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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2.01 대한민국 기업 흥망사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저자
공병호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11-01-2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어떤 상황에서도 기업은 살아남아야 한다!”세계경영의 대우, 국...
가격비교

1. 무리한 사업다각화
1.1. 진로그룹 : 과속과 과욕으로 침몰에 이른 국민 소주
- 해방직후 목포양조에서부터 시작된 삼학소주는 한때 전국 시장점유율 65%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음. 67년 한국의 매출 100대 기업을 보면 60위에 진로양조가, 그리고 61위에 삼학양조가 들어 있음. 두 회사의 매출은 각각 11억 6200만원과 11억 6100만원을 그 격차는 단돈 100만원이었음. 60년대 두 회사는 사운을 건 전쟁을 했고 그 경쟁에서 진로가 승리. 두 회사의 사세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65년 4월 진로가 생산방식을 증류식에서 희석식으로 전환하면서부터. 당시 두 회사에 대해 주류산업 전문가인 정헌배 교수는 "삼학은 전국 브랜드로서 유일한 회사였으며 소주의 대명사였다. 주류업계에서는 삼학의 단맛 소주와 진로의 쓴맛 소주가 한때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삼학은 진로와 비교할 수 없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술 제조기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생산체계와 전국적 판매망을 가진 대표적인 소주였다."라고 평가. 그러나 희석식 소주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70년 12월, 결국 진로가 소주시장의 1위를 차지하게 되고 그 이후의 행보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 사업다각화 가운데서도 특히 진로그룹에 큰 부담을 주었던 결정은 종합유통업의 진출과 맥주사업 진출을 들 수 있음. 두 사업 모두 막대한 초기투자가 필요한 부분임. 특히 맥주사업은 전형적 장치사업으로 초기 설비투자 때문에 그룹의 재무 사정을 악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됨.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로그룹의 주력 기업인 진로는 계열사들에에 출자금, 대여금 등으로 엄청난 자금을 지원. 하지만 이들 신규 계열사의 경영성과가 부진해지면서 97년 초부터 진로의 자금사정이 급속도를 악화됐음. 주류업이라는 단일 업종에 대한 그룹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다각화는 필요했지만 그 다각화의 방향과 내용을 살펴보면 큰 문제점이 있었음. 무모한 다각화의 결과는 주력 기업인 진로가 감내하기 힘든 부담을 가져다 주었음
1.2. 쌍방울 그룹 : 레저사업에 묶여버린 40년 성공신화
- 쌍방울 경영진들은 이미 88년을 기점으로 장기계획을 세우고 섬유사업 중심의 사업구조를 전자, 레저 그리고 섬유의 3대 축으로 성장시키는 구상을 마련하고 추진할 계획을 갖게 됨. 87년 당시 2000억 원대의 그룹 매출을 90년에는 4000억원대로 늘려잡음. 전자업은 89년 6월, 쌍방울 그룹의 무역창구인 한선이 6월 전화기생산 전문업체인 동전산업을 인수하여 한선전자통신으로 회사명을 바꾸어서 휴대용 전화기, 워키토키 등 무선통신기 개발사업에 뛰어듬.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메리야스업계의 라이벌인 쌍방울과 백양이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점. 80년대 이후 두 업체는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데 그런 경쟁 속에서 사실 백양은 쌍방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쌍방울이 백양에 비해서 1.6배 정도의 시장을 더 갖고 있었지만 87년에 처음으로 그 순위가 역전되기도 한다. 백양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메리야스 시장에 주력하고 쌍방울은 경영전략 다각화로 맞서게 되는데 쌍방울과 백양 사이의 시장점유율은 점점 더 좁혀지게 된다. 90년에 시장점유율은 쌍방울 39%와 백양 33%로 80년대 초반시장에 비해 그 격차가 현저히 줄어든다
1.3. 우성건설 그룹 : 부동산 경기침체에 무너진 명품 아파트 우성
- 주택경기가 바닥을 칠 때마다 탄탄하게 보이던 업체들이 몰락하는 사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주택 전문업체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최 부회장은 콘도미니엄이나 호텔업 등과 같은 관련사업에 눈길을 돌리지만 건설경기라는 큰 테두리 내에서 주택사업과 상업용 건설사업은 모두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있다.

