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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제국주의

역사 2014. 10. 12. 21:11

 


과학기술과 제국주의

저자
대니얼 R. 헤드릭 지음
출판사
모티브북 | 2013-11-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제국주의에 대한 통념을 뒤집다! "그것이 어떠하였는가"현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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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함의 초기역사는 기술혁신과 제국주의의 동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보여줌. 맥그리거 레어드는 아버지가 주철공장과 조선소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니제르강 탐험대에 대한 관심으로 바꿀 수 있었음. 피콕은 고전에 대한 깊은 지식과 러시아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거주 영국인들의 본토와 빠른 연락에 대한 관심을 유프라테스강에 대한 증기선 탐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음. 이들의 관심이 합해져 동인도 회사는 포함의 첫번째 주요 구매자가 됨. 그리고 동인도 회사가 포함을 구입한 덕분에 우리는 기술혁신이 제국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제국주의적 동기가 기술혁신으로 이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음. 그보다는 수단과 동기가 호의적인 상호 피드백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자극했다고 말할 수 있음.
- 과학적인 기나나무 생산은 제국주의 기술의 대표적인 것임. 이러한 기술 없이는 유럽 식민주의는 아프리카에서 불가능했을 것이며 다른 열대지방에서는 비용이 훨씬 더 들었을 것임. 동시에 이 기술의 개발은 몇몇 식물원의 전문과학지식,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장려, 인도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의 땀과 노동, 이 모두가 하나로 묶여 신제국주의의 원인이자 신제국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은 분명함. 강을 달릴 수 있는 증기선은 열악한 수송 장애를 제거했고, 키니네는 말라리아를 제거. 이 두가지가 함께 작용해서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은 식민지가 되었음. 다시 말해 아프리카는 유럽과 유럽인들의 조건에 따라 거래하게 된 것임. 이제까지는 아프리카의 분할은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이후의 프랑스의 정치심리학이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야심의 결과 또는 수에즈 운하의 부산물로 종종 설명되어 왔고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할 바가 없음. 그러나 아프리카 분할은 증기선, 키니네 예방법, 속사 라이플의 결과이기도 했음.
- 근대 총포 발전은 소규모의 발전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결과. 이 소규모 발전의 출발점도 다른 경우가 많았고 어떤 경우는 수세기가 걸리기도 했음. 이 발전과정에서 두 단계가 특별히 중요함. 먼저, 격발뇌관, 강선, 장방형 탄환, 그리고 종이 탄약통을 통해 전장식 총포가 완벽해진 것. 두번째 단계는 후장식이 프러시아 침타총에서 시작되어 맥심기관총이 된 것임. 1860년대 전장식에서 후장식으로 기술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일반적인 기술발전이 아니었음. 유럽인들과 비서구인들 사이의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벌려 놓았고, 세기말의 제국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음.
- 1850년대 군사용 라이플은 그보다 앞서 나왔던 머스킷에 비해 정확성과 점화의 일관성면에서 훨씬 우수했음. 그러나 사용하기에는 여전히 시간이 걸리고 불편. 총신이 쉽게 막히고 연기를 내뿜었으며, 종이 탄약통은 약하고 습기에 취약. 최악인 것은 병사가 서 있을 때만 장전을 할 수 있었음. 아군보다 무장이 안된 적과 싸울 때는 그 이점이 상당했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음. 유럽의 식민지 군대가 압도적인 화력을 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후장식 혁명을 기다려야 했음. 총을 뒤로 장전하는 아이디어는 총포 설계에서의 다른 모든 기술 혁신과 마찬가지로 수세기 동안 반복해서 나타났다가 결국 현실화 됨. 퍼거슨, 라이플, 홀 라이플. 샤프스 카빈 같이 초창기에 실제로 쓰인 몇몇 후장식 총은 미국식 총으로 아마도 개척기에 화기에 대한 욕구 때문에 나타난 결과
