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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5.10.29 20251029
  6. 2025.10.29 마키아벨리 르네상스 피렌체가 낳은 이단아
  7. 2025.10.28 메디치 머니 1
  8. 2025.10.28 20251012
  9. 2025.10.27 20251027
  10. 2025.10.26 가고 싶다 퍼렌체

20251031

Quote of the day 2025. 10. 3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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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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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유한 상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된 르네상스 예술
르네상스 시대 예술은 신앙심 깊은 평신도들의 시신을 탁발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수도원 지하에 매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경건함과 더불어 황금도 많이 가지고 있어야 선조들의 시신을 수도원 지하에 안장할 수 있었다. 또한 후원의 대가로 수도원 내부에 기도실을 분양받은 부유한 상인들은 기도실을 장식하는 의무도 지켜야했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이 수도원 저 수도원으로 불려다니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예술이 선을 보이던 1300년대 초반, 수도원 성당의 기도실을 장식할 작품의 주제는 해박한 종교 지식을 갖춘 고위 성직자가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작품 제작 비용을 지불한 상인들은 가문의 위상을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나 표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이러한 요구를 자신들만의 특권이자 명예로 생각했다. 교회는 막대한 경제적 후원을 하던 이 상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토지 소유권을 중요하게 보호하던 당시 시민법(게르만법)에 따라 자신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임대료나 농산물은 토지 소유자의 물이 되듯, 자신의 토지 위에 설립된 교회도 자기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스크로베니에게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당시 평신도들은 십일조를 냈다. 그런데 교회를 설립한 소유자가 교회 관리를 맡으면서, 이 십일조는 교회 소유자의 주머니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니까 아레나 예배당의 경우처럼. 자신의 토지 위에 교회를 짓게 되면 주말마다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더구나 수익을 낳는 교회는 후손에게 상속이 가능했다. 교회 후원권한을 사고팔 수 있었듯이. 교회 또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어버렸다(후에 루터에 의해 이뤄지는 종교개혁의 대상이 된다). 교회가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가장 안전한 투자처가 된 셈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대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엔리코 스크로베니의 두 손은 어느덧 만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미다스의 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다스가 그랬듯 스크로베니의 욕망 또한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 피렌체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토착귀족들은 뜻하지 않게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때문에 퇴장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패하자, 영국 왕(에드워드 3세)에게 막대한 자금(136만 5000 피렌체 금화. 한화로약 10조 원 정도)을 빌려준 토착귀족들이 모두 파산했기 때문이다. 이사건으로 토착귀족들은 200여 년 동안 피렌체 사회에서 누리던 모든 특권을 신흥상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소규모로 무역을 하던 신흥상인들은 토착귀족들이 독점해왔던 영국과의 양모 무역과 금융업(고리대금업)을 이어받아 부를 축적한다. 막대한 자금력까지 확보한 신흥상인들은 어깨를 펴고 시청사를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자신들만이 선거권을 갖고 공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흥상인들은 무엇보다도 피렌체라는 신생 도시국가의 국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외국과 무역도 가능해지고, 유럽각국에서 지점을 운영중인 은행을 보호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명예만을 중요시했던 토착귀족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신흥상인의 리더는'카를로 스트로치& 콤파냐'라는 은행을 통해 고리대금업으로 피렌체 최고의 부자가 된 스트로치 가문이었다.

- 고리대금업자로 놀림 받던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한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한 고리대금업자를 "주둥이 셋 달린 주머니를 달고 있을 그 잘난 지엄한 기사"라고 묘사했다(지옥 편, 17곡). 이 잘난 기사가 바로 1140년경에 피렌체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고리대금업자 조반니 디 부이아몬테 데베키이다(이 가문은 세 마리의 염소를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이후 피렌체에서는 고리대금업자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이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이름을 약간 바꾸어 그들에게 비치라는 별명을 붙였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의 실질 권력자가 된 코시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 '비치'라는 별명이 붙은 것 또한 이들이고리대금업을 했기 때문이다. 코시모의 아버지 조반니 데 메디치도 '조반니 디 비치'라고 불리게 된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던 대부업자들의 연합체인 은행가 길드의 기록을 보면 오래전에 피렌체로 이주해 온 코시모의 할아버지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피렌체로 이주해온 코시모의 선조들은 1200년대 중반부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단지 후대의 역사가들이 코시모의 선조들이 해온 고리대금업을 은행업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을 뿐이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메디치 가문에 후한 점수를 주던 후대 학자들 덕분에 은밀하게 감추어져왔던 것이다.

- 아내의 결혼 지참금을 메디치 은행의 종자돈으로 삼은 조반니
코시모의 아버지 조반니는 경제적 감각이 남달랐고, 관리 능력 또한 뛰어난 사업가였다. 어쩌면 뛰어난 투자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한 1380년대 후반, 조반니는 가문의 주력 사업이었던 고리대금업에서 점차 손을 떼고 부동산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이 퍼지게 되면 가장 안전한 자산인 부동산으로 수요가 몰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흑사병이 피렌체에 다시 창결하자, 피렌체 상인과 은행가 들은 조반니의 예측대로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조반니는 일찍이 구입해놓은 부동산을 다시 팔아서 높은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메디치 가문의 이름으로 등록된 부동산 거래가 무려180건이 넘었다.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 셈이다.

- 고리대금업과 부동산 투자로 피렌체 금화를 금고에 쌓아둔 코시모의 아버지는 많은 지참금을 들고 온 젊은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 조반니의 부인이자 코시모의 어머니는 피렌체 외곽에 대토지를 소유한 가문의 딸로서 결혼 지참금으로 무려 1500피렌체 금화를 가져왔다(12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당시 피렌체 평민들이 딸의 결혼 지참금으로 쓴 금액이 평균 100플로린 미만이었으니 조반니는 장가를 잘 든 셈이다. 당시에 100플로린을 마련하지 못한 가난한 집안의 딸들은 수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반니는 부인이 가져온 결혼 지참금을 사촌들이 운영하는 로마의 은행에 투자하면서 은행의 동업자가 된다. 이어 로마 지점의 운영 경험을 살려. 조반니는 1397년에 다른두명의 투자자와 공동으로 피렌체에 은행을 설립한다. 이 은행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부를 축적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피렌체 은행이며, 후에 교황의 자금을 관리하는 주거래은행이 된다. 이때 코시모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당시 피렌체 은행에 메디치 가문과 공동 투자를 했던 가문은 피렌체 토착귀족 출신으로 1340년대까지 도시에서 가장 부유했던 바르디 가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코시모가 바르디 가문의 딸과 결혼하면서 메디치 가문에는 피렌체 귀족의 피가 섞이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디치 가문이 귀족이 된 것은 아니다.

- 이어 조반니가 베네치아에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새로 설립하고, 그의 아들 코시모가 제노바, 브루게, 런던, 아비농, 밀라노, 피사로 지점을 확대하여, 사업을 메디치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국제적 은행으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이 가문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거대한 상업자본 형성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코시모가 아버지 조반니로부터 불려받은 유산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피렌체 금화로 물려받은 황금 덩어리만 해도 17만 8000플로린, 현재 우리 돈으로 140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또한 피렌체 도심의 부동산과 고향(무젤로)에 있는 대토지, 로마에 있는 메디치 은행과 양모 및 비단 무역 사업체도 동시에 물려받았다.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따르면, 당시 코시모가 보유한 재산은 100년 후에 영국의 번영을 이끌어나가는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시대의 연간 재정 수입보다 많았다고 한다.

- 하지만 코시모는 가문의 위상을 내세우기보다는 시민들이 피렌체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대상을 집중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장식하거나 자신의 저택을 신축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 막대한 자금(약 300억 원)을 들여 시민들이 자긍심을 느낄 만한 산 마르코 수도원을 먼저 짓게 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된 후부터 예술작품은 대부분 '화려함' 보다는 '장엄함'이 주조가 된다.' 코시모는 화려함을 우선시하는 화가들보다 장엄한 건축물을 짓고 장식하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같은 건축가나 조각가 들을 불러들였다. 당연히 시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서 코시모는 이들 건축가나 조각가 들에게 자신의 가문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는 절제와 신중함을 요구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를 경우 우리는 메디치가의 예술 후원이 '겸손'과 통큰 기부'에서 비롯됐다고만 생각하기 쉽다.
권력을 드러내는 가치로 전락한 예술을 시민의 예술로 탈바꿈한 코시모의 적극적인 예술 정책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새로운 가치관과 더불어 코시모 특유의 날카로운 정치 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429년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순여덮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반니는 시민을 존중하는 일에서 가문의 가치를 찾으라며 시민 공동체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유언으로 남겼다(메디치 가문은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행운이 부여해주고 너의 어머니와 내가 열심히 일하여 유지할 수 있었던 거대한 부를 너에게 남긴다. 나는 토스카나 지역의 다른 상인들보다도 더 큰사업을 남긴다. 선하고 훌륭한 시민들을 존경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시민들은 우리 가문을 그들의 안내자로서 빛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만약 네가 조상들의 전통에 신뢰를 가진다면 사람들 또한 너를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불쌍한 자들에게 친절하고 자애롭게 대하며, 너 자신을 내바치고 성심을 다해 그들을 역경에서 구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사악한 일을 행하려 하지 않는 한, 절대 사람들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말거라! 조언을 주려고 하기보다는, 공정하고 올바른 이유를 들어 문제들을 논의하라. 궁(시청사)에 자주 들르지 말고,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순종하며, 많은 표를 얻었다 하여 자만에 취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도록 보살피고, 도시의 상업을 증진시키려 노력하거라.
소송이나 공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 정의를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정의에 의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얼룩도 남기지 않으며. 어떠한 악행도 스스로 저지른 바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오명이 아닌 영광을 너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 완성된 르네상스창조의 공간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의 권력 세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메디치 가문의 수중에 들어간 르네상스 창조의 공간에서는 신에게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낮선 사람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철학자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철인배스정치)을 피렌체에서 실험하려고 했던 르네상스 인문학자들이다. 이제 르네상스 창조의 공간은 피렌체 시민들이 단순히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던 장소를 넘어. 인문학자들이 그리스의 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치는 공간으로 변모되기 시작한다. 이제 정치가로 변신한 인문학자들에 의해 르네상스 창조의 공간에는 고대 문화가 부활하는 모습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때 이교도처럼 여기던 그리스 신들의 모습과 로마제국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예술작품의 대표적인 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인문학 책을 들고 있었던 교황 피우스 2세(재임 1458-1464)가 눈감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봄>에 숨겨진 '새로운 시대'의 신앙
비잔틴제국에서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던 헤르메스 전서(로마가톨릭교회는 금서로 지정했다)를 어렵게 손에 넣게 된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1463년에 마침). 피치노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는 주인공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주인공을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교리를 가져다줄 예언자로 굳게 믿게 되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던 것처럼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다. 모세와 같은 시기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는 예언자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두 예언자가 탄생을 예언한 그리스도, 즉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이 구원할 인간의 모습과 운명은 서로 달랐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인간을 하느님이 되려는 욕심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으로 여겼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하느님처럼 되려 했던 인간은 영원히 '자만의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예언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인간도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한 원리를 잠깐 들여다볼 수가 있다고 믿었다. 신은 자신과 닮은꼴로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을 항상 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여졌다. 특히 인간은 쾌락적인 삶에서 빠져나와 명상하는 삶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이로써 피렌체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구원관이 피렌체에서 탄생하게 된다.
물론 새로은 구원 사상을 찾는 일은 인문학자 피치노가 맡았다. 자연과학이나 의학의 발달이 오늘날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당시에 죽음, 내세, 영혼과 같은 문제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사람들은 플라톤 아카데미 인문학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신비주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생각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자연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새로운 구원관의 발견으로써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치노의 신비주의는 헤르메스주의"라는 이름까지 얻고, 일부 교회들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형상을 건물에 새겨 넣을 정도로 이 예언자를 배하게 되었다.
신비주의에 빠진 인문학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모임 장소가된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할 <봄>이라는 작품을 기획하면서, 헤르메스의 형상을 그림 속에 넣는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로렌초의 앞길에 놓인 어려운 문제들을 최고의 신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가 지팡이로 해결해주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 중세인의 최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코시모가 피렌체 권력을 장악하던 1459년 당시에는 파치 가문의 재산이 메디치 가문보다 많았다. 더구나 피렌체 토착귀족의 후손이었던 가문은 여러 유력 가문 자손들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피렌체 사회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로렌초를 대신해 정치 전면에 나선 인문학자들은 오랜 고민 끝에, 메디치 가문보다 황금이 많았던 파치 가문을 고립시켜야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파치 가문의 자손들이 피렌체 정부의 공직에 일절 참여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여성이 유산을 상속할 수 없는 법을 제정하여, 파치 가문에 막대한 재산 피해까지 입혔다. 당시 파치 가문은 부유한 바로메이 가문의 외동딸과의 결혼으로, 얼마 안 있으면 그녀의 상속재산이 자신들에게 귀속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파치 가문의 수장 야코포 데 파치는 메디치가에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시대에 이르면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자들은 유력 가
문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제치고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인문학자들
의 학문적 요람인 플라톤 아카데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정책을 만들어내는 싱크탱크가 되었다. 인문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정치 실험에 나서게 된다. 피렌체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시험해보는 실습장이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묘사한 짧은 문장으로도, 당시 플라톤 아카데미에 참여하고 있던 학자들의 면면과 그들이 담당한 역할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피렌체에는 폴리치아노의 지휘 아래 인문학이 번창하고 있었다. 그리스어는 도메트리오Dometrio 경, 철학과 예술은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피코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 경을 비롯한 다른 율륭한 학자들에 의해 발전하였다. 로렌초는 피렌체의 오래된 토착 문화에도 관심을 보였고 음악. 건축, 미술, 조각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예술을 (로렌초의) 손과 마음에 담음으로써 도시 전체가 그 아름다움으로 넘쳐났다.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로렌초를 기쁘게 하기 위헤 예술가들이 다투어 경쟁하였기에 모든 예술은 더욱더 번성해갔다.

