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장자수업1

인문 2023. 11. 12. 15:54

-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나 지혜 혹은 덕도 없는 것들에 의해 감시되고, 사찰되고, 염탐되고, 지시받고, 법 적 통제를 받고, 번호를 받고, 규제되고, 등록되고, 세뇌되고, 설 교를 듣고, 통제되고, 제약되고, 평가되고, 가치가 매겨지고, 검열 되고, 명령받는 것이다.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19세기 혁명의 일반 관념(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XIXe siècle)』
- 장자에 등장하는 '거목 이야기'는 말합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 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국가나 사 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쓸모가 있을지 고민하지 말고, 나 자신 에게 국가나 사회가 쓸모가 있는지 고민하라는 장자의 도전인 셈입니다. 인재, 즉 체제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격렬 히 거부하자는 것!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향유하자는 것! 크게는 국가나 사회, 작게는 회사나 가정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쿨하게 떠나자는 것! 2,500년 전도 그렇지만 지금 시대에도 『장 자』가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는 이유, 체제를 위한 교재 가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책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 습니다.
-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스케일에서의 안목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장자가 대붕(鵬)이라는 거대한 새를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대붕은 천하를 벗어나 저 까마득한 북쪽에서 출발해 천하를 벗어난 저 멀리 아득한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여기서 대 붕은 주인-인간과 노예 인간이 구분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꿈,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다른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상징합니다.

-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에 관해 함 께 말할 수 있네. 세상이 넓고도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 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을 디딜 만큼의 땅이네. 그렇다면 발 을 디디고 있는 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땅을 모조리 파고들어 가 황천에까지 이른다면, 그 밟고 있는 땅이 사람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혜시가 "쓸모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이 쓸모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네." 「외물」

- 또한 너만 들어보지 못했는가?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 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지락」
- 상대방의 코나투스를 증진 시켜주지 못하면 상대방은 나를 떠나가거나 죽어갈 겁니다. 그 렇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보기 싫어하는 것까지도 받아 들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기꺼 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없으면 사랑은 비극으로 귀 결될 테니까요. 그럴 각오까지 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는 것쯤 못 할까요? 나 자신이 송두리째 죽고, 내가 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것을 유지하고 내가 강하게 유지되는 것은 사랑 의 속성이 아닙니다. 바닷새가 사흘 만에 죽자 노나라 임금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그리 아껴주었는데 왜 죽었을까를 생 각하며 슬피 울었겠죠. 여기에 기괴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죽게 만들고서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라고 탄식할 테니까요.

-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가고 있는데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 힌다면, 아무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배에 누군가 타고 있다면, 그 타고 있는 이에게 저리 비키라고 소리칠 것이다. 처음에 소리를 질렀는데 듣지 못 하고, 두 번째 소리를 질러도 듣지 못한다면, 세 번째 소리를 지 를 때는 틀림없이 험악한 소리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전에는 화 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를 내는 것은, 전에는 배가 비어 있 었고 지금은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 이제 공식처럼 외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것이라는 의식 은 나라는 의식과 함께한다"고 말이죠. 이제야 우리는 "배를 붙 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그 군주가 왜 자신의 배에 부딪힌 다른 배에 분노하는지 알게 됩니다. 배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거 대한 배는 바로 자신의 소유물이자, 나아가 군주로서 자기 자신 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빈 배가 와서 부딪힌 경우 화 를 삭이거나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소유물 을 훼손하는, 혹은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없기 때문 일 겁니다. 이제야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어야 한다"는 장 자의 가르침 중 "자신을 비운다"는 말의 의미가 우리 눈에 드러 납니다. '실'이 가득 채운다는 의미라면 '허'는 텅 비운다 는 뜻입니다. 이미 '비운다'는 말에는 어떤 소유 의식의 부정이 전제되어 있죠. 자신을 비운다고 해서 멍하니 의식을 버린다거나 무언가 신비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층간 소음이 들리면 윗집 아이들이 아파트에서도 건강하게 자란다고 생각하고, 내 가 앉아 있는 벤치에 누군가 앉으려 하면 그가 편히 앉도록 엉 덩이를 옮겨주고, 누군가 파스타를 가져가 먹으면 그가 얼마나 배고팠을지 걱정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자신을 비우자" 놀랍게 도 그 자리에 타자가 들어섭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자 연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비운 사람은 극도로 타자 에 민감한 상태에 있게 되니까요.
- 아이들에게서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지 않 습니다. 불장난은 그냥 불장난이고, 곤충 껍질을 모으는 것도 그 냥 모으는 것이니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죠. 하 루하루, 순간순간이 행복한 아이들을 질투하는 걸까요. 어른들 은 지혜로운 척하면서 아이들을 훈계합니다. "그걸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매 순간 행복을 뒤로 미루며 행복의 꽁무 니만 좇고 있는 사람들, 불행이 생활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훈계를 하는 걸까요.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결국 "배를 붙여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은 유위나 노동의 화신이었 던 겁니다. 작은 배가 충돌했을 때 그가 화를 내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반대편 땅에 닿으려는 목적을 빨리 달성하는 걸 방해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물을 끓여야 하는데, 가스 불이 잘 켜지지 않아 짜증을 내듯 말입니다.
이제 빈 배 이야기의 의미, 혹은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니 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자신을 비운다는 것 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뿐만 아니라, 주어진 순간을 부정하는 목 적의식을 비운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빈 배는 바로 이를 상징합 니다. 빈 배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도 없고 황하를 건너겠다는 목적의식도 없으니까요. 빈 배는 그저 황하의 물결과 즐거운 놀이를 할 뿐이죠. 이 점에서 세상에 노닌다로 번역된 유세(世) 라는 말이 그 은은한 빛을 드러냅니다. '유'라는 동사는 '논 다' 혹은 '여행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여행은 출발과 귀 가의 시간이 정해진, 일정이 미리 잡힌 관광과 같은 것은 아닙 니다. 여행은 즐거우면 지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장자』 편집자는 장자가 제안한 여행에 '소 요(逍遙)'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진짜로 한가로운 여행, 목적 없는 여행, 그래서 즐거운 곳이 있으면 머물고 그렇지 않 으면 떠나는 놀이와 같은 여행이 바로 소요유이기 때문이죠. 그 래서 노니는 세상은, 노닐고 있다면, 절대적인 긍정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무엇과 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까요. 세상에 노니는 사람은 머 물고 싶으면 머물고, 가고 싶으면 떠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자 유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모든 사람들이 이 빈 배처 럼 되는 사회가 장자가 꿈꿨던 사회일 겁니다. 빈 배와 빈 배가 떠다니는 세계! 육지에 빨리 이르려는 생각이 없기에 속도도 그 리 빠르지 않은 배들입니다. 물결을 타고 여유롭게 움직일 뿐이 니 충돌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간혹 부딪혀도 쿵 소리가 아니라 통 소리가 날 겁니다. 그러면 까르르 웃음소리가 이어질 겁니다. 재미난 해프닝이 벌어졌으니까요.

