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적 도덕법칙이 무너져가는 상황속에서 칸트가 제시한 것은 정언명법이다.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도덕법칙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방법으로서, 칸트가 제안한 법칙이다. 실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라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이 말을 쉽게 바꿔보면, "네가 개인적으로 하려는 일이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 정도가 된다.
-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파이어아벤트의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는 수학, 물리학, 철학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아 불가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상징직 사건이 됨. 이런 학문의 내적 붕괴가 세계대전이라는 외적 요인과 결합되어 근대 합리성에 대한 낙관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이성은 사실 너무나 초라하고 제한적이며 폭력적 귀결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류는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로서 기대되었던 근대이성을 극복하고, 근대 합리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 포스트모던, 탈근대, 현대는 같은 말이며, 모두 근대를 넘어서는 시대를 말한다. 여기서 근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근대 이성중심주의를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 그래서 탈근대는 이성에 반대하는 반이성을 특징으로 하고 근대적 합리성, 효율, 주체, 질서, 규율, 규칙 통제, 발전, 성장, 기술에 저항하며, 이 근대적 속성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려고 한다. 근대가 쌓아올린 이성과 합리성의 완고하고 질서정연한 고층건물 안으로 새로 출근한 포스트모던이 걸어들어가서 취약해 보이는 몇몇 기둥을 손가락을 밀어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합리성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작업을 해체라고 한다. 해체는 포스트모던의 대표적 특징이다. 반이성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가치를 억압하는 폭력을 수반할 수 밖에 없음.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이분법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 세계를 강압적으로 쪼갤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가치들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하며, 한발 더 나아가 이분법에 포착되지 않고 배제되었던 것들까지도 다시 복원하고자 한다.
- 근대를 끝내고 현대 포스트모던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해라."
- 절대주의 : 불변하는 단일 진리를 상정하는 태도
- 상대주의 : 변화하고 운동하는 현상세계와 진리를 고려하는 태도
- 회의주의 : 보편적 진리나 그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태도
- 지금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플라톤의 절대주의와 유사.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의 '일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해당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해당. 플라톤 사상에서 완전한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상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그리스도교에서 완벽한 천상세계와 타락한 지상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과 동일함. 이에 대해 현대철학의 문을 연 니테는 그리스도교가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에 다름이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 그에 의하면 플라톤 사상의 세계 이해방식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
- 중세 신 중심의 시대가 지나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중심의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 그것은 역사파트에서 본 것 처럼 물질적 권력을 획득한 시민계급의 부상과 관련된다. 그들은 왕의 권력을 정당화해주는  신 대신 인간이 중심인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 이제는 진리의 대상이 종교에서 이성으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대상이 변경된 것과는 달리 진리에 대한 입장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중세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싸움이 보편논쟁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에 있었다면, 근대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논쟁으로 변형된다.
- 합리론과 경험론은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짐. 다만 그 답변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하는 분야를 철학에서는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 근대 합리론과 경험론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였다. 합리론은 보편적 이성을, 경험론은 개별적 경험을 그 방법으로 제시. 이 두체계를 종합함으로써 소모적 논쟁을 끝마친 인물이 칸트이다.
- 고대 이집트로부터 로마시기 노예는 구체적으로 유대민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도덕은 원한으로 시작되고 부자연스러운 형태를 띤다. 주인에 대한 그들의 원한은 점차 왜곡되고 이상화되어 결국에는 독특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재탄생. 즉 노예들은 자신들이 가진 도덕인 겸손, 근면, 순종, 순응 등을 '선'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뒤바꾼다. 그리고 주인의 진취성, 결단력, 창조력 등은 '악'이라는 개념으로 가치절하. 마음속으로 소심하게 복수하는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에 의해 좋음은 악이 되고, 나쁨은 선이되는 가치전도 상황이 발생.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가 이런 선과 악의 개념을 공고히 했다는 것. 그리스도교는 유럽 사회 전체를 장악하면서 유럽인들에게 선과 악이라는 원한의 도덕관을 뿌리깊게 심어놓았다. 무엇인가 억눌리고 금욕적이며 겸손하고 희생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로 유럽이 병들어가고 있다고 니체는 판단. 그에 따르면 주인의 도덕은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건강한 도덕이지만, 노예의 도덕은 타인에 대한 원한에서 출발.
