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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

역사 2015. 3. 3. 21:28

 


도시의 역사

저자
조엘 코트킨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07-04-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도시의 5천년 역사를 함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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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로도토스 시대에 제기된 다음과 같은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채로 남아 있다.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도시들을 쇠락으로 이끄는가? 이 질문에 대해 이 책은 세가지 중요한 요소를 주장. 이는 장소의 신성, 안전을 제공하고 권력을 발산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시에 활력을 주는 통상의 역할이다. 이 요소들이 도시의 총체적 건강을 결정해 왔다. 이 요소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도시문화는 번성함. 이 요소들이 약해질 때 도시는 흩어지고 결국은 역사에서 퇴장함
-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충적분지는 도시로 급격히 변모하는 데 이상적 환경을 지녔음. 그리스인들에게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진 이 지역에서 불모의 사막은 끝나고 물고기가 넘쳐나는 강물과 야생생물이 북적대는 강기슭이 딸린 갈대 무성한 습지가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밀과 보리 같은 토착 곡물들이 싹을 틔웠으며,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믿음직한 농작물인 이 곡물들은 신석기시대 농부들에게 중요한 잉여 식량을 제공해 줬다. 그 잉여식량에 의지해서 도시문명이 탄생했다. 그러나 초기의 도시 건설자들은 이 기름진 환경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 우선 광물과 건축용 석재, 목재가 부족했음. 비는 드문드문 내렸고 강물은 이집트에서와는 달리 주변에 있는 넓은 면적의 건조한 땅에 자연스레 물을 공급하지 않았다. 그 결고 이 지역 정착민들은 경작지에 물을 대기 위해 복잡한 시스템을 개발해야 했음. 이런 엄청난 노력은 복잡하게 얽힌 사회를 규제하면서 자연과 더욱 지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도덕적, 사회적 체제를 필요로 했다. 이는 촌락의 전통적 삶을 수천년 동안 좌우해 왔던 가족간, 씨족간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초창기 도시들은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소로 생겨남. 현대 기준으로 볼 때 (심지어 고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그 기원이 기원전 5000년가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도시의 규모는 아주 작았음. 기원전 3000년 경에 강력한 메트로폴리스인 우르 역시 넓이가 겨우 150에이커에 인구는 대략 24000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됨. 당시 성직자 계급이 새로운 도시체제의 주요 창시자로 부상. 그들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레 두는 원칙들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숭배 시스템을 대중에게 주입. 또한 구성원 상호간에 관련이 없는 대규모 인력이 한데 모여 벌이는 활동을 복잡한 공동체 과업위주로 규제하는 일을 하기 시작.
- 두 초기 문명 사이에는 차이점도 많다. 이집트에서 통치권은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파라오의 손아귀에 있었음. 관리들은 신이나 왕을 위해 용수로와 잉여경제를 관리했다기보다는 그 둘을 동시에 인격화한 존재인 한 개인을 위해 일을 했음. 메소포타미아의 발전에 너무나 중요했던 도시의 정체성과 성직작 계급사이의 깊은 관계는 이집트에서는 별로 뚜렷하지 않았음.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어버니즘의 기원에 초점을 맞출 때 초기 이집트는 그 정의에 그리 잘 부합하지 않음.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도시생활은 영구적인 종교적 구조물들을 중심으로 운영됐음. 그에 비해 이집트인의 생활은 왕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짐. 행정가, 성직자, 기술자, 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은 자신을 도시적 공간에 속한 개인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파라오에 속한 개인으로 간주. 왕조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성직자 계급과 정부도 자리를 옮겼다. 물론 이집트처럼 위대하며 오랫동안 지속된 문명은 아주 큰 도시들을 여러개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5세기에 만들어진 한 찬가는 테베를 이렇게 찬양. "테베는 도시라 불린다. 다른 모든 것은 테베를 통해 자신을 확대시켜 보여주려고 테베의 그림자 안에 자리를 잡는다." 바빌론 같은 도시들이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이집트 도시들의 인구는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과 같은 정도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랬음에도 멤피스나 테베 같은 거대한 도시들조차 수메르의 다양한 도시들이 보여주었던 독립적인 정체성과 활발한 경제, 성스러운 지위를 결코 보여주지 못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제멋대로인 데다가 사분오열된 메소포타미아와 강하게 대비되는) 이집트의 장기간에 걸친 통치체제는 성벽을 두른 도시들의 발달을 장려하지 않았따. 교역에 따른 경쟁이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는 점도 시장경제의 발달을 늦추었다. 이집트는 가장 위대한 업적인 피라미드를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환경"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구조물을 건설한 문명"으로 남을 터였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것은 내구성 있는 형태를 찾아 낸 듯하다"고 도시 사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밝혔다. "그러나 도시만큼은 예외다."
