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체제 해체에 경제 거품의 붕괴가 겹친 1990년대에 접어들며 일본사회는 정체성 위기에 휩싸였다. 달리 말하면 일본이 어떤 존재이고, 지금 어디에서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된, 일종의 방향감각 상실 상태였던것이다. 일본역사학자 마쓰모토는 이 불안을 19세기후반 개항기에 겪었던 혼란스러움에 견줬다.
개국이란 일본이 자신과 완전히 이질적인 타자에 직면하여 그 타자의 '문명'
에 자신을 열어 변혁하여 나가려 하였던 경험이다. 그 제1의 시기가 막말 유신기일 것이다. 제2기가 대동아전쟁 전후, 그리고 제3기는 냉전 구조가 해체되어 국제사회의 한복판에 내쳐진 현재이다.
- 일본의 전후 번영은 '냉전형 발전'이었다. 미.일 동맹하에서 한국이 반공의 방파제 역할을 함으로써 일본은 안보 무임승차' 구조 속에서 경제 발전을 추구하였다. 이 구조를 지탱하던 것이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평화헌법이었다. 이 중 미.일 동맹은 유지되고 있으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안보 무임승차에 대한 국내외 비판이 일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한국이 반공 방파제 역할을 해 오면서 북한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본의 대북정책도 한국의 민주화와 북핵 위기 등으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공교롭게도 그간 일본을 두껍게 감싸고 있던 경제의 거품이 터지기 시작했다.
평화, 민주주의, 고도성장이라는 일본의 성공이 세계적인 냉전체제 위에 쌓은 모래성 같은 것이었음을 일본인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전후'라는 가치 공간이 붕괴되자 일본은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위기는 물질과 정신 양면에서 찾아왔다.
- 다일본 주가의 정점이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조지 부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미.소 정상회담(1989년 12월 2~3일)에서 두 정상이 냉전체제의 종식을 선언한 직후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탈냉전으로 세계에 낙관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냉전의 최대 수혜자였던 일본은 1980년대 부풀어 올랐던 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5년 코스모신용조합의 경영 파탄을 시작으로 1997~1998년 금융회사들의 연쇄 도산 사태가 이어졌고. 2000년대 들어서는 제조업의 붕괴로 치달았다. 1990년대 세계 반도체 기업 매출 상위 10개사 중6곳이 일본기업일 정도로 '전자왕국'이던 일본은 1990년대 글로벌화와 인터넷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총체적 침체의 길을 걸었다.
- 내셔널리즘의 귀환
권혁태 전 성공회대 교수는 고도 경제성장에 의해 소비사회가 출현하면서 파편화된 개인들이 '자기 찾기'를 통해 안식처를 찾아 헤매던 끝에 결국 '국가'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현상이 1990년대에 출현했다고 본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서브컬처에 90년대 이후 정보화로 생성된 새로운 관계망이 합쳐지면서 파편화되고 부유하는 개인들이 삶의 안식처로 일본이라는 공동체에 몸을 맡기는 현상이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평화, 민주주의, 고도성장으로 상징되는 전후란 자신의 삶을 규정지은 거대 서사이면서도 자신들의 끝없는 일상'과는 무관한 딴 세상'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 전투가 종료된 이후 1972년 일본으로 반환되기 전까지 오키나와는 미군이 행정권을 갖는 미군 통치하에 있었다. 이는 쇼와 천황이 오키나와에 대해 미군이 25년 내지 50년 내지 그 이상' 장기 점령을 허용하겠다는 비밀 메시지를 연합군총사령부에 전달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었다.
미국은 주민들의 땅을 강제 수용해 곳곳에 미군기지를 건설했다. 미공군의 해외 기지 중가장 규모가 큰 가데나 공군기지를 비롯해 미 해병대의 캠프 한센. 캠프 슈워브. 후텐마 비행장 등이 속속 들어섰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기지화함으로써 1965년 베트남전쟁에서 다낭을 침공할 때 해병대를 전개할 수 있었고, 1968년부터는 괌에서 오키나와로 B-52 폭격기를 이동시켜 인도차이나 전역을 매일 공습했다.3 오키나와는 평화헌법 보유국'이자 '세계 최강의 군사국가인 미국의 강력한 조력자'라는 전후 일본의 모순이 집약된 곳이며, 그 모순을 본토의 일본인이 직시하지 않아도 되도록하는 장소로 기능해 온 것이다.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했고, 사토 에이사쿠(1901~1975) 총리는 "핵무기 없이, 본토 수준으로" 돌려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으나 핵무기를 탑재한 함선이나 항공기의 출입은 사전 협의 없이 이루어졌고 유사시 핵 반입' 밀약도 체결됐다. 27년간의 미군 통치를 받았을 때나 일본으로 귀속된 뒤에도 미군기지라는 오키나와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전체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일본 전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돼 있고, 오키나와 본섬의 20퍼센트가 미군기지의 공여지로 제공되고 있다. '작은 바구니(오키나와)에 달걀(미군기지)이 너무 많이 담긴' 것이다. 오키나와는 미군 주둔으로 인한 각종 사건.사고. 환경오염. 소음 공해등 다방면에 걸쳐 고통받고 있다.
1959년 6월 30일 미군 F-100D형 제트 전투기가 시험비행 도중 엔진 폭발로 추락하면서 미야모리 소학교 어린이 11명과 주민 6명이 죽고, 200여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68년 11월 19일에는 B-52 폭격기가 가네다 기지의 독가스탄과 핵폭탄이 저장돼 있던 탄약고 부근에 떨어져 오키나와 전체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에 앞서 1955년 9월에는 6세 여자어린이가 가데나 고사포대 소속 미군에 납치.강간당한 뒤 살해된 '유미코짱 사건'이 발생했다. 1995년 발생한 초등학교 여학생 강간 사건은 오키나와 주민들로 하여금 40년 전의 '유미코짱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 우익 교과서 문제나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와 달리 일본인 납치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 사회적 논란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미미했다. 납치에 대한 김정일의 인정과 유감 표명은. 일본인들이 북한을 '테러리스트' 국가로 인식하도록 했다. 2009년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권조차 '동아시아 공동체'를 강조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경직된 태도로 임했다.
납치 문제 해결을 '필생의 과업'이라고 공언해 온 아베는 2014년 5월 북한과 '스톡홀름 합의'를 성사시키는 등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스톡홀름 합의는 북한이 1945년을 전후해 북한 내에서 사망한 일본인의 유골 및 묘지, 잔류 일본인, 일본인 배우자, 납치 피해자 및 행불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에 대한 조사를 포괄적으로 실시하며, 이에 일본은 독자적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스톡홀름 합의는 일본 사회의 '메구미 생존 신앙'을 넘어서지 못했다. 북한은 합의 이행 차원에서 납치 피해자인 다나카 미노루와 가네다 다쓰미쓰 등2명의 생존 정보를 스톡홀름 합의 직후 전달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두 사람만으로는 국민 이해를 얻어 낼 수 없다며 사실 공표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납치 피해자의 전원 귀환'이라는 목표를 내걸어 여론의 기대치를 높여 놓은 것이 실질적인 해결을 막았던 것이다. 북한에 지나치게 높게 허들을 설정한 것이 거꾸로 일본의 발목을 잡은 셈이 됐다.
