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장자수업2

인문 2023. 11. 15. 07:17

- 내가 누군가 '귀가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 눈이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모양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본다'는 것 을 의미한다.
무릇 스스로 보지 않고 저것을 보는 경우나 스스로 얻지 않 고 저것을 얻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 얻으려는 것을 얻음이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음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맞다고 하는 것에 맞추려 함이지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변무
-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이지만, 불교에는 묘한 데가 있 습니다. 불교에서 인간은 부처를 숭배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 간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부처의 눈으 로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가르 침, 종교로서는 정말 개운치 않은 종교가 불교입니다. 분명한 것은, 승려들에게 복이 있으려면 중생들은 부처의 눈으로만 세 상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중생들이 사찰을 찾아 시주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 이 부처가 되면 붕괴되는 종교! 탄생할 때부터 그 내부에 시한 폭탄을 장착했던 종교! 그것이 불교입니다. 시한폭탄의 초침 이 돌아가고 있다는 긴박감 때문인지, 종교성과 함께하는 불교 의 인문성은 더 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밝은 대낮보다 짙은 어 둠 속에서 작은 촛불이 더 인상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앙 굿따라니카야(Ainguttara Nikāya)』에 실린 작은 경전 「마하나마경 (Mahānāmasutta)」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야기합니다. "에히 파 시코(ehi pasiko)!" "와서 보라(come and see)!"는 아주 강렬한 인문주의 선언입니다. 내 말을 믿지 말고 여기로 와서 너의 눈으로 직 접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봄'을 뜻하는 '파삼(passam)'에서 유래 한 '파시코'라는 말은 강렬합니다. 그렇습니다. 싯다르타는 중생 들이 자기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기를 원했던 겁니다. 중생들이 자기 눈으로 보게 되면, 그들도 자신처럼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된다는 걸 싯다르타는 알았으니까요. 바로 여기서 릴케의 발원 은 부처가 되겠다는 의지와 다름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 보는 법이나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은 필 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라!"는 말은 사족에 불과합니다. “와 서"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보면" 되니까요. 「변무」 편의 '총명 이야기'에서 장자의 입장은 바로 이겁니다.
- 눈이 없는 것을 '맹(盲)'이라 하고, 귀가 없는 것을 '롱()' 이라 합니다. 맹이라는 한자는 '눈'을 뜻하는 '목(目)'과 '없다' 는 뜻의 '망(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롱이라는 한자는 '용'을 뜻하는 '용(龍)'과 '귀'를 뜻하는 '이'로 구성됩니다. 뱀 이든 용이든 파충류에게는 귀가 없다는 것에 착안한 글자입니 다. 어쨌든 맹인이나 농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귀가 되고 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달리 누군가 자신이 귀 와 눈이 되어줄 테니 너는 스스로 듣지도 보지도 말라고 유혹하 거나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유혹과 강요에 복종하는 순간 우리는 기묘한 맹인이나 엽기적인 농인이 되고 맙니다. 「소요유」편에서 장자가 말했던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어찌 몸에만 농맹(盲)이 있겠는가? 저 앎에도 역시 농맹이 있다(豈唯有 聾盲哉?知有之)."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어 듣지 못하는 경우보 다 더 '웃픈' 상황입니다. 이런 희비극을 폭로하는 것이 명 이 야기입니다. 국가나 자본의 팩트 물신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들을 수 있거나 특정한 저것의 모양을 볼 수 있는 것보다 스스로 듣고 스스 로 볼 수 있는 것을 장자가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제야 총명 이야기의 핵심이 '특정한 저것의 소리'나 '특정한 저것의 모양'이라고 번역한 '피(彼)'라는 글자에 있음을 알게 됩 니다. '피', 즉 '저것'은 내가 아닌 타인이나 국가 혹은 자본이 보 라고 유혹하거나 강요하는 팩트였던 겁니다. 그래서 총명 이야 기 후반부에서 장자는 말합니다. "무릇 스스로 보지 않고 저것 을 보는 경우나 스스로 얻지 않고 저것을 얻는 경우는 다른 사 람이 얻으려는 것을 얻음이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음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맞다고 하는 것에 맞추려 함이지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 에 맞추지 못한 채, 자신의 소중한 삶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싯다르타는 노파심에 절절하게 호소했던 겁니다. "내게 와서 네 눈으로 보라!" 그러나 장자는 사람들이 국가나 자본의 눈 대신 스승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마저 경계합 니다. "네가 있는 그곳에서 네 눈으로 보라!" "에히 파시코"가 아 니라 그냥 "파시코!” 릴케는 장자에게 미소를 던집니다.

- 어떻게 내가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는가? 어떻게 내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우리들이 마치 젊어서 고향을 잃고도 고향으로 되돌아갈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여희(姬)는 애(艾)라는 곳을 지키던 어느 여 족(族)의 딸이었다. 진(晉)나라가 처음에 그녀를 잡아 데리고 왔을 때, 눈물이 그녀의 옷을 적실 정도였다. 진의 궁궐에 이르 러 진왕(王)과 침상을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그 녀는 자신의 눈물을 후회했다. 어떻게 내가 죽은 사람들이 처음 에는 살기를 바랐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는가?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아침에 깨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 흘리던 사람이 아침에 깨서 새벽에 사냥을 즐긴다.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의 꿈을 해몽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음을 안다.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분명하 게 아는 듯 "왕이구나! 목축민이구나!"라고 말하는데, 고루하기만 하구나! 「제물론」

- 조릉의 수렵 금지 구역 근처에서 노닐고 있을 때, 장주(莊)는 남쪽에서 방금 날아온 기이한 까치를 보았다. 날개폭이 일곱 자 이고 눈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듯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큰 날개로 날지도 못 하고, 큰 눈으로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장주는 자신의 옷자락을 걷고 밤나무 숲으로 걸음을 재촉하 며 석궁으로 그 새를 겨냥했다. 그때 그는 매미 한 마리를 목도 했는데, 그 매미는 방금 아름다운 그늘을 발견해 그 자신을 잊 고 있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그 매미를 낚아채려 했는데, 그 사마귀도 얻을 것을 기대하며 자신이 드러났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 기이한 까치도 그 사마귀를 뒤따르며 이롭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인데, 그 까치도 이익을 기대하며 자신의 실제 상황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장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다. “아! 사물들은 본질적 으로 서로 연루되어,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장주가 석궁을 던지고 숲에서 되돌아 나오는데 사냥터 관리 인이 그에게 욕하며 달려왔다. 장주는 집으로 돌아와 사흘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저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무엇 때문 에 이리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신 겁니까?"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나자 신을 잊으려 했고,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에 매료되어 있 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그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조릉에서 노닐 때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기이한 까치가 이마를 스치고 날아들었을 때 나는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나의 실제 상황을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냥터 관리인은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다." 「산목」

