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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이동

경제 2014. 12. 25. 14:23

 


부의 이동

저자
그렉 클라이즈데일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 | 2008-11-04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송대 중국부터 현대 일본과 미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부강했던 ...
가격비교

- 혁신이 기술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려면 네가 역할중 적어도 한가지는 감당할 수 있어야 함
(1) 혁신기술이 자원을 가치있는 형태로 발전시킴
(2) 기존제품이나 용역에 가치를 부가
(3) 시장을 개발
(4)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상품을 가질 수 있도록 비용을 절감
1. 동방의 부_중국, 분업화의 대량생산 체제가 부를 만들다
- 중국이 그토록 일찍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한 배경에는 지리적, 정치적 이유가 있음. 중국인들은 일찍이 고대왕조때부터 봉건체제가 최상의 국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음, 구체제 아래에서는 봉건영주가 지역적 세력을 발판으로 전쟁을 일으켜 국가의 안정을 뒤흔들었음. 그래서 봉건영주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체계적으로 진해오딤. 그후 몇세기가 지나자 봉건영주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 세계 최초로 관리들로 구성된 관료체제가 자리잡게 됨.
- 상인들은 중국선박들이 드나드는 외국항만에 대리점을 개설. 이와 더불어 소규모 중국상인 공동체가 참파, 캄보디아, 수마트라, 자바 등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형성되기 시장. 외국항구에 있는 대리점들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 대리점이 화물을 창고에 보관하고 출하시기를 조절함으로써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가격도 높은 상태로 유지되었음. 대리점들은 외국시장 개척에도 핵심적 역할을 함. 이들은 외국항구의 시장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어떤 종류의 물품을 어떤 항구로 가져와야 할지, 그들이 예상하는 가격은 어느선인지 등의 정보를 제공했음. 중국상인들은 이렇게 대리점을 통해서 자유시장을 조직화된 시장으로 변화시켜 수익성을 높임.
2. 직물과 향신료_세계의 거상들, 인도양에 취하다
-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세정책의 변화, 특히 세금을 곡물대신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허용한 악바르의 결정은 시장경제체제로의 변화움직임을 가속화했음. 예전에는 식량과 면화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양만 생산하던 농가도 현금과 바꿀수 있는 곡물 생산에 열중하기 시작. 농업이 자급자족 형태에서 시장을 중심으로한 생산체제로 바뀐 것임.
- 구자라트는 건전한 경제환경 덕분에 독특한 비즈니스 구조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음. 도우선은 인도양의 여건에 맞추어 해상운송에 가장 효율적으로 만든 배였음. 그러나 배가 가벼워서 군사작전에 필요한 무장은 갖출 수 없었고, 따라서 평화적 무역이 상인들에게도 유리했음. 한편 무역상들의 종교적 신앙이 평화로운 무역환경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된 측면도 있음. 구자라트의 합리적 비즈니스 관행으로 대리인제도를 꼽을 수 있음. 상인들은 외국항구에 대리인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시장수요를 예측하게 하고, 만약 수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상품을 구매하는 업무도 맡겼음. 대리인은 항해하기에 알맞은 몬순 계절풍이 불기 시작하면 미리 확보한 상품을 선적했음. 재원이 넉넉한 상인들은 특정 상품을 시장에서 독점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격렬한 저항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음. 상인등른 늘 이런 위험을 염두에 두고 그 문화권에서 합리적인 경제활동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사업을 운영했음
- 중국과 구자라트의 해운업 융성에는 흡사한 점이 많음. 양국 모두 해운업을 지원했으며 해운능력을 배양하는 데 필요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음. 특히 정치적 안정과 제국의 통일로 말미암아 대규모 시장과 생산기지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사업가들에게 열려 있었음. 양국의 선주들이 성공한 배경에는 높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던 배후산업과 나날이 증가하는 국내수요가 있었음. 이러한 이점 덕분에 선주들은 경험과 역량을 쌓으면서 외국고객의 유치에도 성공함. 양국의 해상운송업은 강력한 제국의 관문역할이라는 전략적 자산도 가지고 있었음. 양국의 해상운송업체는 모두 가족중신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그 구조가 매우 유사했음. 물론 중국의 조공무역은 예외였음. 그러나 해상운송업을 뒷받침했던 배후산업의 구조는 매우 다양했음. 중국의 요업은 단일품목에 집중하는 대량생산체제로 발달했지만, 인도의 직물생산자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음. 그렇지만 양국의 산업은 모두 고도의 전문화를 이루었음. 산업구조의 차이는 원료의 주산지와 생산기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음.
- 구자라트 경제체제의 취약점은 지식을 발전시킬 사람이 없었다는 점. 구자라트에서 기술을 혁신하기 위한 노력을 찾아보기 어려움. 중국에서는 승려들과 문관들이 기술혁신에 기여했고 또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지만, 구자라트에서는 그런 현상이 보이지 않았음. 그 이전 수세기 동안 이슬람 문명권과 인도지역에선느 유럽을 능가하는 신기술이 많이 개발되어 있었음. 하지만 구자라트가 명성을 떨치던 시대에는 기술혁신이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었음. 여기에는 그들의 학문이 지니고 있던 독특한 성격이 한몫했음. 중국인들은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자 했지만 인도인들은 물질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음.