-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중국은 도시건설에서 제국이 차지하는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영구적 사례. 중국 고유의 독특한 어버니즘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됐지만 대부분의 경우 초기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제사의 중심지로 세워졌고 왕실에 봉사하는 장인들의 작업장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기원전 1110년경에 통일된 제국인 주가 탄생하면서 높다란 성벽으로 에워싸인 소읍들이 처음으로 발달. 사실 성이라는 한자에는 성벽이란 뜻과 도시라는 뜻이 모두 있다. 주나라와 그 계승자인 한나라, 당나라는 존속기간과 철저함 면에서 비교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중앙집권적 통치양식을 고안해내미 수도인 뤄양과 장안, 카이펑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꾸준히 자리매김. 각각의 도시가 갖는 상대적 중요성의 변동은 대개는 통치하는 군주가 자리하는 곳이 어디냐에 달려 있었음. 유교의 고전인 주례는 "군주 혼자서 수도를 건설한다"고 단언한다. 커다란 행정의 중심지이건 현이라 불리는 지방행적구역이건 수도를 제외한 다른 도시들의 중요성은 해당 도시가 제국의 일부를 통치하는 행정의 중심지로서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좌우됐다. 뒤이은 몇 백년 동안 이웃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형 어버니즘 모델을 채택. 일본의 첫 주요 중심지들(나니와, 후지와라, 나라)은 중국의 장안을 의식적으로 모방. 794년 일본은 헤이안에 새롭고 영구적 수도를 건설했는데, 10만명 이상의 거주자를 수용하는 이 수도는 천황일가를 중심으로 한 의식의 중심지로 이후 1천년 넘게 공헌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 이와 유사하게 1394년 조선 수도로 건설된 한양은 이후 거의 500년동안, 한국 사학자 두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목가적인 중국식 수도"로 이바지. 한양은 전형적 중국식 모델을 따라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왕실의 관료들이 지배하는 행정 중심지로 설계됐다
- 카르타고도 고대의 순수한 상업도시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몰락. 페니키아의 문화와 정치적 가치관의 자랑스러운 운반자였던 카르타고인들(전성기에는 인구가 15만~40만)은 수페테스라고 불리는 집정관과 원로원, 일반의회를 선출하는 도시국가에 어울리는 규모의 정부 시스템을 운영. 보통은 상업귀족들이 이런 통치체제를 장악. 노예와 하인은 허드렛일과 더러운 일을 하고, 군인과 선원은 전투를 했으며 성직자는 지배계급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부자들이 이들을 통치. 카르타고의 고집스럽게 상업적인 성격은 페니키아의 선조들에게 그랬더너 것처럼 카르타고의 몰락에 한몫을 했음. 카르타고에는 경제적 이익 이외에는 확장을 해야겠다는 다른 사명감이나 근본적인 동인이 없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다른 식민지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곳들을 응집력있는 제국으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곳들은 무엇보다도 사업적 이해관계자들이 경영하는 나라였다. 그 옛날의 세계에서 사업을 위해 설계된 메트로폴리스는 결국에는 정복을 위해 건설된 도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 이익과 편협한 이기주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동이 터오르기 전까지는 도시의 역사를 지배하게 될 제국의 비전에 대항할 수 없었다.
-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신도시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자그마한 어촌마을 라코티스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와 근동, 지중해 세계 사이의 교역을 위한 화물 집산 항구로 설계됨. 알렉산드리아의 건설은 알렉산드로스가 오랜 포위 끝에 파괴해버린 페니키아의 티레를 대체할 지중해 동부의 교역 중심지를 만들겠다는 의식적인 계획을 반영. 이 야심찬 비전은 먼저 거대한 새 항구의 건설을 요구.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이집트를 넘겨 받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가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선박들이 항구를 안전하게 오갈 수 있게끔 파로스 섬에 거대한 등대를 건설. 알렉산드리아는 우아한 공원들로 아름답게 꾸며졌고 이 도시를 지중해 세계의 지적 중심지로 만들어준 건물들 (특히 박물관과 도서관)도 갖추었다. 도시계획의 현실적 측면들 역시 무시되지 않는다. 대로는 넓었고, 거리의 청소부들과 공중위생 시스템들은 더 믿음직스러웠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도시의 대부분은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석재로 지어졌다.