- 우연히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 돼지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잠시 후 새끼들은 놀라 눈망울을 굴리며 모두 어 미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 새끼들은 어미에게서 자신을 보지 못 했을 뿐이고, 어미에게서 유를 얻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이 다. 새끼들이 자기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어미라는 형체가 아니 라 그 형체를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
인기지리무신(趺支離無賑)은 위나라 영공에게 유세를 했다. 영공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 려 그들의 다리가 너무 앙상해 보였다. 옹앙대영(大)은 제 나라 환공에게 유세를 했다. 환공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 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너무 앙상해 보였 다. 그러므로 그 매력이 월등하다면 그 형체는 잊게 되는 법이 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다. 이것이 바로 '진짜 잊음'이라고 말한다. 「덕충부」
- 영공이나 환공은 사실 비범한 군주였습니다. 억압의 피라미드 그 최고 정점에 있었고 최상의 허영을 과시하던 두 사람은 억압체제와 허영의 논리에 깊은 환멸을 느꼈습니다. 궁궐의 모 든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척할 뿐 그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모든 관료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척할 뿐 그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 어 두 군주는 자신도 여자를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하고, 신하를 그 쓸모 있음 때문에 아끼는 척하고 있다는 걸 압 니다. 권력과 부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것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겁니다. 영공과 환공은 이런 비범한 자각이 있었기에 지푸 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구나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두 불구 자를 만났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배와 복종과는 무관한 사 랑의 관계, 허영에서 벗어난 기쁨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 합니다. 자신이 금관과 곤룡포를 빼앗겨도, 심지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팔이나 다리가 잘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 날 수 있는 사랑의 짝을 찾은 겁니다. 그 짝과 함께할 때 영공이 나 환공은 더 이상 군주일 수도 없습니다. 권력과 부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으로만 교환되는 관계에 돌입했으니까요. 새끼 돼 지가 어미 품에서 젖을 빨다가 편히 잠들고, 어미가 그런 새끼 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새끼 돼지 이야 기를 마무리하며 장자는 "그 매력이 월등하다면 그 형체는 잊 게 되는 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 형체를 잊게 되었을 때 우리는 타자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억압사회가 각인시킨 시각 지 배적인 사유, 억압사회를 유지하는 시각 지배적인 삶을 극복하 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 자사, 자(子), 자려, 자래, 이렇게 네 사람 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말했다. “누가 없음을 머리로, 삶을 척추로, 그리고 죽음을 꽁무니로 생각할 수 있는가! 누가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한 몸이라는 걸 아는가! 나는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네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거슬리는 것 이 없어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었다. 자여가 병이 들자 자사가 병문안을 왔다.
자여가 말했다. “위대하구나! 저 사물의 만듦이 나를 이렇게 뒤틀리게 만드는구나! 구부러져 등이 튀어나오고 오장이 위로 향하며 턱이 배꼽에 숨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아졌고 목뼈가 하늘을 가리키니, 음양의 기운이 모두 뒤죽박죽이구나!"
자여의 마음은 편안하여 아무런 일도 없는 듯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 우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말했다. “아! 저 사물의 만듦이 또 나를 계속 뒤틀리게 만들려 하는구나!"
그러자 자사가 말했다. “자네는 그것이 싫은가?"
자여가 대답했다. "아니, 내가 무엇이 싫겠는가! 내 왼팔을 차츰차츰 닭으로 변화시키면 나는 그에 따라 새벽을 알리는 소 리를 내겠네. 내 오른팔을 차츰차츰 석궁으로 변화시키면 나는 그에 따라 구운 올빼미를 기다리겠네. 내 엉덩이를 차츰차츰수 레로 그리고 나의 신(神)을 말로 변화시키면, 나는 그에 따라 그 것을 탈 것이니 다시 마구를 채울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얻는 것도 때에 맞은 것이고, 잃은 것도 따라야 할 것이네. 때에 편안 해하고 따름에 머물러야 슬픔과 즐거움이 개입할 수 없는 법이 지. 이것이 옛사람들이 '매달린 데서 풀려남'이라고 말했 던 것이네. 그런데도 스스로 풀려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물 들이 더욱 얽어매게 될 거야. 게다가 사물은 자연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인데, 내가 또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얼마 후 자래가 병에 걸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둘러앉아 울고 있었다.
자려가 가서 안부를 묻고는 말했다. "쉿! 비키세요! 변화 를 놀라게 하지 마세요!" 자려가 문에 기대어 말했다. "위대 하구나! 만물의 만듦이여! 또 그대를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 가? 그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 들려고 하는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려고 하는가?"
자래가 말했다. "부모가 명을 내리면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 자식은 따라야 해. 음양은 사람에게 단지 부모일 뿐만이 아니 네. 그것이 나를 죽음에 가깝게 하는데, 만약 내가 따르지 않는 다면 나는 바로 무례한 자가 될 뿐이니, 음양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거대한 대지는 형체를 주어 나를 싣고, 삶을 주어 나를 일하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 게 한다네. 그래서 나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죽음을 긍정하는 이유네. 지금 위대한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녹이고 있 는데, 쇠붙이가 뛰어 올라와 '나는 장차 반드시 명검 막야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위대한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쇠붙이라고 생각할 것이네. 이제 한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 서도 '사람일 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저 변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지금 한번 하늘과 땅을 거대한 용광로로 생각하고 변화의 만듦 을 위대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 가!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 자래의 이야기에는 막야()라는 명검이 등장합니다. 막 야는 간장(醬)이라는 검과 함께 춘추시대를 상징하는 명검입 니다. 간장과 막야라는 부부 대장장이, 즉 남편 간장이 만든 검 이 간장이고, 아내 막야가 만든 검이 막야입니다. 간장이든 막 야든 이것은 쇠붙이가 꿈꿀 수 있는 최상의 이상형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막야가 인간의 꿈, 즉 권력자, 부자, 미인 등을 상징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래의 대서사시에서 대장장 이 비유는 매력적입니다. 금붙이도 있음이고, 용광로에 있는 쇳 물도 있음이고, 쟁기도 있음이고, 명검 막야도 있음입니다. 대장 간에서는 이렇게 찬란한 생성의 드라마가 벌어집니다. 명검 막 야는 소중한 것이니 쇠붙이들은 이에 집착할 겁니다. 쇳물에서 막야가 되면 기쁘고, 막야가 녹아 쇳물이 되면 슬플 겁니다. 그러나 생성은 이런 기쁨과 슬픔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쇳물은 막 야의 부재로 오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쇳물은 막야만큼 긍정해 야 할 생성의 결과물이니, 있음으로 긍정해야만 합니다. 대장장 이 비유는 죽음을 부재로 이해하며 절망하는 우리 인간의 편협 함을 바로 부수어버립니다. "이제 한번 인간의 형체를 빌렸으면 서도 '사람일 뿐이야, 사람으로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저변 화의 만듦도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건 강함, 젊음, 미모 등에 매달려 변화와 생성을 부정하는 우리에게 이만한 죽비도 없을 겁니다. 마침내 자래의 대서사시가 정점에 이르면서 현해 이야기는 엄청난 감동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지 금 한번 하늘과 땅을 거대한 용광로로 생각하고 변화의 만듦을 위대한 대장장이로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 하늘과 땅 사이, 이 세계는 있 음으로 충만한 생성의 장입니다. 여기에 없음이나 부재는 끼어 들 틈이 없습니다. 쟁기가 녹아 쇳물이 되고, 쇳물이 명검이 되 고, 명검이 녹아 쇳물이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이 만 들어질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부재의 느낌이 없이 긍정해야 할 겁니다. 녹는 과정도 긍정하고, 형체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긍정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래는 마지막으로 여섯 글자의 유언을 자 려에게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성연매(成然), 거연각(然覺)." "편하게 잠들고 새롭게 깨어날 뿐이네." 이렇게 자려와 자래 두 사람, 아니 자사, 자여, 자려 그리고 자래 네 사람은 영원히 헤어 질 수 없는 친구가 되는 시험을 무사히 통과합니다.

- 공수가 선을 그리면 양각기와 곱자에 부합했고, 그의 손 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므 로 그의 영대(臺)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 던 것이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 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은 것이다. 앎에서 옳고 그름을 잊 는 것은 마음에 딱 맞은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 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은 것이다. 처음 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은 것이다. 「달생」
- 윤편 이야기나 포정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육체적 이성'이나 '몸적 마음'을 강조합니다. 장자는 몸적 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 다. 그가 비우고 잃어버리고[]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몸 과 분리된 마음, 몸과 독립된 마음, 실체로 이해된 마음입니다. 정치철학적으로 장자의 이런 입장은 정신노동의 독립성과 우 월성에 근거한 억압체제에 대한 비판과 공명합니다. 어쨌든 장 자는 손과 하나가 되는 마음, 그리고 끌이나 칼과 하나가 되는 마음, 나아가 마침내 나무토막이나 소의 고유한 살결에 들어가 노니는 마음을 복원하려고 합니다. 전국시대에 소인이라 불리 던 피지배계급이 간신히 보존하고 있던 마음입니다. '허(虛)’ ‘상 (喪)' 혹은 '망忘)' 등 개념은 바로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에만 집중하면 이 세 개념이 무언가 신비하고 초월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포정 이 야기에서 장자가 신(神) 개념을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 니다. '허' '상' 혹은 '망' 개념이 가진 부정적 뉘앙스가 낳을 오 해와 착각을 막기 위해 신이라는 긍정적 개념을 제안한 겁니다. 이것이 윤편 이야기나 포정 이야기 외에도 삶의 달인을 다룬 이 야기들이 『장자에 많은 이유일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체로 이해된 마음을 부정하고 몸적 마음을 긍정하려는 장자의 속내 와 공명하는 철학자가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양에서, 그것도 장자 사후 2,000여 년이 지난 뒤에 뜬금없이 탄생한다는 사실입 니다.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입니다.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니체는 장자의 '망'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줍니 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 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 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 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 을 길렀던 것이다." 장자가 들었다면 박수를 쳤을 만한 인상적 인 구절입니다. 특히 소화불량은 장자도 부러워했을 매력적인 비유입니다. 니체에게 있어 망각은 소화가 양호하게 되는 상태 에, 그리고 반대로 기억은 소화불량 상태에 비유됩니다. 
-  장자는 발과 허리라는 근사한 비유를 하나 던진 다음 공수의 경지를, 혹은 그 경지가 시사하는 교훈을 '망' 과 '적'이라는 개념으로 일반화합니다. "앎에서 옳고 그름을 잊 는 것은 마음에 딱 맞은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 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은 것"이라고 하 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러니까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옳고 그 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것은 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또한 나에게 딱 맞는 어 떤 장소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의 내면은 안정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장소에 있을 때 내면의 동요가 일어나거나 다른 사람의 평 가에 휘둘린다면, 우리는 딱 맞는 장소에 있지 않은 셈이죠.
- 공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장자는 이야기합니다. "처음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 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은 것이다." 이 사람과 딱 맞는 순간, 이 음악과 딱 맞는 순간, 혹은 이 장소와 딱 맞는 순간, 우리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람과, 이 음악 과, 그리고 이 장소와 딱 맞았었다고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항 상 딱 맞았었다고 느껴야 "딱 맞는다"는 생각, 딱 맞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싹트지 않을 테니까요. '망'과 '적'은 대상화하는 순간 무력해진다는 걸 알 정도로 영민한 장 자입니다.

