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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전쟁

역사 2014. 10. 3. 11:53

 


원시전쟁

저자
로렌스 H. 킬리 지음
출판사
수막새 | 2014-04-2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원시전쟁』은 미국 일리노이 주립 시카고 대학(Univers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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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평화로웠던 것으로 만들려는 경향은 현재 인류학계에 만연되어 있으며, 이는 인류진보의 신화와 인류의 황금기라는 개념간의 대립이 계속되고 의미함과 동시에, 원시사회와 선사시대의 성격에 관한 홉스적/루소적 관점간의 갈등임. 이에 민족학적 유추라는 고전적인 고고학 기법에 의존하는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의 전쟁을 무시하는 추세가 늘어가고 있음. 그들은 발굴 후 원자료를 정리하고 요약하는 과정에서 원시시대의 폭력에 관한 증거를 누락시키는 방법으로 원시전쟁을 없애버리고 있음. 최근 일부 사회인류학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평화론자로 돌변해 민족학지에 등장하는 모든 원시전쟁의 모습을 부정하며, 이를 평화로웠던 선사시대에 대한 문명 간섭의 산물로 간주하고 있음.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인류학이 전쟁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음. 그러나 원시전쟁과 원시평화 주창자들 모두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임. 원시전쟁의 치열함, 위험도, 그리고 효율성을 알기 위해서는 원시전쟁의 직접적 결과물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 예를 들어 사상자, 전쟁으로 인한 손실, 영토 또는 다른 중요한 사물의 점유와 상실 등이 이에 해당. 만약 원시사회가 문명사회와 접촉하기 전에 진정으로 평화로웠다면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님. 위의 주장들 또는 이들에 대한 반론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은 최근 부족전투와 원시전쟁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고,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민족학적, 고고학적 자료의 면밀한 고찰을 요함. 그리고 원시전쟁에 대한 담론은 문명사회의 전쟁과 비교를 묵시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를 하더라도 동등한 조건하에서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중요. 이렇게 해야만 모든 형태의 전쟁에 대해 현실적 관점이 형성될 수 있으며, 비로소 인류학이 전쟁이라는 병폐를 이해하고 종국에는 없애는데 기여할 수 있음.
- 북미 인디언 부족과 씨족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관찰대상인 157개 집단 중 불과 135만이 적에 대한 습격이 드물거나 습격을 당하는 경우가 드문 것으로 파악됨. 여기서 드물다는 것은 1년에 1회 이상을 말함. 여기에 포함된 소위 평화로운 21개 부족 중에도 14개 부족은 몇년에 한번씩 기습을 하거나 기습을 막아내는 싸움을 벌인 것으로 추측됨. 따라서 어떤 형태로건 전쟁이나 습격행위를 하지 않는 진정으로 평화로운 부족은 불과 7개(약 4.5%)에 불과. 그나마도 북미 서부 콜롬비아 평원이나 대분지 지역에서 가장 고립된 곳에 사는 소규모 떠돌이 집단이었음. 평화로운 집단은 인구밀도가 극히 낮거나 거리가 멀거나 완전히 황무지인 지역에 살고 있어서 다른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음을 알수 있음. 하지만 지역적으로 고립되고,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거주하며, 수렵/채집을 영위하는 집단이라도 반드시 평화적이지는 않음. 예를 들어 채집을 위주로 살아가는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애보리진 부족들이나 심지어 사막에 사는 부족들도 상습적으로 습격을 감행했음. 결국 소규모 수렵, 채집 집단의 평화성은 진정한 평화라기 보다는 해당 집단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일반적인 의미의 전쟁개념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일 뿐. 독립된 하나의 사회, 정치집단이 하나의 핵가족이나 몇개의 대가족이 연결된 형태(4~25명)로 구성되고, 성비 면에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더라도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전사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됨. 이런 소규모 집단의 남성들이 다른 씨족이나 가족집단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심지어 이들이 넓은 들판에서 다른 집단의 남성들과 공개적으로 전투를 벌이더라도 이는 대결, 복수, 살인행위 등으로 일컬어지며 전쟁으로 불리는 일은 없음. 이런 이유 때문에 민족학자들은 대다수의 소규모 집단들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인행위의 빈도가 높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족은 매우 평화로운 집단으로 여겨져 왔음.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어떤 민족지에서는 그들을 유순한 사람들로 소개. 그러나 1920~55년 동안 이 부족에 나타난 살인발생률은 1950~60년의 미국과 비교하면 4배나 높았으며, 같은 시기 주요 선진국가들의 20~80배에 달했음.