- 고대 로마제국 황금시대의 옷으로 치장되는 피렌체 르네상스
메디치 가문에 행운은 계속되었다. 로렌초의 둘째 아들 조반니가 열세살이 되던 해에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이다(후에 교황 레오10세가 된다). 어린 조반니가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데소요된 비용이 무려 10만 플로린(한화로 800억 원 상당)이었다고 한다.13 로렌초와 측근에 있는 인문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을 직접 확인할 수는없지만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당시 종교법에 의하면, 추기경으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열여섯 살이 넘어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세속권력의 주인공이었던 로렌초와 인문학자들은 교황청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종교권력까지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제 이들은 중세 시대와 단절된 새로운 시대를 연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권력을 원했다. 그들은 세속권력과 더불어 종교권력까지도 세습할 수 있게 하여 메디치 가문의 번영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이렇게 1400년대 후반 피렌체를 중심으로.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 평화가 유지되던 '팍스 로마나 시대'의 영광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펼쳐진다. 그리고 로렌초 측근에 있던 인문학자들의 정치적 욕망이 변화하면서, 르네상스 창조의 공간은 로마제국 황금시대의 옷으로 갈아입게 된다.
인문학자들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을 로렌초에게 투영하기 위해. 로렌초 우상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피렌체 사회는 한편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황금시대로 탈바꿈하기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별들의 움직임에서 인간의 운명을 읽는 점성술과 신비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 1397년 코시모의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가 5500플로린. 바르디 가문이 2000플로린, 그리고 다른 가문이 2500플로린, 이렇게 총 1만 플로린(80억 원)을 투자해 피렌체에 새로운 은행을 열었다. 조반니가 사망할 때까지 23년 동안 메디치 은행은 15만 2820플로린의 수익을 올렸다. 수익의 4분의 3은 메디치가문의 몫이었다.
메디치 은행의 주 수익원은 해외 무역에 필요한 돈(오늘날의 환어음)을 결제
해주는 환전업이었다. 1463년에 베네치아의 메디치 은행이 한 기업의 요청으
로어음을 발행해준 3개월 후에 런던의 메디치 은행이 어음 증서를 소유한 사람에게 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한 환어음을 살펴보자.'5 이를 통해 메디치 은행이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세 달 동안 메디치 은행은 환전 수수료로 34다카트를 받았다. 연간 24~25퍼
센트에 해당하는 수익률이다. 메디치 은행은 이러한 방식으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런던과 벨기에의 브루게에 있는 메디치 은행의 해외 지점들은 환어음을 결제해주는 일 외에도 양모를 수입하여 만든 옷을 다시 수출하는 무역 거
점 역할을 했다. 비단 무역도 양모 사업과 같은 형식으로 운영했다. 그래서 해
외 지점들 중에서 런던과 브루게 지점의 비중이 컸다. 메디치 은행의 총지배인이 된 프란체스코 사세티도 열아홉 살 때부터 브루게 지점에 근무했으며, 선임자들을 제치고 이 지점의 총책임자로 승진하였다.
메디치 은행 중에서도 교황청이 있는 로마 지점의 역할이 중요했다. 교황청
의 금고 역할도 중요했지만, 교황청 소유의 톨바 광산에서 생산되는 백반의 수출 독점권을 메디치 은행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반은 양모에 광택을 내고 착색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광물이었다. 코시모가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있던 시기만 해도 교황과 사이가 좋아 백반 광산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결과 메디치 은행은 번성했다. 메디치 은행의 번성기는 1450년대 중반으로, 해외에 있는 지점과 소규모 점포까지 합하면 총 72개나 되었다
하지만 로렌초 시대에 들어서면, 백반 광산의 독점권과 교황청의 금고 관리
도 파치 가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영국과 브루게 지역의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양모를 가공하면서. 피렌체로 들여올 수 있는 양모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디치 가문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런던과 브루게 지점이 문을 닫았고, 프랑스에 있던 아비농 지점도 문을 닫았다. 이어 로마 지점과 베네치아 지점까지 폐쇄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사업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이 경제적 어려움율 겪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로렌초는 사업 운이 안 좋았다. 사업을 책임진 해외 지점의 지점장
들이 상인이 아니라 마치 귀족처럼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손
실은 외국의 지점에서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피렌체 정부는 로렌초에게 거액
을 지원해야만 했다." 또한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로렌초의 사업
이 기율게 된 원인에 대해 "정부. 기업의 낭비와 비효율성 때문으로, 귀족은
상인으로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같은 현상을 놓고 정치가와 경
제학자의 분석은 서로 비슷했다.

- 로마제국 탄생의 어머니 비너스를 피렌체로 모셔오다
로렌초를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열어갈 영웅으로 신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종교권력이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당시는 기독교를 위해 순교하거나 생전에 기적을 행한 고위 성직자들만이 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발 뒤로 물러선 인문학자들은 당시 피렌체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던 점성술을 활용하여, 피렌체에도 황금시대가 오고 있다는 정치적 선전을 하게 된다.
로렌초가 집권하고 있던 당시에 점성술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피렌체 외곽에 있는 카레지 별장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로렌초는 이 별장을 '사투르누스가 재림한 장소'라고 이름 지었다. 과거에 로마를 건국한 사투르누스가 피렌체에 재림함으로써, 피렌체에도 머지않아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기원을 담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마침 신기한 현상이 피렌체 밤하늘에 나타났다.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큰 별이 나타나 동방박사들이 목격했던 것처럼, 1482년 12월에 피렌체 밤하늘에 밝은 빛을 내는 커다란 별이 나타난 것이다. 사투르누스가 재림한 장소'에 있던 인문학자들은 접성술로 탁월한 예언 능력을 지녔다는 수도사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부산을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이레적인 천체 현상을 피렌체에서 황금시대가 탄생하는 길조로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길조를 그림으로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작품에서 화가 보티첼리는 여신 비너스가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부는 바람에 떠밀려, 꽃의 여신 플로라가 환영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탈리아반도는 서풍이 불면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기 때문에. 화가는 황금시대를 잉태한 여신 비너스를 등장시켜, 피렌체에도 황금시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보티첼리는 비너스가 피렌체로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꽃의 도시 피렌체를 상징하는 꽃의 여신 플로라를 작품에 그려 넣었다. 이렇게 그림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이 보티첼리가 가진 재능 중 하나이다. 그래서 보티첼리는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인문학자들로부터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로렌초와 아우구스투스 사이에 유사성만 찾아내면, 다가올 황금시대의 주인공으로 로렌초를 우상화할 수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인문학자들은 점성술사로 변모한다.

- 판의 궁정이 완성될 즈음인 1492년 로렌초는 마흔셋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로렌초가 사망하자 메디치 가문에 의해 펼쳐지던 황금시대 광장의 입구는 두꺼운 철문으로 닫히게 된다. 신비주의의 결말은 항상 폭력과 무질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피렌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느님이 주신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앞장서서 신비주의의 잔재들을 소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렌초의 후원으로 풍요를 누리던 산드로 보티첼리가 가장 먼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사보나롤라의 발밑에 바쳤다.
이후 피렌체가 조금 안정을 찾으면서, 마키아벨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피렌체 공화정 시대가 들어서게 된다. 피렌체가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또한 코시모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겨놓은 시민공동체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다시 등장하고, 예술가들도 피렌체공화국의 가치를 상징하는 주제를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밀라노에서 활동하다 피렌체로 막 돌아온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피렌체 대성당에서 <다비드> 조각상을 제작하고 있던 미켈란젤로가 그 주인공들이다.

- 수명을 다한 '르네상스 창조의 공간', 황혼기에 접어든 르네상스
한때 '르네상스 창조의 공간'에서 르네상스인들은 종교적 엄숙함에서 벗어나 세속적 축제를 즐길 수 있었고, 인문학자들은 깊숙이 숨겨져 있던 고대 문헌들을 찾아내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을 창조해 냈다. 우리는 이들을 '창의적인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은 가톨릭 세력이 약해진 중요한 원인이 창의적인 인문학자들이 발전시켜온 인문주의에 있다고 판단했다. 인문주의의 확산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갖춘 개인이 탄생했고, 이러한 지식인들이 종교개혁을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은 반소인문주의 운동에 주력했다. 금서 목록이 제정되었고, 교황 식스투스 4세 때 시작된 출판물의 검열이 다시 강화되었다. 인문주의 정신은 이 엄숙한 가톨릭교리를 피해 숨게 된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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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0

Quote of the day 2025. 10. 30.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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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이성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하는 것은 중세에는 장려되지 않았던 인간의 사적 감정이었다. 단테에 의해서 아름다움에 매흑당하는 삶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베아트리체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정신적 몰두는 르네상스 미학의 상징적 원동력이 되었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단테가 르네상스 시대정신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단테의 이런 아름다움의 극단에 대한 지적 몰두 방식을 돌체 스틸 노보라고 불렀다. 굳이 번역하자면 상큼하고 새로운 스타일'이다. 단테는 (신곡)의 <연옥 편> 제24곡에서 "나는 사랑 때문에 영감을 받았을 때 붓을 든다. 마음속에서 사랑이 내게 속삭여주는 대로 나는 글을 써간다"라고 돌체 스틸 노보를 설명했다.
개인의 감정이 통제되던 중세와는 달리 사랑에 빠진 상큼한 삶이 긍정되었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찬미하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태동한 것이다. 단테가 추구했던 돌체 스틸 노보는 이후 300년 동안 이탈리아와 피렌체 사람들을 탐미의 세계로 이끌었고, 이 최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적 몰두를 통해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젬마와 결혼했던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만났던 아르노 강의 산타 트리니타 다리도 단테 추종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피렌체의 명소다. 

