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라바조의 작품이 지닌 독창적인 기법상 특징은, 첫번째는 명암을 효과적으로 강조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연속된 움직임의 어느 한순간을 잘라내 보여주는 점이다. 이런 두가지 기법이 어울려 극적인 효과를 발한다. 특히 성마태오의 소명은 이러한 창의성이 활짝 피어난, 화가 카라바조의 절정기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수있다. 이 그림이 지닌 드라마틱한 정점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로 그순간에 있다. 돌연히 출현한 그리스도, 명령을 내리는 그 몸짓이 너무나 위엄이 있어 일순간 충격에 빠진 사람들은 아연해져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없다. 하지만 곧이어 부름을 받은 레비(사도가 되기 전 마태오의 이름)는 일어서서그리스도를 따를것이다. ......뿜어내는 박력은 실로 이러한 동작의 정지 상태에서 비롯된다.
- 카라바조는 전생애에 걸쳐 약열두 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 사람을 모티프로 한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두눈은 각각 다른반응을보인다. 왼쪽눈에는 생명의 잔광이 느껴지지만 오른쪽 눈은 이미 흐릿해져버렸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그릴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아닐까. 나는 이 점에 경탄하지 않을수없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협 없는 그의 묘사가 인간의 잔혹함, 현실 바로 그대로의 잔혹함과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 신약성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의 첫 번째 제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케파(아람어로 바위의 단편, 반석이라는 의미)'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이후 같은 뜻의 그리스어 '페트로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로마로 선교를 떠났던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로 순교했다. 예수가 잡혀갈 때, "너도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한 후 죄책감으로 격하게 흐느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마태복음 J 26장69~75절) 그 후 베드로는 기독교 박해가 심해지던 로마에서 몸을 피하려고 아피아 가도를 걸어가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예수와 만났다. 그가 "도미네, 쿠오바디스(주여, 어디로가시나이까?)"라고 문자 예수는 "네가 나의 양들을 버리고 떠나니 나는 로마로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순교를 각오하고 로마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베드로는 심약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 일화는 마음 여린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이야기는 그렇게 생겨나는 법이다.
- 페라라 역에 인접한 유대인 박물관에도 가봤지만 아쉽게도 폐관 중이었다. 해 지는 거리에서 숙소 방향이라고 짐작되는 쪽으로 걸어서 돌아왔다. 역사가 느껴지는 좁은 길은 여기저기 튼튼해 보이는 아치로 보강되어 있었다. 길바닥은 역시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돌맹이"가 깔려 있었다. 지도에서 확인해보니 '볼테거리'라고 한다. 예전 유대인 게토로 향하던 길이다. 기둥에는 녹슨 경첩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밤이 되면 게토로 출입하는 거리의 다섯 군데 철문을 굳게 닫고 유대인들을 가뒤두었던 흔적이다. 페라라의 군주였던 에스테 가문과 유대인 공동체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궁정 문화의 번영을 나눠가졌다. 그러나 가문이 끊기고 이 땅이 교황령으로 편입된 이후부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통제가 강화되었다. 우르바누스 교황 치하였던 1624년부터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해방된 1796년까지, 유대인들은 이 좁은 구역에 같혀 살아갔다. 당시 유럽에서는 당연했지만, 지금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차별이었다. 이런 차별의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예전에 베네치아의 옛 게토를 방문했을 때, 그곳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서 "게토의 문을 나폴레옹이 열어주었다."라는 취지를 담은, 주민들의 감사장을 본적이 있다. 중정에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희생당한 주민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이곳 페라라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녹슨 경첩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게토에서 겨우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나치가 유럽의 점령지에 게토를 신설하여 전근대를 휠신 뛰어넘는 학살 행위를 차레차례 펼쳐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최악의 형태를 띠고서.
- 얀 판에이크(1395~1441),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 한스 멤링, 로베 르캉팽 등 플랑드르파 회화의 명품은 단지 아름다울 뿐만아니라 놀랄만큼 생생하다. 어째서 14~15세기라는 시대에 이러한 명화가 집중적으로 탄생했던걸까? 하위징아의 중세의가 따르면, 그것은 페스트의 대유행, 유대인 학살, 백년전쟁, 십자군, 끊임없이 반복되던 기근처럼 혹독하고 무참한 사건으로 뒤덮였던시대였기 때문이다. 재앙과 빈곤이 누그러질 날이 없었다. 역겨우리만큼 가난했다.(....... 영예와부를 열심히 바라며 탐욕에 사로잡혔던 것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하기 그지없던 가난으로 인해 명예와 불명예의 대조처럼 너무나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이런혼란한 시대가 역설적이게도 보석과도 같은 플랑드르파의 그림을 낳았던 셈이다. 하위징아의 저 묘사도,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르네상스 시대의 '극단적이기까지 한 양면성'은 아니었을까.
