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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21 진선미

진선미

인문 2014. 10. 21. 20:23

 


진선미

저자
하워드 가드너 지음
출판사
북스넛 | 2013-02-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하버드 석학, 하워드 가드너에게 듣는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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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진실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예술은 진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게끔 우리 앞에 주어진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거짓말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거짓말이 진실인 것처럼 확신시킬 방법을 알아야 한다.
- 최근들어 미의 기준으 인간의 신경계에 유전적으로 설치되어 있다는 주장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최신 유행으로 각광을 받고 있음. 약간 덜 대담하고 덜 노골적으로, 미적기준은 인간의 신경계와 지구환경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불가항력적이진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출현한다고 주장하기도 함. (심지어 과거에 그런 환경이 우리 조상들에게 더 쾌적했기 때문에 이 선호현상들이 출현했다는 진화론적 주장도 있음. 그런 환경에 끌리는 성향이 진화상 유리했고, 그래서 생존자들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었다는 말이다. ) 만일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균형잡힌 신테와 얼굴 같은 자연미의 어떤 표준들이 역사와 문화의 변덕을 초월하고 그래서 보편성에 도달한다고 입증되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어떤 목가적 장면 앞에서 특정한 신경전달물질들을 분비하는 성향을 갖도록 뇌 회로가 배선되어 있을지 모름. 여기까지는 생물학을 지향하는 동료학자들의 의견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선천적 성향들이 모든 시대의 예술에서 무엇이 미의 근본인지 설명한다는 개념에 나는 강항게 이의를 제기한다. 기껏해야 그 성향들은 정식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유기체가 청각적으로, 시각적으로, 또는 단일하거나 복합적인 감각양식을 통해 무엇에 주목할지에 영향을 미치는 대략적인 매개변수에 불과하다. 우리의 공통적인 감각적 경험은 진리가치를 확정하기 위한 출발점을 이룰 수 있지만, 그 공통의 경험 자체로는 세계의 기본적 진리들에 대해 거의 어떤 내용도 포착하지 못함.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 뇌영상, 신경전달물질 등을 더 깊이 파헤쳐도, 자연적인 미든 인공적인 미든 간에 우리가 미의 영역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거의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경외감은 미적 경험을 알니는 설렘과는 다르다. 어떤 존재물이나 경험이 아름답다고 지각될 때, 우리는 자제심을 잃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다. 어떤 존재물이나 경험이 경외감을 유발할 때 우리는 그 힘에 짓눌리고 압도당하고 주도권을 상실한다. 그러나 다시 찾아올 때마다 경외심은 길들여지고, 보통 미적 감정을 알리거나 그에 수반하는 즐거운 지각으로 변한다. 되돌아오기로 결심하는 것은 미적 경험의 필수요소다. 그러나 왜 되돌아오기로 결심하는가는 결국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문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통용되고 아마 앞으로는 항상 통용될 미의 핵심자질을 확인할 수 있다. 가치의 확인은 집단적 노력으로 종종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개인들이 참여하지만, 미적 경험은 개인적이고 개별화된 문제, 심지어 때때로 특유한 문제가 되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핵심개념으로 되돌아가보자. 어떤 사람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미는 이제 어떤 객체나 경험의 독립적이거나 자명한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할 지 모른다. 그런 종류의 주장은 미를 형식의 흥미로움과 기억성, 재경험 충동의 단순한 혼합물로 가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약간 다른 공식을 지지한다. 내가 보기에 미는 독자적 존재물로 인정할 만하다. 미는 위에서 언급한 생리적, 심리적 설렘을 수반하기 때문인데, 이 설렘은 단순한 흥미나 재방문 유인의 반응과는 다르다. 미적 경험은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은 적어도 때때로 그 경험의 특별한 성질을 의식한다. 시인 콜리지의 공식을 빌리자면, 미의 특징은 평온한 마음으로 상기하게 되는 강력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 전통적인 선관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이 가치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개념은 현재 재협상을 거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협상이 필요한 것은, 한편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강력한 상대주의 물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중요성과 편재성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우리가 조상들이 전해준 것보다 더 좋은 윤리규약에 도달할지, 더 나쁜 윤리규약에 도달할지를 예상할 수 없다. 인간과 관련된 사건들은 규칙에 따르거나 심지어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우연에 따라 움직이는 역사적 문화적 차원들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나는 선의 영역이 계속해서 우리 앞에 도전과제를 던져 놓을 것이라 예상하고, 선이란 단어의 윤리적 의미도 그런 흐름 속에서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똑같이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다.
- 많은 연구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취학전 아동은 본질주의자임. 다시 말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은 제각기 기초적 본질, 즉 결정적으롤 중요하고 피상적 외양을 초월하는 본질을 갖고 있다고 아이들은 믿음. 개를 다른 색으로 그리거나 털을 깎거나 이식수술을 해도 그것은 여전히 개다. 내장된 부품이 마술처럼 다른 것으롤 바뀔 때에야 비로소 개의 본질이 해체된다. 본질주의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여자는 여자이고 남자는 남자이며, 이 생각은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 본질주의는 인간의 하위범주에도 적용된다. 아이들은 사람들을 거짓말쟁이, 영웅, 친구로 가차 없이 묶는다. 아동들에게 이 본질은 좀처럼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이것이 왜 미 연구와 관련이 있을까? 본질추구의 경향은 이른 나이에 사람이 만든 물체에까지 확대된다고 밝혀졌다. 그림은 바위와 다르다. 그림은 사람이 만들었고 그 사람의 본질의 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한 친구가 만든 작품이 다른 친구가 만든 작품과 다르다고 보고, 우연히 만들어진 서투른 그림이 무엇인가를 묘사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서투른 그림이 무엇인가를 묘사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서투른 그림과는 다르다고 본다. 