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인문 2020. 12. 7. 20:02

- 최초의 문명은 왜 다른 지역이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역 에서 만들어졌을까? 농업혁명의 탄생 이유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문명이 발생하려면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가 만들어 져야 하는데 문제는 사람이 모여 살게 되면 전염병이 돈다. 전염병이 돌 면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안 되기 때문에 모여서 살 수 없고 도시가 붕 괴된다. 우리는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을 통해서 이와 비 슷한 일을 경험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우루크 같은 곳은 건 조기후여서 전염병이 돌지 않는 장점이 있다. 예방주사가 없고 특별한 위생 시설도 없는 천연 상태에서 박테리아성 질병이나 바이러스성 전 염병의 유행에 가장 강한 내성을 가진 지역은 건조한 기후대 지역이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과정을 연구했는데, 비가 내리면 땅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흙과 함께 발포 상태가 되고 그것이 옆으로 이동하면서 바이러스가 전파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 왔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세균의 증식뿐 아니라 바이러스의 전파 에도 취약하다. 반대로 건조한 기후대는 비가 잘 안 오기 때문에 전염 병에 강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건조 기후대는 전염병에는 강하지만 물이 부족하다. 물이 없으면 인간이 모여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은 특이하게도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조건을 가 지고 있다. 두 문명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의 하구이면서 건조 기후대에 위치한 문명이다.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같은 거대하고 긴 강은 상류와 하류의 기후대가 다른데, 강의 상류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빗물이 강을 따라서 하구의 건조한 지역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들은 전염병 없이 그 물로 농사를 짓고 마시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자연이 만들어 준 천연의 상수도 시스템이 되었다. 덕분에 최초의 문명 도시 우루크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 하구의 건조 기후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 인류가 최초에는 수렵과 채집을 해야 했기 때문에 숲에서 살았 다가, 점차 수렵과 채집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농업으로 이전될수록 경사진 숲에서 조금 낮은 구릉지로 내려오게 되고, 완전히 농업으 로 전환하면서부터는 경사가 더 완만하고 물이 풍부한 강가의 낮은 지 대에 마을을 만들고 거주하게 됐다. 농업 경제에 기반을 둔 마을이 저 지대에 위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농업으로 형성된 인류 최초의 마을은 저지대에 자리 잡았을 테지만, 그런 마을들은 13000년 동 안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대부분 물속에 잠겼을 것이다. 그래서 중동이 나 중국을 비롯한 각 문화권마다 홍수 설화가 많은 것이다. 그중 성경 속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그러다가 기원전 5000년경에 해수면 상승이 멈췄고, 이후 1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이 안정적으 로 모여 살게 됐고, 기원전 3500년이 되어서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도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최초의 도시가 기원전 3500년에 만들어지고 난 후 본격적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 수렵 채집과 농업의 가장 큰 차이는 농업은 추수한 농작물 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 었고, 그에 따라 계급이 생겨났다. 더 많은 땅과 인구수는 더 많은 부를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인간은 집단의 크기를 키우고 땅을 차지 하기 위해 더 많이 싸우게 됐고, 사회 조직력이 커지면서 도시국가가 만 들어졌다. 그리고 남는 재화를 저장하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문자가 생겨났다.
- 벼농사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많은 물을 다뤄야 하기에 치수 를 위한 토목 공사가 많이 필요하다. 물을 담는 작은 저수지인 '보'를 만 들어야 하고 모내기도 집단으로 모여서 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저수 지나 다른 사람의 땅에서 사용한 물을 내 논으로 내려 받아서 사용하고 다시 그 물을 물길을 내어서 이웃의 땅으로 전달해 주어야 한다. 벼농사 에서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물을 함께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사용해야 만 한다. 시기를 놓치면 농사가 어려운 품종이기 때문에 노동의 형태도 집단적으로 집중해서 심고 태풍이 오기 전에 집중적으로 추수하는 형식 을 띤다. 이러한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벼농사 지역은 자연스럽게 공동 체 의식과 집단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다. 벼농사는 옆에 있는 이웃 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지을 수 없다. 다른 말로, 이웃과 잘 지내지 않으면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 벼농사 지역에서의 삶이다.
