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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발자국

역사 2014. 10. 18. 17:13

 


인류의 발자국

저자
앤터니 페나 지음
출판사
삼천리 | 2013-04-1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자연사의 큰 흐름 속에서 조망해 보는 세계사“지구의 생애와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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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기후체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크지만, 지구온난화가 수십억년 전에는 산소를 배출하는 남조식물을 만들어내는 데 이바지하고 해빙을 촉발시켰으며 물속에서 산소와 철의 작용을 촉진시켰음. 철은 산소가 있으면 물에서 분리되고 대양 바닥에 가라앉아 광상을 이룸. 이 밖에도 지표 온도가 무척 높아 증발이 많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꽤 많은 비가 내렸음. 비가 대기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씻어냈을 것이고, 그것이 탄산이 되었을 것임. 이어서 탄산은 대륙으로 스며들고 땅에 스며든 침전물이 대양으로 흘러들어가면서 화학작용을 거쳐 석회석이 됨. 철과 석회석 광상은 오랜시간을 지나며 빙하석 형태의 광상이 되고, 먼 미래에 인류의 제조업이나 산업활동에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떠오르게 되는 해양 퇴적물을 끌어들였음.
- 6억 5천년 전 무렵 지구의 탄소 양에 나타난 변화가 지구의 기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음. 이 기간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오늘날의 2~3배 수준까지 떨어졌음. 이산화탄소 감소현상은 탄소가 온갖 종류의 암석에 흡수되고 해양저가 확장되며 땅위의 생태계가 다양한 식물군을 갖춰 나가면서 나타났음. 온난화로 지구의 녹지화가 계속 진행된 반면에 이산화탄소의 양의 감소로 지구는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냉각되었음. 이산화탄소 양의 변동은 과거 1억5천만년 동안 주기적으롤 등장한 빙하시대의 역사를 이치에 맞게 설명해주기도 함. 규칙적 양상을 보인 빙하시대는 더 최근인 75만년 전에도 등장. 9만 5천 8백만년 정도 지속된 빙하시대와 1만~3만 년에 이르는 간빙기가 거의 10만년마다 나타났음. 이런 흐름을 고려해보면, 인류문명은 현재의 간빙기에 꽃을 피운 셈
- 호모 에렉투스는 가혹한 기후의 역경속에서도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도구 제작자가 되어 번성. 이는 그들의 지능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함.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 하빌리스가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고 1백만년 동안 사용해온 매우 단순한 올두바이 도구 대신에 양날이 있는 아슐 손도끼를 발명. 힘이 세고 지능이 더 우수한 종과 경쟁할 수 없었던 호모 하빌리스는 호모 에렉투스가 행사한 압력에 굴복. 호모 에렉투스가 불의 힘을 활용하고 불을 이용해서 열을 가하거나 어둠을 밝혔다는 사실은 훨씬 중요함. 그들은 이 두가지 발전을 통해서 환경을 좀더 쉽게 지배할 수 있었음. 그들은 육식동물로서 이제 동물과 식물을 요리할 수 있게 됨. 동물의 사체를 뒤져서 얻든 사냥을 해서 얻든 동물성 단백질을 더 많이 섭취하게 되었고, 이 단백질이 식단에 추가되면서 건강이 좋아지고 수명도 늘어남. 또 불을 이용해서 포식자들의 공격을 막고 주거지를 따뜻하게 하기도 했음.
- 과학자들은 14500~12900년 전에 북대서양의 거대한 빙상과 빙산이 줄어들면서 전반적 온난화 추세가 나타났다고 가정.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고 건조해지면서 수로와 물이 풍부한 초지가 줄어들고, 말과 영양을 비롯한 몸집이 큰 사냥용 초식동물이 사라짐. 인류는 이런 변화에 적응해서 사슴과 땅 다람쥐, 쥐, 거북이, 새 같은 좀 더 작은 동물을 사냥.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이런 변화를 광역 스펙트럼 혁명이라고 부름. 기후가 따뜻해지고 강수량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플라이스토세 후기 인류가 재배한 식물들의 수확이 늘어났음.
