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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한국 현대사

역사 2014. 10. 7. 13:23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저자
임영태 지음
출판사
생각의길 | 2014-02-2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 책은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한국사 교과서 사건’으...
가격비교

- 냉전시대 구우익의 주무기는 반공이데올로기와 편가르기식 이분법이었는데, 뉴라이트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음.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친북, 종북, 좌익, 좌빨, 나아가 김정일 정권의 2중대, 김정일의 하수인 등의 용어를 쓰는 것은 올드라이트와 판박이임. 그래도 올드라이트는 형식상으로는 민족을 강조했고, 뉴라이트처럼 항일독립운동을 폄하하거나 친일파를 노골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음. 그러나 뉴라이트는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아예 부정하며 친일파를 노골적으로 옹호. 그들은 지금 일본에서 군국주의 부활을 주도하는 아베신조와 같은 극우세력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의 소리도 내지 않음. 오히려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며 온몸으로 저항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비웃는 일조차 서슴지 않음. 올드라이트는 북한을 적대시했지만 하나의 민족, 통일의 대상으로는 보았음. 그러나 뉴라이트는 그런 개념조차 없음. 북한을 아예 한국사에서 제외해야 할 존재로 취급. 그들은 어떤 형태의 남북화해나 협력도 부정함. 그런 행위는 오직 종북, 좌빨의 행위일 뿐이라고 강변함
-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사람보다 보수적인 사람이 더 큰 힘을 발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유신체제를 만들고 지탱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다시 정치권력을 장악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그의 주변에 올드보이들이 몰려들어 한국사회 전체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 한국 현대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퇴행하고 있음. 역사적으로 보면 진보가 힘을 발휘한 시기는 매우 짧았음. 반면 보수가 주도한 기간은 길었음.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합리적 보수가 아니라 보수를 가장한 극단주의였음. 지금 보수를 가장한 극단주의 세력, 즉 극우세력이 한국 사회를 좌우하고 있음. 그들은 비상식적인 뉴라이트 교과서를 만들어 한국역사의 전통과 근간을 뒤흔들고 있으며, 국정원의 선거개입 공작과 같은 국기문란 행위를 자행하여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음. 한국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합리적 보수와 극우세력이 분리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이런 논리는 당연히 진보세력에도 해당됨.
- 건국절 주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가치를 축소하려는 사고. 이영훈은 건국절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음. "1945년의 광복과 48년의 제헌, 둘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단연코 후자이다. ...반면 45년 8월의 광복에 나는 그리 흥분하지 않는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감격이야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후대에 태어난 사람의 입장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다.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복은 일제가 무리하게 제국의 판도를 확장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미국에 의해 제국이 깨어지는 통에 이루어진 것이다." 광복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님. 그러나 우리 힘으로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독립투쟁의 가치나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아님. 그걸 부정해서도 안됨. 친일파들이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할 때,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벌판과 중국대륙을 누비면서 풍찬노숙했음.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를 나라의 독립에 바쳤음.
-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희생을 생각할 때 이영훈의 주장은 광복절이 의미를 폄훼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움. 그러나 문제는 이영훈만이 이렇게 하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뉴라이트로 불리는 사람들의 인식체계는 대동소이함. 뉴라이트 세력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함. 그들은 일제의 지배가 식민지배라는 점보다 일본 근대화 경험의 이식과정이라는 점에 주목. 일제가 지배하면서 조선에 공장이 들어서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가 성립되면서 경제가 발전했다는 것. 이런 사실을 통계자료와 수치까지 제시하며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보여줌. 그러나 이런 주장의 치명적 약점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
- 제국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백히 발혔음. 48년 정부수립에서 건국의 의미가 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적 실체로서 존재하게 된 것은 48년부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거족적 항일운동인 3/1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 출발점이 마련되었음. 48년 당시 한국정부를 세운 주역들도 그렇게 인식했음. 그랬기 때문에 제헌헌법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건국이 아니라 재건이라고 표현한 것.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운동의 전통위에서 세워졌다는 것은 뉴라이트가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분명히 인정한 사실. 이승만 임시국회의장은 제헌국회 1차 회의에서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기미년 서울에서 13도 대표가 모여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이 계승이다라고 말했음. 또한 그는 국회 개원 축사에서 민국 29년만에 부활되었기 때문에 민국 연호를 기미년에서 기산하여 대한민국 30년에 정부수립이 이루어졌다고 말함. 이승만은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신적으로는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 독립운동과 그 정신의 계승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임. 독립이 없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랬기 때문에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 계승을 천명하였고, 부칙에서 친일파 청산의 근거조항까지 마련. 제헌헌법 101조에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 이를 바탕으로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만들어진다.