- 탈헬름 교수는 농사 품목이 가치관을 결정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재미난 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중국 한족 학생 1,162명을 상대로 ‘기차, 버스, 철길을 세 가지 중에서 같은 종류끼리 묶으라는 문제를 냈다. 중국은 대륙이 크기 때문에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는 비가 많이 내려서 벼농사를 짓고, 북쪽으로 가면 비가 적게 내려서 밀 농사를 짓는다. 이 실험에서 중국 내 밀 농사를 짓는 지역 출신의 학 생은 '기차와 버스를 하나로 묶은 반면,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학생은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는 비율이 높게 나왔다. 벼농사를 짓는 지역 의 사람들은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를 생각하면서 개체 간의 '관계'에 집중해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었고, 밀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관계 가 아닌 각 개체가 가진 성질의 공통점을 찾아서 교통수단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버스와 기차'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같은 역사적 배경과 같 은 유전자적 특징을 가진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농사 품종에 따라 서 가치관의 차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비슷한 실험으로 자신의 크기를 동그라미 그림으로 그리라는 질문에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이 밀 농사 지역의 사람들보다 자신을 나타내는 원을 작게 그렸다. 심리학자는 자 신을 나타내는 원을 작게 그리는 것은 개인인 '나'보다는 '우리'라는 집 단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실험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원을 가장 작게 그렸다고 한다. 같은 벼농사라고 하더라도 일본은 섬나라라는 제한적인 공간 내에서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적기 때문에 지금 속한 집단이 절실하게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기후는 건축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초의 문명은 건조 기후대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 문명에 속한 우루크의 집들은 진흙 벽돌로 벽을 세워서 만들었고 지붕은 평평한 모양이었다.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에 지붕은 그다지 중요한 건축 요소가 아니었다. 대신 벽은 영역을 구분하고 지붕을 받치기 때문에 중요한 건축 요소였다. 주변의 외적으로 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대한 성벽도 세워야 했다. 기원전 8500년 경에 지어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 유적물인 '괴베클리 테페'도 엄밀 하게 보면 지붕은 없고 벽만 있는 건축이다. 이처럼 최초의 건축 요소는 '벽'이었다. 수메르의 문명과 건축 기술이 북서쪽의 유럽으로 전파되었는 데, 이때 비가 적게 내리는 유럽의 밀 농사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벽돌이 나 흙을 이용한 벽 중심의 건축이 계승되었다. 바뀐 점이 있다면 유럽은 수메르의 건조 기후대보다는 비가 더 많이 내렸을 테니 지붕에 약간의 기울기를 두어서 빗물이 흐르게 하는 정도였다. 반면, 벽 중심의 수메르 건축 양식이 동쪽으로 전파되었을 때는 그 기술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 게 된다. 왜냐하면 극동아시아에는 장마철에 집중 호우가 내리기 때문이 다. 집중 호우가 내리면 땅이 물러지게 되어서 벽돌 같은 무거운 재료로 만든 벽은 옆으로 넘어가 집이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동양의 일부 북쪽 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건축 재료로 가벼운 목재를 사용해야 했 다. 목재를 사용하게 되면 다 좋은데, 물에 젖으면 썩어서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땅과 만나는 부분에는 방수 재료인 돌을 사용하여 주춧돌 을 놓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다. 나무 기둥이 비에 젖으면 안 되기 때 문에 처마를 길게 뽑아서 비에 맞지 않게 지붕 디자인을 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지붕의 경사를 급하게 만들어서 빗물이 잘 흐르게 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지붕을 덮는 방수 재료로 흙을 구워서 만든 기와를 사용했다. 그런데 기와는 무겁기 때문에 지붕을 받치 는 기둥이 더 굵어야 하고, 기둥 재료도 더 비싼 큰 나무를 써야 한다. 기 와로 만든 지붕은 무겁고 기둥도 더 굵어져서 집이 전체적으로 더 무거워 졌다. 주춧돌 같은 좁은 면적의 기초를 가지게 되면 기둥이 침하될 수 있다. 따라서 더 많은 무게를 땅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더 넓은 기초가 필요 하다. 이런 경우에는 더 많은 돌을 써서 넓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기와를 사용하면 건축비뿐 아니라 토목공사비가 더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돈이 많은 부자일수록 더 큰 주춧돌과 더 높은 기단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때 가장 큰 주춧돌을 가진 건축물은 무엇일까? 왕이 사는 '경복궁의 경회루'다.