- 장기적인 온난화 추세가 중단되고 영거 드라이아스 기후라고 부르는 빙하기(12600~11600년 전)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수렵채취 활동을 줄이고 노동집약적 개간활동에 뛰어듬. 이동을 덜 해도 되는 좀더 영구적인 곳에 정착을 하면서 인구가 점차 늘어났음.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유기물질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일부 야생식물 가운데 먹기에 가장 좋은 식물을 골라 그 씨앗을 땅에 심음.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혹독한 추위가 아마도 야생식물을 재배하고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생산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임. 이렇듯 장기간에 걸친 식량부족과 그것이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식량부족은 농업을 역사적 서사로 서술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
- 젖을 빨리 떼고 아이를 낳는 간격을 줄이는 일은, 부드럽고 맛있으며 소화가 잘 되는 이유식을 입수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이 있음. 이유식은 대개 탄수화물이 풍부하고 영양가가 높은 일년생 토종식물이었음. 얇고 효율적인 도자기 그릇 덕분에 이유식을 끓이는 작업이 수월해졌음.
- 농경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데는 기후변화가 한몫했음. 6000~5200년 전 무렵에 지구가 따뜻해지고 농경이 확산되어 오늘날 마그데부르크-쾰른-리에주 지역으로 알려진 중유럽에서도 처음으로 곡물이 생산됨. 이런 확산추세는 2900~2300년 전 무렵에 한랭기가 시작되면서 멈추었음. 더위와 추위, 습윤과 건조의 극단을 오가는 변덕스러운 기후가 수백년 동안 지속되다가 1000~1300년 무렵에는 온난기가 이어짐. 기후학자들인 중세 온난기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중유럽과 북유럽으로 농업이 급속히 확산됨.
- 1750~1850년에 농부들은 파종과 추수를 교란시키는 변덕스러운 날씨체계에 직면. 가을과 봄에 내린 치명적 서리 때문에 자라나는 작물이 모조리 죽었음. 기상 악화에 뒤이어 대기 중에 수백만 톤의 연기와 재를 날리며 태양광선이 지표면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화산폭발이 여러차례 일어남. 1788년과 1789년 일본과 아이슬란드에서 화산이 폭발했고, 1816년에는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산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났음. 이런 화산폭발은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렸고 전 세계의 곡물 수확량을 감소시켜 기아를 확산시킴.
- 공업과 매뉴팩처 시대의 유럽에서 농부들이 점점 늘어나던 도시 인구와 팽창하는 농촌인구의 식량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 인구의 95%가량이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세계 경제에서 농업이 압도적이었지만, 농민과 도시 빈민은 주기적으로 식량 부족사태에 직면. 농촌과 도시 거주민들 대다수는 좋은 시절에도 제대로 먹지 못했음.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소득 가운데 60~80% 이상을 영양가가 별로 없는 곡물을 사는 데 지출
- 수렵채취인이 초창기 농부들보다 좀더 균형잡힌 식사를 하고 키가 좀더 컸으며 충치가 더 적었음. 하지만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천연자원에는 제약이 많아 인구 규모와 증가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음. 수렵채취인들은 걸어서 하룻길 정도에 있는 서식지만 이용할 수 있음. 날마나 길을 떠났닥 주둔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함. 식량을 구하는 일은 서식지의 생태와 접근성에 달려 있음. 이런 기능을 단 하루에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함. 그래서 수렵채취인들에게는 동식물과 적절한 강수량이 생존의 필수요건. 그들의 가족 부양능력은 동식물의 양에 달림. 이런 생활방식을 유지하느라 인구밀도가 제곱킬로미터 당 1명을 넘어서지 않았음.
- 야생식물 경작과 더불어 가축을 사육하게 되면서 초기 농부들은 전염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임. 야생동물이나 가축과 접족하면서 동물의 체액이나 배설물에 들어 있는 감염성 미생물에 노출될 위험이 나타남. 개는 광견병은 물론, 그보다는 덜하지만 주로 말에서 감염되는 무시무시한 파상풍을 옮길 수도 있음. 천연두와 결핵은 원래 소에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 왔음. 하지만 지금은 천연두는 낙타에서 옮고 결핵은 버팔로나 야생조류를 비롯한 여러 동물들에서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소는 홍역과 디프테리아를 옮김. 인플루엔자는 조류와 돼지, 닭에서 생기고 일반감기는 사람이 말과 접촉하면서 시작됨. 호흡기 감염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작됨.