- 토리노는 내가 아는 이탈리아의 여타 도시들과는 인상이 꽤다르다. 예컨대오르비에토나 산지미니노는 중세 성채도시이며, 페라라나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는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층적으로 짜인 공간이다. 토리노는 이들 도시보다 나이가 젊다. 이른바 산업혁명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근대도시다. 거리를 오가는사람들의 표정까지도 나탈리아가 말한대로 어딘가 멜랑콜리하고도 실무적인 인상을 풍긴다. 오래전 토리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사실상 속국이던 사부아공국의 수도였다. 17세기 말, 계몽전제군주 비토리오아메데오 시대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고, 1720년에는사르데냐섬을 획득하여 사르데냐 왕국을 수립했다. 이때부터 오늘날 토리노의 기반이 정비되고 산업도 융성하여 중산계급의 성장과 함께 이탈리아의 근대가 준비될 수 있었다. 이지역을 진원지로 삼아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통일운동)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1860년에는사르냐왕국이 다른지역을 병합하는 형태로 통일된 이탈리아국가를 세웠다.
- 미켈란젤로는 살아 있다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1475년 피렌체 교외의 카프레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도비코는 은행경영에 실패한 후 공화국정부의 임시직원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지만 스스로 명문 시민계급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일가는 피렌체로 겨우 돌아왔고, 미켈란젤로는 여섯 살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적이 나쁜 학생이라서 또래에 비해 읽기도쓰기도 늦었고 고전어에도 신통치 않았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의욕을보였다고 한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열세 살이 되자 당대 인기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공방에 도제로 들어갔다. 산마르코수도원 정원에는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수집한 미술품이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 미켈란젤로는일마니피코로부터 대리석을 받아 목양신을 새겨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작품에 푹 빠져버린 일마니피코는 그 천재소년을 자신의 집에서살게했다. 열다섯살이된 미켈란젤로는 "오락을 멀리하고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며 젊은여성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음울하고 과묵한 성격이라 걸핏하면 싸움을했다. 언젠가는피에트로토리자노라는 남자와 말싸움끝에 결국 호되게 얻어맞아 코뼈가 주저앉은 적도있었다. 그사건 이후 점점 더 사람을 피하게 되었고성격도 삐뚤어졌다.(몬넬리외,네스의역사-반종교개혁의이탈리아 주코문고, 1985년) 일 마니피코가 죽고 몇 년이 지나 1494년부터 4년남짓한 기간동안 사보나롤라는 향락과 퇴폐 풍조를 규탄하면서 피렌체의 신공화제아래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했다. 무도,도박, 경마같은 오락은 모두금지했으며 신을 모독한 자에게는 혀를 뽑는형벌을 내렸고, 동성애자도 엄벌에 처했다. 축제와도 같았던 일마니피코 시대의 분위기는 모조리 사라졌다. 압수한 대량의 '사치품'은(그중에는 귀중한 필사본과 일급미술품도 섞여있었지만) 광장에 쌓아놓고 모두불살랐다.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레산드로6세에게 파면되어 처참한 고문끝에'거짓예언자라는 명목으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1498년 5월23일, 피렌체의 많은 시민이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주도아래 '허영의 소각'에 처해졌던 시청앞 광장에서 제자 두명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 후, 다시 화형을 당했다. 신학상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사보나롤라는 20년후 종교개혁의 기치가 된도덕적요청을 확실히 먼저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사건의 전말을 어떤 기분으로 지켜보았을까? 그는일마피코에게 큰 은혜를 입으면서도 동시에 정적 사보나롤라의 '도덕적 요청'에도 공감했다. 이러한 정황은 이후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사보나라가 처형된 다음 해인 1499년, 로마로 이주했던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완성했다. 작품의 성공으로 주문이 물밀듯이들어왔다. 인기 작가가 되었다고 해도 성격은 온화해지지 않았고 그대로였다. 변함없이 친구를 사귀지못했고, 술집이나 유곽은 커녕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빗질도 목욕도 좀체 하지 않았다. 달랑 한벌뿐인 더러운 옷을 입고 구두를 신은채 잠들었다고한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2년 남짓한 시간을 들여 다비드를 제작했다. 이 거대한 조각상은 1873년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지기까지 피렌체 공화국 청사 베키오궁앞에 서있었다. 지금 그자리에 있는 다비드는 복제품이다.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르네상스의 자유도시 국가 피체중앙광장에서 의회 정면 계단을 지키며 서있다.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몸으로, 새하얀 대리석의 맨몸뚱이로. 그리고 왼손에 쥔 가죽물맷돌을 어깨에서 등너머로 걸쳐 놓고 골리앗을 쓰러트릴 돌멩이는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왼발은 실로 한발자국 내딛는듯하다. 보라! 굳게다문 입과 아름다운 머리카락아래 지성과 힘으로 아로새겨진 눈썹을! 치켜뜬 두 눈은 인류의 적, 민중의 적을 응시한다. 기나긴 중세 봉건의 압제 아래에 있던 어두운 세계로부터 드디어 빠져나온 인류가 새로운세계, 새로운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한다. 그선두에 서서 달려 나간 르네상스의 꽃 피렌체의 자유독립 시민들.( 한가운데에 미켈란젤로의다비드가. 자유도시 피렌체에서 선거 수립된 시뇨리아 정부의 의사당 팔라초베키오 정면에 우뚝 서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 미켈란젤로의 생애 동안 피렌체의 정치 체제는 로렌초데메디치(일 마니피코)의 참주제로 시작하여 두 명의 메디치 교황시대를 거쳐 코시모 1세의 절대군주제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두번의 메디치가문 추방이 있었고 사보나롤라의 민중공화제나 소데리니의 과두공화제, 그리고 과열된 포위전도 경험했다. 절대군주들이 60년 이상에 걸쳐 단속적으로 투쟁을 거듭했던 이탈리아 전쟁이 피렌체의 격변으로 상징되는 이탈리아의 비운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는 그런 이탈리아 전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있다. 전쟁에 둘러싸인 패트런을 섬기던 예술가의 생애가 평온할 리 없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괴로움속에서 작품을 만들었고, 작품을 만들며 괴로워했다.
