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드소프 등의 연구에서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태도 (work orientation)를 크게 세 가지로 대별했는데, 첫째는 성 취 지향성 (bureaucratic orientation), 둘째는 연대적 지향성 (solidaristic orientation), 셋째는 도구적 지향성 (instrumental orientation)이다. 첫째는 노동자들이 기업 위계 등 일정한 질 서 속에서 성취를 통해 상층부로 상승, 진급하는 것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경우고, 둘째는 조직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과 정서적·감정적 유대감을 갖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경우다. 전자가 승진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경우라면, 후자 는 친밀한 인간관계 (신뢰, 충성)를 우선시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끝으로 도구적 지향성은 노동을 다른 무엇보다도 생활 수준 향상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다. 첫째와 둘째가 노동 안에서의 내재적 만족(intrinsic satisfaction)을 지향한다면 셋째는 노동 밖에서의 외재적 만족(extrinsic satisfaction)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 골드소프 등의 실증 연구는 1960년대 말 영국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에 대한 태도를 분석한 것으로, 당시 대부분의 응답자는 노동에 대해 '도구적' 입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즉 노동 자들은 노동으로부터 내재적 의미(자아실현, 도전감, 발전감, 유대감)를 찾기보다는 단지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한 보수와 고용에 주로 관심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위계질서의 하층부, 즉 하층 노동자집단으로 갈수록 도구적 지향성이 강 했다. 이 연구 결과는, 서양에서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 이래 근대적 노동관이 형성되면서 정립된, 자아실현의 장으로서의 노동관 또는 인간관계 형성의 장으로서의 노동관에 일정한변화가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으로는 임금과 복지에 의한 구심력이, 다른 편으로는 무의미한 노동에 의한 원심력이 동시에 작동한 것이다. 이제 1990년대 이후의 사정은 어떠한가? 미국 버클리 대 학교의 A, 혹실드 교수가 130명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조 사해 《뉴욕타임스매거진》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직장을 갖 고 있는 아버지 중 33퍼센트 이상, 어머니 중 20퍼센트 이상 이 자신을 '일중독' 이라 하면서도 근무시간이 줄어들기를 원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직장을 “가정사의 온갖 스 트레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Hochschild, 1997). 이러한 현상은 독일과 같은 유 럽이나 '일벌레' 로 이름난 일본,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일중독은 예외적 현상이나 일시적 현상을 넘어 대중 현상' 이 되어가고 있다(Heide, 2002).
- 사실 우리의 현실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가정의 이 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nest)' 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 장(bus-stop) 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 동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이 되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과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려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 록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이 있다. 가 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는 일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이 우리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강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 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필요에 따라 일을 하기보다는 일의 필요에 우리가 끌려 다니며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와중에 굳이 우리가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 은 일이 우리 내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 내지 '망각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일중독 문제나 중독사회의 문제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준 A, W. 셰프(A. W. Schaef, 1993)는 이렇게 말한다. “내 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에 묻혀 바삐 지내는 것은 실제 그 일이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 바 쁠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명상록 I, March 255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자기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속을 들여다보았다가,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요컨대 어릴 적부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채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충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 라, 부모와 잘 소통하지 못하고 따뜻한 지지도 받지 못하면 서 자란 경우, 특히 좋은 학교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성과주의적 삶의 태도를 반복하며 자란 경우, 한국과 같이 전형적인 일중독성이나 일과 삶의 불균형이 상대적으로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2002)가 강조하 는 바와 같이, 어린 시절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을수록 일 종의 상흔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에 시달리면서 사람 들은 생존의 두려움을 특히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럴 때 대 개 생존전략으로서 강자와의 동일시'를 하게 되고 이것이 곧 성과주의적 삶의 지향이나 강박적 노동관으로 연결되기 쉽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좌절감을 보상받기 위해, 또는 그러한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일이라는 일 종의 중독물에 빠져듦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심적 상황을 피 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의 결과가 얼마 나 좋은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 으려고 하는 자기 강제' 를 하게 되고, 자연히 실 노동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현실은 경제와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사회가 경제 속에 병합되었음을 말해준다.
