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4'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5.09.04 돈의 얼굴 1
  2. 2025.09.04 성공을 만드는 실패의 과학 1
  3. 2025.09.04 씻는다는 것의 역사
  4. 2025.09.04 컨셉언어수업
  5. 2025.09.04 어떻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6. 2025.09.04 20250904

돈의 얼굴

경제 2025. 9. 4. 07:18

- 중국 중부에 위치한 후베이성의 차 제조 공장에서는 지금도 전통 방식으로 차를 재배한다. 이 지역에서는 갓 딴 찻잎을 찌고 이것을 가루로 만든 다음 벽돌 모양을 낸다. '전차'라고 부르는 벽돌 모양의 차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전차를 벽돌처럼 단단하게 제작하는 이유는, 그 기원이 과거 몽골과 북방 민족들의 물물교환 화폐 역할에 있기 때문이다. 양고기, 양털, 모피, 낙타 등은 몽골 유목민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고, 이들은 이를 전차와 직접 교환하곤 했다. 전차는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형태와 무게가 일정했기 때문에 가치 저장 수단으로도, 교환의 매개로도 이상적이었다.
실제로 몽골에서는 전차 12~15개가 양한 마리와, 티베트에서는 전차 20~150개가 낙타 한마리와 거래되었을 만큼, 전차는 실질적인 화폐로 기능했던 것이다.

- "교자가 처음 발행되었을 때, 철전과 교환해 줬습니다. 즉, 교자를 가지고 오면 일정한 수량의 철전과 바꿔 주겠다고 정부가 보장한 것이죠."
왕성뒤( 중국 송사 연구위원회 이사)
실제로 당시에는 교자를 가지고 시장에서 곧바로 쌀이나 물품을 살 수 없었다. 지폐는 직접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 철전으로 교환하기 위한 중개수단이었다. 교자를 관리하던 관청인 '교자무'에 종이인 교자를 가져가면 교자 1개를 철전 770개로 교환해 주었는데, 더 많은 지폐가 필요해도 그만큼의 철전이 없으면 추가로 발행할 수 없었다. 즉, 종이 지피는 신뢰의 상징이긴 했지만, 실질가치는 여전히 금속 화폐'에 종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약 200년 후,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는, 저 멀리 서역에서 온 파란눈의 소년을 매혹시킨 종이는 더 이상 실물과 바꿀 필요가 없는 오늘날우리가 사용하는 지폐와 같은 돈돈이었다. 지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이룬 쿠빌라이 칸이 진짜 종이돈을 찍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불환지폐였다.
실물 자산으로 바꾸지 않아도 종이 그 자체로 온전히 가치를 다하는 지폐인 불환지폐는 화폐 역사상 손에 꼽히는 거대한 전환이었다.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재무학과 교수 대럴 더피는 이렇게 말했다.
"돈의 역사에는 여러 중요한 지점이 있었죠. 오래전에 쿠빌라이 칸이 도입했던 중국의 종이 화폐는 엄청난 변화입니다.그것은 어떤 특별한 약속없이 시민이 종이 쪼가리를 받아들이기로 최초의 사건이었어요."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서양보다 300여 년이나 먼저 불환지폐를 발행할 수 있었을까? 중국 전폐박물관 부관장 가오충밍은그 이유를 '명목론'에서 찾는다. 중국에서 지폐가 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바로 중국의 전통 화폐 사상이 '명목론'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화폐는 명목만으로도 충분했고 실물적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환지폐를 가리키는 또다른용어인 명목화폐의 정의가 탄생했다.
금과 은 등어떤 실물 자산과도 바꿀 필요 없이 지폐 자체의 가치로 충분한 화폐. 지금 전 세계에서 쓰고 있는 지폐가 바로 명목화폐이다. 그렇게 9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명목화폐가 등장했고 그 가치를 목격한 마르코 폴로는 지구상에 유일했던 물건에 경탄했다.

- "인플레이션이란 국내에서 원화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즉 원화로 살수
있는 물건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식당에 가면 한끼 식사하는 데더 많은 원화를 지불해야 하고, 자동차를 사는 데에도 더 많은 원화를 지불해야 하고, 이발하는 데에도 더많은 원화를 지불해야 합니다. 즉, 살수 있는 모든 것을 사는 데 있어서원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죠."
조나단 파커(MIT 경영대학원 금융경제학과 교수)

- 장을 볼때바가지를 씌우면 금세 눈치채고 덤을 받을수 있을지, 얼마나 깎을수 있을지 상인들과 밀고 당기기를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그러한 감각마저 흐려진다. 인플레이션이 우리의 현실 감각을 왜곡시키는것이다.
MIT 경영대학원 금융경제학과 교수 조나단 파커는 그런 인지력을'추
적능력'이라 명명한다.
인플레이션은 우리의 '추적 능력'을 엉망으로 만들죠. 우리가 그걸 추적하는 방법은, 구매하는 물건의 가격을 모니터링하고 가격이 올라갈 때 실제로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쇼핑할 때 모든 물건의 대략적인 가격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어떤 물건이 비싸 보이면 사지 않고, 저렴해 보이면 두 개를 사죠. 인플레이션이 심하지 않아서 가격이 안정적일 때는 이런 방식이 잘 작동하는데, 인플레이션이 심할 땐 이 지표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특정 물건이 고가인지 저가인지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질수록 그 파악이 더욱 복잡해진다. 파커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길이를 측정하는 방식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1피트나 1미터에 대한 정의가 매달 바뀌고, 길이 측정 방식과 신발 사이즈가 계속 번한다면, 그 신발이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알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 '화폐착각이란 통화량이 늘어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착각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사실은 시장에 돈이 더 많이 풀려 물가가 오른 것뿐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긍정적인 변화로 오해하죠. 그것은 단지 인플레이션일 뿐인데 말이죠.
만약 화폐착각이 발생해서 가격이 급격히 오르면, 통화 가치의 하락과 구입한 물건 가격의 변동을 분리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은 진짜 소득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실제 물건의 가치도 햇갈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돈의 실제 가치 변화와 인플레이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자산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상황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부가 증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 양적 완화를 시행하면 시중에 풀린 자금으로 인해 가계와 기업이 전보다 더 낮은 금리로 더많은 자금을 빌릴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세계 각국이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바로 이 양적 완화였다.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자금이 필요할 때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법은세금이다. 도로.공공건물.지하 건설 복지혜택 등을 위해 평소에는 세금으로 예산을 마련해 왔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이러한 방식이 불가능했다. 국민은 세금을 더 내기는커녕 지원금을 달라 아우성쳤고, 국가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코로나 팬데믹 당시 국민들에게 코로나 지원금을 지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세금을 거두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그 막대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화폐 발행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화폐 발행 행위가 실질적으로 세금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세금을 징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폐 발행은 일종의 세금입니다." (폴 터커(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연구교수))
화폐를 발행하면 국가는 국민의 저항 없이 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국민은 세금을 더 내지 않고도 다양한 혜택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서로에게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올까? 화폐 추가 발행으로 인한 대가는 없을까? 당연히 있다.
화폐가 과도하게 발행되면 시중의 돈이 과잉공급되어 다시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소득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화폐 가치가 하락하면 가계의 구매력이 줄어들어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수익성에 타격을 입게 된다.

- 결국 세금을 내지 않고 받은 혜택은 고스란히 '실질소득 감소라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게 된다. 다시 말해, 세금은 내지 않았지만 인플레이션 자체가 세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뉴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201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토마스 사전트도 이러한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인플레이션은 일종의 세금입니다. 연간 인플레이션율이 10%라면 이 지폐의 가치는 10%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폐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10% 세금을 낸 셈이죠. 국회는 세금을 걷으려 애쓸 필요 없이 세금을 검은 효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폐가 많아지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만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리는 결정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그렇다면 상환하지 못한 빛은 어떻게 처리될까? 단순히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걸까? 그렇지 않다. 은행에서 발생한 대출금은 단순히 대출자 개인뿐만 아니라, 사실상 우리 모두가 함께 부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26년 경력의 신용관리사 성백림 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채무자가 깊지 않은 빛은 전체의 책임으로 조금씩 다 젊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금융권에는 법적으로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합니다. 정상적으로 대출을 이용하는 고객도 이 비용을 일부 부담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 은행이 회수하지 못한 대출금은 결국 은행을 이용하는 모든 고객이 대손충당금 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모아 메워 주고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행이 손해를 피할수 있는 건아니다. 은행에 손실을 입히고 대출금을 갚지 않은 채무자들에게는 대가가 따른다. 이에 대해 성백림 신용관리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품격을 지키기 어려운 게 빚이거든요. 현대사회는 신용사회이기 때문에, 현금이 있어도 신용이 없으면 살기 힘듭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페딘 아모스의 경제학 수업  (0) 2025.09.06
자유시장  (5) 2025.08.31
헬렌을 위한 경제학  (5) 2025.08.27
드디어 만나는 경제학 수업  (8) 2025.08.08
일본경제 대전환  (7) 2025.08.06
Posted by dalai
,

