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사사회

사회 2023. 6. 22. 16:45

- 상식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들의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 이었다. 예컨대 1992년 사망자 약 23만 명 중 병원에서 임종한 사람은 약 4만 명에 그쳤다.' 말기 돌봄과 죽음이 주로 집에서 이뤄지다 보니 사망 원인 분류에 '증상불명확'이란 항목이 있 을 정도였다. 해를 넘겨 사망신고를 하는 지연 신고 문제도 불 거졌다. 이처럼 대다수 사람들에게 돌봄과 죽음은 의료(진단과 치료)와 행정(규정과 절차)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집안일'에 가까 웠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상황이 달라졌다. 통계청에 따 르면 2008년 한 해 사망자 중 63.7퍼센트가 '병원사'였던 반면 '재택사'는 22.4퍼센트에 머물렀다. 이 시기 말기 돌봄과 죽음은 의료보험을 타고 집 밖으로 나섰다. 2003년 공무원 의료보험공단·직장 및 지역 의료보험조합들과 그 기금들이 국민건 강보험으로 완전 통합됐다. 병원의 문턱이 낮아졌다. 과거 '노 환'이었던 것들이 파킨슨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진단명으로 세 분화되었고, 의료 서비스의 대상이 되었다. 1990년대 존재했던 증상불명확이란 항목 역시 통계청 사망 원인 분류에서 사라졌다.
- '산업역군'으로서 남자들이 바깥일을 무탈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여자들은 '현모양처'로서 집안일(여기에는 생애 말기 돌 봄은 물론 출산과 육아도 포함된다)을 하도록 고무됐다. 여성의 가사 노동을 비가시화하고, 남성 노동자에게만 임금을 주는 사회구 조는 산업화를 싸고 빠르게 이룩하는 데 효율적이었다. 자연스레 생애 말기 돌봄은 '집사람이 공짜로 하는 집안일'이라는 인식과 경험이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공적 의료보험과 요양보험을 비롯한 사회제도의 확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 증가 등의 사회적 흐름은 생애 말기 돌봄을 시장에서 거 래되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돌봄 노동은, 앞서 언급했듯이, 전 문성이 필요 없는 집안일로 여겨졌고, 시장에서 그 가치가 낮 게 매겨졌다. 오늘날 생애 말기 돌봄은 대개 여성이 최저임금 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 됐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안에 들 어와 있어도 요양보호사들의 노동조건은 비참하고, 제도 밖에 있는 간병인은 저임금인 데다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실정이다. 요양보호사의 돌봄은 노인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어르 신'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한편, 건강보험에 간병급여가 빠져 있기 때문에 병원에서의 간병은 보호자가 하거나 환자가 간병 인을 직접 고용해서 해결해야 한다. 불안정한 노동·의료·복지 구조 속에서 요양보호사, 간병인, 환자, 보호자 모두 위태로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가령 간병인은 병원 내의 코로나19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24시간 환자의 손과 발이 되고 있지만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 을 적용받지 못한다. 대개 간병인은 근골격계 질환 등에 시달 리고 있고,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요양보호사들 또한 고강도 육체노동과 다양한 폭력(예컨대 노인들의 침 뱉기, 욕하기, 꼬집기 등등)에 노출되어 있다.
- 특히 사람들이 이들을 '아줌마'로 호칭하는 것은 돌봄 노동을 여전히 집안일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생애 말기 돌봄의 형성 과정 (젠더화와 시장화)은 노동 자들뿐만 아니라 돌봄 수혜자의 삶 또한 취약하게 만든다. 언 론에서 고발하는 시설 내 노인 학대나 환자 소외의 본질을 노 동자의 도덕성이나 전문성 결여가 아니라 흔들리는 삶의 조건 에서 찾아야 한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 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 등등)이 좋아야 한다. 
- 사회학자 조은주는 1960~70년대 "가족계획사업은 적은 수의 자녀를 낳아 임금노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아버지와 합리적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일상적 실천을 일반적인 삶의 과정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 다. 즉 이 사업은 단순히 산아제한을 통한 국가 발전이 아니라 개인들이 일과 가족(계급과 젠더)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실천하 는 장이었다. 정상적인 가족(4인 가족)과 특정한 생애 주기(일, 결 혼, 출산 시기)가 이념처럼 퍼졌다. 이처럼 인구는 과거, 현재, 미 래를 규정하고, 사회 성원이 믿고 따라야 할 삶의 형태를 창출 하는 일종의 '기획'이다.