- 경쟁의 내면화'는 왜 이뤄지게 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강자와의 동일시 (identification with the aggressor)' 또는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 개 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직접 상대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엄청난 폭력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깡패(가해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응 방식은 대개 도망가거나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 자체가 절대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직접 맞서 싸워봐야 결과가 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그 깡패 같은 이 앞 에 무릎을 꿇고 “형님,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라고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공포심이 갑자기 모종의 안도감으로 변한다. 피해자 자신이 마치 가해자와 일심 동체가 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이제 자신이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사실 상 자신의 내면이 요청하는 것과 다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소외' 또는 자기배신' 이 일어난다. 나아가 이 피해자는 스 스로 그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힘이 더 약한 이에게는 마치 강자처럼 폭력적으로 대한다. 이미 자신은 강자처럼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안의 약한 요 소들을 억지로 감추고 철저히 억누른다. 물론 묵시적 증오감 과 더불어. 그런데 만약 자신 내부에 꼭꼭 숨겨두었거나 억압했던 약점들을 어느 날 갑자기 자기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약점에 대한 (불편한) 증오심을 다른 약자에게 (편안히) 모두 퍼부어버린다. 피해자 자 신이 가해자로부터 받았던 폭력적 경험을 이제는 자신이 가 해자로서 다른 피해자에게 전이하는 것이다
- 경쟁력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근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아무리 완벽한 실업대책을 세우려 해도 실업이 늘 존재할 수밖에 없 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본 입장에서는 노동력의 유연한 투 입을 위해, 그리고 취업자의 노동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라 도 실업자들이 늘 많으면 좋다. 게다가 경기 순환 과정은 호 황과 불황을 거치면서 과잉된 부분들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 다. 오늘날 유행어가 된 구조조정' 이라는 말도 사실은 자본 이 생존을 위해 그 과잉 부분을 조절하는 과정이다. 결국 이 런 사실들은 실업 정책들이 실업률 수치를 세련되게 관리하 는 정책이나 단기적 임기응변으로는 결코 효과를 가질 수 없 음을 시사한다.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 최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그 기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나 현실적 힘으로 부상하여 우리에게 '실재(實在)'로 다가온 것은 대체로 1980년대 이후의 현상이다. 필리핀대학의 월든 벨로가 올바르게 지적하듯, '신자유주의 이념이나 이론 자체는 이미 1920~30년대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에 의해 공식화되었으나 그것이 현실화되는 데는 사회적 세력관계의 변화와 사회적 내면화 과정이 필요했다. 즉,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경제 대공황, 소련 사회주의의 등장 등을 거치면서 (선진) 자본주의는 케인즈식 복지국가 자본주의로 변모하는데, 이는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 행위자로서 개입하는 한편, 노동 과 자본 그리고 국가 사이에 일종의 사회적 합의' 를 이루어 제3세계와 생태계의 희생을 바탕으로 공존공영' 을 도모한 것 이었다.4 이러한 합의체제에 기초한 자본주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때가 1970년대 초반이고, 마침내 1980년대 초반에 이 르면 케인즈주의 (Keynsianism) 대신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가 현실적 힘으로 떠오른다. 1980년에 권좌에 오른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이 그 예다. 이들의 등장은 단순한 인물의 교체가 아니라 사회적 세력관계의 변화를 상징한다. 즉, 노동이나 국가에 비해 시장 및 기업 세력이 더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 등의 신자유주의 이론이야 이미 존재했고, IMF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그런 입장을 바탕으로 수십 년간 세계체제의 재편을 도모하려고 케인즈주의의 물밑에서 조심스레 탐색 중이었는데, 마침내 케인즈주의 자체의 한계와 모순으로 파열이 생기고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정치세력이 보수 중산층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를 본격 현실화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대학, 기업, 교회, 정당, 언론 등 사회제도를 통해, (노조 및 국가를 배제한) 자유시장은 국민 전체에게 행복을 준 다' 고 하는 '시장 이데올로기' 가 전파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먼저 기득권층이 내면화하고 다음으로 선전과 선동, 교육과 언론을 통해 국민 대중에 내면화된다. 그리하여 기존의 노동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 등 시민사회운동 세력 중에서 실질적 포섭이 가능한 분파들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포섭과 타협이 어려운 분파들을 강력 배제하고 주변화시킨다.8 이 과정에서 20 대 80 사회' 로 상징되는 사회 양극화' 는 더욱 심화한다.