3. 신과 황금, 그리고 영광_유럽, 모방과 혁신으로 경제 변방에서 벗어나다
- 외국의 생산기술을 받아들여 응용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생산능력은 크게 향상됨. 신기술의 주요원천은 바로 이슬람 국가였음. 유럽인들은 이슬람권에서 아마포 생산기술을 받아들였음. 이슬람 교도들은 에스파냐에 면화 생산방법도 전파. 물레는 13세기에 처음으로 동방에서 도입됨. 베니스는 시리아에서 전수받은 유리생산능력으로 유명해졌고, 설탕제조 기술은 십자군이 동방에서 배워 유럽으로 들여온 것. 이슬람의 영향은 광업에도 미쳤음. 15세기 중엽까지도 광업에 관한 출판물이라고는 아랍서적의 번역물밖에 없었음.
- 기독교 십자군이 이슬람 세계와 더욱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12세기에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엄청난 모방이 행해졌음. 기술면에서 부유해질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을 확보한 셈이었음. 이 시기에 그리스 고전이 재발견 되었으며, 이슬람 지역의 과학서적이 도입되어 점차 유럽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음.
- 유럽상인들은 중국이나 인도상인들에 비해 정부로부터 훨씬 많은 지원을 받았음. 각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분열되어 있던 유럽의 정치적 지형이 낳은 결과였음. 유럽 각국은 상대적으로 영토가 작아서 중국이나 무굴제국에 비해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농토가 부족했음. 그래서 세입을 올리려면 상인들을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음. 국토가 작아서 군주들이 상인을 포함해 일반백성들과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며 상인들의 요구에도 응하기가 쉬웠음. 현대 기업구조에도 이와 비슷한 특징이 있음. 기업구조가 분권화되어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 부분에 접근해서 결정을 내리기가 쉬움. 유럽 각국은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동양의 거대국가들에 비해 경제적 효율성을 한층 높일 수 있었음.
-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스파냐, 포르투갈)에게는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두가지 중요한 이점이 있었음. 먼저 대서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또 지중해에 인접해 있어서 이탈리아인들의 전문적 지식도 흡수할 수 있었음. 여기에는 제노바 사람들이 자본을 공급하고 해운에 관한 전문지식을 보급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음.
- 이베리아반도 국가들은 상호보완적 수요패턴으로 세계경제체제를 구축. 아프리카 노예를 광산과 농장에 공급하기 위해 남아메리카로 수송하고, 남아메리카에서 선적한 은괴와 기타산물은 아시아로 운송해서 남아메리카와 유럽으로 보낼 재화와 교환했음. 그와 동시에 남아메리카에서 선적한 은괴, 설탕, 기타산물을 대서양으로 거쳐 유럽으로 직접 운송하기도 했음.
- 이베리아반도 사람들은 레콘키스타 운동을 전개하던 때의 가치관 토대에서 새로운 경제체제를 구축. 이슬람 세력에 대항해서 싸울 때 적용되던 레콘키스타라는 낡은 패러다임으로 해운기술을 향상시키고, 여기에 남아메리카 자원을 개발하려는 열망이 보태졌음. 그러나 교회와 귀족층이 상인과 무역보다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국왕은 발전과정을 직접 주도하면서 계속 중심적 위치를 점했음. 세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두 무역제국은 효율적인 조직운영으로 독점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음. 1세기 동안 대적할만한 경쟁국가가 나타나지 않아 두 나라는 자신들이 구축한 무역항로를 무난히 유지할 수 있었음.
4. 북유럽의 도약_자원부족을 딛고 바다에 이름을 떨치다
- 거래소는 자금조달의 편의를 제공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으며 암스테르담 무역계의 큰 장점이기도 했음. 즉, 네덜란드가 고품질의 제품과 용역을 저비용으로 생산하고, 고도로 효율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음. 네덜란드는 이와 같이 혁신적 제도를 통하여 부를 창조하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도전장을 던졌음.
5. 에스파냐의 위기와 네덜란드의 전성기_조선술이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다
-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이 함정에 빠진 원인은 그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낡은 믿음 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아 올린 위업에 대한 자만심 때문이기도 했음. 이들은 늘 오만하게 행동하며 외국을 멸시했음.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지도다을이 정복자의 후계자로 행세하고 있었음. 자기들이야말로 에스파냐 제국을 건설한 정복자들의 후예이므로 벼락출세한 북유럽 상인들과는 신분이 다르다고 확신했음.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사고방식과 오만한 문화로 인해 내적 발전에 장벽이 생겼음.
