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그리파는 로마의 공공시설을 담당하는 직책인 아이딜리스로서 로마에 설치된 각종 시설을 조사해 통계를 냈는데, 1세기 로마에는약 170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4세기 무렵에는 하루에 2,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11개의 테르마이와 926개의 발네아가 있었다.
많은 귀족과 부유한 시민들이 자신의 집에 발네아를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공공의 테르마이를 선호했다. 로마에서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친분을 맺고 의견을 교환하는 사교활동이었다. 테르마이는 개인적인 친분을 다지고 사회적 및 정치적 의견을 나누는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처럼 로마인들의 일상에서도 테르마이 방문은 중요한 일과였다. 로마인들은 아침에 일어나 오전 내내 업무에 집중하다가 오후 2시에서 3시가 되면 테르마이로 향했다. 목욕탕이 개장 준비를 마치면 문지기가 종을 울리고, 입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문지기에게 돈을 지불하고 들어간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목욕을 하며 서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해가 지면 목욕탕은 문을 닫는다.
테르마이 내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포다테리움이라는 탈의실을 만난다. 여기에는 긴 벤치가 놓여 편안하게 옷을 벗을 수 있고, 개인사물함과 바구니가 구비되어 있다. 현대 한국의 목욕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에도 손님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나 돈, 귀중품을 노리는 절도범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자물쇠와 열쇠 대신 노예가 귀족들의 짐을 지켰다.
테르마이 옆에는 운동 공간인 팔레스트라가 있었다. 운동을 한 뒤에 목욕했던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공간으로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레슬링, 복싱, 멀리뛰기 등의 운동을 하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은 냉탕인 프리기다리움 rigidarium에서 시작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테르마이의 프리기다리움은 웅장함으로 유명하다.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천장 높이는30m에 달한다. 이 화려한 프리기다리움은 성당으로 변모해 지금도 남아 있다.
프리기다리움에서 나온 로마인들은 온탕인 테피다리움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몸을 따뜻하게 만든 후 칼다리움, 즉 열탕으로 들어간다. 칼다리움에는 반원형의 벽감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움푹 들어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양피지로 만든 책을 읽으며 땀과 노폐물을 배출했다. 그 후 테피라디움으로 돌아와 몸에 기름을 바르고 스트리절로 때를 굵어냈다. 1세기 중반 정치가 페트로니우스(20~66)가 남긴 글에는 양털로 짠 옷감으로 때를 밀어주는 노예 이야기가 나온다. 양털 옷감과 노예가 그 시절의 때수건과 세신사였다.
온탕에서 나오면 다시 처음 방문했던 냉탕으로 돌아가 몸을 식힌다. 열탕에서 몸을 덥힌 뒤에도 냉탕에 들어간다. 앞선 고대 그리스 시대 히포크라테스가 주장한 4체액설은 로마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인들은 체액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뜨거운 불과 찬물을 번갈아 들어갔다.
-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는
명상록에서 "목욕이 당신의 마음에다 무엇을 선사하느냐? 기름, 땀, 먼지, 기름이 뜨는 물, 그리고 구역질 나는 모든 것을 선사할뿐이다. 어느 분야든 인생은 바로 그런 것이고 인생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은 그러한 것이다." 라고 물질문명의 추함에 목욕을 빗대었다.
목욕과 테르마이에 대한 예찬과 불평, 경고가 쏟아져 나온 것은 고대 로마에서 목욕이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성했던 로마의 목욕 문화도 변화를 겪는다. 이민족의 침입과 금욕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화려하던 목욕 문화는 점차 쇠퇴한다.
- 로마의 목욕 문화와 공중목욕탕은 8~9세기까지 금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점차 쇠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537년 고트족이 로마의 송수로를 파괴하면서 가속화되었다. 냉탕, 온탕, 열탕 모두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송수로가 파괴되고 물 공급이 끊어지자 공중목욕탕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타민족의 침략과 제국의 몰락으로 테르마이로 대표되는 공중목욕탕은 사라졌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마인들이 정복했던 지역에 목욕 문화가 남았다.
제국의 전성기 동안, 로마는 유럽 곳곳을 정복하며 목욕 문화를 전파했다. 군인들은 고향에서처럼 목욕을 즐기기 위해 주둔지에 공중목욕탕을 세웠다. 로마인들이 정복한 지역 중 온천이 있는 곳은 온천 도시로 발전했다. 영국의 바스와 벅스톤, 프랑스의 비시와 엑스레병, 독일의 아헨과 비스바덴, 오스트리아의 바덴 등이 그 예이다.