- 벼농사 지역과 밀 농사 지역의 건축은 다르게 발전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게 진화했다. 밀 농사 지역은 벽 중심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지붕을 받치고 있는 벽에 창문을 내 려고 구멍을 크게 뚫으면 집이 무너진다. 그래서 창문의 크기가 작다. 게다가 유리가 대량 보급되기 전에는 창문을 유리창이 아닌 나무로 만 든 문으로 가려야 했다. 유리창은 고딕 성당 같은 엄청나게 비싼 건축물에나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집 안에서 창문으로 바깥 경치를 볼 수 없었다. 서양 건축의 대표적인 창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투명한 창문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에서 서양의 건축 공간은 내부와 외부가 벽으로 확연히 나뉘는 공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안에서 밖을 볼 일이 없으니 건축 디자인을 할 때에도 밖에서 건물 을 바라보는 시점에 더 중점을 두고 디자인하게 된다. 이것이 서양 건축의 입면 디자인이 화려하게 된 이유다. 창문의 비율도 중요하고, 각 종 조각으로 건축의 입면을 꾸몄다. 실내에 들어가서도 바라볼 경치가 없기 때문에 그림과 조각으로 실내를 과도하게 꾸몄다. 그에 반해 전 통적인 동양의 건축은 입면을 디자인할 때 서양만큼 신경 쓰지 않았다. 동양의 건축물을 보면 건물의 입면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지붕 이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서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기 때문에 방수를 하는 지붕이 가장 중요한 건축 요소였다. 비가 많이 내리니 빠른 배수 를 위해서 지붕의 기울기가 급하다. 그러다 보니 앞에서 바라보면 지붕 이 건물 입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난방 시스템이 무거은 돌로 만든 온돌이어서 2층짜리 집이 없었다. 그래 서 건물을 지으면 건물 입면에서 지붕이 절반을 차지한다. 지붕을 제하 고 난 건축물의 입면은 그저 지붕을 받치기 위한 나무 기둥이 있을 뿐 이다. 동양은 나무 기둥을 이용해서 건축되었는데, 기둥 구조는 지붕을 받치기 위한 벽이 필요 없다. 그러다 보니 기둥과 기둥 사이는 뻥 뚫린 개방감을 갖기 쉽다. 게다가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가 있었기에 유리가 보급되기 훨씬 전부터 창문을 크고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여름 철 더울 때에는 통풍을 위해서 창문을 접어서 들어 올려 처마 밑에 걸기 도 했다. 자연스럽게 벽이 없는 건축이 된다. 비가 오더라도 처마가 길게 가려 주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 놓아도 비가 들이치지 않아서 창문 을 열고 바깥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처마 아래에는 툇마 루를 만들어서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을 수도 있다. 동양 건축에서는 이렇게 내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감이 발달하게 되었다. 동양은 안 에서 밖을 보는 일이 일상이었고, 집의 내부와 바깥 경치의 관계가 중 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경관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건축물의 배 치를 결정한다. 안에서 밖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건축 디자인의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 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 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 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행 동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 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 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 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 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 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 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강수량 차이로 인해서 서양 은 독립된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 하는 사회가 되었다. 두 문화의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조금 더 비교해 보자.
