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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

경영 2014. 12. 7. 10:36

 


대국굴기

저자
왕지아펑, 천용, 가오다이, 가오이, 리공전 지음
출판사
크레듀 | 2007-08-14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양성희.김인지 공역 양장본 | 384쪽 | 223*152m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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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블루 오션을 찾아 바다로 나아가다- 포르투갈, 스페인
근대사회는 인류의 활동 영역이 육지에서 바다로 옮겨가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을 비롯한 선진 유럽 국가들은 충분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진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외부 진출을 꺼렸다. 그러나 비교적 낙후되어 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인류사회에 새로운 발전이 시작되었다.
- 15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 국가의항해는 기본적으로 국가주도 사업이어서 개인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 표면적으로 보면 정화의 함대보다 인원이나 규모 면에서 훨씬 못미쳤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항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있어도 황제 혹은 일부 대신의 일시적 관심뿐이었음. 물론 당시 중국의 상인들은 해외로 나가 무역을 하고 싶어했지만 황제는 이들을 지원하지 않았음. 오히려 외국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금지시킴. 반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전체적으로 항해규모는 작았지만 이것이 국가와 국민이 공동으로 노력하고 참여한 국가 핵심사업이었음.
- 해외영토확장은 원하는 대가 혹은 기회를 국내에서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눈을 해외로 돌리면서 나타난 결과임. 이것은 결국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함. 만약 그때 영토확장이 없었다면 모두가 불행과 불만을 안고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임. 결국 영토확장만이 모두에게 만족과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음.
- 영토확장의 원동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원인은 종교의 힘. 중세 유럽의 카톨릭 교회는 정치 및 경제적 영향력이 매우 컸으며 유럽인의 의식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침. 카톨릭 교회가 영토확장을 지지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 7세기 이후 유럽 주변에서 이슬람 세력이 크게 성장하면서 서유럽의 카톨릭과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 이에 카톨릭 교도들은 교황의 기치하래 수백년에 걸쳐 이슬람 토벌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치렀음. 하지만 15세기 중반 서아시아에서 이슬람을 신봉하는 오스만투르크가 세력을 떨치면서 서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을 위혐. 이에 교황은 동서 양쪽에서 이슬람 세력을 협공할 수 있는 동방의 협력자를 찾는 한편, 새로 정복한 땅에 카톨릭을 전파하여 세력을 넓히길 원했음. 그래서 카톨릭 교회는 식민지 영토확장을 적극지지했음.
-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영토확장은 제국건설, 유럽의 독특한 문화 배경과 관련이 깊음. 첫번째, 중세 유럽의 도시간 경쟁때문에 이베리아 반도 국각가 영토확장에 나섬. 본래 향료의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제노바 양대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통해 지중해를 건너 서유럽으로 들어옴. 그러나 1453년, 오스만투르크가 이스탄불을 점령한후 제노바 상인들은 지중해 무역에서 크게 힘을 잃었고, 이후 베네치아 상인들이 향료무역을 독점하게 됨. 그러자 제노바와 다른 서유럽 도시상인들은 베네치아 상인의 향료무역독점을 타파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자금과 인력을 이베리아인에게 집중시켜 대서양 탐험에 나섬. 물론 이들의 목표는 새로운 바닷길을 열어 베네치아 상인의 독점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음. 두번째는 융통성있는 인재활용과 투자방식임. 당시 유럽에서는 아무 제한없이 인재와 자금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음.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고, 그는 포르투갈에서 항해술을 익혔으나, 결국 에스파냐를 위해 신대륙을 발견. 마젤란은 포르투갈 사람으로 포르투갈 군대에서 동방 식민지 활동을 하면서 항해술을 익혔으나, 역시 에스파냐의 이름으로 세계일주 항해를 함.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에는 여러 국가의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260명의 선원이 함께함.
- 왜 유럽의 다른 나라가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가 그 주인공인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음. 첫번째는 두 나라가 신항로 개척을 위해 대서양으로 진출하기에 적합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 두번째는 다른 서유럽 국가보다 빨리 통일 민족국가이자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했기 때문.
- 정확한 기회포착과 적극적 행동은 반드시 한 세트가 되어야 함.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두 국가는 예부터 아주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 바로 외국의 인재와 자금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임. 만약 다른 나라 특히 이탈리아의 인재와 자금이 없었다면 이베리아반도의 두 국가는 대규모 영토확장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임. 외국의 자본과 인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린 마음, 용기, 지나치게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 등이 필요함.
