 상금을 주는 상도 만들 계획이었다. 당시 노벨 경제학상은 생긴 지 한두 해밖에 안 된 상이었고,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사람들 중에는 받은 사람이 없었다(그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쓰여 있다. “여기에 닉슨이 후원하게 할 것.” 그 외에 “존중받을 만하다는 평판을 어떻게 만들고 유지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가식이 필요할 것인가?”, “내부 비판을 어느 정도나 허용할 것인가?” 등과 같은 전략적인 문제들도 적혀 있다). 이 일을 진전시키는 데는 비밀 유지가 꼭 필요 했다. 외부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어야 했다. 리치몬드 연설을 하고서 얼마 후, 뷰캐넌의 팀은 향후 40년간, 아니 그 보다 더 오래 거대한 전략을 진전시킬 인맥을 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레이건 주지사의 내부 인사들도 초대해 LA에서 더 큰 모임을 조직했다. 뷰캐넌의 학문적 동지들과 스카이프의 리처드 래리 외에, 레이건 주지사 의 참모 네 명이 참석했는데, 레이건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인 에드윈 미즈 3 세도 있었다.
- 찰스 코크는 엔지니어와 기업인으로서는 똑똑했지만 사회성 면에서는 그런 편이 못 되었다. 결혼도 마흔 하나가 되어서야 했다. 사업도 순조롭 게 번창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자 하는 “강박”(코크 본인의 표 현이다)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쓸 데도 없어서, 그는 "번영과 사회 진보로 이 끌 원칙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책과 논문을 읽는 데 점점 더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그의 공부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치우쳐 있었다. 번영과 사회 진보의 토대는 제약 없는 자본주의여야 한다고 믿은 사상가들이 그 의 공부 대상이었고, 그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에게 영 향을 많이 끼친 책은 1957년에 F. A. 하퍼F.A. Harper가 출간한 자유시장 찬가 ‘임금은 왜 오르는가’Why Wages Rise)였다.'발디 Baldy'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하퍼는 급진우파 사상가 중 그리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의 창립멤버였고 찰스가 매우 소중히 여기던 스승이었다. 전공은 농업경제학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떻게 임금에, 그리고 “통치받는 것의 비용'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그의 결론은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하퍼는 노조를 “은행 강도에 비유했다. 노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며 단기적인 이익을 얻는 반면, 나머 지 노동 대중은 피해를 보는 상황이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왜곡이 없는 진정한 시장이라면 임금은 오로지 생산성이 증가할 때만 올라야 한 다고 주장했다. 하퍼는 노조의 요구로 노동계약에 의료보험이나 연금 같은 부가급부가 포함되면서 생겨난 작은 기업 복지국가에도 반대했다. “작은 복지국가가 큰 복지국가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악적”이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것이 “공산주의-사회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그런 부가급부가 “노동자들을 현재의 일자리에 고착되게 만들어서” 일자리 사이에 노동력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음으로써 “우리의 진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개개인 각자가 자신의 보수에 대한 협상과 자신의 지출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필요한 서비스는 정치 시스템이 공급해주기를 기대할 게 아니라 시장 참여자로서 각자가 시장에서 구매해야 했다.
- 코크를 그 스스로 선택한 평생의 사명에 나서게 만든 요인이 또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정도로 사업에서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자유지상주의 운동의 지도자 가 되고 이 운동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갈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는 증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공이 곧 자신의 지적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적합성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일찍이 루트비히 폰 미제스로의 저 술을 읽으면서, 코크는 기업인들이 인류 역사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칭송을 받지 못한 천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 청교도인들이 현 세에서의 성공을 신에게 선택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겼듯이, 성공 한 기업인들도 그와 비슷한 의미에서 존중을 받아야 마땅했다.