- 2022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의 하맘 출입이 금지되었다. 탈레반은 놀이공원과 헬스장에 이어 하맘 사용까지 제한하며, "모든 집에 목욕탕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놀이공원이나 학교 출입이 제한되고, 보호자 없는 장거리 여행이 금지되며, 얼굴을 가리는 것까지 요구되는 상황에서, 하맘까지 금지당했다.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귀족들도 제 집에 하맘이 있는데도 하맘에 출입했다. 하맘이 몸을 씻기만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공동체의 대소사를 논의했다. 각종 의례가 이루어졌다. 탈레반은 그 공간이 해온 사회적 역할을 알기에, 그곳에서 여성들의 유대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기에 하맘을 금지했을 것이다.
- 로마 제국이 쇠락하고 목욕을 죄악시하는 기독교가 번성하자 유럽에서는 공중목욕탕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깨끗함에 대한 선호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었을까? 13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교회 안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 향을 피웠다.
유럽에서 잊혔던 목욕 문화는 십자군 전쟁(1095-1291)을 통해 다시금 유럽 땅을 밟았다. 성지 탈환을 위해 동쪽으로 향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설탕, 살구, 대추 등의 식재료와 체스와같은 유희거리, 이슬람의 제지.의학.과학 기술이 유입되었다. 이렇게 유럽에 들어온 것 중 하나에 목욕 문화가 슬그머니 끼어 있었다. 고대로마가 남기고 이슬람식으로 변형된 목욕 문화였다.
전쟁을 거처 돌아온 목욕 문화는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개인이 집안에 목욕탕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 공중목욕탕도 속속들이 등장했다. 고대 로마의 테르마이와 다르게 물을 끓여 증기로 공간을 채우는 방식이어서 건설도 수월했다.
기독교가 목욕 문화를 억제하려 했어도 사람들의 일상에서 목욕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14세기 런던에는 최소 18개의 목욕탕이 있었고, 피렌체에는 목욕탕이 즐비한 거리가 적어도 세 곳이 넘었다. 1292년 인구가 7만 명이었던 파리에는 무려 26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공중목욕탕은 어떠했을까? 로마의 웅장한 테르마이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한증과 욕조가 전부였다. 욕조는 주로 나무로 제작되어 별도의 방에 설치되었다. 목욕탕을 방문하면, 첫 번째로 증기를 셋고, 이어서 모두 함께 나무 욕조에 몸을 담갔다.
- 산업의 발달과 함께 의학 지식도 발달했다. 1861년 프랑스의 생화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는 질병과 미생물의 연관 관계를 밝혀냈다. 그는 유명한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병이 자연발생 하는 것이 아니라 미생물에 의해 등장하는 것임을 입증했다. 파스퇴르 이전에도 세균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의 실험은 세균의 발생을 눈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믿지 않았던 유럽인들을 납득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도 탄저병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손가락보다 작은 플레이트 위에 놓인 세균이 인체를 죽인다는 것을 모두 현미경을 통해 보았다. 불결한 환경과 악취라는 모호한 대상보다 눈으로 불 수 있는 세균이 싸워야 할 대상으로 등극했고, 세균설은 서구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병을 치료하고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1930~1940년대에 설파제와 항생제라는 해결책이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가 미생물과 맞서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욕이었다. 그래서 20세기 초입부터 몸을 씻는 습관은 점점 널리 받아들여졌다. 목욕을 위한 물품의 개발도 늘어났다. 그 대표 주자가 비누다. 비누와 바디워시, 때수건 등을 이용해 광적으로 몸을 씻어내는 시대가 도래했다.
- 가족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세면대를 공유하는 현대와 다르게, 조선시대에는 개인별로 전용 대야를 소유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남편, 본인,그리고 하인들까지 각자의 방에 자신의 대야를 걸어두었다.