- 베키오 다리는 아홉 살 소년 단테(1265~1321)가 구원의 여인인 한 살 어린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다는 전설의 다리다. 10년 후 다시 만났을 때 베아트리체는 하얀 너울 위에 올리브 띠를 두르고 푸른 망토 속에는 찬란한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단테 역시 귀족 가문의 딸인 집마 도나티와 결혼한 상태였다. 베아트리체는 자녀를 낳고 살다가 스물네 살의 젊디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단테는 그녀를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 품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 신곡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베키오 다리가 그런 애틋하고 낭만적인 스토리만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베키오 다리, 즉 폰테 베키오는 이탈리아 말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피렌체에서 가장 일찍 만들어진 교각이다. 베키오다리는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되었는데, 중세 전에는 교각 위 도리까지만 석조이고 그 위에 걸친 부분은 나무로 된 쪽이 좁은 다리였으나 1177년 완전히 석조교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1333년 대홍수 때 모두 유실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 개의 아치형 도리에 폭도 비교적 넓은 우아한 2층 다리는 1345년 거장 타데오 가디(1300~1366. 피렌체 화파의 대가 조토의 제자로 스승이 죽은 뒤 30년 동안 피렌체 화파를 이끌었다)가 완성했다. 이 로맨틱한 다리 위에 처음 들어선 가게는 엉뚱하게도 푸줏간이었다. 게다 베키오 상류에 사형수의 처형장이 있어서 종종 시체가 다리 아래로 떠내려 오기도 했다. 때문에 베키오 다리는 행인들이 코를 막고 빨리 지나가야 하는 지저분한 저잣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채로 2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딸을 프랑스 왕에게 출가시키게 된 코시모 1세의 아들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는 갑자기 그런 베키오 다리가 남 보기에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귀한 사돈이자 프랑스의 왕을 모시고, 관저 베키오 궁전을 출발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갤러리이지만 그 당시 메디치 가문의 개인 사무실이었던 우피 치를 경유하여 사저 궁전으로 갈때, 베키오 다리 2층 통로 아래서 전개되는 광경이 그래서야 정말이지 매우 난처했을 것이다. 코시모 1세는 바사리에 의뢰해 오늘날의 2층 누각을 짓게 했다. 푸줏간은 다른 곳으로 강제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처럼 귀금속 상점이 들어섰다.
- 피렌체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단박에 느낌 수 있다. 중앙역에 내린 관광객의 눈에 바로 들어오는 붉은색의 동근 몸을 쫓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를 향해 곧장 달러가야 할지, 아니면 역에서 제일 가까운 산타 마리아노 벨라 성당에 가서 피렌체에 오게 된 데에 감사기도부터 드리고, 이 성당의 파사드,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프랑스 어로 얼굴이라는)를 설계한 최초의 만능 르네상스 인 알베르티1404~1472에게 존경을 표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1898년 처음 피렌체를 방문한 릴케1875~1926가 그랬던 것처럼 시뇨리아 광장으로 달려가야 할지 즐거운 고민에 빠진다. 아니면, 메디치 가문의 공동묘지인 카펠라 메디치는? 아니, 베키오 다리로 가서 쇼핑을 먼저? 이도저도 제처놓고 우선 '피차토리아 피자집'부터?
- 오늘날 우리가 피렌체에서 보는그토록 많은 예술품들은 메디치라는 한 가문의 후원과 결단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수가 없다. 메디치가문은 1397년 조반니 비치1360~1429가 메디치 은행을 설립한 이래 시작되어 1737년 마지막 후계자 잔 가스토네1671~1737가 후손을 두지 못하고 사망함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340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잔가스토네의 누이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1667~1743는 메디치 가의 소장 예술품과 수집품 모두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유언을 남겼는데, 여기에단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단 한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겨서는안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는 왕과 정치인들에 의해 우피치의 작품들이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덕분에 우피치 박물관은 연간500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 페트라르카의 고향, 아레초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 3대 문인이라고 하면, 단테,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를 손꼽는다. 이들 셋은 모두 토스카나 지방 출신이라는 공통점말고도 많은 인연이 서로 업혀 있다. 단테는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이었고, 페트라르카는 추방당한 공직자의 아들이었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있었다면, 페트라르카에게는 라우라가 있었다. 말년의 페트라르카는 단테의 신곡을 모방하여 승리를 집필했다. 단테가 토스카나 방언으로 르네상스를 시작했다면, 유려한 라틴어로 고전부활의 르네상스를 본 궤도에 올려놓은 장본인은 페트라르카라 할 수 있다. 단 테가 중세를 마감한 인물이라면,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김상군,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그리고 보카치오는 페트라르카의 제자였으 므로 이들 셋은 차례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열었던 것이다. 인문주의 정신과 그 작품들은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어 이탈리아에서부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요컨대 인쇄술은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의 세속적인 이야기도 확산시켰던 것이다. 페트라르카가 내놓은 덕성 회복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고전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선한 덕성을 회복하는 길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주었던 사람은 바로 고대 로마의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로서 그들과 같은 고대 로마의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의 양심과 덕성을 회복시킬 있다고 믿었다. 페트라르카는 인간이 고매한 덕성을 드러내며 찬란히 빛났던 고대 로마문명의 시대. 그러한 고대 로마 문화가 사라져버린 암흑의 중세 시대, 새롭게 부활한 인문주의의 시대로 역사를 3등분함으로써 '네네상라라 새로운 시대적 개념의 기초를 놓았으며, 고대 문화의 부활을 선언한 것이었다. 몽방투 산을 내려오는 길에 인간의 진정한 내면적 가치를 발견했던 페트라르카를 통해 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함께 시작되었다.