- 본인의 성취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그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선의 행동이나 동정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노동자는 물론이고 그와 생각이 다른 기업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장기업 경영자들, 특히 현재 공화당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온건 성향 의 경영자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커다란 고층건물에 화려한 사무실을 갖고 있다고 마치 자기가 코크와 동급인 줄 알지만, 잘못 생각하는 것이었 다. 코크가 보기에 이들은 주주들에게 기대고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알 지 못하는 '고용된 경영인'일 뿐이었다. 코크는 자신 같은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중서부, 서부, 남부 출신에 자신의 사업을 스스로 일군 사람들, 그리고 회사를 상장하지 않고 사기업으로 유지하면서 무엇에도 전혀 타협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말이다. 코크는 실패한 기업인은 더 경멸했다. 그는 기업의 실패는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증거이며, 구매자를 잘못 가늠했거나 경쟁자 대비 자신의 역량을 잘못 가능한 기업을 시장이 잘 솎아냈다는 증거라고 보았 다. 코크는 저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창조적 파괴”라고 부른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건강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고, 공감이나 동정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미래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라”며, “창조적 파괴를 추동하기 위해” “원칙”과 “절박성”을 가지
고 나서라고 촉구했다.25 고객에게 서비스를 잘 제공할 능력이 없는 기업인은 “수위나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코크의 세 계관에서, 노동자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본인의 실패 탓에 임노동 이라는 예속의 형태를 선고받은 사람을 의미했다.
- 로스바드는 카토 연구소의 목표와 행동계획을 담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Toward a Strategy for Libertarian Social Change' 이라는 글을 썼는데(책 한 권 분량이나 되는 긴 글이었다) 레닌의 저술을 아주 많이 인용하고 있었고 이전의 혁명들과 권위주의 정권들에 대한 내용도 너무 많이 담고 있어서, 내부자들을 넘어서서 회람시키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해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로스바드가 이 글에서 제시한 방법론에 따르면, 레닌이 볼셰비키를 이끌면서 보여주었듯이 간부단이 핵심역할을 해야 했다. 이 들은 이 일에만 전념하면서 운동의 보병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소 수정예의 전위팀이 될 것이었다. 그러면 외부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저변을 넓히면서도 운동의 순수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을 터였다.
- 오늘날 미국을 대대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이들의 은밀한 운동이 끼친 영향을 파악하려면, 이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로스바드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과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깨달 았듯이, 우리는 조직과 지속적인 내부자 교육 및 강화 프로그램이 없는 군단은 더 강한 연합세력에 흡수되거나 원칙을 저버리게 될 수밖에 없다. 는 것을 깨달았다.” 흡수되거나 넘어가버릴 우려 없이 현재의 더 강한 세력하고도 단단하고 유익한 연대를 할 수 있으려면 교육과 훈련이 결정 적으로 중요했다. 2008년 이후에 공화당 주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이 모델이 성공했 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전통 있는 주요 정당인 공화당의 주류 지 도자들은 명백하게 코크의 군단보다 더 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 지만, 영향력 면에서 결국 당을 접수한 쪽은 그들이 아니라 원칙과 규율로 무장한 코크의 군단이었다.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다. 뷰캐넌의 접근방식이 가진 사악한 천재성은, '민중의 자기 통치'라는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민주주의를 꽁꽁 속박한다는 목적을 대개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 나쳐버렸을 아주 세부적인 규칙들을 가지고 달성했다는 데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도록 길게 이어지는 세세한 사항들을 통해 사람들이 인식하
지 못하는 사이에 점진적으로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뷰캐넌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부사항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에 그리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뷰캐넌의 조언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다 른 사람들을 고용해서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세부사항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헌법이 담고 있는 세세하고 복잡한 변화가 종합적으로 일으킨 순영향은, 대통령에게 전에 없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의회를 대폭 약화시키고, 선출직이 아닌 장교들이 선출직인 의원들에게 제동을 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또 교활한 새 선거제도는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응결된 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파 소수정당이 영구적으로 의회에서 과다. 대표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이 선거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쓰인 적이 없으며, 분명히 뷰캐넌의 조언에 따라 생겨난 제도일 것이다). 또한 지배층의 통 제를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새 헌법은 노조 지도자들이 정당에 가입하 는 것을 금지했고 “노조가 구체적인 목적과 상관없는 활동에 개입하는 것”도 금지했다. “구체적인 목적”이란 해당 작업장의 임금과 노동시간만 을 의미한다. 또 새 헌법은 “계급 간 분쟁을 조장하거나 “가족제도를 공 격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금지했다. "반가족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마르크스주의자” 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항소나 기타 이의제기 절차를 밟을 기회 없이 추방당할 수 있었다.