- 르네상스 문화가 찬란했던 그리스 . 로마 문명의 부활을 시도했던 창조적 재생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 첫 번째 공로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는 고대 사상을 부활시킨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의 명실상부한 선구자다. 단테가 토스카나 방언으로 르네상스를 시작했다면, 페트라르카는 유려한 라틴어로 고전 부활의 르네상스를 본궤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단테가 중세를 마감한 인물이라면,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1304년, 피렌체 인근 아레초에서 태어난 페트라르카는 당시 법률가로 간주되
던 공증인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찍부터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라틴어 고전을 접할 수 있는 지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것이다. 부친이 프랑스 남부 아비농에서 교황청과 관련된 직업을 찾으려고 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면서 소년 페트라르카는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만끽하게 된다.
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법률가가 되려고 남부 프랑스의 몽펠리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학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여전히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고전문학에만 몰두했다. 열여섯 살 소년으로 성장한 페트라르카는 유럽 최고의 법과대학이었던 볼로냐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다가, 1326년 부친이 사망하자 급히 프로방스로 돌아왔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는 여가시간과 이를 뒷받침할 재정적 후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성직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겠다는 결의보다는, 지속적인 수입이 보장되면서도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할 수 있는 일자리를 모색하던 중에 찾아낸 궁여지책이었다.
물론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고전문학을 탐독하는 일과 글쓰기였다.

- 페트라르카는 아레초에서 태어났고, 유소년 시절을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보냈으며 볼로냐 대학을 다녔고, 장성한 후로는 이탈리아와 남유럽 전역을 떠돌았기 때문에 피렌체에는특별한 역사적 흔적을남겨놓지 않았다. 의무덤덤 마지막 거주지였던 파도바에 있다. 그럼에도 피렌체 사람들은 페트라르카가 피렌체의 정신을 통해 인문주의와 르네상스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1층 로지아에는페트라르카가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있다.

-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14세기 피렌체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세 문인 중 마지막 인물. 조반니 보카치오 1813-1375. 
데카메론을 통해 시대의 절실했던 환경에 노출된 인간의 솔직한 본성을 예리한 필체로 파헤쳐 인문주의 문학의 태두로 꼽히는 인물이다.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는 피렌체에서 단테를 부활시킨 인물로도 기억되어야 한다. 피렌체 겔프 흑당의 음해로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유랑하다가 1321년 9월 14일. 라벤나에서 임종한 단테의 영혼을 피렌체로 초혼했던 인물이 바로 보카치오다. 그는 피렌체 시민들의 간절한 탄원에 힘입어 최초로 단테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대한 공개 강연을 개최했다. 단테가 유랑자의 회한 속에 임종한 지 무려 52년이 지난 1373년에 보카치오가 처음으로 단테 강연을 피렌체에서 시작함으로써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운동은 가속화되었다.

-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중 .후반의 예술 작품은 죽음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과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종교적 주제로 채워졌다. 특별히 피렌체와 시에나의 작품이 그렇다. 흑사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예술가들은 성 로코성 세바스티아노를 작품 속에 동원했다. 이 두 성인은 흑사병에 걸린 환자들의 수호 성자였다.
흑사병의 창궐은 르네상스 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흑사병이 드리있던 죽
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걷혔을 때, 유럽인들은 삶의 유한합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인간의 생명이 죽음의 폭력 앞에서 모두 부질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불청객과 마주치기 전에 살아있음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긍정이 시도되었다. 살아 있을 때 즐길 수 있다면, 가능하면 마음것 즐기자는 것이다.
흑사병이 찾아오기 전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는 것에 대해 종교적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사병의 무시무시한 파괴력과 죽음의 일상성을 경험한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주어진 삶의 순간을 즐기고 이를 찬미하는 쪽에 관심을 두게 된다. 물론 이것은 향락적인 삶과는 무관하다. 르네상스 정신에 미친 흑사병의 영향은 향락적인 삶의 추구가 아니라 주어진 삶에 대한 탐미적 자세다. 이것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연모하며 추구했던 돌체의 삶과 연결되어 르네상스 정신의 한 축을 이룬다.
흑사병의 충격이 서서히 걷혀가던 1350년, 보카치오는 나폴리에서 피렌체로
귀환한 페트라르카를 처음 만난다. 그리고 페트라르카는 평생 스승이자 친구로서 보카치오와 함께 활동한다. <데카메론>을 한창 쓰고 있을 때159~1352 만났던 페트라르카는 보카치 오에게 신선한 문학적 자극이 되었다.

- 유럽 여러 나라의 수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우리는 중세와 비잔틴 예술의 고답적인 표현 때문에 심각한 고문을 받는다. 예술적 표현보다 종교적 가치가 더 소중했던 중세의 그림이나 조각은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언제나 등장인물은 경건하거나 숭고하게 보인다. 희로애락과 같은 인간의 사적 감정은 극도로 절제된다.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을 참고 있는 예수도 신적인 능력을 강조하다 보니, 근엄하기 짝이 없다. 눈물과 상심은 허용되지 않고, 오직 결연한 믿음만이 강조될 뿐이다. 우리 같은 일반 대중이 느끼는 고통의 감정을 예수는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함'이란 세속적인 감정을 초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작품 속에 나타난 그들은 성스럽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속되다. 성스러움은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에 우리는 언제나 중세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소외되어왔다. 우리의 속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중세의 거룩한 예술 작품과 담을 쌓아왔다.
그런데 바로 이 중세의 마지막 시기에 조토라는 인물이 탄생해서 성스러움과
반대되는 속된 모습의 천사를 그려댄 것이다! 근엄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워야 할 천사가 조토의 그림에서 속된 인간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세의 성화는 그 특유의 거룩함으로 관람객을 숙연하게 소외시켜왔다. 그러
나 조토의 그림에서 우리는 속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조토에 의해서 예술 작품은 어떤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르네상스 정신을 획득한다.

- 15세기의 길, 즉 비아 콰트로첸토의 첫 번째 길은 피렌체의 사상가이자 인문학자였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장을 지냈던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열었
다.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였던 조토의 길을 문필가였던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문학적으로 먼저 열었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림 이전에 글이 있어, 아름다움의 길을 예비해놓았다.
브루니는 15세기가 막 시작되던 1401년 무렵에 ( 피렌체 찬가)를 발표하여 아르노 강가의 작은 도시가 르네상스와 시민적 인문주의의 출발점임을 만천하에 알린 인물이다. 그가 집필한 < 피렌체 시민사)는 근대적 의미에서 본 최초의 역사책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서구 최초의 근대적 역사가가 되는 셈이다. 브루니는 피렌체 찬가와 피렌체 시민사를 통해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최초로 공식화한 인물이며 선배 페트라르카가 추구했던 관조적 삶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인간의 덕목이었던 '활동적 삶을 추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삶)에서도 활동적 삶'을 강조하고자 정치적 이념에 따라 격정적 삶을 살았던 단테를 칭송하면서 개인적 은둔 생활을 강조했던 페트라르카를 상대적으로 비판한다. 피렌체의 선배 페트라르카가 금욕주의적 수양과 철학적 관조에 몰입했다면, 15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브루니는 이른바 '시민적 인문주의"에 근거한 공화제의 정치철학적 이론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시민 개인이 추구할 행복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시민의 덕성을 강조함으로써 피렌체의 새로운 사회윤리 체계를 제시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대한 관조적 삶'이 아니라 현실에 참여하고 공공의 선을 이루어가는 활동적 삶'에 의해 성취된다. 그는 스스로 현실세계에 뛰어들어 사상과 삶을 일치시키는 활동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로마에서 귀환한 브루니는 1427년부터 피렌체의 제1 서기장으로 봉직했고, 1444년에 임종할 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견제를 견디며 끝까지 피렌체를 위해 일했다.
브루니의 피렌체 찬가는 이런 시민적 인문주의의 근원에 대한 모색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공화주의적 시민의 자유 의식이 처음 탄생했다고 본다. 피렌체 찬가는 시민적 인문주의의 찬가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적 가능성을 예찬한 일종의 선언문이다. 로마에서 귀환하여 집필한 피렌체 시민사 역시 르네상스의 도래를 알리는 인문학적 신호등과 같았다. 브루니는 이 책에서인류의 역사를 고대, 중세. 현대로 3등분했다.

- 르네상스 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는 프랑스 역사가 질 미슐레다. 이 용어가 14~16 세기의 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보편적 학술 개념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스위스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부르크 하르트1818~1097가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미슐레와 부르크하르트의 공헌이 시대정신을 한 단어로 축약시킨 것이라면, 그 시대정신의 예술적
가치를 명확하게 규정했던 인물은 15세기의 위대한 르네상스 이론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다. 알베르티에 대한 이해 없이 르네상스의 핵심 기조는 절대로 간파될 수 없다. 르네상스 운동의 가시적 결과가 회화 .건축.조각이라는 3대 조형예술의 장르로 나타났다면, 알베르티는 르네상스 예술 운동의 출발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 회화 미술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 중의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한 역사화다.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나 이전 시대에 살았던 인물을 마치 지금 눈앞에 펼쳐지거나 살아 있는 인물인 것처럼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화는 과거의 재현을 목표로 한다. 이런 기술적 어려움은 화가가 이른바 자연주의적 재현' 기술을 완속하게 구사할 수 있을 때 극복된다. 그림은 항상 이차원 평면에 그려지지만, 그것은 마치 실재하는 사물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 알베르티의 창안과 마사초와 브루넬레스코의 적용으로 널리 알려진 선원근법이 고안된 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었다. 회화를 통한 자연주의적 재현을 위해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선원근법을 개발한 알베르티는 서양미술사의 빛나는 인물이다. 그의 발견 때문에 서양미술은 이차원의 평면에서 삼차원의 세계를 확보하게 된다.
물론 알베르티는 무조건 자연주의적인 묘사'가 최고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정
확하게 사물이 묘사되어야 하지만 묘사된 사물은 정확성과 더불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 아니. 사실처럼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가치다. 그런데 알베르티는 "자연은 스스로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는 자연을 아름답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실제처럼 그리는 것이 바로 화가의 사명이라고 알베르티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알베르티에게 최고의 아름다움은 무엇이었을까? 최상의 실제는 어떻게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을까? 여기서 알베르티는 고대 로마의 예술 이론가 비트루비우스의 미에 대한 이론을 차용한다. 알베르티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조화로운 상태로, 더할 것도 빨 것도 없는 규칙적인 상태"다.

- 브루넬레스코가 발전시킨 선원근법은 사물에 대한 기억을 사실처럼 보이게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눈앞에서 사실처럼 보이는 마술과 같은 능력이었던 것이다.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에서 우리는 작품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마치 실재하고 있는 세상을 다시 재현한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실재하는 모습을 포착하고 그 실재하는 세상을 언제나 예술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을 완전하게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 된다. 브루넬레스코는 선원근법을 통해 실재하는 세상을 실재하는 것처럼 재현함으로써 세상을 철저하게 해석하려고 했던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확장한 인물이다.