- 예술가 열전,을 집필한 바사리의 고향, 아레초 아레초에서 사람들이 즐겨찾는 명소들 가운데는 바사리의 생가가 있다. 바사리는 유명한 화가이자 우피치 궁전을 설계한 건축가였지만, 르네상스라는 말을 만든 업적을 남겼다. 16세기의 토스카나 하면 언제나, 오만한 눈빛과 권위적인 얼굴의 코시모 1세와 그를 위해 언제든지 봉사할 채비가 되어 있는 정력적이면서도 근엄한 바 사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코시모 1세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바사리는 젊은 국가의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하여, 각자의 상호 보완적인 재능을 결합시켰다. 한 사람은 무기와 법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은 펜으로 토스카나 공국의 위광을 드높이는 데 함께 기여했으며, 그들의 창조 활동은 군주의 상승과 국가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바사리가 죽은 뒤, 문인 바사리와 미술가 바사리 사이에 십각한 불균형이 일어난다. 사실 그는 스스로를 전문적인 문인으로 여긴 적이 없으며 그의 저서 예술가 열전,은 우연한 계기로 남들에게 떠밀려서 집필된 것이었다. 바사리 자신은 화가로서 더 큰 야망과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날이 갈수록더 큰명성을 얻었고 지금까지도불후의 명저로 남게 된 반면에 그가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천정화, 베키오 궁의 벽화를 비롯한 무수한 프레스코 대작들과 패널화 등을 그린 재능 있는 화가이자, 피렌체 시의 명물인 바사리 통로, 우피치 궁 등을 설계한 탁월한 건축가이며, 코시모 1세가 군림하던 피렌체 공국의 문화.예술 사업을 주도한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무수한 미술 작품들은 망각 속에 묻혀 그가 과연 생전에 화가였는지조차 아리송할 정도가 된 것이다. 고딕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기도 한 바사리의 기념비적 저서 예술가 열전은 서양 미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절대적이다. 르네상스 연구의 권위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 책이 없었다면 유럽 전체에는 아직도 미술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바사리는 이 책에서 미술은 1250년경 이 탈리아에서 새로이 부흥했으며 16세기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거듭 발전 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렇게 새롭고 뛰어난 것의 일부가 되었다는 자각이 곧 르네상스 시대에 자부심과 응집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볼 때 르네상스는 중세적인 유산을 파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집대성했다.
- 메디치 은행이 설립되다 사업이 번창하는 곳에 은행업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탈리아의 은행업이 번창한 것은 단지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자금이 필요한 강대국의 등장이 사실상 더 큰 이유였다. 1330년경이 되자 비단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 은행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왕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137~1453을 촉발시킨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영국의 모직물 교역을 전담하는 은행업 허가를 내주는 조건으로 국내외에서 많은군자금을 조달했다. 세속의 지도자이건 교황과 같은 영적지도자이건, 그런 거래는 수지도 맞았만 위험도 컸다. 에드워드 3세는 1339년 전쟁에서 패하자 부채에 대한 지불불능을 선언했다.그 여파는 이탈리아에도 미쳐서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 등이파산했다. 그당시 이탈리아의 은행은 대체로 종류로 분류되었다. 첫째, 전당포와 유사한 소매금융을 하는 방키 디 페니로서 이자율은 43.5%였다. 그러나그것은 명목상이었고 실제로는 60%가 넘었다. 그래서 1460년대프 란체스코 수도회는 최소비용만을 이자로 부과하는 서민 은행 몬티 디 피에타설립했다. 둘째, 도시 상인들을 위한 은행인 방키 인 메르카도는 광장이나 다리 주변에 사무실을 개설하여 상인들을 위해 예금과 대출 그리고 송금업무를 했다. 또 금속화폐의 함량도 측정했을 뿐만 아니라 금은화 등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정보도 수집했다. 셋째. 오늘날 국제금융기관에 해당하는 방키 그로시다. 소위 도매금융을 담당했는데, 국가 간 자본과 신용이동을 주로 담당했다. 그들은 해외의 여러 도시에 지점들을 보유했고 협력은행들과 제휴를 했다. 따라서 방키 그로시의 주요 고객들은 자연히 왕가나 귀족 그리고 교황청이었다. 15세기 말 피렌체에는 33개의 방키 그로시가 있었다. 르네상스의 요람이자 메디치 가문의 본거지인 피렌체는 15세기 초반 내내 주변 도시국가들과의 끊이지 않은 전쟁 덕분에 성장했다. 그 당시 전쟁은 비용이 많이 드는 용병들이 담당했는데 전쟁 중 용병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상승으로 물가는 계속 치솟았다. 피렌체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방키 그로시로부터 차입했다. 적절한 이자에 자금을 공급한 은행들은 급성장했다. 그 대표적인 은행 가문이 바로 메디치인 것이다. 메디치 가문이 최초로 피렌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201년 키아리시모 디 잠보오노 데 메디치가 시뇨리아로 선출되면서 부터이지만,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조반니 디 비치가 1397년 은행업을 시작하면서였다. 