- 인류가 농사를 짓고 살기 시작한 시기가 약 1만 년 전부터 라고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역사는 불과 4백년 이다. 이 4백 년의 자본주의도 국가-자본 민중의 역관계' 에 따라 크게 나누어보면 고전적 자유주의 단계, 케인즈주의 단계, 신자유주의 단계로 정리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화' 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고전적 자유주의 (Classical liberalism)를, 봉건귀족과 국가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일부 민중과 힘을 합쳐 자유 시장체제를 확립한 단계라고 한다면, 케인즈주의 (Keynesianism)는 다양한 차원의 모순과 위기를 드러낸 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국가와 자본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즉, 저항하는 민중을 '복지-소비 체제'로 포섭하면서도 과잉자본을 합리적으로 정리하는 데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단계가 케인즈주의로 나타 났다. 그 뒤 케인즈주의의 자기모순과 다차원의 민중저항을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가 현실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특성은 무엇인가? 우선 작금의 세계화 물결이 네 가지 기둥을 중심으로 추진됨을 보아 야 한다. 그것은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화 등이다. 개방화(Liberalization)는 초국적자본이나 세계금융시장에 국경을 개방하라는 것이고, 탈규제화(Deregulation)는 국가나 노조의 자본에 대한 간섭과 제한을 철폐하라는 것이며, 민영화 (Privatization)는 공공 부문이나 국가 복지를 민간 자본에게 넘겨 수익성 원리에 따르게 재편하는 것이고, 유연화 (Flexibilization)는 노동시장과 기업조직을 신축적으로 개편하 는 것이다.
- 미국 주도의 군사력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제하 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에마뉘엘 토드는 문제의 근원 은 미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약해서”라고 말한다.25 즉 세 계적 무력행사 뒤에는 세계에 대한 미국의 경제 의존이라는 취약함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의 무역적자는 1990년에 천억 달러였는데 2000년에 4천 5백 억 달러, 2005년에 5천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대량소비 위주의 낭 비적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를 시장화, 세계를 공장 화한 결과가 대형적자로 나타나고 또다시 이를 모면하기 위해 더욱 강제적으로 시장자유화를 추진하려 하니,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파국과 제국의 몰락을 자초하는 것이다.
- 선생의 말씀 중에 “현대 의학이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탈취해 갔다” 라는 말이 있는데, 결국 인간은 과학, 기술 덕에 무 의미하게 죽음을 연장하는 많은 사례에서 드러나듯, 적당한 기회에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능력까지 상실한 상태, 즉 죽음으로부터의 소외 까지 겪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깊 이 생각해 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는 막연히 오래 살 것 처럼 생각하고 불행이나 고통, 죽음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 움에 젖어 거의 대비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죽음을 진지하 게 생각하고 성실히 대비하지 못하는 삶은 온전한 삶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예컨대 한 달에 한 번 씩 나름의 유언장' 을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유언장을 쓴다. 는 것은 얼핏 꺼림칙한 일 같지만, 결국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삶을 더욱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 일리치 선생은 인간성 그 자체를 보존, 실천하지 않고 그것 을 체계 내지 제도 속으로 편입하는 것에 대해선 질색한다. 먼저 환대의 제도화가 이뤄진 역사부터 보자. 착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경우처럼 환대와 사랑의 마음을 고이 간직하던 시 대도 있었지만, 서기 3백 년 경 기독교가 공인되고 이후 국교가 되자 사태가 급변했다. 주교들은 마치 행정관처럼 되었고 환대를 제도화하기 위해 환대의 집' 을 곳곳에 세웠다. 피난 민과 이방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물론 많은 현인들은 “당신네들이 자선을 제도화한다면, 즉 자선이나 환대의 관습을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업으로 전환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명성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대문을 두드릴지도 모르는 사람 을 위해서 언제나 여분의 이불과 묵은 빵조각과 양초를 준비 해두고 살아온 것으로 유명했던 것입니다” 라며 우려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개별 사람들은 언제라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그런 직접적 삶의 방식을 점점 잊 게 되었고 대신에 귀차니즘 이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이것 이 자선의 제도화가 낳은 사생아다. 오늘날 복지국가의 병폐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또한 우리들 모든 삶의 과정이 상품화 한 것이 바로 오늘 날 서비스 경제'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함과 우정, 환대,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확인하고 나누던 행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서비스 경제' 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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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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