- 이베리아 국가들은 해전에서도 과거에 성공을 거둔 낡은 전술만 고집하고 있었음. 에스파냐는 화포사격으로 적군의 전열을 와해시킨 다음에 적선 갑판으로 뛰어오르는 전통적인 지중해식 해전방식을 쓰고 있었음. 하지만 영국은 병력이 한정되어 있어서 주로 바람을 이용하면서 뱃전에 일제사격을 퍼붓는 전술을 펼쳤음.
- 주요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새롱누 경제활로를 찾는 길 밖에 없었으며 네덜란드는 산업발전만이 그 길이라고 굳게 믿었음. 네덜란든느 기술혁신과 기계화 증진을 통해 경제전반에 걸쳐 발전. 방직기계, 구리 증류기, 압착기, 톱날이 여러개 달린 제재용 톱, 원두를 가는 기계 등이 그때 개발됨. 잔 산업지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제지공장이 1670년 경 출현했음. 이 공장에서는 종전에 비해 더 무겁고 값이 비싼 장비가 사용되어 표면이 매끄러운 고품질 백지가 생산되었음. 네덜란드는 서방세계의 기술연구소가 되었음. 신기술로 양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수출가능 품목들이 새로 등장했음. 그러나 에스파냐에는 네덜란드의 산업기자와 같은 산업기반시설이 없었음. 에스파냐 선박들은 초기에는 공산품을 싣고 남아케리카로 왔다가 원자재를 싣고 돌아왔음. 하지만 에스파냐령 남아메리카 거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생산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자 에스파냐와 물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음. 식민지 거주자들은 품질이 좋은 외국상품을 찾았음.
-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는 생산투자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사회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었음. 일단 벌어들인 돈은 산업에 투자되지 않았음. 성공한 상인들은 아들을 교회나 군대에 집어넣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고 대지주가 되었음. 이들은 막대한 재산을 건물, 보석, 또는 신분 과시용 물품을 사는 데 소비했음. 농업이나 공업 등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하지 않고 이자율이 높은 사채나 국채에 투자를 많이 했음
- 네덜란드와 대조적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지연되고 있었음. 예수회 교육제도는 한때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형식주의에 빠져버렸음. 예수회 교육제도가 처음 탄생했을 때 이를 창안한 사람들은 당시 대학들의 여러제도를 분석해서 혁신적인 교육과정을 만들었음. 그러나 이 교육제도가 채택된 이후로 진보가 멈춤. 교사들과 학생들은 카톨릭 교리에 기초하지 않는 명제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었음. 다른 유럽국가들에서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등의 영향을 받아 지적동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는 예수회가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었음.
- 중국인들이 유럽 선박구조를 모방하지 못한 첫번째 이유는 유럽선박이 건조되는 과정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 두번째 이유는 그러한 선박이 없어도 여전히 강력한 경쟁력이 있었다는 점. 중국인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배를 가지고도 동아시아 무역시장에서 유럽인들을 능가하고 있었음. 이들은 이 지역 무역시장에서 유럽인들을 능가하고 있었음. 이들은 이 지역 무역시장에서 경험이 많았고 이 지역 산물을 취급할 수 있는 지식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음. 또한 자국 무역에 대해서도 강력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음. 유럽 선박들은 광동지방에서만 무역이 허용되었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고 고율의 관세를 부담해야 했음. 중국인들의 또 다른 이점으로는 유럽인들이 치열한 침략행위를 통해서 시장을 개척한 반면, 이들은 아시아 각국과 비교적 평화롭게 무역을 지속했다는 점. 그래서 아시가 각국의 군주들은 유럽 해운업자들에 대해서는 관세를 높이고 장벽을 세우면서도 중국인들에게는 관대했음. 중국 무역상들도 1717년부터 1727년 사이에 시행된 정부의 무역금지령, 바타비아에서 중국인들이 밀집해 살던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사건 등 여러가지 어려움에 봉착. 그러나 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동아시아 무역시장을 계속 지배해 나갔음. 1842년 까지 이들은 자국분만 아니라 일본, 베트남, 샴, 캄보디아 등 아시아 각국에서 주요 해운업자로 활동했음.
6. 네덜란드의 부_모든 배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다
- 영국의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아시아 지역에서 여전히 주요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향료제도를 계속 지배했음. 영국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무역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며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했음. 영국의 주요 상품은 직물이었음. 1660년대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을 유럽으로 수입하기 시작했음. 그때까지 영국 소비자들은 모직물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면직물을 팔려면 소비습관부터 바꿔야 했음. 그러나 면직물은 모직물에 비해 무게가 가벼워 여름에 입기가 편하고 유행에 따라 고치기가 쉬여 오래지 않아 영국인들로부터 사랑받기 시작.