- 로마의 위대한 힘은 지리적 위치나 자연자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로마를 가로질거 흐르는 티베르 강은 티그리스나 유프라테스, 나일 같은 거대한 강과는 같은 반열에 끼지 못함. 로마의 심장부는 도시를 둘러싼 일곱 언덕의 보호를 받았고, 내륙에 지리한 입지는 바다를 둘러싼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방패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야망을 지닌 정복자 앞에서는 별로 대단치 않은 장애물에 불과했을 게 틀림없다. 로마는 기본적인 경제적 자산을 향유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많은 도시들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온화한 기후와 약간 비옥한 토양은 양치기와 농부들로 구성된 조그만 공동체를 먹여 살렸다. 도시는 티베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점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덕에 초기의 로마는 주위를 둘러싼 민족들에게는, 특히 당시 가장 선진화된 문화의 소유자인 에트루리아인들에게는 천연의 교역로가 됐다. 소금퇴적물은 로마인들이 교역에 내놓은 중요한 품목이었다. 그 대실 로마의 위대함은 그들의 별난 신화와 신성한 사명감에 있음. 로마는 티베르 강에 버려져서 암컷 늑대 밑에서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기원전 753년 창건. 그들은 처음부터 잔인해서 서로를 사납게 공격. 전쟁과 농경의 신인 마르스는 초기에 이 거친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강한 추종세력을 만들어냈음. 그러나 강인함과 억센 심성만으로는 에트루리아인들에게 저항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 자그마한 정착지였던 로마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그곳에 왕정을 확립. 여러면에서 로마인들은 이 패배에서 수혜를 입었다. 이 패배 덕에 그들은 더 세련된 문화를 접하게 됐고 그리스 세계와 페니키아 세계에 모두 연줄을 갖게 됐다. 외래 세력의 지배에서 일단 자유로워진 로마인들은 기원전 5세기에 인구가 겨우 4천명 밖에 되지 않는 이제 막 갓난 티를 벗은 도시국가를 신속하게 개혁. 기원전 450년 무렵 그들은 12표법으로 정치제제를 성문화함. 이 법전은 장날에서부터 고객과 의뢰인 사이의 관계, 귀족의 권리, 평민의 보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다루었다.
- 기원전 31년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아우구스투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의 동맹세력인 안토니우스 군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헬레니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거의 전부와 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상당부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많은 땅을 이미 정복한 상태였다. 이후로 4세기 동안 서구 어버니즘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로마인들과 그들의 의지를 따르는 이들에 의해 씌여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 철학잗와 도시 건설자 또는 건축가로 보여줬던 천부적 독창성이 로마인들에게는 없었다고 주장. 하지만 이는 부당한 주장이다. 물론 로마인들은 그리스화한 세상에서 발견한 것들을 취해 그 위에다 자신의 문화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들도 카르타고 같은 도시들을 탈바꿈시키거나 재건했고, 고색창연한 아테네를 포함한 다른 도시들의 복구를 도왔다.
- 요크와 런던, 트리어, 파리, 빈, 부다페스터, 그리고 훗날의 유럽에 있는 주요 도시들은 티베르 강기슭에서 내어난 도시의 천재성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로마화는 많은 점에서 선진적인 도시화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발달은 사상 유례가 없는 치안과 안전 때문에 가능했다.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는 방법을 통해 평화를 수호했다."고 에드워드 기번은 말했다. 국경지역과 성벽, 도로 가까운 곳에 배치된 군단들은 사하라의 황무지에서부터 몹시도 추운 스코틀랜드 변방에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도시들을 보호. 성벽과 다른 방어시설들은 그런 오지에 있는 도시들의 생존에 중요했다. 그러나 독일의 트리어와 베룰라미움과 같은 고장들은 단순히 군사적 전초기지에만 머물지 않았다. 1~2세기 경, 심지어는 영국의 소읍들조차도 바둑판 모양의 거리와 정교한 배수 시스템, 욕탕과 수도관을 자랑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도시 문명의 번창이 단순히 제국이 내린 칙령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민초들의 에너지도 한 몫을 했다. 여러 도시들 사이의 격렬한 경쟁은 무절제한 신축 건설 프로젝트들과 극장들, 스타디움을 만들어냈다. 로마는 개별 도시들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허용. 제국 그 자체가 도시 세포들의 연합으로 기능했다고 사학자 로버트 로페즈는 밝혔음.
- 예전의 그리스 비잔티움인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고대 어버니즘의 마지막 남은 거대한 보루였음. 326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선포된 이 도시는 유럽을 아시아로부터 갈라놓는 보스포러스 해렵에 걸쳐 있었음. 성벽 뒤에서 안전을 영위하는 웅장한 항구를 낀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인들의 맹공에도 살아남았다. 1세기 내내 도시의 인구는 대략 5만에서 30만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쇠락해가는 로마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를 쉽게 추월
- 예전의 그리스 비잔티움인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고대 어버니즘의 마지막 남은 거대한 보루였다. 326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선포된 이 도시는 유럽을 아시아로부터 갈라놓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걸쳐 있었다. 성벽 뒤에서 안전을 영위하는 웅장한 항구를 낀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인들의 맹공에도 살아남았다. 1세기 내에 도시의 인구는 대략 5만에서 30만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쇠락해가는 로마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를 쉽게 추월했다. 6세기의 절정기에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의 지배적 도시의 지위에 오르면서 인구가 50만에 육박했고 아드리아해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흑해에서 아프리카의 뿔에까지 걸치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다. 오랜된 도시들을 개발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창건했던 로마와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근동의 다른 도시들이 쇠락하고 있던 시절에 번성했다.
