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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12 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

 


대중문화 5000년의 역사

저자
프레드 E. H. 슈레더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4-02-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신화, 마녀, 신들림, 농담, 히스테리, 발라드, 종교........
가격비교

- 물표 체계의 발전과정을 보면 물표와 기호의 관계가 우연이 아니며, 물표가 물자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음. 최초의 물표가 발견된 신석기 초기는 인류사회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음. 물표는 농경과 작물화, 가축화가 옛 경제를 서서히 대체한 신석기 현상의 일환이었을 것임. 따라서 농경에 다른 정착생활로 기록이 필요하게 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음. 초기 농경민은 새로운 문제들에 부딪혔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확물의 저장이었음. 수확물의 일부는 일가족이 일년내내 춘궁기에 먹고살기 위해 저장해야 했으며, 씨앗의 일부는 파종하기 위해 따로 떼어두어야 했음. 두번째 문제는 생태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물자를 얻는 것이었음. 이들은 유목생활을 계속하는 부족과 교역관계를 맺고 먼 지방의 외래산물과 원료를 수확물과 교환했을지도 모름. 따라서 식량자원을 관리하고 타 부족과 교역해야 할 필요성이 기록의 필요성을 낳았으리라 짐작됨.
- 통념과 달리 문자는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9000년 이전에 서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기록체계의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름. 이 최초의 회계체계는 다양한 기하학적, 불규칙적 형태의 물표가 토대가 됨. 이 체계는 기원전 4000년전까지 별다른 수정없이 쓰이다가 교역이 발달하자 급격히 변화됨. 상거래용 물표를 안전히 보관할 진흙용기 표면 안에 든 물표 개수를 표시해 새긴 것. 물표의 이미지(또는 기호)를 이용하는 체계는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이내 기존기록 체계를 대체. 이 가설이 옳다면 고대 점토판의 특징들, 특히 진흙을 재료로 쓴 이유와 모양이 볼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음. 둘다 점토판의 선조인 불라의 특징이기 때문. 이것은 초기의 일부기호가 추상적 형태인 이유(물표의 형태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와 문작 방대한 지리적 영역에서 급속히 받아들여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 문자는 서남아시아 전역에서 5000년 동안 쓰이던 옛 기록체계에서 빌려온 친숙한 형태를 기반으로 함
- 크기, 인구, 부는 저마다 달랐지만, 로마세계에서 도시로 인정되는 공동체는 예외없이 그 밖의 모든 인간조직과 구별되는 기본적이고도 공통되는 특징이 있었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완전한 지방자율 또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누린다는 것. 본질적으로 자치는 공동체의 제한된 영역에 적용되는 규칙을 통해 표현됨. 이것은 주로 로마의 세나투스(원로원)나 그리스의 불레(심의위원회)에 해당하는 심의위원회의 형태를 띰. 입법기능과 선거기능을 갖춘 시민체 전체집합은 포풀루스, 에클레시아, 데모스를 이룸. 시민체의 선거로 해마다 선출되어 공동체의 구체적 업무를 수행하는 행정장관도 필수 요소였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독자적 창건설화와 뚜려산 과거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과거사는 대개 수많은 법령의 형태로, 또한 과거의 시민과 외국 지도자가 공동체에 헌정한 헌물의 형태로 나타남. 이런 헌물은 주요 공공기념물과 건축물의 형태로 구현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지속적 자부심을 불어넣음. 공동체가 갖추어야 하는 마지막 필수요소는 시민체의 수호신에 대한 자체적 신앙관습이었음. 형태와 내용은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이러한 필수요소를 갖추지 못한 공동체는 도시로 규정되지 않았음. 하지만 도시의 지위를 얻기 위해 무엇보다 로마의 공식 승인을 받는 것이 중요했음. 승인은 영구적이지 않았으며 로마의 뜻에 따라 부여되기도 철회되기도 함. 쇠락하거나 특히 분쟁 시기에 불명예를 저지른 공동체가 촌으로 추락하는 일이 종종 일어남. 그러면 기존의 정치적 삶을 더는 인정받을 수 없었음. 공동체가 여전히 거대한 인구를 자랑하고 전문화와 기능적 활동, 사회적, 문화적 삶을 독자적으로 표현하며 물질적 번영을 구가하더라도, 더는 도시로 분류되지 않음.