- 말은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고, 말하는 자에게는 말이 있다. 그 말하려는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실제 말이 있는 것 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있지 않은 것인가? 만일 이런 말이 새들의 지저킴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 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길)은 무엇에 가려져 진짜와 가짜가 있게 되는가? 말)은 무엇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가? 길은 어디에 간들 있 지 않겠는가? 말은 어디에 있든 허용되지 않겠는가? 길은 작은 이루어짐에서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꽃에서 가려진다. (...) 허 용된다고 해서 허용되는 것이고,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허용 되지 않는 것이다. 길은 걸어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불 러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 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물에는 원래 그렇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 고, 사물에는 원래 허용된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어떤 사물도 그렇지 않은 것은 없고, 어떤 사물도 허용되지 않은 것 은 없다. 「제물론」

- 그대는 저 사마귀를 모르지는 않겠지? 사마귀는 앞발을 사납 게 치켜들고 흔들며 수레바퀴 자국에 서서 수레와 맞서려고 하 네. 자신이 그 수레를 감당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이지. (...)
그대는 저 호랑이 기르는 사람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는 감 히 호랑이에게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주지는 않는다네. 호랑 이가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다 드러내는 성냄 때문이지. 또 그 는 감히 호랑이에게 동물을 통째 먹이로 주지는 않는다네. 호랑 이가 그것을 찢어발기다 드러내는 성냄 때문이네. 호랑이 기르 는 사람은 호랑이가 배고프거나 배부를 경우에 때를 맞추어 호 랑이의 성냄을 조절하지. 호랑이가 인간과 유가 다른데도 자신을 기르는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이유는 그 사람이 호랑이 의 기질을 따랐기 때문이고, 호랑이가 자신을 기르는 사람을 물 어 죽였다면 그 사람이 호랑이의 기질을 거슬렀기 때문이네.
저 말을 아끼는 사람은 광주리로 똥을 받고 대합조개 껍데기 로 오줌을 받아준다네. 마침 파리나 모기가 말 등에 들러붙으려 는 것을 보고 불시에 말 등을 때리면, 말은 재갈을 부수고 말을 아끼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차고 그의 가슴을 걷어차게 되네. 아끼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아끼는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던 셈 이네. 「인간세」
- 자는 세 우화로 구성된 당랑 이야기 안에 자기 고뇌 혹 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멋지게 새겨 넣습니다. 당랑 이야기는 먼 저 사마귀 우화로 시작됩니다. '당랑거철(鄭拒轍)'이라는 유명 한 고사성어의 출전이 되는 우화입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수 레와 맞짱을 뜨려고 수레바퀴 자국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정 확히 말해 사마귀는 수레의 진행을 막으려고 했던 겁니다. 얼 마 지나지 않아 수레가 그 바퀴 자국을 따라 굉음을 울리며 육 박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사마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수레가 지나간 뒤 바퀴 자국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짓뭉개져 있을 테니까요. 사마귀 우화를 마무리하면서 장자는 사마귀가 자신이 그 수레를 감당할 수 없음을 몰랐던" 거라고 논평합니다. 당랑거철이라는 고사성어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에 저항하는 어리석음의 비유로 통용되는 이유가 짐작이 됩니 다. 하지만 사마귀 우화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 실마리는 수레를 뜻하는 '거)'라는 글자에 있습니다. 기원 전 1200년경 중국 대륙에는 청동기 시절 국가의 힘과 지배계급 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전거(戰車)가 중앙유라시아로부터 수입됩 니다. 상나라 시절 이야기입니다. 상나라 시절 고분에서 부장품 으로 전거가 출토되는 것이 그 증거일 겁니다. 사마귀가 맞선 수 레가 국가기구를 상징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 어디선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을 들어봤 을 겁니다. 청동기 시대와 함께 시작된 국가는 말이 끄는 전거 와 함께 대지를 질주합니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종 모두가 공유 했던 대지는 이제 인간이 독점하는, 특히 소수 지배계급이 독점 하는 곳으로 쪼개집니다. 영토국가로의 추세는 이제 누구도 거 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겁니다. 강자와 약자는 있어도 지배와 복종이 없었던 대지는 국가의 탄생과 함께 점점 활기를 잃어가 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수레바퀴 자국이 대지에 더 깊게 새겨 지기 전에,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마귀 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렬한 죽음이 반복되자 생각을 전환한 사마귀들이 생깁니다. 역사의 수레를 막거나 되돌릴 수 없다면,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잡겠다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전거의 폭주를 막으려고 장렬한 죽음을 각오하는 방법이 아니라 전거에 올라타 전거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 하자는 방법입니다. 국가에 맞서지 말고 국가를 이용하자는 수 정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열립니다. 사마귀 우화에 이어지는 두 우화로 장자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호랑이 기르는 사람[養虎 우화와 '말을 아끼는 사람]'우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의 성격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 째 우화의 주인공은 사마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우화의 주인 공은 사람입니다. 영토국가를 상징하는 전거에 올라타는 순간 사마귀가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건 무척 인상적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전거에 맞서는 존재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문명에 반 하는 야만, 인간에 반하는 짐승, 혹은 지혜에 반하는 우매함으로 표상됩니다.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가 문명화된 인간으로 표상 되는 이유입니다. 설령 그들이 여전히 전거에 불만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 '위시'는 '가느다란 줄기'와 '굵은 기둥' '나병에 걸린 추 너'와 '서시 같은 미녀' 등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무리 엉 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길로 그것과 소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 '쪼개짐'이 있으면 '완전함'도 있고, '완전함'이 있 으면 '망가짐'도 있다. 사물에 내가 규정한 '완전함'과 '망가짐' 이 없어야 그것과 다시 소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소통해서 하나가 될 줄 안다.
'위시'를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도록 해야 한다. '일상'이란 '사용(用)'을, '사용'이란 '소통'을, 그리고 '소통' 이란 바로 '얻음(得)'을 말한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거의 다 온 것이다. '인시(因)'할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왜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길이라고 한다. 「제물론」
- 장자는 "사물이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길로 그것과 소통하여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엉뚱하고 이상 야릇한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열등한 것이자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관계할 가치가 없고 멀리해야 할 것들이죠. 그러나 비범한 영혼 에게 그것은 충분히 쓸모가 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긍정될 수 있 습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 사람이나 그 사물로 발걸 음을 옮기게 될 겁니다. 그 걸어감이 반복되면 당연히 길이 만 들어지겠죠.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과 소통하려면 그것이 엉 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장자가 "사물에 내가 규정한 '완전함'과 '망가짐'이 없어야 그것과 다시 소통해 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가느다란 줄기라고 멀리하고, 추녀라고 멀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느다란 줄기도 근사한 건축 재료가 되고, 추녀도 매력적인 짝이 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 순간 가느다란 줄기는 가느다란 줄기가 아니라 굵은 기둥보다 더 훌륭한 건축 재료가 되고, 추 녀는 더 이상 추녀가 아니라 서시 같은 미녀도 아쉽지 않은 소중 한 애인이 됩니다. '위시'와 날카롭게 구별되는 '인시' 개념은 바 로 이 문맥에서 읽혀야 합니다. 위시에서 우리 사유가 원인이고 외부 사물이 결과였다면, 인시에서 그 관계가 뒤집힙니다. 인시 에서는 외부 사물이 원인이고 우리 사유는 그 결과가 되니까요. 그래서 인시 개념에서 '인(因)'이라는 글자가 명사로는 '원인'이 라는 뜻을 가진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닙니다. 가느다란 줄기만 있더라도 그것을 절대적 원인으로 삼아 집을 짓는 것, 추 녀만 있더라도 그 여자를 절대적 원인으로 생각해 사랑을 이루 려는 것, 부족한 식재료만 있더라도 그것을 절대적 원인으로 긍 정해 근사한 요리를 만들려는 것, 바로 이것이 '인시'입니다.
- '이것이라 생각한다'는 뜻의 위시에서 '이것'은 다른 것과 비 교되는 '이것'입니다. 반면 '이것에 따른다'는 뜻의 인시에서 '이 것'은 비교 대상이 없는 '이것'입니다. 위시의 '시'와 인시의 '시' 사이에는 이렇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 바로 여기 에 장자 사유의 섬세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위시'를 쓰지 않 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도록 해야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바 로 이 간극을 건너뛰라는 요구였던 겁니다. 손약 이야기를 떠올 려보세요.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똑같은 약이지만, 송나라 사람 의 일상에서 그 약은 겨울에 빨래하는 데 사용되었고 오나라 사 람들의 일상에서는 수전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일 상'이란 '사용'을, '사용'이란 '소통'을, 그리고 '소통'이란 바로 '얻음[得]'을 말한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거의 다 온 것"이라고 말을 이었던 겁니다.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이 따뜻한 오 나라에서는 쓸모가 없으리라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장자 의 말대로 우리는 "위시'를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 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오나라에서도 손이 트지 않게 하 는 약이 버려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얻게 될 테니까요. 위시에 서 인시로의 전환, 혹은 '비교되는 이것'이 '비교 불가능한 이것' 으로의 전환은 이렇게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 사유의 세계 는 삶의 세계로 열립니다. 그래서 장자는 위시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인시)'할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왜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길이라고 한다"고 강조했던 겁니다. 내 앞에 주어진 타자들을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것으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 운 것으로 긍정하라는 것! 그래야 우리는 타자에 가까이 가려는 걸음을 자기도 모르게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자 에만 적용되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것과 비교하지 말고 절대적으 로 긍정해야 합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 "나는 못생겼어." "나는 스펙이 부족해." 이것도 위시니까요.

