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수업

인문 2018. 1. 13. 21:04
-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내어 분노하라. 판단하지 말고, 의미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오직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 어차피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 불공평하다. 그러니 이토록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 화를 허락하면 할수록 마음 깊이 감춰진 감정들을 더욱 더 찾게 된다. 분노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그것을 다스리면서 숨어 있던 다른 감정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통은 상실의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강도가 감당하기 버거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고 영원이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반대편 출구로 나오게 될 것이다. 고통은 가라앉고, 상실의 감정들은 다시 형태를 바꾼다.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분노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라. 누구든 당신의 분노를 비난하도록 두지 말라. 심지어 당신 자신이라 할지라도
- 절망을 방문객으로 여기라. 환영받지 못할 방문객이지만 당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방문할 자이다. 그 손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라. 절망을 초대해 난로 앞 당신 옆으로 의자를 마련해, 피할 방법을 강구하지 말고 순수함 속에서 상실을 바라보라. 절망을 느끼도록 마음을 놓아두면, 상실 안에서 목적을 달성한 절망은 곧바로 떠날 것이다. 더 강해지면 때때로 절망은 다시 찾아올 수 있겠지만, 이게 바로 슬픔이 일어나는 방식이다
-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버리는 것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 눈물은 슬픔을 해소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이며, 몸 안에 내장되어 있는 놀라운 치유장치이다. 불행하게도 우린 자주 이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방출을 참아내려 한다. 슬플 때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해 핵심이 되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갑자기 닥쳐온 슬픔에 북받쳤다고 생각하는 것. 두번째는 울음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람들은 대개 울기 시작하면 그 자연스런 현상을 멈추게 하려고 재빨리 자리를 뜬다.
-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당신이 남겨졌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잃었는가? 당신이 왜 굳이 남겨졌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가? 신과 우주만이 그 정답을 이야기해주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당신들은 모두 살기 위해 남겨졌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니면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쇼핑이나 낚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슬픔에 빠진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기 보다는 무작정 뭔가를 하려고 든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치유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슬픔을 완전히 겪어야 한다. 밖으로 나갈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건너뛸 수는 없다. 슬픔을 늦추기 위해서는 주위에 조심스럽게 앉아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 단지 슬픔 곁에 앉으라. 슬프면 자신이 그 슬픔을 느끼게 하라. 분노와 실망에게도 이같이 하라. 하루 종일 울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라. 상처를 억누르거나 또는 표현할 정도로 충분히 아물지도 않았는데 인위적으로 꺼내려고 하는 것만 피하면 된다. 여기서 얻어야 할 것은 고통을 느끼고 난 후 찾아오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슬픔이 엄청난 힘을 갖고 찾아올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피하기 마련이다. 이 사실을 의식하라. 하지만 고통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것을 오히려 확대시킬 뿐이다. 슬픔 속으로 내려가 그것을 느끼려 한다면 많은 공간이 생길 것이다. 고통으로 자신을 씻어내어 몸과 마음으로 돌아온 에너지를 느껴보라. 슬픔에게 항복하면 상상했던 것보다 자신이 훨씬 더 강해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으며, 고통은 제법 고통스럽겠지만 외부의 산책을 통해 기분을 전환시키면 그것을 더 빨리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됐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당신에겐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가서 자신과 접촉하고 스스로 어떤 감정상태에 빠져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몸의 속도를 늦추고, 오직 몸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라
- 당신이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갈 것들에 대해 정녕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고,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낯선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잘 죽을수도 없고 잘 애도할수도 없다. 40년대 병은 병원으로 옮겨갔고, 죽음은 장례식장으로 옮겨갔다. 이제 우리는 낯선 사람들 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다만 한꺼번에 몰려온 몇명의 방문자에게만 병실 출입이 허락된다. 간병인과 호스피스들은 훌륭하지만 여전히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좀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는다. 만약 가족이 모인다면 병원에서는 교대로 방문하기를 강요한다. 대개 14세 이하의 아이들은 병문안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100년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임종을 앞두고 모두가 모였으며 마을에 종이 울렸다. 시신을 놓을 차구운 나무판을 설치햇다. 관을 짜기 위해 나무를 모았다. 몸에 입힐 옷을 직접 바느질했다. 사랑한 이의 시신을 장례식장 안에 안치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명복을 빌었다. 서로 다 아는 사이였다. 참석한 이들은 그에 대한 일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들은 화려한 비단처럼 펼쳐진다. 추모식의 사회자는 떠난 그 사람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상실을 넓은 눈으로 보게 해준다. 친구와 가족 모두가 묘지 앞으로 모인다. 그후 그들은 뭔가를 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해 굳이 묻지 않고 다만 행동으로 옮긴다. 상실을 당한 누군가를 돕는 방법에는 애매한 일이 없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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