- 서양에 많은 사상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후배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그는 고대 지식인들의 성지라고 불린 밀레토스에서 가까운 작은 섬 사모스에서 태어났다. 피타고라스는 섬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먼 거리라고 할 수 있는 중 동 지역까지 여행을 했다. 중동 여행의 경험과 당시 그리스의 문화적 패 러다임이 피타고라스를 수학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수가 형태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서양의 생각에 지대한 영 향을 끼친다. 우리는 지금 피타고라스를 수학자로 이해하지만 당시의 피타고라스는 수학자 겸 종교 지도자였다.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집단생활을 했고, 내부적으로 지식을 공유했던 특이한 집단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음계를 수학적으로 정의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첼로 같은 현악기에서 특정 줄의 음을 낸 후에 그 줄 전체 길이의 2분의 1 지점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소리 내면 두 소리가 화성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3분의 1 지점을 누르고 소리 내도 화성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이 음이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완전 5도다. 우리가 음악에서 듣기에 아름 답다고 느끼는 것을 숫자로 규명한 사람이 피타고라스다. 흥미로운 부 분은 피타고라스 이후 초기의 사상가들이 수학을 대하는 자세의 차이 다. 서양의 모든 사상가가 처음부터 수학을 생각의 중심에 둔 것은 아 니었다. 소크라테스는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 는 질문하고 답하는 산파술'이라는 대화 기법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전형적인 문과생이다. 그는 수학을 멸시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 인 플라톤은 다르다. 플라톤은 20대에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독배를 마시고 세상을 떠난 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유 명한 수학자들과 친교를 나누었는데, 키레네(현 리비아 동부) 출신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테오도로스로부터 기하학을 배웠고, 이집트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사귀었다. 이에 따른 영향으로 그는 수학을 멸 시했던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수학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피타 고라스의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색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종교적인 부분을 삭제하고 수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는 관점만 받아들였다. 플라톤은 “수학은 세계를 이해하고 기술하는 최 적의 언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원자가 정사각형이나 정삼각형같 이 기하학적이라고 믿었다. 플라톤은 원소인 물, 불, 흙, 공기가 모두 3차 원 기하학 도형이라고 믿었는데, 흙은 정육면체, 공기는 정팔면체, 물은 정이십면체라고 믿었다. 문과생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라톤은 다분히 이과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인류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해서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특이한 점은 이 학교에는 수학에 기초가 없는 사람은 입학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학교 입구에는 “기하학 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현대 양자 이론의 대가인 카를로 로벨리의 저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 니다』에 의하면 플라톤은 수학을 공부한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보이는 천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수학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겠는지 물어 보 았다고 한다. 플라톤의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플라톤 학파의 에우독소 스Eudosox(BC 390~ BC 337)가 연구했고, 여러 학자를 거쳐서 프톨레마이 오스Ptolemaeos(83?~168?)에 의해서 완성되어 비로소 수학적인 천문학 체계가 시작되었다.
- 서양의 문화는 양식이라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의 반복을 통해서 공간을 만들어 가는 형식이다. 이는 마치 체스에서 각각의 말들이 다른 형태의 규칙과 위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양식 혹은 규칙을 만들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것이 서양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동양의 나무 기둥과 보를 가지는 구조 양식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 다. 다만 건물은 놓인 대지의 조건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반응하면서 건 물의 배치를 변화시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상대적인 공 간을 연출해 왔다. 물론 여기에도 풍수지리 같은 보이지 않는 규칙은 존재했지만, 그 풍수지리라는 규칙도 물과 산과 사람의 상대적인 관계에 관심의 초점이 있다. 이렇듯 동양 건축은 양식보다는 상대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왔다.