- 비교문화학적 연구에서 평화로운 집단으로 나타난 이누이트 역시 캐나다 기마경찰의 금지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는 대결빈도와 살인발생률이 높았음. 20세기 초에 처음 외부와 접촉한 어느 이누이트 마을에서는 마을을 구성하는 15개 가족의 남성 모두가 살인행위에 가담한 적이 있었음. 소규모 마을 단위로 조직된 북극권의 여타 이누이트 마을도 이런 경향에 부합. 다른 자료에 의하면 네트실릭 이누이트 부족의 살인 발생률은 캐나다 경찰이 집단간의 대결은 금지시킨 후에도 미국의 4배였으며, 현대 유럽국가의 15~40배에 달했음. 신대륙 반대쪽인 남쪽 극단 티에라 델 푸에고 섬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야간족은 혈연적인 가족 외에는 정치조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지만 19세기 말 미국에 비해 살인발생률이 무려 10배나 높았음. 그러니 사회통합의 가장 초기적인 단계에서도 사회집단간의 무장투쟁이 없었다고 볼 수 없음. 다만 용어가 전쟁이 아닌 대결이나 살인으로 바뀔 뿐임
- 평화주의적 사회집단은 드물기는 하지만 모든 사회적, 경제적 발전단계에서 발견됨. 완전히 평화로운 농경사회는 평화로운 수렵, 채집집단보다 발생빈도가 더욱 낮음. 조사에서 보이는 평화로운 농경사회는 거의 모두가 전쟁난민이거나 국가사회의 통치하에 오랫동안 살았던 소수민족, 또는 식민모국이나 국민국가의 경찰력이나 군사력에 의해 진압된 부족으로 분류됨. 인구밀도가 낮은 떠돌이 수렵, 채집집단은 소유물이 거의 없고, 있다해도 쉽게 옮길 수 있으며, 광활한 지역에 살고, 영구적인 자원이나 시설물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분쟁이나 습격을 피해 이주할 수 있었음. 그들은 이주하면 심리적 안정을 잃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잃는 것도 없었음. 그러나 사는 지역이 상대적으로 협소하고, 소유물의 수가 많고, 많은 노동력을 이용하여 만든 주택과 축적된 식량, 그리고 토지 등 부동재산이 많은 수렵, 채집민이나 농경민들은 분쟁을 피해 이주하는 경우 모든 것을 잃고 굶주림의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농경민과 수렵, 채집집단은 힘에는 힘으로 맞서거나, 재침을 막기 위해 복수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음. 특히 특정 지역에만 있는 필수적 자원, 예를 들어 사막의 샘물이나 비옥한 땅, 초지, 어류자원이 많은 어장 등에 의존하는 집단은 이를 지켜내야만 했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 지독한 궁핍에 시달렸음. 넓은 초원에 사는 유목집단들도 그들이 어디에 있건 간에 그들의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음. 농경민이건 유목민이건 그리고 비교적 정주생활을 하는 채집집단이건 간에 완전히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그렇지만 완전히 평화로운 농경집단이 나타나는 일도 간혹 있었음.
- 대부분의 원시전자들은 매우 적극적인 탄도물을 사용했지만(군사용어로 화력제공, 대개는 무기의 최대사정거리에서) 이런 화력을 전진이나 단계적 후퇴 등 일정한 기동과 연결시키지는 못했음. 사실 전사들을 적 무기의 살상반경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기동은 극단적인 위험에 대한 거부반응을 극복하는 훈련과 강제된 기강이 요구됨. 문명세계의 지휘관들은 부대뒤편에서 도주하거나 전진하지 않는 아군 병사를 처형하는 독전대를 배치. 원시전투에서는 다니족처럼 소규모 전투를 하면서 전사들이 앞뒤로 진퇴를 거듭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전투하는 전사들 사이의 공간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됨. 씨족과 부족단계의 사회에서는 개인이나 최고전사들 간의 격투가 아닌 집단적인 근접전투가 벌어지는 일이 드물었으며, 이는 군장사회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었음. 원시전투의 대부분은 어느 한편이 포기하고 도주하지 않는 한 장거리 탄도물을 날려보내는 형태로 이루어졌음. 만약 어느 한편이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면 몽둥이와 도끼, 창 등을 동원하여 적을 잡아 처단함. 일부 학자들은 국가이전 사회의 전술이 기습에 과도하게 치중되어 있는 것은 빈약한 경계활동 때문이라고 주장. 일반적으로 경계활동은 동틀 무렵 주변에 대한 빈틈없는 감시가 요구되며, 임무 태만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면서 동시게 기강이 잡힌 보초들이 필요. 기강이 잡힌 문명군대에서도 경계임무 중에 자는 일은 흔히 나타나며, 이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이 내려졌음. 원시부족 전투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위협이 소규모 집단의 기습이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경계하는 데는 상당한 애로가 따랐음. 전사건 군인이건 간에 어둠속에서 움직이는 소수의 전사들을 미리 감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움. 뉴기니의 다니족은 마을 주변에 파수대를 세우고 소수의 전사들을 상시 배치. 하지만 이런 경계체제로도 소수의 적에 의한 기습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음. 원시부족이 기습을 예방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기습한 적들이 무사히 도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 사실 많은 학자들이 원시부족 전사들의 정찰과 정보수집능력을 높게 평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습이 수월했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경계기능의 부족은 원시전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으며, 기습은 당연히 효과적인 방법이었음.