2. 조직관리의 패착
2.1. 대우그룹 : 1인 독주 속에 조각난 세계 경영의 꿈
- 사업가는 자기 사업에 자신의 에너지를 국한시키도록 해야 함. 그렇지 않고 사업각가 자기 능력 밖의 문제들에 대해 지나치게 애정을 갖다 보면 종종 궤도를 이탈하는 일들이 발생. 이런 경영방식에 대해 대우의 임직원들 사이에는 불만의 소리가 높았던 것도 사실. "우리 자신도 앞가림하기가 힘든데 왜, 회장님은 자꾸 다른 곳에 돈을 사용하실까?"라는 그런 불만 말이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을 전후해서 김우중 회장의 대권도전이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음. 그리고 김 회장이 나서서 신당을 만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훗날 그가 그런 의사를 갖고 움직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음. 결국 권력과 금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는 주변의 부추김이나 개인적 야심보다는 스스로 나라를 위한다는 그런 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 이런 점에서 김우중 회장은 사업가의 위치에 자신을 한정시키는 보통의 재벌총수와는 차이가 있었음. 사익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이 공익을 추구하는 일과 자신의 역할을 혼돈할 때 사업상 의사결정에서는 여러 실수가 일어나게 됨
- 대우그룹 워크아웃에 깊숙이 관여했던 강봉균 경제수숙은 대우그룹의 문제점은 기업규모가 그정도로 커졌는데도 김 회장이 혼자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보니 그룹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처럼 김우중 회장이라는 1인의 직관, 통찰력, 경영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한 채 전체 사업규모를 감당할 만한 적합한 시스템과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 대우그룹과 세계경영의 실패를 가져온 큰 원인 가운데 하나임. 게다가 김회장 주변에 포진한 고위 임원들은 대부분 특정 고교와 특정 대학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 그룹내 공공연한 비밀 가운데 하나는 특정 고교나 대학출신이 아니면 대우그룹 내에서 실세가 되기 쉽지 않다는 것. 학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룹 고위층에 대한 정실주의 인사의 폐단은 김회장의 조직관리가 가진 문제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

2.2. 뉴코아그룹 : 시스템 없는 확장으로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지다
- 93년 분가가 마무리된 이후 김의철 뉴코아그룹 회장의 사업확장은 더욱 탄력을 받음. 94년 인천점과 평촌점의 백화점을 늘리면서 확장전력에 놀라울 정도의 가속도가 붙게 되는데 96년 킴스클럽이라는 창고형 할인점 사업에도 진출. 94년부터 96년까지 3년간 뉴코아 그룹은 전국에 17개의 백화점과 할인점을 잇달아 개설. 속도전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점포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조건이 있었음. 바로 빠른 점포확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경영시스템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어야 했다. 뉴코아 그룹이 가졌던 구조적 문제에 대해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회사가 급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통업체는 필수적인 전산망을 갖추지 못해 주먹구구식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해쓰며, 현금회전을 위해 40일간의 초장기 바겐세일로 일관, 앞에서 남기고 뒤로 손해보는 장사를 해왔다. 여기에 관리분야의 전문인력이 없어 자금누수도 그룹 안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무리한 점포확장 자금난 불러, 매일경제 97.10.21)