- 흔히 천재적인 예술가가 탄생하면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렇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천재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것이 무슨 정해진 운명의 장난처럼 보인다. 많은 천재가 혜성과 같이 등장해 충격과 파란을 일으키다가, 젊은 나이에 불현듯 세상을 등졌다. 조르조네가 그랬고, 라파엘로가 그랬으며. 카라바조가 그랬고. 또 빈센트 반 고흐도 그랬다. 마사초도 그런 인물이다. 세상의 뭇 천재가 그러하듯이 마사초는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손에 꼽히는 극소수의 걸작을 남기고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15세기 초반에 그가 피렌체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제2의 조토가 다시 피렌체에서 탄생했다고 열광했다. 그의 많지 않은 작품들은 동시대와 후대의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일종의 미술 교과서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수많은 피렌체의 후배 예술가가 마사초가 남긴 브랑카치 채플의 프레스코 작품 속에서 르네상스의 정신을 발견했다. 

- 코시모는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서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되어 있는 11세기 이후의 종교적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라면, 피렌체의 실질적 영주가 누구인지를 전 유럽에 알리는 정치적 선전이 두 번째 목적이었다. 두 번째 목적은 첫 번째 목적이 성취되면 자연히 얻어지는 결과였다.
피렌체 공의회의 개최는 15세기 중반의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제도적 화합도 사실상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새로운 시대 사상이 유럽과 이탈리아. 아니 피렌체로 유입되었고, 이것이 바로 전성기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15세기 후반부터 피렌체에 밀어닥친 신플라톤주의의 파도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대한 예술적 해일을 일으킨다. 이 모든 문명의 격동 뒤에 언제나 사려 깊고 은인자중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조용한 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방 비잔틴 교회와 서방 유럽 교회는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서로의 잘못과 그동안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의 교회 전통으로 합처지지 못했다. 물론 신학적인 화해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최소한 동방 비잔틴 교회의 대표로 피렌체를 방문했던 수많은 신학자와 철학자에게 코시모는 충분히 우호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스어와 그리스 철학의 맥을 이어가던 동방 비잔틴 교회의 플라톤 연구자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줌으로써 동서 문화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 가능성은 채 15년이 지나기 전에 현실화된다. 바로 1453년에 발생한 세계사적 사건 때문이다. 동방 비잔틴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함락됨으로써 유럽 역사에 대변동이 생기는데, 이때 콘스탄티노플과 동방 교회를 탈출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대거 피렌체로 이주한 것이다. 이것은 유럽 지성사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초로 쌓아 올라가던 유럽의 중세 문명에 새로운 대안이 갑자기 제시된 것이다. 바로 신플라톤주의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39년의 피렌체 공의회를 주도함으로써 유럽의 르네상스 정신에 신플라톤주의라는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는 공헌을 남긴다.
코시모는 메디치 가문의 별장인 빌라 카레지에서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철학지들의 정기 학술 토론회를 열었다. 이 모임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코시모가 시작한 플라톤 아카데미는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을 의미했다.시 뒤에서 자세히 소개할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등용하여 그리스어로 쓴 플라톤의 저술을 모두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한 것도 코시모였다. 중세 시대에 알려졌던 플라톤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의해 축소되거나 왜곡된 형태였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 르네상스는 항상 복수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문법적으로 어색하다면 최소한 '르네상스의 여러 가지 흐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는 한 번 높이 솟구쳤던 일회성 파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파도를 솟구치게 만들었던 거친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바람처럼 흘러갔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가 걸어갔던 14세기는 암흑처럼 고여 있던 중세의 사상적 물꼬를 트는 출발점이었다. 억제되었던 인간의 감정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던 시기였다. 돌체의 삶이 추구되었던 시기였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첫 번째 흐름이었다.
15세기는 두 번의 파도가 높이 일면서 르네상스 중기를 형성한다. 15세기의 첫 번째 르네상스 흐름은 엄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그 이론적 기반을 조성했다. 자연이나 인물을 그림이나 대리석으로 재현하는 작업은 수학과 기
하학의 원리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코가 그 과학적 이론을 창시했고. 도나텔로와 마사초가 각각 조각과 회화에서 수학적 아름다움을 예술로 표현했다. 전 시대의 천재 화가 조토가 그렸던 인간의 솔직한 모습과 아름다움을 수학적 원리로 규명한 원근법이 함께 적용된 시기였다.
15세기의 길은 너무 많은 천재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피렌체의 좁은 길이 더욱 비좁고 혼잡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100년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 하는 천재들이 줄줄이 태어나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책에서 15세기의 마이너리 예술가로 분류된 10명은 정말 운이 없는 사람들이다. 다른 도시에서 태어났다면 그 도시를 대표하는 거장의 대우를 받았을 텐데, 너무 많은 천재가 피렌체에서 태어나면서 그들의 재능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가 되는 부당한 평가를 받게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중기 르네상스의 두 번째 단계, 혹은 일반적으로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로 분류되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의 시대는 플라톤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15세기 전반의 흐름이 사물의 내재적 아름다움을 중시했다면, 후반기 르네상스의 흐름은 플라톤적인 초월적 아름다움이 강조되었다. 이 르네상스 전성기의 미학은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동시 추구로 요약될 수 있다.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거룩함과 동일하다는 미켈란젤로의 미학은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표출하면서 아름다움의 극상을 향해 치닫는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는 최소한 세 번의 각기 다른 흐름이 이어졌다. 인간의 감정이 재발견되었고, 비례.조화.반복을 통해 내재적 아름다움에 주목했던 시기를거쳤으며. 플라톤 사상에 기초한 초월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새삼 우리를 놀라제 하는 것은 이 모든 르네상스의 각기 다른 흐름이 모두 한 도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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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에서는 인민과 귀족 사이의 대립이 말과 토론을 통해 다루어진 반면, 피렌체에서는 무기를 통해 다루어졌다. 반목의 경우 로마에서는 법을 통해, 피렌체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의 추방과 죽음을 통해 종결되었다. 로마에서는 그것들이 군사적 역량을 고양했지만, 피렌체에서는 그것을 없애버렸다. (.) 로마 민중은 귀족들의 사회에서 가장 높은 명예에 동참하려고 했다. 피렌체 민중은 귀족들을 배제한 채 혼자만의 지배권을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로마 인민들의 요구가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만큼 귀족에게 부여된 제한들도 수행하기 쉬운 것이었다. 이들은 쉽게 그리고 무기를 들지 않고서 양보했으며 몇몇 관점의 차이는 법을 통해 합의를 보는 식으로 해서 귀족들의 명예는 손상받지 않았고 민중은 만족할 수 있었다. 한편 피렌체 민중의 요구는 상처를 주는 것이었으며 부적절한 것이었다. 따라서 귀족은 모든 힘을 다해 자신들을 보호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피를 보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 피렌체 사람들은 아주 세속적이었으며 도덕적 당위보다는 실제적 이익을 중시한 것 같다. 군주론 15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경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 십상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하는 군주는 필요에 따라 부도덕을 이용하거나 이용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워야만 합니다.

- 피렌체에서 '시뇨리아'는 최고 행정기관을 뜻했으며 갖가지 길드를 대표하는 의원 여덟 명과 최고 의원에 해당하는 통치자 곤팔로니에레 등 선출직으로 채워졌다. 선거는 길드 회원 중 나이, 재산, 출신 가문 등 여러 조건을 따져보고 고른 후보들의 이름을 적어 가방에 넣고 임의로 뽑는 것이었다. 원칙상으로는 후보를 고를 때부터 공정하게 비밀을 유지해야 하지만, 유력 가문인 메디치의 코시모는 선거를 관리하는 위원회를 장악해 시뇨리아를 자기 사람들로채웠다. 물론 선거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코시모가 대표하는 메디치가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후원 활동을 펼치면서 사람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공화국을 유지하는 공적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메디치가의 사적인 지배가 중심이 된 피렌체에서는 평등한 관계가 사라지고 지배와 복종, 추종 관계만 남게 되었다. 메디치가가 몇 차레 겪은 추방은 명목상 공화국이 사실상 군주국으로 운영되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긴장을 보여주는 셈이다.
시뇨리아광장에 자리 잡고 있는 베키오궁, 즉 시뇨리아궁은 행정부의 수장으로 뽑힌 사람들이 살던 곳이며 시민들이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곳이다

-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8장에서 사보나롤라를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기의 상황에 유연한 대처를 역설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정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당연히 정치의 논리를 따랐어야 했는데 사보나롤라는 여전히 수도원에서 설교라는 수단에만 의지했다. 그사이 반대파와 교황은 갖가지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그를 압박했고, 결국 그는 실패했다. 물론 그가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한 점에서 나중에는 루터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선지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알리는 동판을 보면서 인간이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본다. 성직자가 정치가로 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여러 저작에서 정치가는 끊임없이 질료의 상태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자신이 생각한 이데아를 잘 표현해낼수있고, 형상과 질료의 조화속에서만 성공할수있다는 것이다. 조각가가 자신의 머릿속 형상만 고집할 때 질료로서 원석은 그것을 거부한다 조각가를 정치가로 바꿔 말하면, 정치가의 오만은현실에서 외면당하는 것이다

- 마키아밸리가 살던 시기 피랜체에는 공화국을 떠받치는 시민적 요소와 그것을 대체하는 대가문들의 과두제적 요소, 1인 지배의 군주제적 요소가 혼제하고 있었다. 마키아밸리가 태어난 1469년에 피렌체는 명목상 공화국이면서 메디치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때는 특허 병약하던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고 로렌초 데 메디치가 스무살 나이로 권좌에 오른 헤다. 로렌초가 지배하는 피렌체에서 성장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몰락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집권과실각을 목도한다. 그 뒤 피렌체공화국의 공무원이 된 마키아벨리는 잘사는 나라,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민병대를 구성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시민은 공동체의 핵심세력이었다. 피렌체는 영웅이나 천재몇 명만 사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디치가의 코시모나 로렌초가 확인시킨 것처럼 힘있는 가문과 개인은 결코 무시할수 없는 존재다. 같은 시민이라도 모든 조건이 똑같을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이를 대중과 엘리트, 일반 시민과 지도자 또는 팔로워와 리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점에 비춰볼 때 마키아벨리가 고민한 지점이 생각보다 우리와 멀지 않다.

- 공화정이 군주정으로 바뀌려면 민들이 자유보다 복종에 익숙해져야 하며 군주가 되려는 인물 또는 가문이 있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경쟁자는, 공화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엘리트일수 있으며 스스로 군주가 되려고 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군주가 될수 있다. 흔히 모반은 경쟁에서 불리한 쪽이 일으키는데, 그것이 실패하면 역풍이 기존 관계를 빠르게 강화한다. 마키아벨리는 고금의 사례를 통해 이런 현상을 강조했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에서 음모에 대해 길게 설명한 것이다. 로렌초가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매에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파치가의 습격이 일어났을 때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이 사건이 그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음모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거리에 공범자들의 목이 내걸리고 시체가 나뒹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귀족 간의 대립, 인민과 귀족의 대립, 인민 간의 대립이 끊이지 않던 갈등과 분열의 도시 피렌체에서 음모는 일상이자 중요한 정치 행위였다. 하지만 음모는 대개 실패로 끝났고, 그것이 의도와 다르게 상황을 악화시켰다. 상대방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 파치가의 음모를 비롯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마키아벨리는 시의적절한 행동의 중요성과 기다릴 줄 아는 마음과 지혜 등에 대해 생각했다.

- 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에는 사적 이익을 위해 사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메디치가에 대한 비판이 적혀 있다. 공화정을 옹호하는 현실주의자 마키아밸리는 피렌체가 직면한 메디치가의 군주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메디치가의 권력이 피렌체를 더 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방법으로 비판적 지지를 택했다. 바로 이것이 마키아벨리를 군주제의 옹호자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군주제를 옹호하지 않았다. 자유를 누려온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군주제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메디치 군주 가문이 이미 장악한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기를 바라서 군주론을 썼다.

