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와 로마는 온난한 기후 덕분에 농업 생산성과 경제력이 크게 증가하면서 부강한 나라로 성장했고, 오늘날 동아시아와 유럽 문화권의 기초를 이룬 대제국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지요. 몽골제국 역시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할 무 렵 때맞춰 척박한 스텝 지대에 많은 비가 내려 인구와 경제력, 군사력이 크게 성장하면서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제국으로 발 전할 수 있었습니다.

- 1만 2,000년쯤 전에는 플라이스토세의 매섭던 추위가 잦아들 고, 극지나 고산 지대 정도를 제외한 땅에서는 빙하가 녹았다. 빙 하기의 기후와 환경에 적합하게끔 진화했던 매머드, 검치호 등은 멸종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동식물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내거 나 번성했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기후와 자연환경은 홀로세라 불 리는 1만 2,000여 년 전에야 비로소 형성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1만 2,000여 년 전에 단지 간빙기가 시작되었을 뿐이며,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또 다른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주 장한다. 반면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를 많이 배출한 덕분에, 빙하기가 오지 않고 인류 문명이 이어질 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50억여 년 전에 탄생한 이후로 지 구의 기후가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상기한다면, 언젠가 지구에 또다시 빙하기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이산 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가 노력 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식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자연적인 기 후변화는 아무리 짧아도 수백 년, 길게는 수천만 년에서 1억 년이 상의 주기로 이루어지는데, 최근에는 인간의 무절제함 때문에 몇 년에서 몇십 년으로 눈에 띄게 그 주기가 짧아졌다. 이처럼 급격하 고 인위적인 기후변화는 생태계는 물론 인류 문명에도 심각한 위 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온실가스를 마음대로 방출해도 괜찮다고 여겨서는 곤란한 이유다.
-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2만~9만여 년 전에 드디어 남아프리카를 벗어났다. 이 무렵에 접어들어 지구 자전축이 바뀌면서 사하라사 막에는 습기를 가득 품은 계절풍이 불었다. 때마침 지구 기온도 계속해서 낮아졌다. 그 덕분에 메마른 사막에는 비가 자주 내렸고, 기온이 낮아지니 수분의 증발량도 줄었다. 사하라사막은 강물이 흐르고 동물이 뛰노는 초원으로 바뀌었다. 기후변화가 아프리카 의 지리적 환경을 바꾸면서 인류는 한층 넓은 세계를 향해 발걸음 을 내딛을 수 있었다.
- 초원으로 변한 사하라사막은 인류에게는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인류는 새로운 삶의 터전과 먹거리를 찾아 북쪽으로 이주 했다. 수만 년에 걸친 이주 끝에 인류가 분포하는 영역은 아라비 아반도가 있는 서남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주 행렬은 7만~6만여 년 전에 일어난 기후변화 때문에 잠시 멈추게 되었다. 빙하기로 인한 기후변화가 사하라 지역을 또다시 사막으 로 만들면서 사하라 북쪽으로 이주한 현생인류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빙하기는 인류가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를 넘어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갈 기회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빙하기에 접어들면서 해 수면이 오늘날보다 최대 90미터까지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유라시아 대륙과 가까이 있는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와 필리 핀, 뉴기니 등의 섬은 물론, 호주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육지로 이 어졌다. 그 덕분에 인류는 유라시아 각지는 물론, 오늘날에는 바다 로 분리된 다른 대륙과 섬들에까지 이주할 수 있었다.
- 6만~4만여 년 전에는 빙하기와 더불어 서남아시아가 건조한 불모지로 변했다. 인류는 새로운 삶터를 찾아야 했다. 사하라사막 에 가로막힌 옛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인류는 북쪽과 동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유럽에는 습윤한 계절풍이 불었다. 북유럽은 빙하에 덮여 있었고 중부 유럽에도 척 박한 툰드라가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남유럽과 동유럽의 넓은 평 야에는 스텝뿐만 아니라 비교적 비옥한 초원과 삼림이 펼쳐져 있 었다. 이러한 환경은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며 지내기에 알 맞았다. 남유럽과 동유럽의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인류는 불과 도구 그리고 털가죽 옷의 힘을 빌려 중부 유럽의 툰드라까지 진출했다.
- 한편 인류가 이주하기 수만~수십만 년 전부터 유럽에는 네안 데르탈인, 아시아 각지에는 자바원인과 베이징원인 같은 호모에 렉투스의 분파들이 살고 있었다. 호모에렉투스는 현생인류와 네 안데르탈인의 직계 조상 격인 고인류이고,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의 사촌격에 해당하는 고인류이다. 이들은 인류가 유럽과 아 시아에 이주한 뒤에도 2~3만 년 이상 인류와 공존했다. 네안데르 탈인과 호모에렉투스는 현생인류와 마찬가지로 불과 도구를 사용 했고, 문화생활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호모에렉투스와 네안데르 탈인은 2~3만 년쯤 전에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들 이 왜 멸종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과적으로 호모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패한 셈이다
- 인류는 동남아시아에서 동쪽과 북쪽으로 계속 이주를 하다가 1만 5,000년쯤 전에 드디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발을 들였다. 아직 빙하기였지만, 전성기를 지나 끝물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빙하기가 절정을 이루었던 1만 8,000년 전이라면 인류는 베링해협 근처
까지 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빙하기의 절정기가 지나 고 기후가 조금 온난해지면서 인류가 유라시아의 북동쪽 끝인 축 치반도 일대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빙하기의 끝물에 이르러 해수 면이 조금씩 상승했지만, 아직은 빙하기였기에 베링해협은 여전 히 땅으로 이어져 있었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차하는 절묘한 타 이밍에 축치반도까지 도달한 인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베링해 협을 건넜다.
베링해협 너머에는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펼쳐져 있었고, 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써 인 류는 빙하기의 기후변화 덕분에 지구 전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 다. 10만 년 가까이 아프리카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빙하 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난 둘리처럼, 빙하를 타고 전 세계로 뻗어 나 갈 수 있었던 셈이다.

- 지금으로부터 1만 2,000여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다. 지표면의 3분의 1을 뒤덮었던 빙하가 녹기 시작했고, 지구는 수천 년 에 걸쳐 온난한 기후로 변했다. 이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유라시아와 이어졌던 호주, 아메리카는 별개의 대륙이 되었고, 영 국, 일본, 뉴기니, 인도네시아 등은 섬이 되었다. 빙하기가 끝나면 서 지구는 오늘날의 지형도에 나타난 모습과 닮은 땅과 바다를 갖 추었다.
따듯해진 홀로세의 지구에서, 인류는 야생 식물과 동물을 작물 화·가축화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땅의 모습과 환경이 바뀐 덕분에, 인류는 거대하고 체계화된 집단을 이루며 살 아갈 힘을 얻었다. 식량 생산 능력이 발달할수록 인간 집단은 더 한층 규모가 커지고 체계화·전문화되었다. 기후변화가 불러온 전 지구에 걸친 환경 변화는 문명이 태동할 수 있는 지리적 밑그림을 그려주었다.