- 압바스 칼리프가 8세기 말에 창건한 새 수도 바그다드는 초기 이슬람 도시 중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로 부상.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자리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옛 수도인 크테시폰과 바릴론 양쪽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바그다드를 당대의 관찰자 아부 유세프 이븐 이스하크는 세계의 교차로라고 기술했다. 위대한 수도로 설계된 바그다드는 환상 계획에 따라 건설됨. 성벽, 해자, 그리고 궁전을 에워싼 내벽. 최소한 25만에 달하는 바그다드의 인구는 동시대 유럽이 주도적인 도시인 베니스와 파리, 밀라노를 압도했고 그리스-로마 문명 최후의 위대한 보루인 콘스탄티노플과 맞먹었음. 900년경 바그다드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것이다. 물론 몇 백년 후에 칼리프의 영토는 조각나고 바그다드는 정치적 권력의 지배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바그다드는 여전히 두드러진 지적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번성한 도서관과 아카데미들은 종이의 도입과 서양과 페르시아 고전들의 번역본을 포함한 서적의 발행과 유통에서 도움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랍학자들은 더 얇은 종이를 개발해서 서적을 들고 다니기 쉽게 그리고 필기도 더 쉽게 만들었다.
- 도시 중심의 이슬람 문화와 심하게 대조적으로 중국의 도시들은 현저하게 농업에 기초한 문명의 틀 안에서 생겨났다. 16세기에 이르러서도 명나라의 황제들은 황궁 마당에서 빈틈없이 짜여진 의례에 따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계속 올렸다. 이러한 영속적인 농업적 현실은 심지어 도시 내부에도 반영됐다. 항저우, 광저우, 장저우, 베이징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세계 최대의 그리고 가장 훌륭한 계획도시들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들은 북적거리는 시골지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도시들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도시들은 그렇게 큰 규모를 이루어냈음에도 그저 거대한 농업지역일 따름이었다. 고대 유럽이나 이슬람 세계에서는 공통된 현상인, 배후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을 중국의 도시들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규모가 큰 도시일지라도 대부분의 상품은 주로 지역 내 소비를 위해 생산됐다. 대부분의 농촌 필수품은 마을 수준에서 충족됐다. 당시까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음에도 중국은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로 측정하는 도시화를 다른 나라와 비슷한 정도로 달성할 수 없었음. 중국의 도시화 정도는 서유럽이나 지중해 또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1천년전부터 현재에 이르기 전까지의 일본에 비해 절반 미만을 계속 유지했다
- 1000년 말엽과 이후의 몇세기 동안 중국에서 또 다른 종류의 메트로폴리스가 생겨났음. 정치적 권력에 주된 기반을 두지 않고 상업적 가치에 기반을 둔 메트로폴리스였다. 상업적 도시들이 처음으로 꽃을 피운 것은 618년부터 907년까지 중국을 통치한 당 치하에서였다. 교역에 대한 전통적 규제를 해제한 당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도시경영자라는 새로운 계급의 창출을 이끌었다. 960년 패권을 잡고 교역을 장려한 송 치하에서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대륙간 교역세력이 등장. 영해에서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을 소탕한 후 중국의 상인들은 인도로 이어지는 모든 교역루트에서 지배적 역할을 확립. 나침반 사용법을 배우면서 세계에서 가장 항해솜씨가 뛰어난 뱃사람이 된 중국의 항해자들은 저 멀리 희망봉에까지 이르는 해도를 작성. 12세기 무렵 중국 해군력은 20개 소함대와 5만2천명이 넘는 병력으로 성장. 이제 중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상당 부분을 포함한 드넓은 영역으로 퍼져나감. 중국 선박 중 일부는 500명 가량을 태우고 1년치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다. 배에서 돼지들이 사육됐고 술이 빚어졌다. 여행가 초우 추-페이는 이렇게 적었다. "남쪽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말과 비슷하다. 또 돛르 펼치면 배들은 하늘에 뜬 거대한 구름과 비슷하다."
- 몽골인들은 적들을 철저하게 위협했지만 아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사상유례가 없는 치안력을 제공함으로써 교역을 활성화. 그들의 치하에서 "사람들은 머리에다 황금접시를 이고서도 어느 누구로부터 공격당하는 일 없이 해가 뜨는 나라로부터 해가 지는 나라로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고 어느 이슬람 논평자는 기록. 몽골인들의 종교적 관용정신도 상업적, 지적 접촉의 확대를 장려.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다른 신앙들이 상대적 화합속에서 번성. 이슬람 카디(재판관)가 관리하는 모스크와 병원, 바자들이 광저우와 이슬람 상법과 민법의 적용을 받으며 운영됐음. 많은 이슬람교도들 심지어 마르코 폴로 일가 같은 유럽인들도 몽골제국의 통치 속에서 출세했음. 서로 다른 문화간의 교역과 접촉의 성장은 위대한 칸의 황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거대한 수도와 내륙의 다른 주요 도시들은 해안의 교역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인도와 근동 심지어는 아프리카에서 온 엄청난 양의 사치품을 소비했다.