- 제국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 해상제국임. 미노아인들,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바이킹족들은 모두 자기 주변의 바다를 한 동안 지배. 그러나 자신의 함대와 상선으로 세계의 거의 모든 바다를 지배했던 국가, 다시 말해 진정으로 전 지구적 제해권을 가졌던 나라는 단 한나라만 있었음. 19세기 대영제국이었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영국의 힘이 영국인들의 국민성의 독특한 강점이나 신의 은총에서 왔다고 주장. 또 다른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신뢰할 수 없는 성격과 탐욕 때문이라고도 했음. 한 아랍인 족장은 체스니의 유프라테스 탐험대 대원에게 이런 말을 했음. 영국인들은 개미같지요. 한 사람이 고기 한점을 발견하면, 백명이 따라붙지요. 그러나 지구상의 바다를 휘어잡는 데는 신의 은총이나 신뢰할 수 없느 성격과는 다른 것이 필요. 우수한 기술과 그 기술을 지지해줄 경제력이 필요. 영국인들이 어렵게 획득한 해상패권은 19세기 초 미국의 조선 붐에 의해 위협을 받음. 미국인들의 조선붐은 값싼 목재를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었던 데서 온 것. 그러나 쇠로 배를 만들게 되면서 영국인들의 우위는 보호됨. 영국은 1840년에 세계선박 총톤수의 4분의 1을 소유하고 있던 데서 1850년에는 42.7%로 늘었고, 1차대전까지 40%에서 50% 사이를 유지. 1890~1914년 사이에는 세계의 해상무역의 반이 영국인 소유의 배에 의해 이루어졌고, 영국은 세계의 새로운 선박의 3분의 2를 건조. 영국이 증기엔진과 금속 선체 산업에서 선두를 유지하는 데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음. 영국은 영향권 내에 있는 해안들에서 몇 마일 안되는 곳에 세계적으로 가장 질 좋은 증기선용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된 곳을 갖고 있었음. 편리한 석탄 공급항의 경우처럼 나중에 인도양 주변(나탈, 벵갈, 보르네오)에서 발견된 석탄의 대부분도 영국의 식민지에서 나온 것. 영국은 세계 해저 케이블 망을 지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해상 석탄 공급도 실제로 독접. 이 요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20세기의 석유, 무선통신과 비교하면 잘 드러남. 석유, 무선통신 가운데 어느것도 그것을 소유한 나라에 석탄과 해저 케이블을 통해 영국이 누렸던 정도의 우위를 제공하지는 못했음.
- 19세기에 해운업과 통신이 크게 팽창했던 것은 세계의 경제에 관련해서 일어났던 그보다 훨씬 더 큰 변화의 일부분이었음. 모든 역사시대를 지나서 19세기까지 오면서 동양과 서양 사이의 교역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었음. 하나는 중동을 통하든 아프리카를 돌든 운송비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차, 자기, 향신료, 인디고, 비단, 진주, 보석, 금괴나 은괴 같이 아주 귀한 물건들만 교역할 가치가 있었음. 다른 하나는 교역의 본질상 균형이 맞지 않았다는 점. 동양은 유럽인들이 탐내는 상품들을 공급했지만 유럽인들은 금괴나 은괴, 그리고 나중에는 아편 외에 줄 것이 거의 없었음. 이런 오래된 시스템을 깬 것이 증기선이었고, 서로 부피 큰 상품들은 저가의 운임으로 교환하는 새로운 경제관계를 촉진시킴. 유럽은 산업생산품(면, 기계류, 철, 석탄)을 동양의 값싼 농업생산품과 원자재(밀, 쌀, 황마, 고무, 구타 페르카, 주석)및 다른 생산품과 교환
- 증기, 케이블, 수에즈 운하는 그보다 500년 전의 신대륙 발견 보다 더 동서양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킴. 포르투갈의 소형 범선과 스페인의 갤리온선은 바다 때문에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접촉하게 함으로써 전 지구적 에쿠메네로 완성. 그리고 19세기의 새로운 기술로 인해 상품과 사람과 사상이 끊임없는 흐름으로 바뀜. 제한적인 교역관계를 갖고, 고립되어 있던 자급자족 경제가 19세기의 새로운 기술로 인하여 기본적인 상품을 취급하는 단일 세계시장의 부분이 됨. 그들의 전통적 교역, 기술, 정치관계는 약해지고 서양의 기술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전 지구적 문명의 기초가 놓이게 됨
- 19세기 중반의 제국주의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촉수가 인도에서 버마, 중국, 말레이반도, 아프가니스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홍해로 뻗어나간 것. 영토 면에서는 이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으로 신제국주의를 표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19세기 말의 몇십년 동안 아프리카를 서로 가지려고 한 것. 그러나 아프리카의 분할이 이윤획득의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공통된 시각. 이런 점은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설명할 수 있음. 발명품 하나하나를 기술과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비추어 보면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음. 그러나 기술혁시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 때문에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패턴을 보지 못해서는 안됨. 어느 시대에나 기술의 진보는 있었지만 아프리카 분할에 참여한 제국주의자들에게 유용했던 혁신기술들은 1860년에서 1880년의 20년 동안에 특히 많이 나타나 그 첫 효과를 발휘했음. 바로 이 20년은 키니네 예방법으로 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고, 제국의 변경에 주둔하던 군인들 사이에서는 속사의 후장식 총이 전장식 총을 대체하던 때였고, 복식기관, 수에즈 운하, 해저 케이블로 인해 증기선이 정부 보조금을 받는 우편물 로트만이 아니라 원양의 보통 화물사업에서도 범선에 대해 경쟁력을 갖추게 된 기간이었음. 1880년에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해 떠났던 유럽인들은 그들보다 20년 먼저 떠났던 사람들보다 자연에 대해서 또 자신들이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훨씬 우세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고,더 안전하고 편하게 임무를 달성할 수 있었음.