2.3. 새한그룹 : 사람의 장벽을 물리치지 못한 2세 경영자의 불운
- "삼성출신 전문경영인 A씨는 이재관 부회장과 함께 새한부실의 1등공신으로 지목되고 있다. 새한출신 한 핵심경영층은 "새한이 부실해지고 몰락한 데는 A씨와 이재관 부회장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그래도 이재관 부회장은 억울한 점이 많지만 말입니다." (방원석, 좌초된 삼성가 2세 경영인의 꿈 : 10년던 새한그룹 워크아웃 막전막후4)
- 젊은 오너나 회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너가 등장하면 노회할 뿐더라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측근으로 등장할 수 있다. A씨는 이미 은퇴를 위하여 자기 몫을 챙기는 기업, 이를테면 자기회사를 만들어서 계열의 협력사로 정한 다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 새한의 말로를 통해 2세 경영자들이 주의해야 할 점
(1) 학교에서 배운것과 현실이 돌아가는 것은 차이가 크기 때문에 사업세계에 몸을 담기 시작한 2세 경영자들은 우선 자신의 사업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함. 사람에 따라서 사업을 이해하는 속도가 다르겠지만 일정한 시간, 즉 마치 물이 끓는 것과 같은 임계점이 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관점에 따라 대형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다.
(2) 2세 경영자들은 곁에 누구를 두어야 하는가를 늘 고심해야 한다. 가능한 특정인에게 힘이 쏠리지 않도록 해야 하고 지나치게 특정인을 믿지 않도록 해야 함

3. 사업구조 쇄신의 실패
3.1. 대농그룹 : 그룹 전체의 부실을 막다가 힘에 부친 미도파
- 대농그룹은 89년 박영일 회장체제에 돌입하면서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서며 성장산업인 유통, 금융, 정보통신 등 사업다각화에 착수. 그런데 이런 선택이 훗날 대농그룹의 몰락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게 됨. 마치 전선은 확장시켰지만 전선에 임하는 각각의 군사들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 이는 경영능력의 문제와도 직결됨. 사세를 확장시키는 것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재와 기업의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고 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회장의 몫이기 때문. 대농창업투자, 메트로콤, 스파메트로, 대농중공업, 미도파건설, 메트로프로덕트 등이 이때를 전후해 설립 또는 인수한 계열사들이다. 이 같은 확장과정에서 모기업격인 (주)대농과 미도파가 지급보증을 서면서 무리하게 은행빚을 끌어썼고 당연히 그룹 전체의 부실로 이어짐.
- 대농그룹 몰락의 교훈
(1) 그룹이라고 하지만 결국 주력기업의 경영성적이 무척 중요하다. 주력기업 한두개가 전체 그룹 매출과 이익의 70~8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주력기업의 경쟁력 하락은 그룹의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월등한 경쟁력을 가진 경쟁사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중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열위인 기업이 살아남기란 힘들다. 롯데와 신세계라는 백화점 업계의 두 거인은 미도파가 대항하기에는 자금력이나 경영능력 면에서 너무 월등한 존재였다.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협상력을 갖고 있을 때 경쟁사를 상대로 매각협상을 벌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 자금을 이용해서 다른 출구를 찾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3) 이런저런 사업을 전개하더라도 새로운 사업이 그룹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업을 성장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