- 인구의 성장과 감소는 때때로 식량공급의 변동이나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음. 지난 천년기(11~20세기)의 초기 몇 세기에 인구가 수십억명이 아니라 수백만명에 불과했던 것은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이 전 지구나 반구에 기후변화가 나타났기 때문. 모든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태양활동의 장기변화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구의 장기변동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이었음. 뉴질랜드 석순에 있는 광물 침전물 자료와 고대 나무에 있는 탄소-14 침전물과 농도자료, 기후변화와 사망률 기록, 농업 생산성 등을 기술한 역사자료를 비교해보면 중위도 기후에 상당한 일관성이 나타난 것으로 보임. 중세 온난기(800~1200년)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구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목격. 더 나은 도구를 사용하고 새로운 마구덕분에 소보다 끄는 힘이 더 센 말을 이용하면서 농업생산성이 늘어났음. 콩과 식물을 심고 비료를 사용하면서 토양의 필수 영양소가 고갈되는 것을 막음. 생산이 늘어나자 도시가 성장하고 역내무역이 확대됨. 소빙기(1300~1850년)에는 기온아 하락하고, 특히 1590~1670년 무렵에 기온이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식량이 부족해지고 물가가 상승. 1500~1650년까지 오스만제국과 중국, 영국의 곡물가격이 500%나 상승. 곡물생산을 줄고 사망률이 늘어났으며 출산율과 기대수명이 낮아짐. 1670년~1800년 이후 소빙기가 물러나고 비교적 따뜻한 시기가 이어지면서 식물 생육기가 더 길어지고 식량이 늘어나 가격도 떨어짐.
- 요즘 기준으로 볼 때 18세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었음. 심지어 소득분포 상위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이 있었음. 영양상태가 좋아진 것은 농업생산량이 늘어나고 소비할 식량이 더 많아지면서부터. 농업기술이 개량되면서 적은 수의 노동자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게 됨. 이렇게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소 도시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됨.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었고 이런 사람들은 생산자들의 주류에 들지 못했음. 산업 시대 이전 1730년대 영국이 거둔 놀라운 풍작은 최고의 출산율과 더불어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옴. 영양상태가 좋은 인구가 공업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됨. 산업시대 이전에도 인구가 급증하기는 했지만 농업 사회가 수요에 맞추어 생산을 늘리지 못한 까닭에 그 성장이 빛을 바랬음.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질병에 취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구붕괴 현상이 나타났음. 인구학적 변천과 전염병학적 전환이 영국에서는 18세기에 전개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됨.
- 메소포타미아의 기록관리자들은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초창기 도시 생활의 소통을 위해서 외국의 이름이나 지역, 사물을 번역할 발음 부호를 갖춘 공통의 기호언어를 발명. 이것이 다중언어를 사용하는 수메르에서 낱말표기를 음절문자로 전환하는 데 영감을 불어넣음. 기원전 제5천년기가 끝나기 이전에 대외무역이 확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문자가 등장. 시리아와 크레타, 터키, 남이란, 인더스강 유역, 중국이 그런 곳임. 문자 전통은 이처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고대 도시들의 상업적 성격 때문에 생겨났을지도 모름. 이런 도시로 청동기 시대 수메르인들이 인더스강 유역이나 이란의 해안 지역과 교역을 할 때 들르게 되는 딜문(오늘날 바레인)이라는 섬이 있었음. 이 섬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를 인더스 문명과 이들 사이에 위치한 이란의 해안지역을 연결하는 화물집산지 구실을 했음.
- 구리를 처음 사용한 시기는 1만년전 부터 9천년전에 이르는 1천년 간의 기간이었음. 이 시기에 구리에 열을 가하고 망치로 두드려 간단한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음. 7천년 전에는 인류가 섭씨 1000도 정도로 열을 가하면서 광상의 표층에서 구리를 벗겨냈음. 고고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 초기 취락과 선왕조 시대 이집트, 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사회, 고대 중국에서 구리로 만든 고리와 끌, 도끼, 칼, 창을 찾아냈음. 구리 광상의 표층이 고갈되자 노동집약적인 활동이 필요한 심부채광을 하게 되었고 그 작업을 노예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음.