- 의료 과실은 의사들이 게으르거나 매너리즘에 빠져서, 혹은 악의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 전문가로서 성실하고 세심하게 진료에 임하는 과정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그렇다면 의료 과실은 왜 이렇게 자주 발생하는 걸까? 첫째, 질병과 치료 과정의 복잡성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2,420개의 질병과 장애를 분류하고 있으며, 각각의 질환은 서로 다른 치료 지침을 요구한다.' 이처럼 방대한 정보와 복잡성 때문에 진단에서 치료에 이르기까지 실패의 여지가 커질 수밖에 없다. 둘째, 자원 부족 때문이다. 의료 현장에서 자원이 부족하면 의사가 과로에 시달리는 일이 잦아지고, 병원이 과부하 상태에 놓여 의료 과실이 증가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 셋째, 의사가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상황이 심각할 때는 의사가 모든 치료법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없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옳은' 판단을 내린다 해도 시간이 지연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외부 요인팬만 아니라 내부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이는 의료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듯이 병원에서 발생하는 많은 실페에는 특정한 경향성이 있다. 이 경향성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예측 가능한 패턴을 따르기 때문에 사고 조사관들은 이를 두고 '특징적 패턴'이라고 부른다. 항공업계처럼 투명한 보고와 정직한 평가가 이뤄진다면 이런 실패의 원인을 파악해서 재발방지 노력을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 허드슨 강에 기적적으로 착륙하고 몇 달 뒤 어느 매체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귀중한 지혜의 말을 남겼다.
항공업계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 지침서에 담긴 모든 규정,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모든 절차는 누군가가 어디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을 체계적으로 잘 관리해서 다음 세대에 전할 의무가 있어요.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망각하고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도덕적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설렌버거의 말은 실패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되새길 가치가 있다. 항공업계의 성공적인 안전 성과가 사고 잔해에서 얻은 결과라는 사실은 명확하고 역설적이면서도 깊은 의미가 있다.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교훈은 인간이 활동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 일반적으로 심리치료사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환자의 반응을 관찰하며 치료 효과를 집작한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는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 보통 환자는 치료사의 기대에 부웅하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실제보다 좋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심리치료에서 흔히 발생하는 문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심리치료사는 치료가 끝나면 환자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추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치료법이 장기적으로 환자의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악화시키는지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심리치료사의 입상 판단력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어둠 속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또 다른 예로 방사선 전문의는 유방 촬영술이라는 저선량 X선 영상을 분석해 종양을 식별한다. 악성 종양을 진단했을 경우 자신의 판단이 맞았는지의 피드백은 나중에 시행되는 탐색적 수술 이후에야 받을수 있다.그런데그때쯤이면 처음에 내린 진단의 근거를 잊고 새로운 환자사례에 집중하고 있을 가능성이크다. 이처럼 피드백이 지연되면 직관적 판단력을높이기가어렵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만약 의사가 암을 진단하지 못해 환자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겠다면? 그리고 몇 달 혹은 몇 년 뒤 그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암이 진행된 상태라면 당시의 방사선 전문의는 자신의 과실을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실패에서 배울 기회를 아예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련의의 진단 실력은 빨리 향상되지 않고 대부분 70퍼센트의 정학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장차 전문가가 되려는 이들의 판단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동기부여나 헌신 같은 기존의 요소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불을 밝히는 것'이다. 잘못을 알려주는 '오류 신호error signal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도 실력은 향상되지 않는다.

- 검찰은 피고인 측의 주장을 검증할 의무가 있다. 강간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정액이 살인범의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사건의 전체 맥락을 살펴보는 일은 합리적이며 필수적이다. 즉 검찰은 그저 자기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판결 전후의 태도 차이가 극명하다는 점이다. 사건초기에 검찰은 DNA를 가장 강력한 증거로 여긴다. 실제로 DNA 덕분에 많은 유죄 판결이 내려진다. 그런데 일단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무죄를 입증하는 DNA 증거가 갑자기 미심쩍은 대상이 된다. 왜일까?
페스팅거는 이 현상을 쉽게 설명한다. DNA 증거는 강력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들의 욕구보다는 약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브랜던 개릿Bnandon Garct 법학 교수가 지적했듯이 검찰의 이런 태도에는 외적인 이유도 작용한다. 개릿은 <뉴욕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문제를 연구하는 법학자들은 검찰이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걱정하는 것과 더불어 정의보다 승리를 중시하는 문화 또한 주요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한다. 검사는 자신이 끌어낸 유죄 판결에 애착을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의심받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그들의 현실부정은 때때로도를 넘는다. 셰크는 말한다. "내가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일부 검사를 보면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게 뻔히보였습니다. 너무 노골적이었죠"

- 미국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하면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진다.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시스템 결함인가? 개인의 과실인가? 위법 행위가 있었는가? 재발을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무죄를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 유죄 판결이 무효가 될 경우에는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는다. 판사는 보통 한 줄짜리 결정문을 내릴 뿐 공식 의견을 작성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석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고 우기기 어렵다. 실패가 너무나도 명확하고 극적이기 때문이다. 항공 안전 전문가는 이를 붉은 깃발이라고 부른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신호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친구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과 같다. 그럴 때는 당연히 차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패는 이렇지 않다.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포장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실패를 정당화할 수 있다. '한번뿐인 예외적인 실수였다.' '특수한 경우였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만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불리한 데이터는 무시할 수도 있다. 당시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새로운 변명을 찾아내 마치 원래부터 그런 이유였던 것처럼 믿을 수도 있다. 그리고 때마침 그 변명이 놀랍도록 적절하게 자신을 구해주곤 한다
심리학자는 자기 합리화가 반드시 부정적이기만 한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결혼, 직장, 하는 일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을 매번 후회하고 밤잠을 설치며 같은 고민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 그러나 이 과정이 맹목적인 자기 합리화로 변질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실패를 반복적으로 포장하고, 원하는 대로 해석하며, 실패가두려워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자기 합리화는 배움의 기회를 막는 위험한 도구가 된다.

- 다트머스 대학교의 경영학 교수 시드니 핑켈스타인은 그의 책 <실패에서 배우는 성공의 법칙>에서 50여 개 기업이 겪은 주요 실패 사례를 분석했다." 그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실패를 부정하는 태도가 강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직급이 올라갈수록 변명으로 완벽주의의 허점을 메우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특히 CEO가 가장 심하다. 우리가 연구한 한 기업의 CEO는 인터뷰하는 45분 내내 기업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모두 외부로 돌렸다. 규제 기관, 고객, 정부, 심지어 사내 임원까지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하다. 기업에서 전략을 책임지는 사람일수록 전략이 실패할 경우 잃을 것이 많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이 잘못됐다는 증거가 나와도 이를 인정하기보다 기존 전략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인지부조화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은 그들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가능성이 가장 낮다.

-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패턴을 부여하고 그럴듯한 설명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이유로 정반대의 결과를 '설명'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잉글랜드 축구팀이 그런 성적을 낸 것은 카펠로의 독특한 지도 방식 때문이 아니라 사전에 예측할 수 없었던 수많은 변수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기 후에는 팀이 이기거나 진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기자도 경기 전에 승패를 예측하는 능력은 아마추어와 별반 다르지않다. 대니얼 카너먼은 말한다.
내러티브 오류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람들은 대개 단순하고 구체적인 설명에 설득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오류는 우연보다 재능, 어리석음, 의도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실제로 일어난 몇가지눈에 띄는 사건에 초점을 맞춰 발생하지 않은 수많은 사건을 간과하게 만든다. 결국 어떤 상황이 벌어진 데는 복잡한 요인이 있음에도 최근 발생한 인상적인 사건이 인과적인 내러티브의 중심이 되는 경향이있다.
이 말은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면 굳이 검증하거나 배울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이해할수 있다고 기대하게 된다. 결국 내러티브 오류는 하향식 사고를 부추긴다. 우리는 가설을 검증하고 오류를 발견하며 배움을 얻기보다 자신의 직감, 기존지식, 직면한 문제에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더욱 신뢰한다.

- 완벽함을 추구하는 욕망은 두 가지 오류에 기반한다. 
첫 번째 오류는 최적의 해결책을 찾기 위헤 곧바로 시장에 나가 가정을 시험하고 결점을 찾아야 하는데도 방 안이나 상아탑에 앉아 머릿속으로만 고민하면 된다고 잘못 판단하는 데 있다. 상향식 접근보다 하향식 접근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데서 비롯된 문제다.
두 번째 오류는 실패의 두려움이다. 앞서 보았듯이 사람들은 실패를 겪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많은 면에서 그보다 더 극단적이다. 계획과 전략 수립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정작 실패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리고 실패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난 뒤다. 이는 폐쇄 루프조차 차단하는 행동이다. 시합에서 질 것이 두려워 경기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는 꼴이다.