그러면 인구와 짝을 이루는 위기(crisis)란 무엇인가? 통상 '위 험한 고비나 시기'를 뜻하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 '크리시스 (Kolous)'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명사 크리시스는 분리, 구별, 선 택, 그리고 판단, 생각, 결정을 의미한다. 요컨대 위기를 이루 는 두 축은 '시간과 행위다. 위기는 찬성과 반대, 선과 악, 삶과 죽음, 퇴보와 진보처럼 길이 양쪽으로 갈리는 중대한 순간과 그때 해야 하는 최선의 선택을 가리키는 말이다.

- 노화와 죽음이 공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인구라는 정치적 상상에 기반한 미래의 불확실성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의 결과물로 등장한 '불평등한 노년'을 마주하고 있다. 노년이 불평등한 삶의 형태로 나타나 는 세계에서 노화와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다. 안티에이징 (anti- aging)은 의료 기술 차원을 넘어서 규범으로 작동한다. 사람들 은 세포의 노화까지 걱정하며 돈을 쓰고 몸을 관리한다. 그렇 게 각자도생하거나 각자도사한다.
이제라도 노인 돌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존엄한 노년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저출산·고령화라는 틀, 생산가능인구의 증가가 노인 돌봄의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출산이든 고출산이든 상관없이, 한국의 노인 돌봄은 여러 각도로 검토해야 하는 주제다. 그 논의는 노인을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의료전달체계상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은 환자 의 중장기적 안정보다는 새로 들어오는 위중증 환자 치료에 우선순위를 둔다. 하지만 환자들이 동네 의원에서 어렵지 않 게 진료 의뢰서를 받아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현실에서 의료전 달체계는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대학병원은 각종 검사 및 수 술을 받는 환자를 위해 병상 회전율을 높게 유지하는 방법으 로 '교통 정리'를 한다. 건강보험 수가가 낮고 비급여 진료도 거의 없는 입원 환자가 주요 정리 대상이다. 이러한 의료전달 체계와 건강보험 수가의 난맥상으로 수술 이후 환자 돌봄은 사실상 가족 및 보호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로 남는다.
한편 암 환자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돌봄을 받기도 어 렵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안에 있는 요양원은 치매를 비롯 한 노인성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양병 원도 노인 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현재 요양원 입소에 필 요한 장기요양 1·2등급(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을 받지 못해 서 요양병원으로 향하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혼자 힘으로 거 동은 가능하지만 일상적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은 크게 아프지 않아도 요양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다 보니 중증 환자는 의사가 없는 요양원('수발'을 전제한 복지시설)에 가고, 경증 환자는 의료진이 있는 요양병원(시술'을 전제한 의료시설)에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더욱이 노인성 질환을 주로 보는 요양병원에 완화의료팀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호스피스에선 간호사 한 명이 환자 다섯 명 정도를 돌보는 반면, 요양병원에서는 간호사 한 명이 환자 40명을 감당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두 기관의 환경 차이가 크 다. 요양병원이 완화의료 전문기관으로 거듭나야 하는지, 그 럼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해선 향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 한 실정이다(현재 일부 요양병원이 호스피스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 현재 한국의 호스피스는 말기암 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즉 암 환자가 호스피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주치의로 부터 '말기' 판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암 환자의 치료 과정 에서 말기는 뚜렷한 경계가 있는, 분절 가능한 시기로 보기 어 렵다. 예컨대 대학병원 의료진이 암 환자에게 요양병원, 외래, 응급실 등을 언급한다는 것은 '치료 계획'이 아직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이 계획은 암이라는 적을 섬멸하기 위한 일종의 전 략전술이다. 의료진은 종양(합병증, 부작용, 재발, 전이 등을 포함)의 형태와 병기에 따라 수술 · 항암제 · 방사선 치료를 동원한다. 이 계획을 따라서 종양이 근절되어 환자의 몸이 좋아질 수도 있고, 반대로 종양이 억제되지 않은 채 환자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더 이상 치료 계획이 유효하지 않은 시점, 즉 종양을 해결할 수 없는 말기라는 시간을 환자, 보호 자, 의료진이 상이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의료진 (특히 담당 교수)이 '환자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 라고 판단한 것과 별개로, 환자 및 보호자에게 말기를 고지하 고 호스피스 이야기를 꺼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의료 진, 환자, 보호자 간에 말기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공유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적극적 치료'가 아닌 '호스피스'에 대한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가령 의료진은, 초등학생 자녀가 있고, 가족 의 생계를 책임지며, 치료 가능성을 굳건히 믿고 있는 중년 남성 암 환자와 대화를 하게 될 수 있다. 또 자녀 양육과 환자 간 병을 도맡아 하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보호자도 고려할 수 있다. 의료진 중 누가(교수, 레지 던트, 간호사), 언제 말기 판정 직후, 임종기), 어떻게(직설적, 뜸들이기, 돌려 말하기, 희망적 사고), 누구와(환자, 보호자) 말기 및 호스피스에 대해서 대화할 것인가?