- 중국과 대만이 1970년대 들어 영유권을 제기하게 된 것은1968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가 동중국해 일대 해양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센카쿠 열도 주변 해역에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센카쿠 열도 영유권 갈등은 당시 영유권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양해에 따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1978년10월 중.일 평화우호조약추인서를 교환하기 위해 방일한 덩샤오핑 당시부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문제는 일시적으로 보류하는 것이 좋지않은가. 우리 세대의 인간들은 지혜가 모자란다. 다음 세대는 우리들보다 더 지혜로울 것이고 그때 좋은 해결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골치 아픈 외교 현안을 '선반 위에 올려 두는'방식으로 봉합한 셈이다. 문화혁명의 악몽을 떨치고 재건에 나서려던 중국으로서는 국제사회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상황이어서 조그마한 섬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 개방으로 급성장한 중국은 점차 석유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변모했고, 해양 석유 자원 확보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해저 석유 탐사와 개발 능력도 확충됐고, 해군도 먼 바다 작전 능력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센카쿠문제를 더 이상'선반 위에 올려 둘'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중국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에 나섰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4년간 중국은 해군을 동원해 동중국해의 대륙붕 자원 탐사를 실시했고, 이 시기 센카쿠 열도 북동 해역에서도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92년 2월중국은영해법을 공포하고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선언했다.
-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의 고삐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 불황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덮쳤고, 그위에 중국.한국과의 영토 갈등이 점화되면서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 열망이 확산됐다. 그러나 이를 합리적으로 해소할수 있는 리더십은 없었던 것이 일본의 한계였다.
- 지금은 K-콘텐츠로 불리는 한류'가 일본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2003년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가 시작이지만 일본 내 진보 인사들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한류의 뿌리를 찾으려 한다. 한류의 뿌리는 문화가 아니라 정치에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 중에는 한국 국민들이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싸워 온 것에 경의를 표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정치인, 지역감정을 깨겠다며 질게 뻔한 선거에 뛰어든 정치인이 결국 대통령에 오르는 민주주의 역동성이 한류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벌이다 패전한 뒤 미군정에 의해 이식된 '온실 민주주의'만을 경험해 온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부러운 자산이다.
그런데 그런 한류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혐한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류는 처음부터 혐한을 동반했던 것이다.
- 중일간 센카쿠갈등은 이시하라가 만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 정권을 중국에 유화적이라고 자극해 결국 국유화라는 강경책을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시하라는 1970년대부터 일본의 대중 유화노선을 비판하는 활동을 벌여 왔다. 그는 일본 정부의 대외 정책이 국가가 갖춰야 할 '남성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어 왔다. 미국에 종속된 일본이 중국에마저 무력합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중국을 '존재론적 불안'으로 간주하는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시하라가 득세한 당시 상황은 양당 체제가 무너지고 군부가 득세하던 1930년대 군국주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본을 덮쳤으나 당시 양대 정당인 민정당과 정우회가 정쟁으로 국민 신뢰를 상실하자 군부가 득세하면서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가던 상황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이시하라의 도발은 전후 일본의 외교 태도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고,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한껏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이 향후 외교에서 '강한 일본'을 지향하게 된 데는 이시하라의 영향이 컸다고 할 것이다.
- 하마 노리코 태표구 도시샤대 교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 보유국이며 풍부한 자산과 인프라를 갖춘 경제이기 때문에 성장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성장에 집착하다 보면 신홍국들과 수출경쟁을 벌이느라 근로자들은 저임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수 불황이 지속된다. 대신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부를 나눠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의 내실화에 힘을 쏟자."
하산론은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지역 간 격차 해소와 복지.의료.환경 등에 대한 투자로 내수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에너지 정책에서도 원전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작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하산론'은 후쿠시마원전에서 분출되고 있는 방사성 물질로 인한 방사능 공포가 일본 열도를 휘감고 있는 현실과도 직결돼 있었고, 따라서 그 핵심은 '탈원전' 여부에 달려 있었다. 사와치의 외침은 일본이 원전을 동원한 성장 전략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 것이지만, 전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하에 원전을 전력원으로 사용해온 세계 각국에 던진 물음이기도 했다.
- 센카쿠 문제는 대지진과 원전사고로 일본 사회에 형성된 '피해자 의식'을 한껏 자극한 이슈였다.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이 수십 개의 원전을 국책사업으로 지었던 것이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화근인 셈이고, 그렇다면 일본은 재난의 피해자이면서 전 세계 활경과 인류에 해를 입힌 '가해자'이기도하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만 몰두하면서 "미증유의 재해 극복을 위해 단결하자"는 '재해 내셔널리즘'에 휩싸였다. 영토문제는 그 단결을 촉진시키는 데 안성맞춤의 소재였다.
영토 문제가 압도하면서 총선이 있던 2012년 12월에 접어들면 탈원전의제는 맥 빠진 이슈가 돼 버렸다. 원전 재가동을 내건 아베의 자민당이 민주당에 대승을 거두며 손쉽게 정권을 탈환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작고 안전한 나라'를 꿈꾸던 이들은 절망했다. 시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참여로 만들어 낸 탈원전 운동은 2015년 실즈(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학생진급행동)의 안보법제 반대투쟁으로 이어졌으나 어느 것 하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좌절했다.
- 일본의 전후 첫 '지정학 설계도'
미국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취임 첫해인 2017년 11월 새로운 아시아 전략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채택했다. 이듬해인 2018년 5월에는 미군의 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개칭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기간 때만 헤도 아시아에 미국이 반드시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전임오 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폐기했고, 오바마가 추진해 온 환태명양경제동반자협정의 탈퇴를 강행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트럼프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채택하며 아시아로 회귀한다. 트럼프의 아시아 귀환'을 일본의 아베 총리가 추동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아시아 재균형을 폐기한 뒤 마땅한 전략이 없었던 트럼프가 아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이 제창한 인도-태평양 구상은 미국을 거처 5년 뒤인 2022년에는 한국 윤석열 정부의 대외 전략으로 채택됐다. 윤석열 정부가 그해 12월 발표한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일본의 '인도-태평양 구상'의 복제물이다.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미국이 같은 이름의 전략을 공유하게 된 것은 한.미.일 협력체제가 앞으로도 장기간 지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적어도이 구상의 저작권을 가진 일본은 이를 강력히 희망할 것이다.
일본발 인도-태평양 구상이 심상치 않은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동아 공영권 이후 일본이 처음으로 제창한 대외 전략이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반성으로 국제사회에서 지정학은 한때 금기시되었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침략에 나섰던 추축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에서도 지정학 논의는 봉인되었다.