3.2. 한일그룹 : 시대 변화에 재빨리 변신하지 못한 섬유업계의 공룡
3.3. 갑을그룹 : 의욕이 앞선 사업쇄신이 세계3대 면방업체의 꿈을 꺾다
- 갑을그룹 몰락은 주력기업의 사양화에 대한 사업가의 전형적 대처를 보여주는 사례. 갑을그룹은 다양한 해외공장 건설을 통해 면방업의 사양화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사업성이 있어 보이는 비관련 다각화로 사업을 확장. 그런데 신문, 방송, 전자, 건설 등 비관련 분야의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주력 기업인 갑을이 무리한 출자를 했을 뿐만 아니라 주력기업의 해외사업진출도 과도한 차입에 의존. 외환위기를 맞을 시점이 되었을 때 그룹 내에 어느 계열사도 돈을 제대로 버는 기업이 없었음. 결국 사업구조 쇄신이라는 의욕은 앞섰지만 이곳저곳에 한정된 자원을 분산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4. 시장을 읽어내는 통찰력 부재
4.1. 쌍용그룹 : 계열사를 매각의 길로 운전한 쌍용자동차
- 자동차는 거대한 투자가 필요한 사업. 게다가 일정 규모 이상을 양산할 수 있어야 수지가 맞음. 이른바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규모를 갖추도록 해야 함. 그런데 쌍용 그룹에는 이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자원이 없었음. 게다가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벽을 넘어야 하는데 이게 여의치 않은 상태였음. 92년까지 내수점유율은 불과 1.6%에 불과. 이후에도 계속 내려가는 상황이었음. 2~3년 정도 투자한 이후 김석원 회장은 적절한 시점에서 발을 뺐어야 했다. 누구든 미래에 대한 판단을 잘못할 수 있다. 하지만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과감한 조치를 빨리 취해야 한다. 그런데 김회장은 마치 뻘밭에 발이 들어가듯이 계속해서 수렁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그룹내에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던 쌍용양회마저 자동차사업에 대한 지급보증으로 부실해져 훗날 그룹이 해체되는 상황에 도달. 사업가는 때로는 이미 투자했지만 회수하기 힘든 매몰비용을 포기할수도 있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미련을 가졌던 점이 김회장의 실책 가운데 하나. 누구든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수 있고 뛰어들어야 한다. 그것을 나무랄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뛰어든 이후에라도 잘못된 판단이라고 밝혀지면 신속한 조치로 방화벽을 설치하여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함. 98년 1월 대우그룹에 쌍용자동차를 넘겼을 때 쌍용양회를 포함한 계열사들이 떠안은 쌍용자동차의 부채는 1조 7665억이나 되었다. 공식적 수치가 그렇다면 쌍용그룹은 자동차사업 진출로 2조원을 날린 셈. 자동차에 투자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주요 계열사들이 지급보증을 선 결과 계열사들은 속속 매각의 길을 걷데 굄. 결국 사업다각화와 관련해서 김석원 회장은 두번의 결정적 실책을 범하게 됨. 하나는 승용차 사업에서 성장동력을 찾은 것. 그리고 중도에 무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즈음에 포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

4.2. 삼미그룹 : 지나친 다각화도 문제, 지나친 집중도 문제
- 삼미그룹으 80년대 사세확장과 이후의 위기를 통해 큰 교훈을 배웠다. 이것저것 아무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선택한 특수강 중심의 사업구조 역시 철강업의 경기상황에 따라 지나치게 그룹에 부담을 주었던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경영에는 집중과 분산이라는 모순된 2가지 사이에 적절한 비중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 지나친 다각화도 문제지만 지나친 집중화도 문제를 낳게 됨

4.3. 나산그룹 : 기네스북에 오른 슈퍼브랜드, 부동산으로 뜨고 유통으로 지다
- 나산그룹의 몰락의 씨앗은 94년 영동백화점을 인수하고 유통업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시작. 유통업은 선행투자가 많이 소요되는 분야일 뿐만 아니라 유통업을 위한 인력과 같은 내부역량이 어느정도 준비되어 있어야 함. 그룹이 가진 자금과 인적자원없이 유통업에서 가능성을 찾았던 부분이 안병균 회장의 실책이었음. 결국 자신이 진출하는 시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시장에서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가라는 점도 중요. 90년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여러 그룹들이 유통업 진출에서 고배를 마시게 된 것은 시장에 대한 이해부족에다 자신의 역량에 대한 과대평가도 일정한 몫을 담당하게 됨. 그런데 백화점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안병균 회장은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이나 선견력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만큼 풍부한 성공경험을 갖고 있었음. 한마디로 베팅하는 것마다 성공했음. 하지만 열번을 잘하다가도 딱 한의 거액 투자에 전부를 날릴수도 있음. 성공투자를 낳는 선견력과 통차력이 언제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님. 선견력과 통찰력에 관한 한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일뿐이다. 하나하나가 승부다. 안회장은 '이제까지 잘해왔듯이 이번에도 잘 맞아떨어질 것이다'라고 믿었을 것이다.