따라서 하인까지 두며 살았던 부유한 양반 가정의 경우에는 한집에서 사용하는 대야만 해도 열 개가 넘어갔다. 밥그릇보다 대야의 수가 더 많았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 사람들이 부분욕을 선호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전신욕을 즐기던 시절보다 더 지저분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 조선시대 사람들이 항상 부분욕만 한것은아니다. 전신욕도 중요한 연례 행사였다. 서민들은 음력 삼날 단오, 유둣날 같은 세시풍속을 따라 야외의 냇가에서 몸을 씻었다. 실록에는 옥에 갇힌 죄인들에게도 한 달에 한번 머리를 감을수 있었으며, 5월부터 7월까지 여름 석달 동안은 원하는 사람에게 한차례 목욕을 허락하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전신을 씻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불결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사람들은 남의 눈을 피해 혼자 있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몸을씻었다.
- 1665년 4월 17일 현종이 온양 온천으로 향할 때의 광경은 대단했다. 왕과 왕족뿐만 아니라 영의정, 우의정, 병조판서, 도승지 등 수많은 관료와 의원들이 동행했다.49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예별감 30명, 어영군 1,200명, 기병 50명, 군뢰와 예비군에 해당하는 잡색 400명이 동원됐다. 거기다 금군 500명, 기마병 400명, 포수 800명이 수행했다.
실록에 기록된 인원만 해도 이만큼이었고, 내관과 궁녀, 하인들을 비롯해 이들을 수송할 군마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았다. 궁궐 한 채가 온양으로 이동하는 격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과 말들이 필요한 먹거리와 자원을 한양에서 온양까지 운반해야 했다. 게다가 이 모든 인원이 온양 행궁에서 편히 실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럴수 없었다. 일부 물자는 도성에서 조달되었겠지만, 온천 지역에서도 감당해야 했다. 부담이 컸다.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특산품부터 군사들이 머물 병영을 짓기 위한 땅까지 제공해야 했다.
농번기에 왕이 행차하면 백성들은 왕과 신하들을 접대하느라 밭을 임시 병영으로 내놓았다. 그해 농사는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의 방문은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생계가 끊어지는 위협이 될 수있었다. 백성들이 왕에게 온천의 존재를 습기고 싶어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매일 목욕하기 위해서는 각 가정마다 목욕탕을 설치하는 것이 제일 낫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집에 목욕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며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모든 조선 사람이 집 안에 욕실을 설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따뜻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과 온수 시설까지 갖추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 공중목욕탕이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도 상수도가 설치되고 관련 법령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은 1894년부터1 1895년. 1900년부터 1902년.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세차례에 걸쳐 상수도 시설을 구축했다.' 인천은 1906년부터 배관을 묻어 1910년부터 수돗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1903년 남산 계곡에 수도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08년 뚝섬에 정수장을 마련해 사대문 안과 용산 일대 주민에게 물을 공급했다.
1912년 당시 서울 인구는 약 30만 3,000명이었으며, 급수 인구는 7만8,000명으로, 급수 보급률은 26%에 불과했다.'3 러 상수도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에 설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었던 조선 사람은 도시에 거주하는 일부 상류층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 공중목욕탕은 상수도, 하수도, 물, 화력 등 다양한 자원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시설이다. 이러한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운영에 지장이 생긴다. 일제는 전국적인 위생 정책을 시행하려 했지만, 필요한 시설은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목욕탕영업단속규칙은 공중목욕탕의 관리와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기반 시설 확충에 대한 조항은 미흡했다.
가장 큰 문제는 깨끗한 물의 화보였다. [목욕탕영업단속규칙]에 따라 매일 물을 같아야 했으며 따라서 공중목욕탕 운영에는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상수도 시설은 일본인에게 우선 제공되었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는 상수도와 하수도가 설치되어 공중목욕탕이 세워졌지만, 조선인이 사는 지역은 그러한 시설이 부족했다.