- 일본 '외교의 레벤스라움'
인도-태평양 구상은 일본의 남진* 정책'의 의미가 있다.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의 비중을 줄이면서 일본 외교의 '생존 공간'을 인도양-태평양의 인도, 호주, 동남아시아에서 확보하겠다는 의미다. 미.중대립 속에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 일본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절대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으로 기존의 아시아 태평양, 동아시아 개념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자 인도양으로 전략적 공간을 확장하고, 인도를 미.일 동맹 중심의 지역질서로 끌어들이려는 구상이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을 넓혀 중국을 넓게 포위하는 모양을 만들고자 했다. 물론, 일본의 구상을 범게르만주의의 기치하에 침략에 의한 영토 확장을 꾀한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시야의 확대는 일본 외교안보 정책 공간의 확장이라는 성격을 띠고있는 점도 분명하다.
- 시라이는 일본이 패전을 부인합으로써 영원한 패전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기지로서 종속되는 대신 식민 지배와 침략을 당한 한국과 중국등 이웃 국가들에 대한 사죄와 책임은 회피했다. 천황과 지도부가 전쟁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만들어진 '무책임의 체계'와 대미 종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속패전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크기 때문에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라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패전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전승국 미국에 복종하고 있는 상황을 '영속패전 체제'로 규정한다. 영속패전 체제의 핵심 구조는 패배의 부인과 대미 종속이다.
패배의 부인은 전쟁을 주도했던 군국주의 세력들이 전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려면 패전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사정 때문에 발생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초기에 탈군국주의화를 위해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냉전 본격화로 전전 보수 세력에게 전후 일본의 통치를 맡기게 됐다.
일본 보수 세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전의 권력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 대가로 미국이 어떤 요구를 하든지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대미 종속구조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일본은 전후 점령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피침략국에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음으로써 '동아시아의 고아'가 되었다. 그런 만큼 미국에 맹목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게 됐다. 대미 종속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립을 부채질하고. 그 고립이 다시 대미 종속을 강화하는 '무한루프'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라이는 이런 과정에서 미국이 천황을 대체해 천황 자리에 앉은 '국체의 뒤바뀜'이 일어났다고 본다. 영속패전 체제와 국체의 '미.일 동맹화'는 서로 연결돼 있다. 이 체제 속에서 일본 권력층은 미국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되는 편리한 사고 구조를 갖게 되었다. 패전의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도 책임 추궁도 덮고 넘어갔다. 시라이는 300만이 넘는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킨 국가의 존망이 걸린 패전이었음에도 사실상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던 전쟁 책임자들의 '체제. 그 자체의 퇴폐'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고 비판한다.
패전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과오가 반복되는 것이다.
- 일본 정부는 구두로는 해당 국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밝혀 왔지만 한반도에서 위기 사태가 발생해 데프콘(방어준비태세)이 3단계로 올라가면 한국군의 작전권이 한미연합사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일본 개입을 차단할 수 있겠느나는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한국동의 없는 일본의 대북 공격 가능성도 더 커졌다. 나카타니 당시 일본 방위상은 2015년 10월 한민구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의 주권범위는 휴전선 남쪽"이라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이는 북한이 탄도미사일로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할 경우 한국의 양해 없이 북한의 기지를 타격하겠다는 뜻이다.
2015년판 미.일 가이드라인과 안보 관련 법제 정비를 통해 일본은 그간의 평화헌법이 채워 온 군사적 족쇄에서 벗어나 군사적 의미에서 '보통국가'로 전환하는 첫발을 뗀 것이다. 그 이후의 움직임은 미.일 가이드라인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다. 또 일본은 중장기적으로 미.일 동맹을 넘어 독자 노선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아베 총리는 2020년 9월 퇴임 직전 담화에서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포함한 새로운 미사일방어체제에 대한 논의를 당부했는데. 그가 불의의 총격으로 숨진 뒤인 2022년 12월 일본은 안보 관련 3대 문서를 개정해 적기지 공격 능력(반격 능력) 보유를 공식화했다. 반격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로 일본 정부는 '적이 일본에 대한 공격에 착수했음이 확인됐을 때'라고규정했으나 '공격에 착수한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 놓은셈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 평화헌법이 규정해 온'전수방위' 원칙은 완전히 퇴장했고, 일본은 명실상부한군사적 보통국가로 전환하게 됐다.
- 반도체 생산 거점의 동아시아 편중 실태를 두고 반도체의 애치슨 라인이라는 말도 회자된다. 지정학 리스크가 있는 대만-한국을 제외하고 일본을 포함한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형성해야 한다는 구상이 미국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일본이 부추기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미국이 1980년대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약화시켰는데, 대만과 한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고 있으니 다시 일본에 기회를 달라는 논리다.
다시 말해 반도체 애치슨 라인'은 1950년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대만과 한국을 제외한 것처럼 미국의 반도체 동맹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미국, 일본 중심으로 재구축하자는 구상이다. 미국과 일본 간에 이뤄지고 있는 긴밀한 반도체 협력. 일본의 TSMC공장 유치 등의 움직임 뒤에는 이런 구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2025/11/30'에 해당되는 글 2건
- 2025.11.30 네오콘 일본의 탄생 1
- 2025.11.30 세계를 점령한 중독경제학
- "18세기 경제에서 사탕수수의 지위는 19세기의 철강, 20세기 석유와 같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책 중에서)
- 양봉을 통해 키운 꿀벌이 아무리 부지런해도 생산할 수 있는 꿀은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달콤한 맛을 더 많이 즐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꿀을 생산해 낼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먹보 인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헤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심지어 그로 인해 생명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가장 먼저 그 혹독한 길을 나선 건 로마의 미식가들이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감미료 찾기에 앞장섰다. 그들은 와인을 납 용기에 넣고 끓이면 매우 달콤한 맛이나는 백색 결정 화합물을 얻을 수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이 인공 꿀 제조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이 달콤한 화합물에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 화합물은 사실 '초산 납'이라고도 불리는 '아세트산 납Lead Acetare'이었고, 이는 달콤하지만 독성이 매우 강한 유독물질이었다.
이렇게 얻은 아세트산납을 그들은 '사파 시럽이라 부르고, 모든 음식에 감미료로 사용하였다. 이 납을 다량 섭취하면 중독되어 불임, 유산, 심한 경우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에드워드기번은 로마제국 홍망사에서 장기간 다량의 아세트산납 섭취로 인해 로마 귀족의 수명이 짧아지고, 출산율은 낮아졌으며, 젊은나이에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결국 제국의 급속한 쇠퇴를 초래했다고 하였다. '사파'로 인해 건강을 잃고 전투력이 떨어진로마 제국은 후계자부재로 인한 혼란이 더해져 결국 오스만 제국의 칼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 인도에서 자당을 처음 제조한 방법은다음과같다.
1.사탕수수즙을 짜낸다.