-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를 비롯한 토스카나 지역 도시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트루리아인, 즉 로마인보다 앞서 처음으로 이달리아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로마사 논고 2권 4장에 서술된 것처럼 피사, 시에나, 볼테라. 루카, 아레초 등 토스카나의 유력한 도시들은 모두 자치도시의 전통 속에서 그들의 자유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졌다. 토스카나에서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피렌체가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이 도시들과 대립하는 것은 당연했다. 도시국가 피렌체가 영토국가로 변모한 뒤 겪은 여러 대외 관계에 대헤 경험이 많은 마키아벨리는 깊은 통찰을 얻었다.
예컨대 피렌체 북서부의 도시국가 피스토이아에 일어난 소요에 피렌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문제를 통해 그의 정치적 통찰을본다. 군주론, 17장에서 그는 "잔인하다는 평판을 피하려고 피스토이아가 사분오열되도록 방치한 피렌체인들"을 비판한다. 그것은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한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및 사람을 시범적으로 처벌해서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휠씬 더 자비로운 셈이기 때문"이다. 여
기서 마키아벨리는 공동체와 개인, 즉 공과 사를 구분하는 논법을 쓴다. 앞에 인용한 문구 바로 뒤에 그가 붙인 말이 있다. "전자는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 데 반해 군주가 명렁한 처형은 단지 특정한 개인들만 해치는 데 그칩니다." 잔인합이 때로는 인자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는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합당하다.

- 마키아벨리가 공직에서 보낸 14년은 정확히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떠난 뒤 공화정이 들어섰던 시기다. 조력자 없이 종신 통령 자리에 오른 소데리니가 마키아벨리를 믿고 많은 일을 맡겼는 데, 피렌체에 복귀한 메디치가는 공화정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일벌레라고 할 정도로 국가를 위해 성실히 복무하고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해임되고 베키오궁 출입마저 금지당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 반메디치가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가 소데리니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메디치가의 숙청 대상이 된 것이다. 지금은 미술관이지만 당시 경찰청 구실을하던 바르젤로궁에서 마키아벨리가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았다가 떨어뜨리는 고문을 여섯 차례나 받았다는 설이 있다. 다행히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일말의 행운이 찾아와 메디치가 로렌초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 추기경이 1513년에 교황으로 뽑혀 레오 10세가 되었다. 새 교황의 취임으로 대사면령이 내려진 덕에 풀려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조그만 집이 있는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인 페르쿠시나로 떠났다.

- 보르자가 행운의 사나이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요즘 말로 '금수저' 집안 출신이라 젊은 나이에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로 그는 운을 즐기는 데만 만족했다고 할 수없다. 비록 권모술수와 폭력적 행위를 썼지만 자기 힘으로 군대를 키우고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보르자의 역량은 운명이 준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권력 기반을 확충한 데있다. 그 권력 기반은 물론 자기 군대와 인민의 지지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기 마련이다. 노력해서 얻지 않았으니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세습으로 얻은 권력이나 재물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를 우리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예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운명이 가져다준 과실을 즐길줄만 알지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법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보르자는 특출한 능력이 있었다. 군주의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군주 자신이 아니라 인민이고, 그들로 구성된 군대다. 권력과 권력
기반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통찰이야말로 군주의 진정한 역량이다.

- 인간은 유연성이 부족하고 바뀌는 시대의 흐름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유명한 조언이 등장한다. 운명은 여성이니, 그녀를 거칠게 다루고 과감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지금 보기에는 무모하고 무식한 비유일 수 있지만, 속뜻에 주목하자. 어차피 알 수 없는 미래라면, 운명에 과감하게 도전하라는 말이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좋을 수 있다. 물론 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운명보다는자기 자신을 믿으라!
르네상스적인 인간은 세상을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을 믿을 뿐이다. 안 돼도 할 수없다. 이것이 인생의 비장미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웅관을 보여준다. 세상을 정복하고 운명을 휘어잡는 독보적 영웅이 아니라 비극을 인정하는 '쿨한' 인간이다.
운명의 여신에게 행운을 구걸하며 눈치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비겁하고 구차한 삶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그러나 안 돼도 한번'씩' 웃고 주어진 결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최첨단 자본주의사회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갖는 사회에서 돈과 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자기 길을 내는 삶은 얼마나 멋진가!

-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에게 진정한 통치술을 전하고 싶어 했다.행운이 가져다준 지위에 만족하고 지배하는 것을 즐기다가는 자유를 잃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는 헌정사에서부터 아첨 대신 진실한 내용으로 쓴소리를 하겠다고 밝혔다. 군주들이 금은보화 좋아하는 것을 잘 알지만 그는 그것을 바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군주에게 권력의 맛을 느끼게 해 타락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했다. 쓴 약을 준 것이다. 메디치가의 군주가 그약을 알아보고 기꺼이 입에 넣어 큰일을 이루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사는 마키아벨리의 뜻과 다르게 흘러갔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다시 오르지 못했고, 피렌체는 여전히 외세에 좌지우지되었다.

- 군주론은 흔히 말하듯 성공을 위한 지침서도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전략서도 아니다. 모든 나라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을 탁월한 고전 지식과 탄탄한 정무 경험을 통해 알려주는 책이다. 군주는 자기 전력이 강해지면 국가도 강해진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국가 구성원, 특히 인민의 자유로운 삶과 부강한 국가에 대한 통찰이 있는군주라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군주론이 악마의 책이라는 오명까지 덮어쓴 것은 마키아벨리가 인간과 권력의 속성을 가식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책의 솔직한 내용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우리 안의 이기심이나 비굴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허울 좋게 체면이나 차리면서 우리 안의 부정적인 면이 빛어낸 현실의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군주론은 나 자신과 세상을 맨눈으로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군주론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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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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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머니

역사 2025. 10. 28. 17:40

- 메디치 은행은 1397년에 설립되어 1494년에 문을 닫는다. 아깝게도 100년이 약간 안 되는 기간이다. 이 은행을 세운 사람은 지오반니 디 비찌 데 메디치이다. 그의 긴 이름이 뜻하는 것은 메디치 가문 비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본명은 비찌가 아니라 아베라르도였다. 아베라르도를 왜 비찌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1360년에 태어난 지오반니는 은행의 설립과 함께 조직을 확장하고 전통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는 은둔형 인간이었다. 1429년 사망할 때까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익이 넘쳐나는 회계장부를 방패삼아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죽을 때도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처신하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을 물려받은 코지모 디 지오반니 데 메디치는 달랐다. 대중의 주목을 피하기는커녕, 국가의 중대사에 앞장서서 간여했다. 그래서 첫날 국부메x라는 뜻의 '파테르 파트리아에(Pater Pariae, 원래 키케로, 시저, 아우구스투스 둥에게나 쓰이던 희랍어이다 - 감수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1389년에 출생하여 1464년 사망한 코지모는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세대의 인물 중가장 장수한 인물로 기록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대중들 앞에 나선 탓에 짧은 수감과 유배생활도 한다. 그런 역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메디치 은행의 확장과 수익성을 극대화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피렌체 공화국을 사실상 좌지우지한다. 또한 철학자, 건축가, 화가들의 친구였으며, 예술과 주요 공공사업의 후원자였다. 다만 그가사망할 무에는 메디치 은행이 회복할수 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 코지모의 아들, 피에로 디 코지모 데 메디치는 통풍환자 피에로'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 가의 많은 남자들이 바라만 불어도 손끝 발끝이 아프다는 통풍으로 고생했다. 그럼에도 코지모의 아들 피에로만 유독 통풍환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만큼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별명을 가질 기회가 없을 정도로 활동기간이 적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역사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인물이다. 계승할 수 없는 자리까지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업적인 동시에 과오였다.
피에로가 메디치 은행을 뮬려받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피렌체 정부 안에서 아버지 코지모가 누렸던 정치적 위상까지 승계 받는 데는 어떠한 법률적 근거도 없었다. 성미가 고약했던 피에로는 공화국 내 정적들을 단호하게 다루면서 그들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1416년에 출생한 피에로는 워낙 몸이 부실해서 1464년부터 1469년까지 단 5년 동안만 가업을 이끌 수 있었다. 그가 세도를 휘두른 짧은 기간 동안에는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았다. 그리고 1469년 그가 사망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열쇠는 큰아들 로렌조에게 넘어갔다.
로렌조는 일명 '위대한 로렌조'로 불린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비해서는 대중의 눈에 좀 덜 띄는 삶을 살려고 했다. 그렇다고 중조할아버지처럼 완전히 은둔하면서 산 것은 아니다. 갓 스무살의 나이로 공화국 전체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부각되었을 때, 로렌조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지혜를 발휘한다. 즉 이미 하락세로 접어든 은행을 살리려는 노력보다는, 금융과 상업
이외의 다른 분야를 개척하려고 한다. 물론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서 중대한 음모가 도사린 사건들을 요령 있게 해결한다. 하지만 로렌조는 앞선 두 세대와 분명히 달랐다. 공화제보다는 귀족정치를 동경하면서 독재자로서의 야욕도 별로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옥같은 시를 쓴다. 그는 매우 훌륭한 시인이었다. 통풍 때문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애인의 집에도 제대로 찾아갈 수 없었던 로렌조는 1492년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 5명의 주인공 중 마지막인 피에로 디 로렌조는 '어리석은 피에로'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집안의 가업을 물려받았을 때, 중조부가 남긴 금전상의 막대한 재산은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다. 아버지의 예술적 업적이나 귀족적 기질도 대물림되지 못했다. 1472년에 출생한 로렌조의 아들 피에로가 가진 재주라고는 동네 축구에서나 통하는 약간의 운동신경뿐이었다. 피에로가 2년간 피렌체 가문을 이끄는 동안 그는 아버지가 발휘했던 기지와 술책을 모방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1494년 프랑스 군대가 도시로 진격해 왔을 때는 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레 질접하고 피렌체에서 도망쳤다. 그바람에 가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은행은 폐쇄되었다.
10년 뒤, 피에로는 나폴리의 북쪽 강 가리글리아노를 건너다가 익사했다. 예기치 못했던 죽음을 통해 그는 자신의 아둔함과 불운을 세상에 다시 알렸다.

- 흑사병은 정말 지독했다. 역사가 T지아르디니는 메디치 은행의 초창기 무렵을 묘사하면서 "사람들이 병마에 지친 나머지, 죽을 때는 차라리 편안해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메디치 은행은 더 지독했다. 그런 역병을 꿋꿋하게 견디고 버렸으니까. 그렇다"
메디치 은행이 제 궤도에 오른 후에는 세상이 순탄했을까? 메디치 은행이 사라진 뒤 찾아 온 16세기의 대격변들을 생각해 보면, 온갖 음모가 난무하는 정치판을 살아야 했던 코지모와 로렌조 데 메디치의 활동 시기야말로 자신감이 충만했던 태평성대로 여겨진다.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기까지 한 시대였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리석은 피에로가 피렌체를 버리고 달아난 뒤 이탈리아는 프
랑스와 스페인에게 차례로 짓밟혔고 독일인들과 스위스인들은 이에 놀라 이탈리아에 예치했던 자금을 인출하기 바빴다. 그래서 상황은 더 복잡하게 꼬였다. 주변국의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로 처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는 종교문제를 둘러싼 여러 주변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 도시 곳곳이 볼모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간의 알력으로 신성로
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1527년)하고 교황을 체포했다.
그 반격으로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가 나폴리(1527~1528년)와 피렌체(1529~1530년)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외세가 물러나고난 뒤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반종교개혁의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질식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분위기가 한동안 이탈리아를 억눌렀다. 이어서 300여 년 동안은 실질적인 독립성을 잃은 채로 지냈다.
이에 비하면, 메디치 은행이 존속했던 97년간 15세기의 피렌체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전쟁과 고문, 살인, 부패, 부정선거, 탈세 둥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그런 점에서 이 기간을 중세에서 근세로 이전하는 격동의 세월 사이에 낀 조용한 징검다리쯤으로 여겨도 좋다. 이 시기는 추잡한 대금업이 예술의 꽃을 피운 경이로운 시기였다.