- 원시시대의 발사무기는 현대의 소형화기에 버금가는 살상력을 갖고 있었으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총기류보다 월등히 효과적이었음. 최근 고대와 근현대전투의 사상률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고대전투에 참가한 병력의 70%정도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데 비해, 가장 치열했다는 근현대전투에서는 사상률이 전체 병력의 60%를 넘지 않았음. 검을 제외한 고대문명 사회의 전투무기는 원시시대의 무기(투석기, 창, 화살)와 같았기 때문에 살상력은 거의 동등했다고 볼 수 있음. 물론 이를 근거로 머스킷 소총이 활이나 투석기에 비해 이점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점은 상당히 제한적임. 머스킷 소총의 가장 큰 이점은 바로 일제사격이 정착된 후 사용이 덜 복잡해지고, 훈련에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으며, 작은 힘으로도 쏠 수 있다는 것. 아울러 발사되는 탄환의 타격력은 월등했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었음. 그러나 머스킷 소총의 유효사거리(80~100야드)는 활보다 우수하다고 볼 수 없으며, 활에 비해 발사속도도 느렸고, 매우 부정확했음. 사실 19세기 중반 강선소총이 등장하기 전까지 보병들에게 내려지는 명령은 '조준'이 아니라 '똑바로 들어'였음. 조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일이었기 때문. 18세기 후반 남미 에스파냐 식민지 총독은 인디오들에게 머스킷 소총과 충분한 탄약을 제공할 것을 제안. 그 이유는 인디오들이 활을 다루는 기술을 잊게 하기 위해서였음. 총독의 인식으로도 당시 소총보다는 활이 효과적 무기였던 것. 개인용 화약무기가 활보다 월등한 성능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머스킷에 비해 정확도, 사거리, 그리고 연사속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된 후장소총이 등장한 이후. 적어도 19세기 후반까지 문명국은 원시부족에 비해 발사무기의 성능이 약간을 뒤져 있었음.
- 독자들은 전투라는 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사전 합의에 의해 벌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함. 전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싸움 당사자들의 합의, 즉 서로 동의해야 한다. 전쟁사가인 존 키컨은 '만약 전투를 벌여야 한다면 두개의 대립적인 세력에 의한 상호적이고 지속적인 전투의지의 발현이 필수적이며, 만약 한편이 싸우기를 거부하는 경우 다른 한편은 전투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받을 수 있다'라고 했음. 언제 어디서 전투를 치르거나 상대의 전투요구를 수용하느냐는 전쟁지도부가 내리는 결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근대전쟁이 원시전쟁보다 의식화의 정도가 심함. 그중 하나가 항복에 관련된 것인데 병사 개인이나 부대차원의 항복 모두 포함됨. 개인의 항복의식은 백기를 들거나, 무기를 넘겨주거나 버리는 것, 특정 단어를 외치는 것 등이 있음. 부대차원에서는 백기를 든 항복사절의 접은, 항복조건에 관한 협상, 미리 정해진 시간에 휴전, 그리고 대부대의 경우 공식 서류에 서명하는 것 등 개인의 경우보다 세심한 사전 연출이 필요. 이리하여 적들을 죽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던 개인과 집단들은 어느 순간 적합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적들이 가할 수 있는 직접적 위해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었음. 포로교환과 적대행위 중지에 관한 약속을 받고 풀어주는 사면의식은 전장에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일반적 현상이었음. 아울러 함선과 비행기에서 이탈한 상대편 수병과 조종사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구해주는 관습도 있었음. 최근까지도 항복을 하기 전에 전투의식을 치르는 관습이 남아 있었음. 2차대전 중에 연합국이나 추축국 지휘관들은 아군이 명예롭게 항복할 수 있도록 아군의 위치에 잠시 사격해줄 것을 요청했음. 심지어 세르부르 요새의 독일군 지휘관은 포위하고 있는 미군에게 성문을 포격해달라고 했음. 항복할 수 있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음. 원시전쟁에서는 위와 같은 항복과 관련된 관습이 드물다
- 원시전쟁에서는 소규모 기습과 매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문명전쟁에서는 잘 구사되지 않는 전투유형임. 이는 공격부족의 남자 몇명이 상대의 영역에 숨어들어가 적어도 한명 이상을 죽이거나 매복하여 죽이는 형식으로 전대됨. 이런 기습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살해당하는 것은 일반적이었음. 카토족과 유키족간의 전투는 두 부족간의 분쟁거리였던 흑요석 채석장에서 카토족 처녀들이 흑요석과 식물을 채취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유키족 부족원이 카토족 처녀 4명을 살해한 것이 발단. 원시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습방법은 동이 트기 직전에 적이 사는 집을 포위하여 얇은 벽에 창을 찔러 넣거나 문이 나 연기 구멍으로 화살쏘기,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쏘아 죽이는 것.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칠코틴 부족은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 고립된 타 부족이 작은 마을이나 가족들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사람을 모두 죽이고 그들이 저장한 식량으로 겨울을 났음. 캐나다 퀘백의 동 크리 부족은 이누이트들을 보는 족족 살해하고 아기들만 포로로 삼음. 원시부족의 기습앞에 연령과 성별은 목숨을 보장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
- 대개의 경우 문명국 군대는 원시부족의 전술을 채용한 후에야 비로소 원시전사들에게 패배를 안길 수 있었음. 유럽국가들이 식민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원시부족 전사들을 이기려면 문명세계의 전술과 무기를 여러차례 버려야 했음. 아울러 기동성 있는 소규모 부대편성(야포대신 소화기 사용 비중 높이기), 열린대형과 소규모 유격전투(매복, 급습, 기습빈도 높이기), 적의 경제기반(가옥, 식량, 가축, 이동수단) 파괴, 인적자원 소모전략(문명세계의 월등한 보급능력을 이용한 지속적인 추격), 그리고 원주민을 정찰병이나 보조병력으로 채용하는 방법을 도입. 다시 말하면 문명세계의 전투방법으로는 원시전사들을 꺾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문명세계의 군대능력으로는 원시전사들과 싸우는 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 따라서 원시전사들을 격파하려면 다른 원시전사들과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음.