조반니가 사망할 무렵 메디치 가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메디치 가는 도시국가 피렌체를 넘어 이탈리아와 유럽 대륙, 더 나아가 서구 역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새로운 시대사상이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유입되었고 피렌체는 가장 빨리 그러한 변화를 소화했다. 이것이 바로 전성기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 신 플라톤주의의 파도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와 같은거대한 예술적 해일을 일으켰고, 이러한 문명의 격동 뒤에는 코시모의 사려깊고 조용한 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코시모는 가업의 경영, 특히 은행 경영에도 탁월했다. 코시모는 크게 4가지 략을 통해은행업을 크게확장했다. 첫째, 경영 시스템의 도입과 권한이양을 바탕으로 한확장 전략을 펼쳤다. 코시모는 우수한 지점장을 선발했고, 보고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유럽 각지에 지점망을 설치해 은행의 규모를 키웠다. 둘째, 신뢰를 바탕으로한인적 네트워크 전략을 썼다. 코시모는 뛰어난기 억력, 근면성, 신뢰성, 그리고 적정한 수익배분을 바탕으로 업자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로마와 제노바 등지에서 새로운 동업자를 영입했다. 셋째.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인적자원 투자가 적중했다. 간혹 실패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메디치 가문이 교황이 될 만한 인물에 대해 사전에 손을 써 두는 능력은 가히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있다. 파란투첼리와 피콜로미니가 교황으로 재위하는 동안 메디치 은행 로마 지점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전체수 익의 절반을 넘었다. 넷째, 다각화 경영을 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뿐만 아니라 섬유, 말, 노예, 심지어 아프리카의 기린도 잡아다 팔았다. 1466년 메디치는 명반 광산에 대한채굴 및 수출권을 확보했다. 코시모는 자신이 설정한 과제를 잘 수행했다. 코시모는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당, 수도원, 병원, 그리고 복지시설을 직접 짓거나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다. 예를 들면 피에솔레의 바디아 성당,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산 로렌초 성당, 예루살렘의 병원 등이다. 코시모는 학자들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학문을 사랑했다. 그는 동방으 로부터 희귀한 고문서를 수집하는 상설 조직도 두고 있었고, 동방으로 여행하는 학자들에제 여행 경비를 제공하기도 했다.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코시모의 노력을 영국의 사학자이자 로마 제국 홍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코시모의 이름은 학문부흥의 동의어와 다름없었다. 그의 신용은 명성으로 승화했고, 그의 부는 인류에 대한 봉사를 위해 바처졌다. 그는 카이로에서 런던까지 서신 왕래를 했으며, 종종 인도의 향료에서부터 그리스의 서적까지 같은 배에 실어 수입해 왔다. 코시모는 단지 한 가문의 영광과 부를 축적하고자 노력했던 존재가 아니라. 피렌체와 이탈리아, 그리고 유럽 전체의 사상사적 번곡점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신플라톤철학을 이탈리아와 유럽에 소개했으며 그 시대의 정신을 배태시키고 새로운 사상이 새 시대의 정신이 되도록 만든 인물이었다. 그가 정한 플라톤 아카데미 운영 규칙 중 하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였다고 한다. 학자와 예술가에 대한 코시모의 이런 정신이 새로운 시대를 낳게 했다.
- 미켈란젤로의 부친 로도비코는 카프레세 시장직을 마치고 피렌체로 돌아갔다. 피렌체 인근 세티냐노에는 집안 소유의 농가가 한채 있었고 반나절 거리에 유명한 채석장도 있었는데, 미켈란젤로의 생모가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친은 세티냐노 채석장의 한 석공의 아내를 유모로 삼아 그를 맡겼다. 이런 사실 또한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예술가로서 각본대로 미리 짜여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좋은 구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부터 각종 돌, 대리석, 조각 작품, 석수와 조각가들 사이에서 그들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랐다. 석수의 아들들은 바깥세계와 혼인을 맺는 법도 없었고 미켈란젤로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섯 살에벌써 망치와 끌을 들었다. 그들의 재주는 문자 그대로 '비법으로 전수되었다. 토스카나 석수들은 어려서부터 돌의 느낌과 냄새 그리고 겉은 물론 속살까지 알았기에 돌이 뜨거운 햇빛이나 밝은 달빛 아래서는 어떻게 보이고 겨울철 얼어붙은 비바람 속에서는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았다. 토스카나 사람들은 돌 대하기를 사랑하는 연인 대하듯 했다. 이곳에 에트루리아 인이 살 때부터 산에서 돌을 캐와서 자르고 다듬어 숩 막히게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다. 집, 궁전, 교회. 공공건물, 로지아, 성벽을 만들었다. 토스카나 사람들은 타고난 조각가이자 건축가였다.