- 중세까지 유럽이 괴철로를 사용해서 철을 소량으로 생산한 데 비해 중국은 2300년 전에 이미 용광로 기술을 이용해서 철을 대량생산하기 시작. 유럽에서는 아직 이 기술을 발명하지 못한 채 근처의 나무를 이용할 수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저마다 철을 만들고 있었음. 반면에 중국에서는 한나라 황제들이 철 생산을 통제하고 독접하여 숲 근처가 아니라 인구밀집지역과 행정 중심지 근처에 제철소를 세움. 중국에서는 앞선 기술 덕분에 생산이 전례없는 규모로 늘어났으며, 제철소가 행정 중심지와 인구밀집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재와 그을음, 연기가 도시환경을 오염시켰음. 삼림이 고갈되면서 여기저기서 연료위기가 발생했고 새 연료로 대체가 일어나고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게 되었음. 연료사용과 발명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철강생산이 급증. 용광로는 적어도 하루에 500킬로그램 규모로 대량생산을 하기 위한 발명품임. 용광로는 몇 주나 몇 달동안 중단없이 가동해야 함. 따라서 연료와 광석의 공급능력, 풍부한 노동려, 생산량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 수송역량 등이 생산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였음. 용광로에 공급할 숯이 끝없이 필요하게 되자 땔감나무를 구하는 일이 늘 고민거리였음. 그 결과 2300년 전 중국의 철 생산은 서기 1700년 식민지 아메리카의 제철소와 흡사하게 숯을 생산하는 삼림 근처나 삼림지대와 연결이 되는 수송망을 따라서 생겨난 제철단지 같은 생산조직이 필요했음. 삼림지대가 고갈되자 연료 공급원에 더 가까운 곳으로 제철시설을 옮겨갔음.
- 1775년 무렵에는 아시아, 주로 중국과 인도가 전 세계에 공급된 상품의 80%가량을 생산. 당시 유럽이나 신세계의 유럽 식민지들은 아시아의 거대 국가들을 상대로 품질이나 가격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인도가 전 세계 면포의 25% 정도를 생산. 빛깔이 곱고 품질이 좋은 가벼운 면포가 주를 이룸. 캘리코는 섬세하고 촉감이 부드러웠으며 유럽제품보다 쌌음. 유럽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였음.
- 1차 아편전쟁 (1839~1842)에서 영국이 중국을 물리치면서 다가올 20년 동안 체계적 아편무역의 길이 열리게 됨. 그래서 해마다 3천톤에 달하는 아편 5만상자 가량이 중국에 판매됨. 중독이 확산되면서 인도와 터키에서 재배한 아편대금으로 은이 중국 밖으로 흘러나감. 영국 정부의 강요로 중국 정부는 아편을 합법화할 수 밖에 없었고 공급업자들에게 여러 항구도시를 개방. 중국 농민들이 아편거래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 밭작물을 면화에서 양귀비로 바꾸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현금 유동성이 늘어남. 이런 결정은 식량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흉작과 기근에 더욱 취약하게 됨. 19세기 말에 중국인은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95%를 소비하고 있었고 인도가 주요 공급자였음. 두 나라 사이의 마약무역은 서유럽에서 산업화가 시작되기까지 수백년 동안이나 누려온 세계 최대 제조업 중심지라는 그들의 지위를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
- 잭 골드스톤은 중국이 공장생산 모델을 채택하지 않은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설명을 내놓음. 명나라(1368~1644) 초부터 남성들은 밭을 가구고 작물을 경작하고 면화를 재배하고 세척하고 말렸음. 여성들은 가정에서 실을 잣고 베를 짜고 음식을 준비.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나 역할을 구분하고 위계적 사회규범와 엄격한 도덕률이 마련됨. 심지어 20세기까지도 방직공장에 여성을 고용하는 일은 저항에 부딪히고 실패로 돌아가기 일쑤였음. 한가지 예외는 있었음. 상하이에 일본인이 소유한 방직공장들에서는 노동자의 72.9%가 여성이었음. 1897년에는 중국의 방직공장 34개 가운데 26개가 상하이에 이었음. 193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인 여성들 10% 미만이 공장에서 근무.