- 문명의 탄생과 발전이 기후의 축복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달리 말하면 기후가 변함에 따라 문명이 쇠퇴할 수도 있음을 의미 한다. 실제로 한때 번성했던 문명이 언제부터인가 몰락하거나 자 취를 감춘 까닭은 기후변화와 깊이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다.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기후가 문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대표 적인 사례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지역이며, 선구적인 고대 문명인 메 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메소포타 미아는 '비옥한 초승달과는 거리가 멀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 스강의 강물을 이용한 관개농업이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 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곳에 분포한 사막은 이곳이 정말 인류최고의 농경과 문명을 잉태했던 땅인가를 의심케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강수량이 적었지만, 문명의 탄생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다. 밀, 보리 등 작물화할 만한 야생식물이 자 생했고, 광물자원도 풍부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은 대규모 관개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수로를 통한 교역로 기능도 했다. 그 덕분 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일찍부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관개농업은 토양에 염분이 쌓이는 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암석과 토양에 미세하게 존재하는 염분이 관개수로의 물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메소포타미아는 강수 량이 적었기 때문에 토양에 축적된 염분이 빗물에 씻겨 가기를 기 대하기도 어려웠다. 하천이 흘러넘쳐야 토양의 염분을 제거해줄 수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체계적인 치수 사업을 시행 해왔기 때문이다. 기원전 2,400년 무렵부터 염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재난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관개농업이 계속될수록 염해도 악화됐고,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농업 생산성을 낮추고 사막화를 불러왔다. 이에 따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라는 위치를 결국 잃어버렸다.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로마, 사산조페르시아, 이슬람 왕 조 등의 영지로 전락했다. 서구 문명의 중심지는 기후 조건이 더 나았던 지중해 연안, 아나톨리아반도, 페르시아 등지로 옮겨 갔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관개농업을 통해 강수량이 적은 기후를 극복 하고 고대 문명을 꽃피웠지만, 부족한 강수량은 관개농업이 불러 온 염해를 악화하여 결국 문명을 쇠락하게 만든 것이다.

- 에쿠우스 페루스가 뛰놀던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스텝은 비록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기후나 지형은 비슷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식물은 기후나 환경이 크게 달라지면 살아남 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위야 어찌 되었든 유라시아 스텝의 인 류는 북아메리카의 동족과 달리 에쿠우스 페루스를 가축으로 삼 았다. 그리고 이 작은 차이는 말이라는 가축을 가진 유라시아 대 륙과 그렇지 못한 아메리카 대륙 간의 문명사적·인문지리적 차이 로 이어졌다.
인류가 처음에는 다른 가축과 마찬가지로 식량을 얻기 위해 말을 길들였으리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기원전 2,500~2,000년 무렵에 메소포타미아와 유라시아의 스텝 지대에서 마차가 발명되면서 말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말은 다른 가축들과 차별화된 빠 른 속도와 지구력을 갖춰 독보적인 군사적 가치를 지녔다. 즉, 운 송 수단이자 전략물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물론 소나 당나귀도 사람을 태우거나 수레를 끌 수는 있지만, 말보다 느리고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아 교통수단이나 군용으로 활용하기에는 한 계가 있었다. 낙타는 말의 장점을 갖고 있지만, 다양한 기후와 환 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보병을 압도하는 기동력과 돌파 력을 갖춘 군용 마차, 즉 전차는 머지않아 전장을 지배했고, 전차의 보유 대수는 곧 그 나라의 국력, 군사력과 동일시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즈음부터 전차는 서서히 기병으로 변모해갔다. 지속적인 품종개량의 결과 말의 신체 구조가 사람을 등에 태운 채 질주하는 데 점점 적합해졌기 때문이다. 전차는 제작과 유지에 많 은 노력과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급격한 방향 전환이 힘들고 평 지가 아닌 지형에서는 운용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기병은 전차보 다양성과 유지가 쉬울 뿐만 아니라 구릉지 등에서도 운용할 수 있고 방향 전환이 쉬우며 무거운 차체를 끌 필요가 없어서 속도도 더 빨랐다.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창검을 휘 두르는 기병은 전차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적군을 격파할 수 있었 다. 기원전 6~7세기 무렵에서 늦어도 기원 전후에 이르러 기병은 유라시아 문명 대부분에서 전차를 대체했다.

- 미노스문명은 해상무역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선진 적인 문명을 받아들였다. 북쪽에 인접한 키클라데스문명과도 교 류하며 문물을 받아들였다. 관개수로를 비롯한 수준 높은 농업 기 술을 통해 크레타섬 각지를 개간했고,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도자기와 청동기도 만들었다. 선형문자 A라는 독자적인 문자 체 계도 개발했다. 나아가 강대한 해양 문명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 인 우수한 선박과 함선도 건조했고, 이를 바탕으로 석고, 상아, 금 속 등을 수입하고 세련된 도자기, 직물, 금속 공예품 등과 품질 좋 은 올리브유를 지중해 각지에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그 덕분에 미노스문명은 계속해서 부강해졌고, 기원전 1,800년 무렵에는 당시로서는 강력한 왕권에 토대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 축했다. 미노스문명의 도읍 크노소스는 지중해 동부의 해상무역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화려하고 수준 높 은 유적과 유물은 고대 미노스문명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찬란했던 미노스문명은 기원전 1,900년 무렵부터 그리스 본토에 정착한 미케네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이 고대 미케네 문명을 이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 그토록 화려하고 찬란했던 미노스문명은 기원전 1,200년 무렵 완 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크레타섬은 그리스 본토에서 온 미케네인 에게 지배받았다. 미케네 문명은 아테네, 스파르타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문명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신화가 정 립되는 등 그리스문명의 직접적인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 스》와 《오디세이> 역시 미케네 문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즉, 미노스문명의 몰락은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에게해의 고대 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옮겨 가기 시작한 계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미노스문명은 왜 사라졌을까? 과거에는 미노스문명이 크레타섬 북쪽에 있는 산토리니섬 화산의 대규모 분화로 인해 쇠 약해진 데다, 예기치 않았던 이민족 미케네인의 침입을 버티지 못 하고 멸망했다는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이러한 논의에 대해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선 1980년대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고고학 연구 결과에 따르 면, 산토리니섬의 화산 분출은 크레타섬의 소멸보다 수 세기 이상 이른 기원전 1,600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즉, 산 토리니섬의 화산 분출 시점은 미노스문명의 몰락을 가져오기에는 너무 이르다. 사실 미노스문명이 화산 분출로 멸망했다는 과거의 견해 역시, 미노스문명이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지진을 극복해내며 1,000년이 훨씬 넘도록 지속되었음을 인정했다."
미노스문명이 몰락한 뒤 크레타섬이 미케네 문명의 영역에 포섭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근거로 미노스문명이 미케네인의 침 공으로 멸망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일례로 미노스문명의 전 성기를 상징하는 크노소스의 왕궁이 기원전 1,450년경 어떤 이유 로 인해 파괴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미케네인의 침략으로 미노스문 명이 멸망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1980~1990년대 이후 이루어진 고고학적 분석 결과, 왕궁 잔해나 시신의 상태 등 이 전쟁이나 학살 등으로 파괴 및 살해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깔끔했기 때문이다."
