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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2

저자
박정호 지음
출판사
한빛비즈 | 2013-06-03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현대그룹, SK그룹, IBK기업은행 등 기업이 선택한 통섭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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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설탕물들이 초창기 약으로 분류되었듯이 콜라 역시 약이었음. 중세에는 약제사가 설탕물을 약으로 팔았고, 19세기 후반호황기 때의 약사들 또한 설탕물로 만든 음료를 팔았음. 설탕물의 일종인 초기 콜라 역시 소비자들에게 약으로 판매됨. 콜라를 최초로 개발한 사람은 내과의사이자 약사였던 존 스틸스 펨버톤 박사임. 모르핀 중독에 시달렸던 그는 모르핀을 대체할 수 있는 약물개발에 몰두. 그러던 중 1885년 페루의 코카잎에서 추출한 코카와 아프리카의 콜라 너트에서 추출한 카페인이 포함된 최음제 성격의 와인 음료수를 개발. 펨버톤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이 와인 음료수를 과로, 변비, 우울증, 성기능장애, 두통, 히스테리, 아편중독 등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 그리고 제이콥 약국에서 5센트에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콜라의 시초임. 하지만 곧이어 애틀란타에서 알콜이 들어간 모든 식품의 판매를 금지함. 이에 펨버톤은 와인성분을 제거하는 대신 7X로 알려진 일곱개의 비밀성분을 추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맛의 코카콜라를 만들어 냄. 이 비밀스런 성분에 대한 실마리는 거의 100년이 지난 후 93년 알려짐. 당시 공개된 코카콜라의 성분은 라임주스와 오렌지, 레몬, 너트케그, 시나몬, 오렌지꽃 등에서 추출한 오일이었음. 콜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분이 중동을 비롯한 동양에서 전해진 재료들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시. 미국이 원산지인 재료라고는 바닐라뿐이었음. 펨버톤은 알콜 성분 대신에 최음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동양에서 찾았던 것.
-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아프리카 노동자들을 이주시켜 사탕수수를 재배한 것은 단순히 향료를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음. 당시 설탕은 향신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고,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음. 예를 들어 이슬람 지역에서는 설탕을 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하고 있었음. 이는 유럽에 전파되어서도 마찬가지였음. 16~17세기 유럽에서는 설탕이 결핵을 포함한 주요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음. 설탕은 권위와 신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음. 설탕이 아시아에서 수입된 향신료 못지 않은 고급재료였기 때문. 특히 다른 향신료와 달리 신비로운 흰색을 띠고 있어서 때로는 정교하게 제공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했으며, 국왕이나 귀족의 파티와 의례를 화려하게 수놓기도 했음. 유럽국가들이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설탕은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었음. 18세기 무렵부터는 일반 서민들의 아침식사에 등장할 정도로 대중화되었음. 그리고 설탕이 대량으로 생산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올 수밖에 없었음.
- 쾌적한 기후환경에서 살고 있는 유럽대륙 사람들과는 달리 영국인에게 음식이란 귀한 것이었으며,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자원을 인식. 그래서 영국인들이 광활한 식민지를 얻게 되었을 때 식자재를 원활히 생산하기 위해 플랜테이션을 도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름. 그들에게 식민지의 광활한 영토는 오랫동안 부족했던 식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대상이었을 뿐, 음식문화를 만들어나갈 대상은 아니었던 것. 이처럼 그들은 오랫동안 음식을 자원으로 여겨왔기에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추는 방식으로 음식문화를 이끌어옴. 미국에서 패스트 푸드 문화가 만들어진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음. 영국인의 후예인 미국인에게 식자재란 다양한 요리문화를 만들 수 있는 기초재료가 아니었음.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손실없이 빠른 시간내에 요리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었을 분. 결국 미국인들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공산물을 찍어내듯이 패스트 푸드라는 음식자원을 만들어내기에 이름. 이처럼 영국과 미국이 음식을 문화나 레저가 아니라 자원으로 인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랫동안 음식물에 대한 열악한 제약조건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
- 비옥한 토지와 축복받은 기후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프랑스가 훌륭한 요리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님. 프랑크 왕국 시절인 8세기 경까지만 해도 프랑스 요리는 형편없었음. 당시 문헌들을 보면 많은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기록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음. 그들이 주로 먹었던 빵 또한 말랑말랑하고 먹기 좋은 것이 아니라 돌처럼 딱딱해 스프에 적시지 않고는 먹기 힘들 정도였음. 12세기에 들어서도 프랑스인들은 구운 고기와 데친 야채가 요리의 전부였음. 당시 영국의 요리문화와 비교해도 별반 다를바 없는 수준이었음. 그랬던 프랑스가 16세기에 벌어졌던 백년전쟁의 승리로 절대왕정이 공고해지고 유럽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식문화 또한 발달하기 시작. 특히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지역과도 교역을 하면서 다양한 농산물을 이용한 조리법을 알고 있었음. 그런데 프랑스 왕가에 이탈리아 부호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시집을 오게 되면서 프랑스 음식문화는 큰 변혁을 맞게 됨. 프랑스 요리를 소개하는 서적들을 보면 오늘날의 프랑스 요리법과 음식예절은 카트린이 소개한 식자재와 조리법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식탁예절을 그 원형으로 함. 당시 문헌에 따르면 카트린이 데려온 요리사가 각종 스프와 베샤멜 등의 소스, 브로콜리 요리법, 잼과 케이크, 설탕과자, 아이스크림 등을 프랑스 왕국에 처음 선보임. 그리고 왕실과 많은 귀족들은 그 맛의 황홀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함. 그 맛을 잊지 못한 프랑스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카트린이 소개한 요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식자재를 구매하기 시작. 그리고 비옥한 토지와 적합한 기후 덕에 그들의 시도는 풍족한 결실을 맺음. 또한 식사 후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디저트 문화가 퍼지고 난 뒤에는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해안에 배를 보내 얼음을 운송해오기도 했음. 이는 당시 프랑스 지배계층이 얼마나 식문화에 열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임