- 16세기 베이징이나 델리, 이스탄불, 카이로의 통치자들이 보기에 유럽의 도시들은 규모도 변변찮은데다 후진적이었음. 중국과 이슬람의 기술과 약품, 온갖 도구들은 대부분의 경우 유럽에서 생산된 해당 물품들보다 훨씬 정교했음. 고도로 발달된 관개시설과 수로체계를 갖춘 동양의 농경시스템, 특히 중국의 시스템은 서양의 농경 시스템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중국과 다르 알-이슬람의 주도적 도시들은 인구와 건물의 웅장함 면에서 모두 유럽의 주도적 도시들을 능가하는 듯 보였다. 1526년 인도의 통치권을 장악한 몽골족의 후예인 무굴제국은 이슬람 사학자가 인간이 거주하는 에덴동산이라고 묘사했던 수도 델리에서 인도를 통치. 정복당한 콘스탄티노플의 유적에 자리잡고 있던 이슬람 도시 이스탄불은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많은 부를 소유했고 인구도 더 많았다. 동양의 주요 도시들의 웅장함은 오랫동안 지속돼온 우월적 입장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 중국 황실의 태도는 전형적이었다. 어떤 사람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동안 그 사람은 황실의 영토를 지나 제후들의 영토로, 그 다음에는 강화지대로 그리고 그 뒤러 이어지는 절반정도 문명화된 미개인들의 땅으로 들어갔다가 마지막으로는 문화라고는 모르는 미개인들의 땅에 닿게 된다고 믿음. 변두리의 저끝에 있는 유럽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듯 보였다. 다르 알-이슬람에 사는 엘리트들도 외국인들, 특히 유럽인들에 대해 비슷한 정도의 경멸적 태도를 갖는 경우가 잦았다. 9세기 바그다드에서 기록된 교역 통람은 비잔티움과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을 매매할만한 가치가 잇는 상품들을 가진 곳으로 언급함. 그와 대조적으로 북유럽과 서유럽에 있는 도시들은 일부 선택된 광물들의 산지나 노예의 산지로만 유용할 뿐이었다. 두드러진 것은, 이런 태도가 유럽의 군사적, 기술적 우월성이 이미 뚜렷해지고 있던 18세기가 될 때까지도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 교회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고 또 안전을 보장해 주는 강한 제국이 없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던 유럽의 도시 공동체들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가진 것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약탈을 일삼는 기사들과 산적들이 시골을 배회하는 상황에서 방어선의 구축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 이탈리아 베로나에 대한 8세기의 묘사는 이 도시가 "두툼한 성벽의 보호를 받으며 횃불이 빛을 발하는 누대 48개에 둘러싸여 있다"고 전한다. 대포가 도입되기 이전 시대에 도시의 강력한 방어시설은 가장 포악한 침략자들이라 해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독립적인 도시국가들의 새로운 황금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탈리아 북부 상인들과 장인들은 방어를 위한 무장군대를 보유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제국의 경계가 모호하고 종종은 그런 경계의 의미가 없기까지 한 세계에서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는 도시의 상인들과 장인들은 동양의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독립성을 향유. 사유재산권이나 상업 계급의 특권을 억누르려는 황제도, 칼리프도, 술탄도 없었다. 서양에서 자치권이 있는 도시와 태동기에 있던 자본주의는 동반성장했다. 앙리 피렌느는 이렇게 썼다. "돈벌이에 대한 사랑은 애향심과 결연을 맺었다."
- 베니스인들은 사업과 정치 양 분야 모두에서 이기적 존재라는 명성을 쌓아감. 그들은 기독교 세계 대부분이 이슬람 교도들과 냉혹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시기에도 이슬람교도들과 교역. 1204년, 그들은 십자군이 비잔티움을 장악한 사건을 지중해 동부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굳건하게 다지는 계기로 한껏 활용. 결국 베니스의 선박들은 유럽과 아랍인들 사이의 교역뿐 아니라 그들이 이슬람 교도와 유대인 중개인들을 통해 빈번하게 벌인 인도와 남아시아, 중국과의 교역도 지배했다. 중개인이나 금융업자 신분에 만족하지 못한 베니스인들은 제조업도 공들여서 발전시켰으며, 그에 힘입어 도시의 경제는 훨씬 강해졌다. 전문화된 산업지구라는 개념이 서양의 다른 곳으로 확산되기 훨씬 전에 베니스인들은 주변지역을 특유의 기능적 계열에 따라 구획으로 나눴다. 선박건조와 군수품 제조, 유리제조에 종사하는 특별한 거주 공동체와 산업 공동체들을 갖춘 것이다. 14세기 무렵, 16000명 이상의 인력이 이들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면서 베니스를 서양의 상인이자 은행가뿐 아니라 서양의 작업장으로도 만들었다. 16세기 초입에 상업과 제조업의 이런 조합은 베니스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한편으로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이 도시가 보여준 확연한 코스모콜리탄 성격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이 이방인을 향한 불관용과 폭력때문에 암흑기를 겪던 시기에 베니스는 외국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독일에서 온 상인들, 레반트에서 온 유대인과 그리스 기독교인들 그리고 다른 외지인들이 베니스의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상품과 사상, 기술들을 베니스로 가져왔다.