-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의 초니스Anastasios Tsonis 교수 등이 2010년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노스문명의 몰락은 엘니뇨 남방진동에 따른 크레타섬의 장기간에 걸친 극심한 가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초니스 교수는 지난 500년간의 유럽 강수량 데이터 를 분석한 결과,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부 지역의 강수량은 엘니 뇨 현상이 나타나면 감소하고 라니냐 현상이 나타나면 증가하는 패턴을 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크레타섬은 이러한 기후 패턴이 유별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크레타섬은 엘 니뇨로 인해 서기 1,000년부터 1,500년까지, 무려 500여 년 동안 가뭄을 겪었다. 심지어 마찬가지의 기후 패턴을 지녔고 크레타섬 과 가까운 키프로스섬에는 가뭄이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크레타섬에는 엘니뇨로 인한 극심한 가뭄이 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초니스 교수는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해서 엘니뇨 남방진동의 강도가 눈에 띄게 강해졌으며 이에 따라 기원전 1,450년부터 수 백 년에 걸친 강력한 엘니뇨가 이어졌다는 분석 결과를 도출했 다." 이 시기는 미노스문명이 전성기를 지나 쇠퇴를 거듭하다 멸 망한 시기와 일치한다. 즉, 미노스문명은 엘니뇨 남방진동의 강도 변화에 따른 유난스러울 정도로 강한 엘니뇨 현상, 그리고 엘니뇨 에 유독 취약한 크레타섬의 입지 조건 때문에 가뭄이 수 세기 동 안 이어지면서 식량과 식수 부족에 시달린 끝에 몰락을 거듭했던 것이다. 항해술과 해상무역에 탁월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강력한 해군력까지 갖추었다고 한들, 인구를 부양할 만한 물과 식량을 구 하지 못해서야 문명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 황에서 기원전 1,200년 무렵, 북쪽에서 내려온 미케네인들이 가뭄 으로 힘을 잃은 미노스문명을 대신해 크레타섬을 차지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에게해와 지중해 동부의 교역 요지라는 입지 조건 덕분에 눈부 시게 발전했던 미노스문명은, 하필이면 그 입지 조건이 엘니뇨 현상에 따른 가뭄에 특히 취약했다는 이유로 인해 결국 몰락할 운명을 맞았던 셈이다.

- 아프리카의 열대우림과 사바나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거나 인간이 통과해서 문명의 교역로로 삼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우선 열대우림은 너무 무더웠다. 적절한 강수량과 온난한 기후는 농업 생산성을 높여 로마, 한나라와 당나라, 중세 서유럽 등의 문명이 전 성기를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열대우림의 너무 높 은 기온과 과다한 강수량은 오히려 인간의 활동과 문명의 발전을 저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열대우림은 얼핏 보기에는 농사가 잘될 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강수량이 너무 많아 유기물과 무기염류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은 농사를 짓는 데 부적합했다. 물론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에도 수렵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부족들이 있지만, 이들은 이러한 환경의 제약 때문에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을 하며 체계적인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열대 사바나 역시 우기와 건기가 너무 뚜렷해서 강수량의 변동 폭이 지 나치게 큰 데다, 이로 인해 토양까지 척박해지기 때문에 농사짓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와 유라시아의 스텝은 드넓은 초원이 분포한 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문명 발달의 측면에서 보면 결정적인 차이 가 존재한다. 바로 동물이다. 에쿠우스 페루스, 즉 말의 직계 조상 을 인류에게 선사한 유라시아 스텝과 달리, 아프리카 사바나에는 인류가 길들일 만한 동물이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라. 사자나 표범, 아프리카코끼리, 기린, 하마, 악어 같은 거대하고 사납기 그지없는 동물을 인류가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까? 사바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야생동물인 얼룩말 역시, 말과 생김새만 비슷할 뿐 인 간이 길들일 만한 동물이 아니었다. 얼룩말은 생김새와는 달리 유 전적으로는 말과 거리가 제법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길들여 가축으로 삼기에는 성질이 너무 사나웠다." 물론 아프리카의 사 바나에도 여러 유목민 부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소 나 염소 등을 몰고 다닐 뿐, 유라시아의 기마유목민과 달리 말이 나 말의 역할을 할 만한 가축을 길들이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열대수렴대가 아프리카에 만든 거대한 사하라사막 과 사바나, 열대우림은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문 명 교류를 가로막고 말았다. 이 때문에 낙타를 타고 사하라사막 북부의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하던 북아프리카의 대상들과, 소와 염소를 몰고 다니며 가족과 가축을 위협하는 맹수들과 용감히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전사였던 아프리카 사바나의 유목민들은 아 프리카를 남북으로 잇는 문명 교류를 주관하지 못했다. 유라시아 및 이들 지역과 교류했던 북아프리카와는 달리, 현생인류의 발상지이며 일부 지역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식량을 생산했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고도의 문명이 뚜렷하게 발달하지 못했던 데 에는 열대수렴대가 빚어낸 아프리카 기후의 특성이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 밀림이 우거진 유카탄반도와 중앙아메리카의 경관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수천 년 전에 고대 문명이 싹틀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유카탄반도는 엄밀히 말해서 열대우림기후가 아니라 사바나기후가 나타나는 지역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는 열대수렴대는 1월에는 유카탄반도 남쪽으로 내려가고, 7월에는 북상하여 그 북단이 유카탄반도 저지대를 지나간다. 이러다 보니 유 카탄반도는 겨울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많은 비가 내리는 사바나 기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바람과 기압대의 영향, 바다나 사막 과의 거리 등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이 아프리카 사바나와는 다르기에, 아프리카의 열대기후에 속하는 땅의 무려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사바나보다 그 규모가 훨씬 작다. 사바나기후가 열대우림, 열대 계절풍 등 다른 형태의 기후와 뒤섞여 나 타나는 옛 마야 땅의 자연경관은 아프리카 사바나와는 사뭇 다르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맹그로브 같은 열대우림에서 자생하 는 식물이 자라나 언뜻 봐서는 열대우림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사바나기후 역시 고도의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 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바나와는 달리 유카탄반도의 기후와 지리 적 조건은 이곳에서 수천 년도 더 전에 고대 문명이 발달할 만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우선 유카탄반도의 강수량은 연교차가 크 지만, 아프리카 사바나만큼 극심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유카탄 반도에서는 아프리카 사바나에 비해 수목이 많이 자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야인들이 농사짓고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문명을
이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카탄반도 남부의 미라도르 분지와 페텐 분지 일대의 지형은 석회암 기반암 위에 습지가 많이 분포하 여 마야인들에게 건기에도 물을 구할 수 있는 수원을 제공했 다. 또한 토질까지 비옥하게 만들어 마야인이 고대 문명을 이룩하 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마야 땅에 인접한 카리브해는 유 카탄반도 저지대의 환경을 한결 쾌적하게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 니라, 마야인들이 배를 타고 교역을 할 수 있는 무대로도 작용했 다. 게다가 마야인이 주식으로 삼았던 옥수수는 유카탄반도라는 땅이 마야인에게 내린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쌀, 밀, 보리 등 다른 곡물에 비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랐기 때문이다.