- 오컴의 면도날이란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두 이론이 존재할 때, 더 간단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사고방식. 오컴의 면도날처럼 이론을 정립하는 방법과 논쟁을 진행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불필요한 가정을 덧붙이거나 상식에서 벗어난 논쟁을 담론에서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결국 과학적 담론이 진행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 뉴턴이 관심을 가진 만유인력이나 힘에 대한 역학은 기존의 과학이 갖고 있던 관심사를 확장했다는 의미를 가짐. 갈릴레이나 케플러가 기하학을 통해서 자연적 사물들을 수학화했다면, 뉴턴은 그 사물들간의 보이지 않는 힘을 수학적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기존의 물리학이 존재자에 관심을 갖고 그 존재자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뉴턴은 특정 존재자와 다른 존재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수학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뉴턴으로 인해 물리학은 존재부터 관계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수학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하이젠베르크는 동시에 결정되지 않는 미시세계의 원리를 불확정성 원리라고 이름 붙임.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물리하겡 대해 과학자들의 선언이 뒤따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물리학으로서 양자역학의 출발을 알리는 선언인 동시에, 아인슈타인까지의 결정론적 세계가 끝나고 결정되지 않는 비결정론적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코펜하겐 해석이 물리학을 포기한다거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선언은 아니었다. 여기서 결정론의 세계가 원인과 결과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과론적 세계를 대변한다면, 비결정론은 확률로서 제한되는 세계를 말함. 양자역학은 수학적 확률안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된다.
- 쿤에 의하면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의 발전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과학이 실험과 관찰 그리고 수학적 적용에 따른 논리적 진보일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쿤이 과학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본 결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 과학적 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우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 진리가 존재.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신뢰하는 시기라고 해보자. 이 단계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것은 일반인들에게 무척 당연한 것이고,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공통된 진리관이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과학작들으 이 패러다임 안에서 실험과 관찰을 진행한다. 패러다임 안에서 과학적 활동을 정상과학이라 부름. 정상과학이 진행될수록 패러다임은 더 확고해진다.
(2) 그런데 위기가 찾아온다. 정상과학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변칙사례가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하늘에서 화성의 경로를 추적해보면 원래의 경로와 다르게 역행해서 움직일 때가 발견되는데, 천동설 안에서는 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변칙 사례들이 발견된다고 해도 패러다임이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패러다임보다는 변칙사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변칙을 수용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한다. 프톨레마이오스도 실제로 주전원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추가해서 화성의 역행을 설명하고 천동설의 변칙사례를 해결했다.
(3) 위기가 심화되고 혁명이 발생하는 시기. 변칙사례들이 계속 발견되고 기존의 정상과학이 이를 수용하기 어려워지면, 패러다임의 심각한 위기가 찾아옴. 그러면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젊은 과학자 집단이 새로운 이론으로 기존이론에 도전. 이 시기에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경쟁하는데, 이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듯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듬어 지지 않은 까닭에 기존의 패러다임보다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미적으로 보기좋다거나 간결해진다는 과학 외적인 요인을 기반으로 젊은 과학자집단에 의해 제시되는 단계다.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든 과학자 집단은 기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변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하고 노련한 방법들을 사용.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지만, 기존 과학계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은 것이 이에 해당.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움직이는 지구에서 왜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지 등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어서 당대에는 설득력을 갖지 못했음
(4)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것을 폐기하고 혁명적으로 등장해 새로운 정상과학이 되는 단계.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런 변화가 기존의 정상과학과는 단절된 혁명적 변화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새로운 과학이론이 기존의 과학이론을 아우르면서 점진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쿤의 생각. 과학은 기존의 세계관과는 단절된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혁명적으로 발전한다. 이를 과학혁명이라고 한다. 쿤이 과학발전대신 과학혁명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만큼 비판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뇌이상설이다. 뇌이상설은 죽음이 임박한 당시 의 신체적 변화가 뇌에 비일상적인 영향을 주어 환각으로서의 경험을 일으킨다는 설명. 세부적으로는 호르몬설과 산소결핍설이 대표적. 우선 호르몬설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진통작용을 하는 엔돌핀의 과다분비가 환각의 원인이라는 설명. 전형적 임사체험의 경험 중 느끼는 평온함과 안락함의 경험이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됨. 다음으로 산소결핍설은 심장박동의 정지로 인한 뇌안의 산소부족이 환각의 원인이 된다는 설명. 산소농도의 저하는 시각 뉴런의 활동을 증가시켜 빛을 보는 듯한 경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내용. 이와 비슷하게 혈류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 환상을 보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음. 이 밖에도 임사체험을 수면의 단계와 연결하는 설명이나, 측두엽의 이상과 연결하는 설명 등 뇌 활동의 일부로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
- 만약 지금 이 순간이 힘겹고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은 영원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이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현명해질 것을 요구한다. 내가 지금 소모해버리고 있는 이 순간은 내가 영원이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영원이 반복될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도록 삶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 지금 이 순간을 소모하지 않고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존재. 이 존재가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 진정으로 신비하고 심오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자신이 내적 세계로서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라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나의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계의 의미와 세계속에 살아있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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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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