- 제국쇠락의 교훈
(1) 봉건전통의 잔재가 뿌리깊게 남아 있음 : 봉건귀족들은 자본주의가 싹틀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았고, 제국의 횡포 아래 상공업자와 농민은 사회적으로 설 곳을 잃고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음. 이것은 곧 제국 병사들의 전투력 저하로 이어졌고, 경제가 쇠락하면서 제국도 쇠락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됨
(2) 제국의 통치자가 이상만 가득한 비현실 주의자뎠으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킴.
(3) 최고통치자가 종교문제를 잘못 처리하면서 커다란 국력손실을 초래 : 에스파냐 제국의 황제는 무어인과 유대인을 이교도로 간주하고 핍박하거나 추방했음. 이렇게 상공업 분야에 종사하던 무어인이 대거 추방당하자 본래 기반이 약했던 에스파냐 상공업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짐. 또한 에스파냐 황제와 카톨릭 교단은 이교도 탄압 수단의 하나로 마녀사냥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부녀자들이 목숨을 잃음. 에스파냐의 종교정책은 국가내부의 결속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국민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능력개발을 제한시킴
(4) 영토확장과 식민지 사업성공은 에스파냐 사회에 부정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음 : 당시 에스파냐 사회는 농업이나 수공업은 하층민이나 가난한 이민족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음. 이런 사회분위기는 에스파냐 제국의 농업 및 수공업 몰락의 직접적 원인이 됨.
2장 '안전'까지 사고팔았던 바다의 상인- 네덜란드
17세기, 세계무대를 독주하며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네덜란드. 손바닥만한 나라 네덜란드가 어떻게 경제 대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네덜란드인들의 어떤 사고가 이런 전대미문의 기적을 만들어 냈을까? 네덜란드의 역사를 통해 경제 대국의 비결을 고찰한다.
- 1600년부터 네덜란드에서는 회사합병운동이 일어나기 시작. 그 결과 1602년 전국적 규모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 연합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 시스템을 기반으로 성립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조직적이었고, 새로운 제도와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음.
(1) 동방무역 회사의 상업자본을 하나로 모아 거대 자본을 형성. 여기에는 국가의 전폭적 지지가 뒷받침됨. 네덜란드 상인들과 국가의 이익이 결합하여 탄생한 동인도 회사는 강력한 확장력을 바탕으로 경제, 정치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갖춤. 상인들의 부와 국가권력이 완벽하게 결합하여 탄생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빠르게 힘차게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 17세기에는 유럽 최대의 아시아 무역국이 될 수 있었음.
(2) 안정적이고 효율적 시스템.
(3) 무역투자의 장기화를 실현시켰으며, 불안정한 소규모 합작회사라는 구조를 대규모 근대 주식회사로 변모시킴.
- 17세기 네덜란드, 19세기 영국, 20세기 미국은 각각 세계 패권을 거머쥐고 전성기를 누림. 소위 패권대국이란 국토면적이 넗은 대국이란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세계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힘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 만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력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세계를 움직일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 윌러스틴은 이 3국의 국명에 연합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음도 지적. 17세기 네덜란드는 연합공화국이었고, 영국도 연합왕국이고, 미국은 아메리카 합중국이란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음. 이것은 일종의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말임.
3장 변혁을 주도한 산업혁명의 기수- 영국
전 세계 면적의 0.2%, 인구 2,000만 명에 지나지 않는 섬나라 영국. 그들이 19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강대하고 부유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모든 산업에 생산혁명을 일으키며 이후 수많은 개발 국가의 모델이 되었던 영국의 강력한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본다.
- 영국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중 하나는 명예혁명임. 명예혁명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당시 사회상황에 알맞고 생산력 향상을 지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마련되었기 때문. 이 정치체제는 영국사회를 보다 여유롭고 평화롭게 만들어 주었고, 사회와 경제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음. 영국인들은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고, 이것은 곧 영국사회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짐.
4장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다- 프랑스
전세계 정치 민주화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했던 프랑스. 하지만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혼돈 속에서 현대 민주화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기까지, 그 고행의 길은 짧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자신들의 고난을 정신적 유산으로 삼고, 현대 문명의 발원지와도 같은 문화적 성과를 창출하게 된다.