- 고대세계에는 여러 수준의 도회적 위계들이 두 측면에서 조화를 이룸. 도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하는 데는 이런 조화가 필수적이었음. 도회적 위계는 도시(또는 도시라 분류한 지역단위)와 시골 촌/읍이라는 두개의 수준으로 뚜렷이 나뉨. 두 수준은 도시민과 촌사람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삶의 표현을 토대로 계층화된 무게중심을 유지. 하지만 도시와 도시적 삶을 살아가려면 도시민에게 필요한 잉여생산물을 공급받아야 했음. 그 대가로 도시는 사회적, 문화적 생활양식과 폭넓은 세계관을 촌사람들에게 제공했음. 도시민의 세련된 삶은 실제로는 부차적인 것이었음. 상당한 규모의 농업 생산과 부에 기반하는 단단한 경제적 토대 없이는 도시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 따라서 도시의 세련된 삶은 사치(도회적 위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에 의해 지탱되는 사치)였음.
- 지배계급은 제의적 신들림을 언제나 미심쩍게 여김.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음. 신을 직접 체험하고 접하면 중개자 (즉, 신앙을 국가적 목적에 이용하고 지배계급에 해를 미칠 수 잇는 자들이 종교를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는 사제집단)가 필요없어지기 때문. 제의 참가자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의 경계를 뛰어넘음. 지배계급은 사람들이 이런 경계를 넘는데 익숙해지면 계급같은 정치적 경계까지도 넘으로 들지 않을까 우려했음. 디오니소스는 언제나 하층계급의 신이었음. 로마인들이 특히 두려워한 것은 평민의 대중집회가 국가, 즉 지배계급의 통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열리는 것이었음.
- 생식을 위한 섹스조차 필요없다고 여긴 초기 기독교 시대를 시작으로 생식을 위한 섹스만 허용한 중세시대를 지나는 동안, 기독교 교부들이 성교의 예방적, 치료적 효과를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음. 따라서 이들은 히스테리의 신체적 병인을 부인해야 했음. 그렇지 않는다면 섹스가 자연스러운 것, 즉 인간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 이에 따라 히스테리가 기능장애란 관념도 거부해야 했음. 소마(몸)와 프시케(마음)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섹스를 이용하는 것은 치료를 위해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 반면에 귀신들림을 원인으로 제시하면 히스테리의 성적 기원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엇음. (물론 귀신은 대개 음탕한 존재로 묘사되었으며 음욕을 채우려 드는 것이 특징이었음.) 게다가 질병과 정신이상의 원인으로 귀신을 부각시키는 것은 고대 후기의 여타 추세와도 잘 들어맞았음. 당시에 두드러진 추세 중 하나는 히포크라테스 학파로 대표되는 과학적 접근법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 고대 후기에 창궐한 무서운 전염병들은 의술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음. 게다가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와 기근도 잦았음. 토지의 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노예제도의 문제점이 커지자, 사람들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당하는 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현세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잃고 내세의 축복에 눈을 돌리기 시작. 귀신에 대한 믿음은 새로 등장한 기독교가 옛 이교도 신앙과 융화하는 데 한몫했으며, 악의 존재에 대한 그럴듯한 근거를 대중문화에 제공. 기독교인은 옛 이교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보다는 이들이 실제로는 사람이었다가 귀신이 되었다고 설명
- 1000년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신들림으로 광기를 설명하는 견해는 흥미롭게 변화해 왔음. 광기는 신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에서 저주로 바뀜. 퇴마사를 부르고 찾아가는 횟수로 보건대, 고대 후기의 일반적 추세(이를테면 금욕주의)가 더 강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광기에 시달린 듯 함. 이 자리에서 논지를 전개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고대세계에 일어난 변화들(사회/경제적 관계, 의료, 철학, 종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노예사회의 모순이 격화되고 더 높은 차원의 경제구조인 봉건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반영. 우리 사회에서 귀신들림에 대한 관심과 믿음이 다시 생긴 것은, 모순이 격화되어 사회제도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하는지도 모름