-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이 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그것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도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 다. 그 새는 바다가 움직일 때 남쪽 바다 방향으로 여행하 려고 마음먹는다. (...)
물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그 물은 큰 배를 실어 나를 수 있 는 힘이 부족하게 된다. 한 사발의 물을 바닥의 움푹한 곳에 부 으면, 갈대는 그곳에서 배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 큰 사 발을 띄우려 한다면, 그것은 바닥에 붙어버릴 것이다. 물은 얕 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그 바람은 커다란 양 날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 다. 그래서 그 새는 구만리를 날아올라 자신의 밑에 바람을 두었 을 때에만 자신의 무게를 바람에 얹을 수 있고, 등에 푸른 하늘 을 지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된 다음에야 남쪽으로 향 하는 자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
메추라기가 그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 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며 지낸다. 이것 또한 '완전한 날기(飛)'인데, 그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 는가?" 「소요유」
- 대붕 이야기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런 데 대붕의 자유에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날지 못하 고 바람을 기다리는 대붕의 모습에 무언가 한계와 제약이 느껴 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떠받치는 바람이 옅어지면 대 붕은 언제고 추락할 수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물론 이 경우 대 붕은 비행고도를 유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붕 은 이전보다 더 힘차게 날갯짓을 해야 할 겁니다. 바람이 금방 두꺼워지지 않으면 대붕은 언제고 다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대 붕이 날갯짓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대붕 의 이미지는 뭐든 할 수 있고 거침이 없어야 자유로운 것이라는 통념과는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대봉 이야기가 메추라 기를 등장인물로 캐스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메추라기는 말합니다.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 린다"고 말이죠. 메추라기는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날갯 짓에 의지하여 납니다. 세속적 통념에 따르면 메추라기야말로 자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날고 싶으면 날고 날기 싫으면 날 지 않기 때문이고, 올라가고 싶으면 날아오르고 내려가고 싶으 면 하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추라기는 자신이 자유롭다 고 당당히 선포합니다. 자신의 비행도 '완전한 날기]', 즉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말입니다. 대붕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메추라기가 자유로운 것일까요? 대붕과 메추라기의 자 유를 구별할 때, 곤이나 붕이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는 표현이 그 실마리가 됩니다. 여기서 수천 리의 크기는 상징적으로 독해해야 합니다. 내가 크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협소하다는 의미입니다.
- 이제야 우리는 대붕 이야기의 진정한 신스틸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람입니다. 철학적으로 바람은 내 세계의 협소 함을 폭로하는 타자를 상징합니다. 타자와 함께하면 나의 세계 는 커지고 그만큼 나도 커질 겁니다. 사랑이 아니어도 타자나 타자적 사건과 마주친 사람이 얼마나 커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과거의 나나 협소했던 세계로는 다시 돌아 갈 수 없죠. 아니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곤으로 있 던 그 갑갑한 곳으로 대붕이 어떻게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바람을 느꼈고 바람을 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대붕 이야기가 사실 바람 이야기이고,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자는 바람의 이미지로 사유했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아마 장자 편집자는 장 자』를 여는 첫 번째 이야기로 대붕 이야기를 선정했을 겁니다. 반면 기존 체제와 기존 질서를 옹호했던 철학자들은 바람 이미 지보다는 다른 안정적인 이미지를 선호합니다. 대표적으로 논 의 「야 편에서 공자는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산만큼 바람에 동요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동양 의서 『황제내경(黃帝內經)』마저도 풍(風), 즉 바 람을 모든 병의 시작이라고 저주합니다. 그래서 찬바람을 맞아 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죠. 한마디로, 풍을 맞지 않으려면 집 밖 으로 함부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이란 항 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장자라면 다르게 이야 기하겠지요. 겨울에 따뜻한 방에만 머물면 몸은 약해질 거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긍정하며 뛰어놀라는 거죠. 그럼 우리 몸은 더 강건해지리라는 겁니다. 물론 한두 번의 감기나 몸살은 각오해야만 하죠.