- 42년말부터 45년 4월까지 2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나치치하에 있었던 프랑스나 동유럽국가들도 전쟁후에 나치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철저히 처벌했음. 프랑스의 경우 비시정권과 나치 협력자 1만명 이상이 처벌받았음. 중국에서도 일제에 협력했던 한간을 강력히 처벌했음. 한간이란 원래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때 한족으로서 만주족과 내통하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적과 내통하는 첩자, 간첩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음. 일제에 빌붙어 중국을 팔아먹은 친일분자는 간첩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중국에서는 일본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부 종사자가 바로 친일파였음. 일본군 밑에서 첩자로 일한 자들을 말할 필요도 없었음.
- 부산정치파동은 한국정치사에서 파행의 첫걸음이었음. 또한 그것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억압적 독재정치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음.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당시 미국은 전쟁중인데도 이승만을 교체하기 위한 군부 쿠데타를 심각하게 검토. 미국은 53년부터 이승만 제거계획인 에버레디 작전을 마련하여 가동. 작전명처럼 항상 준비된 작전, 즉 이승만에 대한 항상적인 군사 쿠데타 계획이었음. 이승만의 이런 민주주의 파괴행위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미국의 한국안보 활동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본 것. 미국은 이 작전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50년대 내내 몇번에 걸쳐 그 실행을 검토.
- 이승만은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였던 맹자가 주장한 덕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 맹자는 신분질서를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여긴 근본 보수주의자였지만 통치자의 책임의식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강조. 그렇다면 이승만의 행위를 냉혹한 마키아벨리스트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음. 그러나 그가 말하는 용맹함과 교활함은 자신의 호의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안위와 행복을 지키기 위한 것임. 그러면 이승만이 과연 그랬을까? 그는 전쟁을 예방하지 못함으로써 통치자로서 가장 중요한 국민의 안위와 생명을 지키는 데 실패. 그뿐인가? 야반도주, 거짓방송, 한강 다리 폭파, 잔류파 처벌, 가혹한 부역자 재판, 민간인 학살 등 통치자로서 지켜야 할 책무를 하나도 지키지 못했음. 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도 파괴함. 그것은 순전히 권력욕망에서 나온 것. 이승만은 전쟁이 아니었으면 60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쫓겨났을 것임. 이승만은 전시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는 불법적 조치를 계속했고, 그로써 경찰국가를 구축해서 정권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음. 그의 이 같은 반민주적인 행위에는 모두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붙었음. 그는 발췌개헌에 이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며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 자유당 독재, 민중억압, 정치탄압, 조봉암 암살 등 이승만의 정치적 과오는 끝이 없음. 그에게서는 동양적 세계관에 입각한 민중에 대한 사랑은 고사하고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냉철한 현실적 정치능력 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간에는 이승만을 두고 외교는 천재, 정치는 천치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음. 그러나 과연 이승만의 외교가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을까?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는 한마디로 미국을 협박해서 안보공양을 확실히 받아내는 것이었음. 그것을 위해 이승만은 정전협정 파괴위험까지 있는 반공포로석방을 감행했으며, 미국을 향해서는 북침을 일으킬수도 있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음.
- 박정희의 행동에는 출생과 성장,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와 관동군의 경험에서 얻은 정신세계가 크게 영향을 미침. 그는 일찍부터 큰 칼을 차고 싶다는 지배욕과 과시욕이 강했기에 일본군 장교가 됨. 그는 일본 만주군 장교시절, 메이지유신 시기 지사들의 천황주의 국가관과 30년대 2/26 쿠데타를 일으킨 일본군 청년장교들의 극우적 군국주의 사상에 매우 깊이 매료되었음. 평생 그의 정신세계에는 일본군의 황군정신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음. 박정희는 현세적인 출세와 기회를 엿볼 줄 아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음. 그는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만주군을 이탈한 뒤 광복군을 찾았고, 국내에 들어와서는 국방경비대에 들어감. 그리고 다시 남로당에 입당. 박정희의 남로당 입당이 존경하는 형 박상희 때문이었는지, 시대적 대세를 좇는 처신에서 나왔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움. 하지만 이러한 행적으로 볼 때 그가 현실적 조건에 따라 변신에 능했던 것은 분명. 박정희는 무엇보다 권력에 강하게 집착. 이는 일본군 장교가 되는 과정, 남로당에 입당하는 과정, 승진누락에 대한 불만 표출 등 그의 삶, 행적 곳곳에 드러남. 평소 그는 강한 영웅의식과 권력추구 욕망을 갖고 있었음. 그는 또한 나중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고, 자신의 생명을 근대화에 바치겠다는 각오를 보이는 등 역사적 인물로 남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음. 조갑제는 박정희를 영웅적 기질의 인물로 보았음. 조갑제는 박정희의 행동과 정신세계에서 일반인과는 다른 혁명가의 초상을 발견. 하지만 과연 박정희를 영웅, 혁명가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할까? 박정희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산 것은 분명. 한마디로 박정희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거부했고, 끊임없이 도전했음. 그런데 그가 도전한 것은 가치나 신념이 아니라 권력이었음.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박정희는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비범한 면을 갖고 있었음. 그는 항상 결단력 있는 삶을 살았음. 개인적 욕망의 추구라는 점에서만 본다면 그는 매우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음. 그는 생활이 보장되는 보통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과감히 군인의 길을 선택. 일본 육사에 입학해서는 아주 좋은 성적으로 졸업. 이는 그가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는 하나의 징표로 볼 수도 있음. 남로당의 군사책임자가 된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음. 시대적 대세여서 그랬든 권력을 향한 욕망 때문에 그랬든 보통 사람으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임.