- 농촌에서는 귀족들의 봉건적 권리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승인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봉건귀족들은 기벨린당(교황에 맞서 독일 황제를 옹호한 황제당 -감수자)을 지지했다. 반면 도시에서는 귀족들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려는 중산 계층이 교황과 겔프당(교항당 - 감수자) 편에 서는 경향을 보였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통치권이나 세금징수의 최종 권한이 교황에게 있는지, 황제에게 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벌이 난립하고 분열이 계속되었다. 도시의 세도가들은 가문의 치안과 재산 보호를 위해 앞다투어 탑을 건립했다. 이렇게 세워진 건축물들이 1200년 피렌체에만 100채에 달했고, 그중 상당수가 150피트의 높이를 자랑했다. 피렌체가 100채의 탑을 수용하고 있는 모습은 다소 버거워 보일 정도다. 덕분에 탑은 많고 도로는 좁다. 세도가들은 자기 돈으로 사병도 거느렸다. 일반 시민들이 거리를 다닐 때는 군대의 막사 사이를 이리저리 뚫고다녀야 했다. 아르노 강은 한가로이 흘렀지만, 그 양변에는 소유권이 다른 영지들이 지독하게 쪼개져 있었다. 무기가 사방에 난무하고 살인율은 무서울 정도로 높았다.
"이런 무정부 상태와 혼돈 속에서 카리스마와 돈이 위용을 드러냈다. 위대한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서유럽 도시국가의 군주 중에서 그들의 통-치권에 대한 합법적인근거는 찾을 수 없다. 종교적 신앙심이 군주세습에 있어 판단 기준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통치 않다. 그 당시 군주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근거는 개인적인 인기였던 것 같다. 남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재주와 카리스마가 신분격상과 통치력 회득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 현금 없이도 남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 남들을 설득시키는 것을 카리스마라고 한다면, 카리스마를 갖추는 데 현금만큼좋은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결국 전통 사회구조가 무너졌을 때 대금업자, 즉 은행가들이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돈의 힘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렌체의 금화, 플로린보다 확실하고 믿을 만한 것은 없다. 플로린에는 고대 계급제도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군주의 얼굴이 없다. 한쪽 면에 플로렌티아라는 이름과 다른 면에 도시의 상징인 백합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동전에 왕을 새겨 넣지 않은 것은 은행가들이 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은행가들의 돈이 없으면 왕이 되지 못하니까 이들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킹메이커다.
하지만 은행가리는 직업이 결코 마음 편한 자리는 아니다. 그들은 이쪽저쪽으로 자금을 대며 왕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돈을 떼이고 몰수당하기도 한다. 은행가들이 도시국가 전체의 재정을 통제할 수도 있지만 위정자로부터 세금 폭탄을 맞아 파산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칼자루를 쥐느냐 칼날을 쥐느냐 둘 중 하나다. 그런 긴장 속에서 일반인들은 은행가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시의 문학작품들도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부를 일군 미천한 평민들'에 대해 대단히 공격적이다. 이들보다 더 무 뚝뚝하고 사악하며 콧대 센 자들이 또 있을까? 코지모 데 메디치는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귀족은 아무나 될 수 있어. 몸에 두를 빨간 천만 있으면 돼."

-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 뿌리를 두고 그 지역 사람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니까 지오반니가 아내와 자식들을 피렌체에 남겨두고 로마로 갔던 것도 언젠가 돌아올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피렌체로 돌아와서는 지역 유지로서 핵심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피렌체의 시민으로서의 정치 권한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세도까지 휘두르면서 일반 시민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자기가 이방인이었던 로마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처신하라"고 지오반니가 자식들에게 내린 명령은 정치권력을 포기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중의 눈에 띄지 않게 처신하는 진짜 이유는 더큰 권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잠깐! 지오반니가 로마에서 피렌체로 활동무대를 옮긴 또 다른 이유는 피렌체가 국제금융에 관한 한 로마보다는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일방적으로 돈을 빨아들이는 곳이었지만, 피렌체는 삼각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곳이었다. 국제금융업에 관한 노하우가 모든 힘의 원천인 로마를 상대로 피렌체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열쇠였던 것이다.

- 화폐의 기능은 정해진 지리적 영역안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계산단위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성질이 전혀 다른 재화의 가치가 사칙연산을 통해 화페단위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돈이 가지는 매력이자 마력이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리 동전들이 모이면 은화 동전이 되고 은화가 모이면 금화가 된다. 금화가 사라진 오늘날에는 1달러, 5달러, 10달러, 20달러, 100달러짜리 지폐가 세상 모든 재화의 척도이다.
하지만 15세기의 피렌체는 그렇지 않았다. 은화 피치올로가 모여서 금화 플로린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통용되었다. 그 원리는 이렇다. 2개의 동전은 서로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는 사과와 오렌지만큼이나 다르다고 여겨졌다. 은화인 피치올로가 금화인 플로린으로 교환되는 경우는 은행들이 결정하는 전환비율에 따라 은행가들이 자기들의 테이블 위에서 바꿔줄 때문이다. 이렇게 화페끼리의 상호 교환성을 차단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회 현실이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별 볼 일 없던 농민이 재수 좋게 부를 축적해서 귀족 행세를 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신분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했다. 돈을 쓰는 데도 그런 사회적 분화와 계급성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다. 은화 피치올로는 가난한 자들의 통화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빵 한 덩이의 가격이 피치올로로 표현되었다. 반면 사치품, 상인들이 취급하는 도매 물품, 국제 무역 등은 금화 플로린의 독점 영역이었다. 법이 그렇게 정했다. 얼마 전 공산권 국가에서 부자와 세력가들은 달러를, 일반 대중은 국내 통화인 즈워티(폴란드의 화페)나 루블(러시아의 화페)을 사용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한마디로 은화 피치을로를 사용하는 자는 지배계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가들이 펼쳐 놓은 녹색 테이블 위에서만은 신분과 계급이 초월했다. 은화와 금화가 교환되면서 검소한 서민의 세계와 풍족한 부자들의 세계가 비로소 소통했다. 물론 그런 경이로움을 경험하려면 소정의 수수료가 있어야 했다. 은화의 세계와 금화의 세계가 단절될 때 손해보는 쪽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 쪽이었다. 빈자의 돈 피치올로가 점점 가치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1252년 금화 플로린이 처음 주조되었을 때, 1플로린은 1리라, 즉 20피치올로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1500년경에는 7리라, 즉 140피치올로로 상대가치가 올라갔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아르테 디 칼리말라(상인 길드)에 속한 상인과아르테 디포르 산마리아(직물 길드)에 속한 실크제직업자들의 농간 때문이었다. 이들은 물건을팔 때는 플로린으로 받으면서 직원에 대한 급료는 피치올로로 주었다.그래서 수익이 떨어질 때면 정부에 주화 제작을 장려하여 정부가 주화를 제작할 때 피치올로에 들어가는 은의 함량을 줄이도록 했다. 도시국가에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이강력한 길드의 멤버였기 때문에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피치올로로 표시된 급료는 같은데 이에 상응하는 플로린의 양은 줄일수 있었다. 돈많은 상인들에게는 먹고쓰는 대부분이 플로린으로 표시되었다.

- 메디치 은행은 성직자로부터 거뒤들인 신성한'돈과 환어음을 통해서 번 '모호한' 수입을 투자하기 위해 나폴리와 베네치아 두 곳에 지점을 세웠다. 로마를 포함한 세 지점과 피렌체 본점 사이의 업무관계는 대단히 중요했다. 메디치보다 먼저 활동했던 바르디 은행과 페루찌 은행이 와해된 데에는 외국의 군주들에게 대출해 준 돈이 부도가 났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도시국가에 세워진 지점들과의 법률적 관계가 애매했다는 이유도 있다. 은행 지점들은 채무에 대해 연대 책임을 졌다. 따라서 어느 지점이 통제받지 않고 마구 돈을 차입하면, 다 같이 망할 수 있었다
페루찌 은행의 경우 국제 영업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기위해 동업자들을 너무 많이 끌어 모은 결과, 지점들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력을 상실했다. 한 지점에서 문제가 생기자 다른 지점들이 연루되었고, 상관도 없는 동업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배가 가라앉는 판에 배를 안전한 항구로 옮기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페루찌 은행의 실수였다.
지오반니 디 비찌는 페루찌 은행의 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은행 경영방식을 바꿨다. 메디치 가문의 천재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그는 우선, 은행 조직 안의 사람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처음에는 금전적으로, 나중에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통제했다. 당시 각 지점은 독립된 조직이었다. 지분의 10-40퍼센트를 투자한 사람이 지점장이 되고 나머지 지분은 메
디치 가문이 투자했다. 그런데 대주주는 메디치 가문의 개인이 아니라, 피렌체 본점이었다. 따라서 피렌체 본점은 영업 면에 있어서는 여느 지점들과 동등했지만 지배구조 면에서는 독립된 사무실을 가진, 다른 지점들의 지주회사였다. 이런 식으로 메디치는 각 지역의 유력인사나 유지들을 한두 명씩 동업자로 끌어들이면서도 전체적인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지점장은 월급 이외에 출자지분에 대한 수익금을 배당받지만, 그 배당금은 원래 출자지분보다 항상 많았다. 이것이 지오반니가 지점장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지점장들은 본점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영업을 하면서도, 피렌체의 지주회사가 내려준 규칙들을 아주 잘 지켰다

- 보통 한 지점에는 출납계원과 서기, 급사, 책임자 등 4-8명이 근무했는데, 이들은 한 건물에서 일하고 먹고 졌다. 이밖에도 한두 명의 하인과 노에, 말이 부속되었다. 이들의 고용과 해고는 전부 피렌체의 지주회사가 담당했다. 급여도 마찬가지였다. 본점에서 일일이 먼 도시의 인사관리를 하지 않으면, 지점장과 직원들이 본점을 상대로 음모를 꾸밀지 누가 알겠는가? 각 지점에는 공
식장부 외에 비밀장부가 따로 있었다. 재량예금같이 비밀을 보장해야 하는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은 직원의 급여도 마찬가지였다. 한솥밥을 먹는 직원들 사이에도 동료의 급여 수준은 절대 비밀이었다. 그래야만 본점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이나 음모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밀장부는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로 만들어졌고 자물쇠로 채워져 열쇠와 따로 보관되었다. 보통 지점장의 침실에 보관되었고, 이렇게 관리되는 비밀장부는 1년에 한 번, 피렌체로 보내져 본점의 감사를 받았다. 지점들끼리는 마치 다른 회사처럼 독립적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경쟁 상대인 동시에 하나였다. 메디치 은행은 이런 관리기법을 훗날 정치에도 적용했다. 사람들을 적당히 대접하되 서로를 떨어뜨려 놓고, 위에서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다!