게다가 한 아이는 다른 아이가 선을 휘갈길 때 그 앞에 모델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휘갈긴 선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리고 어떤 막대기에 대말 지위를 부여하고 나면, 그 대말을 막대기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개로 취급하는 자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 발견들을 종합하면, 아이들은 어떤 물체들, 즉 미적경험의 중심이 되는 물체들의 특별한 지위를 일찍부터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건설적 관여와 전문지식의 모델화는 정규 교육 초기에 시작할 수 있고,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중간단계, 즉 12세 경에 발생하는 중요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때 수업은 사실들 또는 꾸밈없는 명제들에 대한 단순한 진술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서, 명제 태도의 제시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이동. 학교 교육 초기에 학생은 단지 물질은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거나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한 후 권력을 되찾았다거나 지구는 편평하지 않고 둥글다고 듣는다. 학생들이 인지적으로 더 정교해지만 정보를 제시하는 새로운 방법과 마주침. 진위의 단조로운 진술을 넘어서는 것임. 이제 진술하는 명제에 대한 화자나 저자의 태도가 끼어든다. 물질은 창조죄거나 파괴되지 않는다고 뉴턴은 주장했다. 또는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한 후 권력을 되찾았다고 역사가 파머는 주장한다. 여기에서 정보는 더 이상 직접적 단언으롤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학생은 그 사실이 구체적인 권위자가 주장한 것이고 그래서 그 출처의 신빙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 순수한 교훈적 교수법으로는 아이들의 도덕성을 거의 이끌어내지 못함. 어떤 행위들은 왜 금지해야 하는지를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자신의 이유를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런 구속들을 내면화하고 자발적으로 지키기가 어려움. 그래서 건설적 관여는 행동수칙 헌장보다 나아 보임. 대안적 관점들을 논의하고 토론하고 들을 기회, 그리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각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 진정한, 장기적인 도덕적 나침반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음.
- 적어도 어른들이 보기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본인들이 알든 모르든, 그리고 남들이 지적해줄 때 본인들이 고민하든 안하든 간에, 흡수하지 못하고 체계화하지 못한 정보를 산더미처럼 품고 있고, 또 산더미처럼 만들어냄. 접속을 하는 순간부터 진리, 미, 도덕적 교훈의 가상 포화가 아이의 저인을 난타함. 아이에게 타고난 성향이 있더라도 경쟁적으로 밀려오는 규범들에 압도당함. 바로 여기에 왜 청소년들이 버락 오바마 같은 사람에게 끌리는지를 말해주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름. 오바마 대통령은 출생, 주거, 믿음 체계가 교과서적으로 해체된 (그리고 그들처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젊은 사람이지만 온갖 곤란을 무릅쓰고 이 파편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없이, 우리는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결코 오바마가 아니다. 결국 존재감은 크지만 포스트모더니즘도 디지털 미디어도 세 가치의 적절한 형태로부터 청소년들을 떼어놓거나 막아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히려 희망적인 징후들을 볼 수 있다. 미적 경험과 객체를 알아보는 멋진 개인화된 감각이 출현할 수 있고, 세계적으로나 국지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이끄는 건전한 관념을 형서오딜 수 있고, 인내와 끈기를 겸비한 사람들은 강인한 진실감을 향해 꾸준히 그리고 자신있게 나아갈 수 있다.
- 조숙한 경우라도 청소년의 세계관은 자기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다. 세계가 때로는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다. 발달의 후기단계에 이르면 개인의 탈중심화 능력은 훨씬 더 커닌다. 자신의 의제를 한발 물러나 바라보는 능력,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표 달성을 도와주는 능력, 한발 양보하여 다른 사람들의 독립을 더 많이 허락하거나 격려해주고 정당한 공적이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증가함. 최상의 시나리오에서 그런 발달은 말년까지 지속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성숙한 판단, 효과적 리더십, 책임있는 관리, 더 나아가 지혜로 완성됨
- 한때 학자든 문외한이든 사람들은 아동기 이후의 삶을 단지 청소년기, 성인기, 노년기 등 3단계로 구분하고 만족했다. 오늘날에는 부상하는 성인기(또는 연장된 청소년기)라는 단계를 널리 인정하고 있음. 노년 초기의 단계도 마찬가지임. (활동적 은퇴기(65~75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50~75세의 시기인 성인기의 제3단계를 인정하고 있음. 이 단계에서 젊은 시절의 야망을 성취하고 한계를 인정하게 된 성숙한 어른은 새롭고 종조오 단호히 친사회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생활사의 다른 어느시기보다 이 시기에 개인은 몇몇 영역에 걸쳐 다양한 진리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세련되게 다음고, 일터, 투표소, 도심 광장에서 발생하는 골치 아픈 윤리적 문제들을 민감하고 현며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잠재력과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있다.
- 취향변화를 가로막는 한계들은 선천적인 성향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개인이 좋아하게 되는 또는 싫어하게 되는 장르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에 한두 문화에서 획득하는 본인의 경험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음. 그 기준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떠오름. 그러나 주로 나이와 반복에 의해 일단 자리를 잡으면 이 기준은 갈수록 개조하기가 여렵다. 우리의 인지체계뿐 아니라 감정체계에도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 이는 수긍할 만한 뉴스지만, 최종선고는 아님. 새로운 것에 대한 반감의 증가가 반드시 치명적일 필요는 없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예술의 세계에서 넘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임. 만일 내가 새로운 예술형식, 매체, 장르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나는 분면 그에 대해 유의미한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중요한 차이들을 식별할 줄 알게 된다면(사람이든 전자기기든 어떤 원천, 어떤 종류의 도움도 환영한다), 나는 중요한 선을 넘은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결정적 차이에 주목하는 단계에서 그것을 즐기고 갈망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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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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