- 마야인은 유카탄반도의 저지대를 개간해서 얻은 농지에 옥수 수 그리고 호박, 콩 등의 작물을 심으며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은 맛과 영양소,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식량작물의 품종개량에 힘썼고, 강수량의 연교차가 큰 환경 속에서 농업용수와 생활용수 를 저장할 저수지 등과 같은 시설을 건설하는 일에도 노력을 많 이 기울였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지만 유독 지력 소모 가 큰 옥수수를 안정적으로 재배하기 위해서 콩, 호박 등 다른 작 물과 섞어 재배하거나 경작지를 주기적으로 휴경하는 등의 농법 도 개발했다.25 농사를 잘 짓기 위해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 하여 수준 높은 천문학에 기반한 정교한 역법도 발달시켰다. 한때 2012년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담고 있다며 화제가 되었던 마야인의 역법은 사실 유카탄반도 저지대에서 풍년을 기원하던 고대 마야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한편 마야문명은 잉카, 아스테카와는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특 성이 있었다. 잉카, 아스테카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 과 지역을 무력으로 병합한 중앙집권적 정복 왕조 성격이 강했다. 반면 마야문명은 도시국가의 연합체 형태로 발달했으며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야문명은 농업 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인구가 늘어났을 뿐 만 아니라 사회구조 역시 복잡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진화해갔다. 마야문명의 천문학과 역법은 마야인 고유의 우주관과 세계관에 토대한 고유의 종교를 배태했다. 농업과 치수를 위한 기술은 자연히 건축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마야인은 체계적인 문 자를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한편으로 비교적 수심이 얕고 잔 잔하며 섬이 많은 카리브해에도 눈을 돌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 리브해를 통한 해상무역은 마야 사회에서 농업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유카탄반도 남부 저지대에 건설된 마야의 도시 엘 미라도르EL Mirador 는 선고전기 마야문명 의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엘 미라도르는 전성기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다. 전근대 시대의 도시는 오늘날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고,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구 10만~20만 명 정도만 되어도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였음을 고려하면, 엘미라도르가 어느 정도로 번 영한 도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는 높이 70미터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인 라 단타La Danta "를 비롯한 다수의 석조 유적과 유물이 지금도 전해져 온다.
기원후 300년을 전후하여 마야문명은 선고전기에서 고전기로 접어든다. 이는 마야문명이 부족사회 또는 초기 도시국가 수준을 넘어 세련된 문명을 꽃피우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티 칼(오늘날 과테말라 소재), 칼라크물(오늘날 멕시코 남동부 캄페체주 소재) 등은 인구 1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고, 이들 지역에 세워진 거대한 석조 피라미드는 오늘날에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 다. 6세기 중반에는 유카탄반도 북동부 해안 지대에 무역항 툴룸 이 세워졌다. 오늘날 마야문명을 대표하는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툴룸은 마야문명이 카리브해에서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을 벌였음 을 보여주는 장소다. 8세기 초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이한 고전기 마야문명의 총인구는 300만~1,3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 가뭄은 왜 일어났을까? 마야문명 연구의 세계적인 권 위자 한센 Richard D. Hansen 은 고전기, 아울러 선고전기 마야문명을 몰락하게 한 가뭄을 해당 시기에 이루어진 기후의 한랭화가 강수 량을 감소시킨 결과로 해석한다." 한편 스위스의 게랄트 하우크 Gerald H. Haug 교수 등의 연구는, 고전기 마야문명의 몰락을 불러온 극심한 가뭄은 마야문명을 번성케 한 여름철 열대수렴대의 위치가 바뀌면서 유카탄반도 남부 저지대의 강수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극 심한 가뭄이 고전기 마야문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논의는 학계 에서 인정받고 있다. 2~3세기의 가뭄이 마야문명을 주도하는 도시의 위치와 문명의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면, 8~10세기의 가뭄은 마 야문명의 공간적 배경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이다.
- 고전기 마야문명의 몰락이 마야문명의 완전한 소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야인들은 10~11세기 무렵부터 유카탄반도 남부 와 중앙아메리카 일대 대신, 유카탄반도 북부로 옮겨 새롭게 문명 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를 후고전기라 부른다.
후고전기 마야문명을 주도하기 시작한 도시는 바로 치첸이트 사였다. 치첸이트사는 카리브해의 해상무역을 통해 대두한 도시 였다. 치첸이트사의 유적, 그중에서도 쿠쿨칸의 신전으로 쓰인 피 라미드 엘 카스티요 Castillo 는 마야문명건축과 예술의 정수이다. 고전기에 건설된 툴룸 역시, 후고전기에 접어들면서 치첸이트사 와 더불어 전성기를 맞았다.
- 치첸이트사의 전성기는 13세기에 막을 내렸다. 서쪽에 있는 마 야판 Mayapan"의 침공을 받아 도시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후고전기 마야에서 내륙의 농업 세력과 카리브해를 무대로 한 해 상세력 간의 경쟁에 따른 결과로 보기도 한다." 마야문명의 마지 막 패자로 등극한 마야판 역시,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극심한 가뭄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세기 에스파냐인들이 유카탄반도와 중앙아메리카에 침입했 을 때, 마야문명은 이미 문명으로서의 생명이 끝나 있었다. 한때 마야문명이 번성했던 이곳은 에스파냐인들에게는 그저 목초지로 쓸 만한 땅 정도로나 여겨졌다. 이미 문명이라 부르기도 힘들 정 도로 몰락한 데다 잉카, 아스테카와 달리 금이나 은, 주석 같은 가 치 있는 자원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마야인은 그 맥을 현대까 지 이어오며 중앙아메리카에 1,00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몰락한 마야문명은 잊힌 채 3,000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 을 보내다 19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인 발굴과 연구가 이루어지며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금 드러낼 수 있었다.

- 한나라는 어떻게 중국을 통일된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간적 기틀까지 다질 수 있었을까? 이는 한 건국 직후인 기원전 200년 무렵부터 중국 전역의 기후가 온난습 윤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한나라는 수백 년간 이어진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진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초한 전쟁의 혼란과 분열을 딛고 건국된 왕조였다. 게다가 한고조 유방이 기원전 200년 흉노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흉노를 상국으로 섬기며 막 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사기》·《한서》·《후한서》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한나라가 건국될 무렵부터 중국 땅의 기후가 온난습윤해지면서 농업 생산성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 덕분 에 한나라는 길게 보면 수백 년에 걸친 중국 땅의 분열과 혼란 그 리고 상국 흉노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한다는 부담을 극복하고 경제력과 국력을 점점 강화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한나라의 공물로 인해 흉노의 지배층은 물론 평민층까도 한나라의 문물에 심취하면서 흉노 제국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한나라에 종속되어갔다." 이렇듯 한나라가 건국될 무렵 이루어진 중국의 기후변화는 무제 재위기에 이르러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 하고 대외 팽창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었다.
흉노의 군사들은 한나라 군대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 패퇴를 거 듭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원전 100년을 전후해 흉노는 근 거지인 몽골의 스텝 지대에 극심한 한파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국 력과 군사력에 치명타를 입었다." 흉노 제국은 결국 붕괴했고, 수 많은 흉노족이 고향을 버린 채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머나먼 이주 에 나서야 했다. 물론 만리장성 북쪽의 흉노족은 5세기까지 그 명 맥을 이어갔지만, 흉노족의 제국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두 번 다 시 수립되지 못했다.