- 노(魯)나라 군주를 만났는데, 그에게 근심하는 낯빛이 있었다.
시남 선생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 근심스러운 낯빛이십니까?" 노나라 군주가 말했다. "선대 천자들의 통치술을 배우고 선 대 군주들의 유업을 닦아 귀신을 공경하고 현인을 존중하고 배 운 것을 몸소 실천하기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지만, 우환을 면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남 선생이 말했다. "우환을 없애는 군주의 기술은 얕습니 다. 풍성한 털의 여우와 아름다운 털의 표범이 숲속에 살면서 바위굴에 숨어 있는 것은 그의 고요함입니다. 밤에 움직이고 낮 에는 머무는 것은 그의 경계함입니다. 비록 배고프고 목마를지 라도 숨어 있다 멀리 강과 호숫가에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그의 안정됨입니다. 그런데도 그물과 덫의 우환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가죽이 재난을 부른 겁니다. 지금 군주께 노나라는 그 가죽과 같은 것뿐 이겠습니까? 바라건대 군주께서도 육체를 도려내 가죽을 벗어 버리며 마음을 씻어 욕망을 없애버려 아무도 없는 들판에 노닐 도록 하십시오. 월나라 남쪽에 건덕의 국가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순진하고 소박하며 사사로움이 적고 욕망도 드뭅니다. 일할 줄은 알지만 저장할 줄은 모르고 남에게 무엇을 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의무가 어떻게 구분되 는지, 예식은 어떻게 수행하는지도 모릅니다. 멋대로 부주의하 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모든 경우에 품격이 있습니다. 살아서는 즐겁고 죽어서는 풍장을 좋아합니다. 바라건대 군주께서도 국가 를 떠나 사회를 버리고 길을 친구삼아 떠나십시오."
노나라 군주가 말했다. "그곳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고 또 강과 산으로 막혔는데, 내게는 수레도 배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 을까요?"
시남 선생이 말했다. “주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머 물지 않은 것을 배와 수레로 삼으십시오."
노나라 군주가 말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득히 멀고 아 무도 없는데 내가 누구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겁니까? 내게는 양 식도 없어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곳에 도달하 겠습니까?"
시남 선생이 말했다. "비용을 적게 쓰고 욕망을 줄이면 비록 양식이 없더라도 풍족할 수 있습니다. 군주께서 강을 건너 바다 에 떠가시면, 되돌아보아 바닷가가 보이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면 배가 어디에 이를지 모르게 될 겁니다. 군주를 전송하는 이 들이 모두 바닷가에서 되돌아갈 때쯤, 군주께서는 이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셨을 겁니다. 타인을 소유한 자는 그것에 연루되고, 타인에 소유된 자는 근심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타 인을 소유하거나 혹은 타인에 소유되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바 라건대 군주께서는 연루됨과 근심을 제거하고 홀로 길을 따라 크게 광막한 국가에서 노니십시오." 「산목」
-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Beckwith, 1945-)는 주저 중앙유 라시아 세계사(Empires of the Silk Road)』에서 말합니다. "유목민들 은 거대 농업 국가들의 농경민에 비해서 대개는 훨씬 쉽게 먹거 리를 구했고, 훨씬 편하게, 훨씬 오래 살았다. 중국 지역으로부 터 동쪽 스텝 지역으로 유출되는 인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들은 주저 없이 초원의 삶이 더 낫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례로 많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훈족이나 다른 중앙유라시아 민 족에게 넘어갔을 때, 그들이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살았고 더 좋은 대접을 받았다." 여기서 위드가 주목하지 못하는 것 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이 물질적 이익 때문에 유목생활에 뛰어 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종을 강요하는 체제를 거 부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내하고 유목생활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중앙유라시아에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스키타이의 길이 아니 라 반대의 길을 만들려는 사람들, 습격과 약탈의 도구가 아니라 탈주와 자유의 동반자로 말을 탔던 사람들입니다. 중앙유라시 아의 팽팽한 긴장, 스키타이의 삶과 진정한 유목민의 삶 사이의 긴장은 중국 대륙까지 파장을 미칩니다. 잊지 마세요. 중앙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초원길이나 사막 길은 실크 등 사치품들만 오 갔던 것이 아닙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기르는 방법도 오갔 던 길, 즉 국가의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그 길을 통해 유목국가나 유목제국마저 벗어던지려는 자유인들의 고뇌 와 꿈도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장자가 천하의 북쪽에서 자유의 공기를 느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기원전 300년경 중국 전국시대에 살았던 그는 영역을 넓혀가려는 영토국가의 야욕에 맞서고자 했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였으니까요.
- "우환을 없애는 군주의 기술은 얕다"고 평가하며, 시남 선생 은 노나라 군주에게 우환을 없애는 근본적인 방법을 제안합니 다. 그 핵심은 군주의 지위를 버리라는 것, 지배와 피지배로 구 성된 국가기구를 벗어나라는 겁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 기 위해 시남 선생은 "풍성한 털의 여우와 아름다운 털의 표범" 을 비유로 듭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경계해도 여우나 표범은 인 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의 털가죽 때문입니다. 사람 들은 값비싼 털가죽을 얻기 위해 여우나 표범을 사냥합니다. 결 국 여우나 표범은 자기 털가죽을 벗겨내거나 보잘것없게 훼손해야 합니다. 물론 여우나 표범이 그렇게 할 리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노나라 군주가 국가를 떠나거나 군주라는 지위를 버리 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여우나 표범이 자기 가죽을 스 스로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만큼 힘든 일일 겁니다. 그러 나 시남 선생이 제안한 근본 대책은 정확합니다. 국가라는 억압 사회가 작동하면 누구나 군주가 되려는 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구나 CEO나 대주주가 되려는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남 선생의 말대로 "노나라는 여우나 표 범의 가죽과 같은 것뿐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귀한 겁니다. 군 주의 자리는 모든 허영과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희소한 자리니 까요. 시남 선생은 노나라 군주에게 군주라는 지위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노나라 군주는 다른 국가나 혹은 내부 경쟁자 들의 사냥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육체를 도려내 가죽을 벗어버리며 마음을 씻어 욕망을 없애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남 선생은 노나라 군주를 격려하기 위해 저 남쪽 멀리에 있는 자유로운 공동체, 지배와 피지배라는 위계질서가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를 소개합니다.
바로 '건덕의 국가 [德之國]'로 불리는 마을입니다. '건덕 德)'은 매력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국가로 번역 한 '국(國)'은 국가기구를 상징하기보다 상형문자 전통대로 목 책 등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을을 가리킨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 니다. 시남 선생은 담담히 건덕지국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합 니다. "일할 줄은 알지만 저장할 줄은 모르고 남에게 무엇을 주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의무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예 식은 어떻게 수행하는지도 모릅니다. 멋대로 부주의하게 행동 하는 것 같지만, 모든 경우에 품격이 있습니다. 살아서는 즐겁 고 죽어서는 풍장을 좋아합니다." 
- 라틴어 코무니타스 (communitas)의 어원을 추적하면,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를 갖게 된다. 이 용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선물'이나 '의무'를 의미하는 무누스(munus)에서 유래한 말이다." 소수가 부나 권력을 독점하 지 않은 곳, 커먼과 무누스가 살아 있는 곳, 지배계급이 없으니 그들이 강요한 의무나 예식이 무력화되는 곳, 대다수가 비굴하 지 않고 인간의 품격을 유지하는 곳, 지배와 복종에서 자유롭기 에 삶이 누구나 즐거운 곳, 피라미드나 고분을 만들어 지배자의 위엄을 과시하지 않는 곳, 새나 짐승 혹은 벌레에게 시신을 맡 기는 곳. 바로 이곳이 코무니타스로서 매력을 세우는 마을입니 다. 노나라 군주가 이 코무니타스에 살게 되면, 그의 모든 고민 이 봄눈 녹듯 사라지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 "타인을 소유한 자는 그것에 연루되고, 타인에 소유된 자는 근심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임금은 타인을 소유하거나 혹은 타인에 소유되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누구도 지배하려 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말라! 지배와 복종이 없는 코 무니타스를 구성하라! 불행히도 시남 선생과 장자의 외침은 공 허하게 흩어집니다. 대붕이 훌쩍 날아갔던 그 남쪽 바다, 그 끝 은 이렇게 외롭게 방치되고 맙니다. 떠나면 죽을 것 같기에 떠 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 장자의 안타까움은 이렇 게 깊어만 갑니다. 대붕의 한숨입니다.

