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인문 2018. 1. 13. 09:47

- 지금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한해 한해를 맞을 때마다 나의 삶은 점점 즐거워 질 것이다.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 예를 들어 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심 따위는 단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 또한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랬으니 나 자신을 불행한 괴짜로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차차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외부적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그 나름대로 고통을 부를 수 있다. 세상이 전쟁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친구들이 죽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고통은 자신에 대한 혐오로 생기는 고통과는 달리 삶의 본질적 부분까지 파괴하지 않는다. 외부에 대한 관심은 어떤 활동을 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관심이 살아있는 한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버림. 나는 극단적으로 자극에 반대하지 않는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 아무리 훌륭한 소설이라도 지루한 대목은 있는 법이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종일관 재치가 넘치는 소설은 훌륭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위인들의 생애 역시 몇몇 위대한 시기를 빼놓고는 흥밋거리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때때로 연회를 즐겼고, 독약의 효과가 퍼져나가는 동안에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상당한 만족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크산티페와 함께 조용히 지내면서, 오후에는 건강을 위해 산책을 하기도 하고, 산책길에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며 지냈을 것이다.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6킬로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윈은 세계일주를 한 뒤 남은 생애를 자신의 집에서 보냈다. 마르크스는 몇 차례의 혁명을 선동한 뒤에는 여생을 대영박물과에서 보냄. 전체적으로 보자면 조용한 삶이 위인들의 특징이며, 위인들이 누렸던 기쁨은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흥미진진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끈질긴 노력이 없이는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일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 그러므로 위인들에게는 많은 열정을 요구하는 오락에 쏟아부을 만한 활력이 남아 있을 턱이 없다. 예외가 있다면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건강회복을 위해 하는 오락 정도르 알프스 등반을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현대 부모들은 이런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 마땅하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영화구경이나 맛있는 음식 같은 수동적 오락거리를 너무 많이 제공. 부모들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날마다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주로 자신의 노력과 창조력에 의지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영화구경처럼 재미는 있지만 육체적 활동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 오락거리를 어린아이들에게 자주 제공해서는 안된다.
- 자극은 약물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양의 자극이 필요. 또 육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극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어긋남. 어린 식물은 계속 같은 토양에 가만히 놔둘때에 가장 잘 자라는 법인데,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잦은 여행을 하고 지나차게 다양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좋지 않다. 이런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지루함조차 참지 못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지루함 자체가 유익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어느정도의 지루함을 참아내지 않고서는 유익한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경우가 있다
- 현대의 도시인들이 느끼는 특별한 권태는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과 깊이 연관됨.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삶은 사막을 여행할 때처럼 뜨겁고 답답하고 갈증에 시달린다. 돈이 많아서 마음대로 생활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들이 겪는 권태 가운데는 권태를 두려워하는데서 비롯된 특이한 권태가 있다. 그들은 생산적인 권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다가 훨씬 나쁜 종류의 권태에 빠지고 만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만 깃들기 때문이다.
- 현명한 사람은 고민을 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때에만 고민하고, 고민을 해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음. 물론 파산이 임박한 경우, 혹은 아내가 자기를 속인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처럼 엄청난 위기를 맞았을 때에는 지금 당장 그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함.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정신적 훈련을 쌓은 몇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그 문제에 맞닥뜨려야 할 때를 제외하면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그 문제에 맞닥뜨려야 할 때를 제외하면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지나치게 고민하는 것보다 꼭 필요할 때에 적당하게 고민하는 침착한 태도를 기르면 행복과 능률을 엄청나게 증진시킬 수 있다. 곤란하거나 심각한 결정을 내려햐 할 경우에는 모든 자료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즉시 그 문제를 깊이 숙고해서 결정을 내려라.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결코 그 결정을 번복하지 마라. 망설임만큼 심신을 지치게 하면서 쓸데없는 것은 없다
-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걱정이나 불안이다. 감성적 피로가 가진 문제는 그것이 휴식을 방해한다는 것. 사람은 피곤할수록 그 피곤에서 벗어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짐. 자신의 일이 몹시 중요하므로 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거라 생각하는 것은 신경쇠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다. 내가 의사라면 자신의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환자들에게 일에서 벗어나 휴가를 얻으라고 처방할 것이다. 일 때문에 빚어진 듯이 보이는 신경쇠약의 원인은 바로 감성적 문제에 있다.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일이라는 수단을 통해 감성적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일을 중단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만약 일을 중단하게 되면 어떤 종류의 불행을 겪고 있든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에서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지기 때문.
