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세이

사회 2020. 4. 7. 12:29

- 사실 '노동자는 노동자, 정치는 정치'라는 주장, 바꿔 말하면 노 동자에게 “열심히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이 정치에는 왜 관심을 가져!”라고 말하는 식의 주장은 먼 옛날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역시 널리 퍼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론'에서 인간을 이성적 인간, 기력적 인간, 정욕적 인간의 세 부류로 나누고 이성 적 인간집단이 정치를, 기력적 인간집단이 국가방위를, 정욕적 인 간집단이 생산을 담당하는 것이 이상국가이며 이성적 인간집단의 덕목은 지혜, 기력적 인간집단의 덕목은 용기, 정욕적 인간집단의 덕목은 절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플라톤이 살고 있던 고대 그리이스국가는 노예제국가로서 노예소유계급인 귀족과 무사계 급, 평민, 노예의 신분적 계급관계를 취하고 있었고 귀족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서 평민과 노예를 지배 · 억압착취하고 있었는데 플라톤은 그 자신이 귀족으로서 그리이스의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플라톤은 귀족계급의 지배와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노예제 국가를 영원히 지속시키고자 그의 이상국 가론에서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고 그 각각에게 자기의 본분을 다 할 것을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 우리는 고대 중국의 공자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보게 됩니다. 공자는 명분(名分)을 내세워 군주와 제후, 백성이 각각의 본분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플라톤과 공자의 주장을 오늘날에 적용하여 보면,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와 민중은 생산에 힘쓸 것이며 정치는 정치가가 알아서 잘 할 것이니 관심쓰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 나 이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사실 노동자와 정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치가 국민의 다수인 노동자를 위해 이루어지지 않으면 노동자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개선되기 어렵습니다. 노동자가 임금인상투쟁을 통해 임금이 어느 정도 오른다고 해도 정 부가 돈을 마구 찍어 물가가 오르면 임금인상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됨은 물론 오히려 임금이 더 내려가버린 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활을 진짜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즉 정치와 노동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 기 때문에 노동자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며 올바른 것입니다.
- 모든 사물은 상호 관련을 맺고 상호작용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관련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올바 른 인식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고 나아가 현실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와 행동양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관련되어 있고 또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고 보는 철학적 견해를 변증법이라 합니다. 이에 반해 사물의 상호 관련성을 부인하여 사물을 고립적으로 보고 사물의 운동 · 변화를 부인하여 사물을 정지적으로 보는 철학적 견해를 형이상학이라 합니다
* 본질과 현상 : 현상이란 사물이 외적인 조건에 따라 나타내는 일시적 이고 표면적인 모습을 말하고, 본질이란 현상의 배후에서 현상을 규정하는 동일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 자신의 무지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서로 대립하는 대립물이면서 상대방을 각각 자신의 존재의 전제로 하 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의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라는 두 대립물이 상대방을 각각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면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호 대립 (대립이라는 말이 반드시 적대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는 두 사물이 상대 방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 (이것을 상호의존 관계라고 말합니다)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물의 통일'이 바로 철학에서 말하는 모순입니다. 즉, 모순이란 한편으로는 상호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의존 관계하에서 통일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입니다. 한편 경제학에 대한 공부를 함으로써 경제에 대해서 문외한이던 사람이 경 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공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여기서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의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투쟁입니다. 결국 변 화는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서 변화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립물의 투쟁이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 서로 대립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상호의존관계 하에서 상품 속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이 바로 상품의 내적 모순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품의 내적 모순에 의하여 상품은 화폐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투쟁을 통해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극복할 때 (이것은 현실적으로 교환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데) 상품은 교환가치를 나타내는 화폐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 알아본 것처럼 사물변화의 근본원인은 사물 내부에 있는 사물의 내적 모순입니다. 그리고 모순이란 상호 대립하는 두 사물이 상대방을 각각 자기 존재의 전제로, 하는 관계 (상호의존관계) 하에서 결합된 것이며, 이러한 내적 모순의 상 호 대립하는 두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의 변화를 바라볼 때 그 변화의 근본원인이 되 는 내적 모순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내적 모순이 아닌 외부적인 원인에서 그 변화의 근본원인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 변화의 참된 원인을 찾는 데 실패할 것입니다.