- 말기 고지 및 호스피스 전원은 그런 '지난한 과정'을 전제한 다. 대개 치료 계획에 관해서는 의료진 간에 견해차가 크지 않 지만, 말기에 관한 의료결정은 교수의 '철학'에 따라 요동친다. 어떤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고려해 끝까 지치료를 고민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의사는 그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말기 및 호스피스에 대해 모호하게 말할 수도 있다. 즉 말기는 당사자들(환자, 보호자, 의료진) 간의 입장, 신뢰, 의사소통 등에 따라 의학적 판단과 비슷한 시기가 될 수도 있고, 그로부 터 한참 뒤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정신없이 바쁜 대형 병원에 서 당사자들이 이 복잡한 협의를 할 정도의 '라포르(rapport: 상 호 친밀감, 신뢰관계)'를 형성하기란 무척 어렵다. 치료가 아닌 돌 봄과 관계가 있는 말기라는 시간은 지리멸렬에 빠지기 십상이 다. 환자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 그제야 '말기' 딱지를 붙인 채 호스피스 전원이 이뤄진다.
그 결과 호스피스 의료진은 임종이 임박하거나, 말기에 대 한 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환자를 만나게 된다. 환자는 호스피 스에서 의미 있는 생의 끝자락을 보내고 싶어도 체력과 시간 이 없다. 완화의료 전문가들은 호스피스의 가치를 실현하기 보다는 '임종 처리' 역할을 맡으면서 소진된다. 이런 현실에서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싹튼다. 간 혹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접하는 선진국 호스피스의 사례들, 예컨대 가든파티, 바닷가 여행,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 기 등을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이유다.
- 오늘날 호스피스는 생애 말기 돌봄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호스피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치료사, 자원봉사 자는 종교와 관계없이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존엄한 죽음 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 문제는 환자가 호스피스까지 가는 경 로가 멀고 험난하다는 것이다.
한국 의료라는 컨베이어벨트는 천천히, 수평으로,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 장치는 환자의 '몸'을 진단과 치료에 치우 친 방향으로 급격히 회전시킨다. 각 구간 사이는 찢어지고, 경사지고, 굴곡져 있다. 이 '역동적인 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돌봄의 가치는 부서지고, 가족 보호자의 부담은 커지며, 의료 진은 분열한다. 질병의 치료 가능성과는 별개로, 환자 삶의 위 험이 증식하는 구조다. 그래서 호스피스에 주목해야 한다. 의 료라는 컨베이어벨트 말단에 위치한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은 곧 이 체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과 밀접히 연 결되기 때문이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 '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 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 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 내 눈길을 끈 건 노인들이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1층 어르신들은 입을 통해서 먹지 않았다. '줄'이라 불리는 비위관 삽 입 (Levin tube insertion)을 통해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았다.
비위관 삽입은 환자의 코를 통해 식도를 지나 위까지 삽입 하는 관(管)으로 음식물이나 약물을 투여하는 의학적 시술을 뜻한다. 2008년 도입된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더불어 늘어난 요 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일상적 의료행위로 자리 잡았다.
중요한 건 비위관 삽입이 어디까지나 '의학적 시술'이라는 점이다. 이 시술이 상당 기간 진행된 퇴행성 신경질환(예컨대 알 츠하이머병)과 연하곤란(삼킴 장애)을 겪고 있는 와상 환자 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의학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미비하다. 의료인은 환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비위관 삽입을 결정해야 한다. 환자의 상태와 삶의 질을 '충분하게' 향상시키지 않고 수명만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 시술 은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비위관 삽입에 대해 입소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 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노숙 생활 을 하다가 아픈 몸으로 길에서 발견되고, 응급실을 거쳐 요양원으로 들어온 노인들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어르신들이 그 의료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의사를 밝히면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 들에게는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줄 가족이나 지인도 없는 상황 이다.
