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알랭 드 보통)

인문 2018. 1. 2. 21:30

-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됨.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됨.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함.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으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 실제적 궁핍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않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불평등을 고려할 때 질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모두를 질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 귀족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몇가지 행복을 누려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자와 동등해지기를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가하지 않았음.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진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생각.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가 불면의 자연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그 결과 운을 불평등하게 타고난 여러 계급 사이의 일종의 친선관계가 확립되었다.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기대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철거해 버렸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물질적 평등을 성취할 수단이 없는데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느꼈다. 토크빌은 말한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부자의 쾌락에 희망과 질시가 섞인 눈길을 던졌다.' 가난한 시민은 부자 시민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으며, 언젠가는 그들의 뒤를 쫓을 수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늘 틀린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큰 부를 일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예외없는 규칙이 될 수는 없었다. 미국에도 여전히 최하층 빈민이 있었다. 그러나 귀족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 삶은 불가피하게 고난일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믿음은 수백년 동안 인류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며, 울화로 치닫는 마음을 막아주는 보루였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근대적 세계관이 배양한 기대 때문에 잔인하게 훼손됨.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에서 위로해주는 말투로 불행은 삶의 움직일 수 없는 본질이며, 비참한 인간상황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이 비참한 삶에서 인간이 자신만의 힘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을 경멸했다.
- 루소는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배를 채울 과일 몇알과 견과가 있고, 저녁에 어설픈 악기를 연주하거나 날카로운 돌을 사용하여 낚시용 카누를 만들수만 있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루소가 원시인과 근대인의 행복수준을 비교하는 것을 보면 윌리엄 제임스가 행복의 수준을 결정할 때 기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떠오른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 루소는 권력자들이 처음부터 강탈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유지해 왔다고 주장. 처음으로 문명사회를 세운 사람들은 땅에 울타리를 친 다음 이게 내땅이야 하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 또 다른 사람들이 순진하게 그 말을 믿어준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들이었다. 만일 누군가 그 말뚝을 뽑아버리거나 도랑을 메우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면 인류는 수많은 범죄와 전쟁과 살인, 엄청난 비극과 공포를 격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라. 땅의 열매가 모든 사람의 소유이고 땅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 (인간불평등 기원론, 1754) 100년 뒤 마르크스는 이 이야기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 다듬지 않은 사회적 항거의 외침이었던 루소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보이는 발판위에 올려 놓음.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 내에는 본래부터 착취의 역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고용주는 노동자의 생산물을 팔아 얻는 돈보다 싼 값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며, 그 차액을 이윤으로 자기 호주머니에 챙기려고 노력하기 때문. 자본주의 언론에서는 이런 이윤을 고용주의 모험과 경영에 대한 보답이라고 찬양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말이 도둑질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마르크스는 주인계급은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지배해왔으며, 부르주아지는 그 최신형태일 뿐이라고 비난. 부르주아지가 겉으로는 아무리 인간적으로 보여도, 그 문명화된 겉모습 밑에는 무자비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목소리로 부르주아지에게 말했다. '당신은 모범적 시민일 수도 있고, 동물학대 예방협회의 회원일수도 있고, 거기에 청정한 향기까지 풍길수도 있지만, 당신은 결국 가슴에 심장이 없는 생물이다.' 이런 무정함의 증거는 19세기 공장, 빵가게, 조선소, 호텔, 사무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병에 걸렸고, 암이나 호흡기 질환으로 죽어갔고, 열심히 일을 해도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누릴 수 없었고, 자신의 지위를 지적으로 이해해볼 만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안정감 없이 불안하게 살아야 했다. 자본주의 생산은 그 인색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재료 만큼은 철저하게 낭비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인간 재료에게 그 주인에 대항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채무를 당당히 받아내라고 촉구했다.
(1)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2) 낮은 지위에 도적적 의미는 없다
(3)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 위 세가지 이야기는 서기 30년부터 1989년까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들은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운을 북돋는 세가지 메시지를 전달. 첫째, 그들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둘째, 세상의 지위는 신이 보기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것, 셋째, 부자는 파렴치하며,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면 서글픈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차피 존중할 가치가 없다는 것.