- 세계에는 남미보다 군사기술이 원시적이고 향료, 황금, 상아 등 유럽인들의 탐욕을 일으킬만한 자원들이 풍부하며, 호주보다 가깝고, 기후도 온화한 부족사회 지역이 많았음. 19세기 말까지 유업인들에게 정복되지 않은 부족지역이 상당히 많았음. 이런 미정복 지역과 400년간 유럽인들에 의해 신속히 장악되었던 지역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의 질명에 면역력이 있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몇몇 지역에서는 유럽인들에게 치명적 풍토병을 안겨주었음.
- 남미 가이아나의 마룬인(신대륙에 노예로 끌려왔다가 탈출하여 정글에 정착한 흑인집단)처럼 유럽인들의 병에 면역이 있는 신대륙 집단들은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침입자들에게 맞서 승리할 수 있었음. 다시 말하면 유럽인들이 생물학적 우위를 상실할 경우 그들이 보유한 군사적 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 현대의학과 위생, 증기선, 연발소총, 그리고 기관총 등이 등장한 후에야 유럽인들은 적대적 부족들에 대한 체력, 보급 그리고 화력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음. 이를 볼 때 유럽인들의 우월한 전술과 기강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는 주장은 가소롭기까지 하다. 다만 그 주장을 뒤집는 사례들이 너무나도 비극적이어서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명세계의 무기들이 가진 잠재적인 위력을 깨닫는데 이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문명세계 군인들보다 오히려 빠른 경우가 많았음. 지금의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던 인디언 부족들은 초기의 유럽계 개척민들과는 달리 화승총(불붙은 노끈으로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소총)보다 수석총(방아틀뭉치에 부싯돌을 달아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을 장착한 기계장치가 마찰을 일으켜 화약을 점화해 발사되는 총)을 선호했고, 전투에서 수석총의 명중률과 살사력을 높일 수 있는 장전법과 사용방법을 터득했음
- 게릴라들이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보급체계가 없거나 현대적 경제체제에 의해 보급니 끊어졌기 때문. 원시전쟁이 지닌 단 하나의 결정적 약점임과 동시에 문명세계 전쟁방식이 가진 결정적 강점임. 아마추어 군인들은 작전을 논하고, 전문군인들은 보급을 논한다는 격언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줌. 게릴라들이 정규군에게 승리했다고 해서 문명국 군대의 정교한 전술이나 복잡한 조직, 그리고 엄격한 기강이 의미없는 의식이나 비합리적 관습이라는 것은 아님. 문명세계의 전쟁방식은 전투에서 이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비해 원시부족과 게릴라들은 전투 이외의 모든 것(전쟁 자체)에 집중함. 대부분의 경우 원시전쟁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장기간, 심지어 몇세대에 걸쳐 전쟁을 치름. 이에 비해 문명세계의 전쟁은 이루기가 상당히 어려운 결정타를 적에게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문명세계의 전쟁방식은 비슷한 병력과 대규모 대형을 형성하고, 크고 복잡한 무기를 사용하는 문명화된 상대끼리 전투를 벌일 때보다 효과적임. 이는 18세기와 19세기 유럽군대나 유럽인들이 지휘하는 군대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군대와 싸워 승리한 사실로 증명되었음. 2차대전 당시 우월한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독일군과 자살까지 감수하는 무모한 용맹함을 지닌 일본군의 연합국이 인력자원과 압도적 공업생산능력의 위력에 여지없이 분쇄되었음.
