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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7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저자
김덕호, 문지영, 이정희, 송충기, 박진희 지음
출판사
에코리브르 | 2013-09-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근대 산업 사회를 형성한 주역이자 자본과 노동의 중재자로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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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엔지니어는 자수성가한 기술자들의 사회적 지위향상 노력을 통해 형성. 하지만 이들 초창기 엔지니어를 배출한 도제 제도가 강력하게 유지되면서 전문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대학에서의 공학교육이 매우 더디고 불완전하게 진행되었으며,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 또한 전문직업인으로 정착하는데 그침. 프랑스의 엔지니어는 상층부의 국가 엔지니어와 중하층의 민간 엔지니어가 뚜렷하게 구별됨. 18세기 말 이래 프랑스는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국가엔지니어를 양성. 이들은 혁명(프랑스 혁명, 산업혁명)과 전쟁(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두가지 키워드로 대변되는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부산물이었음.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로 성장한 국가 엔지니어는 19세기 중엽부터는 민간엔지니어와 경쟁하면서 학교서열과 교육내용이 계급적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엔지니어 집단 내부에 다양성과 계층화가 진행. 독일의 경우 19세기 초부터 정부가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엔지니어 양성과 수급에 나섰다는 점이 두드러짐. 프랑스와 달리 독일의 국가적 지원은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민간 엔지니어 양성으로도 이어짐. 교육을 통한 산업부흥이라는 모토아래 바우 아카데미부터 폴리테크닉 학교, 고등기술학교로 이어지는 다양한 근대 엔지니어 양성기관이 발달. 이들 교육기관과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는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
- 유럽의 사례를 추종하려 한 미국에서는 그와 같은 선진모델을 채택하면서 미국적 엔지니어를 형성. 미국의 근대 공학교육은 프랑스를 모방하면서 시작.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영국식 도제훈련방식의 영향이 컸음. 이리 운하 건설사업 같은 공공 토목 프로젝트는 사회적 측면에서 엔지니어 양성 공간 역할을 수행했지만, 연방정부는 1862년 모릴 법을 통해 주립대학이 공과대학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정문제를 해결해줌. 모릴 법 때문에 이들 대학에서 엔지니어가 대규모로 배출됨.
- 산업화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기술교육, 즉 공학교육은 각국의 산업 및 경제발전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거칠게 답한다면, 유럽의 대부분 고등 기술교육 기관이 가졌던 우선적 관심은 그 시대 산업이 요구하는 종류의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음. 요컨대 반복적으로 공론화된 국력에 대한 우려가, 즉 상대적 쇠퇴에 대한 우려가 새로운 형태의 교육 기관에 대한 공적 투자를 이끌어낸 경우가 더 많았음. 덕분에 신설하는 기술교육 기관은 대부분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존 엘리트의 보수적 태도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이들 기관은 사회적, 문화적 보수주의 성향을 갖게 됨. 그 결과, 대학의 학문 경력주의와 위계구조는 실제적 훈련보다 이론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며, 학문화 과정이 전개됨. 그리하여 원래는 산업을 위해 만든 학교가 공학의 중심지로 진화하게 됨.
- 엔지니어로서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과정을 보면, 미국 엔지니어가 국가와 독특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 뚜렷해짐. 예컨대 이리운하 건설사업같은 공공 토목 프로젝트가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역할을 수행. 이런 공공사업의 감독자들이 엔지니어-관리자-공직자를 겸하는 계층으로 성장했고, 이들이 장인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엔지니어로 여겨짐. 한편, 유럽국가와 달리 미국의 상류층에서 엔지니어를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한 사회문화적 배경에는 전통적 상류층이 부재한 미국에서 엔지니어-관리자나 발명가-기업가가 나름대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것도 있음. 이 점에서 미국 엔지니어가 19세기 후반에 겪은 위계화의 한 뿌리는 19세기 전반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음. 프랑스 엔지니어와 달리 미국 엔지니어는 초창기부터 독립적인 엘리트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을 지닐 수 없었으며, 전문적으로 집단의 진입을 제한해 엘리트로서의 특권을 유지하지도 못했음. 즉, 특권적 권리를 갖는 엘리트 엔지니어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음. 현장 경험을 존중하는 풍토 때문에 프랑스나 독일처럼 국가 엔지니어와 민간 엔지니어 간의 장벽도 없었으며, 학위증이 엔지니어의 지위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기능하지도 않았다고 보아야 함.