- 브레인스토밍의 핵심 문제는 자유로운 발상이나 빠른 연상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비판적인 피드백 없이는 제대로 평가될 기회를 잃는다는 점이다.
비판은 문제를 드러내고 어려움을 표면화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정이 깨질 때 비로소 우리는 현실을 되돌아본다. 실패 없이 혁신을 이루려는 것은 산소 없이 불을 피우려는 것과 같다.
다이슨의 사례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가 후버 청소기의 먼지 흡입 방식을 고민한 계기는 기존 기술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터가 계속 막히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문제는 진공청소기의 원리를 되돌아볼 절호의 기회였다
상상력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오히려 결함과 어려움, 문제를 통해 성장한다. 브레인스토밍 규칙, 비판을 꺼리는 문화. 인지 부조화의 영향 등으로 실패를 피하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정신적 능력의 연료를 빼앗는 일과 같다 

- 시드니 데커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가 아니다. 또한 '정당한 질책과 단순한 실패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경계는 명확히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직원들이 그 경계를 설정하는 책임자를 신뢰하는가'이다.
직원들은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을 신뢰할 때만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한다."
메모리얼 병원에서 질책이 심한 병동의 간호사들은 수간호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경영진의 눈에는 그 수간호사가 단호하고 규율을 강조하는 리더로 보였을 것이다. 과실을 저지른 간호사에게 엄하게 책임을 묻고 기강을 바로 세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환자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기업 세계에서 누군가를 탓하려는 성향을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심리학자이자 조직 관리 컨설턴트인 벤 대트너는 뉴욕 리퍼블릭내셔널 은행에서 근무할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는 동료가 자신의 책상 칸막이벽에 붙여둔 종이를 발견했는데,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프로젝트 6단계
1.열정 
2.환멸 
3.혼란 
4.책임자 찾기 
5. 무고한 사람 처벌하기 
6.아무 관련 없는 사람에게 보상하기
대트너는 이렇게 썼다. "직장 생활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한 표현은 본 적이 없다."
그의 말은 비난의 위험성을 알아보기 위해 거창한 실패 사례를 들여다볼 필요 없이 평범한 사무실 환경에서도 그 해악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에서는 늘 잘잘못을 따지고, 숨기는 것이 많고, 합리적인 도전조차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문화에서는 무턱대고 상대를 탓하지 않으며 개방성이 높다. 또한 실패를 감추는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 뿐임을 안다.
나는 세계 최대 금융 기관의 인사 책임자가 보낸 이메일을 보고 뛰어난 인재는 실패를 피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았다.
직원들이 고객 프레젠테이션 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면 처음에는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전문성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직원마다 대응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도전을 즐기는 사람은 늘 피드백을 구하고, 동료와 소통하며, 프레젠테이션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니죠. 그런 사람은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반면 첫 실패를 경험한 뒤 단번에 위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또다시 그런 실패를 겪지 않으려고 굉장히 교묘한 방식으로 회피 전략을 사용해요. 결국 실패의 두려움이 그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셈이죠.

- 자신의 믿음에 반하는 증거를 무시하거나 왜곡해 받아들이는 심리적 반웅인 인지 부조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념 전쟁은 불편한 증거를 외면하는 대신 그 근거를 제시한 사람을 없애 버리는 인지 부조화의 극단적 형태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종교적, 전통적 신념은 보호할 수 있지만 발전 가능성도 차단한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는 이런 흐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는 말한다. "이 시기는 훼손되지 않은 진리를 전수하는 교조적 전통에 마침표를 찍고, 비관적 토론을 허용하는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오류는 실패가 아닌 유익한 자산이 됐다."
특히 마지막 문장의 의미가 중요하다. 그리스 시대에 와서는 오류가 더 이상 파멸이나 위협,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 내 믿음의 허점을 드러내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하면 배움을 얻고 세계관을 수정할 기회였다. 과학적 지식은 권위자에 의해 전수되는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 탐구를 통해 발전하는 동적인 대상으로 여겨졌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이렇게 썼다.
신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탐구하고 배워 가는 과정 속에서 더많은 것을 발견한다.
이런 미묘한 인식의 전환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 시대는 인류 역사상 지성이 가장 화려하게 꽃 피운 시기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등 서구 사상의 뿌리가 되는 선구자를 배출했다. 스완지 대학에서 고전학을 가르쳤던 벤저민 패링턴은 말한다.
놀랍게도 우리는 현대 과학의 문턱에 서 있다. 고대 그리스 문헌의 발췌문헌이 어떤 번역의 기교 덕분에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어휘와 문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문체가 파생된 원천이었다.

- 베이컨의 위대한 업적은 수 세기 동안 인류를 억눌러 온 교조적인 지식관에 맞서 싸운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과학이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올바른 과학의 진정한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인간의 삶에 새로운 발견과 힘을 더하는 것이다."
그는 확증 편향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인간의 지성은 한번 특정 의견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일반적인 견해든 자신의 생각이든 이를 뒷받침하거나 동의하는 모든 정보를 끌어모은다. 심지어 그 반대를 가리키는 중요한 증거가 휠씬 많다고 해도 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며 온갖 이유를 붙여 배제하는 지독한 선입견이 작동해 처음 내린 결론의 정당성을 유지하려 한다.
베이컨의 연구는 갈릴레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와 더불어 제2의 과학 혁명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론은 다시 검증대에 올랐고 창의성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무례가 아니라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오류의 가치도 부정적 평가에서 긍정적 의미로 돌아섰다.

- 프리모템 기법은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생각하는 정도의 방식이 아니다. 이 기법에서 팀원들은 '환자가 이미 사망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시작한다. 즉 프로젝트가 실패했고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으며 계획이 완전히 들어졌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실패를 구체적인 사실로 그리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예 달라진다.
심리학자 게리 클라인에 따르면 이런 예정적 사후 가정은 앞으로 일어날 결과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사람들의 능력을 30퍼센트나 높여준다고 한다. 대니얼 카너먼을 비롯한 여러 저명한 학자도 이 방법을 지지한다. 카너먼은 말한다. "프리모템은 홀륭한 아이디어이다. 다보스 포럼에서 이 아이디어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한 대기업 회장이 덕분에 다보스에 온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프리모템은 일반적으로 팀장이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팀원에게 그 이유를 종이에 적도록 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런 다음 프로젝트 매니저부터 돌아가며 하나씩 이유를 말한다.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컨셉언어수업  (0) 2025.09.04
반도체 패권전쟁  (3) 2025.08.22
스페이스 이코노미  (4) 2025.08.22
가난한 찰리의 연감  (5) 2025.08.14
마케팅 한다는 착각  (3) 2025.07.26
Posted by dalai
,

- 아그리파는 로마의 공공시설을 담당하는 직책인 아이딜리스로서 로마에 설치된 각종 시설을 조사해 통계를 냈는데, 1세기 로마에는약 170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4세기 무렵에는 하루에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11개의 테르마이와 926개의 발네아가 있었다.
많은 귀족과 부유한 시민들이 자신의 집에 발네아를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공공의 테르마이를 선호했다. 로마에서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친분을 맺고 의견을 교환하는 사교활동이었다. 테르마이는 개인적인 친분을 다지고 사회적 및 정치적 의견을 나누는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처럼 로마인들의 일상에서도 테르마이 방문은 중요한 일과였다. 로마인들은 아침에 일어나 오전 내내 업무에 집중하다가 오후 2시에서 3시가 되면 테르마이로 향했다. 목욕탕이 개장 준비를 마치면 문지기가 종을 울리고, 입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문지기에게 돈을 지불하고 들어간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목욕을 하며 서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해가 지면 목욕탕은 문을 닫는다.
테르마이 내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포다테리움이라는 탈의실을 만난다. 여기에는 긴 벤치가 놓여 편안하게 옷을 벗을 수 있고, 개인사물함과 바구니가 구비되어 있다. 현대 한국의 목욕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에도 손님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나 돈, 귀중품을 노리는 절도범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자물쇠와 열쇠 대신 노예가 귀족들의 짐을 지켰다.
테르마이 옆에는 운동 공간인 팔레스트라가 있었다. 운동을 한 뒤에 목욕했던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공간으로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레슬링, 복싱, 멀리뛰기 등의 운동을 하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은 냉탕인 프리기다리움 rigidarium에서 시작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테르마이의 프리기다리움은 웅장함으로 유명하다.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천장 높이는30m에 달한다. 이 화려한 프리기다리움은 성당으로 변모해 지금도 남아 있다.
프리기다리움에서 나온 로마인들은 온탕인 테피다리움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몸을 따뜻하게 만든 후 칼다리움, 즉 열탕으로 들어간다. 칼다리움에는 반원형의 벽감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움푹 들어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양피지로 만든 책을 읽으며 땀과 노폐물을 배출했다. 그 후 테피라디움으로 돌아와 몸에 기름을 바르고 스트리절로 때를 굵어냈다. 1세기 중반 정치가 페트로니우스(20~66)가 남긴 글에는 양털로 짠 옷감으로 때를 밀어주는 노예 이야기가 나온다. 양털 옷감과 노예가 그 시절의 때수건과 세신사였다.
온탕에서 나오면 다시 처음 방문했던 냉탕으로 돌아가 몸을 식힌다. 열탕에서 몸을 덥힌 뒤에도 냉탕에 들어간다. 앞선 고대 그리스 시대 히포크라테스가 주장한 4체액설은 로마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인들은 체액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뜨거운 불과 찬물을 번갈아 들어갔다.