- 마키아벨리는 1520년대의 시각에서 15세기의 전쟁 행태에 대하여 "5대 강국들끼리 무력 침공을 그치지 않는 상황을 누가 평화라고 단언할 수 있으랴. 하지만 사람이 죽지 않고 도시가 약탈되지도 않으며 나라가 파괴되지도 않는 그 상황을 누가 또 전쟁이라고 부르랴. 이런 전쟁은 공포감도 없이 시작해서 긴장감도 없이 지속되다가 손해 보는 것도 없이 끝나버리는 , 나약한 전쟁이었다"라고 말했다.
잦은 전쟁은 별다른 인명과 영토의 피해 없이 끝났다. 그렇지만 자금의 손실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이 정치에 개입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틈바구니 때문이었다.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살인적인 비용을 동반했다. 그래서 원활한 자금공급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 전쟁을 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많이 죽지 않았을까? 마키아벨리는 그 비밀이 콘도띠에레에 있다고 했다. 콘도띠에레는 타락한 봉건제도의 부산물로서, 군주나 상인들이 고용한 용병대의 대장을말한다. 작은 도시의 평민이나 자신의 성을 가질 정도의 재산이 있는 상인들은 아마추어급인 자기들이 전쟁에서 빠지고, 대신 전쟁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서민들의 생업을 위해서나 도시 전체의 안녕을 위해서 그것이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콘도띠에레를 초빙해서 유치하는 것이 이탈리아 전체의 관행으로 정착되었고, 콘도띠에레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꽃어지게 가난한 도시라는 것을 말했다.
그래도 전쟁을 하려면 대장만으로는안 된다. 부대가 있어야 한다. 5대 강국같이 큰 나라들은 대장뿐만 아니라 일반 전사들도 돈을 주고 용병을 샀다. 그러니 시민들은 전쟁이 터져도 죽을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무감각하게 자기들의 생업만 걱정했다. 이런 식의 시스템은 통치계급에도 도움이 되었다.
병력을 가진 세력이 우두머리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킬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쟁을 대비하는 정부는 돈을 주고 불러 온 외인부대를 지휘할 사람만 뽑으면 되었다. 자기 나라 출신중에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적당한 사람을 골라 용병들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지독한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콘도띠에레 수요가 매우 높았다. 이 전쟁 선수들은 마음에 드는 이탈리아 은행을 통해 자기의 수입을 본국으로 송금했다(보통 벨기에의브뤼헤나 이탈리아 제노바에 지점을 둔 은행을 이용했다). 하지만 용병의 특성상, 직업의 안정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죽어서도 안되고 전쟁이 끝나서도 안 된다. 이것이 용병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이탈리아에 모인 콘도띠에레와 일반 용병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무슨 작전이든지 끝을 보는 일이 없었다. 적군을 공격하되, 죽이는 것도 아니고 포로로 잡는 것도 아닌 희한한 전쟁이 이탈리아식 전쟁이었다. 

- 1463년 동업자이자 동료였던 지오반니 벤치가 죽었다. 코지모는 이제 디다음 차례는 자기라는 걸 알고 우울해졌다. 자기의 장례문제를 교회와 진지하게 협의했다. 돈이 오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성스런 순례자의 무덤과 가까운 산 로렌조 성당에 묻히고 싶었다. 코지모의 지하 석관을 둘러싼 돌기둥들은 위쪽의 교회 바닥과 연결되었다. 교회 1층에서 보면, 지하에 코지모의 무
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다.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표지에는 큰 원 안에 두 개의 긴타원형이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는데, 이는 영원을 상징하는 마법의 문양이다.
그러나 디자인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분명히 산로렌조 성당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역시 코지모답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성당에서 미사 도중 사제가 성체(예수의 회생을기리며 나눠먹는 밀떡과 포도주-감수자)를 나눠주는 자리 바로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는 것이다 코지모의 영혼을 위한 미사가 매일, 그리고 영원히 실시되는 대가로 거액의 자금이 전달되었다.그의 마지막 헌금이었다. 이와 함께 4명의 여자노예를 포함해모든 장례식 참석자들의 고급 장례 복장도 지급됐다. 이것이 그의 장례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진 전부다.

- 교회법에 따르면 독점은 이자놀이만큼이나 나쁜 것이었다.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었지, 선택받은 소수에게 베푼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제약하고 터무니없이 가격을 올리는 독점은 도둑질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독점을 통해 부당하게 재산을 모았다면, 대금업과 마찬가지로 하나도 남
김없이 그 이익을 환원시켜야지만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갈 수 있다. 누구에게서 얼마만큼을 착취했는지 계산하기 어럽더라도 무조건 밸어내라는 것이 교회법의 원칙이었다.
교회가 말하는 독점이란 물건의 판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례로 노동조합의 결성도 독점, 그것도 가장 악독한 독점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노동자의 자유뿐만 아니라 고용주가 자유롭게 고용할 자유, 근로조건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막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동조합 역시 신의 섭리에 위반된다고 보았다. 실제로 직물제조의 도시 피렌체에서는 모직노동자협회가 결
성되었을 때 즉각 죄악이라고 매도되어 짓밟혔다.
이런 버젓한 사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466년 교황 바오로 2세는 메디치 은행과 연대하여 전 유럽에 걸쳐 교회가 백반의 판매를 독점 관리한다고 선언했다. 그 당시 백반은 철이나 소금 다음으로 중요한 광물이었다. 백반이 없으면 직물 무역이 제대로 돌아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교회가 스스로 만든 교회법을 뺀뻔스럽게 위반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교회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야심찬 사업에서 생기는 이익은 투르크와 싸우는 십자군 전쟁에 전액 투입하겠다고 교황이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런 독점이라면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거룩한 목적을 앞세운 종교조직의 위험한 일탈 사례다.

- 귀치아르디니는 그의 저서 <피렌체 이야기> 에서 로렌조가 마침내 나폴리에서 거둬들인 값비싼 평화조약은 그렇게 위험한 모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 로렌조의 영웅적 행동, 즉 스스로 각본을 짜고 연출하면서 보여준 한편의 드라마는 로렌조가 피렌체의 지도자라는 것을 피렌체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주고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정치선전이란 완전히 창작물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휠씬 효과적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로렌조는 페란테 왕을 만나기 한참 전부터 물밑으로 비밀협상을 진행시켜 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렌조는 여러 가지 외교 카드를 주머니 속에 준비하고 떠났다. 그중에는 왕에게 줄 은밀하고 달콤한 특권들도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
다. 가장 종잡을 수 없고, 전혀 신뢰할 수 없으며, 가장 호전적인 왕의 손에 자기 자신을 맡긴 일은 대단한 용기였다. 페란테 왕은콘도띠에레 이아코포 피치니노(그 유명한 콘도띠에레, 니콜로 피치니노의 아들)에게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해 놓고 그가 도착하자마자 즉시 처형을 할 정도로 신뢰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19세기의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이탈리아 회화사에서 자유에 대한 열정과 귀족계층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가졌던 피렌체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에 복종했던 것은, 그들이 정치적 자유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긴 심미안적 즐거움을 메디치가 마약처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시내를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들이란 틀에 박힌 미술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림이나 조각 그리고 덧진 건축물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를 들면, 로렌초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 충분히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행위예술을 행했다. 거기서 그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석 달 동안 협상했다. 마침내 페란테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장르로 따지자면 모험극에 해당하는이 위대한 드라마는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제부터 피렌체는 카리스마와 지략을 겸비한 지도자가 통치한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행운까지 따르는 지도자였다.

- 1480년8월, 투르크의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로 상륙하여 남동쪽 해안의 오트란토를 점령했다. 주민 1만 2,000명을 살해하고 1만 명을 노예로 끌고 갔다. 이때의 피해와 비교하면, 이 책에서 소개된 모든 전쟁들은 전쟁 축에도 못 낀다. 그러나 로렌조에게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이교도들을 물리치기 위한 연합작전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페란테 왕에게는 평화조약을 맺을 때 양도했던지역을 전부 환원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르크의 침공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교황 식스투스 6세에게는 그동안 자기와 자기 친구들에게 내려졌던 모든 조치들을 사면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마치 파찌 가문의 음모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모든 일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정상을 되찾았다.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478년 암살미수 사건 직후 피렌체 정부는 교황에게 보내는 항의 편지에서 교황을 베드로의 자리를 차지한 유다'라고 저주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로렌조를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로부터 3년 뒤 모든 일들이 까망게 잊히고 완전히 용서되었다. 1481년 12월에`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가 다시 로마로 내려가서 협상을 시작했다. 교황이 메디치 은행에 진 빚을 확인하고 그 귀하신 분을 다시 고객으로 맞이하는 한편, 은행거래를 재개했다.
물론 전에 비해 조금 달라진 것도 있었다. 토르나부오니는 조카 로렌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너'라는 말 대신 윗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인 귀하여'라는 호칭을 썼다. 그 전부터도 은행의 대표로 로렌조를 말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경애하는 어르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아버지나 만년의 코지모 할아버지에게 붙였던 호칭이었다. 따라서 그 정도는 그다지 파격적인 예법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나폴리의 위업, 즉 풍전등화와 같았던 피렌체의 운명을 로렌조의 손으로 회생시킨 영웅적 사건이 있고난 뒤 로렌조는 갑자기 '위대한' 인물이 된다. 자기 스스로 붙인 호칭이었다. '위대한 로렌조'라고 부르는 동안 자연스레 우상화된다. 뺏한 그의 삼촌조차 로렌조 앞에서는 무료을 끊는다. 이제 로렌조에게는 은행이 있을 필요도 없다. 위대한 인물이 현찰이 없어서 힘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 않은가.

- 다행스럽게도 은행가들에게는 자기의 본업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코지모의 경우에는 직원들을 시켜 고문서를 수집했다. 피에로는 그림, 태피스트리, 그리고 조랑말 같은 것을 사 모았다. 로렌조는 넷째 자식이자 둘째 아들인 지오반니를 위해 수입이 잡짤한 교회의 성직을 알아보려고 직원들을 풀었다. 지오반니는 막 서품식을 마치고 사제의 길에 들어선 겨우 여덟 살밖에 안 된 꼬마였다. 리옹지점은 로렌조의 지시를 받고 즉각 움직였다. 프랑스 서부 퐁두스에 있는 대수도원의 소년 수도원장 자리를 얻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수도원장은 가정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다. 여기에 여덟 살짜리가 소년 수도원장을 맡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국은 프랑스의 샤르뜨레 근처에 있는 상 제메 수도원의 자리로 낙착을 보았다.
성직에서 나오는 수입은 무엇보다도 안정적이어서 기복이 없었다.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위계서열이 분명한 집단이지만, 꼬마 주교의 이름으로 재산 빼돌리기가 자행되는 것은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뽀아띠에 근처의 르 뺑 수도원에서는 핏덩이 같은 주교 지오반니의 이름을 앞세워 코지모 사세티가 교회재산을 가져가려고 하자 그
가 교회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했다. 은행업을 통해 많은 돈을 잃은 로렌조는 마침내 자기가 정통한 분야에서 돈 버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바로 인맥과 특혜, 뇌물, 그리고 밀실 담합을 통해서였다. 덕분에 나이 어린 지오반니의 성직은 하나씩 늘어나고, 그의 무률으로 떨어지는 성직록 수입도 불어났다. 시에나로 기는 길에 있는 파시나노 대수도원, 프라토, 아르노 , 무겔로 둥에 있는 여러 성당들, 나폴리 근처의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 밀라노 근처의 모리몬도 대수도원 둥, 메디치 은행이 문을 닫을 때까지 교회에서 걷는 수입은 메디치 가문의 새로운 수입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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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2