- 17세기 초엽에는 네덜란드 지도제작자들과 출판업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헌과 해도를 제작해서 선장들에게 공급했음. 그러나 네덜란드 출판업자들이 예날에 제작된 것만 반복해서 찍어내는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훨씬 정밀한 지구본, 지도, 해도를 제작하기 시작했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침체에 빠지게 된 원인으로는 회사 이사진이 항해술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점도 지적할 수 있음. 이러한 상황이 해운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 네덜란드 전역에서 사업기술이 침체기에 빠져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1세기 전에 겪었던 것처럼 네덜란드 산업계도 고임금에 시달리며 경쟁력이 떨어졌음. 과거에는 임금수준이 높아 인력절감기술을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지만 이제는 외국의 추격속도가 훨씬 빨라 인력절감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됨. 네덜란드의 경제체제의 특징이 평등과 자유로운 사회이동이고 또 누구에게나 경제적 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과거와 다른 분위기가 사회전체를 뒤덮음. 1680년 이후에는 이자수입만으로 먹고사는 풍조가 퍼짐. 과거에는 기업가 계층이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지만 이제는 투자이익으로 한가롭게 살아가는 귀족층으로 전략.
- 네덜란드 사회가 화석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 영국은 사회와 경제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음. 많은 영국인들이 새로운 산업기술과 무역의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 신분상승에 성공. 윌리엄 코케인, 조사이아 차일드, 찰스 덩컴 등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넓은 토지를 사들이고, 작위를 받고, 딸들을 귀족과 결혼시켰음. 상류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장남이 아니라 상속을 받지 못한 남자들은 무역계로 진출해서 재산을 모음. 그래서 도시와 시골의 결혼, 상인과 지주의 결혼과 같은 관계가 영국경제와 사회체제를 좌우하게 되었음.
- 네덜란드가 겪은 문제는 현대의 기업조직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와 똑같은 것이었음. 첫번째 문제는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혁신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임. 두번째 문제는 노동의 전문화와 분업화로 말미암은 것임. 초창기에는 조선회사들이 모두 소규모여서 관리자들이 생산 및 계약에 관한 주요 사항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음. 그러나 배가 대형화되고 배의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관리업무는 더욱 중요하게 되었지만 선박건조를 주문받은 도급업자와 실제로 선박을 만드는 조선공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짐.
- 네덜란드인은 끊임없이 솟구치는 정열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마음으로 번영의 물결을 주도했음.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기질이 모두 사라졌음. 이 나라는 여전히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재정에 관한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산업의 쇠토로 말미암아 국내시장에서는 더 이상 투자대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 투자자들은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음. 즉 해외로 눈을 돌린 것임. 에스파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공채투자로 몰렸음.
7. 번영을 맞이한 영국_동인도 회사와 증기기관이 영국을 살리다
-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말엽까지 영국경제는 꾸준히 발전을 이어갔음. 1760년에 이르러서는 외국기술을 모방해 산업구조를 개선하는 과정을 끝냈음. 혁신기술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해서 모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영국은 비용절감, 가치부가, 신제품 창조에 필요한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 나감.
- 대영제국이 성장하면서 무역과 해운의 성장도 촉진되었으며 식민지 시장에는 보호장벽이 없었음. 성장 초기에 영국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항해법은 1849년 폐기됨. 식민지 무역시장이 외국의 경쟁업자들에게도 개방됨. 이 법령의 폐기는 해당 법령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경쟁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영국 해운업계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었음. 영국은 경제의 물결을 지배하고 있어서 어떤 도전자든지 편안하게 상대할 수 있었음. 이 나라는 성장 초기에는 보호무역주의로 국내산업을 보호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유무역의 사도가 되었음. '
- 영국은 철도와 증기선, 강철 선체분야에서 축적된 기술 등으로 교역량을 급격하게 늘렸음. 그러나 자본이 없으며 이와 같은 교역량에 걸맞은 대규모 사업기반을 구축할 수 없음. 그래서 런던시가 금융중심지로 부상했음. 산업혁명에서 얻은 부는 런던 자본시상으로 흘러들어가 통상 기반시설을 구축하려는 외국정부에게 차관으로 제공되었음.
- 1855년에는 유한책임에 관한 입법조치로 적은 위험부담으로 자본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 이 조치는 선박 소유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으며, 조합형태의 종전 회사들을 과거의 유물로 전략시켰음. 새로운 법률의 시행으로 배 한척을 보유한 주식회사가 많이 등장. 소규모 집단의 투자자들이 주로 이러한 회사를 공유했음. 자본이 있거나, 거래처가 있거나, 무역에 경험이 있거나, 또는 동인도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기업가는 신기술과 새로운 법적 보호 조치로 성공의 기회를 잡았음. 많은 투자자들이 가족 또는 동업자들과 회사를 설립했음.
- 영국산업시 세계 무역시장에서 성장세를 타면서 영국은 이익을 새로운 기술과 기량의 개발, 경험의 축적에 재투자 하여 외국과의 경쟁에서 앞서갔음. 19세기 중엽,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세계 석탄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선철 생산량의 절반, 강철생산량의 7분의 5, 철강제품의 5분의 2, 면직물 상품의 절반이 영국에서 생산되었음. 석탄으로 움직이는 영국상선 선단의 규모는 1890년에 이르러서는 세계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선단 규모의 합계를 능가했으며, 이 배들이 부지런히 전 세계를 누비며 공산품을 해외로 수출하고 원자재를 국내로 수입했음. 런던에서는 각 금융기관이 자본을 제공하고 그 자본으로 경제체제가 발전하는 선순환이 지속됨. 그 결과 통상 및 생산활동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추진력을 강화하는 경제체제가 구축되면서 세계 정상을 향해 전진했음.