- 환공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윤편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의하려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해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하면 너는 죽을 것이다."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저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 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끌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 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빠르면 끌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습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 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 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천도」

- 남백자기가 상의 언덕에서 노닐다 거대한 나무와 마주쳤는데, 그 나무는 특별한 데가 있었다. 말 네 필이 끄는 수레 천 대를 매어놓아도 그 나무의 그늘은 수레들 모두를 가릴 만했으 니까.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나무인가? 이것은 반드시 특별한 재목일 것이다!"
가느다란 가지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구부러져 있어서 들보나 서까래로 만들 수 없고, 그 거대한 뿌리를 내려다보니 속이 푸석 푸석해서 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 잎사귀들을 혀로 핥으면 입 안이 헐어 상처가 생기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들을 사흘 동안 이나 미쳐 날뛰게 할 것 같았다.
남백자기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재목이 아닌 나무여서 이렇 게 거대한 나무로 자랐구나. 아! 신인(神人)도 그래서 재목이 아 니었던 거구나!" 「인간세」
-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먹고살 길이 있기에 주인의 감시를 피해 탈출하려는 노예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물 론 특정 자본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임금노동자는 생계 를 위해 반드시 제 발로 다른 자본가를 찾아가야 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새로운 자본가에게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어필 할 겁니다. 먹이를 얻으려고 "저는 튼튼하고 일을 잘하니 부려 주세요" 하며 찾아온 기묘한 말이 바로 임금노동자인 셈입니다. 과거의 노예나 말에게 임금노동자는 미친 노예나 혹은 미친 말 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특정 회 사는 떠날 수 있다고, 그래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 책과 교재, 즉 북(book)과 텍스트(text)의 차이를 생각하면 인 재의 논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 책이라면, 남이 읽어야 한다고 강 요해서 읽는 것이 바로 교재입니다. 책은 하품을 유발하지 않지 만 교재는 하품을 넘어 졸음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 다. 책은 읽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반면 교재 는 읽기 싫어도 봐야 합니다. 시험도 봐야 하고, 그 결과가 진학 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니까요. 교재는 나의 재능을 입 증하는 관문인 셈이죠. 그러니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가깝게는 성적과 스펙, 최종적으로는 취업을 위한 수단 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읽는 책과 자신을 통제하는 혹은 통제할 타인을 위해 읽는 교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거리만큼 다릅니다. 책이 사라지고 교재만 남았다면, 이제 정말 주인의 삶은 꿈꾸기 어렵게 된 겁니다. 남에게 쓸모 있는 길을 가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돌볼 여력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과거 중국의 전국시대도 현재 자본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 재가 되지 않으면 굶어 죽고, 인재가 되면 살아도 죽은 것과 진 배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은 것이라면, 같은 말이지만 쓸모가 없어도 베이고 쓸모가 있어도 베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제를 떠나서도 살 여지가 있었던 시절, 아니 그럴 용기가 있었던 장 자의 시절, 신인이 아직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한 날입니 다. 쓸모없어 좋은 날, 그날은 언제쯤 올까요?

- 양주가 송나라로 갈 때 어느 객사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객사 주인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름답고 한 명은 못생겼다. 그런데 못생긴 부인은 귀한 대접을 받고, 아름 다운 부인은 홀대를 받았다.
양주가 그 이유를 묻자 객사의 어린아이가 말했다. “아름다 운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아름 다운 줄 모르겠습니다. 못생긴 여자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못생긴 줄 모르겠습니다."
양주는 말했다. "제자들은 명심하라!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자신이 능력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에 간들 아 낌을 받지 않겠는가!"  「산목」
- 사실 미인 이야기는 '객사 이야기'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객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허영의 세계, 혹은 허영이 지 배하는 세계를 상징하니까요. 미녀뿐만 아니라 나머지 객사 식 구들, 심지어 추녀까지도 모두 자신의 허영을 충족하기 위한 투 쟁에 참여합니다. 이렇게 장자는 객사 전체를 인정 투쟁의 장이 자 허영의 감옥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철학자이기 에 앞서 장자가 일급 소설가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이 야기의 기본 모티브가 미인과 관련되었기에 기억하기 쉽게 미 인 이야기라고 부르지만,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 게 이야기할 때 객사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어쨌 든 이제야 우리는 미인 이야기가 표면적으로 왜 겸손을 강조하 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비 교우위에 서려는 욕망을 가진 인간, 즉 허영의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고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은 허영의 존재가 되어 타인들에 대해 비교우위에 서려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비교 우 위에 서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비교 개념과는 무관한 삶에 들어가려는 장자의 분투하는 모습이 분명해질 겁니다. 다 행스럽게도 우리는 루소라는 철학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 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자신의 진정한 주저 『인 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에서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우리 인간을 허영의 존재 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죠. "각자의 지위와 운명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신 이나 미모, 체력이나 재주, 장기나 재능 등에 의해서도 결정되 었다. 그리고 이런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라야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실제로 갖추든지 적어도 갖고 있는 척이 라도 해야만 했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실제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고 이 차이에서 엄숙한 겉치장과 기만적인 책략과 이 에 따른 모든 악덕이 나왔다." 여기서 각자의 지위와 운명'이라 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미 지배/피지배라는 위계질서, 그 사 이에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복잡한 신분 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이제 대부분의 인간은 파란만장한 자유보다는 평온한 굴종에 적응하고 만 것입니다. 도망쳐서는 살 수 없어서 도망치지 않는 노예와 같은 신세죠.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등장하는 가장 유 명한 말,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능가능하다"는 말 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루소의 말이 서늘한 이유는, 지금 현재 우리 대부분이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는 취업을 하든 무엇을 하든 돈을 주는 사람을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도망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거 노예나 지금 우리나 자신의 필요를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억압체제는 우리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테니까요. 자신이 쓸모 가 없더라도 쓸모 있는 척이라도 해야만 합니다.