- 흔적을 끊기는 쉽지만, 땅을 밟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네.
인위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자연적 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어렵지.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을 거야.
앎으로 안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 안다는 것도 듣지 못했을 거고.
저텅 빈 곳을 보게! 빈방에서 밝음이 생기고, 상서로움은 고요함에 머물고 있네.
저 고요하지 않은 상태, 앉아서 달린다고 말하지.
이목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에서 앎을 쫓아낸다면, 귀신도 찾아와 깃들 텐데 하물며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간세」
-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걸어야 하는 지를 장자가 명확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인간세」 편에 있습니 다. 바로 '날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날개 비유 외에도 그 에 버금가는 시적 표현들로 충만합니다. 특히 걸어가는 일이고 독하리라는 느낌을 바로잡으려는 빈방]의 비유는 매력적입 니다. 빈방의 비유로 장자는 우리가 타자에게 가는 과정이 사실 타자가 내게로 오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사실 이 것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도 아는 일입니다. 멀리 있는 미루나 무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면 그 나무도 그만큼 조금씩 조금씩 내 게 다가올 테니까요. 반면 카프카의 성처럼 우리가 무언가에 다 가가면 갈수록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지 않아서 생기는 일입니다. 이는 걸어가 지 않은 경우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아내와 남편과, 애인과, 아들과 딸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관계가 호 전되기는커녕 악화되는 비극적인 상황이지요. 어딘가에 혹은 무언가에 가고 있지만 멀어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걷지 말고 멈추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아주 조금 걸어 보면서 내가 가려는 곳이 내게 다가오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바로 그 방향입니다. 한 걸음 내가 나아가면 한 걸음 내게 다가 오는 타자! 바로 그 방향으로 우리는 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걸어감과 관련된 이 모든 가능성들! 근사한 시 한 편으로 이 모 든 것을 담아낸 것이 바로 날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시를 음 미하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민감하게 이 이야기를 다루어 야 하는 이유입니다.
- 심연을 건너기로 작정한 사람을 다시 떠올려보세요. 그는 가 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 이쪽 절벽 끝에서 저쪽 절벽 끝으로 뛰 려면, 혹은 그 도약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지고 있는 짐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무거운 배 낭뿐만 아니라 두꺼운 외투마저 버리고 가벼움과 경쾌함을 얻 어야 합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심연은, 심연 건너편 저쪽 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네가 내게로 오려면 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바로 여기서 '날개가 없음'을 뜻하는 '무 익)'과 '알지 못함을 뜻하는 '무지'가 '날개를 없앰'과 '앎을 없앰'이라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로 심화됩니다. 날 개나 앎마저 없애야 가벼움을 얻을 수 있다는 장자의 투철함입 니다. '없앰'을 뜻하는 '무)'라는 글자는 곧바로 우리를 '비움' 을 뜻하는 허(虛)라는 글자에 이르게 합니다. "저 텅 빈 곳을 보 게! 빈방에서 밝음이 생기고, 상서로움은 고요함에 머물고 있 네." 이사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 전개지(之)가 주(周)나라 위공(公)을 만났다.
위공이 말했다. "나는 신(腎)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축신과 함께 배웠다는데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전개지가 말했다. "저는 비를 들고서 뜰 앞에서 시중을 들었 을 뿐이니 스승님으로부터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위공이 말했다. “선생은 너무 겸손하시네요. 나는 듣고 싶습니다."
전개지가 말했다. "저는 스승님께서 '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중 뒤처진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 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걸 듣기는 했습니다."
위공이 말했다. "무슨 뜻인가요?"
전개지가 말했다. "노(魯)나라에 선표(單)라는 사람이 있었 는데, 바위굴 속에 살고 골짜기 물을 마시며 민중들과 이익을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70세가 되어도 어린아 이 같은 안색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행하게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호랑이에게 잡아먹혀버렸습니다. 또 장의 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높은 문을 가진 귀족의 집이든 문 대 신발을 사용하는 민중의 집이든 달려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 다. 그러나 나이 40세에 몸 안의 열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선표 는 그의 안을 길렀으나 호랑이가 그의 바깥을 잡아먹어버렸습니 다. 장의는 그의 바깥을 길렀지만 병이 그의 안을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그중 뒤처진 놈을 채찍질하지 않은 겁니다." 「달생」

- '사물 중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사물 중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스스로를 저것이라고 여기면 (이것은)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를 이것이라고 여기면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으 로부터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따른다고 말한다.'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동시에 생기는 것은 동시에 죽는 것이 고 동시에 죽는 것은 동시에 생긴 것이며, 동시에 허용되는 것은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것은 동시 에 허용되는 것이다. 옳음을 따르는 것이 그름을 따르는 것이고 그름을 따르는 것이 옳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저 것과 이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견해를 따르지 않고 사물을 '자연스러움 (天)'에서 비추어 보는데, 이 또한 인시(因是)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 또한 하나 의 시비(是非)고,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다. 그렇다면 저것과 이 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자기 짝을 얻지 않는 경우를 '길의 지도리라고 부른다. 지도리는 처음부터 그 '원의 중앙'을 얻어야 무한한 것에 대응한다. 그렇게 되면 옳음도 하나의 무한이 되고, 그름도 하나의 무한이 된다. 「제물론」
- 문이 닫힐 때 안과 밖은 구 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이 열릴 때 안과 밖의 구분 은 해체됩니다. 여기서 문이 문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적 특 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을 여닫는 걸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근사한 경첩, 바로 지도리, 추樞) 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문 이미지는 지도리 예찬으로 근사하게 마무리됩니다. "저것과 이것이 자기 짝을 얻지 않는 경우를 '길 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른다. 지도리는 처음부터 그 '원의 중앙 [中]'을 얻어야 무한한 것에 대응한다." 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고 타자가 내게 들어올 수 있으니, 이쪽과 저쪽이나 이것과 저것, 혹은 이런 대립과 관련된 옳고 그름도 일의적으로 정해 질 수 없습니다. 장자가 "옳음도 하나의 무한이 되고, 그름도 하 나의 무한이 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나가본 적이 없기에 막 연히 바깥쪽이나 저쪽 혹은 타자라고 상상했던 것들을 어느 꽃, 어느 바람, 어느 여자, 어느 남자, 어느 비바람으로 생생하게 마 주치게 될 겁니다. 타자를 이해하는 길이 문 안쪽에서 바깥쪽으 로 열리는 거죠. 반대 상황도 가능합니다. 문이 만들어졌기에 바 깥쪽의 타자를 안쪽으로 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바깥 쪽이 안쪽으로 열리는 환대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타자를 이해 하거나 환대하는 것, 즉 문을 여는 일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 다. 어쩌면 나를 파괴하려는 타자와 단호히 단절하는 것, 즉 문닫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장자가 문을 벽처럼 사유했던 혜시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했던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문턱에 서서 장자는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닫히는 문만이 열릴 수 있 다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장자는 숙고합니다. 닫아야 할 때 닫을 수 없는 문,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는 문. 경첩이 부서진 문들입니다. 문턱에 서서 장자의 사유는 이렇게 깊어만 갑니다