- 17세기 해상을 제패했던 바다의 마부 네덜란드, 하지만 18세기 초, 네덜란드의 국력이 쇠퇴하자 동시에 강자로 떠오른 영국과 프랑스는 바다에서의 승패 다툼을 시작. 영국과 프랑스는 해양 무역의 발전을 위해서 해외식민지 개척을 무엇보다 중요시함. 때문에 양국은 북아메리카와 북아프리카, 인도에서 대규모 식민지 확장을 진행. 패자를 건 그들의 싸움이 식민지 쟁탈전으로 귀결된 것. 실제로 영국은 명예혁명(1688년)이 일어나고 수십년 동안 줄곧 시기적절하게 국제전쟁을 이용해 프랑스의 식민지 이익을 줄여나감. 반대로 이러한 영국의 공격에 겨우 맞섰던 프랑스는 매번 실패와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7년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거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어버림. 이러한 실패가 프랑스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음. 이로 인해 19세기, 영국은 세계패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영어권 국가의 위세와 명성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
-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실패하게 된 원인. 첫째, 프랑스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해외식민지가 아니라 유럽 대륙의 패권이었음. 둘째, 당시 역국은 해외 식민지 개척에서 가장 큰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공업경제사회였음. 근본적 원인은 아무래도 당시 프랑스의 정치제도가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패하고 낙후되어 있었다는 점.
5장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키우다- 독일
독일은 유럽 대륙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다. 여러 국가와 면해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늘 민족의 경계가 불문명한 국가였다. 그러나 200년간의 현대화 과정을 겪으며 분열, 전제, 독재로 얼룩진 낙후된 농업 국가에서 자유와 민주를 갖춘 고도의 공업 사회를 이루게 된다. 그 중심에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한 ‘통일’이 있었다.
- 프랑스가 완전한 민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파리분지가 중심적 역할을 했음. 하지만 독일에서는 국가발전의 중심지가 동쪽으로 옮겨지면서 라인강이 그러한 역사적 기능을 하지 못했음. 이렇게 복잡한 산맥과 어지럽게 교차하는 강들이 독일의 정치적 분열에 일조를 하게 됨.
- 비스마르크가 시행했던,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 통일방안은 고도의 예술성과 정치적 기술, 그리고 힘의 평형이라는 기반위에 만들어진 것. 독일민족의 힘이 소독일 통일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제한성 때문에, 또 이 정책 체제가 동서양의 중간에 있다는 특징 때문에, 대외 정치권력 또한 비스마르크의 신중한 게산을 통해 행해졌기 때문에, 이 새로운 제국이 지금의 영토에 만족하고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당시 이웃국가들은 새로 탄생한 이 통일국가를 동양과 서양세력의 완충지였던 독일연방의 계승정도로만 생각했음. 특히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가 이전처럼 중부유럽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형편이 못된것도 커다란 역할을 했음.
- 독일민족을 포함한 모든 유럽민족은 민족국가라는 형식이 현대화 사회의 조직형식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함. 때문에 반드시 새로운 유럽민족이라는 개념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야 함. 그렇지 않으면 미래의 유럽은 여전히 불안정할 것이기 때문.
6장 시대의 흐름을 따른 백년 유신의 선물- 일본
일본은 백년간의 유신을 통해 낙후된 봉건국가에서 아시아 유일의 자본주의 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강대국이 되기 위해 군국주의를 택했고, 무력을 남용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시아 유일의 강대국으로 꼽히는 일본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긴다.
7장 유일무이한 슈퍼 강국을 갈망하다- 러시아
러시아는 언제나 강대국이 되기를 갈망했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진실로 위대한 민족은 인류 역사에서 조연의 역할을 맡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주인공에도 만족하지 않는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유일무이한 역할이다.”러시아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바로 전세계를 압도하는 슈퍼 강국이 되는 것이었다.
- 1차 5개년 계획기간이었던 29~33년까지 자본주의 국가는 대공황을 겪음. 하지만 소련을 그 기회를 이용해 서방세계로부터 선진기계설비를 들여왔으며, 많은 돈을 들여 외국의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초빙했음. 31년초 소련은 외국자본가들과 손을 잡고 무려 124개의 원조프로젝트를 성사시킴. 이렇게 공업이 발전하에 따라 서양경제에의 의존성이 크게 줄어듬. 37년 소련의 수입량 중 기계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0.9%정도로 보일러와 발전기, 농기계 및 트랙터는 수입이 중단되기도 했음. 이 모두는 소련의 경제가 독립성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임. 하지만 이로 인해 소련은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이용할 기회를 잃게 되었고, 이는 국력증강에 영향을 미침.