- 한랭화가 초래한 삼국지의 시대와 난세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 전역을 헤집었다. 한 조정은 황건적의 난을 간신히 진압했지만, 이 때문에 권위를 실추하며 동 탁, 조조 등의 권신들에 휘둘린 끝에 220년 멸망했다. 《삼국지연의》의 주역이기도 한 위 오梟. 촉한의 세 나라로 분열된 중 국 땅은 280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晉 왕조에 의해 통일되나 싶었지만, 진 역시 316년 내분과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이기지 못한 채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 땅에서는 581년 통일왕조가 성립할 때까지 3세기가 넘는 분열이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땅의 혼란과 분열은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조짐 을 보이다 2세기 중후반부터 극심해진 중국 땅의 한랭건조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소빙하기라 불릴 정도로 춥고 건조한 기후가 이어지면서 기원전 50년 전후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한 나라의 농업 생산력"은 치명타를 맞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염병까지 창궐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수준 높은 사회보장제도를 갖추고 있었지만, 농업경제의 파 탄과 이에 따른 한 조정의 재정난은 사회보장제도를 마비시켰다. 농촌 공동체는 와해했고, 한나라의 기반이었던 농민층은 농토를 잃고 유랑민, 심지어는 산적으로까지 전락했다. 끝날 줄 모르는 흉 년과 역병으로 농촌 공동체와 사회보장제도가 파탄 난 한나라의 백성들에게 식량과 의술을 베풀며 희망을 준 인물은 도교의 분파 인 태평도의 지도자 장각이었다." 태평도는 순식간에 중국 전역으로 퍼져 수십에서 수백만 명이 넘는 신도를 모았고, 새로운 세상을 부르짖던 그들은 어느 순간 황건적으로 변모했다. 기후 변화로 인한 농촌 경제의 파탄이 황건적의 난으로 이어지며 연달아 치명타를 맞은 한 왕조는 결국 220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한랭건조한 기후가 계속되어 농업 생 생산성은 계속 낮아졌다. 이는 중국 땅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 지 고작 36년 만에 분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진 왕조가 통일 제 국의 기틀을 다지기도 전에 내분에 빠진 틈을 타, 한족이 오호 라 불렀던 북방의 유목민 집단(흉노, 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들이 침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나마 덜 춥고 건조한 땅을 찾아 진
나라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침범했고, 양쯔강 이북 영토를 빼앗아 수많은 나라를 세웠다. 이후 중국 대륙의 북부에서는 유목민 계통 의 왕조가 남부에서는 한족 계통의 왕조가 난립했고, 얼마 버티지 못한 채 다른 왕조에게 찬탈당하는 일이 이어졌다. 300년이 넘도 록 제대로 된 통일 왕조가 들어서지 못하고 오랫동안 나라가 안정 적으로 이어지지도 못했던 이 난세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신출귀몰한 능력을 갖춘 여러 영웅호걸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이어진 난세는 기후변화 로 인한 재난의 영향이 컸다.
- 540년 이후 중국에는 수백 년에 걸친 한랭기가 끝나고 온난습 윤기후가 다시금 찾아왔다. 이러한 기후변화로 중국 땅의 농업 생 산성과 인구 부양력은 증가했고, 6세기 후반에는 한나라가 전성기 를 구가하던 시절에 비견될 정도로까지 회복되었다." 즉, 혼란기 를 벗어나 재통일이 이루어질 환경적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수 문제는 개인 역량이 출중한 명군이었지만, 그가 중국을 재통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기후의 도움을 받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 수나라는 통일을 이룩한 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619년 멸망했 다. 2대 황제 양제가 감행한 무리한 고구려 원정의 실패, 과도 한 토목 공사와 사치 등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수나라 멸망 직후 중국은 분열하는 대신 당왕조에 의해 다시금 통일되었다. 7세 기에도 계속된 온난습윤기후 덕분에 중국의 농업 생산성이 향상 하면서 인구 부양력과 경제력 또한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1세기가 넘도록 흉노를 상국으로 섬겨야 했던 한나 라와 달리, 당나라는 건국 직후 바로 세계적인 제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 제국 동돌궐은 전성기 흉노 못지않은 강적이었지만, 당나라 건국 직후인 627년에 이르러 그들의 근거 지인 몽골의 스텝 지대를 강타한 주드 dzud에 의해 치명타를 입었다. 주드는 몽골에서 평균 10년 주기로 발생하는 한파인데, 당시 일어난 주드의 피해가 특히 심각했다. 당나라 사신 정원숙은 주드에 피해를 받은 동돌궐이 3년 안에 멸망할 거라고 조정에 보 고할 정도였다. 당 태종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돌궐을 격파하 여 멸망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 및 발해와 선린관계를 맺은 뒤, 중 앙아시아에까지 진출해 동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웠다. 세계 제국 당나라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제를 도입하는 등 외 국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주변국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동서 문화를 융합한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는 가운데 동아시 아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중국문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문화를 재창조했다. 서라벌, 하슬라와 같은 한반도 고유어 지명이 경주 ■, 강릉 등의 한자식 지명으로 바뀌기 시작한 때도 바로 통 일신라와 당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했던 남북국시대였다.
당나라 역시 8세기 중후반 이후 한랭화에 따른 농업 생산성 저 하와 연이은 반란으로 몰락하여 10세기에 결국 멸망했다. 하지만 한대에 기틀이 다져지고 수. 당대에 공고화된 통일 중국의 땅은 주변 지역과의 문명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라는 문화권의 지도를 그려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 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는, 한나라와 수당이 통일 제국을 형성하고 북방의 유목민마저 격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기후변화에 서도 찾을 수 있다.


- 고대 서구 세계의 수많은 강국 중에서 로마가 유럽 문명권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앞선 그리스 문 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타 문화를 받아들이고 배울 줄 알았던 로마인의 유연함, 군단병으로 대표되는 로마군의 우수성,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준 높은 로마의 법률과 건축술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의 팽창과 번영은 한나라가 그랬듯 기후변화, 정확히는 기후 온난화에 힘입은 부분도 크다. 즉, 로마 는 온난습윤기후 덕분에 국력을 키울 수 있었고, 이는 로마가 수많은 외부의 강적을 상대로 연승하며 유럽 문명의 토대를 다진 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후한과 마찬가지로, 로마 역시 기후의 한랭화 로 점점 쇠퇴하며 결국 동서로 분열하고 말았다. 서로마는 기후변 화의 직격탄을 맞아 유럽의 지정학적 질서의 격동을 이겨낼 힘을 잃은 채 멸망했고, 이후 중국과 달리 통일 왕조가 두 번 다시 들어 서지 못한 서유럽은 수많은 국가와 민족집단의 영역으로 계속 분 열되었다. 요컨대 로마와 한나라의 흥망성쇠는 기후변화라는 지 구환경의 거대한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 중세 유럽을 흔히들 '암흑시대'라 부른다.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치 면서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과 문인, 예술가들이 중세를 고대 그리 스·로마의 찬란한 문화·예술과 수준 높은 학문적 업적이 단절되 고, 미신과 비이성이 판치던 암흑시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러 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며, 심지어 2000년 대 이후 발표된 학술논문 중에도 서양 중세사를 암흑시대로 간주 한 사례가 적지 않다.
