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쾌락 자체는 현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힘이 전혀 없다. (.....) 행복은 결코 목표가 되면 안 되고,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 없으며 단지 결과일 뿐이다.
이로부터 빅터 프랭클은 중요한 사상을 전개했는데, 그것은 그가 발전시킨 실존 철학적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이제부턴 '내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선 안 되고]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 프랭클은 삶이란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에 답변할 때에만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빅터 프랭클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에 대답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도구로 적극적인 행위와 타인을 향한 애정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함한) 아름다운 감동의 체험을 꼽았다. 그러면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한 사람에게는 사랑받 은 체험(경험을 포함)이 남아 있고 행동을 초월해 세계를 수동적으 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 자살을 시도하다 구조돼서 생명을 건진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자기 머리에 총을 쏘려고 차를 타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려 했다고요. 당시는 때늦은 밤이었고 전차도 끊 긴 터라 그는 택시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택시 타는데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는 죽음을 앞둔 마당에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죽기 직전 돈을 아까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살을 결심한 사람에겐 무의미해 보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삶 속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인간의 이러한 자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어느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잠들어 꿈을 꾸었습니다.
삶은 기쁨인 듯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았지요.
삶은 의무였습니다. 
나는 일했고 이제는 알아요. 
그 의무가 기쁨이었다는 걸
- 이제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잘못됐다는 것도 압니다. 흔히들 질문받는 것처럼 질문한다면 말이죠.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없고 - 인생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 답변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대답해야 하는 자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물음, 생사의 문제에 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삶 자체는 질문을 받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존재는 모두 인생에 대답하는 것, 책임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생각에서 보면 미래는 있건 없건 우리를 더는 놀라게 하지 못합니다. 현재가 전부이고, 현재야말로 끝없이 새로운 삶의 물음을 감추고 있기 때문 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 우리에게 닥치는 운명은 좋든 싫든 반드시 그 모습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하지만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동으로는 인내로는 더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란 없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 운명을 바꾸거나, 필요하다면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불행을 겪으면서 내적으로 성장할 뿐입니다. 또 시인 횔덜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 이 '불행에 발을 내디딜 때 더 높이 우뚝 서네' 하고 노래한 의미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라. 그리고 지금 하려는 행동이 첫 번째 생에서 잘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라!!
- 삶 자체는 질문받는 것,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삶의 현존을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과된 것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의 과제입니다. 이로부터 삶은 힘들수록 더욱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과제를 찾는 등반가 같은 운동선수는 스스로 어려운 일을 만듭니다. 절벽에서 등반가는 오르기 어려운, 더 힘든 '변수'를 발견할 때마다 얼마나 희열을 느끼는지 아십니까! 여기서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종교인은 삶의 감정, '존재의 이해 안에서 삶을 과제로 이해하는 사람들보다 한 걸음 더 멀리 내딛 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경건한 사람은 과제를 대할 때 자신에게 과 제를 내주거나 자신을 과제 앞에 세운 절차로 받아들입니다. 종교인은 삶을 거룩한 사명으로 체험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인생의 가치에 관한 물음은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헤벨Christian Friedrich Hebbel, 1813∼1863 의 말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기회다!!”
- 한번은 수용소에서 제가 어린 시절에 알던 여성과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몹시 비참한 상태로 위독했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기 며칠 전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운명에 감사해. 이전에 여유로운 중산층의 삶을 살 때는 심미적 열망이 있긴 했어도 전혀 진지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을 겪었지만 행복해. 이젠 모든 것에 진지 해졌고, 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줄 수 있고, 보여 줘야 하니까.” 
이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은 전에 알던 모습보다 훨씬 더 밝았 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인 릴케가 모든 인간에게 바랐거나 모든 인 간을 위해 소원했던 것, 자신의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 그녀에겐 가능했습니다. 삶 전체에 죽음을 의미 있게 삽입하는 것, 죽어 가면 서도 인생의 의미를 충족하는 것, 그것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삶의 전체 의미 안에서 죽음의 유의미성을 그대로 보도록 시각을 전환함으로써, 병들고 죽어 가는 순간도 단순히 잃는 것과 얻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데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거의 모두 견디어 낸다. (니체)
‘왜’는 삶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는 강제 수용소 생활을 매우 힘들게 했던 삶의 조건들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왜, 무엇 때문 에’와 관련해서만 견딜 수 있었습니다.
- 책임을 깨닫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백하는 일은 어렵습니 다. 책임에 그리고 삶에 '예'라고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온 갖 어려움에도 '예'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독일 바이마르 근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은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예 라고 말하려 하네” 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들이 노래할 때는 단지 노 래만 부른 게 아니라 많은 것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수용소에 있는 수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조건에도 그것을 행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 로 말할 수 있는 내외적인 조건 속에서 말입니다. 이전과는 좀처럼 비교할 수 없는 지금의 평온한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할 수 는 없을까요? 삶에 '예'라고 말하는 것은 온갖 상황에도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 온갖 상황에서 가능하기도 합니다.
-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 운명을 바꾸거나, 필요하다면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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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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