- 곧이어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이 자금과 인재, 산업적 패권을 놓고 베니스와 경합. 플로렌스는 은행업세어 직물교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베니스의 패권에 도전했다. 제노바는 지중해 교역의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음. 프라토같은 소규모 도시들은 특정한 틈새산업을 장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도시국가들의 통치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이었으며 대개는 전제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도시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는 길드들, 상인들, 귀족들, 성직자들 사이에서 라이벌 파벌이 상대 파벌을 타도하는 일이 뻔질나게 벌어졌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제국적인 전통 그리고 교회조직의 전통과 단절돼서 전개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다시 한번 도시는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의 토대로 남았다. 규제, 특히 통상과 관련한 규제는 그 규제들이 전통적인 교회법의 신념을 침해한다 할지라도 도시의 경제적 이득이 가장 권세좋은 시민들을 위해 기획되고 도입됐다. 말썽의 여지가 있는 이런 환경에서 이제 의심할 나위 없는 근대적인 도시정치가 피어났다. 플로렌스의 메디치 가문은 근대적 도시 정치 보스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이끄는 파벌에게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체 주민에게 아낌없이 금품을 베풀 수 있는 능력에 크게 의지했다. 그들은 대단히 기회주의적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주된 목표는 믿음의 전파나 거대한 제국의 건설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도시를 위해 물질적인 부의 최고수준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제 북부 이탈리아 전역의 도시 거주자들은, 일부 현대 추정치에 의하면, 고대 로마의 풍요를 넘어서는 풍요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 도시국가들이 처한 상황은 세계 교역의 패턴이 극적으로 변화하면서 더욱 손상됐다. 기독교적 열정이 불하는 신흥 국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무어인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후 15세기를 기점으로 거의 구세주적인 광란의 분위기에 젖어 대양으로 진출. 그들은 이탈리아인들과 그들의 파트너들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교역 루트들을 결국에는 훼손시킬 매혹적인 신흥시장들을 개척했음. 인구가 백만명 밖에 되지 않는 후진적이고 가난한 소국 포르투갈이 최초의 결정타를 날렸다. 1440년대 아조레스 제도의 서부에 다다르기 시작한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얼마 되지 않아 서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 식민지들을 건설하기 시작.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하면서 이 조그만 나라는 아프리카를 둘러 아시아로 가는 루트를 열었고 이 사건은 수익이 짭짤한 향신료 교역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독점체제를 위협.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테노치티틀란 정복보다 10년 앞선 1509년에 일어남. 소규모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구지라트 외곽에 있는 디우에서 대규모 이슬람 함대를 격파한 것. 그 이후로 세계 무역의 통제권 그리고 도시의 미래는 아랍인과 중국인 그리고 다른 민족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의 손아귀로 떨어짐.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자행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잔혹한 신세계 정복은 이탈리아의 상업적 탁월함을 더욱 손상시킴.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가 되겠다는 야심에 찬 이탈리아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군주를 위해 일하기 시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존 캐벗,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 같은 이탈리아인들은 광대한 새 영토를 탐험한 초기 탐험가들이었다. 결국 신대륙의 이름은 한때 플로렌스에서 메디치 가문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던 에이전트였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7세기 무렵 2백년 전만 해도 보잘것 없던 리스본은 중요한 도시로, 포르투갈의 드넓은 제국을 위한 주도적 항구이자 행정의 중심지로 부상. 인구가 10만명이 넘는 리스본은 이제 세계적 규모의 사건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대한 제국의 수도 분위기를 풍겼다.
- 북부에 있는 도시들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런던)은 세계무역의 급격한 팽창에서 대단히 큰 수례를 입었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도시들이 17세기와 18세기를 통과하며 쇠락한 반면,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4배, 런던에 있는 도시들은 6배 이상이나 성장. 이런 발전을 가능케 한 결정적 무기는 용감무쌍한 탐험가들이나 전사들이 들고 있던 무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은행가, 상인, 숙련공들이 수행한 세속적 기능들이 이 도시들의 주무기였다. 제국이 뿌리고 가꾼 상업적 열매를 획득한 것은 용감한 병사들과 겁없는 선교사들을 거느린 스페인이 아니었따. 네덜란드의 통상을 지향하는 앤트워프와 다른 도시들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5세가 관용의 법칙을 받아들였더라면 스페인은 이 도시들의 통치를 통해 발흥하는 유럽의 도시경제를 장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카톨릭 신항을 강요하겠다는 왕조의 욕심은 생산성 높고 프로테스탄트의 비중이 높은 북부도시들을 어느 스페인 장성이 밝혔듯이 유럽의 묘지로 탈바꿈시켰다. 네덜란드의 많은 마을들이 스페인에 항거하며 봉기한 1572년 대반란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스페인 사령관 알바 공작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작전을 벌임. 네널란드의 북부는 성공적으로 저항했지만 남부는 카톨릭 통제권 아래 남음. 알바의 전쟁은 스페인의 상업적 전망에 재앙같은 결과를 가져옴. 지배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상인 계급은 스페인 치하에 있는 지역에서 피신했듬. 1567년에 스페인 군대가 약탈한 앤트워프는 쇠락한 반면 앤트워프의 인재와 자금, 통찰력 중 상당 부분은 북쪽에 있는 신흥독립도시들로 옮겨감.