-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준 큰 박 씨를 심었더 니 거기서 다섯 섬이나 담을 수 있는 박이 열렸다네. 거기다 물을 채웠더니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었지. 쪼개서 바가지를 만들었더 니, 깊이가 얕고 납작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네. 박이 놀랄 정도로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무용하다고 생각해 깨뜨려버렸네."
장자가 말했다. "여보게, 자네는 큰 것을 쓸 줄 모르는군. 송나 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약을 손에 바르고 무명을 빨아서 탈색하는 일을 대대로 해왔다네. 어떤 이방인이 그 말을 듣고, 금 일백 냥을 줄 터이니 약 만드는 비방을 팔라고 했지. 그 사람은 가족을 다 모아놓고 의논하기를 '우리가 대대로 무명을 빨아 탈색시키는 일을 했지만 기껏해야 금 몇 냥밖 에 만져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약의 비방을 금 일백 냥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팝시다'라고 했다네. 그 이방인은 오나라 임금 에게 가서 그 비방을 가지고 유세를 했지. 마침 월나라 임금이 싸 움을 걸어오자, 오나라 임금은 그 이방인을 수군의 대장으로 삼았 다네. 결국 그 이방인은 겨울에 수전을 벌여 월나라 군대를 대패 시켰다네. 오나라 임금은 그 사람에게 땅을 떼어주고 영주로 삼았 지.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했는데, 한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었고 다른 쪽은 그것으로 무명 빠는 일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 용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지. 자네는 어찌하여 다섯 섬을 담을 수 있는 박으로 큰 술통을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길 생각 을 못 하고, 깊이가 너무 얕아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만 걱정 하는가? 자네는 아직도 '쑥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 「소요유」
- 손약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장자 사유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문맥주의 혹은 맥락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콘텍스트주의(contextualism)입니다.
제자백가 대부분이 텍스트(text)에 집중했을 때, 장자만이 콘텍 스트(context)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20세기에 들 어서야 서양은 본격적으로 콘텍스트주의를 숙고하게 되죠. 모 두 비트겐슈타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젊은 시절의 주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의 의미는 세 계를 지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력한 텍스트주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성숙해지면서 그는 콘텍 스트주의자로 변합니다. 이때의 주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라는 책에서 그는 "언어의 의미는 쓰임 [use]에 있 다"고 말하니까요. 동일한 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 라, 혹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며 소를 잡는데, 설컹설컹, 썩둑썩둑,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소 잡 는 것이 무곡 <상림(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경수( >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이에 문혜군이 말했다. "참 훌륭하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 에 이를 수 있을까?"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이고, 이는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 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푸주한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푸주한이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뼈 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간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 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 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곳처럼,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 만 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 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 「양생주」
- 중요한 것은, 이론적 지식은 실천적 지식과는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천적 지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든 문자와 숫자로 기억하고 분류하고 통제하며 예측하려 하니, 현실을 체험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힘든 법입니다. 삶 에서 만나는 타자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혹은 타자와 '같이하면 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삶도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육체노동 자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이 타인이든, 소이든, 나무이든, 물고기든, 철이든 티타늄이든, 혹은 땅이든 물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죠. 반면 상명하복에 포획된 정신노동은 삶의 세계에서 조우하는 타자와 제대로 관계하기 어렵습니다.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타자는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이제 사무실에 서 나와 햇빛이 찬란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영상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눈을 떼고 창가로 불어들어오는 바람과 꽃 내음을 느껴야 합니 다.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는 '표상된 상황들(vorgestellte Situationen)'과 '체험된 상황들(erlebte Situationen)'을 구별한 적이 있 습니다. 이제 우리는 체험된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 상황은 나만이 아니라 타자와 어울려야 만들 수 있습니다. '포 정해우(解)'라는 고사의 기원인 포정 이야기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입니다. 체험된 상황이 좌절감을 안기지 않도록 만 드는 팁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 남곽자기가 탁자에 기대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 앞에 시 중들며 서 있던 안성자유가 물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진 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 늘 탁자에 기대 앉아 있는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 앉았던 사람 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자유, 현명하게도 너는 그것을 질문하 는구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너 는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직 땅의 피리 소리를 들 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너는 땅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았어도 아 직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안성자유가 물었다. "감히 그 의미를 묻고 싶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대지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이 울부짖는다. 너는 무섭게 부는 바람 소리 를 듣지 못했는가? 높고 깊은 산이 심하게 움직이면 백 아름이 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 마치 코처럼, 입처럼, 귀처럼, 병처 럼, 술잔처럼, 절구처럼, 깊은 웅덩이처럼, 좁은 웅덩이처럼 생 긴 구멍들이 각각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탁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낸다. 앞의 것들 이 '우우' 하고 소리를 내면 뒤의 것들은 '오오' 하고 소리를 낸 다. 산들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거센 바람에는 큰 소리 로 대답한다. 그러다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해진다. 너만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하거나 살랑살랑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가?"
안성자유가 말했다. “땅의 피리가 온갖 구멍들이라면, 사람의 피리는 대나무관들을 붙여 만든 악기들이군요. 감히 하늘의 피 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만 가지로 다르게 소리를 내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오도록 해서 모두 자신이 취한 것이다. 그렇게 소리 나도록 한 것은 그 누구인가!" 「제물론」

-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요임금이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를 평정했 다.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그는 멍하니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소요유」
- 네 선생 이야기의 후반부 요임금 이야기는 송나라 상인 이야 기만큼 짧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 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 요임금은 중국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 니다. 하지만 요임금은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 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멍하게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죠." 이 짧 은 이야기를 맛보려면 '천하'와 '네 선생'이라는 단어가 그 실마 리가 될 수 있습니다. 천하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라 는 뜻입니다. '하늘하늘의 아들-정신노동자-육체노동자, 즉 '천(天)-천자(天子)-대인(大人)-소인(小人)'으로 이루어진 국가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천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국가 질서가 지상(地上)의 모든 곳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물론 요임금은 처음에는 국가질서가 모든 곳에 통용된다고 믿었습 니다. 설령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도 국가질서 는 작동하리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치 월나라도 모자를 쓰리 라 믿었던 송나라 상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면서 국가질서가 미치지 않는 외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수(水)는 황하 북쪽에 서 황하로 흘러들어오는 지류입니다. 유목민들이 살았던 중국 북쪽 초원지대였죠. 그곳 네 명의 선생은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 았던 월나라 사람들처럼 국가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죠. 바로 여기서 요임금은 '천천자대인 소인'이라는 피라미드 지배 구 조가 우물 안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이 제 '네 선생'이라는 표현, 구체적으로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생각해보죠.
국가질서든 종교 질서든 일자와 다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 습니다. 신은 하나이거나 최고신이 존재합니다. 이 일자가 만물 을 관장하는 것이죠. 국가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자는 한 명 입니다. 이 한 명이 모든 피지배자를 지배할 때 인간 사회가 질서와 조화를 달성했다고 하죠.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은 일자와 다자의 구조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 생이라 생각하고 서로를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네 선생이 있었 으니까요. 한 명의 천자와 네 명의 선생의 만남! 이는 상명하복 의 국가질서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와의 마주침을 상징합 니다. 월나라라는 외부성과 마주쳤을 때, 송나라 상인에게는 세 가지 행동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송나라로 되돌아오는 것, 폭력 적으로 월나라를 송나라로 개조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 나라를 버리고 월나라에 몸을 던지는 것! 마찬가지로 요임금도 세 가지 행동이 가능합니다.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을 정복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다섯 선 생' 중 한 사람이 되는 것! 역사적으로 보아 요임금은 첫 번째나 두 번째를 선택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네 선생 옆에 머문 것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요임금은 천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상천하(天下)! 천하를 잃어 땅에 매장한 겁니다. 천하라는 관념 자체가 죽은 셈이죠. 다섯 번째 선생이 된 요임금을 따라 국가질서에 포획된 모든 이 들이 차례차례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선생이 되어가는 것! 어느 송나라 철학자의 꿈은 바로 이것입니다.