2.사탕수수즙을 불에올려 끓인다.
3.모든 수분이 증발하고나면 그릇에 남은 적갈색의 덩어리인 자당을 얻는다.
이 적갈색 자당은 지금의 설탕과는 조금 다르지만,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쉽게 변질되지 않았다. 보관할수 없어 갓짜서 사용해야하는 사탕수수주스보다는 진일보한 혁신이었다.
기원전 510년, 페르시아의 왕다리우스1세가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정복했을때,그는 인도인들이 가정마다 달콤한 맛의 갈색 덩어리를 숨기고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매우 달콤한 이 갈색 덩어리가 식물의 즙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을알고는 즉시 이 식물을 페르시아로 가져와 대규모로 재배할 것을 명령했다.
1,00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아랍 국가들이 페르시아를 침략했을 때, 아랍인들은 이 맛있는 식물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후 사탕수수는 페르시아에서 아랍 국가로 전파되었고 대규모로 재배되었다.
그로부터 500년 후, 십자군은 아랍 국가들이 대규모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하며 마치 보물을 얻은 것처럼 사탕수수를 유럽으로가져갔다.
유럽인들은 갈대처럼 보이지만 달콤한 매력을 지닌 사탕수수라는 이 식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사탕수수를 '벌 없이 꿀을 얻을 수 있는갈대'라고불렀다.
사탕수수가 태평양을 건너 유럽으로 전파되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는 사탕수수처럼 달콤한 식물 하나조차도 지역을 넘어 전파되는 데에 생각보다 휠씬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
- 차와 설탕의 만남으로 유럽인의 설탕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수요는 중가했으나 공급이 심각하게 부족한 현실에 설탕 산업은 막대한 이익을얻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즉 환금작물이었다.
유럽 대륙은 수십 개국이 조밀하게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와 토양조건도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유럽인들은 사탕수수를 대량으로재배할수 있는 플랜테이션에 알맞은 땅을 찾기위해 이곳저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신대륙의 광활한 땅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식민지개척자들은 사탕수수를 아메리카대륙으로 옮겨 재배를 시도했고, 곧 이곳이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이상적인 땅이라는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이득을 본 나라는 세계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리던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섬나라인 자메이카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땅을 개간했다. 이로써 자메이카는 순식간에 아메리카 사탕수수 재배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럽 사탕수수 설탕의 주요공급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뒤이어 포르투갈이 나섰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유일한목적은 사탕수수 재배지를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결국 자국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대규모로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고, 현지에서 설탕으로가공까지 마친 후 유럽으로 운송하였다.
-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1779) 이라는 찬송가를 작곡한 것으로유명한 영국의 존 뉴턴목사는 무려 6년동안 노예선 선장이자 흑인노예사업가로 활동했다.
설탕을 목숨처럼 아꼈던 유럽인들 누구도 이 흑인노예들의 운명에 대해 전혀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흑인노예들을 조롱했으니, 이는 흑인노예의 비극이자 인류문명의 슬픔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코틀랜드 역사에서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철학자 데이비드 흄 조차 한 에세이에서 "흑인노예들은 스스로 생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열하게 태어난다. 예술도 없고,토착 문학도 없고, 과학적업적도 없다. 가끔 흑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이 보여주는 유일한 지혜는 단지 다른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것일뿐이다"고 했다.
-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는 일찍부터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는 현대적인 산업 시설이 최초로 투입되었으며, 설탕 가공 과정에서 분업 체계가 형성되었고, 각 작업 단계마다 요구되는 기술과 역할이 달라지면서 직능에 따라 필요로 하는 인재상도 점차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설탕을 가공하는 과정에는 조리, 거품 제거, 탈수, 온도 조절 둥이 포함되며, 이는 숙련된 전문 지식과 기술을 요구한다. 따라서 제당 공정에서는 다양한 직종의 작업자 모두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효율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설탕을 제조하려면 지속적인 동력이 유지되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 농장주들은 장기간에 걸쳐 첨단 풍력 및 수력 발전장비를 개발했다. 이러한 전력 장비의 혁신은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섬유, 철강, 제지 등산업에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을 제공했다.
- 또한 설탕은 농업에 묶여있던 노동력을 산업화 현장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노동력 창출'이라는 산업혁명의 핵심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탕이 널리 보급되기 전, 유럽에서는 기근이 찾아 많은 인구가 굶주림에 시달렸다. 당시 유럽 각국은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탕무 제당 기술이 발전하면서 설탕 가격은 점차 낮아졌고, 결국 설탕은 대중의 일상 소비재로 자리 잡았다. 덕분에 유럽 노동자들은 전통적으로 쌀, 밀, 옥수수에만 의존해 에너지를 보충하던 시대를 넘어설 수 있었다.
유럽 노동자에게 설탕은 곡물보다 휠씬 더 효율적인 에너지 공급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의 인구수는 빠른 중가세를 보였지만 오히려 식량 가격은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 설탕은 단순히 산업혁명을 촉진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산업혁명이 지속될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었다. 설탕은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었기에 '노동자의 에너지 원천'이라 불렸고, 석탄은 '기계의 에너지 원천'으로 불렸다. 이 두 가지는 산업혁명이 완성되는 데 필수적인 구성 요소였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석탄이 아직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기계도 보급되지 않아 생산 공정 대부분은 여전히 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일과는 매우 힘들었다. 이런 고된 생활 속에서 노동자들이 충분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커피, 설탕, 그리고 차 덕분이었다.
산업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노동자들의 설탕 소비는 계속 증가했다. '빠른 에너지윈'으로 알려진 설탕은 영국인의 일상 업무와 생존에 필요한 하루 열량 중 25%를 제공했다.
설탕은 뇌에서 도파민 분비를 촉진해 노동자들이 힘든 환경 속에서도 기쁨을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설탕은 인체에 가장 빠르게 흡수되는 에너지로서, 산업혁명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다양한 생리적요구를 충족시켰다.
설탕 혁명은 본질적으로 산업혁명의 전주곡이라고 할 수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산업혁명 당시 여러나라의 설탕가격을 통계해 보니 설탕이 저렴한 곳 일수록 산업혁명이 더 빨리 완료되었다는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설탕이 기업의 생산모델, 노동력, 공정개조, 노동자 에너지공급 등과 같은 핵심문제의 해결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올리버 윌리엄슨은 설탕과 산업혁명의 불가분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차와 설탕이 없었다면 영양이 부족한 식단을 먹는 공장노동자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할수 없었을 것이고, 인류 산업혁명의 발전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 " 밥없이 사흘은 살아도, 차 없이는 하루도 못산다." (중국속담)
- 당나라때 차를 마시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차무역은 점차 수익을 창출하는 유망한 사업으로 변모했다. 당나라의 인구가 빠른 증가세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차의 유행 덕분이다. 차에는 고대의 소독제와 같은 강력한 항균 및 항염효과가 있다. 차의 타닌산은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및 기타질병을유발하는 박테리아 제거에 효과적이다.