이 시기에 공중목욕탕은 주로 경성, 인천, 부산 등의 도시에, 그중에서도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조선인의 거주지나 도시 바깥의 위생 환경은 식민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공중목욕탕은 도로 교통이 전국적으로 완비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00년대 찜질방이 성행할 때까지, 읍면 소재지의 버스 터미널 옆이나 큰 재래시장 근처에서 공중목욕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장이 서는 날에는 목욕탕이 북적거렸다. 월출산이나 마이산 같은 유명 관광지에는 관광호텔이 공중목욕탕을 겸영하기도 했다. 목욕하기 편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공중목욕탕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농어촌 인구가 감소하고, 남은 인구도 빠르게 고령화되면서 공중목욕탕의 이용객이 줄어들었다. 운영 비용은 계속해서 오르고, 수익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농어촌 지역 경제의 어려움과 지역 소멸 위기는 공중목욕탕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지역 사회의 오래된 공중목욕탕은 단순한 몸 씻는 곳을 넘어서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도 한다. 이곳의 이용객들은 서로 익숙한 사이로, 목욕탕에서 동네 소식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한다. 공중목욕탕하나가 문을 단는다는 것은 마치 커뮤니티의 구심점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 61년에는 온수 보일러가 등장했다. 보일러 구입에 2~3만 환, 욕실 바닥 타일 공사가 5~6평 기준 15만 환, 공가비를 포함하면 부대비용 제외 최저 18만 원이 필요했다. 그 비용만 들이면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 집 안에서 목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노동자 가구평균 월수입이 52,870환이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온수 보일러 설치는 석 달 반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돈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목욕탕을 설치할 공간이 있을 때 가능하다. 노동자 가구의 평균 주거비가 월 3,600환이었던 점을 봐도,52 온수 보일러 설치는 상류층의 이야기였다.
광복 이후에도 서민층의 목욕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정내 목욕 공간이 생겼다고 해도, 여전히 부분적으로만 몸을 씻었다. 많은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했을 것이다.
-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한국의 주거 형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양식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된 아파트 건설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결국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아파트에는 각 집마다 상수도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고, 화장실도 집안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아파트 정착 초기부터 씻기 좋은 시설이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1962년 마포아파트 건설을 시작으로 아파트 주택 형태가 대한민국의 주거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와 무허가로 난립하는 판자촌, 심화되는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정된 토지위에 고밀도로 쌓아 올리는 집합 주택은 훌륭한 대안이 되었다. 마포아파트는 박정희 정부의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현대 문명의 혜택 제공을 목표로 삼았다. 거주지의 평면적 확장을 지양하고 고층화를 시도했으며 국민의 생활양식을 간소화하고 공동생활의 습성을 향상시키는 한편 수도 정비와 미화를 추구했다.
한국에서 배스 유닛이 처음으로 설치된 곳도 이 아파트이다. 배스 유닛은 목욕, 배설, 세면을 한 공간에서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초기에는 마실 물도 귀한 판에 아파트에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강남 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도시 중산층의 주거지로 인정받게 되며 배스유닛형욕실은 점차 보편화되었다 강남뿐만 아니라 용산구의 한강맨션아파트,송파구의 잠실주공아파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에서도 이러한 욕실 형태가 설치되며 일반화되었다.
- 고급 사우나 입장료는 일반 공중목욕탕보다 월등히 높았다. 1979년에 공중목욕탕의 성인 목욕값이 400원일 때, 사우나는 1,000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신고된 가격이며, 실제로는 그보다 더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다.
고급 사우나는 고속 경제성장의 그늘, 사치, 과소비, 퇴폐 풍조와 결합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84년 매일경제는 대낮에 사우나를 즐기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을 보도하며 비판했다. 이들은 서너 명이 짝을 지어 아침부터 사우나로 향했고, 하루 종일 목욕과 휴식을 번갈아 하며 점심과 간식을 먹었다. 팁을 포함해 하루에 15만 원을 소비했다. 기사는 월 10만 윈 이하를 버는 저임금 근로자가 많은 우리 사회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서민들의 눈길 또한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며 일침을 놓는다.
밀크탕, 오렌지탕, 쑥탕과 같은 다양한 목욕 시설을 갖춘 이곳에서는 사치스러운 서비스가 행해졌다. 손님은 목욕부터 전신 마사지, 매니큐어, 머리 세팅까지 원스톱으로 제공받았다. 때로는 불법 고용된 남성 안마사에게 퇴폐적인 마사지 서비스를 받거나 도박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성 전용 공중목욕탕의 퇴폐 영업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1960년대 초 법적 제재가 없다는 맹점을 이용해 몇몇 한증탕에서는 여성 입욕 보조원을 두고 음란 행위나 성매매가 이루어졌다. 사우나 내에 이성 입욕 보조원이 출입하는 것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공중목욕탕에서의 성매매는 암암리에 퍼져나갔다
밀실을 설치해 도박이나 성매매 등 불법 행위를 자행하는 호텔 사우나도 있었다. 1991년에는 서울시가 서울 시내 관광호텔의 한증탕, 사우나탕 등 92개 업소를 대대적으로 단속했고 그중 29개 업소가 밀실 설치와 도박, 퇴폐 행위로 적발되었다. 적발된 한 호텔은 시각장애인 대신 일반 여성 종업원을 안마 보조원으로 고용하고, 밀실을 아홉개나 설치해 35일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 97년 외환위기 이후 찜질방은 급격히 증가했고, 2000년대 초반에 이르면 목욕 시설을 흡수하며 더욱 대형화되었다. 전통적인 한증을 포함해 피트니스 센터, 만화방, 노래방, 미용실, 네일샵 등 다양한 시설을 흡수해 복합 레저 시설로 거듭났다. 고대 로마의 황제가 세운 목욕탕, 테르마이와 다를 게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찜질방의 형태는 이때 완성되었다.