- 고대 알렉산드리아와 절정기의 카이로, 15세기 베니스처럼 암스테르담의 상업적 성공은 인구의 다양성에 많은 힘을 입음. 이 도시에서는 지배적 네덜란드 개혁 교회와 더불어 카톨릭과 위그노, 유대교, 루터교, 메노파의 종교기관들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은 종교가 아닌 종교를 믿는 인구는 대략 시민 4명중 1명 꼴. 페르낭 브로델은 이렇게 적었다. "신앙의 자유라는 기적은 교역에 집중하는 공동체 어디에서건 볼 수 있다." 상업적 활력과 다양한 인구의 결합은 예술과 기술, 철학 분야에서 과감한 혁신을 일으키기에 이상적 분위기를 창출. 스페인은 이와는 대조적이었다. 종교재판소장의 아들인 로드리고 만리케는 "문화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교도나 죄인, 유대교도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고 투덜거렸다.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개방적 연구와 혁신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대학과 과학협회, 출판사를 통해 그런 것들을 키워내기까지 했다. 이런 진취적 정신은 도시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명됐다. 처음에 네덜란드의 교역은 와인과 목재, 설탕, 화학제품 같은 상품들에 의존. 그러나 17세기 무렵 네덜란드인들은 값진 교역 (염료, 유약, 도자기, 린젠, 고급가구, 태피스트리)에 더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혁신적 기법들을 사용. 네덜란드 기업가들은 엔지니어링 서비스와 산업적 전문지식, 기술을 유럽 곳곳의 나라들로 그리고 심지어 멕시코까지 수출. 네덜란드의 팽창하는 중산층은 주요한 문화적 중심세력이 되면서 도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함. 16세기와 17세기의 네덜란드 미술가들은 숙련된 장인 (태피스트리 디자이너, 모피 재단사, 금 세공인)의 아들인 경우가 많았음. 이 미술가들은 지역의 상류층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후원을 받았음. 미술은 명성을 얻는 방법일 뿐 아니라 돈을 버는 방법이기도 했다. 일급 초상화 화가인 렘브란트는 대학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다.
- 런던의 번영은 정도 면에서도 엄청났을 뿐 아니라 성격 면에서도 파리나 마드리드,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라이벌 제국의 수도들과도 확연히 달랐다. 이 거대한 수도들은 런던과 비슷하게 그들 나라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웅장한 성당과 궁전, 공원들을 자랑했다. 그러나 성장일로에 있는 세계경제를 통제하고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활력 넘치는 경제기관들을 만들어낸 것은 런던 뿐이었듬. 런던은 역사의 초창기 이래로 거대 도시들을 지탱해주던 도덕적 결단력에 대한 중요한 감각도 터득. 로마제국이 절정기에 달했을 때처럼 런던은 세계를 주도할 준비와 세계를 발전시킬 준비가 모두 돼 있었다.
- 런던의 상업적이고 제국적인 패권은 도시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닦았음. 이 단계의 발전은 제조업 기술의 혁명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산업은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시대 때부터 도시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지만 18세기 말 영국은 새로운 종류의 도시, 주로 상품의 대량생산과 연계한 도시의 창출에 있어 선구자가 되었다. 대서양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동력원 겸 운송로 역할을 해준 편리한 강물들 그리고 훗날의 풍부한 석탄 매장량 같은 많은 자연요인들이 연국의 초기 산업의 출현을 이끌었음.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국이 제조업의 성장에 이상적인 사회적, 정치적 풍조를 누렸다는 것이다.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통일된 상태였던 영국은 이탈리아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권력의 분열에도, 프랑스가 겪은 사나운 격변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영국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옮겨간 것은 카톨릭 권력집단과 그들이 보유한 광대한 토지를 모두 없애버린 것에서도 혜택을 입었다. 그 조치를 통해 영국은 중세의 "층층이 쌓인 상류계급의 협동조합"을 분쇄했다. 그러면서 1768년에 다축 방적기를 발명한 아크라이트 같은 예전의 장인 계급 출신이 초기 혁신자로 부상하는 데 이상적 풍토가 조성됨. 귀족제는 영국에서 계속 기업을 유지했지만 부자들은 자신의 조상이 무슨 일을 했던 상관없이 기업을 세울 수 있는 자유를 누림. 이는 제약이 훨씬 많은 동양에서보다 그리고 자유로이 활동할 여지가 적었던 다른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서보다 더 폭넓은 자유를 향유. 결국 영국은 세계의 지배적 제국으로 등장하면서 유럽 외부에 있는 광대한 자원의 원산지와 새로운 시장을 모두 개척할 수 있었음. 마르크스가 쓴 문장인 "자본주의 생산기의 여명"은 제국의 통합과 동시에 찾아옴. 제국주의적 벤처사업 (면화, 담배, 노예)에서 파생된 자본은 섬나라 영국이 산업의 최전방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도약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조달해 주었다.