-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는
명상록에서 "목욕이 당신의 마음에다 무엇을 선사하느냐? 기름, 땀, 먼지, 기름이 뜨는 물, 그리고 구역질 나는 모든 것을 선사할뿐이다. 어느 분야든 인생은 바로 그런 것이고 인생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은 그러한 것이다." 라고 물질문명의 추함에 목욕을 빗대었다.
목욕과 테르마이에 대한 예찬과 불평, 경고가 쏟아져 나온 것은 고대 로마에서 목욕이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성했던 로마의 목욕 문화도 변화를 겪는다. 이민족의 침입과 금욕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화려하던 목욕 문화는 점차 쇠퇴한다.

- 로마의 목욕 문화와 공중목욕탕은 8~9세기까지 금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점차 쇠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537년 고트족이 로마의 송수로를 파괴하면서 가속화되었다. 냉탕, 온탕, 열탕 모두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송수로가 파괴되고 물 공급이 끊어지자 공중목욕탕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타민족의 침략과 제국의 몰락으로 테르마이로 대표되는 공중목욕탕은 사라졌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마인들이 정복했던 지역에 목욕 문화가 남았다.
제국의 전성기 동안, 로마는 유럽 곳곳을 정복하며 목욕 문화를 전파했다. 군인들은 고향에서처럼 목욕을 즐기기 위해 주둔지에 공중목욕탕을 세웠다. 로마인들이 정복한 지역 중 온천이 있는 곳은 온천 도시로 발전했다. 영국의 바스와 벅스톤, 프랑스의 비시와 엑스레병, 독일의 아헨과 비스바덴, 오스트리아의 바덴 등이 그 예이다.

- 2022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의 하맘 출입이 금지되었다. 탈레반은 놀이공원과 헬스장에 이어 하맘 사용까지 제한하며, "모든 집에 목욕탕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놀이공원이나 학교 출입이 제한되고, 보호자 없는 장거리 여행이 금지되며, 얼굴을 가리는 것까지 요구되는 상황에서, 하맘까지 금지당했다.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귀족들도 제 집에 하맘이 있는데도 하맘에 출입했다. 하맘이 몸을 씻기만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공동체의 대소사를 논의했다. 각종 의례가 이루어졌다. 탈레반은 그 공간이 해온 사회적 역할을 알기에, 그곳에서 여성들의 유대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기에 하맘을 금지했을 것이다.

- 로마 제국이 쇠락하고 목욕을 죄악시하는 기독교가 번성하자 유럽에서는 공중목욕탕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깨끗함에 대한 선호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었을까? 13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교회 안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 향을 피웠다.
유럽에서 잊혔던 목욕 문화는 십자군 전쟁(1095-1291)을 통해 다시금 유럽 땅을 밟았다. 성지 탈환을 위해 동쪽으로 향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설탕, 살구, 대추 등의 식재료와 체스와같은 유희거리, 이슬람의 제지.의학.과학 기술이 유입되었다. 이렇게 유럽에 들어온 것 중 하나에 목욕 문화가 슬그머니 끼어 있었다. 고대로마가 남기고 이슬람식으로 변형된 목욕 문화였다.
전쟁을 거처 돌아온 목욕 문화는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개인이 집안에 목욕탕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 공중목욕탕도 속속들이 등장했다. 고대 로마의 테르마이와 다르게 물을 끓여 증기로 공간을 채우는 방식이어서 건설도 수월했다.
기독교가 목욕 문화를 억제하려 했어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목욕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14세기 런던에는 최소 18개의 목욕탕이 있었고, 피렌체에는 목욕탕이 즐비한 거리가 적어도 세 곳이 넘었다. 1292년 인구가 7만 명이었던 파리에는 무려 26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공중목욕탕은 어떠했을까? 로마의 웅장한 테르마이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증과 욕조가 전부였다. 욕조는 주로 나무로 제작되어 별도의 방에 설치되었다. 목욕탕을 방문하면, 첫 번째로 증기를 셋고, 이어서 모두 함께 나무 욕조에 몸을 담갔다.

- 산업의 발달과 함께 의학 지식도 발달했다. 1861년 프랑스의 생화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는 질병과 미생물의 연관 관계를 밝혀냈다. 그는 유명한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병이 자연발생 하는 것이 아니라 미생물에 의해 등장하는 것임을 입증했다. 파스퇴르 이전에도 세균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의 실험은 세균의 발생을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믿지 않았던 유럽인들을 납득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도 탄저병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손가락보다 작은 플레이트 위에 놓인 세균이 인체를 죽인다는 것을 모두 현미경을 통해 보았다. 불결한 환경과 악취라는 모호한 대상보다 눈으로 불 수 있는 세균이 싸워야 할 대상으로 등극했고, 세균설은 서구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병을 치료하고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1930~1940년대에 설파제와 항생제라는 해결책이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가 미생물과 맞서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욕이었다. 그래서 20세기 초입부터 몸을 씻는 습관은 점점 널리 받아들여졌다. 목욕을 위한 물품의 개발도 늘어났다. 그 대표 주자가 비누다. 비누와 바디워시, 때수건 등을 이용해 광적으로 몸을 씻어내는 시대가 도래했다.

- 가족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세면대를 공유하는 현대와 다르게, 조선시대에는 개인별로 전용 대야를 소유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남편, 본인,그리고 하인들까지 각자의 방에 자신의 대야를 걸어두었다.
따라서 하인까지 두며 살았던 부유한 양반 가정의 경우에는 한집에서 사용하는 대야만 해도 열 개가 넘어갔다. 밥그릇보다 대야의 수가 더 많았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 사람들이 부분욕을 선호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전신욕을 즐기던 시절보다 더 지저분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 조선시대 사람들이 항상 부분욕만 한것은아니다. 전신욕도 중요한 연례 행사였다. 서민들은 음력 삼날 단오, 유둣날 같은 세시풍속을 따라 야외의 냇가에서 몸을 씻었다. 실록에는 옥에 갇힌 죄인들에게도 한 달에 한번 머리를 감을수 있었으며, 5월부터 7월까지 여름 석달 동안은 원하는 사람에게 한차례 목욕을 허락하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전신을 씻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불결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사람들은 남의 눈을 피해 혼자 있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몸을씻었다.

- 1665년 4월 17일 현종이 온양 온천으로 향할 때의 광경은 대단했다. 왕과 왕족뿐만 아니라 영의정, 우의정, 병조판서, 도승지 등 수많은 관료와 의원들이 동행했다.49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예별감 30명, 어영군 1,200명, 기병 50명, 군뢰와 예비군에 해당하는 잡색 400명이 동원됐다. 거기다 금군 500명, 기마병 400명, 포수 800명이 수행했다.
실록에 기록된 인원만 해도 이만큼이었고, 내관과 궁녀, 하인들을 비롯해 이들을 수송할 군마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았다. 궁궐 한 채가 온양으로 이동하는 격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과 말들이 필요한 먹거리와 자원을 한양에서 온양까지 운반해야 했다. 게다가 이 모든 인원이 온양 행궁에서 편히 실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럴수 없었다. 일부 물자는 도성에서 조달되었겠지만, 온천 지역에서도 감당해야 했다. 부담이 컸다.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특산품부터 군사들이 머물 병영을 짓기 위한 땅까지 제공해야 했다.
농번기에 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은 왕과 신하들을 접대하느라 밭을 임시 병영으로 내놓았다. 그해 농사는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의 방문은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생계가 끊어지는 위협이 될 수있었다. 백성들이 왕에게 온천의 존재를 습기고 싶어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매일 목욕하기 위해서는 각 가정마다 목욕탕을 설치하는 것이 제일 낫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집에 목욕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며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모든 조선 사람이 집 안에 욕실을 설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뜻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과 온수 시설까지 갖추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 공중목욕탕이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도 상수도가 설치되고 관련 법령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은 1894년부터1 1895년. 1900년부터 1902년.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세차례에 걸쳐 상수도 시설을 구축했다.' 인천은 1906년부터 배관을 묻어 1910년부터 수돗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1903년 남산 계곡에 수도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08년 뚝섬에 정수장을 마련해 사대문 안과 용산 일대 주민에게 물을 공급했다.
1912년 당시 서울 인구는 약 30만 3,000명이었으며, 급수 인구는 7만8,000명으로, 급수 보급률은 26%에 불과했다.'3 러 상수도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에 설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었던 조선 사람은 도시에 거주하는 일부 상류층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 공중목욕탕은 상수도, 하수도, 물, 화력 등 다양한 자원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시설이다. 이러한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운영에 지장이 생긴다. 일제는 전국적인 위생 정책을 시행하려 했지만, 필요한 시설은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목욕탕영업단속규칙은 공중목욕탕의 관리와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기반 시설 확충에 대한 조항은 미흡했다.
가장 큰 문제는 깨끗한 물의 화보였다. [목욕탕영업단속규칙]에 따라 매일 물을 같아야 했으며 따라서 공중목욕탕 운영에는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상수도 시설은 일본인에게 우선 제공되었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는 상수도와 하수도가 설치되어 공중목욕탕이 세워졌지만, 조선인이 사는 지역은 그러한 시설이 부족했다.
이 시기에 공중목욕탕은 주로 경성, 인천, 부산 등의 도시에, 그중에서도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조선인의 거주지나 도시 바깥의 위생 환경은 식민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공중목욕탕은 도로 교통이 전국적으로 완비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00년대 찜질방이 성행할 때까지, 읍면 소재지의 버스 터미널 옆이나 큰 재래시장 근처에서 공중목욕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장이 서는 날에는 목욕탕이 북적거렸다. 월출산이나 마이산 같은 유명 관광지에는 관광호텔이 공중목욕탕을 겸영하기도 했다. 목욕하기 편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공중목욕탕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농어촌 인구가 감소하고, 남은 인구도 빠르게 고령화되면서 공중목욕탕의 이용객이 줄어들었다. 운영 비용은 계속해서 오르고, 수익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농어촌 지역 경제의 어려움과 지역 소멸 위기는 공중목욕탕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지역 사회의 오래된 공중목욕탕은 단순한 몸 씻는 곳을 넘어서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도 한다. 이곳의 이용객들은 서로 익숙한 사이로, 목욕탕에서 동네 소식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한다. 공중목욕탕하나가 문을 단는다는 것은 마치 커뮤니티의 구심점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 61년에는 온수 보일러가 등장했다. 보일러 구입에 2~3만 환, 욕실 바닥 타일 공사가 5~6평 기준 15만 환, 공가비를 포함하면 부대비용 제외 최저 18만 원이 필요했다. 그 비용만 들이면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 집 안에서 목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노동자 가구평균 월수입이 52,870환이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온수 보일러 설치는 석 달 반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목욕탕을 설치할 공간이 있을 때 가능하다. 노동자 가구의 평균 주거비가 월 3,600환이었던 점을 봐도,52 온수 보일러 설치는 상류층의 이야기였다.
광복 이후에도 서민층의 목욕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정내 목욕 공간이 생겼다고 해도, 여전히 부분적으로만 몸을 씻었다. 많은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했을 것이다.