- 설결이 스승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외물에서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측면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면 외물이란 알 수 없다는 겁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모르는 것 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사 실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알 수 있겠는가? 이제 시험 삼아 자네에 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 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 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 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이나 여희는 사 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버리고, 사슴은 보자마 자급히 도망가버린다네.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 을 안다고 하겠는가?" 「제물론」

-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 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 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그러 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 버이를 기를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양생주」
- 집과 학교를 떠나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타자와 무관하게 내 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미성숙한 아 이가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라캉의 표현을 빌리 자면, 이제 "나는 나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불행히도 국가로 상징되는 억압체제가 탄생한 뒤로 어 른으로 가는 길은 무한히 멀어지고, 심지어 막히게 됩니다. 강 력한 상명하복체제와 경쟁체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으니까요. 집이나 학교보다 더 냉혹한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 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폐까지 스 며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맙니다. 인류학적 차원의 구조적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이제 골수까지 새겨지는 형국이죠 
- 오히려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단순합니다. 집이나 학교 를 떠나듯 국가나 자본주의를 떠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국 가나 자본의 질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는다는 데 있습 니다. 심지어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강화하고 타인에게 강요하 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마보이나 마마보다 무서운 국가보이 나 국가 혹은 자본보이나 자본걸이라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겁 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반항함으로써 부모나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지만 자신이 원해서 몰래 무언가를 하는 행동도 가능합니다. 부모나 선생님 이 원하는 것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팽팽하게 맞서던 경험입 니다. 이 경우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됩니다. 부모의 왕국이나 선생님의 왕국이 아닌 나만의 왕국은 이렇게 자라게 됩니다.
- 내경(黄帝內經)』등 동양의학 전통에 따르면, 독맥(督脈)은 생식 기에서 등 뒤로 척추를 거쳐 뇌까지 흐르는 맥으로 양기(陽氣) 를 관장합니다. 그래서 독맥적인 것을 따른다(督]"는 것은 척 추로 상징되는 당당함과 양기로 상징되는 경쾌함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당하고 경쾌한 삶! 억압체 제를 떠나거나 극복하지 못해도, 아니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 복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입니다.

- '큰 앎은 여유로워 보이고 작은 앎은 분별적이네. 큰 말은 담백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네.'
그것이 잠잘 때는 혼들과 교류하고, 그것이 깨어날 때는 몸이 열린다. 함께 접촉하는 것과 얽혀 날마다 마음은 다툰다. 느린 마음, 깊은 마음, 내밀한 마음.
'작은 공포는 겁먹어 보이고, 큰 공포는 넋을 잃어 보이네.' 그것이 쇠뇌를 발사하듯 표현된다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름 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맹세하듯 머문다는 것 은 그것이 우월한 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가을과 겨울처럼 쇠락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나날이 쇠약해진다 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들면 더 이상 회복시킬 수 없다네.'
그것이 밀봉한 것처럼 막힌다는 것은 그것이 늙어 새어나간 다는 것을 말한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은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없다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한탄, 변덕과 고집, 성 급함과 자만, 불손함과 가식 등등은, 음악이 빈 곳에서 나오고 이슬이 버섯에서 맺히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서 교차되 지만 그것이 싹트는 곳을 알지 못하겠구나! 그만 되었다! 이제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이것들을 얻어서 살아가고 있구나! 「제물론」
- 보라색 꽃을 경험 하면서 느끼는 풍성한 감정과 삶을 외부로는 400나노미터 파장 의 전자파와 같은 것으로 환원하거나 안으로는 뇌의 신경생리 학적 작용으로 환원하는 것도 동일한 문제를 낳습니다. 기쁨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강화를, 슬픔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경 감을, 행복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지속을, 고통은 마주침의 자 리에서 그 완화를 모색해야만 합니다. 핑크빛 무드 등은 우리에 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결별의 쓸 쓸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뇌의 특정 표면을 자 극해서 생기는 행복도 늙고 병듦의 고통에 대한 최종 치료제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쓸쓸함이 싹트는 곳, 그 마주침의 장소 에서 새로운 마주침을 꿈꾸며 따뜻함을 싹틔워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고통이 싹튼 곳, 그 마주침의 장소에서 새로운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싹틔워야 하죠.
장자는 인간과 무관한 사물 자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무관 한 마음 자체도 일종의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라는 것을 알고 있던 철학자였습니다. 마음과 무관한 세계 자체 도 문제지만, 세계와 무관한 마음 자체도 그만큼 문제라는 것입 니다. 그래서 장자는 바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멍도 아닌, 바 람과 구멍이 마주쳐서 생긴 바람 소리에 서고자 했던 것입니 다. 이 점에서 장자는 6세기 말 불교 최고 이론가 다르마키르티 (Dharmakirti, ?~?)의 통찰을 선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마키르티는 보라색 꽃이라는 의식 대상과 꽃이 보라색이라 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함께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호파람바 니야마 (sahopalambhaniyama)라고 불리는 주장입니다. '동시'나 '함 께'를 뜻하는 사하(saha), '지각'이나 '의식'을 뜻하는 우파람바 (upalambha), 그리고 '필연성'이나 '제약'을 뜻하는 니야마(niyama) 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구성된 말입니다. 이 주장이 중요한 것은 다르마키르티가 의식 대상을 떠난 마음 자체나 의식을 떠난 사 물 자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집요하게 주장하기 때문입 니다. 절대적 객관주의나 절대적 주관주의를 모두 벗어나려는 그의 의지가 번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객관주의나 절 대적 주관주의라는 쉬운 길을 걷기 쉽습니다. 핑크빛 무드 등을 켜면 일순간적으로나마 따뜻함을 얻을 수 있고, 뇌의 신경을 약이나 의료 장치로 자극하면 고통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 요. 결별이 주는 쓸쓸함을 껴안고 따뜻함을 싹틔운다는 것, 병듦 과 노쇠함이 주는 고통과 공존하며 행복을 싹틔운다는 것! 장자 가 주저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쓸쓸함에 무드 등 을 켜거나 고통을 달래려 뇌를 자극하는 것보다 힘든 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인 간의 삶이니까요.