- 고대에 주술과 마녀술이 실제로 행해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면 그 기원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이 물음에 대답하는 이론을 내놓음. 그중에는 터무니없는 것도 있고 그럴듯한 것도 있음. 이를테면 마녀술이 심리적 요인 때문이라는 가설이 제기됨.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나 개인의 정신장애라는 것. 하지만 마녀술 현상은 전적으로 보편적이면서도 일관됨. 주술과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기본적으로 동일. 환각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일어날 수는 없음. 마음과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이며, 따라서 환각은 언제나 개별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 어떤 사람들은 마녀술의 기원이 맥각(호밀 이삭이 곰팡이에 감염되어 생기는 돌기로 먹으면 경련을 일으킬 수 있음.)이나 이와 비슷한 약물이라 생각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음. 마녀술은 기독교 교회가 이단과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라는 주장되 있었음. 11~17세기 유럽의 마녀재판을 생각하면 무척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토착문화에서 발견되는 마녀술은 전혀 설명하지 못함
- 주술과 마녀술은 고대 농경사회의 풍작기원 의식의 잔재로 보아야 함. 과거에는 풍작기원 의식을 여자가 주관했음. 이 이론에서는 최초의 공동체가 농경/모계 사회였다고 가정.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 초기에는 남자들이 여전히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여자들은 뒤에 남아 촌락일을 돌보았기 때문. 물론 여기에서 촌락은 매우 포괄적으로, 즉 소규모 집단이나 가족, 부족의 거주지라는 의미. 브리포에 따르면, 남녀의 역할구분은 타고난 본능과 기질을 토대로 정해진 것. 남성은 굳세고 지칠줄 모르는 사냥꾼이며 식량과 모험을 찾는 방랑자임. 반면에 여성은 집을 만듬. 최초의 집과 오두막, 천막은 여자가 만들었음. 오늘날에도 어떤 부족은 남자가 밖에서 자고 여자는 보금자리에서 살아감. 남자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동안 여자는 가족과 공동체의 대소사를 맡음. 여자의 지위가 높아진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음. 첫째, 임신과 분만은 남자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킴. 자연적 재생산 과정을 모르는 남자들은 여자가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음. 월경도 마찬가지임. 게다가 인간유아는 동물중에서 어미 의존도가 가장 높음. 성숙해 어미로부터 떨어지는 데 걸리는 기간이 어떤 종보다도 김. 이 때문에 자식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식량을 가져다주는 존재에 불과. 더 중요한 사실은 씨앗을 작물화하는 방법을 여자들이 처음 알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신화가 이를 입증함. 농경의 기원을 다루는 거의 모든 신화는 농경을 발견한 공을 여자에게 돌림. 그도 그럴 것이 곡물과 과일처럼 모아들일 수 있는 야생식량을 채집하는 것이 여자의 임무였으므로, 씨앗이 떨어져서 다시 결실을 맺는 과정을 발견한 것이 여자였을 것. 경작의 비밀을 처음 알아낸 것이 남자라 하더라도 밭을 일군 것은 어쨌거나 여자였음. 남자는 여전히 짐승을 사냥하거나 목축(중석기 시대 시작)하고 있었기 대문. 따라서 초창기의 여성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부계사회에서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
- 그리스, 로마 마녀술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전시대 마녀의 의식과 주문 상당수가 생계유지를 위한 풍작기원 종교에서 직접 기원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음. 풍작을 기원하는 초창기 여사제는 작물을 자라게 하고, 계절을 길들이고, 비를 내리게 하고, 아이가 태어나게 할 수 있었음. 그리스, 로마 시대 들어 마녀는 여사제의 지위를 잃음.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남성이 오래전에 이들의 권한을 대부분 차지했기 때문. 하지만 옛 종교를 간직한 하층계급에는 주술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 일부의식은 원래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지만 나머지 의식은 예전의 목적이 그대로 유지되었음. 해충을 구제하는 의식이 카토시대까지 여전히 쓰인 것, 고전시대 마녀술에서 사랑의 주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마녀의 적은 무능력이나 불임을 두려워한 반면 마녀의 친구는 성공과 다산을 기대한 것, 모든 마녀가 비약을 만든 것, 로마에서 베스타의 여사제가 그토록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 것, 로마에서 주술을 언급한 첫 사례가 이웃의 경작지에서 생산력을 빼앗는 행위를 금지한 법률이란 것, 최초의 신이 경작과 수확을 주관하는 어머니 대지의 여신이었다는 것, 마녀가 모두 예외없이 여자인 것은 이 때문. 그리스, 로마의 마녀는 단순한 문학적 허구가 아니었음. 그 기원은 공동체를 위해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지낸 여사제이며, 그 후예는 20세기 마녀들임