- 최종안이 나오기 전에 피노체트는 손수 개헌안을 검토하고 100군데도 넘는 수정을 가했다. 개헌안은 대중에게 공개된 지 한 달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부쳐지게 되어 있었는데, 투표에서 사람들은 개헌안 전체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었다. 또한 투표는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시행될 것이었다. 모든 정당은 불법화되었고,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선거 인명부도 존재하지 않았으며(피노체트가 불태워버렸다), 외국인 참관인이 개표를 참관하거나 득표 숫자를 확인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일부 온건과 법조인들과 시민 지도자들이 별도의 민주 헌법안을 마련했지만 정권은 그 것의 공개를 막았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를 진행해야 하는 시장들은 피노 체트 덕분에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었다. 선거 규정은 '반대' 표를 조직하려는 선거운동을 금지했다. 전 기독민 주당 대통령 에두아르도 프레이의 연설에 사람들이 오도록 독려하거나 리플렛을 뿌리는 것도 선거법 위반이었는데, 이런 일로 60명가량이 체포 되었다.
- 영구적인 자물쇠와 빗장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뷰캐넌이 칠레의 동료들에게 그들의 통치를 보장하고, 설령 독재자가 권좌에서 내려오더라도 그들의 지배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촉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물쇠와 빗장은 오늘날까지도 효력을 발휘해 시민들에게서 정치적 참여를 통해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갉아먹고 있다. 투표로 피노체트를 몰아낸 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재 자의 경제 모델이 견고하게 남아 있다는 것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아 예 정치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특히 다른 시스템을 알지 못하는 젊은 이들이 더욱 그렇다. 몇몇 법학자들은 기업권력에 너무나 크게 좌우되고, 근본적인 변화는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다수의 이해관계에 너무나 적대적이었던 시스템에 대한 혐오가 퍼지면서 대의제 정부 자체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한편, 칠레에 자문을 하고 돌아온 뷰캐넌은 미국에서도 그것과 비슷 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기를 원하게 되었고 그것의 효과에 대해 확신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 고질병인 점진주의와 실용주의"를 버리기 로 했다. 이제는 “사회적·경제적 제도의 전체 구조를 바꾸어야 할 때였다. 문제는,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 과업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였다.
- 자유지상주의적 우파에게 사회보장제도 민영화는 가장 인기 있고 가
장 성공적이던 연방 정부 프로그램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거둔다.