8. 서양의 판도 변화_미국, 독립을 넘어 발전의 역사를 쓰다
-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산업화를 열망하지는 않았음. 산업화는 벤저민 프랭클린, 제퍼슨 대통령, 메디슨 대통령 등 강력한 반대재들의 저항에 부딪혔음. 과학과 혁신의 선구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이 산업화에 반대했다면 이상하게 들릴 것임. 하지만 이것은 미국인들의 가치관의 핵심을 찌르는 문제였음. 독립선언서는 사유권, 신교도 노동윤리, 개인의 권리 등을 강조한 존 로크의 자연권 사상과 철학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었음. 프랭클린은 산업화와 부가 권력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사회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랭클린도 미국은 단순한 농업경제체제를 토대로 발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음.
- 19세기 내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의 물결이 이어졌음. 인구가 서부로 이동하면서 예전에는 활용하지 못했던 자원에도 개발의 손길이 미쳤고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음.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은 송대 중국에서 인구가 남부로 이동하던 시기에 있었던 과정과 매우 비슷했고, 구자라트가 무굴 제국에 편입된 시기의 발전과정과도 유사했음. 인구의 서부이주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수송체계가 생겨 인력과 자원의 이동을 촉진했음. 1820년대와 1830년대에는 운하건설붐이 일어나 초기 무역을 촉진했음. 하지만 핵심적인 운송수단은 여전히 철도였음. 최초로 철도노선은 1828년에 볼티모어 앤드오하이오 철도회사가 부설한 철도였음. 철도는 1850년에 애팔래치아 산맥을 관통한 뒤 10년만에 미시시피 강까지 뻗어나감.
9.동양의 판도 변화_중화사상, 부메랑이 되어 중국을 무너뜨리다
-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경제가 계속 번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음. 1500년부터 1800년까지 경제성장이 지속되었으나 1인당 국민소득은 증가하지 않았음. 즉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 성장의 범위가 넓어졌으나 집약적인 성장은 없었음. 경제성장은 기존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채 인습적인 행동양식, 관계, 생산활동으로 겨우 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발명품은 거의 없었음.
- 중국의 지식층은 실용적인 문제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았음. 이러한 태도는 기술발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침. 중국의 사상과 교육은 경제문제와 같은 세속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음. 철학자들은 속세를 멀리하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머물며 정신세계에만 몰두했음. 이 나라의 최고사상가들이 물리적인 세계의 탐구를 멀리하는 한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란 없었음. 따라서 역학적, 정량적 관점에서 다양한 현상에 접근하는 유럽식 과학이 이 나라에서 발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음. 아와 같은 실용적인 문제, 기술적인 문제를 멀리하는 태도는 사대부들이 핵심생산활동과 거리를 두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 중국사업가들이 혁신에 실패한 원인은 아마도 시장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임. 중국의 시장은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고도로 전문화되었음. 수공업자들은 시장의 움직임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제품생산에만 몰두했고, 상인들은 재화의 생산과정은 거의 생각해 보지도 않고 유통에만 집중했음. 그 결과 생산자와 상인사이의 관격이 점점 커졌고, 중개인들이 이간격을 더 크게 만들기도 했음. 그래서 시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자본가들은 생산기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 동시에 생산자들은 자본과 영업능력이 없어서 생산기술을 크게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음. 그래서 현저한 기술적 도약은 일어나지 않음. 중국시장의 혁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은 중국인의 의식세계였음. 사업가들은 시장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문제의 해법을 시장에서 찾으려고 했음. 물자공급에 차질이 생겨도 상인들은 기술이나 생산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닦아온 시장에서만 해법을 찾으려 했음. 면화에 대한 수요가 많으면 수십만호의 농가가 농업을 팽개치고 면화산업으로 이동했음.
- 청대의 중국 경제는 고도균형이라는 덫에 걸려 있었음. 농업과 운하 운송에 필요한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자원을 거의 완벽한 수순으로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생성된 세력으로는 변화를 줄 수 없는 경제구조였음. 운송체계 및 통상체계의 효율성이 이미 한계에 이르러 기존방식으로는 거래비용을 더이상 줄일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 중국에서는 인구 증가와 맞물려 실제로 국민 1인당 생산량이 이미 감소하고 있었음. 시장에 내다팔 농산물이 줄어들자 농부들이 구매력이 떨어져 기술혁신에 대한 대가를 시장에서 받아 낼 기회조차 점차 줄어들었음. 자원도 점차 고갈되어 자본재 생산비용은 증가했지만 인구증가로 말미암아 임금수준은 계속 낮아졌음. 이런 상황에선느 유럽처럼 인력을 절감할 수 있는 기계나 개선방법을 찾아내고 생산공정을 혁신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음.
