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색을 입다

예술 2023. 5. 5. 10:45

컬러는 오랜 시간에 걸처 유행을 이끌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노란색이 여성을 위한 색인 반면, 검은 색은 애도를 뜻했다. 바다달팽이의 분비선에서 염료를 추출하는 티리안 보라색은 그 희소성과 높은 가격으로 황제와 왕족만 소유할 수 있었다. 기원전 1000년 경 제작된 기독교 미술품에서 흰색은 순수함을, 빨간색은 그리스도의 피를,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컬러로 확립되었다. 검은색은 16세기 유럽의 종교적 영향으로 경건함을 상징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이르자 세련됨과 반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 궁인들과 귀족들은 화려한 레몬색, 복숭아색, 콘플라워 색상의 의복을 선택했다. 제인 오스틴의 배경이 되는 영국의 섭정시대에는 신고전주의 패션의 단순함과 평등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속이 비치는 얇고 하얀 모슬린 천 드레스가 각광을 받기도 했다.

각종 색이 지닌 이미지와 지위는 수 세기에 걸쳐 바뀌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인의 6가지 기본색상인 검정, 흰색, 빨강, 초록, 파랑, 노랑은 죽음, 삶, 다산 또는 승리와 같은 강력한 개념을 나타낸다.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는 하늘을 청동색으로, 바다를 포도주색으로, 양을 보라색으로 혼란스럽게 묘사했다. 19세기 그의 작품 연구자들은 이러한 색 표현에 당황한 나머지 그리스인들이 색맹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책은 총 열 가지 색상 뒤에 숨겨진 상징성과 고대 이집트에서 중세, 르네상스와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지난 세기의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의상과 의복에서 컬러가 지닌 중요성을 탐구한다. 디자인에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색이 디자인을 창조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색이다. 책을 읽고, 책속에 담겨진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진들을 보면서 색이 주는 영감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고대부터 보라색은 가장 힘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색이었다. 황실 보라색, 왕실 보라색으로 명명된 옷들은 부와 권력을 상징했으며 황제, 왕족, 교회의 수장만이 입을 수 있었다. 로마 네로황제는 보라색 예복을 너무나 아끼고 소중히 여긴 나머지 보라색 옷을 입은 시민을 추방하거나 죽이기도 했다. 보라의 진귀함은 그 희귀성 때문이다. 보라의 염료는 페니키아 고대 문명에서 유래했으며, 뿔고동으로 불리는 달팽이의 하부 기관지 선에서만 추출되엇다. 광택이 도는 풍부한 색감의 보라염료는 만드는 과정 자체가 믿기 힘들 정도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잡하며, 매우 비밀스럽다. 그러기에 비쌀 수 밖에 없었다. 

블루베리와 블랙베리, 가지의 껍질 등 자연에서는 쉽게 보라색을 볼 수 있다. 가시광선 스펙트럼에서 가장 짧은 파장을 지닌 바이올렛은 우리가 가장 마지막으로 보는 파장이다. 따라서 보라는 영적인 감각을 부여하는 저 높은 영역의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아르누보 운동, 라파엘 전파 예술가 이념 및 히피 하위문화 등 대안적 이념과 복장을 받아들인 여러 문화운동에서도 보라가 사용되었다.

남성적 매력으로 이어지는 파랑은 드넓은 하늘과 망망대해처럼 광대하고 장엄한 느낌을 준다. 그러기에 이해와 포용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보인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신선하고 맑음을 선물하는 유일한 색이다.
파란색은 슬픈 감정과 연관성이 있지만, 하늘과 바다 사이의 공간을 나타낸다.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차분하게 여겨지는 색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파란색을 자주 언급하는 지도 모른다.

빨강과 노랑이 섞인 주황색은 주체적 아름다움보다 어울림을 좋아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주황을 정확하게 알고 나면 영 까다롭고 예민한 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주황은 다른 색과의 조화로움보다 주체적이고자 하는 색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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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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