또한 차를 우리는 행위는 사실 가장 초기의 정수기술로, 세균을 죽이고 수질을 정화하면 세균감염 확률과 사망률을 낮추어 결과적으로 평균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송나라에 이르러 차문화는 더욱 대중화되고 성숙해졌다. 당나라 사람들이 찻잎을 물에 넣고 함께 끓인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면, 송나라 이후에는 물을 끓인후에 차를 넣어 우려내는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들어서고 몽골인이 중원에 입성한후, 황실과 관료들의 차마시는 풍조는 점차 쇠퇴했다. 초원유목민족인 몽골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차를마시는 것보다 광활한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말을 몰고 달리며, 세상의 번영을 함께 즐긴 다음 큰사발로 술을 마시고,
큰 덩어리의 고기를 뜯어먹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 그들이 세상을사는방식이었다. 그들은 예술적인 느낌의 다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몽골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말의 우유를 가죽주머니에서 넣어 발효시킨 독주, '마유주이다. 마유주는 육포와 함께 몽골 제국 원정의 필수군수품이었으며, 차보다 훨씬 더 몽골인들의 입맛에 적합한 음료였다.
14세기에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로 교체되면서 차문화는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10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차 문화는 강력한 생명력을 보이며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 비단, 도자기, 찻잎은 중국이 중앙아시아와 서방 지역으로 수출한 가장 대표적인 품목으로,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부와 문명을 세계에 알리는 핵심 수단이었다. 특히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이를 즐기기 위한 찻주전자, 찻잔, 다기 등과 함께 하나의 종합적인 문화로 자리잡았다. 이과정에서 중국 도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그 미적감각과 실용성은 국제 무역에서 강력한 경쟁럭을 발휘했다.
그중에서도 청화자기는 차 문화와 가장 조화로운 궁합을 자랑하는 도자기로 꼽힌다. 마치 가마에서 구워져 나오는 순간부터 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청화자기는 그 정제된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바탕으로차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청화자기는 차와 함께 중국 문명의 정수를 상징하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의 결정적 매개체가 되었다. 이렇게 차와 도자기는 함께 어우러져, 중국 역사상 가장 눈부신 번영의 시기를 함께 피워 올린 문화식 쌍두마차였다.
- 녹차는 선연한 녹색을 유지하기 위해 신선한 찻잎을 따서 바로 뜨거운 솥에서 볶거나 증기를 죄어 수분을 없앤 후 자연 건조를 통해 산화의 진행을 막는다. 이 공정으로 녹차에 함유된 천연 물질이 잘 보존돼 우려낸 찻물의 색은 영롱한 초록빛을 띤다. 대표적인 녹차로 서호용정과 죽엽청이 있다.
홍차는 일정 시간 동안 찻잎을 널어놓아 찻잎의 수분을 제거한 뒤 발효와 건조의 과정을 거쳐 완성하는 제품이다. 찻잎에 함유된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은 효소적 산화를 거쳐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과 같은 향기로운 물질을 생성한다. 이물질의 비율에 따라 홍차의 맛과 색이 결정되는데, 녹차보다 홍차는 맛이 더욱 진하고, 우려낸 찻물은 붉은색을 띈다. 대표적인 홍차로는 기문홍차와 정산소종 등이 있다.
물론 세계 최대의 차 생산지인 중국의 차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녹차와 홍차, 이 두가지 외에도 보이차, 우롱차, 백차, 흑차 둥이 있다.
명나라 시기에는 대부분 녹차만 마셨고, 발효 과정을 거친 홍차는 인기가 많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홍차가 품질이 낮다고 여겨 차를 모르는 외국인들이나 홍차를 마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 차와 아편은 모두 중독성 있는 상품이다. 영국은 차에 중독되고, 청은 영국의 아편에 중독되었다. 결국 양국은 전쟁으로 이번 분쟁을 해결했다. 동양에서 온 신비로운 잎인 차는 결국 두 제국의 운명을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이로부터 한 제국은부상하고, 다른고대 동방제국은 몰락하였다. 차로 인해 촉발된 무역 적자 전쟁이 중국을가장 수치스러운 시기로 이끈 것이다.
- 워디안 케이스'는 런던의 외과 의사 나다니엘 백쇼 워드가 발명한 휴대형 온실 상자로, 세계 식물의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제품이다. 그 당시 세계의 교통수단은 오직 항로를 이용한 선박뿐이었다. 해상 항해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식물 묘목은 장거리 운송에서 살아남기 힘들어, '생생한 상태로'대륙을 건너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워드는 우연한 기회에 식물이 밀폐된 투명 유리병에서 잘 자라고 계속 번식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는 식물 운송 난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이 용기는 완전 밀폐가 가능해 상자 전체가 작은 생태 순환 시스템을 조성했다. 수분이 중발하면 유리 내벽에 웅축수가 형성되고, 웅축수는 토양에 떨어져 수중기의 자연 순한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토양은 항상 동일한 습도를 유지하고, 햇빛은 자연스럽게 유리를 투과해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 준다.
워디안 케이스는 식물에 물을 주지 않고도 최대 3년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워디안 케이스의 발명으로 인해 세계의 식물 분포는 변화를 겪었다. 중국에서 인도로 차나무가 옮겨 심어지고, 아시아에고무나무가자라게 되었으며, 태평양일대의섬과미국 중부, 카리브해지역에서 바나나 재배를 할수 있었다. 하지만 포춘의 시도가 끝까지 성공적인 것은아니었다. 워디안 케이스는 유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선박이 먼바다를 건너는 동안 파도의 격렬한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깨져 버렸다. 결국 포춘이 인도로 보낸 첫 번째 차나무의 생존율은 7%에 불과했으며, 씨앗은 완전히 썩어버렸다.
- 세계최초 산업스파이의탄생
이듬해 포춘은 중국의 가장 핵심적인 홍차산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홍차씨앗을 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무이산에 도착한 그는 신속하게 작전을 펼쳐 가장우수한 차나무 묘목을 성공적으로 훔쳤다. 지난번의 쓰라린 경험을토대로 수집한 씨앗과 묘목을 모두 워디안 케이스에 넣 고파손에 대비하여 단단히 포장했다. 마침내 홍차나무 묘목과 씨앗은 모두 안전하게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무이산 지역의 사원에 머물며 승려들에게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홍차의 더많은 비밀을 점차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녹차가 홍차로 발효되는 과정과 불씨, 재배된 토양, 필요한 빛이 포함되며, 홍차의 양조 및 수질간의 관계도 배웠다.
- 청나라의 차는 세계경쟁에서 패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16년을 예로들면, 중국의 약7만개 차기업의 수출총액은14억8천만 달러로, 당시 영국 립톤차의30억 달러 매출의 절반에도미치지못했다.
먹보 인류의 취향을 저격하며, 세계 지각 변동의 한가운데 서있던 신비로운 동양의 나뭇잎, 차. 인류 최초의 스파이는 이 나뭇잎을 훔쳐 현재의 인류에게차의 맛을 선물했다.