- 예()는 아주 작은 표적이라도 활로 맞추는 데 능숙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 성인은 '자연적인 것'에 능숙하지만, '인위적인 것(ᄉ)'에는 서툴다.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직 벌레만이 벌레일 수 있고, 오직 벌레여야 자연적일 수 있다. 완전한 인간 은 자연적인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적이라고 여 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 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상초」
- 천하 바깥 그 자유의 공간이 거의 사라진 시대, 대붕이 되어 천하를 비웃으며 천하의 북쪽으로 그리고 천하의 남쪽으로 날 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입니다. 억압과 허영의 세계는 인간 의 자유를 부단히 감시하고 저주합니다. 대붕으로 자랄 조짐만 보여도 아이들을 메추라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대붕은 단지 비 현실적인 꿈이라는 선전도 횡행하고요. 대붕들은 점점 날개를 접고 몸을 움츠리며 멍한 눈으로 석양을 바라볼 뿐입니다. 다 행히도 장자에게는 대붕이 되는 길 외에 소충이 되는 길도 있 습니다. 무한히 커지는 길만큼 무한히 작아지는 길도 중요합니 다. 작디작은 벌레처럼 되어야, 그것도 누구의 눈에도 띄어서는 안 되는 미세한 벌레가 되어야, 자유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자유를 구가할 수 있습니다. CCTV에도 잡히지 않는 벌레 와 같은 자유인들이라고 무시하지는 마세요. 그들은 언제든지 모여서 거대한 자유의 군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 들은 흩어져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의 마지막 열 번째 화 살을 말입니다. 쏘지 못한 예의 열 번째 화살, 혹은 마지막 태양을 맞히지 못하고 비껴가 어느 땅에 박힌 그 열 번째 화살은 어 디에 있을까요? 바로 이 화살을 찾는 날, 소충들은 거대한 떼로 모일 겁니다. 활에 그 마지막 화살을 장전해 하늘의 태양에 쏘 려면 불가피한 일입니다. 대지를 감시하는 뜨거운 하늘의 눈, 그 마지막 태양이 사라져야. 모든 초목과 짐승 그리고 인간은 어둠 속의 별들처럼 자기 빛을 뿜어낼 수 있습니다. 예가 꿈꾸던 세 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올 겁니다. 그날은 언제일까요? 예의 마 지막 화살이 거침없이 하늘의 태양을 향해 나아갈 그날! 대붕이 다시 날갯짓을 시작할 그날!

-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맹손재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곡은 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고 마음속으로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장례를 지낼 때도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 가 없음에도, 그는 노나라에서 장례를 잘 치른 자로 명성을 떨쳤 습니다. 그 내실이 없는데도 그런 명성을 얻는 경우가 실제로 있 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정말로 그것이 이상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맹손재는 죽음과 장례에 대한 앎을 넘어 그 것을 모두 실천한 사람이다. 장례를 간소히 치르려 해도 뜻대로 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미 간소히 한 것이 있다. 맹손재는 태어난 이유나 죽는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변 화에 따라 하나의 사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장차 변화한다 면, 어떻게 변화하지 않음을 알겠는가? 장차 변하지 않게 된다 면, 어떻게 이미 변화했었음을 알겠는가? 단지 나도 그렇지만 너도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는 몸이 망가지더라도 마음을 소모하지 않았고, 몸을 떠나려 해도 죽음에 신경 쓰지 않는다. 맹손재만이 홀로 깨어난 사람이 다. 다른 사람들이 곡할 때 그 또한 곡을 했는데, 이것은 사람들 이 그렇게 한 것을 따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나라고 여 기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 내 가 아님을 알겠는가? 너는 너 자신이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 다고, 혹은 너 자신이 물고기가 되어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 다고 꿈꿀 수 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나도 깨어 있는 자인지 아 니면 꿈꾸고 있는 자인지 모르겠구나!" 「대종사」
- 태어난 이유는 죽는 이유는 "왜?"라는 의 문을 던진다면,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야 맹손 재가 왜 "태어난 이유나 죽는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는 삶을 긍정했던 사람, 지금 잠시 머무는 삶, 어머니와 함께한 삶을 향유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태어나기 전의 상태나 죽은 뒤의 상태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도 없는 거죠. 당연히 어떻게 사느냐의 여부나 어떻게 죽느냐의 여부 중 무엇이 중요한지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도 충분히 근사하지만, 지적인 독자들에 대한 노파심에 장자는 사족을 하나 붙입니다. "변화에 따라 하나의 사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장차 변화한다면, 어떻게 변화하지 않음을 알겠는 가 장차 변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이미 변화했었음을 알겠 는가?" 인식론적 설명입니다. 살아서 변화를 겪고 있다면 어떻 게 태어나기 전의 상태나 죽은 뒤의 상태를 알 수 있겠냐는 이 제 죽어 더 이상 변화를 겪지 않게 되면 어떻게 살았을 때의 상 태를 알 수 있겠냐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맹손재는 태어나서 자 신이 겪은 모든 변화를 긍정했던 사람입니다. 늙어도 그것을 젊 음의 부재로 생각하지 않고 다리가 잘려도 그것을 다리의 부재 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여기서도 유목민적 감수성이 빛을 발합니다.

- 재경이 나무를 깎아서 악기 받침대를 만들었다. 받침대 가 만들어지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의 솜씨와 같다며 놀라 워했다. 노나라 군주도 악기 받침대를 보고 재경에게 그에 대해 질문했다. "너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만들었는가?"
재경은 대답했다. “저는 비천한 목공인데, 무슨 별다른 방법 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받 침대를 만들 때 저는 기를 소모하는 일 없이 재계하여 마음을 고 요하게 만듭니다. 3일 동안 재계하면 치하의 상이나 작록 등에 대한 기대를 마음에 품지 않게 됩니다. 5일 동안 재계하면 비난 과 칭찬, 그리고 숙련과 거침이라는 평가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됩 니다. 7일 동안 재계하면 문득 나 자신에게 사지와 몸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국가의 위세에 대한 두려운 생각 이 마음에서 없어지게 되고 안으로는 마음이 전해지고 밖으로는 방해 요인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다음에 저는 산림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성질을 살피는데, 그러면 나무들의 몸이 하나하나 제게 다가옵니다. 그 후 완성된 악기 받침대를 떠 올리도록 만드는 나무 한 그루가 마음에 들어와야 저는 손을 대 서 자르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결코 나무에 손 을 대지 않습니다. 저의 역량과 나무의 역량이 부합되니, 제가 만든 악기 받침대를 귀신이 만든 것 같다고 하는 이유도 아마 여 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달생」
- 남자 주인공 재경과 여자 주인공 나무는 스스로 주인공임을 유지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존중한 채, 사랑의 피륙 을 짜기 시작합니다. 재경은 말합니다. "저의 역량과 나무의 역 량이 부합된다以天]"고 말이죠. 그 결과 "귀신이 만든 것과 같은 악기 받침대가 탄생합니다. 당근을 원하고 채찍을 피하려 는 복종에의 욕망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죽음에 대 한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도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 했던 겁니다. 군주도, 세상 사람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 한 갈망마저 조연이 되어야 합니다. 재경과 나무가 주인공이 되 어 근사한 아이를 잉태하고 생산할 수 있으려면 말입니다. 그 래서 재경의 악기 받침대는 주인공의 품격을 고스란히 가지게 되고, 표절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성(originality)과 권위 (authority)를 갖추게 됩니다. 진정한 권위는 앵무새가 아니라 작 가(author)에서 온다는 윤편 이야기의 통찰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재경의 악기 받침대는 자유의 증거, 주인의 증거, 사랑의 증 거였던 겁니다. 노나라 군주는 악기 받침대가 예술의 경지에 이 른 것을 찬탄하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그는 알까요? 자신의 찬 탄은 재경과 나무가 두 명의 주인공이 되는 것에 대한 긍정이라 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유일한 주인을 자처하는 군주로서 의 자기 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나라 군주는 재경이라는 소 인에게 자유를 인정하고 나무 각각의 고유성을 긍정할 수 있을 까요? 아마 힘들 겁니다. 재경을 주인공으로 긍정하는 순간, 노 나라 군주는 더 이상 재경과 같은 피지배계급을 노예처럼 부릴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서 노나라 군주는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 다. 재경의 악기 받침대를 찬탄해서도 안 되고, 찬탄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요. 바로 이 대목이 장자의 재경 이야기가 빛나는 지점입니다. 이제야 장자가 장인들에 집중한 이유가 분명해집 니다.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둘의 경험입니다. 국가주 의를 벗어나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입니다.