- 문명세게의 기강있는 밀집대형과 난해한 군사기술이 원시부족의 느슨한 방식보다 낫다는 개념은 성립하기도 어렵거니와 차라리 환상에 가까움.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고찰에 의하면 단기전이나 전술적 차원에서 병력의 우위와 방어시설이, 그리고 장기전과 전략적 차원에서는 보다 많은 인구와 우수한 보급체계가 승리의 핵심요소가 됨. 문명국가들이 원시부족이나 게릴라들을 무찌르기 위해 무기와 병력, 보급의 우위와는 상관없이 원시전술을 수용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함. 이는 전술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원시전쟁의 전술이 우위에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명국가의 군대는 호되고 망신스런 패배를 수차례 당한 후에야 비로소 이런 사실을 인정.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 20년 동안 치열하게 싸우고도 동남아의 게릴라들을 꺾을 수 없었음. 그러나 양국은 걸프전에서 인도차이나에 동원한 전력의 몇분의 일만 투입하고도 세계에서 가장 병력이 많고 무장이 잘된 정규군 중 하나를 궤멸시킴. 걸프전의 이라크군과 달리 아파치족은 문명군대의 압력 앞에 무려 300년을 버텼으며, 결국 원시전쟁의 방법을 차용한 미군(미군복을 입힌 다른 아파치 전사라고 해도 무방0에게 패함. 이런 것을 볼 때 과연 전술로 타격하고, 기강으로 지배하여 승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19세기의 일반적 치료행위는 환자를 쇼크상태로 몰아넣거나 상처의 감염 가능성을 오히려 높였음. 그렇지 않아도 이질 때문에 고생하던 병사들에게 미미한 증세에도 강력한 설사약을 일괄 처방하는 등의 관습적 치료가 도움이 되었을 리 없음.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19세기 군의학은 효과가 없는 정도를 넘어 오히려 환자를 큰 위험에 빠뜨렸음. 이와 비교하여 원시부족 치료사들은 화살촉이나 창촉을 뽑은 다음 상처부위를 씻고, 치료효과가 있는 식물들로 만든 연고를 발랐음. 최근 2천종의 식물 추출물에 대한 약학 연구결과 61%에 일정 정도의 항생효과가 있음이 밝혀졌고, 이러한 원시부족의 고약이 적어도 20세기 이전의 치료행위보다 낫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줌. 북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또 다른 치료행위는 상처에서 피를 빨아내는 것. 독화살이 사용된 경우 취하는 조치였지만 어찌되었던 상처를 세척하는 효과가 있었음. 외과차원에서 19세기 서양 군의관들이 원시치료사들에 비해 나았던 유일한 점은 동맥이나 정맥에서 발생하는 대량 출혈을 막을 수 있었다는 점. 선사시대 상당수의 부족과 근래의 군장사회에서는 두개골 골절을 치료하기 위해 두개골 조각을 제거하는 천공술을 행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서양 외과의사들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천공술을 능숙하게 할 수 있었음. 고고학자들이 천공술 시술 후 아문 흉터가 여러개 있는 두개골들을 발견하면서 선사시대 천공술의 성공률이 의외로 높았음이 밝혀짐
- 원시사회의 영역변동을 비율로 살펴보면 식민지를 팽창하던 시기의 유럽이나 19세기의 미국, 또는 로마제국과 비슷함.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국가 이전의 부족전쟁은 영역을 변화시키고, 패자에게 빼앗은 땅을 승자가 갖는 측면에서 문명사회 전쟁과 별반 다르지 않음
- 부족사회의 전쟁동기 중에서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종속과 조공임. 자기 집단의 주민들을 복종하게 하고 그들에게서 공납이나 납세를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도 부족한 정치집단이 같은 목적을 위해 전쟁을 감행할 리 만무함. 승리를 패권과 세금이라는 형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제도적, 행정적 수단이 없기 때문. 중앙집권화가 부족한 집단들은 위험한 이웃들을 평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음. 이와 더불어 약탈과 포로, 그리고 물리적 축출 등의 방법으로 식량, 귀중품, 노동력과 영토를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김. 발달정도가 높은 군장사회나 국가는 이러한 목적을 정복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룰 수 있음. 국가에게 정복이란 안보, 복수, 경제, 영토획득을 포함하는 목적적 개념이 될 수 있지만, 부족사회는 그 특성상 정복이란 개념에 동반되는 것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불가능함
- 국가 이전의 사회 중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집단들은 인구밀도가 낮았던 북미 대분지, 호주 서부의 사막지대,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아프리카 중앙의 울창한 정글 등지에 살고 있었음. 이들 평화적 집단들은 적들로부터 멀리 떨어짐으로써 집단간 분쟁과 갈등이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음. 그러나 이 방법은 이들이 지닌 소유물들이 모두 쉽게 옮길 수 있을 정도이고, 비록 부족하더라고 필요한 자원이 넓게 분포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함. 따라서 낮은 인구밀도가 반드시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음. 이미 언급했지만 굉장히 낮은 상태로 살아가는 집단들 중에는 상당히 폭력적인 집단들이 있기 때문. 위의 비교를 통하여 인구압과 전쟁의 강도는 어느정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이런 연관성은 상당히 약하거나 복잡하거나 두가지 모두인 경우. 근대 문명 국가들은 대개의 원시사회에 비해 전쟁에 참가하는 빈도와 인구대비 전쟁 사상자 비율이 낮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전쟁빈도와 전쟁사상자 비율은 오히려 낮아진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함
- 근대 문명 시대에서도 교역국들이 때때로 적대관계로 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과거 역사를 보면 교역관계가 별로 없는 국가들간의 갈등보다 오히려 교역국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음.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20세기 나타난 가장 좋은 사례는 일본임. 20세기 내내 일본의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은 미국이었음. 미국은 20세기 초에는 일본의 기초공업에 필요한 원자재의 공급처였고, 2차대전 이후에는 완제품 시장이었음. 그러나 일본은 전쟁 발발 전 자국 상품의 최대시장인 중국,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자재 공급국인 미국을 상대로 파멸적 전쟁을 시작. 같은 사례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순간까지 상당량의 곡물, 석유, 그리고 전략물자가 소련에서 나치독일로 넘어갔음. 아울러 1차대전 교전국들의 왕실사이에는 혼인, 혈연관계가 밀접했던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음. 이런 현상이 원시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음.