- 설결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하니, 지극한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극한 사람은 신비스럽지! 넓은 습지가 불타올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고, 벼락이 산을 쪼개고 폭풍이 바다를 뒤흔 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네. 이와 같은 사람은 구름의 기 운을 타고 해와 달을 몰고 사면의 바다 밖에서 노닌다네. 죽고 사는 일도 그에게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익과 손해라는 작은 실마리에 대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제물론」

- 반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그대는 걷다가 지금은 그대는 멈추었소. 조금 전 그대는 앉았다가 지금은 일어 났소. 어찌 그대는 이렇게 무언가를 잡지 못하고 있는 거요?"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또 내가 의존하는 것 또한 다른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뱀의 비늘과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일까?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제물론」

- 지리소라는 사람은 턱이 배꼽 아래로 내려와 있고 어깨가 정 수리보다 높으며 목덜미의 뼈가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의 경혈이 위로 향했으며 두 넓적다리의 뼈가 갈비뼈에 이어져 있었다. 하 지만 그는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자기 밥벌이를 충분히 했고, 산 가지를 흔들고 쌀을 뿌리며 점을 쳐서 열 사람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다. 국가가 징병하려 할 때도 이 불구자는 소맷자락을 휘 날리며 징집관들 사이에서 노닐 수 있었다. 국가가 부역을 강제 할 때에도 그는 만성질환으로 부역을 면했다. 심지어 국가가 병 든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줄 때도 그는 세포대의 쌀과 열 묶음의 땔나무를 받았다. 무릇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사람' 조차 충분히 자신의 몸을 기르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자신 의 덕을 불구로 만든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인간세」
- 누군가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쓸모를 사용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지리소의 삶입니다. 체제에 쓰이지 않으면 못 사는 삶이 아니라, 체제가 없어도 자신의 삶뿐 아니 라 타인의 삶도 돌볼 수 있는 힘! 지리소의 힘입니다. 여기서 중 요한 것은 지리소가 가진 긍정의 정신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 은 그가 불구라고, 다른 사람에 비해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전국시대 때는 노역이나 전쟁으로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팔이나 다리가 있던 때와 현재 상태를 비교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에 절망하며 살 아갔을 겁니다. 배우자와 포옹하기도 힘들고 아이와 산책을 가 기도 힘듭니다. 심지어 불구라는 쑥덕거림과 동정이 싫어 대인 기피증에 빠지거나 술로 나날을 지새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만 지리는 자기 몸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꼽추처럼 허리가 굽었으니 그는 허리 굽혀 하는 일이 편합니다. 바느질과 빨래의 고수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허리가 곧은 정 상인들은 지리소만큼 오랜 시간 허리를 굽혀 일하기 힘들 겁니 다. 혐오감을 줄 만큼 기이한 외모는 지리소에게 종교적 아우라 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다른 외모는 종교적 아 우라만 얻으면 일상적 삶을 넘어가는 영역, 즉 성스러운 영역에 맞닿아 있는 느낌을 줍니다. 지리소가 주역(周易) 점을 쳐서 복 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지리는 진정한 삶의 요리사 였습니다. 진짜 요리사는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대한 근사한 요리를 만듭니다. 반면 미숙한 요리사는 말합니다. 당근이 없어 서, 소고기가 없어서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절망합니다.

- '타자가 아니라면 나도 없고, 내가 아니라면 취할 것도 없다.' 이것도 근사한 말이지만 그렇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일 참된 주재자가 있다 해도 그 징후를 알 수 없다. 작 용한다는 것은 이미 믿을 수 있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고, 실정 은 있지만 그 형체가 없다. 백 개의 관절,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가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나는 어느 것과 더 가까울 까?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좋아하는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들은 신하나 첩이 되는 것일까? 혹은 신하나 첩들은 서로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혹 은 그것들은 차례로 서로 군주와 신하가 되는 것일까? 혹은 거 기에 참된 군주가 있는 것일까? 실정을 파악하든 파악할 수 없 든, 그 참됨에 대해 보태거나 덜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물론」