실상은 달랐다. 7~8세기 이후 유럽에는 온난기가 무려 500년에 걸쳐 계속되면서 봉건혁명이라 불리는 경제와 사회의 대대적 인 확장이 이어졌다. 인구와 경제력이 계속해서 커진 유럽 세계는 십자군 전쟁 등을 일으키며 외부로 팽창했고, 이 과정에서 제지술, 화약 등의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더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1,000년을 이어간 서양의 중세는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서구 세계가 고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 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그리고 중세의 영광과 종언은 기후변화와 맥을 같이했다.
- 카롤루스 르네상스 무렵에 본격화한 유 럽의 온난기는 13세기까지 무려 500년에 걸쳐 이어졌다. 이 시기 유럽의 여름철 평균 기온은 20세기 평균치보다 0.7~1.4도나 높 았고 강수량도 적절했기에, 농업 생산성이 많이 늘어났고 심지어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힘들 영국산 포도주가 유럽 전역에 널리 퍼 졌다." 그 덕분에 경제력과 인구 부양력이 증가한 유럽에서는 인 구가 늘어나고 농촌이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도시도 자치권 을 누리며 발달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유럽의 군주와 제 후들은 북쪽에서 침입해 온 노르만족에게 영지를 주어 그들을 회유하고 포섭할 수 있었다.
- 서유럽은 분열한 프랑크왕국이 남긴 봉건제의 유산을 발판으로 질서를 구축하며 성장을 거듭해갔다. 삼분된 프랑크는 각기 프랑 스, 이탈리아, 독일의 토대를 이루었다. 영국, 폴란드, 보헤미아 그 리고 마자르족의 땅(헝가리)과 노르만족의 정착지도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중세 유럽의 영역에 통합되었다. 권력이 봉건 영주들에 게 분산되어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반란의 위험이 줄면서 역설적으로 사회는 안정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유럽에서는 삼포 식 농업, 바퀴 달린 큰 쟁기 등 농업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량이 크 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인구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수도원 과 성당에서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그리스·로마 의 학문적 유산은 물론 이슬람 세계로부터 수입된 문헌까지 연구 해 얻은 철학과 자연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합 리적으로 재해석하고 재조명하는 한편, 의학 연구를 통해 환자 치료와 빈민 구제에도 힘썼다."
- 11세기에 이르러 봉건제는 서유럽 전역에 완전히 정착했다. 장 자 상속제까지 확립되면서 서유럽의 봉건사회는 정치적으로 안정 되었고, 계속되는 온난기 덕분에 그 안정 속에서 더욱 번영을 구 가할 수 있었다. 이를 '봉건혁명'이라 부른다. 봉건혁명으로 인해 축적된 에너지는 중세 서유럽의 팽창으로 이어졌다. 서유럽은 발 트해 연안과 북유럽 등으로 진출하여 이들 영역을 유럽 문화권으 로 포섭했다. 십자군 전쟁 역시 성지 예루살렘의 수복이라는 명분 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유럽인의 세계관을 크게 넓히며 그들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즉, 유럽의 중세는 초반의 혼란기를 제외하면 '암흑시대'는커녕 봉건혁명을 통해 한 걸음 더 도약해갔다.
- 때마침 유럽의 온난기는 끝날 조짐이 보였다. 14세기 초반부터 이상기후와 그에 따른 기근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1,400~1,420년에 걸쳐 그전까지 비교적 안정적이던 대서양의 대기 순환이 불안정해지고 이로 인해 북대서양 진동까지 이전보다 급격 하게 변동했다." 이에 따라 유럽에는 가뭄, 한파, 폭우, 폭풍 등의 이 상기후 현상이 자주 일어나더니 기온이 예전이 비해 눈에 띄게 낮 아졌다. 이후 500년 가까이 이어질 유럽 소빙기의 서막이었다."
이상기후와 소빙기에 직면한 유럽은 어떤 상황에 내몰렸을까? 흉작이 이어지며 경제적·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500년 동 안 지속된 온난기의 영향으로 풍요를 누리며 인구가 최대로 늘어 난 상황이었기에 그 피해는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유럽 인이 농사를 망쳐 굶주림에 시달렸고, 농토를 버린 채 유랑민이나 도적으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겨났다. 심지어 가축의 분뇨와 썩은 포도주로 가짜 식량을 만드는 사기꾼이나 무덤을 파헤쳐 값나가 는 부장품을 훔쳐 가는 도굴꾼마저 횡행했다."
- 카롤루스대제는 500년 동안 이어질 중세 온난화의 영향으로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이룩했고, 그 덕분에 유럽은 로마 말기부터 중세 초기까지 이어진 혼란과 분열을 딛고 유럽 문화권의 토대를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 후 온난화가 끝나면서 일어난 흑사병 의 범유행은 전례 없는 규모의 대재난과 더불어 서양 중세의 종말 을 불러왔다. 이어진 르네상스와 근대 역시 소빙기의 시대였다. 세 련되고 고아한 르네상스, 바로크 예술 그리고 과학과 학문의 급속 한 발달이 이루어진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의 이면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소빙기가 불러온 가난과 혼란, 분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 갖은 고생을 다 해가며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의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결코 녹록한 여건은 아니었다. 금나라는 여전히 중원과 만주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고, 실크로드 서쪽에 는 호라즘이라는 이슬람계 정복 왕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동아시아에서는 13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태 양의 활동 약화로 기온이 낮아졌다. 이는 금나라에는 중대한 타격 을 주었지만, 몽골에는 오히려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기온이 낮아 지며 몽골 스텝에는 유사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 하버드대학교의 닐 페더슨 연구원 등은 시베리아잣나무 나이테를 분석하여 몽골의 기후 변화사를 연구했는데, 이 무렵의 몽골은 스 텝 지대에 범람이 일어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린 우기 pluvial" 였다 고 표현했다. 비가 많이 내린 덕분에 척박한 몽골의 스텝 지대에 는 유례없을 정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고, 심지어 고비사막 등 의 오아시스까지 초원으로 바뀌었다.
몽골 스텝의 초원이 몰라볼 정도로 무성해지면서 몽골인의 생명줄이자 비장의 무기였던 말은 눈에 띄게 튼튼해졌을 뿐만 아니라 개체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 덕분에 몽골의 인구 또한 증가했다. 갓 통일을 이룬 몽골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갔다. 강인한 군마가 예전보다 훨씬 풍족하게 공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건한 장정들의 수까지 늘어나면서 원래부터 기마술과 기병 전투의 달인이었던 몽골인들은 무적의 기마 군단으로 거듭 났다.
-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력과 군사력까지 비약적으로 상승한 몽골은 몽골 땅을 통일한 데 그치지 않고 밖으로 팽창해나가기 시작했 다. 몽골의 힘이 뻗어 나간 방향은 어디였을까? 크게 두 방향이었 다. 한쪽은 몽골을 잔혹하게 핍박했던 금나라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른 한쪽은 유사 이래 유라시아 스텝의 기마유목민이 활동하는 무대였던 실크로드 무역로였다. 때마침 이 두 지역은 중대한 취약 점을 안고 있었다. 금나라는 한족의 왕조 송을 공격해 중국 북 부를 정복했지만, 송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한 채 중국 남부에 서 재건한 송 왕조인 남송과 장기간 대치하며 국력을 소모하 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정책과 같은 금나라의 강압적인 지배는 피 지배 민족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그런 마당에 한랭화로 인해 농업 생산력까지 악화되면서 금나라는 말 그대로 이중고, 삼중고의 위 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실크로드 서쪽에서 새로 대두한 호라즘 제국은 겉으로는 대제국이었지만, 칭기즈칸의 지도력 아래 하나로 결속한 몽골제국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확장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해 내부 결속이 취약해진 상태였다.