- 서양인들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다. 이 단어는 우주를 뜻하기도 하는 funiverse'와 같은 의미다. 'universe'는 cosmos'와 동의어다. 그런데 'cosmos'는 '규칙' 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해서, 반대말은 '불규칙'을 뜻하는 단어인 'chaos'다. 서양 언어 속 단어 의 상관관계를 보면 '공간', '우주', '수학', '규칙'은 같은 범주에 속한 것 임을 알 수 있다. 서양인의 머릿속에 공간은 수학적 규칙을 갖는 것이 라는 관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서양의 공간은 다분히 수학 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반면,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의 한자 공(空)’과 사이라는 뜻의 한자 간(間)’이 합성된 단어다. '사이'라 는 것은 두 개의 개체가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간(間)'은 둘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과 '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공간을 뜻하 는 단어 하나만 살펴봐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집트나 중국이나 둘 다 강 주변에 서 농사지으면서 살던 사람들인데 왜 유독 이집트 사람들만 형이상학 에 몰두하고 동아시아의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았을까? 이유는 물줄기 의 방향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 인데 이집트인들은 북쪽의 하류에서 살았다. 강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 니 상류와 하류의 기후대가 다르다. 상류에서 폭우가 내려도 하류에서 는 비가 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류에서의 홍수는 급작스럽게 닥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 사건의 원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데서 찾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별자리를 보면서 앞으로 다가올, 땅에서 의 홍수를 예측했다. 별자리의 모양이 특정 기하학적 형태를 띠면 어김 없이 홍수가 나타난다는 규칙을 발견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규칙이 땅의 형이하학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중국 문명의 근원 인 황하는 동서로 흐른다. 아무리 길어도 강이 비슷한 위도에 위치하기에 비가 많이 오는 우기가 같다. 게다가 황하나 양쯔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강의 하구가 동쪽에 위치한다. 그런데 계절풍 이 가져오는 비구름은 주로 동에서 서로 이동한다. 그러다 보니 큰비는 강의 하구부터 내리는 경우가 더 많았고, 중국인들은 범람의 원인 을 주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중국의 황하 문명은 현실에서의 원인을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주로 벼농사를 짓다 보니 관계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나일강같이 남북으로 흐르는 베트남 메콩강의 경우에는 왜 이집트 문명 같은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문명이 만들어 지지 않았을까. 이유는 메콩강은 남북으로 흘러도 상류나 하류나 둘 다 같은 열대 기후대이기 때문이다. 메콩강은 나일강처럼 다른 기후 대에 걸친 강이 아니다. 우기가 오면 강의 상류나 하류나 모두 비가 내 린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처럼 범람의 원인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생 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으로 흐르고 다른 기후대 에 위치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미시시피강에서는 왜 문명이 크게 발전 하지 못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책에 의하면 북아메리카 대륙은 지리적인 이유에서 농업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인류의 여정은 수렵 채집을 하면서 아프리 카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동쪽으로 이동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류가 넘어가게 된 시점은 빙하기 때다. 이때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은 시기여서 현재의 베링해는 육지였고 빙하로 덮여 있던 시절이다. 이때 잠시 날이 따뜻해져서 빙하가 녹았을 때 그 길을 따라서 사냥감 을 따라 이동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들은 남북 방향으로 긴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해야 했다. 남북으로 긴 아메리카 대륙은 위도가 바뀔 때마다 기후가 달라져서 농업이 전파되 기 불리한 조건이었다는 것이 다이아몬드 교수의 설명이다. 그래서 영 국이 미국을 식민지로 만들 때까지도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농사를 통한 국가 형성보다는 버팔로를 잡으면서 사는 수렵 채집의 부족 사 회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미시시피강은 다른 기후대에 걸쳐서 남북으로 흐르기는 하지만 대륙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아시 아처럼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지금도 미시시피강의 하류에 위치한 뉴올리언스에는 정기적으로 허리케인이 덮친다. 그래서 뉴올리언스는 남북으로 흐르는 미시시피강 하구에 있고 이집트의 룩소르, 메소포타 미아의 우루크와 비슷한 북위 32도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문명이 발생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 없었던 멕시코와 남미 지역에 마야나 잉카 문명이 유라시아대륙보다 한참 늦 게 문명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가 전파한 세균에 의해 붕괴되었다.