- 춘추시대에 풍성한 철학적 담론이 나오고 문화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생산성 향상에 기인. 춘추시대는 처음으로 철기를 사용한 시대였음. 병기구, 제례용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에 철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농기구에 철을 사용함으로써 산림을 개간하거나 넓은 농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됨. 특히 땅을 깊이 갈 수 있게 되어 농사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엇음. 철의 사용으로 기초적인 경제문제가 해결되자 많은 사람들이 생산활동 외에 다양한 문화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담론이 성숙했음.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군주들은 저마다 특색있는 통치철학을 내세울 수 있었으며 다양한 조세제도와 공공재 생산방식을 구현할 수 있었음. 자연히 백성들도 각 지역마다 어떠한 특색이 있는지, 어떠한 방식의 조세제도가 운영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됨.
- 해방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우리경제는 극심한 인플레를 경험. 45년 9월부터 12월 사이 물가가 112.9%나 올랐고, 47년에는 전년말 대비 128.1%나 상승. 49년에는 전년말 대비 486.4%가 상승함. 남한의 농지개혁법은 이런 인플레 상황에서 진행됨. 남한 정부는 5년 연부보상을 조건으로 소유자로부터 유상으로 토지를 취득하여 이를 소작농에서 나누어줌. 이 과정에서 지주의 재산형태는 토지라는 실물자산에서 채권 내지 현금이라는 현물자산으로 바뀜. 반면 소작농은 토지라는 실물자산을 취득하게 됨. 지주는 현물, 소작농은 실물 형태로 재산을 보유하게 된 상황에서 인플레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손해는 고스란히 지주의 몫이었음. 소작농이 갖고 있는 토지의 가치는 상승하지만 토지를 반납하고 취득한 지주들의 채권이나 현금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기 때문. 결국 전체 농지의 92%가 자작농에게 돌아갔고 수천년간 이어온 지주계급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해체됨.
- 순장문화는 절대왕권이 공고히 다져지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 국왕들이 자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고안해낸 위험방지 전략. 고대사회에는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경우가 많음. 따라서 당시의 국왕들은 주요 귀족 계층이나 지방 유력자 혹은 곁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자신을 누르고 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임. 즉, 고대 국왕들은 항상 암살이나 독살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생활해야 했음. 그래서 이러한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약 자신이 죽으면 지근에서 자신을 보필한 사람들까지 함께 묻혀야 하는 제도, 즉 순장을 고안해냄. 결국 고대 국왕과 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의 유인구조는 동일한 상황으로 바뀌게 됨. 쉽게 말해 왕의 주변 사람들은 왕이 살아야만 자신도 살 수 있음. 설사 자신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왕을 암살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결국 왕과 함께 묻히는 처지가 된다면 암살에 가담할 확률은 크게 떨어짐
- 2차대전 당시 독일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철광석, 석탄, 석유, 고무 등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음. 독일 본토와 점령지에서 확보한 자원만으로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 독일은 이러한 자원들을 전쟁과 관련없는 지역인 제3국으로부터 조달받고자 했음.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결제방법이었음. 대표적인 예로 독일은 석유를 중동지역에서 수입하고 있었음. 그런데 중동 국가들은 독일화폐는 물론이고 당시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이나 영국화폐로 결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독일, 미국, 영국의 화폐는 전쟁의 결과에 따라 언제든지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 즉, 이들 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가치의 저장수단이라는 기능이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의 매개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 고민끝에 독일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의 화폐로 결제하는 방법이었음. 독일은 스위스에 금괴를 팔고 스위스프랑을 얻어서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결제수단으로 사용. 따라서 독일 입장에선 스위스 프랑의 화폐가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해짐.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독일은 스위스를 침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침공하지 못하게 된 것. 결국 스위스가 2차대전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국의 화폐가 전쟁 참여국들의 결제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기축통화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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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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