- 중국 해상운송업자들은 그들이 취급하던 화물운성에서의 우위마저 놓쳐 경쟁력을 잃고 말았음. 중국은 결국 기술력의 침체상태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면서 19세기에는 생산부문에서도 선두를 빼앗겼음. 1800년에는 중국이 전세계 공산품의 33퍼센트를 생산했으나, 1860년에는 중국 공산품의 점유율이 19.7퍼센트로 떨어지고 1900년에는 6.2퍼센트로 떨어졌음. 같은 기간에 유럽 공산품의 점유율은 28.1퍼센트에서 62퍼센트로 증가했음.
10. 해뜨는 나라_앞선 선택이 선진 일본을 만들다
- 19세기 일본은 경직된 사회였으나 중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음. 일본인들은 기술을 도입하면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 그러나 중국인들은 외국의 사상과 기술이 언제나 열등하다고 생각했음. 그러므로 외국을 모방하는 두 나라의 태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음.
- 무사들은 자제력과 교육, 그리고 공직에 대한 신념 등 신체제에서도 이용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 변화와 불확실의 시대에는 확고한 자신감, 강한 힘, 그리고 낙관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유리함. 이러한 시대에는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듯 주판을 휘두르며 재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강한 의지력을 지닌 사람에게 기회가 많이 찾아오는 법. 교육받은 하급무사들은 노력과 능력을 보상받을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한편 부모들도 자녀교육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음. 하지만 개인적 성공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에 달려 있었음. 학교를 졸업하면 빨리 출세할 수 있지만 여전히 집단에 대한 복종심과 화합하는 자세를 보여줄 수 있어야 했음. 비록 시대를 반영해 상거래 규칙까지도 바뀌었지만 전통적 규칙에 대한 복종과 혈통은 여전히 중요했음.
11. 기업 시대_규모의 무역, 태평양 연안 국가를 일으키다
- 새로운 성장경로가 나타나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임. 록펠러는 경쟁이 치열해지면 가격이 하락하고 수익이 감소하리라는 점을 이내 간파하고 대응전략을 세움. 전략은 기술개발이나 조직개선이 아니었음. 경쟁자를 제거하는 전략이었음. 이 전략은 구자라트의 비르지 보라부터 동인도 회사에 이르기까지 고대로부터 반복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전략임.
- 187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영국에서는 국내총생산이 두배 증가하는데 그쳤으나 미국에서는 다섯배가 증가. 미국은 아주 짧은 기간동안 농업 및 상업중심경제에서 공업대국으로 변모했음. 이러한 발전과정이 평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음. 미국은 선도국가로 향하는 길목에서 1857년과 1873년, 1893년의 공황 등 경제적 재앙을 연속적으로 겪었음. 하지만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규모의 경제, 표준화, 자연자원의 집약적 이용을 통한 대량생산 및 대량분배를 기반으로 해서 경제거인들의 나라로 부상. 미국은 유럽에서 혁신기술을 도입해 자국만의 독특한 제도로 자리잡게 해서 과거 어느시기 어느나라보다도 생산량을 늘렸음. 이제 대기업과 마천루, 전화, 그리고 자동차의 세계가 도래함.
12. 석탄과 석유, 그리고 변화의 가속화_기술의 시대가 도래하다
- 영국의 명문가들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어 귀족적인 명예심과 대중을 이끄는 리더십을 가르쳤음. 학생들은 고도의 도덕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군인, 관료, 정치가 등 상류사회로 진출할 준비를 했음. 불행하게도 영국은 광대한 대영제국에 봉사할 우수한 행정가는 많이 배출했으나 귀족층을 사업가로 육성하는데는 소홀했음.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데 개인이나 국가의 재산을 늘리는데만 몰두하는 것이 야비한 짓이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름.
- 명예와 공익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은 일본인의 가치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일본인은 이런 가치관을 자산으로 바꿈. 일본은 상공업을 명예로운 직업으로 인식시키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음. 반면 영국에서는 교육과정에 과학이 거의 포함되지 않았음. 산업은 신사에게 걸맞은 분야가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사회전반적으로 과학과 돈벌이를 위한 노동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음.
- 사업가들은 성공을 거두면 땅을 사고 시골에 묻혀 살았음. 지방에서 지주행세를 하며 신사라는 올가미에 걸린 채 살아갔음. 이러한 과정은 중국에서 성공한 상인들이 땅을 사고 자녀들을 유학자로 교육시키기 위해서 많은 돈을 투자한 것과 매우 비슷함. 18세기에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음.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사람들은 지위와 같이 비물질적인 목표를 추구함. 그래서 영국에서도 우수한 사람들이 상공업을 멀리하게 된 것임.