- 대저 '이루어진 마음(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 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 을 스스로 선택한 자만이 스승이 있겠는가? 우매한 자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승을 가지고 있다.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 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 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이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어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면 설령 신비한 우임금이라도 알 수 없는 일일 텐데, 나 또한 어찌하겠는가! 「제물론」
- 결국 모든 시비는 가볍게 떠나지 못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국가를 떠나지 못하니 같은 국적의 사람들과 시비가 벌어집 니다. 학교를 떠나지 못하니 급우들과 시비가 벌어집니다. 회사 를 떠나지 못하니 동료들과 시비가 생깁니다. 간단히 비유하자 면, 결혼을 했기에 남녀가 갈등에 빠진다는 겁니다. 연애할 때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상대를 떠나버리면 그만일 겁니 다. 떠나면 살 수 없거나 사는 것이 힘들어질 때, 그리고 내가 머 무는 곳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함께 있을 때 시비는 불가피합니다.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는 것을 스 스로나 타자 혹은 제삼자에게 입증해 상대방을 쫓아내려는 정 착민의 무의식적 의지입니다.
- 정착민의 삶과 '성심'의 탄생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영토국가로 상징되는 정착생활이 확장되고 심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시기에 중 국 대륙은 극렬한 시비 문제에 빠져들고 맙니다. 부국강병의 패권 다툼이 정착생활의 안정성을 위기 상태로 내몰았기 때문입 니다. '성심 이야기'에 등장하는 '성심(心)' 개념은 이런 문맥 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실 성심은 장자』에서도 제일 유명한 말 중 하나입니다. "성심을 버려라"라는 말을 아마 들어본 적이 있 을 겁니다. "선입견을 버려라" 혹은 "편견을 버려라"와 같은 뜻 으로 쓰이죠. 불행히도 성심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 습니다. 성심은 '이루어진 마음'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 이 무엇이든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이루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인간 가축화, 영토국가 그리고 신분 질서의 확립으로 완성되는 정착 생활이 문제입니다. 기원전 2000년 전후 무력으로 농경지를 점 령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이미 기원전 6000년 전후 농경생활을 하던 농경인들은 이제 점령자들에게 토지 사용료를 내게 됩니다. 토지를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농경인들로서 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이렇게 노동을 안 해도 먹고사는, 아니 더 많이 먹고사는 지배자가 탄생하면서 중국 대륙에 국가가 탄 생한 겁니다. 『시경(詩經)』 「북산(北山)」편은 당시 상황을 노래 합니다.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것 없고, 모든 땅 바닷가 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네[溥天之下莫非王土, 率土之濱莫非王 臣]." 바로 이것이 중국 대륙에서 발생한 가축화의 전말입니다. 농경인들은 왕의 신하, 즉 왕신(臣)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사용 료는 물론 병역과 부역의 의무도 감당하게 된 겁니다. 자기 마 음에 안 들면 떠나는 유목민과 달리 농경인들은 토지를 떠나서 는 살 수 없기에 벌어진 비극이죠.
- 정착민적 마음, 즉 성심은 내 집, 내 땅, 나아가 내 것이라는 강력한 소유욕과 함께합니다. 반면 유목민은 마음에 들지 않으 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들에게는 내 가 살고 있는 곳이 중심이고 그 바깥은 주변이라는 의식이 없습 니다. 모든 곳이 중심이자 동시에 모든 곳이 주변입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부유합니다. 수십, 수백 킬로미터 반경이 자기 삶의 영역이니까요. 동시에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가난함 니다. 어떤 곳도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외, 빈부, 생사 등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마음, 바로 이것이 유목민의 마음입니 다. 시비가 유목민에게 낯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그래서 장자 는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을 수 있 다”는 주장을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 판했던 겁니다. 성심이 없다면 시비도 없다는 통찰, 혹은 정착 생활이 시비를 낳는다는 통찰입니다. 

- 대개 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질 때, 설령 부상을 입 을지라도 죽는 경우는 없다. 뼈와 관절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만 해로운 일을 당한 결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그의 신(神)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수레를 탈 때도 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수레에서 떨어져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죽 음과 삶 그리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 기에, 외부 사물과 마주쳐도 위축되지 않는다.
술에서 온전함을 얻은 저 사람도 이와 같은데, 자연에서 온 전함을 얻는 경우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성인(聖人)은 자연에 품어져 있기에, 그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달생」
-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다
취객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의 몸이 있는 곳을 다른 곳과 비 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마음은 몸이 있는 곳을 비교 불가능한 것으로 긍정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달리는 수레 위도, 낭떠러지를 30센티미터 앞둔 곳도, 암벽 중간 매달려 있는 돌출부도, 혹은 어떤 곳이라도 몸이 있다면 마음도 그곳을 편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몸과 교차하는 마음, 즉 신이 가능합니다. 취객 비유를 마치면서 장자는 말합니다. "죽음과 삶 그리고 놀 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에, 외부 사물과 마주쳐도 위축되지 않는다."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나 살아야 만 한다는 갈망이 마음에 가득 차면 우리 몸은 굳어버립니다. 당연히 자신이 직면하는 상황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수 레가 조금만 흔들려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발이 조금만 미끄 러져도 우리는 수레에서, 낭떠러지에서 그리고 암벽에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수레 위를 수레 아래와 낭떠러지를 평지와, 암벽을 땅바닥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수 레에 탄 취객은 저절로 자기 몸과 수레의 운동에 마음을 모읍니 다. 당연히 그는 수레의 운동, 나아가 지표면의 요철을 리드미컬 하게 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는 뒤집힐 만한 턱을 만나 휘청거릴 수도 있고, 취객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이 공중에 던져질 때도 그는 두려움이 없고, 땅 에 닿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날아서 편 안하게 땅에 닿을 겁니다. 술로 인해 "그의 신이 온전하기 때문 이죠."