- 우리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디자인을 통해서 설계자 김대성의 머릿 속을 엿볼 수 있다. 김대성의 설계는 반대되는 것의 병치를 추구한다. 우선 토함산을 기점으로 동쪽에는 땅을 파내서 공간을 만드는 방식처럼 보이게 하여 음의 공간인 '석굴암'을 만들었고, 서 측에는 반대로 기둥과 보를 쌓는 구축 방식으로 양의 공간인 불국사'를 건축했다. 불 국사 경내에 들어가면 마당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보인다. 다보탑은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상 가장 화려한 디자인의 석탑인 반면, 석가 탑'은 미니멀한 디자인의 극치다. 두 개의 탑이 아사달이라는 한 작가 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이처럼 김대성은 반대되는 것 을 한 쌍으로 만든다. 서로 반대되는 음과 양을 병치해서 조화를 이루 게 한다는 것은 도교 사상의 핵심이다. 도교는 음양의 조화로 세상을 이해한다. 따라서 실제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교를 위한 건축물이 지만 건축 배치와 설계의 원리에는 도교 사상이 깔려 있다. 이처럼 통일 신라의 문화는 상당한 복합 문화'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불국 사는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보여 주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이 같은 다양한 문화의 융합이 가능했던 것은 통일 신라의 수도가 경주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는 한반도 남단의 바닷가에 가깝 게 위치해 있다. 위치상으로 대륙에서 오는 문명과 해양에서 전파되어 서 오는 문명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바다를 통해서는 기하학 적인 서양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서 석굴암'을 디자인했고, 음양의 병치를 보여 주는 배치 개념은 중국 대륙을 통해서 들어온 도가 사상 의 영향을 받아서 디자인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석굴암' 이후 불교 사찰에 기하학적인 공간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통일 신라 이후에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의 수도가 개성에 있었기 때문 인 것으로 보인다. 대륙과 해양의 접점에 있었던 통일 신라의 경주와 달리 개성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대륙의 영향력이 상대 적으로 더 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국가의 중심축이 해양과 멀어지면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가 융합을 이룰 수 있는 모멘텀을 잃게 되었다. 물론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 건축가의 상상일 뿐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배경은 현대의 역사까지도 지배한다.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이념과 자유주의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은 과거 시베 리아와 중국 대륙을 통해서 북한으로 전파된 이념이다. 반대로 자유주의 이념은 남쪽 바닷길을 통해서 전파되어 경상도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지형은 아직도 유효하다.
- 도자기를 통해서 중국식 문화가 서양에 전파되었다. 유럽은 계속해서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당시 중국 왕조는 이를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했고 도자기 대금으로 받은 멕시코산 은으로 현재의 우리가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을 복원했다. 당시 도자기 생산은 황실에서 독점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청와대가 삼성 반도체 공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징더전景德鎭이라는 중국의 도자기 생산 주 요 기지가 있었는데 가마가 1천 개 있었고, 연간 400만 개의 도자기를 생산할 정도였다. 하지만 1601년 징더전 도기공들의 노사 분규를 시작 으로 1675년 만주 반란군에 의한 파괴 등 17세기 들어서 여러 차례의 민란으로 징더전의 도자기 공장은 점차 파괴되었다. 서양의 도자기 수입 회사는 중국을 대체할 도자기 공급선이 필요했고, 그 기회를 틈타서 일본이 도자기 수출의 교두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이 이렇게 수출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보다 상업이 발달한 데는 건축적인 이유가 있다. 전작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설명 했듯이 일본은 지진 때문에 온돌이라는 난방 시스템을 쓰지 못했고, 덕 분에 목조 건축이지만 2층 이상의 주거를 지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 밀화된 도시를 만들 수 있었고, 덕분에 주변에 물건을 사 줄 사람이 많 아서 상인들이 돈을 벌수 있었으며 이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 계 층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온돌 때문에 단층짜리 집만 짓고 살았던 조선은 고밀화된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주변에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적었기에 상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5일장을 통해서만 상업 행위가 이루어졌다. 매일 시장이 열리는 사회와 닷새에 한 번 시장이 열리는 사회는 화폐 통화량에서 5배의 차이가 난 다. 화폐 통화량이 5분의 1 적으면 상업으로 새롭게 돈을 벌 기회도 5분 의 1이 된다. 5일장의 사회에서는 상인이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조선 시대 사회 계층의 순서는 사농공상'으로, 상인이 가장 대우를 못 받았 다. 조선은 국운을 바꿀 만한 엄청난 도자기 수출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 음에도 높은 인구밀도의 도시가 없었고 그에 따라서 제대로 된 상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일본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 건축은 언제나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다. 