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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13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 그리고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함.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됨. 애국자와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기념절차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사회는 이들을 지칭하는 어휘를 검열하고 교정한다. 반대로 애국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정치, 사회적 압력이 가해지고 이들을 지칭하는 어휘들에는 거칠고 모욕적이며 배타적인 언어들이 허용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요청은 자본주의만의 특성은 아니다. 신을 요청할 수 없는 모든 지배권력은 애국을 장려한다. 합리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적대화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신과 국가의 존재를 부정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과 국가의 객관적 의미를 초월해서 사회, 정치적으로 과장되고 포장된 의미가 나에게 강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왜곡된 세계에 서 있는 왜곡된 나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지적대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이다.
- 시장의 실패로 발생했던 공황은 정부의 개입으로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것이 바로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 정부는 세금을 높이고 다양한 규제를 시행함으로써 거대자본이 산업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고, 노동환경을 개선. 발전과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소외계층을 보살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이러한 자본주의는 대공황부터 시작되어 냉전시대를 거쳐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이어짐. 이로 인해 미국은 소련과의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를 보호할 수 있었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미국에 큰 부담이 되었는데, 공산주의가 노동자의 권리를 국가의 최고가치로 삼았기 때문.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인 자본가를 인정하기 않고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에 의한 정치를 추구.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는 매우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의 자본가들에게는 공산주의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악마로 보였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사회적 소외계층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불만을 갖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배부르고 편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소외계층의 권리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수정자본주의의 모습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수정자본주의의 등장은 시대,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같이 한다.
- 어떤 사안이 복잡해 보일 때 그것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안으로 인해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입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 어쩐 일인지 한국인들에게 경제체제는 두가지 밖에 없어 보인다. 양극단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라 할때 그것이 암묵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이고, 공산주의라 할 때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북한의 왜곡된 파시즘 체제이다. 경제체제는 종교가 아니고 선악의 문제도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효용과 이익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경제체제가 나와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사회에서 경제체제는 이념과 종교가 되었다는 것. 현 체제를 비판하거나 다른 체제의 가능성을 말하는 이가 이단이 되어 종교재판을 받는 것은 합리적인 현대인들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 정치란 단순히 경제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경제체제 중 무엇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정치의 본질이다. 논의의 선택지는 두가지다. 하나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입장으로 우리는 이를 정치적 보수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우리는 이를 정치적 진보라고 부른다
- 자신의 재산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런 집단은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해서, 역사적 맥락에서 한국인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를 후기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 새누리당이 집권당이 되거나, 민주당이 집권당이 되거나 모든 정책은 사회당과 노동당이 집권하는 유럽처럼 급진적이거나 진보적이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경쟁하는 한국사회는 어찌 되었건 간에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이 대변하는 사회이며, 복지수준이 저조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된 국가일 수밖에 없다.
- 보수는 현재의 체제와 상태를 유지하려는 세계관을 가짐. SBS가 연예와 오락 중심으로 방송을 편성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을 그나마 안정된 세계라고 전제하기 때문. 비정치적 성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지 않는 것, 정치적 사안의 심각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중립이나 비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보수적 세계관이다. 날카로운 풍자와 시사가 배제된 예능은 대중의 말초적 재미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실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기업과 노조의 역사적 기원은 근대부터 시작. 프랑스 대혁명 이후 중세의 왕 중심의 가치관은 붕괴되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발생.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을 소유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두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는 현대에 이르러 기업과 노조로 변화.
- 아이러니하게도 독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형식적 측면만을 고려할 때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이라는 형식적 측면이 독재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측면과 동시에 내용적 측면이 보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적 다수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이라는 내용적 측면가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의 수렴과정과 절차가 보장되고, 각 구성원이 소수의 의견이 귀 기울이는 관용적 태도가 전제되어야함 이상적 형태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독재와 엘리트주의가 현실화 되었을 때,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킨다. 첫재,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서 그것이 자본가이건 노동자이건 이익분배에서 배제된 다른 집단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둘째, 엘리트주의는 스스로의 완전무결성을 유지하기 우해 그런 불만을 가진 집단을 필연적으로 억압한다. 셋째, 이런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이해 권력자는 정보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넷재, 정보의 은폐와 왜곡된 정보가 사실인 양 과정해서 교육한다. 다섯째는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편협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 스스로가 사회의 합리적 선택을 방해하고 결국 사회는 병든다
-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 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현상으로 보인다. 아무리 평범하고 선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경제를 살리겠다는 인물이 있으면 그가 전권을 맡는 것에 대해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독재를 하건, 외국과 전쟁을 벌이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를 잡아가건, 노조를 탄압하건, 대중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한 거이고, 경제회복을 위해 전체가 함께 동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없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존재가치를 절하하고, 집단과 전체의 가치를 앞세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개인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을 반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가치가 절하되어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위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지메의 원리와 동일. 전체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거기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은 그 비윤리적인 행위의 직접적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 노암 촘스키는 "신문과 방송이 광고주인 사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주고, 사기업들은 광고로 언론의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잘못된 이익의 먹이사슬이 형성됐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미디어의 한계를 드러냈다.
- 미디어에 자신의 판단을 양도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여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밖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고, 인생의 깊이를 얻지 못할 거이며,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속세어 빛날 수는 없을 거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만큼 주체적인 삶은 없다
-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법칙을 준수하는 행위를 윤리로 보고, 목적론은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윤리로 본다. 쉬운 예를 들면 의무론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표적 사람들은 종교인다. 목적론적 윤리관의 대표적 인물은 안중근 의사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야" 같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총을 쏜 것이다. 이때의 윤리관은 좋은 결과를 고려한 행위이므로 목적론적 윤리관에 따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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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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