는 것 외에도 매우 영리한 삼중의 승리를 의미했다. 첫째, 사회보장제도 민영화는 정부와 시민들의 유대를 끊고 사람들이 정부가 나의 삶에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는 존재라고 믿는 습관을 없앨 것이었다. 둘째, 공동의 문제에 대해 정부에 해법을 구하는 집단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 집합적 인 조직화의 호소력을 떨어뜨릴 것이었다. 셋째, (앞의 두 가지보다 결코 중 요성이 덜하지 않은데) 자본가의 손에 아주 많은 돈이 흘러들어가게 해 그 들이 부유해지게 함으로써, 이들이 더 많은 변화를 위한 로비에, 또 변화 를 이끄는 단체 · 재단 · 싱크탱크 등에 후원을 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 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우파의 정책 기획 및 옹호 네트워크가 더 강력해진다면 더 힘있는 파트너들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 고, 자유지상주의 혁명을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미국의 권력관계를 변화
- 가차 없고 영민한 프로파간다 전문가였던 나치의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는 이렇게 말했다. “엄청난 거짓말도 충분히 반복해서 하면 사람들은 곧 그것을 믿게 된다.” 오늘날 코크가 돈을 대는 급진우파가 하 는 엄청난 거짓말은 우리 사회가 생산자와 탈취자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생산자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는 탈취자에 대해 선악 이 분법적인 투쟁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티파티 집회에 가보면 “부랑자 계급”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들을 수 있다.11 부유한 후원자들이 돈을 댄 자유지상주의 저술에서도 이 말의 여러 변종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카토 연구소의 데이비드 보아즈David Boaz는 경제 행위자가 약탈자와 희생자로 나뉘어 있는 “기생경제에 대해 언급했다.12 또한 1인당 5만 달러 이상을 후원한 고액 후원자들 대상의 연회에서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 미트 롬니 가 유권자의 47%”는 “생산적인” 미국인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라고 라고 언급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조세제도를 통해 부유한 사람들을 등쳐 먹으 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이들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으면 서 집단으로 모여서 정부를 압박해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는, 그리고 온 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부를 창출한 소수층을 착취한다는 증거가 있는 가? 가장 부유한 계층을 정부가 불공정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 공중보건 면에서 이들 재산권 지상주의 세력이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의료 보조나 금연 상담 지원을 받게 하기보다 죽게 내버려두는 편을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 문제 면에서도 이들은 규제가 도입되어 경제적 자유가 침해되게 하기보다 전 지구적인 생태적·사회적 재앙이 오 게 내버려두는 편을 선호한다. 코크 사단은 일찍이 대중이 환경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보았다.
- 시민들은 미국인의 76%가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우려해야 한다고 기업들에 경고했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도”, 미국인들의 65%가 기업들이 오염을 막기 위한 조치를 스스로 취하 리라고 “믿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유권자의 79%는 현재의 환경 규 제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으로 나타났다”고도 경고했다.27 이 조사 결과에서 코크 사단이 취한 교훈은 자신들의 진짜 목표에 대해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지 메이슨 대학의 경제학과장 도널드 J. 부드로Donald J. Boudreaux는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겠 지만, 공공선택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문제를 고치려 드는 것은 되레 일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도 “그냥 내버려두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의 흑인 역사학자 존 호프 프랭클린John Hope Franklin 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믿음의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 믿음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종결되었을 때 우리가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제임스 뷰캐넌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 한 비판적인 학자가 현명하게 지적했듯이, 공공선택이론은 단순히 “묘사가 부정확한 것”(이 이론은 정치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끔찍하게 왜곡하고 있다)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 이론은 좋은 정부 정책, 그리고 공적인 삶에서의 윤리적 행동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공직자 의 정신적 규범에 대한 믿음을 은밀히 공격한다는 데서 더 큰 문제가 있다. 즉, 공공선택이론은 학술적인 설명력과 관련해서도 잘못된 이론이지 만, 사람들이나 의원들이 이 이론을 믿게 되면 사회에 매우 큰 악영향을 발휘하게 되리라는 데서도 문제 있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언이 맞았음을 계속해서 목격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은 1860년대, 1930년대, 1960년대에 못지않은 역사의 분 기점에 또다시 서 있다. 지금 어느 경로를 가느냐는 앞으로의 운명에 결 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부유한 소수의 자유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이것을 아예 국가의 통치 원칙 자체에 새겨 넣는 것 은, 껍데기만 대의제인 과두제에 동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칼훈과 뷰캐 년이 바로 이것을 촉구했고, 이제 코크의 네트워크가 이것을 한 판씩, 한 판씩 달성해가고 있다. 어느 면에서 이들의 은밀한 계획이 미국인들에게 제기하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20세기 중반의 버지니아 주를 조금 더 치장해놓은 것 같 은 세상에 살고 싶은가? 재산권을 지고의 가치로 상정한 나머지, 민주적 으로 선출된 정부가 시민의 필요에 맞게 그 외의 목적들을 추구하는 것 이 원천적으로 마비되어버리는 세상에 살고 싶은가? “정치세력으로서의 우리가 종말을 고한 세상에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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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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