- "커피의본능은 유혹이다. 진한향기는 와인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프랑스주교 샤를 모리스드 탈레랑페리고르)
- 커피가 에티오피아의 야생에서 발견되어 세계 각지로 퍼진 과정을 살펴보면 사탕수수와 마찬가지로 그 시작점에 '전쟁'이 있다. 유럽의 십자군이 정벌을 위해 길을나섰다가 사탕수수를 유럽으로 가져간 것처럼, 아프리카대륙의 아랍국가 예멘을 침공한 전쟁으로 커피는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 많은 아랍의 위정자는 커피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다. 예를 들어, 카이로에서는 상인들이 자유롭게 카페를 열수 있었고, 16세기에는커피가 아랍 국가의 가정 필수품이 되었다. 심지어 그당시 오스만제국에는 커피에 관한 특별법도 있었다. 커피를 즐겨 마시던 오스만제국의 여자들은 이 법을 통해 남편에게 하루 한잔분량의 커피를 제공받을 권리가 보장되었는데, 만약 남편이 커피를 제공하지 못하면 아내는 이혼을 청구할 수 있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랍인들의커피 사랑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1547년, 오스만 제국이 예멘지역을 점령하면서 커피의 세계 정복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비록 악숨 왕국은 커피를 예멘 지역에 들여왔지만, 그들은 길게 통치하지 못하고 아라비아 중부의 부족들에 의해 쫓겨난 지 오래였다. 악숨 왕국의 사람들은 철수했지만, 예멘지역의 커피농장과 관개 시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오랫동안 커피 사업을 노려왔다. 오스만 제국은 주요경제 작물로 커피를 지정하고, 예멘 지역의 커피 농장규모를 계속 확대하기로 했다. 그들은 대량의커피 원두수출을 통해 제국에 막대한 이익을가져다주었다.
모카항은 예멘 서쪽 해안에 있는 유명한 항구이자 예멘 커피원두가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화물 유통로다. '모카커피'리는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오스만 제국은 세계로 통하는 커피 무역로를 구축했다. 커피 윈두는 모카 항구에서 출발하여 홍해,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거친 뒤 미식가들이 많은 유럽에 도착했다. 먼 길을 달려온 커피는 마지막으로 수많은 가정과 카페로 들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커피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법률을 제정했다. 수출되는 모든 커피 원두는 반드시 먼저 삶고 로스팅하여 가공이 완료된 원두만 선적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원두를 가공하여 수출하면 커피 씨앗이 생명력을 잃어 다른 곳에서는 결코 재배될수가없다.
오스만 제국은 이 같은 방식으로 무려 60여 년간 커피 재배와 무역을 독점했고, 이 기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처럼 고수익의 산업을 오스만 제국만이 영구히 독차지하도록 다른 나라가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 17세기 후반, 해상의마부' 네덜란드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예멘에서 커피 씨앗을 훔쳤고, 커피 씨앗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중 하나인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옮겨졌다. 자바섬은 기후와 토양조건이 커피재배에 매우 적합했고, 네덜란드는 이곳에 대규모 커피 플랜테이션(대농장)을 세웠다. 이들은 자바섬의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을 활용해 본격적인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했고, 곧이어 세계 커피무역의 주도권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탈환하게 되었다.
- 1710년 프랑스인이 '침출식 커피'를 발명했다. 먼저 커피를 가루로 만든 다음 천으로 만든 작은 봉지에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현재 우리가 마시는 드립커피의 시초이다. 이렇게 우려낸 커피는 장시간 끓인 커피보다 휠씬 더 신선하고 맛이 좋다.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커피 애호가로 유명하다. 그는 커피를 자신의 생명과도 같이 여겼으며, 음용법도 남달랐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커피를 물에 우려내어 마시지만, 그는 커피원두를 같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이 가루를 직접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가 남긴 커피 예찬은 그의 음용법만큼 호기롭다.
"커피를 삼키고 나면 모든 것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온몸의 세포는 활성화되고 생각은 전쟁터의 기병대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기억은 기습하듯 살아나 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의 형식과 인물의 성격이 즉시 떠오르고 원고지는 잉크로 덮인다.'
- 사탕수수는 초본식물로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반면, 커피는 목본식물로 심은지 4년이 지나야 수확이 가능하다. 이는 커피나무를 재배한후 4년 동안 수입 없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브라질 사람들이 사탕수수를 심을지 커피나무를 심을지 고민하고 있을 시기, 나폴레옹의 사탕무 설탕 개발이 성공하며 사탕수수 설탕 가격은 폭락했고, 이윤이 높은 커피는 브라질 경제의 생명줄이 되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과감히 사탕수수를 포기하고 모두 커피나무를 심었다. 1812년부터 대규모로 커피나무를 심었는데, 커피나무의 성숙기는 시기에 따라 4~5년이 소요되어 1818년에야 처음으로 수확한 75,000포대(약 550만kg)의 커피 윈두를 유럽 시장에 출시할 수 있었다. 당시 브라질 원두는 수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시장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1823년, 브라질 커피 원두는 보기 드문 대풍작을 이루며 유럽 시장에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유럽 커피 가격은 급락했고, 유럽인들은 그제야 브라질의 커피 원두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후 브라질은 100년 동안 세계 커피 원두 총생산량의 약 97%를 차지하며 전세계 커피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 1920년1월 16일0시, 미국에 금주법이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이 법률은 알코올도수가 0.5% 이상인 음료를 제조, 판매 또는운송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 깊은 영향을 미친 금주법이며, 이 법안은 미국이 세계 최대의 커피 소비국이 되는 기초를마련했다. 미국인들은 커피가 마치 에너지 충전기처럼 신경과 근육에 지속적인 활력을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달았고, 점점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일부는 술보다더 심하게 커피에 중독되기도 했다. 이런 절호의기회에 브라질 커피는 알코올의 빈자리를 메웠고, 커피는 점차 미국인의 알코올 대체품이 되었다.
- '커피 원두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커피나무 재배 면적을 늘렸는데 나만 바보 같이 약속을 지켜 재배 면적을 늘리지 않는다면 손해가아닐까?'
이런 어리석은 속셈을 가진 농장주들은 남몰래 재배 면적을 확장했고, 커피나무 재배 면적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농장주들은 이전의 경험을 기억해 정부가 그들을 또다시 지원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커피나무 재배에 문외한인 투기 상인까지 재배에 참여해 커피 원두의 품질은 들쑥날쑥해지고 말았다. 결국 불안정한 브라질 커피 시장을 감지한 국제 커피 바이어들은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브라질 외의 다른 커피 생산지를 찾기 시작했다.