5. 오너의 자질과 경영능력 부족
5.1. 해태그룹 : 과자만들던 회사가 그 정밀한 오디오를 만들겠어?
- 박건배 회장의 해태그룹 경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81년 경영권을 인수하여 83년 회장을 취임하고 난 다음에 각사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한다는 점. 그리고 이후에 박 회장의 행보는 지나치게 대외활동이 많았다. 박회장은 84년 한국 보이스카우트 연맹 부총재, 84~86년 대한역도연맹 회장, 90년 한국 보이스카우트 연맹 12대 총재, 90년 세계 보이스카우트 연맹이사 등을 역임
- 사업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우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업을 잘 알아야 하는 것. 확실하게 잘 알지 못한 채 진출한 신규사업은 대부분 실패로 연결됨. 그런데 잘 알려면 예외적으로 비범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전부를 걸고 일한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함. 오너가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자전기와 중공업에 진출하면서 대외활동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일. 이 부분들이 바로 한때 재계 순위 24위(96년말 기준)까지 올랐던 해태그룹의 몰락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중 하나이다.

5.2. 한보그룹 : 기업가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5.3. 고합그룹 : 속빈강정의 고속성장, 대북사업으로의 의도
- 다른 재벌 2세들의 다각화와 달리 창업누 장회장은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사세 확장을 시도. 외환위기라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중국 특수에 맞추어서 고합은 날개를 달고 성장했을 것임. 이런 점에서 그는 말년운이 따르지 않았던 기업가 가운데 한 사람. 하지만 사업가로서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장회장의 행보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눈에 띈다. 91년을 기점으로 장회장은 지나치게 대북사업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경향을 보임. 그가 그 어떤 기업인보다도 대북사업에 깊숙이 관여하는 시점은 91년을 전후한 시기.

6. 급격한 환경변화 속 준비되지 않은 불운
6.1. 극동건설그룹 : 외환위기의 파고에 악수가 돼버린 인수합병
- 누구든 사세가 기울면 이를 뒤집기 위해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게 됨. 조치를 취할 당시에는 행운이었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불운으로 바뀌기도 함. 한국 건설업계에서 큰 몫을 차지했던 극동건설 그룹은 국제그룹 해체에 따른 최대 수혜기업이자 특혜기업으로 부러움을 안았지만 이 선택이 결국 그룹 해체의 단초를 제공

6.2. 거평그룹 : 부동산 개발의 행운아, 성장도 빨랐고 후퇴도 빨랐다
- 98년 5월 12일 거평그룹은 기자회견을 열고 산하 19개 계열사 중 4개사(거평시네틱스, 거평제철화학, 거평화학, 한남투자증권)만 남기고 나머지 15개 계열사는 부도처리한다는 방침을 발표. 창업후 20년 만에 스스로 그룹해체를 선언한 거평그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이처럼 다른 그룹과는 달리 자발적 구조조정안을 마련해 조기에 부도를 냄으로써 나승렬 회장은 개인적으로 상당한 재산을 보전할 수 있었음.
- 거평그룹의 성장모델은 신호그룹과 비슷. 신호그룹이 제지업을 중심으로 부실기업을 인수했다면 거평은 민영화 대상이 된 기업들을 시작으로 돈이 될 법한 굵직굵직한 기업들을 인수. 그런데 신호그룹의 이순국 회장이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정상화시키는 능력을 보인 데 반해 나승렬 회장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는 의문. 나회장은 그런 능력을 보일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점도 있지만 그가 기업을 정상화시키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 여전히 의문임. 사업가는 처음에 어떤 사업을 시작했는가라는 점이 사업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됨. 제조업을 일으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과 집장사와 부동산 개발로 시작한 사람과는 사업을 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크다. 거평그룹의 성장사를 살펴보면 기업을 인수해서 이를 담보로 돈을 끌어다가 또다른 기업을 인수해나가는 데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6.3. 신호그룹 : 시대를 잘못만난 부실기업 매수합병의 귀재
- 여타 재벌들과 달리 이순국 회장의 비즈니스 모델은 부실기업을 인수해서 이를 정상화시키고 이런 과정에서 인수한 기업을 담보로 또다시 자금을 빌려서 다른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이었음. 이 회장 자신이 부실기업 가운데 정상화가 가능한 기업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정상화시켜본 경험과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와 같은 급격한 환경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비즈니스 모델은 빛을 발했을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외환위기는 금리수준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고 결국 차입경영에 의존했던 기업가들을 몰락시킴. 그는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해 몰락할 수밖에 없는 기업가 중에서도 1순위에 속했음. 사업가도 결국 때를 잘 만나야 한다. 그는 시대를 앞선 사업모델로 승부수를 던졌지만 외환위기라는 직격탄을 비켜갈 수 없었음. 그는 오늘날 사모펀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활발한 기업인수 방법을 남보다 20여년 앞서 실행에 옮긴 인물이었다.