- 앙시앵 레짐 이래 프랑스 엔지니어는 대부분 고위 기술관려, 공병장교 등 국가 엔지니어단에 소속되어 높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특권을 향유. 이성적, 합리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계몽주의 시대의 엔지니어는 높은 교육적 성취와 과학지식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공학교육=엘리트 교육 또는 엔지니어를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인식하는 풍조가 조성됨. 19세기 영국의 도제제도와 대조를 이루며 주로 이론교육에 집중했던 프랑스의 고등공학교육과 국가 엔지니어의 단체정신은 공익정신과 애국심에 바탕을 둔 직업적 의무를 이행하는 데 충실하게 했음. 이로써 엔지니어는 귀족들 사이에서 모집한 공병장교보다 높은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썼으며, 지휘관 또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음.
- 18~19세기 프랑스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과 성장은 자율적 진화과정이라기보다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논리에 따른 시대적 산물로 볼 수 있음. 계몽주의 시대의 진보개념과 함께 출현한 근대 엔지니어 집단은 국가 및 사회의 진보와 직결되는 대중적 이미지와 정체성을 발전시켜 갔으며, 19세기 산업화 초기에는 실증주의와 생시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회개혁가, 또는 중재자로서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며 조직화의 길을 걸음. 국가 엔지니어와 경쟁하던 산업화 초기 민간 엔지니어의 정체성과 위상은 엔지니어가 민간부문의 산업생산에 관심을 갖도록 프랑스 정부가 체계적으로 유도한 결과, 곧 국가가 제공한 새로운 기술교육 및 직업 모델을 통해 형성됨. 민간 엔지니어 직업이 형성된 데는 프랑스 혁명이 끼친 간접적 효과도 있었음. 혁명으로 길드가 와해하면서 숙련된 장인을 양성하던 도제제도가 약화되었고, 혁명의 결과 기계 관련 기술자와 기계공 같은 숙련 노동자의 부족현상이 심화됨. 특히 석탄업과 제철업 같은 분야에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는데, 이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은 새로운 엔지니어 양성 및 직업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음.
- 우선 독일 엔지니어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해 탄생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님. 국가가 근대화의 필요성 때문에 이들을 양성했고, 또 양성한 다음에는 이들을 고용. 그러므로 한마디로 이들은 적어도 초기에는 (나중에는 민간부문의 기술자도 양성했지만)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엔지니어였음. 둘째, 이들은 주로 공식적 교육기관을 통해 양성되어음. 독일은 어느나라보다 자격증 제도가 발전한 국가인데, 엔지니어라는 직업도 마찬가지였음. 공식적 교육과정을 거쳐 국가가 주관하는 자격증을 획득해야 비로소 이들은 엔지니어라는 신분을 감출 수 있었음. 셋째, 수공업적 전통임. 독일에는 지금도 수공업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근대 엔지니어의 형성과정에서도 장인정신 및 도제식 수업같은 수공업 전통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이것은 엔지니어 집단의 정체성에서뿐만 아니라 이들의 양성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났음. 예컨대 실무적 현장을 중시하는 점이 독일 엔지니어의 독특한 성격으로 남았음.
- 영국에서 엔지니어는 오랫동안 공병, 즉 군대 엔지니어를 가리키는 용어였음. 그러나 1770년 무렵 민간에서 군대 엔지니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전문기술자가 등장했고, 이들은 공병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민간 엔지니어라고 불렀음. 이들은 1760년부터 도로와 운하건설같은 토목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철도부설, 증기기관차와 정밀공작기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 이런 민간 엔지니어는 컨설턴트, 독립사업가, 피고용인 등 여러 지위를 갖고 있었음.