1924년, 브라질에서는 또 한 번 커피가 대풍년을 맞이했다. 예년처럼 커피 재배자들과 플랜테이션 주인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며 위기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브라질 정부는 그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브라질 정부의 경제력은 전과 같지 않았고, 대량의 커피 원두를 인수할 충분한 자금조차 없었다. 게다가 유럽 금융가들도 이미 브라질 커피 농장주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여러 해 전부터 투자처를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 브라질의 커피 원두는 더 이상 유일무이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콜롬비아,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의 커피 생산량 역시 눈에 띄게 증가했으며, 맛 또한 브라질의 커피와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더 독특한 풍미를 지닌 경우도 많았다.
결국 1929년 10월, 마침내 브라질은 커피 재배 역사상 가장 암울한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커피 원두의 가격은 끝없이 폭락했고, 수많은 농장주와 커피 상인이 재산을 탕진했다.
경제학 법칙을 경시하고 탐욕에 눈먼 이들은, 결국 그 탐욕으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제1차산업혁명의 핵심에는 제조업이 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공장이 24시간 가동되기를 원했고 그런 그들에게 커피는아주 요긴한 발견이었다. 자본가들은 심지어 자비로노동자들에게 커피를 제공하기도했다. 노동자들이이 홍분제를 마시고 더 활기차게 일하기를 원하는 희망의 발로였다. 역시 커피의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과거에 노동자들이 하루에 대여섯번 쉬어가며 일해야 했다면, 커피를 제공한 이후로는 쉬지않고 연속으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 후기, 노동자가정의 식단에는큰 변화가 생겼다. 이전처럼 그렇게 단출하지 않았다. 육류, 감자, 치즈, 버터 우유등의 다양한 식재료가식탁에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었다. 차,커피, 설탕에 대한소비였다.
통계에 따르면 도시노동자 가정의 차 ,커피, 설탕의 지출액은 평균적으로 농촌가정의 두배에 달했다. 장기간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는 노동자일수록커피에 쓰는비용을아끼지 않았다. 당시 70% 이상의 노동자가정이 커피를 없어서는 안될 생활필수품으로 여겼다. 커피는 노자의모든 순간에 함께 등장했다.
커피, 설탕, 차의 조합은 인류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인 산업혁명을 뒷받침한중요한 기반이었다.
미국작가 마크 펜더그라스트는 커피에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귀족의 음료였던 커피는 이제 대중에게 필수적인 약이 되었고, 아침식사에서 맥주와 수프를 대신하게되었다."
- 커피계의 에르메스, 게이샤
커피의 진정한 왕좌는 속임수로 쌓아올린 모래탑 같은 코피 루왁이 아니라, 커피 업계에서 당당히 최고급으로 인정받는 게이샤커피다.
최고의 파나마 커피를 가리는 베스트오브 파나마에서 "나는커피 안에서 신의 얼굴을보았다"라는 품평을 받은 커피 원두가 게이샤커피다. 국가별 바리스타 대회에 출전하는 많은 선수가 게이샤를 대회용 원두로 선택하는 것만 보아도게이샤원두가 커피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다.
게이샤 커피는 커피나무의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하였다. 1931년, 에티오피아 고리G의 게이샤숲에서 발견되어 '게이샤'라는 이름이 붙은 이 원두는 꽃향기가 감도는 은은한 단맛의 최고급 커피다.
게이샤 원두는 매우 아름다운 청록색을 띠며, 옥처럼 매끈한 촉감을 지니고 있다. 게이샤 원두는 품종에 따라 베르가모트, 플로럴, 장미, 재스민, 복숭아 등 다양한 향을 품고 있어 커피 애호가들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게이샤 커피는 아라비카, 로부스타, 리베리카, 그리고 엑셀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 품종을 차례로 제치고 2005년~2007년 베스트 오브 파나마' 대회에서 연속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좋은 물건이 반드시 비싼 것만은 아니다. 게이샤는 뛰어난 맛을 자랑하지만, 가격은 비교적 합리적이다. 한국에서 일반적인 게이샤커피 원두 1kg은 40,000원 정도에 판매가 되고, 커피숍에서는 한 잔에 8,000원 정도에 즐길 수 있다. 1파운드(450g)당 미화 120달러(한화 16만원)에서 600달러(한화 80만 원)에 달하는 코피 루왁에 비해 게이샤는 확실히 가성비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 "돈이든 재산이든 무슨 상관인가? 오래된 술이 곧 돈이며, 오래된 술이 곧 재산이다." (미국 작가 랜돌프)
- 인류 발달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의문이 존재해 왔다.
"왜 인류는 그토록 의존했던 사냥과 채집을 포기하고 농경 생활을 선택했을까?"
일부 연구자들은 맥주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메소포타미아평원과 이집트지역의 유물발굴과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수메르인들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맥주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많은 곡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야생 곡물의 수확량은 한정적이고 그 마저 불안정했다. 결국, 농업을 시작해야만 충분한 맥주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인류 최초의 농업혁명이 탄생했으며, 맥주는 인류문명의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맥주는 수메르인들에게 단순한 음료 이상이었다. 축제의식이든 종교제사든 반드시 맥주가 필요했고, 남녀노소, 지위고하, 빈부격차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의 필수품이었다. 수메르어에서 연회는 '맥주와 빵이 있는곳'을의미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 출토된 쐐기형 문자에는 당시 맥주에 대한 사람들의수요가 명확하게기록되어 있다. 수메르인들의 맥주 소비량은신분에 따라달랐는데 직위가 높을수록 더많은 맥주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하층노동자는 하루1L, 일반 관리자는 하루2L, 고위 관리 및 왕실관계자는 하루3L, 지역 행정 장관은 하루5L를 마실 수 있었다.
- 강력한 항해술과 선박 기술을 보유했던 아랍인들은 장기간 항해하는 선원들을 위해 더 독한 술을 만들고자 했고, 이러한 요구 속에서 세계 최초로 증류 기술을 개발하며 혁신적인 독주의 발전을 이룩했다.
8세기, 아랍 학자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세계 최초로 증류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새로운 중류 장치를 개발하여, 포도주를 가열하고 중류한 뒤 알코올 농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안했다.
알코올의 끓는점은 78도, 물의 끓는점은 100도이다. 포도주를 78~100도 사이에서 가열하면 알코올이 먼저 증발하고 이를 냉각시켜 순수한 알코올 농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독한 술을 추출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반복 증류를 하면 점점 도수가 높아지는 강력한 술을 만들 수 있고, 이 기술은 후에 럼, 보드카, 중국의 백주와 같은 각국의 대표적인 독주 제조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증류주가 발명된 시기는 대항해 시대와 맞물렸다. 이 시기에 유럽국가들은 전 세계로 식민지를 개척했고, 독주는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중요한 경제적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독주가 화폐처럼 사용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부족 간 전쟁이 빈번했으며, 패배한 부족은 승리한 부족의 노예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이 노예들과 '교환 거래'를 하기 시작했는데, 노예를 금, 비단, 조개껍질, 금속 그릇 등과 맞바꿀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인기 있었던 거래 품목이'설탕'고추' 그리고 '독주'였다. 심지어 일부 부족들은 '독주'로만 교환하는 거래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뜨거운 나라인 아프리카에서 독주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을까?