온갖 윤리적 수사로 뒤덮인 그 돌봄의 대상은 노인들의 생 명 그 자체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정해진 시간에 콧줄을 통해서 노인들에게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고, 기저귀를 관리하 며, 욕창을 예방한다. 숨 쉬고 먹는 콧구멍을 가진 존재로 전 락한 노인들은 10여 년간의 조용한 와상 생활 끝에 '자연사' 한다. 이렇게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무연고 노인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있다. 이 '생명 존중'이 곧 요양원의 운영 원리이고 질서다.
- ᄀ노인요양원 간호부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는데, 그때 여 기 노인들처럼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서 비위관 삽입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간호부장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 다. “아, 저는 절대 싫어요. 저는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나 이가 좀 더 들면 사전의료의향서를 꼼꼼하게 써놓을 생각이에요. 가족들에게도 내 생각을 명확하게 이야기해놓아야죠."

- 철학자 미셸 푸코의 분석처럼, 개인의 윤리는 특정 시대의 제도, 담론, 지식, 또 그와 관련된 실천을 통해서 '구축'된다' 윤리를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규범과 의무로만 보는 관점에 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생애 말기에 강조되는 윤리 역 시 마찬가지다. 효, 도리, 연명의료결정법과 같은 '선언적 윤 리'는 개개인이 경험하는 '일상적 윤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 한다.
문제는 그러한 윤리가 당사자인 노인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사회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된 문제 를 윤리의 이름으로 가족, 특히 여성(요양보호사, 간호사, 딸, 며느리 등)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존엄 하지 못한 돌봄의 경험은 결국 존엄하지 못한 죽음으로 이어 진다. 생애 말기 돌봄을 담당하는 주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의료적·생물학적 돌봄만을 최선으로 여긴다. 대부분 병원에서 죽기 때문에 그 '나머지' 죽음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 위에서 싹튼다.
- 인터뷰에서 만난 의사는 환자에게 말기를 고지(知)하 고 항암치료를 중단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했다. 그 결정 을 교과서처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말기'는 환자 가 항암치료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그 치료로 기대되는 이 득보다 부작용으로 인한 손실이 더 많아진다고 판단되는 시점 을 가리킨다. 의사는 의료 현장에서 말기라는 단어가 애매모호하게 통용된다고 말했다. 사람들(환자, 보호자, 의료진)은 초기가 아니면 말기라고 오해하기도 하고, 심지어 말기와 임종기라는 용어가 혼재하고 있다고 했다. 용어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말 기 의료결정은 환자의 몸 상태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과 환 경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이고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환자마다 처한 형편이 다르고, 그 상황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의사의 '철학'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그러고 보면 의료진이야 말로 말기 의료결정 앞에서 부화뇌동을 하는 사람인 셈이다.
- ㄷ환자의 보호자는 말기 의료결정을 '의료 다양성' 속에서 검토했다. 한국은 여러 의료가 공존하는 곳이다. 가령 정형외 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뼈주사를 맞은 노인이, 며칠 뒤 한의 원에서 침 치료를 받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양·한방 협진 병 원도 곳곳에 있다. 민간요법도 있다. 또 병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말이 안 통하는) 아픔을 치유하는 무당의 존재도 간과할 수 없다.' 그 '의료들'은 저마다 몸, 아픔, 질병, 고통, 치유, 건강에 대한 인식체계, 역사적 맥락, 실천 방법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그것들을 조합하고 활성화한다. 특히나 가슴을 졸이게 하는 대학병원이란 공간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의료 다양성은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의지가 된 다. 물론 이런 상황을 환자와 보호자의 '선택'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선택을 '불가피한 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환자와 보호자는 말기 의료결정에 관한 의사의 의견을 그 의료들 속에서 따져보고 수용했다.