- 로스엔젤레스에서 교외 모델이 시작된 것은 도시의 발전에 있어 급격한 분기점이었다. 역사를 통틀어 도시는 우뚝 솟은 풍경과 공공장소의 활기를 자랑으로 여겨왔다. 가장 성스럽고 멋진 공공구조물은 필수적으로 도심에, 아니면 도심 주위에 솟아 올랐다. 티레, 카르타고, 로마 등의 가장 역동적인 고대 도시들은 중심부 공간에 건물들을 높이 세우고 더 많은 주민들을 거기에 채워 넣는 것으로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에 대처. 산업혁명의 징후는 도시의 지형에 유례없는 압력을 가하며 도시의 성장률을 가속시킴. 1800년 경, 유럽 도시들은 중세 시대의 선배도시들보다 최소한 두배는 더 조밀했다. 일부 미국의 도시들, 그중에서도 뉴욕은 그보다 더 붐볐다. 한때는 안전한 피신처였던 도심에는 점점 더 범죄가 창궐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 초기에만 해도 도시의 미래가 주변부에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 도시의 주변부로 이주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었다. 요컨대 저렴한 임대료와 길어진 통근거리를 맞바꾼 것이다.
- 50년대와 60년대에 식민지배가 끝나면서 새로 권력을 위임받은 식민지 도시의 통치자들에게는 딜레마가 하나 생김. 그들은 어느정도 현대화된 인프라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엄청난 불평등을 겸비한, 유럽의 영향력이 구현된 소우주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소규모 엘리트들이 전통적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대규모 인구와 공존했다. 이 도시들이 현대와의 활력 넘치는 중심지로 떠오르는 동시에 정치, 경제, 문화적 르네상스의 자랑스런 심벌로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처음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재닛 아부-루고드의 표현에 따르면, 1960년대는 아랍과 이슬람권 도시들에게는 평온한 시대였다. 다른 개도국의 도시들을 통치하는 이들도 상당히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많은 경우 유럽에서 교육받은 식민지 엘리트들은 한때 유럽인들이 차지했던 고상한 주거지역으로 이주했다. 자신들의 도시가 유럽과 북미의 도시들만큼이나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되기를 희망한 그들은 주요 기업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통제하는 관료제를 확장시켰다. 새로운 가능성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기대에 힘입어 이 도시들은 기업 엘리트와 전문직 엘리트들에게뿐 아니라 토지에서 쫓겨난 농부들과 소읍의 기능공들로 구성된 팽창하는 이주민들에게도 매력적인 도시가 됐다. 봄베이와 캘커타, 델리, 라호르, 라고스, 카이로, 마닐라 같은 도시들은 식민 통치 아래에서 규모가 몇 배나 늘어났다. 예를 들어, 봄베이의 인구는 41년 150만 이하에서 20세기 말에는 1500만 이상으로 증가.
- 많은 경우 도시의 거대한 팽창은 부와 권력의 동반 증가를 수반하지 않았다. 그런 개발은 도시역사의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분기점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로마건, 중국이나 이슬람 제국이건,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들이건 아니면 산업화 시대의 북유럽이건 거대 도시들은 보통 경제적, 정치적 성공이 가속화된 결과로 발전해 왔다. 팽창하는 도시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성장하는 산업분야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제국의 정복에 따라 흘러들어온 대규모의 부를 내놓으라며 정권을 졸라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의 거대 도시 중 상당수는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고 사회적, 정치적 역기능이 만연한 가운데 더 엄청난 규모로 성장. 어느 분석가가 기록한 것처럼 많은 경우 이런 도시지역은 현대화와 발전의 생산자로서 그들이 수행할 것이라 기대됐던 기능들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음. 겉으로만 보면 이들 도시 중 상당수는 식민지 시절에 지닌 서구의 얼굴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얼굴은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경우가 잦았다. 이 도시들에는 세계적 기업들의 인상적 사무실, 1급호텔, 품위 있는 거주지역 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도시들의 상당수는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수렁에 빠져 있었고, 도시들의 운명은 대체로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점차 성장하는 동아시아의 기업들이 내린 의사결정에 달려 있었다. 성장의 원동력을 제공할 믿음직한 경제적 엔진이 없는 도시지역들은 가장 기초적 인프라를, 확장은 고사하고, 그대로 유지할 자금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음. 개발도상권을 통틀어 쓰레기의 30~50%가량이 수거되지 않고, 깨끗한 물공급이 부족한 경우가 빈번함. 대기오엽은 유럽이나 북미의 가장 혼잡한 도시들보다 더 치명적인 상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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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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