-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한국의 주거 형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양식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된 아파트 건설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결국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아파트에는 각 집마다 상수도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고, 화장실도 집안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아파트 정착 초기부터 씻기 좋은 시설이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1962년 마포아파트 건설을 시작으로 아파트 주택 형태가 대한민국의 주거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와 무허가로 난립하는 판자촌, 심화되는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정된 토지위에 고밀도로 쌓아 올리는 집합 주택은 훌륭한 대안이 되었다. 마포아파트는 박정희 정부의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현대 문명의 혜택 제공을 목표로 삼았다. 거주지의 평면적 확장을 지양하고 고층화를 시도했으며 국민의 생활양식을 간소화하고 공동생활의 습성을 향상시키는 한편 수도 정비와 미화를 추구했다.
한국에서 배스 유닛이 처음으로 설치된 곳도 이 아파트이다. 배스 유닛은 목욕, 배설, 세면을 한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초기에는 마실 물도 귀한 판에 아파트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강남 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도시 중산층의 주거지로 인정받게 되며 배스유닛형욕실은 점차 보편화되었다 강남뿐만 아니라 용산구의 한강맨션아파트,송파구의 잠실주공아파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에서도 이러한 욕실 형태가 설치되며 일반화되었다.

- 고급 사우나 입장료는 일반 공중목욕탕보다 월등히 높았다. 1979년에 공중목욕탕의 성인 목욕값이 400원일 때, 사우나는 1,000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신고된 가격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더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다.
고급 사우나는 고속 경제성장의 그늘, 사치, 과소비, 퇴폐 풍조와 결합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84년 매일경제는 대낮에 사우나를 즐기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을 보도하며 비판했다. 이들은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아침부터 사우나로 향했고, 하루 종일 목욕과 휴식을 번갈아 하며 점심과 간식을 먹었다. 팁을 포함해 하루에 15만 원을 소비했다. 기사는 월 10만 윈 이하를 버는 저임금 근로자가 많은 우리 사회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서민들의 눈길 또한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며 일침을 놓는다.
밀크탕, 오렌지탕, 쑥탕과 같은 다양한 목욕 시설을 갖춘 이곳에서는 사치스러운 서비스가 행해졌다. 손님은 목욕부터 전신 마사지, 매니큐어, 머리 세팅까지 원스톱으로 제공받았다. 때로는 불법 고용된 남성 안마사에게 퇴폐적인 마사지 서비스를 받거나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성 전용 공중목욕탕의 퇴폐 영업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1960년대 초 법적 제재가 없다는 맹점을 이용해 몇몇 한증탕에서는 여성 입욕 보조원을 두고 음란 행위나 성매매가 이루어졌다. 사우나 내에 이성 입욕 보조원이 출입하는 것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공중목욕탕에서의 성매매는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밀실을 설치해 도박이나 성매매 등 불법 행위를 자행하는 호텔 사우나도 있었다. 1991년에는 서울시가 서울 시내 관광호텔의 한증탕, 사우나탕 등 92개 업소를 대대적으로 단속했고 그중 29개 업소가 밀실 설치와 도박, 퇴폐 행위로 적발되었다. 적발된 한 호텔은 시각장애인 대신 일반 여성 종업원을 안마 보조원으로 고용하고, 밀실을 아홉개나 설치해 35일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 97년 외환위기 이후 찜질방은 급격히 증가했고, 2000년대 초반에 이르면 목욕 시설을 흡수하며 더욱 대형화되었다. 전통적인 한증을 포함해 피트니스 센터, 만화방, 노래방, 미용실, 네일샵 등 다양한 시설을 흡수해 복합 레저 시설로 거듭났다. 고대 로마의 황제가 세운 목욕탕, 테르마이와 다를 게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찜질방의 형태는 이때 완성되었다.
찜질방이 한국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은 비결은 무엇일까? 1995년 신문 기사에서 한 여성은 "여성들의 경우 마땅한 쉼터가 없었으나 찜질방은 5,000원만 내면 내 집 안방처럼 편안히 누워 쉴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했다.'8 찜질방은 사우나보다 온도가 낮고, 목욕탕처럼 옷을 완전히 벗을 필요도 없다.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만질 필요 없이, 옛날 온돌방의 아랫목처럼 따뜻하게 몸을 녹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게다가 집처럼 밤새도록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누구든 어떤 자세로 누워 있어도 주위 사람들은 그저 못 본 척 지나간다. 내 집안방의 아랫목 같은 편안함을 제공하는 곳, 그곳이 바로 찜질방이다
찜질방은 노래방이나 피시방과 같은'방' 문화와 공중목욕탕이 결합해 탄생한 한국만의 독특한 공간이다. '방' 문화는 전화방, 비디오방, 노래방 등 1990년대를 전후로 해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전국으로 퍼진'방' 산업과 함께 등장했다. 한국 사람들은 새롭게 생겨난 방에 친구, 회사, 동료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 혼자가 아니라 끼리끼리 방에 방문해 함께 즐기는 방문화를 발달시켰다. 방'은 소집단주의적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찜질하고 목욕하는 사적인 공간이 '방'이 되었다. 평소 밖에서는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던 행동도 방 안에서는 할 수 있다. 방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격식에 얽매일 필요도 부담도 없다. 찜질방은 자신들의 집 안에 있는 방을 옮겨온 또 다른 '방', 타인을 부담 없이 초대할 수 있는 방'이기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그렇지만 찜질방에 아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공동으로 땀을 흘리고 방바닥에서 뒹굴어야 하지만, 찜질방에서 제공하는 찜질복을 입으면 그 어색함이 사라진다. 방 안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도 같은 목적으로 찜질방을 찾았기에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방에서 벌어진 일은 방에 있었던 사람들만의 비밀이 된다.