1211년 금나라를 처음 침공한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핍박받던 거란족 등의 피지배민을 포섭해가며 1215년 금나라의 수도인 중 도中都(오늘날의 베이징)를 점령했다. 금나라는 1234년까지 항전을 이어갔지만, 이미 몽골과 금나라의 역학관계는 뒤집혀 있었다. 몽 골은 유라시아 북동부의 강자로 떠올랐다.
그런 와중에 1218년, 호라즘 제국과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러 간 몽골제국의 사신단이 그들의 재물을 노린 호라즘의 지방 영주 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호라즘의 술탄 무함마드 2세 Muhammad II는 이에 항의하기 위해 파견된 몽골제국의 또 다른 사신단마저 모욕을 준 뒤 살해했다. 칭기즈칸은 결국 금나라 정벌을 잠시 미룬 뒤 정예 병력을 이끌고 호라즘 제국을 침공한다. 무함 마드 2세로부터 당한 모욕도 모욕이었지만, 호라즘에 실크로드의 무역로를 빼앗긴다면 몽골제국의 운명에는 큰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부 결속력이 취약한 데다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지위를 노리 고 서쪽의 아라비아 방면에 전력을 집중했던 호라즘 제국은 동쪽 에서 쳐들어온 몽골제국군의 전광석화 같은 기습과 기동전에 제 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연패를 거듭했다. 1220년 사실상 와해한 호라즘은 1231년 완전히 멸망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에는 소빙기가 시작되었다. 소빙기의 연평균 기온 감소의 지구 평균치는 0.3~0.4도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동아시아 소빙기는 평균 기온이 무려 1도 가까이 떨어질 정도로 심했다. 게다가 1580~1660년까지는 장마전선을 형성하는 원동력인 동아시아 하 계 계절풍이 약해지면서 장맛비가 줄어드는 바람에 중국 중북부, 한반도, 몽골 등지에 극심한 가뭄까지 들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대규모 전쟁에 이어 기근까지 들이닥쳐 식량이 부족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곡물 교역 규모를 크게 확대해야 했다.
그런데 랴오둥반도와 압록강 유역 등지는 중국 북부나 몽골 등지에 비해 소빙기의 피해를 비교적 덜 입었다. 바다에 인접한 덕 분에 내륙 지대인 중국 중북부나 몽골보다 기온 하락 폭이 비교적 작았고, 가뭄 또한 내륙 지대만큼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온 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그 정도가 중국 중북부, 몽골 스텝 등지에 비해 미미했고, 소빙기가 불러온 강수량의 감소는 오히려 이들 지 역의 골칫거리였던 장마철 홍수 피해를 줄여주었다. 그 덕분에 명 나라의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황허강 유역의 농경지 그리고 몽 골의 스텝 지대가 한랭화로 초토화되었던 것과는 달리, 랴오둥반 도와 압록강 유역은 오히려 다양한 곡물을 재배하며 번창할 수 있 었다"
- 이 무렵 랴오둥반도 동단에서 압록강 북안 일대에 이르는 지역 은 명나라가 여진족을 간접 지배하기 위해 세운 건주위에 속 했다. 소빙기가 흉작과 기근 대신 오히려 풍작을 가져다준 땅에 살았던 건주여진은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이은 소빙기로 쇠퇴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인구도 늘어나 큰 세력을 키웠다. 건주여진의 지도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愛新覺羅努爾는 소빙 기가 불러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건주여진에 대한 통제가 임진왜란, 그리고 소빙기로 인한 국력 저 하 등으로 인해 느슨해진 틈을 타, 만주 중부의 쑹화강松江이흐 르는 오늘날 헤이룽장성 일대에 살던 해서여진西"그리고 그 북쪽 너머에 살던 야인여진 통합한 뒤, 1616년 금나라 "을의 후예라는 뜻을 가진 후금을 세웠다.
만주를 통일한 누르하치는 명나라 정벌에 나섰다. 1619년에 일 어난 사르후(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전투에서 후금군은 명군을 섬멸한 뒤 랴오둥반도를 장악했다. 사르후 전투는 동아시 아의 세력 균형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명나라의 도읍 순천부順天府 (오늘날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500~600킬로미터 떨어진 랴오둥반 도는 명나라의 대여진 전략 및 수도 방어에 있어 중추와도 같은 땅이었다. 명나라가 건국 초부터 요동도사遼東都, 요동총병관遼東 摠 등의 기구와 직책을 설치한 까닭도 랴오둥반도의 지정학적 이고 군사지리적인 중요성이 막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랴오둥 반도는 동아시아에서 17세기 소빙기에 쇠퇴하는 대신 발전의 전 기를 맞은 몇 안 되는 땅이었다. 즉, 후금은 사르후 전투를 통해 명 나라를 상대로 전략적 · 전술적 우위는 물론 경제적 우위에 있는 요지 중의 요지를 확보했던 셈이다.

- 현재위기였던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 辛亥 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보다도 더 참혹했다고 회자되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기근인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1670년에 는 봄부터 초가을까지 우박과 서리가 내렸고, 봄에는 극심한 가뭄 이 닥치더니 여름에는 너무 많은 비가 왔고 초가을인 음력 7월에 는 눈까지 내렸다." 대흉작은 당연한 결과였고, 이상기후 속에서 전염병까지 번져갔다. 이에 조정은 도성에 질병 치료소인 확인서를 설치해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고 끼니를 거르는 백성에게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를 세우는 등 대기근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농사를 망친 1670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는 춘궁기의 고난을 줄이기 위해 곡물을 빌려주고 추수할 때 갚도 록 하는 환곡또한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의 규모는 이러한 노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활인서가 되레 전염병 유행의 진 원지가 되는가 하면, 농사짓는 데 필수적인 소까지 전염병에 걸려 대량으로 폐사하는 바람에 조선의 농업 생산력은 더욱 심하게 떨어졌다. 1670년 겨울을 지나면서 조선은 글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양반과 왕족마저 길거리에 나와서 구걸을 할 정도로 상황 이 악화되고, 급기야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된 채 부패해가는, 전쟁통에서도 보기 힘든 극심한 참상이 일어났다. 조선군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떼강도 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굶주림을 못 이긴 어느 여성 노비 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직후 숨을 거두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 질 정도였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조선 인구의 최대 14퍼센트에 달하는 100만~140만 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1671년 말부터 이상저온 현상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면서 조선은 참혹했던 대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소빙기의 대기근으로 무너진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그 뒤로도 체제를 유지했다. 청나라와 일본이 대기근 속에서 내부 체제 정비 에 주력한 덕에 조선은 외세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았다.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조선 조정과 관리들의 대책 마련과 노력 역시 조선 의 사회와 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경신대기근은 이후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기근 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이 바닥난 재정을 충 당하기 위해 대량의 화폐를 주조했고, 그로 인해 현물과 물물교환 의 비중이 컸던 조선의 경제는 화폐경제로 변모해갔다." 특히 복 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던 노비 계층에서 막대한 사망자가 나오 고, 화폐경제의 발달 덕분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상민 계층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엄격한 신분제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한랭해진 기 후로 인해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함경도 산삼이 대량으로 말라 죽 어 인삼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한편으로 방한복의 필요성도 늘어 나면서 모피와 산삼을 구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을 넘어 간도와 만주에 진출했다.