아프리카인들은 원래 꿀술과 맥주를 즐겼지만, 유럽산 독주를 처음 접한 뒤 그 강한 도수에 매료되었다. 몇 잔만 마셔도 금방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주에 대한 선호는 급격히 가했다. 결국 독주는 아프리카에서 거래 수단이자 '권력 상징'이 되었다. 특히 그 중 브랜디는부족장의 권력을 상징하는 술이었다. 브랜디가 없으면 부족장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에서는 브랜디 한병으로 어떤 상품이든 구매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성실한 노예를 구매하려면 부족장에게 브랜디를 뇌물로 바쳐야 했다.
이렇게 브랜디는 아프리카에서 화폐처럼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일반노동자들도 금보다 브랜디로 임금을 받고 싶어 했다. 즉, 유럽의독주는 단순한 술을 넘어, 아프리카 경제와 노예무역의 중요한 경제적자원이 되었다.
- 럼주는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술로, 어떤 면에서는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략적인 군수물자였다. 당시 대영제국의 위용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었고, 해군은 그 핵심 전력이었다. 애초에 영국 해군은 수병들에게 맥주를 보급했는데, 도수가 낮은 맥주로 정신적 만족감을 안겨주려면 상당히 많은 양이 필요했고, 장기보관도 어려웠다. 결국도수가 높은 럼주가 맥주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럼주는 도수가 너무 높은 술이었기 때문에 해군은 럼주를 물에 희석해 마시도록 규정했다. 이 과정에서 럼주에 물, 오렌지 주스, 라임즙등을 섞는 문화가 생겨났으며, 이는 훗날 칵테일의 기원이 되었다.
오랫동안 영국 해군들은 건강 문제를 겪어왔다. 장기간의 항해로 인해 많은 병사가 비타민 C결핍으로 인한 괴혈병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괴혈병의 원인이 비타민C 결핍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영국해군은 럼주를 섭취한 이후부터는 괴혈병 발생률이 낮아졌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럼주자체에도 미량의 비타민C가 포함되어있지만, 사실 럼주에 혼합한 라임즙이 비타민 C를 공급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1805년, 영국 해군은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해군은 병사들에게 럼주를 보급했지만, 스페인 해군은 비타민C 함량이 낮은 브랜디를 보급했고, 이는 장기 항해에서 병사들의 건강유지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럼주는 영국 해군의 전투력을 높이는데 기여하며, 전략적 군수물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 "사람은 때로 가벼운 자기 학대를 통해 쾌감을 얻는다. 심지어 고통이 심해질수록 더한 쾌감을 느낀다." (미국 심리학자폴 로진)
- 대체 왜 사람들은 자신을고통스럽게 하면서까지 고추를 먹는것일까?사실, 고대인들이 고추를 먹은이유는 단지 '자극이나 '쾌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고추를 자주 먹는 사람들이 더욱 강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적으로 밝혀진바에 따르면, 고추에 철분, 칼륨, 마그네슘, 비타민A,B,C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학술지 사이언스S에 발표된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인류는약 6,100년 전부터 체계적으로 고추를 재배하고 요리에 활용해 왔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당시의 고추 경작지중 상당수가 원산지인 브라질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추가 이미 새들의 배설물을 통해 지구곳곳으로 퍼져나갔음을의미한다.
- 고추를 기점으로, 인류의 식문화는 완전히 달라졌다. 고추의 강렬한 매운맛은 단순한 자극을 넘어, 사람들의 식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추를 넣으면, 평범한 음식도 특별한 맛을 갖게 된다. 또한 고추는 소화를 돕는다. 고추를 먹으면 침샘이 자극되어 타액 분비가 활발해지고, 이는 소화 효소인 아밀라아제의 분비를 증가시켜 탄수화물 소화를 촉진한다. 아밀라아제 효소는 전분을 더 쉽게 흡수할 수 있는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한때 새들이 배설물을 통해 전 세계로 퍼뜨린 작은 씨앗 하나가, 결국 인류의 식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제 고추는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인류의 미각과 식문화를 형성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앞으로도 고추는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에 활용되며, 인류의 입맛을 지배할 것이다.
- 고대인류가 고추를 즐겨 먹었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 전통적인 믿음 때문이다. 조상들은 매운음식을 먹으면 몸이 더욱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둘째, 보존 효과 때문이다. 고추는 쉽게 썩지 않으며, 다른 음식과 함께 보관하면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매운맛이 강한 고추는 천연방부제로 쓰였다. 사람들은 상한음식을 먹으면 병에 걸리거나 죽을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추가 이를 막아준다고 생각했다.
셋째,약용 효과때문이다. 현대 과학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지만,실제로 캡사이신은 강력한 항균작용을 한다.
- 고추를 길들인 것은인간일까, 아니면 인간이 고추에 정복당한 것일까? 이 논쟁은 이제 무의미하지만, 고추가 인간의 미각을 지배하는흐름은 거스 수없는 사실이다. 전세계는 '한국인의 매운맛' 또는 '중국의 마라맛의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현대인들은 고추가주도하는 거대한 미각 진화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과거 사람들은 고추가 건강을 증진하고, 병을 치료하며, 해충을 쫓아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추를 선호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고추가 비타민C를 풍부하게 함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의학적 효능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여전히 고추를 즐긴다. 그 이유는 바로 통증이 주는짜릿한 쾌감때문이며, 이 느낌은 강한 중독성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어떤 제품이 사람을 중독시키면서도 신체에 해롭지 않다면, 이는 경제 논리상 가장 완벽한 상품이 된다. 고추는 입안뿐만 아니라 온몸을 뜨겁게 만들며, 미각에 즉각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이처럼 고추의 강렬한 자극은 신체에 격렬한 통증을 유발하면서도, 먹는사람의 정신 상태까지 변화시킨다.
- 중국에서 매운맛을 선호하는 지역은과거 대체로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고추는 사람들이 거친 잡곡과 들에서 나는 채소를 먹던시절을 함께 지나왔고,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바꾸어 주었다.
현재는 매운맛이 거의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으며, 심지어 KFC나 맥도날드같은 서양의 패스트푸드 브랜드조차도 매운맛 메뉴를 빼놓지 않는다.
현재 매운맛은 세계각지에서 가장 강력한 미각 트렌드가 되었으며, 음식산업에서도가장큰시장을 형성하고있다. 고추는 가격이 저렴하고 강한맛을 가지며며 중독성이있고, 건강에 이롭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고추는 인간의 미각을 길들인가장 성공적인 경제적 식재료라 할 수있다. 6,000년 전브라질의 평원에서 자라던 작은 식물이 이제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 "맛있는 것도 지나치면 병이 되고, 즐거운 일도 지나가면 재앙이 된다." (송나라 소옹, 인자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