- 때밀이는 공중목욕탕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몸에 낀 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따뜻한 물과 그 물을 담을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공중목욕탕이다.
때밀이는 한국 목욕 문화의 독특한 특징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피부를 깨끗이 하는 목욕법이 존재한다. 이슬람의 하맘에서는 증기로 때를 불리고 양털이나 염소털로 만든 때수건을 사용해 몸을 문지른다. 서양에서는 1830년대에 피부 호흡 이론이 등장하면서 모공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이론에 따라, 따뜻한 물에 3~10분 정도 몸을 담근 후에는 피부를 문질러 더러움을 제거하는 목욕법이 널리 알려졌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공중목욕탕을 이용했던 한국인들도 이러한 방식을 접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극단적이었다. 피부를 씻는 것이 아니라 때를 벅벅 밀었다'.'
때를 세게 밀어내는 목욕 관행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공중목욕탕이 문명과 미개, 깨끗함과 더러움, 지배와 피지배의 상징적 공간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몸에 낀 때는 제거해야 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광수는 목욕을 두고 "육신의 때뿐만 아니라 정신의 때도 씻어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지식인들의 사정일 뿐, 서민들에게는 비싼 목욕료 때문에 한 번 목욕탕을 이용할 때 최대한 오랫동안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이유가 더 첫을 것이다. 광복 후에도 목욕료는 여전히 비썼고 한 번 목욕탕을 방문하면 최소 2주는 다시 방문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능한 한 깨끗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몸을 셋어야만 했다. 그 과정에 비누와 이태리타월이 가세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화의 풍경들  (0) 2025.09.03
세계를 움직인 열가지 프레임  (5) 2025.08.28
조선임금 잔혹사  (6) 2025.07.31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4) 2025.07.30
구사일생 세계사  (8) 2025.07.14
Posted by dalai
,

컨셉언어수업

경영 2025. 9. 4. 07:12

- 앨런 케이가 생각한 퍼스널 컴퓨터의 이상적인 모습에는 다이나북Dynabook '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977년 발표한 퍼스널 다이내믹 미디어Personal Dynamic Media라는 논문에서 그는 다이나북에 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노트만 한 크기와 모양의 휴대 가능한 물건에 나만의 독립적인 정보 처리 기계가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기계는 인간의 시각, 청각을 능가하는 기능을 가졌고 몇천 페이지나 되는 참고 자료, 시, 편지, 레시피, 기록, 그림, 애니메이션, 악보, 소리의 파동, 동적 시뮬레이션을 비롯해 내가 기록하거나 변경하고 싶은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나중에 꺼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다."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it.
앨런 케이는 이어서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진 선로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앞으로 어떤 시대가 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툭하면 연구소로 질문하러 오는 사업가에게 한 말이었지요. 참고로 연구소의 다른 직원들도 마음에 들었는지 이 말은 이후 펠로앨토 연구소의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 200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주지자로 선출된 더발 패트릭은 선거 도중 열린 집회에서 이런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말은그저말 한마디에 불과합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자체 뿐이다" 또한 단지 말일 뿐입니다.
"나라가 날 위해 뭘 해줄지 묻지말고 내가 나라를 위해 뭘할수 있는지를 물어 한다"라는 말도 그저 말에 불과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말도그렇고요.
누군가 지적하기 전에 말하겠습니다. 저는 마틴 루터 킹도, 케네디도,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토머스 제퍼슨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더좋은 세상에 대한 전망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한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옳은 말은 사람들을 행동하게 한다는 것을요.

- 사순은 머리를 자르기 전에 고객의 얼굴을 분석하고 골격과 뼈의 높이를 파악해서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커트를 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순만의 커트기법은 지오메트릭 커트입니다.
지오메트릭 커트를 고안할 때사순은 여러 각도에서 보이는 모양을 중시하는 프랭크 게리 등의 건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건축이 막 예술의 장르로 들어서려 했듯이 미용도 어떻게 하면 예술이 될수있을지 고민한 것이었어요.
그런 모든 시도의 집대성이 바로 파이브 포인트 커트입니다. 머리의 균형을 고려해 얼굴에 점 2개를 정한 다음 뒤통수의 한가운데와 양옆의 점을 연결해 5개의 포인트를 지정하는 스타일입니다. 머리의 라인을 살려 입체적으로 자르기 때문에 빗으로 빗거나 손으로 쏠어 넘겨도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지요.
사순이 만든 다양한 헤어스타일에는 "워시 앤드 고 wash and Go라는 선전 문구가 붙었습니다. 사순의 헤어스타일 덕분에 여성들은 머리를 감고 나서 그대로 외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솥뚜껑같이 둥그런 기계를 쓰고 파마를 한 다음 헤어스프레이로 고정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한번 정한 모양은 일주일 동안 씻지도 않고 그대로 유지해야 했지요. 지금 미용실에서 하는 커트와 드라이는 시순에게서 비롯된 셈입니다.
같은 시기 런던에서 활약했던 패션 디자이너 중에 메리 퀸트가 있습니다. 그녀는 풍만한 여성이야말로 미인'이라고 여기는 시대를 끝내기 위해 미니스커트를 만들었습니다. 소년처럼 자유롭고 발릴해 보이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했지요. 그런 흐름과 맞물려 사순의 헤어스타일은 런던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뜨거운 주목 대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돈과 수고를 들여 화려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머리를 파마와 스프레이로 고정한 채 거리를 걷는 여성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시대. 그런 시대의 풍경은 비달 사순과 메리 퀸트의 손에 의해 과거가 되었습니다. 얼마 뒤 사순은 미국으로 진출해 헤어 케어 상품을 만들고 아카데미를 세워 후배를 양성하는 등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 기업이나 브랜드에는 대부분 창업자의 이름을 붙이거나, 말이주는 이미지 또는 기억하기 쉬운 형태를 고려헤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무인양품처럼 이름 자체에 기업의 비전이 담겨 있어 자연히 소비자에게 전해지도록 설계한 경우는 매우 드물지요.
대부분의 기업은 브랜드의 명칭을 정한 다음, 회사의 철학과 사상을 메시지로 나타내기 위해 태그라인이나 슬로건(광고 등에서 브랜드 이름 위에 붙는 말)을 개발해 이름과 세트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무인양품은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을 전합니다. 커뮤니케이션에도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브랜드의 표정과 정반대로 무인양품은 강렬한 '반발'의 자세에서 탄생했습니다. 무인양품은 일본의 대형 마트 체인인 세이유의 자체 브랜드로 1980년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시에는 패션, 식품, 잡화 등 온갓 상품을 화려하게 연출하며 그런 것이야말로 갔비싸고 좋은 물건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상품의 품질을 중시하려는 자세는 어딘가로 가버리고 '좋은 것'은 '비산 것'이라는 사회의 통념이 소비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계기로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며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세존 그룹을 이끌던 쓰쓰미 세이지문캐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디자이너인 다나카 잇코의 교류 속에서 기존 브랜드에 대항해 세상에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탄생했습니다. 초라한 상품에 과도한 장식을 더한 브랜드 제품과 반대로 '브랜드가 없어도 좋은 물건을'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무인양품 '이라고 지었지요. 그 바탕에는 단순히 브랜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기초로 한 합리적 사상'을 팔겠다는 사고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무인'상품'이 아니라 무인'양품'인 것입니다.
그들은 무인양품이라는 사고방식을 실현하기 위해 아무리 가격이 낮아도 대량 생산으로 비용을 낮추거나 품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상품 개발은 모두 '소재' 생산 과정 포장'이라는 3가지 요소를 다시 점검하는 데서 출발했고요. 따라서 엄선한 소재를 사용하고, 생산은 철저히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진행하고, 포장도 최대한 간소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인양품의 홈페이지에는 상품과 관련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군더더기를 철저히 없애고 합리적으로 만들어 오히려 본래 물건이 지닌 매력을 빛나게 한다는 발상은 예로부터 '본연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여겨온 일본의 미의식, 다시 말해 간소한 것이 단순히 수수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호화로운 것을 능가할 만큼 매력적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무인양품의 자문을 맡았던 다나카 잇코는 "생활감은 싫지만, 생활 미학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쓰는 생활용품의 '저렴함'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어떤 사상이 낮은 가격을 만들어 냈는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세는 무인양품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철학이 있는 저렴한 가격이라면 구입하는 사람도 꺼림칙하다고 느끼지 않고 '현명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요.
브랜드 제품은 화려하고 장식이 많고 비싸며, 자체 브랜드 제품은 싸거나 질이 나뿔 거라고 믿었던 시대. '간결'하고 '실용적'이며 '저렴한' 무인양품과 같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 "5GB 용량의 MP3 플레이어"는 단순히 제품의 성능에 관한 정보이지만,"주머니 속의 1,000곡"은 제품을 통해 사용자가 어떤 체험을 할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전자에는 사용자가 담겨 있지 않지만, 후자에는 사용자의 미래 모습이 담겨 있지요.
이런 말의 차이는 제품의 설계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칩니다. 애플은 길을 걸으며 1,000곡이나 되는 곡을 거뜬히 다루는 광경을 상상했기에 한 손으로 쉽게 조작하는 스크롤 휠과 직관적인 사용자 환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덕에 대량의 곡을 매끄럽게 다룰 수있습니다.
잡스는 개발 팀에 "버튼을 3번 이상 누르게 하지 마라'"라는 말을 해서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겠든 1,000곡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만드는 데만 온전히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 밖에도 1,000곡을 짧은 시간에 내려받을 수 있는 파이어와이어나 1,000곡을 견딜 수 있는 배터리 등 미래의 사용자를 위한 최소한의 사양을 차근차근 갖취나갔습니다.
반면 다른 회사의 제품은 음악을 고를 때 몇십 번씩 버튼을 눌러야 했습니다.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상황은 고려조차 안 해서 모든 기능을 플레이어 안에 담느라 조작 방식도 무척 복잡했고요.