- 고고학자들은 희귀품이 교역의 증거이며, 교역은 전쟁을 방지한다고 여김으로써 평화로운 과거를 만들어내고 있음. 그러나 민족학 증거는 위의 경우 모두가 오류라는 것을 암시. 전쟁은 활발한 물품 교류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물적 교류에 못지 않으며 물물교환은 전쟁의 촉발요인이 될 수 있음.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집단들은 혼인관계를 맺은 집단과 싸움. 아울러 물물교환을 하는 상대집단을 습격하고 자신들이 습격하던 집단과 물물교환을 한다.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선사 사회집단간의 교류는 전쟁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교류가 전쟁을 방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기거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변경에서는 사람들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들(토지, 노동력, 이성, 기타 물품)이 있지만 그것이 경계 밖에 있기 때문에 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방법(나눔, 등가교환, 지도집단에 의한 분배 등)으로 획득될 수 없음. 따라서 싸움을 통해 빼앗으려는 유혹이 유달리 심할 수 있음. 평화로운 변경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두번째 문제는 이런 지역은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장치가 없다는 것. 변경의 독립된 사회집단에는 촌장이나 마을회의, 추장 같이 집단간의 중재역할을 전담할 제도적 장치가 부족. 또한 변경에서는 공유된 가치관이 없이 때문에 같은 부족이나 같은 나라의 국민들 간에 이루어지는 살육행위를 보고 끔찍하다거나 영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것도 볼 수 없음.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유대인 상호간에만 적용되며 이후 가나안 족에게 한 짓을 보면 다른 집단에게는 적용되지 않음. 사실 6계명은 살생보다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함. 그 이유는 살인은 동족을 해치는 행위만을 지칭할 뿐 전쟁에서 이방인을 죽이는 것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 마지막으로 변경지역은 항시적으로 습격에 노출되어 있고, 약탈의 최우선적 대상이 되며, 이에 대한 반격이나 반응이 즉각적이기 때문에 대개는 사회문화권 내부 지역보다 평화롭지 않음. 변경지대는 인구가 적고 기습이 용이하며 만약 저항이 심할 경우 즉각적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약탈자들을 유혹함. 대다수의 변경지대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완충지역을 두고 있고, 이 지역의 마을들은 방벽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변경의 취약성과 폭력성을 감안하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캐롤과 멜빈 앰버 부부의 산업화 이전의 전쟁과 그 주변상황에 대한 문화비교학 연구에 의하면 전근대에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으면서도 예측불가능한 사태(가뭄, 홍수, 병충해 등)를 자주 겪는 집단이 전쟁이 휘말리는 경우가 많음. 아울러 이러한 사태에는 높은 위도에 사는 채집집단과 자급자족하는 농경민이 겨울의 끝자락과 이른 봄에 겪는 궁기 같은 것이 집계되지도 않았다. 이 연구가 암시하는 것은 가장 호전적 집단들은 대개 자연재해로 인한 손실을 메꾸고, 줄어드는 목초지나 농경지를 확장하며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손해에 대한 피해를 최소하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전쟁을 야기하는 자연재해 중에는 가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북미 남서부에 살던 푸에블로 족을 괴롭혔던 다양한 유랑족들을 보면 가뭄이 있었던 시기에 활동이 급격히 많아진 것을 알 수 있다.
- 세계 어디든 간에 적을 죽인지 얼마 되지 않은 전사들은 영적으로 더럽져졌다거나 오염되었다고 간주됨. 따라서 해당전사는 영적 오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술적 정화과정을 거쳐야 했음. 즉, 상당기간 은둔과 근신을 하거나, 특별한 음식을 섭취하거나, 금식을 하기도 했음. 아울러 집단의례에 참여할 수 없었고, 성관계도 금지됨. 뉴기니의 훌리족은 전사가 전장에서 살인을 한 경우 며칠간 활 쏘는 손을 사용할 수 없었고, 당일은 주문을 외우면서 밤을 새워야 했음. 그리고 주술로 처리된 물을 마시고 활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했음. 남미 카리브족 전사들은 적을 죽일경우 한달동안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지내야 했음. 아프리카의 메루족 전사는 적을 죽인 후에는 주술사에게 일정한 대가를 주어 자신의 부정한 상태를 해소하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을 치렀음. 마르케사스 인의 경우 적을 죽인 후 10일 동안 터부대상이 됨. 지금의 캐나다 칠코틴 부족 전사는 적을 죽인 후 일정기간 동안 부족으로부터 떨어져 지내야 했으며, 약탈에서 돌아오는 전사들은 모두 물을 마시고 토해내는 정화의식을 거쳤음. 이와 같은 의식은 비록 전장에서 적을 죽였더라도 살인행위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줌.