- 습지의 꿩!
열 걸음 걷다 한 번 먹이를 쪼고,
백 걸음 걷다 한 번 물을 마시네.
울타리 안에 갇혀 길러지는 걸 바라지 않지.
신(神)이 울타리 안에서 비록 왕과 같을지라도
이것은 좋지 않은 일이니까. 「양생주」
- 2,500년 전 장자가 권력의 유혹에 대처한 방식은 인상적입니 다. 장자는 재상이 되면 소인들을 위한 국가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혹은 자신이 재상이 되면 최소한 소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보다 높아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 니다. 그는 이미 대붕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붕에게는 좁은 세계 를 만드는 담장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좁은 세계를 떠나버리는 것,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대붕이 날개를 접 고 자신의 거대한 몸을 작은 호랑이굴에 쑤셔 넣을 수 있겠습 니까? 그러니 장자에게 초나라 군주의 제안은 유혹조차도 되지 않습니다. 장자의 확고함은 그가 기회를 살려 대부 두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기는커녕 장자는 이미 거의 들어가 있는 대부 두 사람마저 호랑이굴에 서 빼내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갑골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 인 대목입니다. 권력의 맛을 본 두 사람마저 영토국가라는 협소 한 세계를 벗어던지는 대붕으로 만들어버리려 하니까요. 나무 를 베어 죽여야 그걸로 서까래나 대들보를 만들 수 있는 법입 니다. 국가권력도 그 대상이 지배계급이든 피지배계급이든 인 간의 자유와 능동성을 박탈해야 그들을 부릴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살아 있는 거북'과 '죽은 거북의 등껍질'을 이야 기하는 겁니다. 살아 있는 거북의 등껍질로는 점을 칠 수가 없 습니다. 살아 있는 거북을 죽이고 등껍질을 칼로 도려낸 다음 그걸 잘 말려야 합니다. 그래야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종교 도구 가 되니까요. 불에 던져 근사한 균열을 얻으려면 이런 잔인한 조치는 불가피한 법입니다. 물론 군주는 등껍질을 그야말로 아 끼고 사랑합니다. 그 껍질을 "상자에 넣고 비단보로 싸서 묘당 안에 소중하게 간직할 정도니까요.

- 효자는 부모에게 아첨하지 않고 충신은 군주에게 아부하지 않 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신하와 자식이다. 부모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부모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아들이라고 한다. 군주의 말은 무엇이든 긍정하고 군주의 행동은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못난 신하라고 한 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해당 됨을 모르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긍정하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 은 자신을 아부꾼(道人)이나 아첨꾼(人)이라고 말하지 않는 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정말로 부모보다 더 권위가 있고 군 주보다 더 위엄이 있다는 것인가! 자신을 아부꾼이라고 하면 세 상 사람들은 불끈 화를 내고 자신을 아첨꾼이라고 하면 세상 사 람들은 왈칵 화를 내지만, 그들은 평생 아부꾼이자 평생 아첨꾼일 뿐이다. 적절한 비유를 모으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해서 대중 을 끌어모으지만, 시작과 끝, 근본과 지엽은 서로 모순될 뿐이 다. 근사한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도 착용하고 표정과 몸짓을 바꾸어가며 동시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신이 아부한 다거나 아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저 세상 사람들 과 무리를 지어 옳고 그름을 따르지만 자신이 대중 가운데 한 명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최고의 어리석음이다.
자신이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지는 않고, 자신 이 미혹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니다. 크게 미 혹된 사람은 죽어도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사람은 죽어도 깨닫지 못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한 사람이 미혹되어도 목적지에는 이를 수 있는 것은 미혹된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미혹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미혹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온 세상이 미혹되었기 때문에 내가 설령
아무리 방향을 알려준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으니, 너무나도 슬픈 일 아닌가! 「천지」
- 삼인행 이야기가 서늘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장자 가 묘사한 섭섭한 세계가 2,000여 년 전 중국 전국시대에만 국 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한 치의 어 긋남 없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를 붕괴시키려는 도 대신 한 단계라도 그 상층부로 올라가려는 경쟁 논리만이 팽 배한 것이 문제입니다. 피지배계급이 자신을 잠재적 지배계급 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을 잠재적 자본가로 오인하면서, 지배자 와 피지배자 혹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근원적 억압 형식이 은폐 되고 맙니다. 군주제에서 대의제로의 이행은 억압 형식이 스스 로의 생명을 영속화하는 가장 세련된 형식을 찾았음을 의미합 니다. 민중의 혁명으로 특정 군주가 축출되는 걸 방치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특성 군주와 함께 군주라는 형식도 폐기될 수 있으니까요. 나쁜 군주든 좋은 군주든 문제는 군주라는 형식 자 체에 있다는 걸 민중은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혹 은 국가주의자는 셀프 혁명을 만들어냅니다. 다수 피지배자들 이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선거라는 사이비 혁명으로 지배계급 이 먼저 군주를 바꾸어버리는 거죠. 군주라는 형식을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입니다. 선거에 의한 군주 변경, 대통령제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물론 대통령 후보는 지배계급의 일원이거나 지배계급이 간택한 사람입니다. 지배계급이 통제 가능한 혁명, 합법적인 혁명, 지배와 피지배라는 형식은 결코 침해되지 않는 보수 혁명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으나 아무나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기만적 지배 형식이죠. 이것은 물론 누구나 대자본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대자본가가 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도플갱어 (doppelganger)입니다. 자본과 국가 사이 의 은밀한 지배는 이렇게 공명하면서, '작은 대통령' '작은 국회의 원' '작은 자본가' '작은 CEO'의 시대를 열었죠. 대통령이, 국회의 원이, 그리고 CEO가 바뀌는 현란한 저글링 속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와 복종 형식은 편안히 숙면을 취한다는 게 중요 합니다. 하도 빨리 내용물이 바뀌니 형식은 생각할 겨를도 없고, 심지어 형식이 항상 새로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겁니다.