찜질방이 한국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은 비결은 무엇일까? 1995년 신문 기사에서 한 여성은 "여성들의 경우 마땅한 쉼터가 없었으나 찜질방은 5,000원만 내면 내 집 안방처럼 편안히 누워 쉴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했다.'8 찜질방은 사우나보다 온도가 낮고, 목욕탕처럼 옷을 완전히 벗을 필요도 없다.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만질 필요 없이, 옛날 온돌방의 아랫목처럼 따뜻하게 몸을 녹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게다가 집처럼 밤새도록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누구든 어떤 자세로 누워 있어도 주위 사람들은 그저 못 본 척 지나간다. 내 집안방의 아랫목 같은 편안함을 제공하는 곳, 그곳이 바로 찜질방이다
찜질방은 노래방이나 피시방과 같은'방' 문화와 공중목욕탕이 결합해 탄생한 한국만의 독특한 공간이다. '방' 문화는 전화방, 비디오방, 노래방 등 1990년대를 전후로 해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전국으로 퍼진'방' 산업과 함께 등장했다. 한국 사람들은 새롭게 생겨난 방에 친구, 회사, 동료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 혼자가 아니라 끼리끼리 방에 방문해 함께 즐기는 방문화를 발달시켰다. 방'은 소집단주의적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찜질하고 목욕하는 사적인 공간이 '방'이 되었다. 평소 밖에서는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던 행동도 방 안에서는 할 수 있다. 방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격식에 얽매일 필요도 부담도 없다. 찜질방은 자신들의 집 안에 있는 방을 옮겨온 또 다른 '방', 타인을 부담 없이 초대할 수 있는 방'이기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그렇지만 찜질방에 아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공동으로 땀을 흘리고 방바닥에서 뒹굴어야 하지만, 찜질방에서 제공하는 찜질복을 입으면 그 어색함이 사라진다. 방 안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도 같은 목적으로 찜질방을 찾았기에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방에서 벌어진 일은 방에 있었던 사람들만의 비밀이 된다.
- 때밀이는 공중목욕탕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몸에 낀 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따뜻한 물과 그 물을 담을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공중목욕탕이다.
때밀이는 한국 목욕 문화의 독특한 특징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피부를 깨끗이 하는 목욕법이 존재한다. 이슬람의 하맘에서는 증기로 때를 불리고 양털이나 염소털로 만든 때수건을 사용해 몸을 문지른다. 서양에서는 1830년대에 피부 호흡 이론이 등장하면서 모공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이론에 따라, 따뜻한 물에 3~10분 정도 몸을 담근 후에는 피부를 문질러 더러움을 제거하는 목욕법이 널리 알려졌다.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공중목욕탕을 이용했던 한국인들도 이러한 방식을 접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극단적이었다. 피부를 씻는 것이 아니라 때를 벅벅 밀었다'.'
때를 세게 밀어내는 목욕 관행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공중목욕탕이 문명과 미개, 깨끗함과 더러움, 지배와 피지배의 상징적 공간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몸에 낀 때는 제거해야 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광수는 목욕을 두고 "육신의 때뿐만 아니라 정신의 때도 씻어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지식인들의 사정일 뿐, 서민들에게는 비싼 목욕료 때문에 한 번 목욕탕을 이용할 때 최대한 오랫동안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이유가 더 첫을 것이다. 광복 후에도 목욕료는 여전히 비썼고 한 번 목욕탕을 방문하면 최소 2주는 다시 방문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능한 한 깨끗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몸을 셋어야만 했다. 그 과정에 비누와 이태리타월이 가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