- 더욱이 의료진에게 병원은 환자를 '보는' 곳이었다. 의사는 질병, 치료, 건강을 해부학적, 병리학적 방법을 통해서 해석한 다. 예컨대 엑스레이, CT, PET-CT, MRI와 같은 영상의학 검 사, 그리고 혈액이나 소변을 통한 생화학 검사의 공통점은 환 자의 몸(몸 안)을 '보는' 것이다. 각종 검사는 몸을 의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형태로 전환한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표준 성인 의 몸, 즉 의학적으로 '정상'이라 간주되는 몸의 기능 및 수치 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 과정을 통해 의사는 환자의 질병(이 상)을 파악하고 환자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행위, 즉치 료를 시도한다. 이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의료 다 양성을 언급했듯이, 서양의학 또한 몸, 질병, 건강에 대한 인식 체계, 역사적 맥락, 실천 방법을 갖고 있다.
- A대학병원의 의료진(의사)은 크게 교수, 펠로(전임의), 레지던 트(전공의), 인턴(수련의)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차, 직급 등에 따 라 다시 서열화·세분화된다. 시니어와 주니어로 나뉘고, 또 진 료 영역에 따라 구분된다. 상하로, 좌우로 분절된 구조다. 그들 은 주로 도제식 (徒弟式)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일한다. 그런 방 식은 임상에 유용한 암묵지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암묵지 는 '개인에게 체화(體化)되어 있지만 말이나 글 등의 형식을 갖 추어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뜻한다. 진료 및 교육의 일관성 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로 볼 수 있다. 한편 대학병원이란 장소에서 그러한 학습 방식은 진료 영역 간의 장벽을 강화하거나, 의료진의 관계를 더욱 수직적으로 만들 수 있다. 대학병원에 서 '급'이 다른 구성원들은 열린 토론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예 컨대 교수의 권위에 눌려 환자의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못 하는 전공의도 있었고, 교수가 명료한 오더를 내리지 않아 혼 란스러워하는 전공의도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료진을 '언제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의료결정을 내리는 전문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의료진 내부의 일상적 규범이 오히려 환자를 위한 말기 의료결정을 방해하는 형국이다.

- 가족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서 늘 변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산업화 시기에 국가의 가족계획 정책과 도시화로 인해 '4인 가족'이 대폭 늘어났다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나 '코로나19 시대'로 명명되는 오늘날에는 1인 가구, 동거 가구, 동성 가구, 비혼 가구와 같은 형태의 가족이 늘고 있다. 즉 당대 무연고자 의 죽음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을 '정상 가족'의 소멸에서 찾을 게 아니라 이미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체계와 규범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 죽음은 개인의 노력으로만 대비되지 않는다
웰다잉으로 정말 잘 죽을 수 있을까? 웰다잉이 간과하는 것 은 없을까? 웰다잉의 주체는 건강하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이 고, 윤리적인 존재로 상상된다. 자기결정권을 무리 없이 행사 하고, 올바른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원만한 대인관계도 유지 하는 이른바 '좋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 구도에서 나쁜 죽음은 나쁜 삶의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런 위인이 현실에 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질병, 간병, 노화, 의존이 주변화된다는 것이다. 즉 좋은 죽음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개인을 질타하고, 질병과 돌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 쉬워진다."
웰다잉이 강조하는 좋은 죽음(표방)과 능동적인 죽음 준비 (실천)라는 '가치의 틀'은 죽음을 각종 기술로 통제할 대상으로 만들고, 정작 죽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 에는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학력, 직업, 소득, 지역 등에 따른 죽음의 불평등성을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는 윤리적 언어 표 현으로 가리거나 정당화한다. 웰다잉이 상정하는 자기의 죽음 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개인은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계발하고, 실현하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로 보인다. 그에게 정책, 제도, 법률, 또 가족, 친구, 동료 등의 이른바 사회적 관계는 잘 죽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되거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까?
웰다잉이 강조될수록 '잘 죽기'는 요원하다. 앞서 살펴봤듯 이 웰다잉이 전제하는 '죽음'은 연명의료와 밀접한 관련이 있 다. 연명의료를 둘러싼 환자·보호자·의료진 간의 갈등 및 쟁 점은 웰다잉이란 광의적 표현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문 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한국의 기이한 의료체계, 빈약한 사회 보장, 정의롭지 못한 돌봄의 배치에 대한 깊은 관심과 논의가 필요하다." 호스피스 확대, 왕진, 간병 급여화 같은 제도도 절실하다. 각 사안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야 한다. 또 건 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기고 아프고 취약한 몸에 낙인을 찍는 인식을 갱신해야 한다. 돌봄을 집에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활동이나 시혜성 사업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문제, 즉 정 치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즉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 민과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 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 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 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 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 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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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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