- 코시모의 적자들 중 둘째 아들 조반니는 건강하고, 유능하고, 성격도 쾌활했다. 게다가 유능한 사업가였으 므로 코시모의 기대가 켰다. 장남 피에로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 조반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후계자 코스를 착착 밟도록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인지라. 조반니는 살을 빼려고 노력하던 중 심장마비로 애석하게도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기대를 한몸에 받던 둘째 자식이 오히려 아버지보다 1년 먼저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1464년 장자 피에로는 코시모가 죽기 직전인 48세에 메디치 가문의 수장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체질이 허약했고, 특히 가문의 지병인 통풍이 워낙 극심해서 별명까지도, 통풍에 걸린 자라는 뜻으로 '일 고토소였다. 그는 통풍 외에도 관절염과 습진에 시달렸으나 짜증을 내지 않았고. 인내심도 많았으며, 또한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피에로는 매우 세심했다. 그는 집안일이나 사업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상세히 기록하게 하여 경영관리의 비교기준을 만들어 놓았다. 예컨대. 부친의 장래에 들어간 비용에 대해 성당의 예배비용. 가족 및 하인들의 상복에든 검은 천의 양, 양초와 밀납의 무게까지 기록해 두었다. 피에로는 메디치 가문의 사람으로서는 훗날 역사가들 사이에 평가가 겨의 일치하는, 분쟁을 싫어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피에로는 한때 동업자이기도 했던 토르나부오니 가문의 루크레치아를 부인으로 맞았다. 가문의 중흥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루크레치아는 문자 그대로 현모양처였다. 그녀의 지성은 여느 대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문학의 후원자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었다. 피에로와 루크레치아 사이에는 딸 셋과 아들 둘이 있었다. 잘 키운 딸 셋은 파치가문, 루첼라이 가문, 그리고 레오페트로 가문 등 모두 좋은 혼처로 시집도잘 보냈다. 코시모가 임종활 당시 각각 열다섯과 열한 살이었던 두 아들 로렌초와 줄리아노는 이후 메디치 가를 반석 위에 앉혀 놓았다.
- 피에로는 1464년 가문의 수장이 된 직후 당시 약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에게서 큰 재능을 발견하고서 그를 고용했다. 보티첼리를 높이 평가하는 현대 세계는 그 혈혈단신의 청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은 피에로 일 고토소에게 감사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식견이 탁월했던 그의 아내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도 그 문제에 관한 한 관심이 남편 못지않았다. 이 재능 있는 후원자 부부는 부부의 장남보다 불과 네 살 위였던 보티첼리를 메디치 가 저택으로 불러들여 그 집 아들과 같은 대접과 후한 보상을 해 주며 그가 작품 활동에 꾸준히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피에로는 아직 유행하지 않던 초상화 대신 동생 조반니와 마찬가지로 미노다피에솔레에게 흉상을 제작하도록 했다. 미노 다 피에솔레는 뛰어난 흉상조각가였고 피에로를 잘 알았으므로 그의 실물과 거의 흡사한 향상을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그 흉상은 현재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의 준수하고 강인한 얼굴을 잘 보여 준다. 피에로와 조반니의 흉상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모델로 한 최초의 작품들에 속한다. 코시모와 마찬가지로 피에로는 사유재산을 사회적 대의를 위해 투척했다. 그는 예술가의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가였고, 또한 친구였다. 산 미니아토 알몬테 성당과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거액의 기부를 했고 메디치 도서관을 위해 많은 희귀본 장서를 필사본으로 만들었다. 코시모가 귀환한 1434년부터 피에로가 죽은 1469년까지 35년 동안 메디치 가문은 동방에서 사본들을 찾아서 구출하는 데 들인 것보다 많은 비용을 학문과 그와 비슷한 목적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관들의 형태로 공중의 유익을 위해 사재를 털어 기부했는데, 그 액수를 오늘날 화폐로 환산하면 300만 파운드에 달한다.
- 로렌초는 1469년부터 1492년까지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통치했는데 이때가 르네상스 최고의 전성기가 되었다. 로렌초 때문에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고향이 될 수 있었고, 미켈란젤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와 정치적으로 화해한 후 로렌초는 피렌체의 거장들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이 막 건축한 시스티나 성당의 내부 장식을 돕게 했다. 로렌초가 피렌체를 통치하는 동안 메디치 저택은 르네상스 문화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되었다. 로렌초는 선대의 총애를 받던 플라톤주의 사상가 마르실리오 피치노에 대한 후원을 계속했으며, 폴리치아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함께 신 플라톤 철학을 논하며 피렌체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끌어갔다. 새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는 정신적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꽃이 만개했다.