- '세계의 어떤 것도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은 작다고 여길 수 있다. 세계의 그 누구도 일찍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없으니, 팽조는 요절했다고 여길 수 있다. 세 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
이미 하나라고 여긴다면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하나라 고 말했다면, 말이 없을 수 있을까? 하나와 하나라는 말은 둘이 라 여겨야 하고, 또 그 둘과 하나는 셋이라 여겨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무리 숙련되게 계산 잘하는 사람도 그 끝을 잡을 수 없는데,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없음' 으로부터 '있음'으로 나아가는 경우에도 셋에 이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있음'에서부터 '있음'으로 나아간다면 상황은 얼 마나 나쁘겠는가! 그 이상 나아가지 말고 이것에 따를 뿐이다. 「제물론」

- 안회가 말했다. “저로서는 이제 더 생각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부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공자가 말했다. "재계하라!"(...)
안회가 말했다. "저는 가난하여 여러 달 동안 술을 못 마시고 양념한 음식도 못 먹었습니다. 이 경우 재계라 할 수 있지 않겠 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런 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계이지, '심재齋)'가 아니다."
안회가 말했다. "부디 심재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다. "너의 '마음 방향(志)'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 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부합되는 것을 알 뿐이다. 기는 비어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길은 오로지 비움에서만 깃들 수 있다. 이렇게 비움이 바로 심재이니라."
안회가 말했다. “제가 심재를 실천하기 전에는 안회라는 자 의식이 실재처럼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심재를 실천하자 자의 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움이라 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 이 있구나! 위나라에 들어가 그 울타리 안에 노닐 때, 너는 명성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들어오면 울고 들어오지 않으면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라. 너의 집(宅)을 하 나로 만들어 부득이不得已에 깃들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인간세」
-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투톱은 유가(儒家)와 묵가(家)입니다. 실제 정치에 영향을 깊이 미쳤던 상앙(BC?~BC 338), 신불해 (申, BC ?~BC 337), 신도(愼, ?~?) 그리고 한비(韓非, BC 280?~BC 233) 등은 자신들이 법가(家)라는 학파에 속한다는 의식은 없 었습니다. 그들은 부국강병의 기술과 논리를 고민했던 현실 정 치가였을 뿐입니다. 반면 유가와 묵가들은 확고한 학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가가 대인(大人)을 정당화하는 사유를 전 개했다면, 묵가는 소인(小人)을 위한 사유를 표방했습니다. 아니 나 다를까,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묵가보다는 유가가 더 권위 있었나 봅니다. 아무래도 소인의 육체노동을 긍정하던 묵가의 입장은 고급 관료를 꿈꾸던 대부분 지식인들과 어울리지 않았 으니까요. 총력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하던 당 시 시대 분위기도 묵가의 쇠퇴를 재촉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중엽, 묵가들은 국가주의나 관료주의를 강하게 표방하면서 당 시 시대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학파의 창시 자묵적(墨)의 '비(非)', 즉 전쟁 반대론을 포기할 수는 없 었습니다. 소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묵가들은 전쟁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었기 때문이죠. 전국시대 중엽 묵가가 점점 지적 헤게모니를 잃어감에 따라 유가는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 그대와 내가 논변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대가 나를 이기 고 내가 그대를 이기지 못했다면, 그대가 정말로 옳고 나는 정 말 그른 것일까? 반대로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나를 이기 지 못했다면, 내가 정말로 옳고 그대는 정말 그른 것일까? 아 니면 그대와 나 둘 중 하나는 옳고 나머지 하나는 그른 것일까? 아니면 그대와 나 모두 옳거나 혹은 그대와 나 모두 그른 것일 까? 나나 그대가 살펴 알 수가 없다면 다른 제삼자도 깜깜하기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불러 옳고 그름을 판정하도록 해 야 할까? 그대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그대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그가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나나 그대 와 의견이 다른데, 그가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 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하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나나 그 대와 의견이 같은데, 그가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면 나나 그대나 제삼자가 모두 살펴 알 수가 없으니, 다른 누군 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제물론」

- 그런 일이 있은 뒤 열자는 스스로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 생각 하고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그 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부엌일을 하고 사람을 먹이듯 돼지를 먹 였으며, 모든 일에 특별히 편애하는 일도 없었다. 세련된 나무 조각품이 다시 온전한 나무로 돌아가듯, 그는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 그의 행동은 어지러워 보이지만 흐트러지지는 않 았다. 열자는 한결같이 이렇게 살다가 자신의 일생을 마쳤다. 「응제왕」
- 열자는 대들보나 세련된 나무 조 각품처럼 체제가 필요로 하는, 혹은 남들이 인정하는 삶을 부정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 의 삶을 죽여야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이제 열자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자신의 자유를 구 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냅니다. 그래서 장자는 열자가 "우뚝 홀로 자신의 몸으로 섰다"고 덧붙이는 겁니다. 괴연(塊然)을 번 역한 '우뚝'이라는 말이 당당함을 의미한다면, 독()을 번역한 '홀로'라는 말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보지 않는 단독성을 뜻합 니다. 그래서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선다”는 표 현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서지 못하면 무언가에 기대고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자는 자신 의 몸으로 서고자 합니다. 대인이 되어 소인을 착취하지 않겠다 는 의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힘으로 먹이겠다는 의지이 기도 합니다. "우뚝 홀로"라는 부사는 바로 이 의지가 관철되었 다는 것을 의미했던 겁니다.
- 누군가에게 명령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 려 하기에, 열자의 삶은 번잡하고 장자의 표현처럼 "어지러워 보일 겁니다. 하긴 밥을 하고 돼지를 기르고 집도 수리하고 빨 래도 하며 의식주와 관련된 일을 몸소 행하는 열자로서는 불가 피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내나 하인 혹은 노예에게 육체노동 을 시키는 대인이 어떻게 열자의 마음을, 메추라기가 어떻게 대 붕의 속내를 알겠습니까.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고 타인에 복종 하지 않으려는 자유에의 의지, 혹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타인 을 업겠다는 사랑에의 의지는 "흐트러지지 않은" 열자의 원칙 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허심이 자유와 사랑의 삶, 혹은 타자 와 소통하는 삶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 다. 마음을 비웠다고 밥이 저절로 되고, 돼지가 먹지 않아도 자 라고, 옷이 스스로 깨끗해지는 일은 없으니까요. 마음을 비우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는 즐겁게 밥을 하고 행복하게 돼지를 기르고 개운하게 빨래를 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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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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