- 유럽 대륙에서는 일찍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은 공학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이론과 실기를 혼합한 교육을 통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했음. 그러나 영국은 다른 길을 걸음. 산업혁명 이후에도 실기 위주의 전통적 도제 제도를 통해 기술인력을 양성했으며, 이는 근대 엔지니어가 등장한 뒤에도 계속됨. 특히 전문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귀족형 도제제도인 문하생 제도가 거의 필수코스였음. 말하자면 실력있는 엔지니어의 작업장 또는 기술현장이 전문교육 기관 역할을 한 것. 그리고 오랫동안 토목엔지니어 협회 같은 전문 단체의 회원가입여부가 엔지니어로서 자격을 증명하는 장치로 작용했음. 이런 방식은 의사, 법률가 같은 영국의 다른 전문직 양성에서도 일반적이었음. 영국 왕실은 민간단체에 왕실 특허장을 수여해 권한을 위임하고 그 단체가 스스로 인력 양성과 자격조건을 규제하도록 했음. 왕실 특허장을 받은 법률가 단체 또는 의사단체가 인정하는 교육기관이 양성과정을 규제했으며, 대학교육이 이들 전문직의 자격요건은 아니었음. 이는 한편으로는 전문단체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교육의 정착과 확산이 프랑스나 독일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기 때문.
- 미국은 영국처럼 산업혁명에 의한 비약적 경제성장에 따라 교통망 구축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후진국으로서 국가차원에서 기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이었음. 또한 항구도시와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지역 사이의 원활한 물류이동을 위해서도 대규모 공공사업이 필요했음. 아울러 신생국의 13개주를 하나의 연방으로서 효율적으로 통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런 공공사업은 연방 혹은 주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되었음. 그 결과를 우리는 교통혁명 혹은 운송혁명이라고 부름.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미국에서는 영국과 달리 연방정부 혹은 주 정부가 필요한 경우 산업화의 토대를 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 이는 미국이 모든 분야에서 자유방임 정책을 지속했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어긋나는 현상이기도 함. 미국에서 공공기관의 의지와 재정적 도움이 없었다면, 즉 건국 초기에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았따면 토목 엔지니어는 미국사회에서 그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임.
- 초기 미국 기계 엔지니어의 대체적 정체성은 식민지 시기부터 내려온 명문가의 일원이거나 그들과 합작한 장인이었음. 명문가 출신의 기계 제작자는 당연히, 비록 근대적 과학중심 교육은 아니지만,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 또한 서로 혼인관계로 연결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정부의 권력을 동원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 존 스티븐스 3세는 미국 특허법 제정과정을 주도한 가장 강력한 청원자였으며, 리빙스턴은 당시 미국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외교상대인 프랑스 대사였음. 영국 출신 슬레이터처럼 그들과 합작한 상인은 기계제작자로 변신하면서 유서깊은 명문가의 일원이 되거나 그에 버금갈 정도로 신분상승을 이루어 당대나 다음 세대에는 명문가와 혼맥으로 연결됨. 예를 들어 풀턴은 리빙스턴가의 사위였으며, 루즈벨트는 라트로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
- 제퍼슨 대통령 시대(1801~188) 이후 미국은 영토팽창과 인구증가에 직면해 대서양 연안과 내륙을 연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음. 특히 1803년 루이지애나를 매입한 뒤에는 미국의 영토가 두배 이상 넓어졌음. 훗날 교통혁명이라 일컫는 일련의 대규모 토목사업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 여기에 필요한 토목 엔지니어는 1세대 토목 엔지니어에 의해 영국적 도제식 현장교육을 통해 양성됨. 게다가 무엇보다 이리운하 건설은 현장 훈련 시스템이 미국에서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줌. 이 운하 공사를 통해 많은 토목 엔지니어가 배출되었으며, 1825년 이리운하가 완공된 후에는 이곳에서 양성된 엔지니어가 미국 전역에서 토목사업 분야의 주역으로 등장. 즉, 운하뿐 아니라 철도나 수로사업, 도시의 하부구조 건설 등에서도 그들의 토목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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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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