- 피렌체는 선대 코시모 가계의 지배 아래서는 경험하지 못한 안정을 얻었다. 그러나 새롭게 마련된 안정에도 불구하고 피렌체는 예술, 과학, 그리고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잃어 갔다. 메디치 가문이 몰락의 조짐을 보인 것은 피렌체의 대공으로 등극했던 코시모 1세1519~1574 때 일이다. 그는 15세기에 살다 간 가문의 위대한 조상이자 동명이인인 코시모 데 메디치와 전혀 다른 유형의 리더였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늘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던 국부코시모와는 달리 16세기의 코시모 1세는 권력을 독점한 황제처럼 거들먹거렸다. 어느 날. 코시모 1세는 아들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의 딸을 프랑스 왕에게 출가시키기로 결정하고 바사리에 의뢰해 베키오 다리 위로 이층의 누각을 지었다. 유연한 재료로 공중에 떠 있는 길을 만들고 축제 다음 날 바로 철거해버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애초 의도와는 달리 이 공중길은 후세에 길이 남을 진정한 도시 건축물이 될 운명이었다. 공중길, 즉 '바사리 통로'란 바로 이 베키오 다리 위를통해 베키오 궁과 피티 궁을 연결한 긴 복도를 말한다. 밖에서 보자면 베키오다리 맨 위 지붕 바로 믿 일련의 창문들이 이여져 있는 공간이다.
- 역사가들은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을 코시모 3세1642~1723의 오랜 통치기간에 반복헤서 나타난 리더십의 부재로 돌린다. 그는 무절제한주색잡기로 악명을 떨쳤다. 탁월한 현실감각, 용기와 관용. 조화의 정신으로 국부.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던 선조들과 달리 텅빈 머리. 허영과 사치, 유약함, 편협했던 사고방식을 가진 후손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그는 불규칙 한 폭식으로 만성적인 질환을 얻게 되고, 주치의는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처방했다. 비만에 시달리던 코시모 3세가 운동 장소로 찾아낸 곳은 바사리 통로였다. 그는 이 긴 회랑에서 걷기 운동을 할 때 무료함을 달래려고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조각품을 일럴로 전시하도록 했다. 피렌체가 배출했던 위대한 천재들에 의해 탄생한 예술품이 비만에 시달리던 한 개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눈요깃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가문을 낳았고 그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은 몰락했다. 메디치 가문은 정신의 위대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를 남겨줬을 쁜 아니라, 위대한 정신이 쇠퇴했을 때 가문의 역사도 끝난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이 교훈이야말로 메디치 가문이 남긴 문화유산보다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 토스카나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통치하에 놓였으며 메디치 가의 마지막 인물이었던 안나 마리아 두도비카는 메디치 가에서 소유하고 있던 공방의 문을 닫고 가문을 보존해야 하는 서글픈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는 1737년 로레나 왕조와 미술품 양도 협정에 서명하며 몇 가지 조항을 내걸었다. 미술품들은 첫째.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영예'를 위해 양도되어야 하고, 둘째, 피렌체 시민들의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하며, 셋째, 외국인의 관심을 끌도록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피치 궁을 포함한 예술품과 보물 등 거대한 유산인 가문의 모든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한다는 유언에서 단 한 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기지 말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렇게 해서 가문의 대는 끊겼지만 가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메디치 가문에 부와 명예와 권력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 시대를 열고 위대한 통치자들을 배출하고 세계 최고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가문의 역사가 이어진 340년 간 사람에 관심을 두고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 문이다. 새로운 생각과 사람에 대한 관심, 예술과 학문에 대한 후원이 세대를 넘어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힘은 메디치 가의 좌우명 셈페르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늘, 한결같은, 변하지 않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라틴어는 메 디치 가문의 시작부터 마지막 후손이었던 마리아 두도비카에게 이어져 내 려온 정신이었다. 21세기의 피렌체 사람들은 18세기 중엽에 문을 단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사람들에게 남긴 막대한 문화유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피치 미술관과 피티 궁 박물관에 소장된 예술품을 보려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피렌체의 재정이 유지되고 있다.
- 스승의 붓을 꺾게 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공증인의 서자에서 만능인으로 발전하기까지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1452년 출생 이후부터 어린 소년이었던 그가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자각하게 된 1467년경까지 빈치에서 보낸 시절이다. 두 번째 단계는 1467년부터 1482년까지 피렌체에서 베로키오와 합께 작업했던 시절이고, 세번째가 1482년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타 공작의 후원을 받기 위해 고향을 떠난 시기다. 부친은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안드레아 베로키오에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말겼다. 베로키오 공방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가 알아 두어야 할 요긴한 기술과 지식들을 하나하나 배웠다. 회화와 건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다루었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성실하게수련을 받았고 베로키오는 그에게는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원근법, 수학과 시각 이론 그리고 다방면의 요긴한 학문들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빛의 전파나 음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깊이 새겨 두었다. 베로키오가 제작한 조각의 인물들은 우아하고 친근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이는 베로키오 조각의 특징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배웠던 어린 시절에 남긴 스케치를 보면 친근한 얼굴과 부드러운 미소가 자주 나타난다. 미소 짓는 입가의 표정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승에게서 배운 미소를 평생토록 잊지 않고 많은 그림에 남겼다. 베로키오는 문하생으로 들어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어린 아이의 그림을보고 로마 시대부터 이 땅에 나타난 적 없던 천재가 태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미술가로서 베로키오의 장점이 무엇이든 그가 르네상스에 기여한 바는, 그의 이름과 함께 연상되는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서 철저히 가려지곤 했다. 그는 도나텔로에게서 배웠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견습생으로 데리고 있었다. 또한 페루지노와 보티첼리 같은 전설적인 화가들의 스송이기도 했다. 우골리 노베리노는 "베로키오는 그 이름이 이탈리아의 도시들 위로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제자로 두었다"고 말했다.