- 남백자규가 여우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데도 안색이 마치 어린아이 같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나는 길에 대해 들었습니다."
남백자규가 말했다. "길은 얻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 복량의卜)는 성인의 소질은 있지만 성 인의 길은 없고, 나는 성인의 길은 있지만 성인의 소질은 없습 니다. 내가 성인의 길을 가르치고자 하면, 아마도 그는 진짜 성 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성인의 길을 성 인의 소질이 있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쉬울 거예요. 그 에게 알려주고서 내가 그를 지켜보면, 그는 3일이 되어 천하를 도외시할 거예요. 그가 천하를 이미 도외시한 뒤 내가 그를 지 켜보면, 그는 7일이 되어 외물을 도외시할 겁니다. 그가 이미 외물을 도외시한 뒤 내가 그를 지켜보면, 그는 9일이 되어 삶을 도외시할 거예요. 이미 삶을 도외시한 뒤 그는 '아침이 열리는 것(朝)'처럼 될 겁니다. 아침이 열리는 것처럼 된 뒤 그는 '단 독적인 것을 볼見獨)' 거고요. 단독적인 것을 본 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없앨 수 있겠죠. 과거와 현재를 없앤 뒤 그는 죽지도 않 고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 들어갈 겁니다." 「대종사」
- '홀로 걷는 여자', 여우에게서 우리는 말을 타는 전사의 당 당함을 떠올려야 합니다. 여우는 억압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온갖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전통 가부장제 속의 여성과는 다 릅니다. 그녀가 "나이가 많은데도 안색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 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 을 때 일어나는 여성, 여성에게 강요되는 온갖 의무들로부터 자 유로운 여성, 바로 그녀가 여우였습니다. 그녀가 억압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위대하다는 것은 분명합니 다. 그 또한 자유로운 전사를 꿈꾸던 남백자규가 여우에게 배움 을 청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길은 얻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달리 여우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남백자규에게는 성인, 즉 자유인이 되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소 질이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여우는 여기서 그치 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선언에 남백자규가 좌절이라도 할까 걱 정하듯, 여우는 복량의倚)라는 남자의 사례를 통해 성인이 되는 길을 남백자에게 알려주니까요. "저 복량의는 성인의 소 질은 있지만 성인의 길은 없고, 나는 성인의 길은 있지만 성인 의 소질은 없습니다. 성인의 길을 가르치고자 하면, 아마도 그는 진짜 성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직접적 가르침이 아니라 간 접적 가르침입니다. 자유는 강요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는 여 우의 통찰입니다. "길은 얻어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라는 남 백자규의 의문 자체가 그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증거입 니다. 자유는 누군가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 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여우가 말하 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겁니다. 누군가에 의지해 자유로우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자유에서 멀어지게 되니 까요. 자유는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 없고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다는 여우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 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은 모두 노여워했 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제안 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 이름과 내용이 어긋나 지 않았지만 노여움과 기쁨이 작용한 것 또한 인시(因)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음과 그름'으로 갈등을 완화하지만 '자연 스러운 물레(天)'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行)'이라 고 한다. 「제물론」

-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는 못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애태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었던 젊은 남자들은 그를 사모해 떠나지 못했고, 그를 보고 부모에게 '다 른 사람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어요'라고 간청하 는 젊은 여자들이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더군 요. 그렇지만 일찍이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고,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호응했을 뿐이죠. (...) 제가 그를 불러 살펴보니 정말 온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못생겼더군요. 저와 함께한 지 몇 달이 되기도 전에, 저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 게 되었고, 한 해가 되기도 전에 저는 그를 신뢰하고 말았습니 다. (...) 결국 저는 나라를 그의 손에 맡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 아 그는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것 처럼 실의에 빠졌고, 더 이상 이 나라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공자가 말했다. “(...) 그는 분명 소질은 완전하지만 덕은 드러 나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
애공이 물었다. "소질이 완전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 난과 부유함, 능력과 무능함,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 위와 더위, 이것은 모두 사태의 변화이고 부득이한 움직임이어 서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사유로서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로 마음의 조 화를 어지럽히거나, 이런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어서는 안 되죠.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고 즐겁게 하여, 타자와 소통해도 즐거 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연속성에 틈이 없도록 타 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하니까요. 이것이 타자와 마주치는 순 간마다 마음에 그에 맞는 때를 생성시키는 겁니다. 이런 상태가 공자가 말했다. “(...) 그는 분명 소질은 완전하지만 덕은 드러 나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
바로 '소질이 완전하다'는 말의 의미죠."
애공이 물었다. “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공자는 대답했다. "고르다는 것은 최고로 물이 안정되어서 표본이 될 만한 상태를 말하죠. 안으로부터 잘 보전되고 밖으로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이라는 것은 조화로움을 이룬 결 과물입니다. 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에게서 타자는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 법이죠." 「덕충부」
- 『장자』 내편 중 다섯 번째 편은 「덕충부」 편입니다. '덕충부' 라는 말은 "매력이 충만한 징표"라는 의미입니다. 아니나 다를 까, 이 편에는 우리에게 소요유, 즉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르 쳐주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불 쌍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르쳐주지 도 않습니다. 그저 그들은 우리 옆에서 자유인의 삶을 살아냅 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 곁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겁니다. 맞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그들의 날갯짓이 만드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면 우리의 가슴은 자유의 희망으로 부풀어 오를 겁니다.
- 기쁨을 주는 사람이나 장소에게 애태타는 슬픔과 우울을 주 지는 않습니다. 슬픔과 우울은 존재를 파괴하는 힘이라는 걸 알 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할 때 상대방이 슬퍼하거나 우울하다 면, 그는 나를 떠나거나 시들어 죽어갈 겁니다. 결국 나의 기쁨 도 유쾌함도 그와 함께 꺼져버리고 말겠죠. 그래서 '소질이 완 전하다', 즉 재전(全)의 뜻을 설명해주는 마지막 대목에서 장 자는 말합니다.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롭고 즐겁게 하여, 타자 와 소통해도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연속성에 틈이 없도록 타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하니까요. 이것이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마다 마음에 그에 맞는 때를 생성시키는 겁니다." 자유인에 대한 최고로 멋진 찬사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장자의 찬사는 아침 해에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이슬처럼 '타자와 함께 봄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한 네 글자 '여물위與物爲春)'에 맺 힙니다. '~와 함께'라는 뜻의 '여(興)', '타자'나 '외물'를 뜻하는 '물(物)', '되다'라는 뜻의 '위)', 그리고 '봄'을 뜻하는 '춘(春)' 으로 구성된 문장입니다. 누가 장자 사유의 핵심을 묻는다면, 이 네 글자의 문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물위춘!"

- 공자가 여량이라는 곳을 관광하고 있었다. 그곳폭포는 삼십 길이나 되었고 그 물거품이 사십 리나 튈 정도로 험해 자라나 물고기 등도 헤엄칠 수 없는 곳이었다. 한 사나이가 그곳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자마자 공자는 그가 고뇌가 있어 자살하려 한 다고 판단해 먼저 제자들을 보내 물가를 따라가 그 사나이를 건 지게 하였다.
그 사나이는 수백 보의 거친 물길을 지나 물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머리카락이 물결에 풀어진 채 노래를 부르며 둑 바로 아래 잔잔한 물에서 헤엄쳤다.
공자도 그를 따라가 물어보았다. “나는 그대가 귀신인 줄 알 았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네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군. 물을 건너는 데 길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네."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없네! 내게는 길이 없네. 나는 과거 ()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어 명령을 이루고 있네. 물 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나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물속에 서 밀어내면 나도 같이 밀려 나오지. 물의 길을 따를 뿐,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네. 이것이 내가 물을 건너는 방법이야." 그러자 공자가 물어보았다. “과거에서 시작했으나 삶에 깃들 어 명령을 이룬다는 그대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 사나이가 대답했다. "내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했 던 것이 과거이고, 내가 물에 깃들어 물에 편해진 것이 삶이고, 어 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명령이야." 「달생」

- 장자가 곧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고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별들을 다양한 구슬로, 그리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네. 내 장례용품에 어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겠 는가?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려 하는가!"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까 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주려고 하 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열어구」
- 죽음을 앞둔 장자는 자신이 가난한, 그래서 순수한 유목민의 정신을 품고 살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고 분은 아니더라도 작은 분묘를 만들려고 하자, 장자는 제자들에 게 자신은 매장이 아니라 조장을 선호한다고 피력하지요. 빈 배 이야기에서 자기를 비우고 세상을 소요하라고 강조했던 장자 다운 생각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 그건 '가난한 유목민'이 되어야 자유인으로 순수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자 의 모든 이야기 중 가장 극적인 임종 이야기가 조장이라는 유목 민의 장례를 긍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착농경을 하던 중국인들에게도 고분을 만드는 매장은 때늦은 장례 형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장례를 뜻하는 장(葬)이라는 글자의 갑골문이나 소전체가 그 증거입니다. 나무판에 시신을 올 린 다음 풀을 덮고, 그 판을 나무 위나 풀 위에 올려놓은 형상 입니다. 아울러 갑골문을 보면 사(死)라는 글자가 나무판에 올 린 시신을 묘사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死)나 장(葬)이라 는 글자에 반영된 장례 형식은 매장이 아닙니다. 조장까지는 아 닐지라도 풍장(風葬)은 분명합니다. 그러던 것이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에서도 고분을 만드는 매장이 지배적인 형식으로 변한 겁니다. 여기서 고분이 지배와 복종이 영속화된 정착사회, 즉 영토국가의 상징이라는 걸 상기해야만 합니다. 바 로 이것이 장자가 조장을 택한 이유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날까 지, 아니 숨이 끊어진 뒤에도 국가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지 를 버린 장자였습니다.

- 옛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 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 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 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 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物化)'고 말한다.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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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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