-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 제트비행기, 위성, 무기시스템 같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강대국 정부만 연구개발비를 댈 수 있고, 또 일반적으로도 강대국 정부들만 적극적으로 연구개발하려는 주요 기술혁신에 익숙해 있음. 19세기 유럽국가의 정부들은 제국주의 외에도 신경써야 할 다른 문제들을 많이 갖고 있었음. 산업화, 사회 갈등, 국제적 긴장, 군사 준비태세, 그리고 예산의 균형을 위한 노력 같은 모든 문제들이었음. 영, 프, 벨, 그리고 독일의 지배집단 내부에서는 식민지가 필요한가와 제국주의의 비용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음. 후장식 총, 기관총, 증기보트, 증기선, 키니네 예방법과 다른 기술혁신의 결과물들은 침투, 정복, 새 영토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을 재정적인 면과 인간의 조건, 모두에서 낮추어준 것. 이 기술들 때문에 제국주의의 비용효과가 커져서 정부만이 아니라 작은 집단들도 제국주의에서 한 역할을 하게 됨
-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낸 토킹 드럼을 이용해서 소통할 수 있음. 유럽인들은 이것을 부풀려서 거대한 신화로 만들고, 아프리카인들은 밤에 북의 진동을 이용해서 대륙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 물론 이 신화는 서양인들이 장거리 통신에 얼마나 집착해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 실제로는 19세기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음. 아편전쟁 이전 중국의 조정은 광저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틀린 정보를 갖고 있었고, 영국, 버마,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개발을 모르고 있었음. 니제르 강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그 강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있었음. 스탠리는 콩고에서 화기나 백인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남. 아프리카 전역에서 전사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서만 배웠고, 이웃의 경험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었음. 물론 아프리카인들이나 아시아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경우들이 분명히 있기는 함. 인도의 토호들은 유럽인들을 고용해서 병력을 훈련시켰음. 에티오피아의 베즈비스 카사는 영국군 병장에게 캐논포를 만들게 했고, 사모리 뚜레는 프랑스에서 총포술을 배워오도록 대장장이를 보내기도 했음. 메흐메트 알리는 나라를 근대화하려는 속성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유럽인 엔지니어들과 관리를 두었음.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그 자체가 매우 드문일들이었고, 대부분 불충분했다는 점. 19세기에 서양의 기술발전을 따라갈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 뿐이었음. 그러나 대조적으로 서양인들은 기술적인 것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 있어서도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임. 아프리카에 있던 서양의사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프랑스와 영국에서 발표했으며, 미국의 대포 제작자들은 자신들의 제품을 런던에 전시. 영국 전문가들은 대포제조기술을 배우러 미국까지 갔고, 울즐리 장군은 제안을 하기 위해 미국의 발명가 히람 맥심을 방문. 맥그리거 레어드는 니제르강에서 일어난 알에 대해 듣고 고무되어 새로운 종류의 배 만들기를 시험하게 되었음. 네덜란드와 영국 식물학자들은 아시아에서 기를 식물을 얻기 위해 남아메리카까지 갔고, 인도네시아에 있던 서양 과학자들은 세계의 독자들을 위해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논문을 발표. 가장 최신형 라이플은 각국에서 모방되어 시험을 위해 식민지로 보내짐. 우편과 전신에 의해 전세계의 산물, 가격, 상품의 양에 대한 최신정보가 전 세계로부터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들어가기도 하고, 소식이 전해지기도 함. 그리고 주요 신문은 해외에 특파원을 보내 먼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자세한 기사를 실음. 지금이나 그때나 서양의 사람들은 가장 최근의 뉴스에 굶주렸으며 유용한 기술혁신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철이든 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이든 키니네 예방법이든 기관총이든 복식 기관이든 한 곳에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 존재가 다른 곳에 빠르게 알려지고 실제로도 이용됨.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토착민들이 자신들의 이웃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더 많았음. 이것이 유럽인들이 가진 토킹 드럼 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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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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