그러면서 만들 어진 문화 유전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그 지역 고유의 문화 유전자와 섞이게 된다. 15세기에 삼각돛을 단 범 선의 등장으로 공간이 더 압축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양 극단에 위치 했던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유전적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16세기 중국 산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17세기에는 동양 철학 책들이 유럽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18세기에는 조경 디자인이 바뀌었 고, 19세기에는 이 변화가 미술로 전파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건 축에서 문화적 이종 교배의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 사고의 패 러다임이 바뀌는 순서를 작고하신 한태동 교수(연세대학교)의 논지로 풀면, 가장 먼저 미술에서 변화가 생겨나고, 음악, 철학, 건축의 순서로 일어난다. 건축이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이유는 위의 여러 가지 문화적 결과물 중에서 건축이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경에서 시작해서 미술까지 적용된 이후에나 건축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건축이 바뀌기까지는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 새로운 생각은 서로 다른 것이 만나서 융합할 때 이루어진다. 보통 이 런 다른 생각들은 충돌하고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이 새 로운 생각으로 통합되면서 문화는 한 단계 발전한다. 모순을 새로운 이론으로 화합시키는 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과학이다. 카를 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 의하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상에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서 규칙을 찾아 낸 갈릴레오'의 생각과 '아주 거대한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한 케플러’ 의 연구를 합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전기에 대 한 연구’와 ‘자기에 대한 연구'를 합쳐서 전자기 방정식을 완성했다. 아 인슈타인은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 해서 특수 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그리고 ‘뉴턴의 역학과 자신의 특 수 상대성이론' 사이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이처럼 역사상 뛰어난 생각은 모순되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화합시키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한 일도 이와 같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산업혁명의 시대로, 새로운 재료와 기술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다. 동시에 이들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공간 압축이 이루어지고 다른 지역의 문화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세대이기도 했다. 과거에도 장 거리 여행을 통해서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마르코 폴 로 같은 상인들이 동방견문록을 쓰던 시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들은 상업을 주업으로 하던 사람들이었고, 직접 그 지역에 가야지만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국제 무역을 하는 상인들만 그런 문화적 체 험이 가능했다. 하지만 식민지와 산업화의 시대를 살았던 미스와 코르뷔 지에는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고도 쉽게 다른 지역의 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산업화가 만든 새로운 기술도 접했다. 두 거장이 이룬 업적은 '새로운 기술'과 '다른 지역의 문화 유전자'를 섞은 것이다. 그들은 공간의 구축 방식으로 기둥 구조라는 동 양의 수천 년 된 아이디어를 사용하고 거기에 최신 철골이나 철근콘크리 트 기술을 합쳐서 새로운 근대 건축의 장을 열었다.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명의 건축가가 유럽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유럽은 무역을 통해서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 었다. 게다가 유럽은 산업혁명의 발생지로 산업화 기술이 만들어지는 곳 이기도 하였다. 그런 조건상에서 수입된 동양의 문화 유전자와 유럽의 기술혁명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미스와 코르뷔지에의 공간이다. 15세 기 대항해 시대의 시작부터 19세기까지의 문화 교류가 있었기에 20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미국 대 륙과 아시아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미스와 코르뷔지에 가 신기술과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섞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건축가 두 명은 콘크리트 기술 위에 동양의 문화 유전자와 서양의 기하학적 성격의 문화 유전자를 섞은 건축가들이다. 한 명은 20세기 후반 최고의 건축가 로 일컬어지는 루이스 칸Louis Kahn(1901~1974)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1941~)다. 20세기 전반부에는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유럽 에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냈다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한 명은 북 아메리카에서, 한 명은 아시아에서 화답을 했다.