- 설령 자동차의 미래를 생각하려다 벽에 부뒷히더라도 아이와 함께 세상을 배우는 교실'이나 '움직이는 거실'인 자동차의 미래에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잠들어 있을 듯하지 않나요?
닌텐도는 게임에서 컨트롤러'라는 이름을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컨트롤러를 거실에 두는 가족의 리모컨'으로 바라봐서 새로운 형태를 손에 넣었지요. 아마존은 킨들을 개발할 때 기기를 전자책단말기가 아니라 '책을 손에 넣는 서점'으로 보고 어디서든 손쉽게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
이름을 떼어낸다는 행위는 말의 의미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고정관념을 말끔히  씻어내고 같혀 있던 가능성을 끌어내는 일이기도 하고요. 맥주, 레스토랑, 비행기, 책, 의자, 접시, 뭐든 좋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라벨을 벗긴 뒤 생각해 봅시다.

- 이름을 바꾸면 시대도 바뀐다
이미 소개한사례 가운데 디즈니랜드의 '캐스트'라는 말은' '이름을 바꾸는' 기술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디즈니랜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도 마법의 일부가되어 미키 마우스 그리고 도널드 덕과 함께 손님에게 마법을 거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런 이상적인 풍경을 떠올리면 아르바이트생이나 '스태프'나 '직원처럼 기존의 음식점과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 발견한것이'캐스트'라는 말이었겠지요.
캐스트라는 단어 자체는 오래전부터 존재했기에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캐스트'에 빗대는 것은 새로운 행위였어요.이 새로운 조합이 새로운 의미를 낳았습니다.
새로운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면 이야기 전체가 달라집니다. '아르바이트생'을 ' 캐스트'로 바꾸자 디즈니랜드에서는 '직장'이 '무대'가 되고 '노동'이 '연기'가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엔지니어'들을 '아티스트'라고 불렀습니다.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완성된 컴퓨터에 작품을 완성한 예술가로서 사인을 하게 했지요. 그렇게 해서 애플은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스타벅스는 자신들이 제공하는 공간을 '카페'가 아니라 '제3의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윈들은 손님과 친밀한 존재이자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여야 한다는 비전을 반영해 '파트너'라 불리고요.
아르바이트생에서 캐스트로. 엔지니어에서 아티스트로. 직원에서 파트너로. 이름의 변화는 조직과 서비스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 자신을 영업자 대신 '비즈니스 프로듀서'라고 인식하면 어떨까요? 협력사나 사내 직원들을 통솔하며 예산과 아웃풋의 품질을 관리하는 전문가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어려운 협상을 매끄럽게 매듭짓는 이미지라면 교섭 전문가'가 잘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거래처에 '물건'이 아니라 '해결'을 판매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컨설턴트'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요. 자신의 취미이기도 한 차나 오토바이 또는 악기를 판다면 '프로 유저'라고 정의해도 좋습니다.
누구보다 상품을 잘 아는 사용자로 자신을 인식하면, 판매자보다도 고객의 편에 서겠다고 의지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자연히 무작정 많이 '판매하겠다'는 자세보다 '이 상품의 장점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전도사 같은 영업 방식이 되겠지요.
자신이 지향하는 미래의 직함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떤 목표와 위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가 명쾌해져서 망설이지 않고 다양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둔 직함은 마치 예언처럼 언젠가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될겁니다.
자신의 직함을 생각해 봤다면, 이번에는 조직과 상품을 주어로 생각해 봄 차례입니다. 기본적인 요령은 같습니다. 상품, 서비스, 사회, 업계. 이름'을 각각 어떻게 바꿔야 내가 꿈꾸는 미래를 담아낼 수있을까요?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공을 만드는 실패의 과학  (1) 2025.09.04
반도체 패권전쟁  (3) 2025.08.22
스페이스 이코노미  (4) 2025.08.22
가난한 찰리의 연감  (5) 2025.08.14
마케팅 한다는 착각  (3) 2025.07.26
Posted by dalai
,

- 신자유주의공격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그 공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로부터 방어수단을빼앗는 것이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대통령과 마거릿대처 총리는 노동조합을 공격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시대를 시작했는데, 노동조합은 계급 전쟁에맞서는 노동자들의 주된 방어선이었습니다. 그들은동시에 기업들이 노동자를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고, 이러한 공격은 종종 불법적인수단을 동반했지만, 미국과 영국처럼 기업의 영향력이 강력한 나라들에서는 정부가 이를묵인함으로써 별다른 문제가 되지않았습니다.
계급 갈등에 맞서는 또 다른 중요한 방어선은 잘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할줄 아는 교육받은 대중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 동안 공교육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대규모 예산 삭감, 정규교수 대신비용이 저렴하고 해고가 쉬운 시간강사나 대학원생을 고용하는사업모델, 그리고 비판적 사고와 탐구를 저해하는 시험 중심의 교육방식 등을들수 있습니다.
결국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수동적이고, 순웅적이며, 고립된 상태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은 분노와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러한 상태야말로 선동가들이 쉽게 이용할수 있는 취약한 표적이 됩니다. 이런 선동가들은 모든 사회에 잠재된 어두운 본성을 자극해 권력을 잡으려 합니다.

- 1953년, 이란의 의회정부는 자국의 막대한 석유 자원을 자국민의 이익을 위헤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 나라의 자원을 개발할 때, 그 혜택을 가장 먼저 받아야 할사람은 그나라 국민이다'라는 생각 자체가 미국과 영국 같은 강대국들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일탈'로 간주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까지 이란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온 영국은 더 이상 이란을 제어할 힘이 없었고, 결국 미국에 개입을 요청했습니다. 미국은 이에 응답해 이란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미 독재자인 샤의 정권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영국의 식민 유산을 이어받은 미국의 이란 탄압 정책이 시작되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국을 도와주는 협상의 일환으로 워싱턴은 영국이 보유하던 이란내 석유 채굴권의 일부를 미국기업들이 확보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당시 미국 기업들은 단기적이고 편협한 이해관계 때문에 이 제안을 꺼렸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수 있었기 때
문이죠.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자원개발에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고, 수익성은 오히려 더높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반독점 소송을 걸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기업들은 마지못해 협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협상이 기업들에 큰손실을 안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원치않았던 결정이었습니다.
워싱턴과 미국기업들 간의 갈등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있습니다. 쿠바 사례와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은 이란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제재에 강하게 반대하고있지만, 결국 그 제재를 따를 수밖에 없어 수익성 높은 이란 시장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란이 미국의 정책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는 사실에 대해 '국가적 차원의 벌'을 주려는 전략적 판단이 기업들의 단기적 이윤이라는 좁은 이해관계보다 더우선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1930년대를 섬뜩하게 떠올리게 합니다.당시, 세계 곳곳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붕괴의 조짐을 보였고, 다양한 병든 징후들이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 표현은 안토니오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안에서 남긴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 미국은 오히려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유럽이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미국은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지요. 그것은 부활한 전투적인 노동운동과 이에 공감했던 행정부의 존재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기업계는 대부분 이러한 변화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유독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기업 중심의 지배체제'를 되찾을 기회를 노리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이 같은 흐름은 앞서 설명했던 역사적 배경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런 갈등은 일시적으로 수면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사회민주주의적 이단'을 제거하려는 조직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캠페인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힘을 얻었고, 마침내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피노체트 정권 아래에서 활약했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앞서 언급한퓨리서치 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 대다수는 탄소배출을 흡수하기 위해 나무1조그루를 심는계획과, 탄소를 포집저장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에 세금 감면혜택을 주는 방안에 압도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몇년간 퓨리서치가 실시한 기후정책 관련 여론조사 결과와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이 결과는 '그린뉴딜' 여전히 미국의 주류담론속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는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그리고 이는 2009년 유엔환경계획이 처음 제안한 '글로벌그린뉴딜'이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주는 걸까요?
노엄촘스키
미국국민이 지지하는 그 두가지 정책에는 공통점이있습니다. 화석연료사용을줄이지 않아도 된다는것, 즉, 화석연료재벌들(생산업체, 금융권, 그외대기오염에 가담한 대기업들)의 수익을 줄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요즘처럼 불볕더위가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기에 지금 당장 근본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는앞서 말한 두 정책보다 훨씬 더 전달되기 어습니다. 대이늦어질수록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그에 따른 비용과 고통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이미 우리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그방법이 감춰진 비밀은 아니잖아요. 아직늦지않았습니다.