- 영국의 변화를 가로막은 주요 장벽중의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고도의 효율성이었음. 영국은 고도로 숙련된 근로자들로 구성된 인력시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섬유업계도 마찬가지였음.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섬유 제조업자들은 값싼 노동력이 부족해서 숙련도가 낮은 근로자들도 작동할 수 있게 만든 고리형 방추기를 사용했음. 이 새로운 기계는 새로 경쟁대열에 들어서는 후발 경쟁주자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음. 영국은 숙련 기술자 부족이라는 문제가 없어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더라도 후발 주자들만큼 효과를 얻기는 힘들었음. 그래서 그 기술을 채택하지 않았던 것.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임. 영국 섬유업계가 2세기 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인도의 직물생산을 앞질렀음. 당시 인도에는 임금이 싼 숙련 직조공들이 많았음. 그래서 영국처럼 직물 생산을 기계화하지 않았음. 이는 한 나라가 함정에 빠지게 된 요인이 역사속에 계속 되풀이 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일깨워줌. 영국시장의 성격도 미국에서 개발된 생산기술을 도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음. 미국은 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자체 시장이 있어서 대량생산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음. 그러나 영국 시장은 규모가 훨씬 작아서 미국과 같은 규모의 경제를 기대할 수는 없었음.
- 영국의 경우에는 산업구조도 외국의 산업 기술을 도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음. 영국산업계는 가문 중심의 군소업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임. 미국에서는 생산, 관리, 유통에 필요한 대규모 체계를 구축해서 산업 주도권을 잡았지만, 영국의 군소업체들은 그런 체계를 만드는 데 투자할 자본이 없었음. 영국의 각기업은 자본이 적고 가문이 회사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어 새로운 제품이나 새로운 공정에 투자하는 것을 꺼렸음.
- 영국은 세계 무역시장이 확대되는 시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몰락했음. 영국 해운업계가 담당한 화물의 물동량이 증가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영국은 다른 나라들이 더 빠른 경로를 개발해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음. 영국은 석탄, 철강, 증기기관 기술 및 친족회사들이 개발한 기량, 능력, 사업방식을 계속 답습하며 20세기를 맞았음. 그때까지 거둔 성공때문에 영국기술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언 것임. 당시에는 그것이 사실이었음. 하지만 더 우수한 기술이 출현하자 영국의 산업은 고정관념과 관행에 사로잡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졌음. 영국에서 지속적으로 개발된 혁신기술을 보면 영국이 결코 정체된 것은 아니었음.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더 빠른 속도로 혁신기술을 개발해서 보급했다는 점임.
- 영국은 더 이상 세계의 학습장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절정기에 이룩했던 한가지가 훗날에 이 나라에 다시 도움이 된다. 바로 영어를 전세계에 보급했다는 점임. 영국은 훗날 미국이 먼저 개발한 정보처리 기술을 이용해 이러한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게 됨. 그래서 서비스 부문에서 다시 선진국의 위상을 되찾아, 21세기 초에 영국이 다시 세계 5대 경제대국의 대열에 서게 됨.
13. 태평양 쓰나미_세계대전,태평양 경제에 변화를 부르다
- 외국 생산기술이 유입되면서 일본의 경제체제와 사회는 완전히 바뀌었음. 일본은 주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해서 기술을 도입했음. 즉, 외국 제품을 완전히 분해해서 제작과정을 분석했던 것임. 이렇게 함으로써 공정설계와 제품 디자인을 일괄적으로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음. 이는 제품 디자인과 공정은 서로 분리된 별도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의 사고방식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음. 서양에서는 분리된 여러단계를 거쳐서 제품을 개발하지만 일본의 개발방식은 개발당시의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를 한데 섞는 것임.
- 일본이 능률적이고 유연한 생산체제를 개발하는 동안 미국은 전통적 방식에 만족하고 있었음. 미국이 혁신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음. 다만 제품 혁신에 관심이 있었을 뿐 생산 공정의 혁신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 미국은 신제품 개발에 연구 개발비 중 3분의 2를 투입한 반면, 일본은 제품생산 공정에 연구개발비를 집중적으로 투자했음. 일본은 생산공정 및 시설혁신에 역점을 둠으로써 생산비를 대폭 줄이고 경쟁력을 강화했음. 이와 같은 다른 접근 방식은 교육에도 그대로 반영됨. 미국의 경영대학원에는 생산에 관련된 교육과정이 거의 없었음. 1980년대말, 미국의 학사 학위 소지자 중 공학 학위 소지자는 6퍼센트에 불과했으나, 일본은 20퍼센트, 독일은 37퍼센트의 학사학위 소지자가 공학을 전공. 앞서 영국이 그러했듯이 미국도 이제 일본에 뒤지기 시작했음. 미국의 관리자들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관리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세계적 기술개발 추세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음.
- 미국경제의 큰 특징은 협력의 결핍이었음. 매사추세트 공과대학의 실시한 미국산업쇠퇴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회사간의 협력이나 회사 내부의 협력은 물론이고 근로자들과 경영진간의 협력관계도 거의 발견할 수 없었음. 개인기업과 경쟁은 시장경제의 기초이므로 이를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협력과 총체적인 목표 추구도 필수적인 요소임. 이 양극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함. 환경이 변화하면 때로는 균형의 개념도 바뀌어야 함.