7. 정치권력과의 불협화음
7.1. 동아그룹 : 부채보다 자산이 많은데도 해체된 비운의 건설왕
- "동아그룹이 파산선고를 받고 공중분해가 되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경영을 책임졌던 내 잘못 못지않게 정부의 책임은 없어요? 솔직히 내가 동아를 살리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김포매립지 용도변경을 요구했을 때 정부가 거절했잖소. 용도변경을 절대할 수 없는 땅이라고 말이지. 그래놓고 내가 물러나니까 송곳도 안 들어갈 정도로 반대했던 정부가 금방 용도변경을 해서 팔아 치우고, 이는 원칙이나 상식이 있는 행위라고는 할 수 없지요. 똑같은 땅, 번지수도 다르지 않은 땅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기업이 하면 안되고 정부가 하면 되는 건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전형적인 경제관이지. 그러면 못 써요." (이코노미스트, 2007.11.13)

7.2. 신동아그룹 : 이땅에선 미운놈 떡하나 더 주어야 기업한다
- 99년 금감위 구조개혁단 국장으로 대한생명 매각에 직접 관여했던 이종구 전 금감원 감사는 자신의 저서 '원칙이 개혁이다'에서 정치권력에 의한 신동아그룹 해체라는 항간의 외압설과는 달리 대한생명은 당시 총자산 14조 7000억원의 생보업계 빅3였지만 속내는 이미 자산 과부족 상태에 있었다. 즉 자산보다 부채가 많았다는 뜻이다. 이 규모가 어림잡아 2조 9000억원에 이른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데 대한생명 한 고위직 임원은 익명을 요구하며 "98년 7월께 금융당국이 비공식라인을 통해 대한생명의 부실조사에 착수했다. 조사결과 대한생명이 5000억 가량을 신동아 계열사에 부당대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2개월 뒤인 9월쯤에는 이 규모가 2조 9000억으로 6배나 급증했다"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음. 결국 부실계열사에 대한 대출 때문에 부실화되었다는 명분으로 99년 대한생명은 부실금융기관을 지정되고,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매각과정을 밟게 됨. 당시 최순영 회장은 99년 외화 밀반출과 대한생명 부실 책임 등을 이유로 해임됨. 그리고 다음날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이 동시에 대한생명에 대해 특별검사와 세무조사에 들어감. 조사결과 대한생명의 부실규모는 최종 2조 9000억원으로 확정됨. 부실자산에 대해서는 최회장 자신도 인정함. 다만 실제 부실규모는 1조 6098억 정도였다고 말함. 이런 부실채무에는 98년 하반기 대우그룹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대출된 5000억원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이는 대우그룹의 분식된 장부를 근거로 대출된 자금이었다. 이정도의 부실규모라면 굳이 정부가 그렇게 서둘러 최회장을 구속하고 계열사들을 헐값에 매각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과연 적법했는지 의문을 갖게 됨. 당시 부실화된 생명보험회사의 구조조정 과정은 경영정상화 계획서를 받은 후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행각서를 제출받고, 충분하게 스스로 자구노력을 기울이게 한 다음에 비로소 부실 금융기관을 지정하는 절차를 밟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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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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