- 르네상스 인의 고전적 원형인 알베르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알베르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1407년에 서출로 태어난 알베르티는 르네상스 예술운동의 출발점에 서 있으며 그 시대정신의 예술적 가치를 명확하게 규정했던 15세기의 위대한 르네상스 이론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르네상스 인을 구현한 인물로 여겨진다. 알베르티는 1428년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법률가로서의 길을 걷는 대신 1432년 로마 교황청 사무국의 서기로 근무하면서, 높은 성직에 있는 후원자의 부탁으로 성인과 순교자 들의 전통적 생애를 고전 라틴어로 다시 쓰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관심과 활동은 매우 현실적이었고, 인문주의적이고도 전문적인, 눈에 띄는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만능인 보편인의 표상인 알베르티는 모든 분야에서 대가였다. 대학에서 7년간 법을 전공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법 도덕철학뿐 아니라 회화 :조각 건축 .음악 시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그의 재능을 보고 어느 동시대 사람은 이렇게 적었다. 이 남자가 모르는 것도 있는가." 또한 그는 브루빌레스키, 도나텔로, 마사초 등 당대의 최고 예술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알베르티는 뛰어난 역사가, 문필가, 수학자, 무술의 고수였고, 모든 것이 수학적 이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현대인들이 서양적 사고'라부르는 사고방식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예술에도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전형적인 학자의 태도로, 싸움부터 가정을 이끄는 법까지 모든 것을 방법론과 이론으로 정리했다. 그의 미술사저서로는 마사초의 원근법을 수학적으로 정리한 회화론과 브루넬레스키의 건축법을 방법론으로 만든 건축론이 있다. 그가 남긴 역사상 거의 최초이자 최고의 업적은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다.
- 알베르티는 르네상스 건축의 1급 이론가였을 쁜 아니라 위대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생애 후반기 20년 동안 알베르티는 자신의 건축 아이디어를 몇몇 훌륭한 건물에 구현했다. 예컨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파사드, 팔라초루첼라이는 완벽한 측량 감각으로 유명하다. 이 건축은 피렌체의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의 유산을 훌륭하게 계승한 것이었다. 알베르티의 인물 됨됨이와 업적은 다재다능할 뿐 아니라 통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사상과 생활에서 측량과 조화라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했다. 그의 지적 추구와 예술적 추구는 동질적이었으며 이론과 실천 사이의 독특한 균형을 이룩했다. 알베르티는 수학에서 그림의 원리. 즉 원근법과 무게의 변화에 관한 놀라운 명제도 이끌어냈다. 그 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 확실히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의 목적은 오직 하나, 공고한 지배권을 수립하는 데만 있는 것이다. 그 지배권의 정통성, 수단의 윤리성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사대국인 동시에 정치대국은 오직 로마 제국뿐이고,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정치는 잘했지만 군사를 중요시하지 않은 로렌초는 피렌체의 현재를 논한 군주론에 언급할 가치가 없는 과거의 인물이었고, 아직 행복했던 시대의 명군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죽음을 경계로 시대는 번했다. 불행한 시대의 피렌체를, 그리고 이탈리아를 구하려면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다른 인물이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군주론에서 체사레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의 사람들, 특히 젊은 공자 로렌초에게서 이탈리아의 구원자, 체사레 보르자 같은 신군주의 면모가 드러나기를 기대했다. 체사레의 통치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한 요소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체사레를 메디치 가의 지배자가 따라야 할 이상적 군주상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론을 증정받은 메디치 가의 젊은 공자는 이것을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 밀라노로 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생애 첫 30년 동안 피렌체에서 성장하고 예술가로서 활동했지만 피렌체의 예술 후원가들에게서 무시를 당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디를 가나 가지고 다니던 작은 수첩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남긴 예술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에서 고독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게 된 직접적 계기는 1476년 동성애자로 재판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수치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었던 때문인지 메디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등용하거나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굴욕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정작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밀라노의 통치자에게 추천한 사람은 위대한 자 로렌초였다. 흥미롭게도 로렌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화가나 예술가로 소개하지 않고 음 악가로 추천했다. 음악은 로렌초 데 메디치가 즐기는 여러 소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미성과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던 레오나르도다 빈치는 말머리 모양의 은 류트Iute, 16~18세기까지 유럽에서 널리 유행하던 기타와 비슷한 현악기를 제작한 바 있었다. 로렌초는 피렌체와 밀라노 동맹이 필요할 때 유용하리라는 정치적 계산으로 스포르차에게 그 류트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그것을 스포르차의저택에 직접 갖다 줄 기회가 오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뭘 듯이 기뻐했다. 그렇게 밀라노로 향한 이후 그는 18년을 그곳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가 아마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공작의 궁인 거대한 스포르차 성을 중심으로 하는 밀라노는 토스카나의 섬세한 양식보다는 북부 유럽의 전통에 더 가까웠다. 사람이 많아 비좁고,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춥고,오염되고 거칠었지만 이 도시의 생동감은 즉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음을사로잡았고 그는 별로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고 그곳에 정착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다채로운 재능들을 보다 깊이 있게 연마해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공의 후원하에 도미니크수도회 소속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린 대형 벽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만찬>을 청탁받은 것은 1493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