- 매우 호전적인 집단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나 전투지도자에게 가장 높은 지위나 지도자 자리를 주는 일은 없었음. 이러한 지위는 전투에 사서서 용감하고 잘 싸우는 이보다 웅변, 재산축적, 관대함, 협상, 그리고 의식에 대한 박식 등 소위 평화로운 기능이 뛰어난 사람에게 돌아감. 북미 서부 아파치족의 경우 족장이 될만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여섯가지 성품은 성실함, 관대함, 공평함, 인내심, 양심, 그리고 화술의 유려함으로 전쟁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것들이었음. 샤이엔족은 일명 평화추장들이 전투추장들보다 정치적 영향력, 보유재산, 그리고 부인의 수에서 월등. 군사적으로 높은 수준에 달해 있고, 전쟁도 빈번했던 북미 서북구 해안지대 부족들의 추장과 고위 남성들의 지위는 전투능력의 우수함보다는 혈통과 재산이 척도가 됨. 뉴기니 고원지대 부족들도 족장들이 뛰어난 전사인 경우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재산이 많고, 관대하며, 설득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음. 마에 엥가 부족원들은 변변한 재산도 없고, 지위도 하찮음 소위 쓰레기인간들이 전투에서는 가장 뛰어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 작가 키플링도 문명국가의 군인들은 총성이 울리는 순간에는 구원자로 대접받지만 평시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며, 어떤 경우에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스스로 평하는 이들의 모습을 이야기했음.
- 종족간의 화합이나 문화적 공감같은 것은 평화의 전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빅토리아시대의 캐나다와 싱구아노들은 배타적이고, 상호불신이 가득하고, 말썽많은 집단들 사이에서도 평화상태를 만들고, 지속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증거사례임. 종족간의 평화에 요구되는 조건은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각 집단간의 차이에 대해 실질적 차원에서 최소한 용인해주는 것임. 즉 자기집단은 바르게 살고 있지만 상대집단이 엉뚱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살더라도 이를 놔두면 되는 것이었다. 싱구아노 집단들은 다른 집단이 자신들이 보기에 거칠고, 거슬리는 말을 쓰고, 요란하고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역겨운 음식을 먹고, 틀린 방법으로 신을 모시고, 소음수준의 음악을 듣더라고 채무를 제때 갚고 약속을 지키는 한,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지 않는 한, 그리고 자기집단의 옳은 삶을 방해하지 않는 한, 다른 집단을 건드리지 않았음. 동맹부족들은 토마스 그레고르의 표현대로 가장된 친절함으로 서로를 대했음. 캐나다에서도 여러 형태의 인종적 편견이 존재했고, 이것이 많은 정치적 분쟁의 원인이 되기는 했음. 하지만 1820년대 이후 발생한 부족간의 살인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희극 수준의 두차례 봉기 외에는 조직적인 폭력사건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음. 약간의 편견적 태도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자기 것이 가장 좋다는 관점을 없애거나 자기 것과 완전히 다른 행동이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라는 것보다 상대를 약간 비하하는 상태에서 관용하는 태도를 심어주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 평화란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고, 무관심하지만 적절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지 세뇌로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바꾸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함
- 일부 인류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만 이들도 홉스적인 현실에서 홀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집단적인 자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란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 전쟁의 승리나 약탈의 성공으로 얻은 약탈물과 포로들은 전투에 따르는 위험과 고통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됨. 전쟁은 식량과 필수물품을 획득하고, 영토를 늘리고, 노동력과 성적 파트너의 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함. 물론 위험성과 고역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전쟁이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 이런 이득이 반드시 전쟁을 촉발시키는 목적, 동기, 또는 원인은 아니지만 전쟁하는 자들에게는 보상기제로 작용. 전쟁은 젊은이들, 특히 미혼 청년들이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하는 데 가장 적극적임. 그 이유는 전쟁을 통해 잃을 것이 별로 없는 대신 성공하면 얻을 것이 가장 많기때문. 이들은 대개 미혼이고, 변변한 재산도 없으며, 연장자들에 비해 지위나 영향력도 떨어짐. 이들은 전사하더라도 뒤에 남겨지는 과부나 고아들이 없기 때문에 패할 경우 부족에게 부담이 되거나 포로로서의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도 없음. 부상당할 경우 나이든 남자들에 비해 회복도 빠름.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부와 명예 심지어 아내도 얻을 수 있음. 패할 경우 잃을 것이 많고 승리하더라도 얻을 것이 상대적으로 적은 연장자들이 미혼청년들을 반드시 자제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음.