- 박정희와 김종필로 대표되는 핵심인물의 행적과 사고를 중심으로 5/16의 동기와 원인을 살펴볼 때, 5/16은 명확한 이념과 전망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음. 그 때문에 이상우 기자는 5/16 성공 후 혁명이념이 급조되었다고 말함. 진급적체에 따른 인사불만과 군부 상층부의 부패에 대한 청년 장교들의 분개, 정부의 무능과 정국혼란에 따른 안보 불안감 등 여러 요인이 혼합되어 있었음. 그들의 불만으 일말의 공감대를 형성할 부분들도 있었지만, 반란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음. 장면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해도 합법적 과정을 밣아 등장한 정통성 있는 정부였음. 4/19 이후 정국이 다소 혼란스럽다 해도 쿠데타와 같이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음. 사회혼란이 문제라면 합법적 절차를 거쳐 질서를 잡을 길은 얼마든지 있었음. 경찰력을 강화하고 도저히 안될 경우에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합법적 방법으로 사회혼란을 평정해야 마땅했음. 그것이 법치국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 따라서 5/16은 어떻게 보아도 정당화될 수 없는 군사반란이었음. 그것은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피로써 쟁취한 민주주의 혁명을 하루아침에 무력으로 짓밟은 반혁명 사건이었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 그 이후 역사전개는 이들 5/16 세력이 처음에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운 것들까지 무색하게 만듬. 군부는 처음 정국이 안정되면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고 혁명공약 제6항에 버젓이 내걸었음. 그러나 그들은 이 공약을 지키지 않음. 그뿐만이 아님. 김종필은 중정이라는 비밀정보기관을 만들어 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하고, 이를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구악보다 더한 신악이란 말이 유행하게 함. 이건 물론 김종필만의 책임은 아님. 박정희 집권에 필요한 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려고 벌인 작업이었으니 당연히 공동책임임. 더욱이 박정희는 그후 3선개헌, 유신체제 등으로 아예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말살하며 18년이라는 장기집권을 지속. 결국 그는 심복의 총에 죽음을 맞이했고, 권력도 종말을 맞음.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구축한 유신왕국도 무너짐. 박정희는 총으로 흥한자, 총으로 망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줌.
- 전두환은 말이 군인이었지 철저히 정치인이었음. 그는 우리가 말하는 부정적 의미의 정치군인의 전형. 전두환은 초급장교시절부터 정치군인 행세를 했음. 5/16 쿠데타가 났을 때, 그의 계급은 대위였음. 31년생인 전두환은 61년 당시 만 30세였음. 한창 피 끓는 젊은 청년이었지만, 국가 수호의 군인정신과 기백은 어디에도 없었음. 이미 그는 닳을대로 닳은 정치가 행세를 하고 있었음. 5/16 지지데모를 조직한 것이 바로 그 징표임. 전두환은 젊은 나이에 정치군인이 되었고, 권력을 탈취하는 순간까지 정치군인이었음. 정치군인이 권력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음. 79년 10/26 사건으로 절대권력자 박정희가 사라지자 권력의 공백 상태가 도래. 사람들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몰랐음. 그러나 전두환은 잘 알았음. 그는 서른살대부터 20여년을 박정희 주변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보면서 정치군인으로 살았음. 그 때문에 권력의 향방에 민감했고, 주인 없는 권력을 어떻게 채어갈지에 대한 촉감도 빨랐음.