-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없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픽테토스, 어록(100년경))
-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쇼펜하우어)
-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왜 어떤 사회에서는 군인이 찬사를 받고, 다른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신사가 찬사를 받는가? 일단 네가지 답이 떠오른다. 어떤 집단은 남에게 신체적 해를 줄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해서, 또는 괴롭힘이나 협박으로 굴복시켜서 원하는 지위를 얻는다. 힘으로 보호해주거나 식량을 조달해주어 원하는 지위를 얻을수도 있다. 안전이 문제가 될 때는(고대 스파르타, 12세기 유럽) 용기 있는 투사나 말을 탄 기사가 존경을 받는다. 재빠른 동물의 고기에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하는 공동체에게는(아마존) 재규어를 죽이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더불어 그 상징인 아르마딜로 허리띠를 얻는다. 교역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기업가와 과학자가 존경의 대상이 된다. (현대 구미지역)
-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레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 간다. 어떤 집단에서는 짐승의 옆구리에 창을 꽂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전투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신에게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자본시장에서 이윤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상적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스포츠, 예술, 과학연구를 포함하여)의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을 통해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킴. 이들 사회의 기반은 능력주의라 할 수 있기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가지는 있다고 칭송 받음. 그 네가지는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다른 미덕, 예컨대 겸손이나 경건은 이제 눈길을 끌지 못함. 성취는 이제 과거 사회에서처럼 행운이나 섭리나 신 때문이라고 이야기되지 않음. 잉것은 현대 세속사회의 개인의 의지력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것. 이에 따라 경제적 실패 역시 능력에 따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실업자는 전사들의 시대에 육체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처럼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도 마찬가지다. 쿠베오 부족의 재규어 이빨처럼 부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훌륭하다는 증거이며, 낡은 차나 허름한 집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증거. 부는 단지 높은 지위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늘 변하는 광범위한 소비재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여 행복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장려되기도 함. 그런 소비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 세대의 제한된 삶을 연상하며 동정심과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 갤브레이스는 부유한 사회에서 스미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이 생존에는 모자라지 않는다 해도 공동체의 소득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지면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럴 경우 그들은 공동체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이라고 하는 것을 가질 수 없으며, 품위가 없다는 공동체의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수가 없다.'
-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세가지 가정에 기반을 둠.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 건강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몸이 보통 알고 있어 염분이 필요하면 훈제 생선으로 향하고, 혈당이 낮으면 복숭아로 향하듯이, 정신도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잘 알고 있어 우리를 어떤 일이나 기획으로 자연스레 몰고 간다는 것이다. 둘째로, 근대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우리의 행복과 별 관계 없이 욕망만 부추기는 번지르르한 소모적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수 있는 돈이 많을수록 제품과 용역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 이런 가정들에 반박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읽기 쉬운 책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루소는 우선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 정신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는 능력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고 전제함. 우리 영혼은 만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대로 말하는 경우가 드물며, 어설프게 말을 한다 해도 근거가 박약하거나 모순될 가능성이 높다. 건강해지기 위해 뭔가를 소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같지만, 루소는 몸도 물이 필요할 때 술을 찾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때 춤을 찾는 것처럼 정신도 모순된 요구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리의 정신은 만족을 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외부의 목소리의 영향력에 민감함. 이런 목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내는 작은 소리를 삼켜버리고, 긴요한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방해할 수 있다. 루소는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훌륭한 작업장과 도시로 진보해왔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특권적 상태로부터 우리 자신의 인격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생활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왔다고 말한다. 과학기술에서 뒤졌던 선사시대에는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에서 살았는데, 이때는 사람들이 숲에 살면서 장을 보지도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루소는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쉽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상상한다. 즉,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품고, 음악과 소박한 오락을 즐기는 것이 그런 특징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상업적 문명은 우리를 이런 상태로부터 떼어냈으며, 우리는 풍요의 세계에서 선망과 갈망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 이데올로기적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편파적이,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잔치가 끝날 무렵 참석자들이 거나해져 있을 때 하인들이 들것에 해골을 담아 연회장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는 관습이 있었다. 아쉽게도 헤로도토스는 어떤 의도로 이렇게 죽음을 연상시키는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그것을 보고 잔치판에서 더 강렬한 즐거움을 맛보았을까. 아니면 새삼 심각한 기분으로 집에 갔을까.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잊히고 무시당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강하고 존경받는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물질, 즉 먼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 대부분의 사치품, 그리고 이른바 생활에 편리한 물건들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이 향상에 장애가 된다. 소로우는 그렇게 쓰고 난 뒤,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연결시키는 사회적 태도를 뒤집고자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소로우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의미. 소로우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이 말이 강요된 물질적 상황보다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상황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는 중국, 힌두, 페르시아,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한때 소박한 생활을 기꺼이 선택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스턴 상인들에게 일깨우려 했다. 소로우가 월든 호수에 머문 뒤 미국에 막 등장한 산업사회에 전달한 메시지의 기조는 소루우 전이나 후의 거의 모든 보헤미안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심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기 때문.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따. 이 다섯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 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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