- 어떤 불행이 닥쳐오면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을 직시하고 나서는, 그 불행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적절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라. 그럴만한 이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나 자신에게 우주적 중요성을 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얼마 동안 최악의 가능성을 꾸준히 응시하면서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좋아, 그까짓 것 별 문제 아닐거야'라고 말해보라. 그러고 나면 걱정이 엄청나게 줄어든 것을 깨닫게 될 거이다. 이런 과정을 서너번 되풀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최악의 사태를 직시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되면, 당신의 걱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대신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때때로 죄의식이 심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신의 계시나 더 고귀한 행동을 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질병이자 약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죄의식은 합리적 도덕원칙에 비추어볼 때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했기에 생기는 죄의식과는 다름. 도덕원칙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미신적으로 도덕원칙을 지니지 말라는 것. 이 두가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설사 합리적인 도덕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삶의 방식을 개선한다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님. 죄의식 안에는 절망감과 자존신을 갉아먹는 감정이 존재. 자존신을 잃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행동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될 만한 상황을 되도록 피해가는 데 해결책이 있다
- 다른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관대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도 남들에게서 호감을 얻기 때문에 무한한 행복을 누린다. 그러나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음이 불안하고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갖지 못한다. 이른반 정신적 통합이 이루어진 사람만이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정신적 통합이란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등 인간의식의 다양한 층들이 갈등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끊임없이 활동하는 상태를 가리킴.
- 자아가 분열되어 있는 사람은 자극과 오락거리를 찾게 됨. 그는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지만, 건전한 이유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이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을 내면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통스런 생각을 없애주기 때문. 그에게 있어서 열정은 모두 도취의 한 형태이며, 그는 근본적인 행복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도취의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심각한 병적 증상이다. 이런 병이 없는 사람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면서 최대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정신이 최고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적은 순간에 사람은 가장 강렬한 기쁨을 느낌. 이것이 바로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참된 행복인지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뭔가에 도취해야 느낄 수 있는 행복은 거짓된 행복이며, 충족감을 줄 수 없는 행복이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충족감을 주는 행복이다.
-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바람을 존중하느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나이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함. 중요한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 중요한 문제냐 사소한 문제냐를 따지지 않고 남의 의견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전문가의 의견은 존중해야 함. 크게 보면, 굶어죽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을 정도로만 여론을 존중하면 됨. 이러한 한도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지나친 횡포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것이고, 모든 면에서 행복을 가로막기 십상이다.
- 결국 성공하지만, 처음에는 성공여부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어려움이 있어야 성취의 기쁨이 뒤따름. 마찬가지 이유에서,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지 않는 사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음.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뜻밖의 성공에 놀라게 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뜻밖의 실패 때문에 놀라게 됨. 뜻밖의 성공으로 인한 놀라움은 즐거운 것이지만, 뜻밖의 실패로 인한 놀라움은 불쾌한 것이다. 그러니 진취성을 잃을 정도로 지나친 겸손은 피하되,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고 하겠다
- 농경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굶주림을 덜 겪기 위해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견뎌내기로 마음먹었다. 사냥으로 식량을 구하던 시절에는 일이 곧 기쁨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이 아직도 옛 사람들이 하던 사냥을 오락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과거에 사냥이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따. 그러나 농업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화가 치미는 기나긴 세월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고마운 기계 작업 덕에 이제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있는것이다.
- 대부분의 경우 일시적 열광이나 취미는 근본적인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 현실도피의 수단에 불과. 현실도피의 수단이라고 한 것은 이겨내기 힘든 고통이 다가오는 순간을 잊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름.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 옛날 사람들은 중용을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여겼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버리고, 중용을 모르는 열정을 찬미하게 됨. 심지어 바이런 소솔의 주인공이 가진 열정처럼 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인 열정까지도 찬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히 옳았다. 훌륭한 인생이라면 여러가지 활동들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한가지 활동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 모든 종류의 폭넓은 관심사는 긴장을 이완한다는 중요한 역할 이외에도 여러 효용성을 가짐. 첫째로 사람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줌. 자신의 목적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 그리고 자기 나름의 일의 방식에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인간이 수행하는 전체 활동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잊기 쉽다
- 우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짧은 인생동안,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습득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한 지식이더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는 것은, 극장에 가서 연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세상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것, 영웅적이거나 기괴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 세상이 보여주는 이런 구경거리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베푸는 여러 특권중의 하나를 포기하는 셈이다.
- 모든 불행은 의식이 분열도거나 통합을 이루지 못한데서 생김.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자아 내부에 분열이 생기고, 객관적 관심과 사랑의 힘에 의해 자아와 사회가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자아와 사회는 통합될 수 없다. 행복한 사람은 자아의 내적 통합이나 자아와 사회가 이루는 통합의 실패로 고통받지 않는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의 인격은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세상에 대항하여 맞서고 있지도 않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인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사람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도 괴로워하지 않음. 마음속 깊은 곳의 본능을 좇아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에 충분히 몸을 맡길 때, 우리는 가장 큰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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