- 신약 외경 배후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몇가지가 눈에 띔. 첫째, 정경 복음서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있었음. 네 복음서는 심지어 네 복음서를 모두 합쳐도, 예수의 일생을 완전히 그려내지 못함. 예수의 생에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에는 매우 넓은 공백이 있음. 예수가 태어나 선교활동을 시작하기까지의 시기는 복음서에서 완전히 누락되어 있으며, 부활과 승천 사이에서 지상에서 머문 40일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음. 이같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기독교인들이 호기심을 느꼈으며 누군가 그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음. 그 결과물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구였음. 하지만 이들 작품이 유포되기 시작하자 초신자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였음. 실제로도 이들 전승 상당수는 중세 교회의 교리체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신약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과정이 관찰됨.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예수와 관련해 여러차례 언급된 사람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의 남편 요셉,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본디오 빌라도는 그중 일부에 불과. 바울과 열두제자를 비롯한 사도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임. 사도들의 선교활동과 최후도 알려져 있지 않음. 따라서 이번에도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해 신약에 누락된 정보를 채워넣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됨. 또 다른 동기는 일반적인 기독교 대중에게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하려는 욕구. 기독교 교회는 교인들이 연극과 서커스처럼 노골적이고 잔인한 이교도 오락을 즐기거나 혼음이 이루어지던 목욕탕 같은 공공시설물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음. 이교도의 통속문학을 읽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음. 그 이유는 2세기 로마 소설을 흘끗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음. 아풀레이우스의 황금당나귀는 시작부터 루키우스와 하녀 포티스의 성행위를 자세히 묘사하며, 끝에 가서는 루키우스를 이시스 여신에게 개종시키기까지 함. 교회가 이런 읽을거리를 권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하지만 제약을 가하려면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제시해야 했기에 기독교 통속문학이 급속히 성장. 이에따라 기독교인 독자들은 사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벌이는 모험담을 비롯한 읽을거리를 즐길 수 있었음.
-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이 단순히 관료주도적 종교개혁으로 표현되었다는(즉 정치적 통치기구가 대응조치를 결정했다는) 가정은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했음. 시의회나 제후는 종종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조치를 취해야 했으며, 시민들은 새로운(또는 낡은) 종교를 열렬히 옹호하고 결정권을 행사했음. 대중의 동기는 단순한 한가지 원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요인이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역할을 단지 경제정의나 참정권,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보아서는 안됨. 물론 제후의 군사력이 대중운동을 짓밟은 경우도 많았지만, 대중의 의지는 그뒤로도 살아남아 지역이 종교를 결정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음.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소수파는 제도권 예배를 거부하거나 박해를 감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종교적 독립을 추구. 따라서 독일의 종교개혁의 향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역할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물질적, 영적 요인의 중요성을 경시해서는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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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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