-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전두환은 평범한 군인이었음. 그는 박정희가 사망할 땅시 보안사령관이었음. 그의 계급은 육군 소장, 평범하다는 것은 그가 군지휘관으로서 특별히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는 동기들 가운데 승진이 가장 빨랐음. 그런 점에서 그는 능력있는 군인이었음. 전두환의 승진이 가장 빨랐던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윗사람, 특히 인사권자인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는 점. 그는 야전사령관으로서 능력을 나타내기 보다는 정치군인으로서 권부 주위를 맴돌며 출셋길을 잘 개척. 그가 군인 본래의 길보다 정치군인으로서 출셋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의 군부관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
- 박정희는 치밀한 계산아래 군부를 관리. 군부의 동향은 보안사에서 항상 감시. 박정희 통치 시기에 군부는 영남 인맥이 장악했음. 이승만 정권 시절 군부의 주요인맥은 서북파(평안도, 황해도)와 동북파(함경도)가 장악했기에 박정희는 소외되어 겉돌아야 했음. 하지만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뒤 이북 출신 군 인사들은 몰락하고 영남인맥이 군부 핵심을 장악. 박정희는 영남인맥이 군부를 장악하도록 도와주었으며, 군부의 주요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게을리 하지 않음. 군부가 등을 돌리면 권력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기 때문.
- 박정희가 전두환을 살려준 것은 5/16 쿠데타 직후 육사생도들의 지지데모를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한 때문이기도 했음. 5/16 직후 쿠데타 세력이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전두환, 이상훈 대위가 주동이 되어 생도들을 배후에서 조종, 이른바 군사혁명 지지 데모를 성공시킴. 전두환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박정희 최고회의 이장의 민원담당 비서관이 되었다가 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됨. 전두환은 이때부터 동기들 가운데 선두주자가 됨. 전두환은 이 같은 박정희와의 정치적 인연을 바탕으로 군부에서 탄탄한 기반을 구축. 그는 또한 노태우 등 동기생들과 함께 결성한 하나회를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확대하면서 동기와 후배들이 군내의 인사, 정보 등 핵심 보직을 차지하도록 이끌었음. 그는 특유의 보스 기질도 발휘. 전두환은 육사 졸업 당시 성적이 최하위에 속했지만 이 같은 정치군인 행보를 기반으로 동기 중에서 가장 앞서가게 됨
-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한 뒤, 신군부는 치밀하게, 그리고 본격적으로 권력탈취에 나섬. 우선 군부를 자신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재편. 10/26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쑥대밭이 된 중앙정보부도 장악. 학생들과 야당, 재야세력이 서울의 봄을 만끽하던 80년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 중앙정보부법상 현직군인은 부장이 될 수 없었기에 서리라는 꼬리표를 달고 등장한 것. 전두환의 정보부장 서리 취임은 몇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 우선 중정의 조직과 정보를 장악함으로써 정국 흐름을 주도할 수 있었음. 전두환은 중정부장과 보안사령관을 겸임함으로써 군과 민간정부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음. 이것은 지금으로치면 기무사령관,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정원장을 한몸에 구현한 것이나 마찬가지. 또 당시 중정부장은 부총리급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음. 그 전까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뒤를 따라 합수본부장 자격으로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전두환에게 신현확 등 각료들이 계속 시비를 걸었음. 전두환은 중정부장 서리가 됨으로써 국무회의에 참석해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게 됨. 어떤 면에서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정이 갖고 있던 예산이었음. 당시 중정 예산은 800억 정도 였는데, 이 가운데 120억을 빼내 권력탈취 활동에 사용. 이와 함께 전두환을 지도자로 부각하기 위한 언론공작이 시작됨. 이른바 K공작임. K는 King의 약자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의미. 이는 보안사가 주도.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주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사령관 비서실장 등 이른바 전두환의 보안사 5인방이 모든 것을 주도. 그들은 실무팀을 꾸려 구체적인 실행 작업에 들어갔는데, 실무책임자는 보안사 언론팀장인 이상재 준위였음. 언론대책반은 서울시청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언론공작에 몰두. 언론사 및 언론인을 포섭하고 시국의 혼란상을 부각하는 한편, 전두환을 띄우는 작업에 들어감.
- 6/29 선언은 국민의 저항에 밀려 나온 민주화 조치였음. 하지만 그것은 집권세력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정치적 쇼이기도 했음. 전두환과 노태우 일파는 제한된 민주화를 통해 그들의 지배를 계속할 수 있다고 보았음. 직선제라는 민주적 절차를 수용함으로써 국민의 저항을 무마하고, 민주세력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여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음. 그들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뿌리깊은 경쟁, 정부여당의 막강한 조직과 자금, 지역감정의 유발 등으로 대통령 직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본 것. 6/29 선언은 노태우의 말처럼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면서 동시에 지배세력의 집권연장을 위한 위장 항복이었음. 6/29 선언으로 집권세력은 일단 물리적인 정권 전복의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음. 이 선언과 함께 야당은 바로 제도권으로 들어왔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이제 거리가 아니라 제도권에서 선거를 통한 집권 경쟁으로 바뀜. 그동안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학생, 재야 등 민주세력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세력은 그 같은 집권경쟁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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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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