경신대기근을 비롯한 17세기 소빙기의 기근은 당장 조선을 멸 망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중세 말 유럽을 뒤흔든 흑사병이 서양 중 세를 종식시킨 것처럼, 17세기 소빙기가 불러온 대기근은 조선을 점점 변화시키며 한반도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로 인도했다.

- 14세기 흑사병이 대유행한 이후 유럽에서도 소빙기가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기후 변동이 있었지만, 중세 말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의 기온은 확실히 낮았다. 중세에 500년에 걸친 온난기가 이어 졌다면, 중세의 끝자락부터는 소빙기라는 또 다른 500년이 펼쳐 진 셈이었다.
중세 말부터 시작된 소빙기에는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서유럽 과는 달리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지 않았다. 중세의 황혼과 더불어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의 문화와 학문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렸고, 유럽은 봉건제를 벗어나 국민국가가 지배하는 땅으로 변모해갔다.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은 인류의 삶과 문명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소빙기가 민중의 삶은 물론 국가의 재정까지도 팍팍하 게 만들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농업 생산성이 악화한 유럽에서는 식량과 자원,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그런 한편으로 수많은 유럽인은 유럽을 벗어나 더욱 살기 좋은 땅을 찾기 위해 배에 몸을 싣고 해외로, 신대륙으로 향했다. 그 결과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지도와 지정학적 질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 부농, 자영농조차 절대빈곤에 시달리며 그 고통을 '마녀'에게 풀어야 했던 소빙기 유럽의 참상은 세련된 궁정 문화와 절대왕정의 권 력을 누리던 각국의 군주와 지배층에게도 중대한 위기로 다가왔 다. 아무리 공권력을 동원해 민중을 쥐어짠들 농업 생산력 자체가 나빠진 데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마저 증가하지 않으니 세수가 줄어듦은 물론 병력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은 이러한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농업기술의 혁 신을 꾀하기도 했지만, 전근대 농업기술의 발전에는 뚜렷한 한계 가 있었다. 각국의 지도층이 소빙기의 위기에 대처한 주된 방식은 식량과 돈을 얻기 위한 장거리 해상무역 그리고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
소빙기가 닥친 유럽에서는 전쟁의 횟수가 증가하고 그 규모도 커졌다. 소빙기가 절정에 달한 17세기에는 전쟁 역시 절정에 달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30년 전쟁(1618~1648년)이 다. 신성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독일, 보헤미아의 가톨릭 세 력과 개신교 세력 사이에 일어난 이 종교전쟁은 프랑스, 에스파냐, 스웨덴,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 각국이 개입한 국제전으로 번지 며 무려 30년이 넘게 이어졌다. 유럽 각국은 겉으로야 종교적 신 념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소빙기라는 기후위기 속에서 더 넓은 땅을 확보하고 더 많은 재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컸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유럽에서는 땅과 권력을 둘러싸고 왕실과 국가 간의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 원양항해와 해상무역은 유럽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했다." 우선 신대륙과 동남아시아, 인도 등지에서 대량으로 유입된 고가의 귀금속과 향신료 덕에 경제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고, 특 히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막대한 자본이 드는 데다 위험성도 작지 않은 원 거리 해상무역을 좀 더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주 식회사, 보험 등의 금융업을 고안하고 발전시켰다. 현물이나 '생돈'에 바탕을 뒀던 경제구조가 금융 기반의 경제구조로 바뀐 것이다. 이는 유럽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구조로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금융업 덕분에 거액의 돈을 대출받고 투자하는 일이 자유로워지고 불의의 사고로 사업이 파산할 위험도 줄어들면서 유럽의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소빙기에 잦아진 전쟁은 당대 유럽의 민중에게는 비참한 현실 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유럽의 과학기술과 군사력이 다른 대륙 을 압도할 정도로 발전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전쟁이 잦아지며 우수한 무기의 도입과 군사제도·전략· 전술의 혁신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아울러 소빙기에 수립된 유럽의 절대왕정은 민중의 삶이 땅에 떨어진 끝에 결국 몰락했다. 프랑스 왕실의 계속된 전쟁과 사치스 러운 생활로 재정난이 누적되면서 극심한 빈곤에 허덕였던 프랑 스 민중의 삶은 끝도 없이 피폐해져갔다. 소빙기라는 기후 재난에 프랑스 정치사회의 부조리까지 더해지며 생겨난 심각한 식량 부 족은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을 촉발하여 부르봉왕조를 무너뜨 렸다." 이어진 19세기에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시 민혁명이 유럽 각지에서 일어나 입헌정치와 민주주의의 싹을 틔 웠다. 어찌 보면 유럽의 소빙기는 근현대 민주주의를 불러온 직접 적인 계기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중반에 이르러 유럽 열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중국, 인도 등 비유럽 세계의 전통적인 강자들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세계가 소빙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수많은 전쟁과 해상무역 활동이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촉진한 끝에 산업혁명의 불길까지 지피게 된 것이었다. 비유럽 세계의 전통 경제는 공장에 서 대량 생산된 품질 좋고 값싼 상품을 앞세운 유럽 열강의 경제에 종속되어갔고, 화승총이나 창검으로 무장한 비유럽 세계의 군대는 기관총과 철제 증기선 군함,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열강 의 군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유럽이 소빙기에서 벗어난 19세기 말~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부분은 제국주의 유럽 열강의 식민지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요약하자면, 소빙기가 부추긴 유럽의 잦은 전쟁과 유럽인의 대 대적인 해외 이주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유럽을 몰락의 길로 이끄 는 대신, 유럽인들이 전 세계로 뻗어가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오늘날 서구 중심적인 세계질서와 세 계지도는 500년간 유럽을 덮친 소빙기, 그리고 원거리 해상무역 과 대규모 해외 이주라는 유럽인의 소빙기에 대한 대처 방식에 뿌 리를 두는 측면도 적지 않다. 나아가 소빙기의 끝자락에 놓인 유 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류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 떠오르면서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미래를 뒤흔들 새로운 양상의 기후위기를 불러오는 시발점이 된다.

- 사하라사막은 왜 이렇게 계속 넓어지는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후위기가 불러온 열대 수렴대의 변화이다. 대기 중의 과다한 온실가스로 인해 기온 상승 이 자연스러운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이루어지면, 바람의 방향과 세기 그리고 바닷물을 비롯한 수분의 증발량과 증발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면서 해수와 대기의 순환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다. 그러다 보니 지구온난화가 심해질수록 해들리순환도 눈에 띄 게 변하면서 열대수렴대가 남하하게 되는 것이다. 열대수렴대가 남하하면 고온건조한 공기가 남쪽까지 뻗어가고 그로 인해 사헬 과 열대우림에도 사막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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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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