- 나는 위대한 건물은 '잴 수 없는 것unmeasurable'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잴 수 있는 것measurable'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는 잴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루이스 칸)
루이스 칸은 건축의 본질상 물질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잴 수 있는 것'을 통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하지만 건축의 처 음과 끝은 결국 잴 수 없는 것'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칸이 말하는 잴 수 없는 것은 노자가 말하는 '이름 없는 것'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道를 말하는 것이고, 잴 수 있는 것은 '이름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가치는 측량하거나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라 믿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 측량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건축을 통 하는 것이라는 루이스 칸의 생각은 다분히 노자스럽다. 칸은 침묵하는 동양의 보이드 공간을 서양의 기하학적인 틀에 성공적으로 맞춰 넣 은 건축가다. 루이스 칸은 20세기 후반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는다. 그가 그렇게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 하고 융합하는 능력에 있다. 코르뷔지에와 미스가 서양 건축가로서 근 대의 새로운 기술에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융합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 다면, 루이스 칸은 현대식 건축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서양 전 통 건축, 도가 사상, 유대 민족 문화까지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문 화적 유전자를 섞어서 융합시킨 건축가였다. 특히 20세기 전반을 거치 면서 사라졌던 서양의 전통 문화 유전자를 복원하여 사용한 점은 그 의 독특한 성취다. 솔로몬의 문양 역시 오랜 과거의 문화 유전자다. 미스나 코르뷔지에가 한 융합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의 문화 유전자를 빌려 쓰는 공간을 뛰어넘는 융합 능력'이라면, 루이스 칸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문화 유전자를 도입하는 '시간을 뛰어넘는 융합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간을 초월한 융합 능력'이 칸을 위대한 건축가로 만든 것이다.
- 복잡한 진입로는 일본 전통 건축의 공간 구조적 특징이다. 일본 전통 건축은 그 안에서 경험하는 사람에게 기대감을 극대화하고 긴장감을 주기 위해 진입로를 특별하게 디자인해 왔다. 예를 들어서, 다도를 하는 방은 집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하며, 그곳에 가기 위해서 보 통은 '로지Roji'라고 불리는 정원을 통해서 가게 되어 있다. 이 정원을 통과하면서 방문객은 몇 개의 문을 거쳐야만 했다. 일본이 이런 디자인을 하는 이유는 귄터 니츠케Gunter Nitschke의 '시간이 돈이고, 공간 이 돈Time is Money - Space is Money' 이라는 글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미 전작에서 자주 설명됐지만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이처럼 단순하 고 명료하게 설명한 것은 없기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다. 그의 주장 에 의하면 미국과 같이 공간이 넘쳐 나는 지역에서는 시간이 더 중요 하기 때문에 시간 거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건축이 발전해 왔다고 한 다. 고속도로가 대표적인 예다.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발전한 건축 시스템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 같은 섬 나라에서는 공간이 부족하고 시간은 오히려 남는다. 이런 경우에는 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건축이 발전해 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같은 면적의 공간이라도 이동 시간을 늘 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면 많은 기억이 남게 되고, 따라서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 정원의 경우, 좁은 공간을 넓 게 인식되게 하려고 분절되고, 회전하고, 돌아가는 식의 장치를 만들 어서 시간을 지연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같은 공간이라도 실제보다 더 넓게 인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의 교회에서 그대 로 적용된다. 물의 교회는 복잡한 진입 시퀀스를 통해서 단순한 상 자형 본당이지만 마지막에 그 장면이 주는 느낌은 그냥 본당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첫 장면 보고 엔딩을 본다고 해서 영화를 다 봤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위해서 보통 두 시간 정도의 다채로 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주요 장면 이전에 이야 기의 전개가 중요한데, 그것을 가장 잘하는 공간 이야기꾼이 안도 다 다오다. 그의 이런 재능은 다음 작품인 '바람의 교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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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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