-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돌아가보죠. 이법의 핵심구성요소 중 하나는 화석연료 산업과 이들을 지원하는 금융기관들이보다 책임 있는 방향으로나아가도록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회유책입니다. 그러나그방식은 주로 뇌물과 보조금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석유를 계속 추출할수 있도록 연방 토지를 이용하게해 주는 일종의 '선물''도 포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사실상 우리가 이미 기후 파괴의 임계점을 넘어선 이후에도 돌이킬수 없는 활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전술적 선택은 기존의 제도적 구조를 감안하면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트문화에서는 모든 관심사가 민간 경제의 주인들을 위한 복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지요. 이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마치 모세와 예언자의 가르침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주인들이 만족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방향을 잃는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는 셈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 전제가 전쟁을 위해 총동원되었죠. 전시 행정을 총괄하던 헨리 스팀슨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거나 준비하려면, 기업들이 그 과정에서 돈을 벌 수 있게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업 지도자들은 전시 생산을 조정하
도록 정부로부터 요청받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운영하는 기업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기업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원가 플러스 고정 수수료.cost-plus-fixed-fee' 시스템이었는데, 이 방식은 정부가 개발 및 생산 비용을 보장하고 생산된 물품에 대해 일정 비율의 이익을 지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최근의 한사례로 중동 문제 전문가인 알랭그레시는 이스라엘이 점령중인 가자 지구에서 저지른 최근 테러 행위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프랑스TV에서 검열을 당했습니다. 그레시는" "이런 식의 노골적인 검열은 드문 일이다. 팔레스타인문제에서는 이렇게까지 대놓고검열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라고말했습니다. 대신 훨씬 더 효과적인 방식은 출연자나 해설자를고르는 방식으로 여론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방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폭력은 유감스럽지만, 이스라엘 역시 자위권을 갖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 극단주의 세력을 경계해야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발언은 받아들여지지만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이나 인종차별적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인물에게는 방송 출연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미국의 경우, 대중에게 비인기적인 견해는 조용히 묻히고, 불편한 사실은 은근히 가려지는 방식이 매우 정교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겉보기에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교묘한 통제가 가능해지는 셈입니다. 이러한 실태를 세밀하게 추적.기록한 자료는 이미 수천 페이지에 달하며, 미국의 '페어시'나 영국의 '미디어렌즈'와 같은 언론 비평 단체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그 실태를 밝히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 사용되는 세뇌 방식이 전체주의 국가의 조잡하고 투명한 수단보다 더 정교하고 효과적이라는 논의는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자유 사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식은 명확한 주장이나 강요가 아니라 특정한 전제를 깔고 은근히 메시지를주입하는 식입니다. 그레시가 지적한 사례는 바로 이러한방식을 잘보여 줍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규칙이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암묵적인 전제들이 작동합니다. 겉으로는 토론이 허용되고 심지어 장려되기도 하지만 그 논의는 표현되지 않은 엄격한 경계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경계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내면화합니다.
조지오웰이 지적했듯이 이런 미묘한 형태의 세뇌를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이건 말해서는 안돼!"라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생각 자체를아예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당시 고르바초프와조지H W.부시 간의 협상, 특히 독일의 통일과 관련된 논의는 냉전의 유산에서 벗어날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죠.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냉전의 종식이 단지 일시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걷어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기밀해제된 정부 문서들은 냉전이 상당부분 초강대국 간의 암묵적 합의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합의란, 각국이 자국의 영향권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암묵적 허용이었죠. 러시아의 경우는 동유럽, 미국의 경우는 세계 대부분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조지H. W.부시행정부는 중동 지역을 겨냥한 개입군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방침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수십 년간 모호하게 덮어두었던 사실과 달리 중동의 복잡한 문제들을 더 이상'크렘린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미국이 오랫동안 가장 우려해 온 위협, 즉 독립적인 민족주의야말로 중동의 불안정의 진정한 원천이라는 인식이 분명해졌습니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음에도 이 위협 인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는 새로운 명분이 필요해졌을 뿐이죠. 러시아의 위협'이라는 넓은 구실이 사라지자, 그자리를 인도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명분이 채우게 됩니다. 이는 서방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전통적으로 피해를 입어 온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는 냉소적이고 날 선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논의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더 깊이 검토된 바 있습니다.
공식적인 냉전은 잠시 종식되었습니다. 조지 H. W. 부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한 약속을 지켰지만, 빌 클린턴은 즉시 그약속을 뒤집고분명하고도 확고했던 합의를 어기며, 나토를 러시아 국경까지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린턴은 이러한 조치가 국내 정치, 특히 폴란드계 유권자들을 의식한 것이었다고
친구인 보리스 옐친에게 설명했죠.
그이후 이어진 불행한 이야기들은 굳이 다시 되짚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고르바초프가 구상하고 부시 1세가동의했던 군사동맹 없는 '공동의 유럽의 집'이라는 비전은 클린턴에 의해 무산되었고, 결국 새로운 형태의 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냉전은 극도로 위험한 국면에 이르렀습니다.

- 냉전초기의 핵심 인물중 하나였던 딘애치슨은 정부가 엘리트의 계획에 따라 복종시키기위해서는 '진실을 넘어서 더욱 과장된서사' 필요하다고 인정했
습니다. 그가 말한 바로그 예시가NSC-68 같은 문서였죠.
애치슨은 사실상 NSC-68의 목적은 대대중 마음을 굴복시키기 위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있었다'고 시사했습니다.학계에서도 간헐적으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해 왔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 교수이자, 오랫동안 미국 정부에 자문을제공해온 새뮤얼 헌팅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군사개입이나 전쟁을 추진할 때, 실제 이유와는 달리 마치소련과 싸우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켜야 할 수도 있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 이후 줄곧 이런식으로 행동해 왔다."
지금벌어지고 있는 방식도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은 전세계를 무대로 움직이는 초강대국이며, 그 전략 역시 지역단위가 아니라 국가단위로 설계됩니다. 하나의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결코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사실상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더 큰 전략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우리는 종종 눈앞의 한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에만 집중한 나머지,그 일이 전세계적으로 엮인 복합적인 전략의 일부에 불과하다는사실을 간과하곤 합니다.

- 미국은 유럽에서는 나토 정상회의를 통해 유라시아 서쪽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동쪽에서는 림팩RIMPAC 훈련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유사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 해군이 주도하는 림팩 훈련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공중.지상 합동 군사 훈련으로 호주의 정치학자 개번 매코맥은 이를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전쟁 시뮬레이션'이라 표현한바 있습니다. 이 훈련에는 26개국이 참여하고, 238척의 함정, 170대의 항공기, 4척의 잠수함, 약 2만 5천 명의 병력이 투입됩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훈련이 자국을 겨냥한 일종의 '아시아판 나토 구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훈련에는 가상의 적과의 전투, 목표물 타격, 하와이 지역에서의 상륙작전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 미국은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인근에서 정기적으로 해군 작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무해한 통과'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항행의 자유' 원칙에 기반한 것으로, 중국이 이에 항의하면 미국은 인도나 인도네시아의 유사한 항의에도 동일한 논리로 자신들의 항행을 정당화해 왔다고 맞서죠. 미국은 이러한 입장을 국제 해양법에 거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법은 배타적 경제수역내에서무력의 위협이나 사용을 명확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는동맹국인 호주는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중국 배타적 경제 수역 해역에 고성능 감시.탐지 장비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 발발 시 미국이 중국 함정을 더욱 신속히 타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군사 정보 환동의 일환입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끝에서 진행되는 훈런들에 더해, 미국은 북태평양과 발트해 일부 지역에서도 활발히 군사훈련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 훈련에는 최근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와 스웨덴도 참여하고 있죠. 두 나라는 이미 상당 기간 동안 나토의 군사 체계에 통합되어 왔으며, 이제 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공식적인 회원국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우는 안보 위협'의 근거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은 양국의 군수 산업에 확실한 이득을 안겨주었고, 사회 전반을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 제국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너무 많기 때문이죠. 언제나 그렇듯이 공식적인 입장은 그럴듯합니다. 모든 군사훈련과 전략적 움직임이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 질서'를유지하기 위한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나토 정상회의의 전략 개념 문서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반면, UN기반국제질서'라는 표현은 아예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두표현은의미상큰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UN기반 질서는 국제법의 근간인 UN헌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미국 헌법에 따라 미국내에서도 최고의 법으로 인정받아야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지배은 이 원칙을 수용하 않고 역대 대통령들 역시 공개적으로 이를무시하거나 위반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 규칙 기반 질서는 유엔 중심의 국제 시스템이나 국제법에 기반한 국제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 이 질서의 정점에는 미국이 자리 잡고 있으며, 미국은 여러
국가의 실질적인 주권 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영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전 세계에 걸친 영토를 가진 미국의 부관 역할을 하고 있고, 호주나 이스라엘처럼 하위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조한다.
이른바 규칙 기반 국제 질서'란 결국 다른 나라들의 정치적 주권을 통제하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선의의 행동으로 포장하며, 비교우위에 기초한 경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나 언론 논객들은 제국이라는 표현을 쓰길 꺼리기 때문에, 그 대신 규칙기반질서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한다.'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3) 2025.08.27
10년후 세계사 미래의 역습  (1) 2025.08.22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6) 2025.08.22
위어드  (4) 2025.08.21
방치된 믿음  (6) 2025.08.12
Posted by dalai
,

20250904

Quote of the day 2025. 9. 4. 07:09

'Quote of the d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906  (0) 2025.09.06
20250905  (0) 2025.09.05
20250903  (0) 2025.09.03
20250902  (0) 2025.09.02
20250901  (0) 2025.09.01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