- 1850년에 영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업은 농업이었고 집안일이 그 뒤를 이음. 전체적으로 면방직 공장 노동자보다 건설 노동자의 수가 더 많았음. 석탄이나 금속을 캐내는 광부들보다 제화공의 수가 더 많았고, 제철공에 비해 대장장이의 수가 더 많았음. 공업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아직 성숙기에 접어들지는 않았음. 1870년까지만 해도 증기기관은 광업과 직물업, 야금술 세 분야의 산업에서 주로 사용했음. 다른 분야에서는 주로 물레바퀴에 의존.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는 증기력 사용이 10배나 증가.
- 영국에서는 공유지를 사유지로 전환하는 인클로저 법령으롤 노동자들이 농장에서 쫓겨나 도시로 내몰림. 미국에서는 가족이 늘어나고 유산으로 받게될 농장규모가 작아지면서 형제자매들이 일자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음. 농가에 가족들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주를 했고 이들이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이 되었음.
- 설탕의 생산과 유통만큼 소비세계를 크게 바꿔 놓은 상품은 없음. 중독성이 있는 담배도 그렇게 하지 못함. 경작자들이 생산품목을 바꿨음. 대개는 담배재배에서 설탕생산으로 바꿈. 설탕이 1640년에 유럽시장에 들어오면서 사탕수수가 영국에서 가장 이문이 높은 아메리카의 환금작물이 되었음. 설탕은 1600년부터 1800년까지 곡물과 고기, 생산, 담배, 소, 향신료, 의류, 금속무역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만들면서 국제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상품으로 뛰어오름. 설탕은 인간관계와 농업생산, 전 지구적인 식생활의 변화를 주도한 유일무이한 소비상품이었음. 설탕혁명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슬픈 것이었음. 설탕혁명으로 다양한 혼합농업이 설탕 단작 농업으로 바뀌었으며, 이 단작농업은 삼림벌채와 토양침식을 유발하고 카리브해 지역의 변화무쌍한 기후체게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음.
- 백화점은 소비자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구매자와 판매자의 가격흥정을 가로막는 가격시스템을 만들어 냈으며 새로운 판매전략을 발명해 냄. 연예인들의 추천, 제품의 심미적이고 문화적인 가치홍보, 잠재적 구매자들의 모방을 부추기는 양식화되고 낭만적인 이미지의 모델 활용이 제품에 신분과 가치를 더하도록 디자인한 새로운 판매전략들이었음. 백화점이 등장하면서 대중소비가 시작되었고 신분과 맛, 예술, 성별인식 등에 관한 문화적 의미들이 소비양식에 영향을 주었음.
-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신다. 세상에서 여기보다 더 자주 바람을 이용하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 10세기 아랍 작가들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주변 지역을 이렇게 묘사. 풍차는 주로 맷돌을 돌리거나 논밭에 댈 물을 길어올리는 데 사용. 이 풍차가 중세에 유럽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동쪽에 있는 중국으로 확산되었음. 1500년부터 1800년까지 풍차가 대륙 에너지 수요의 4분의 1을 공급하고 나머지는 수력과 근력이 담당. 1200년에 십자군들이 돌아오면서 유럽으로 가져온 풍차와 수차 덕분에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노동에서 해방되었음. 기술사가인 린 화이트가 그 해방을 이렇게 서술. "중세 후기의 주요 자랑거리는 대성당이나 서사시도, 스콜라 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복잡한 문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땀 흘리는 노예나 막노동꾼의 등이 아니라 비인간 노동으로 지은 건축물이었다."
- 산업화는 어떤 면에서 전 세계 경제력의 균형을 바꾸어 놓은 증기기관 혁명이었음. 18세기 말에 영국 공장에서 생산된 직물이 인도의 오래된 공업을 무너뜨리고 수천명의 노동자들을 쫓아냈음. 18세기에는 전 세계 총생산의 70%가 인도와 중국, 유럽 사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음. 19세기 말에는 중국의 몫이 7%로 줄고 인도의 몫이 2%로 줄었으며, 유럽이 60%나 되는 엄청난 양을 생산하고 미국이 20%를 생산. 세계 강대국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음. 그 대부분이 인류역사에서 그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에너지의 흐름에서 비롯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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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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