- 스탈린의 발전모델과 중앙집권형 정치, 경제체제로 인해 소련은 불과 10여년만에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유럽 1위, 세계 2위의 공업국가로 변모.
- 브레즈네프 집정시기, 국제무대에서 소련의 지위 역시 최정점에 달함. 하지만 자꾸 쌓여가는 내부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음. 소련이 안고 있던 내부문제는 (1) 소렴의 쇼비니즘과 패권주의는 각국의 질타와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음. 게다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커다란 장애를 만난 소련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고 맘. 설상가상으로 강력한 핵무기 보유국인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진흙탕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함. (2) 충분한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국의 지위를 얻음.
8장 도전과 스피드로 진화한 세계 제일의 강대국- 미국
겨우 20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20세기 초에는 영국의 발전을 뛰어넘었고, 중반에 이르자 러시아와 함께 냉전시대를 이끄는 양대 강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로는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모두가 그렇듯 미국 굴기(屈起) 또한 복합적인 작용의 결과이다. 하지만 어느 단계, 어느 시기에, 어떤 요인이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는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서진운동(1789~1865)은 서부개척 뿐 아니라 미국 현대화 과정의 밑거름이 됨. 서진운동이 미국현대화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음
(1) 서부에서 생산된 밀, 면화, 소고기가 산업혁명이 일기 시작한 동북부와 이즈음 시작된 도시화에 필요한 식량과 원료로 공급됨. 특히 면화는 동북부의 방적, 방직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원료공급원이 었음.
(2) 서부개척활동을 위해서는 대량의 농기구, 교통운송기구가 필요했는데, 이는 동부의 자본가와 기업가들에게 서부에 공장을 건설하고 투자하려는 의욕을 불러일으킴. 특히 수요량이 많은 기계의 경우 아예 서부로 공장을 옮겨와 현지생산에 들어감으로써 미국의 제조업이 서부로 이동하는 계기가 됨
(3) 제조업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1815년~1850년 사이에 수많은 운하가 개통되었고, 1850년 이후 철도망이 서쪽으로 확장되기 시작. 철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시키고를 중심으로 한 오대호 중공업지대가 급속히 성장. 당시 미국의 중공업은 철도용 강철 뿐 아니라 각종 기계 및 자동차 생산에서도 빠른 성장세를 보임. 이때부터 미국의 제조업은 뉴잉글랜드에서 중서부로 옮겨갔고, 미국의 사업구조가 경공업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
(4) 제조업 지대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중서부에도 중공업이 발달하기 시작. 철도로 상징되는 교통혁명은 도시에서 동떨어진 서부의 농업을 미국의 산업화와 상품화 과정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만듬. 또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서부농업에 반기계화 및 기계화가 실현됨. 이런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서진운동은 미국의 대국굴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 대국굴기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산업화에 직접적 원동력으로 작용했음.
- 미국은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 패권의 자리에 올랐을까?
(1) 2차대전이 터지자 미국은 중립노선을 버리고 참전을 결정. 이로써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노선은 막을 내림
(2) 중립정책이 막을 내림에 따라 미국의 대외무역정책도 변화. 이때부터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대량의 군수물자와 군비를 제공. 이것은 미국을 민주주의의 병기창으로 만드는 한편, 2차대전이후 미국을 세계 최대 채권국가로 만듬. 48년까지 미국의 산업생산량은 세계 총생산의 53.4%에 달했고, 세계 총수출액의 32.4%를 차지. 또한 전세계 황금의 74.5%를 미국이 보유하고 있었음.
(3) 44년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열린 세계 금융회의에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설립을 결정. 달러를 기본화폐로 하는 국제금융조직이 생김
(4) 2차대전 참전으로 미국은 자국에서 생산한 무기보급을 최대한 확대. 그 결과 2차대전이 종결될 당시 미군의 규모는 1200만명에 달했고, 미국의 군수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
(5) 반파시스트 동맹결성을 통해 2차대전 종전이후, 윌슨이 실패했던 국제안전기구 설립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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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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