- 수직적인 통제와 개개인이 고도로 전문화된 조직형태는 회사내부의 협력에 도움이 되지 못했음. 수직적인 조직으로 말미암아 의사소통과 조직 내부의 조정이 어렵고, 근로자들은 각자 전문화된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즉시 처리해야 할 업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음. 또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음. 혁신책을 도입해도 그 혁신책은 외딴 섬처럼 조직내에서 고립되고 개발 초기단계에 도입되지도 않았음. 이와 같은 현상은 18세기 인도와 19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현상과 매우 흡사함. 당시에도 근로자들이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어 폭 넓은 안목으로 봐야 할 혁신책이 도입되지 못했음.
14. 급속도로 변하는 세계_다시 아시아가 일어서다
- 1990년대가 되자 일본의 성장세가 멈추었음.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음. 첫째는 경제의 바탕이 되는 사회구조였음. 수직적인 관계와 경직된 결속력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요소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음. 사회구조가 경제발전에 영향을 미친 역사가 여기서도 되풀이 되었음. 두번째 원인도 매우 낯익은 것이었음. 어느 나라든지 성장의 물결에는 투기의 거품이 일어나기 마련임. 90년대 초에는 일본이 투기열풍에 휩싸임. 투자자들이 투기대상으로 삼은 것은 주식이나 튤립이 아니라 토지였음.
- 중국의 성장도 이 책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추진되었음. 모방을 통해서 세계 각지로 수출할만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음. 1978년부터 1999년까지 중국 경제는 연간 평균 9.5퍼센트씩 성장했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성장은 중국에 생산기지를 세운 서방국가들에 의해서 추진되었음. 21세기초 중국은 외국의 직접투자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유치했으며, 외국자본으로 기술격차 해소에 박차를 가했음.
- 90년대는 정보산업과 생명공학기술로 인해 미국고 영국의 경제가 건전한 성장을 이룬 시기였음. IT혁명은 여러분야에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시장이 더욱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정보접근성을 향상했음. 또한 공급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고 고객과 공급자 사이의 의사소통도 향상했음. IT혁명은 인터넷이 탄생토록 했고, 예전에 갤브레이스가 소멸하고 있다고 우려했던 기업가들이 되살아나게끔 했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앞서 설명했던 미국 경제의 쇠퇴가 일시적인 조정일 뿐이라고 주장함. 또 고임금 때문에 경쟁력을 상실한 산업들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므로, 오히려 자유시장의 효율성ㅇ르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함.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많은 허점이 있음. 첫째, 이 주장은 이 기간 동안 일본에서도 인건비가 상당히 올랐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있음.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많은 산업부문에서 자국의 위치를 발전 유지하고 있음. 이 주장은 가장 중요한 문제도 무시하고 있음. 즉, 일본이 지속적인 개선과정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척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이러한 산업부문이 계속 침체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주목할만한 차이점은 미국 시장이 호황기로 접어든 시기가 많은 기업이 붕괴된 후인 90년대라는 점임. 시장변화에 따라 자원이 사양산업에서 신흥산업으로 넘어간 상황이 아니었음. 미국산업은 우수한 경쟁국가들에 밀려 몰락했고, 그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던 것임.
- 경제학자들은 지금까지 경제계를 비교적 정적인 관점에서 보았음. 이들이 본 경제계는 공급과 수요의 세계, 그리고 유연한 시장이 전부였음. 시장의 역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 이들의 눈에는 기업가들은 그저 시장 여건에 따라 변화에 대응하는 사람들로만 보였음. 하지만 경제의 참모습을 보려면 역사가 중요함. 시장에는 상업의 기능을 결정하는 시간의 경제가 있음. 이 경제개념에는 시장에 진입해야 하는 타이밍과 선두주자로 나설 때 얻는 이점, 그리고 개척자 또는 후발주자가 되었을 때 감수해야 할 비용의 차이도 포함됨.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미래 생산활동에 대한 역사적 투자의 유산임. 통상분야에서 성장능력을 역사적 유산으로 물려받은 국가는 훨씬 유리함. 그러나 그 유산은 한 국가를 몰락의 길로 몰고 갈 수도 있음
- 서양은 지금 시간의 경제측면에서 볼때 위기에 처해 있음. 경제에는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있음. 세계화와 변화관리에 관한 지식도 여기에 포함됨. 하지만 안심하려면 멀었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논리적 사고력의 한계와 사고방식을 향상할 수 있는 문화적 투자임.
- 유연성이 뛰어난 경제체제에도 미래를 위한 선택을 제한하는 요소가 있음. 투자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투자한 것이 내일 우리가 차여하고 있는 활동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뜻임. 투자는 기계와 자본만 일컫는 말이 아님. 투자는 역량, 관계, 사고방식도 가리키는 말임. 이와 같이 경제성장의 진로는 구성원들이 과거에 개발한 지식과 역량을 토대로 함. 이러한 요소들은 기업가의 운영방식에도 영향을 미침. 과감한 기업가나 어리석은 기업가가 아니라면 아무런 지식이나 역량이 없는 산업이나 시장에 투자하지 않을 것임.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에 의해 좌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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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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