- 사회를 변화시키는 내적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두 대립물 의 통일, 즉 모순입니다. 생산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 생활에 필 요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생산수단과 일정한 경험이나 숙련도를 가지고 이러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생산을 행하는 인간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합친 것을 말합니다. 즉, 생산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물질적 재화를 생산함에 있어서 자연물과 연력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 정도에 따라 생산력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생산력은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는 힘을 말합니다. 한편 (생산관계는 자연을 정복하고 개조하는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 맺게 되는 관계를 말 하며 그것은 인간이 일정 생산체제에서 차지하는 지위,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생산물의 분배방식 등을 포함합니다. 그중에서도 생산관계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생산수단 (토지, 삼림, 원료, 생산용 구, 건물, 교통 및 통신시설 등)의 소유관계입니다.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닌가,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생산에 서 차지하는 지위와 분배에서 차지하는 몫이 결정되기 때문.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연관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로, 형식으로서의 생산관계는 내용으로서의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해야 하는데 사회제도로서 고정화되어 있는 생산관계는 쉽게 변하지 않아 생산력이 일정하게 발전하면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 막게 됩니다. 여기서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격화됩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격화는 새로운 생 산력을 대표하는 진보적인 계급과 낡은 생산관계를 고수하려는 반동적인 계급 사이의 투쟁의 격화로 나타나며 이러한 투쟁에 따라 사회는 발전합니다. 즉,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계급 투쟁에 따라 운동 ·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내적 모순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사회발전의 역사에서 나타난 각각의 사회 에 특수성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적대적 모순은 주로 사회적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세력들 사이에 나타나며 비적대적 모순은 근본적으로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 사이에 주로 나타납니다. 사회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계급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모순은 적대적 모순에 해당됩니다. 노 예제 사회에 있어서 노예소유자계급과 노예계급의 모순, 봉건제사 회에 있어서 봉건영주와 농노의 모순, 자본제사회에 있어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모순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제국주의 세 력과 식민지민중 사이의 모순도 역시 적대적 모순에 해당됩니다.
-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모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식민지민중 내부의 모순의 실현 그 자체가 모순의 해결인 비적대적 모순입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사회의 노동자와 농민 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물론 노동자와 농민은 서로간에 여러 가지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데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식민지 사회의 노동자와 농민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조건 위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충실히 수 행하고 상호협력과 단결, 나아가 전민중과 단결해야만 서로간의 공통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적대적 모순은 주로 사회적 이해관계를 근본적으로 달리 하는 세력 사이에 나타나며 이는 모순의 극복에 의해서 해결되고 비적대적 모순은 근본적으로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 사이에 주로 나타나며 이는 모순의 실현에 의해서 해결됩니다.
- 관념론의 주장, 즉 의식이 근원적이고 1차적이며 물질은 파생적 이고 2차적이라는 주장의 부당성은 과학의 성과에 의해 그리고 인 간의 인식과 실천이 확대됨에 따라 입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관념론이 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모습을 바꾸면서 남아 있으며 여전히 이를 주장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까요? 이 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제까지 있어 온 관념론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이제까지 존재한 관념론의 내용을 살펴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 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관적 관념론이고 다른 하나는 객 관적 관념론입니다. 주관적 관념론은 앞서 나온 버클리의 견해와 같은 내용입니다. 즉, 모든 사물은 인간의 관념과 의식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주장입 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의 사물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견해도 주관적 관념론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주관적 관념론자에게 있어서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도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던 것 이 됩니다. 반면에 객관적 관념론은 세계를 관념, 의식, 정신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점에서는 주관적 관념론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객 관적 관념론은 세계를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이나 관념의 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객관적’ 정신의 산물로 봅니다. 즉, 세 계가 나타나기 이전에 어떤 신비한 정신적 존재가 있어서 이것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세 계의 창조주인 신이나 하나님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따라서 객관 적 관념론자는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총을 들고 적을 막아내기보다는 전지전능한 신에게 기도를 드립니다.그러면 왜 이러한 관념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식상의 이유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인 이유입니다.
- 사람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복잡합니 다. 따라서 인식과정의 어떤 한 부분을 과대하게 평가하게 되면 관념론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정에 대한 잘못된 이해, 즉 인식상의 이유는 다만 관념론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할 뿐이며 보다 중요한 이유는 사회적인 이유입니다.
사회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조건하에서 지배계급은 항상 관념론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그것을 전파시킵니다. 현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발전하고 있는데 관념론은 모든 것을 관념, 의식, 정신 혹은 신으로부터 설명하기 때문에 우선 피 지배계급의 눈을 현실 세계의 변화·발전에서 떼게 하여 자신의 지 배와 재산, 특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현실 세계 에 존재하는 고통과 불평등을 마음만의 문제로 생각케 하여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듭니다.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을 신의 섭리로 여기게끔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생활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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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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