-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홉스의 선사시대관이 우위를 점하게 됨. 그 이유는 유럽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야심에 잘 부합되었기 때문. 이 논리로 야만인들은 인생자체가 범죄의 연속이고, 무정부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수준높은 직업활동에 의한 생산을 하지 않고, 교양있는 소비도 하지 않으며, 그들의 존재자체가 인근 문명의 변경지대에 무질서와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치적, 영토적 권리는 필요없다고 생각한 것. 이런 관점에서 정착민들과 식민관료들에게 야만인들은 해적이나 도적떼 같은 가만히 놔둘수 없는 존재들이었음. 19세기 말에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홉스적 관점이 적용되면서 법도 없이 사는 수준 낮은 종족들에게 평화와 함께 문명세계의 풍요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위선적인 논리(백인의 책무)로 발전. 그러나 서양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법과 질서가 원주민들에게는 노예상태와 빈곤을 의미할 수 있으며, 원주민들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탐욕스런 식민지인들이 가만히 둘 수 없는 해적과 도적들 같은 존재였다는 점을 간과했음. 심지어 19세기 중반의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새롭게 해석된 홉스적 관점을 갖고 사회적 진화론과 인종주의라는 두가지 이론을 만들어 냈음. 이는 오히려 홉스가 조심스레 펼친 인간평등의 주장에 역행하는 것이었음. 많은 원주민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유럽의 문명과 종교의 우월성을 거부했고, 제국주의론자들은 이에 상당한 우려를 나타냄. 그러나 가장 뛰어난 자만이 존재하고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이론이 새롭게 등장하여 많은 것을 설명하였고, 정당화시켜주어싿. 서방, 유럽 문명이 다른 문명과 종족들을 밀어내면서 확장과 팽창을 하는 현상은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이 제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아주 좋은 증거였음. 야만인들의 고집스런 저항은 생래적인 무지와 지적능력의 열세때문이라고 해석되었음. 이 관점에서 야만인드르이 더럽고 덧없고 짧은 삶은 그들의 문화적, 유전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19세기 말, 제국주의자들은 비로소 뒤떨어진 인간들로부터 세계를 빼앗고 지배해야 하는 도덕적인 임무와 생물학적인 권리를 찾아낸 것이다. 2차대전 이전의 유럽 제국주의가 전쟁과 정복을 정상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면, 2차대전과 그 여파는 이런 관념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음. 2차대전 중에 발생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나치들이 유럽인들에게 자행한 짓이었음. 하지만 이들의 악행은 이미 바로 유럽인들이 비유럽 인종들에게 오랫동안 하던 짓(다만 덜 잔인하고 다소 비효율적일 뿐이었음) 이었음. 나치들은 그들이 행하는 인종청소와 가장 극악한 노동착취, 그리고 정복민들에 대한 폭압적 통치를 인종적, 기술적,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정당화시킴. 나치들이 휩쓸고 간 후 전쟁과 정복은 고귀한 원정이나 자연적인 법칙의 반영이 아니라 가장 더러운 형태의 범죄일 뿐이었음. 서유럽인들은 400년이란 오랜세월 동안 제국주의를 행한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을 자신들이 당하게 된 것.
- 인위적으로 원시시대를 평화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인류학자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당시의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볼 수 있음. 모든 관념이 그렇듯이 과학적 관점 역시 특정 시대나 문화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근거함. 그러나 어떤 과학적 명제가 단순한 지적 유행이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비판적 증거분석과정을 거치기 때문. 평화로운 원시시대 개념이 틀린 이유는 그들이 유행을 따랐거나 선입견이 반영됐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학, 고고학 증거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 그렇다고 해서 홉스주의적 관점에 의거한 과거의 유행이나 신루소주의적 관점에 의한 현재의 유행이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님. 두 관점 모두 부족민들의 인간성을 온전히 인정하기 않기 때문. 과거에는 부족민들의 지적능력과 사회성, 관대함은 물론 생활방식의 다채로움과 효율성,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았음. 또한 현대의 대중적 관점은 원시 부족민들에게 현대인과 유사한 탐욕과 잔학성, 환경에 대한 무시, 그리고 정치적 모략이 있다는 것에 대해 긍정하기 어려워함. 예를 들어 현대인에 대한 환경론적 비난이 난무할 때 무려 10개종의 모아 새들이 뉴질랜드에 처음 정착한 폴리네시아인들의 사냥감이 되어 멸종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반인과 전문학자들은 환경론적 신비감과 물질적 삶에 대한 혐오에 경도되어 부족집단들을 에덴 동산의 선량한 인간으로 보고싶어 함. 한마디로 문명인들은 부족민들이 의롭고, 영적(그들 스스로가 아닌 현대인의 관점에서)이며, 보다 행복하고, 심리적으로 복잡하지 않아 이기적 계산을 할 가능성이 적은 사람들이기를 원함.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지난 수세기 동안 서양인들은 선사, 원시부족들이 현대인만큼이나 꾀가 많고 도덕에 선택적이며 심리적으로 복잡다단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음. 하지만 원시, 선사부족들에게 장점만 가져다 붙이면서 단점 보기를 거부하는 것은 문명인 스스로만큼이나 그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임. 어떤 현명한 문인은 스스로를 짐승으로 여기는 자는 인간으로서 사는 고통을 잊게 된다고 했음. 문명인들은 원시, 선사부족들이 문명인들보다 인간적이고 평화적이라고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짐승에 비유하고 있음. 우리는 조직적 폭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로 인한 전쟁은 모두 추악하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이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겪는 고통이다. 평화로운 과거에 대한 신화를 믿으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외면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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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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