Quote of the day 2025. 10. 2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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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다 퍼렌체

etc 2025. 10. 26. 19:55

- 피렌체 공화국은 115년에 건국되어 1532년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후 공화정이 폐지되었습니다. 이때의 국기와 국장이 현재도 피렌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합 문양이랍니다.
공화국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때의 피렌체는 전제 군주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시뇨리아라고 불린 의회(9명의 위원으로 구성)가 도시 행정을 관장하였습니다. 시뇨리아는 두달마다 피렌체의 길드 임원들이 선출한 곤팔로니에레 (명목상의 도시 통치자)가 선정하였지요.
비록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 중심으로 시뇨리아가 구성되었지만 그래도 한 사람에 의한 통치나 독재가 불가능한 민주적인 통치 제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는 쿠데타와 역 쿠데타의 반복으로 점철됩니다. 메디치 가문의 세력이 커지자 1434년에 경쟁 가문에서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다시 메디치 가문이 돌아와 상대 가문을 억압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경쟁 가문을 축출하고 재력과 교황청의 비호를 바탕으로 권력을 잡은 후, 공화제를 폐지하고 피렌체 공국을 세읍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자신의 친척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공작소사으로 임명하면서 '공국(공작이 다스리는 나라)'이 탄생한 것입니다. 공작은 세습 귀족이므로, 피렌체가 공국이 되었다는 것은 세습 군주국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피렌체 공국이 되면서 국기와 국장에는 메디치 가문의 상징이 들어갑니다. 여섯 개의 둥근 공모양 문양이 메디치 가문의 상징이거든요. 이때부터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받는 도시국가가 된 것입니다.
피렌체 공화국에서 출발하여 1532년에 피렌체 공국으로 국가의 체제가 바뀌었던 피렌체는 1569년 다시 한 번 큰 변동을 겪게 됩니다.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가 대공초소으로 서임되면서 '토스카나 대공국"이 된 것입니다. 피렌체라는 도시에서 벗어나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리는 더 큰 국가가 된 것이지요
여기서 잠깐. 공작과 대공이 무슨 말인지를 구분하여 봅시다. 그 차이가 나라의 차이를 만드니 말입니다.
과거 유럽의 귀족들은 다양한 작위로 나뉘었습니다. 높은 순서부터 차례대로 나열하자면, 공작, 자작. 남작, 후작, 백작 등이 그것이지요. 즉. 공작은 귀족의 작위 중 가장 높은 서열이며, 대공은 공작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입니다. 왕 아래에 귀족이 있으니 대공은 왕을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신분이며. 공작은 대공 바로 아래의 신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공작이 다스리는 나라(공국)보다는 대공이 다스리는 나라(대공국)의 지위가 높다고 보면 됩니다. 현재도 유럽에는 공국과 대공국이 있는데. 모나코와 리히텐슈타인은 공국이고 룩셈부르크는 대공국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나코(2km²)나 리히텐슈타인(160km²)보다는 룩셈부르크(2586km²)의 영토가 휠씬 더 넓습니다. 물론 공작보다 높은 대공이라 할지라도 왕보다는 낮은 신분이니, 대공국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왕국)보다 대체로 규모가 작습니다. 벨기에(30.528km²)와 네덜란드(41.543km²)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룩셈부르크보다는 휠씬 큰 것을 우리는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치자의 신분 서열에 따라 나라의 크기도 달라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 그렇다면 왜 다른 나라. 다른 도시가 이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까요?
14세기 흑사병으로 인한 농민 계급의 몰락과 지주의 파산, 농업의 쇠퇴는 고리대금업자(훗날 은행가로 미화된)와 상인의 전성기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피렌체 상인들은 무역을 동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흑사병의 직격탄을 맞은 피렌체 근교의 수도원은 황폐화되고, 수도사들은 감소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피렌체로 몰려들었는데. 수도원과 수도사는 절대적으로 부즉하게 되었습니다. 뒤숭숭한 현실에서 종교의 권위는 추락하고 미신과 이단이 출현하게 되었지요 여기에서 고리대금업자와 교회의 결탁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입장이었거든요
먼저 고리대금업자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전동적으로 고리대금업은 교회에서 악덕으로 여겨 죄악시했습니다. 고리대금업자에게는 영성체(성체성사를 받는 일. 가물릭 신자들은 영성체를 동해 하느님과 일체를 이룬다고 믿는다)와 중부성사(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받는 가톨릭 성사)가 허락되지 않았지요 중세의 끄트머리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것은 심각한 불안요인 이었습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축은 조상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졌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돈으로 조상의 영혼을 구할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지요
그러면 교회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가난한 신자들이 피렌체로 몰려드는데 교회와 수도사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흑사병이 돌았을 때 공동체 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어 기존의 교회와 수도원이 대부분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복원하자면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돈은 고리대금업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고리대금업자로부터 교회 재건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고리대금업자들의 요구 사항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조상의 유해를 교회 안에 안치하게 해 달라.
둘째 조상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간(가문의 기도실)을 교회 안에 만들어 달라.
고리대금업자들로서는 절박하면서도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의 요구 사항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교회를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 달라.
둘째 수도사들이 고유 업무에 정진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 달라.
자, 이렇게 되니 두 집단의 요구 사항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돈을 들여 교회를 치장하고, 교회는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피렌체의 부자들은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성인- 성녀의 묘와 가까운 곳에 조상의 유해를 유치하기 더 중요한 교회 후원하기. 중앙 제단에서 가까운 곳에 가문의 기도실 갖기 가문의 기도실을 유명한 예술가에 맡겨 장식하기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피렌체의 부자들은 초기에는 기독교 교리에 충실한 장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종교 우위의 사회 질서가 영향을 미치던 시기(중세 후기였고, 부자들이라 해도 기독교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부자들이 욕심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장식하는 그림에 자신들을 슬쩍 등장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화로에 부자들의 상징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 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세속 권력이 중교 권력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의미이지요
당시 화가들은 그림의 내용을 걸정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라기보다는 기술자, 혹은 장인에 가까있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이 그림의 주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교회와 학자들이 정했는데. 초기에는 그들의 주장이 반영되어 기독교적 주제가 그려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그림에 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의 억압을 벗어나 인간이 등장하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지요.
피렌체 메디치 궁전 벽면에 그려진 베노초 고출리의 "동방박사의 행렬'에는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젊은 동빙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어린 후계자 로렌초(훗날의 위대한 로렌초)클 모델로 하고 그를 보좌하는 수행원들로 코시모 데 메디치(로렌초의 할아버지)와 피에로 데 메디치(로렌초의 아버지를 등장시킨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메디치 가문에서 이런 시도를 하자 다른 가문들도 따라 하기 시작하여., 피렌체의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성화 중에는 후원자 가문의 인물들이 요소요소에 들어간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이예 중교적 주제에서 벗어난 미술도 등장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미술의 주제를 찾는 것이 유행하기 시직한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림 속에 성서 속의 인물. 혹은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인물이 아닌 신화 속 인물이 나오는 것은 중세의 장막을 걷어내는 획기적인 시도였습니
다. 왜냐하면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에서 가장 터부시한 것이 다신교에 해당하는 그리스 신화였는데. 바로 그 신화 속의 인물들을 그림에 등장시킨다는 것은 단순한 파격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르네상스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제세으로 생각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새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억압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로도 거의 1,0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동로마 제국이 멸망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입니다.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한 것은 유럽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 나라의 멸망이 아니라 서방 세계에 대한 동방 세계의 공격, 더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공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1499년에 베네치아령이었던 키프로스 섬을 오스만튀르크가 공격한 것입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오스만튀르크에게 패하고 맙니다.
혼자 힘으로는 오스만튀르크를 물리칠 수 없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공화국은 종교적 일치감에 호소하며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게 전쟁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교황청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게 성전에 참여할 것을 궐기했습니다. 이때 호응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대공국과 제노바 공화국, 우르비노 공국. 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었습니다. 이들 국가를 '기독교권 연합 합대' 혹은 신성동맹함대'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참전한 것은 종교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오스만튀르크가 지
중해에서 세력을 키워 가면 해상 무역에 의지하는 자신들에게큰 타격이 될 거라고 생각하여 자의반 타의 반 나섰을 겁니다.
오스만 제국의 합대와 기독교권 연합 함대는 1571년 10월 코린트 만의 레판토 앞바다에서 건곤일척의 혈투를 벌입니다. 이것을 '레판토 해전이라고 합니다.
갤리선(노를 주로 쓰고 못을 보조적으로 쓰는 군용 배)이 참전한 마지막 해전이라고 불리는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권 연합 합대가 큰 승리를 거듭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오스만튀르크는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승전국들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이때의 승리를 바탕으로 아르마다를 운영하며 해양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전쟁의 당사자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 무역의 왕자로 승승장구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대공국은 레판토 해전의 실질적 당사자는 아니었으나 자신들이 참전한 해전에서 큰승리를 거둠으로써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피렌체 시민들이 시뇨리아 광장에 승전을 기리는 넵투누스 분수를 만들어 세운 것은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 몇 년 동안 로마에서 고대 건축에 관한 공부를 하고 피렌체로 다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조각가로서보다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무렵인 1419년에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쿠폴라 설계 공모전이 발표됩니다. 피렌체 대성당의 쿠폴라는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하중이 무거워 일반적인 건축공법으로는 시공 도중 붕괴될 위험이 있어 당시까지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청동문 제작 공모전 때 입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공모전에 참여합니다. 그는 로마에서 판테온을 연구하며 쌓은 건축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쿠폴라 건설에 필요한 설계를 제안했고, 그것이 채택되어 쿠폴라 건축 총괄 책임자가 됩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는 역사적으로 보거나 문화적으로 보거나,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는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건축공학적으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구조물이므로 여기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거대한 쿠폴라의 무게를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까지 줄일 수 있느냐에 공사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고. '이중 골조 구조'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중 골조 구조란 마치 달걀 껍데기를 이중으로 씩운 것과 같은 형태로, 두 벽사이가 비어 있어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면서도 양쪽 벽이 서로 잡아당기는 역할을 하여 휠씬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건축방식은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기적으로 불리며. 이후 수백 년 동안 비슷한 규모의 돔이 건축되지 못했을 만큼 독창적이면서 성공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중 골조 구조는 본래 하중을 줄일 목적에서 만들었지만, 이렇게 하여 생긴 공간은 쿠폴라 꼭대기로 올라가는 통로로 사용되는 부수적인 기능도 했습니다. 지금도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그 공간은 비록 가파르고 좁아서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쿠폴라 꼭대기에 이르러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면 힘들었던 것을 다 잊을 수 있게 되지요.
브루넬레스키가 쿠폴라의 하중을 줄이기 위해 선택한 방법 중의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건축 자재인 석재 대신 벽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쿠폴라를 완벽하게 덮기 위해 약 400만 장의 벽돌을 사용했는데. 지그재그로 쌓아올리는 독특한 방식을 택합으로써 내구성과 안정성을 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석재보다 가벼운 벽돌을 건축 자재로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400만 장이나 되는 벽돌을 지붕에 없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벽돌의 총 무게가 37,000여 톤이었다고 하니 붕괴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8개의 주 리브와 16개의 중간 리브 를 설치하여 그것들이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브(늑골)란, 서양 건축에서 '얇고 편편한 재료를 보강하기 위하여 재료 단면과 직각으로 설치한 보강재"를말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벽돌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붕괴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벽면에 튼튼한 골조를 덧댄 것입니다.
그리고 쿠폴라를 지붕 위에 설치하는 평범한 공법 대신 드럼(쿠풀라를 받치는 원통형의 벽으로 쿠폴라의 높이를 늘리면서 채광용 창이 설치되는 구조물)을 먼저 만든 다음, 그 위에 쿠폴라를 없는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쿠폴라의 하중이 드럼을 통해 분산되도록 하여 안정감을 높인 것입니다.
1420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된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는 이러한 다양한 장치를 통해 안정감을 확보했고. 그 덕분에 거의 6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여행자를 맞이합니다. 피렌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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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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