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십년 동안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1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1), 13~15쪽.
- 자기 자신을 더는 경멸할 줄 모르는 더없이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고 있다. (1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5), 27쪽)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1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3), 19쪽.)
-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지를. (1부 〈세 가지 변신에 대하여〉, 43쪽.)
-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있으려면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2부 행복의 섬에서, 158쪽.)
- 살아 있는 자를 발견하는 곳, 그곳에서 나는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시중을 드는 자의 의지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 211쪽.)
-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3부 치유되고 있는 자 2), 390쪽.)
- 삶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이 최고의 희망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최고의 희망이 삶에 대한 최고의 사상이 되게 하라! (1부 (10.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87~88쪽.)
-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이여, 우월한 인간이란 없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4부 〈우월한 인간에 대하여 2), 502~503쪽.)
- 여기 지상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지금 웃고 있는 자에게 화 있을지어다!” 라고 한 그자의 말이 아니었던가. 그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는 우리 웃는 자들도 사랑했을 것이다!! (4부 우월한 인간에 대하여 16), 515쪽.)
-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에서조차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 자신의 고유한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면서 자신의 최고 유형을 희생하는 삶에의 의지,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우리가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를 회피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긍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이중적이라는 것. 니체가 고산지대에서 정신을 수 련하고 고독을 즐겼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서 늘 산 정상과 끝모를 심연이 등장합니다.
심연이란 무엇일까요? 유럽에 가서 호수를 보면 완전히 검게 보일 정도로 깊어서 그 끝을 알 수 없죠. 그것을 심연이라고 하잖아요. 심연은 불가해한 것,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 수 없고 규명할 수 없는 것, 악마와 같은 것 등이죠. 인간의 내면에는 고산의 청명하고 명랑한 빛만이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것도 존재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천사만이 아니라 악마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천사가 악마를 죽이면 해결될까요? 그렇게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요. 이 양면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가는 것, 그것은 자신의 몰락을 바라는 것이며 자신 을 경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예요.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간 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멸할 만한 것을 발견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절대 극복하지 못합니다.
-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그리고 더 바람직 한 것은 차라투스트라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 이제 그대들 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여러분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의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고민하고 성찰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어디선가 다시 여러분을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살펴봤습니다.
- 일본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中島義道)는 《니체의 인간학》에 서 21세기에는 “신형 약자들이 득실거린다고 주장합니다. 나카지마는 니체의 관점에서 히키코모리(폐쇄은둔족)나 사토리 세대를 비 판한 학자로 유명한데요. 신형 약자는 고전적 약자에 비해 생명력 이 현격하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숙도도 몹시 낮은 단계 에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전통 시대의 고전적 약자는 정신이나 신체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약한 사람이에요. 장애인, 고아, 과부 셋을 꼽습니다. 전통 시대에서 가장이 없다는 점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문제와 같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명력은 무척 강했죠. 어떻게든 생존해서 자손들을 잘 살게 만들려고 했습 니다.
반면 신형 약자는 그것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고전적 약자는 특유 의 중후함이나 오만함으로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고 했는데, 신형 약자는 자신이 옳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책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설령 자신이 겪는 문제가 사회적 문제임에도 변화를 요구할 용기가 없다는 겁니다. 그 책임을 전부 자신에게 돌리죠. 나 카지마는 이런 태도라면 누구도 자기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도중에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벌벌 떨거나 멈추어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동정이 결합되어 있다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모순을 극복할까요?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물이라고 일컫는 두 동물이 있어요. 독수리와 뱀입니다. 독수리는 자부심이 강한 짐승으로 하늘을 날아다니죠. 우 리가 추구할 수 있는 목표의 높이를 상징해요. 인간이 가진 정신적 영역을 상징합니다. 뱀은 무척 영리해요. 아담과 이브를 꼬실 정도 로 대단한 짐승이잖아요. 뱀은 땅에서 기어다닙니다. 우리가 겪어야 하는 수많은 심연의 깊이를 잘 알고 있는 존재가 뱀이에요. 궁극적 으로 우리의 몸, 물질을 상징하는 거죠.
우리가 자신을 극복하려면 정신과 물질을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뱀이 독수리의 목을 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여자 친구가 목을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독수리와 뱀이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이 니체의 초인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초인의 과제는 이 땅의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모순을 감당할 수 있을지입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 초인의 길에 적힌 핵심적 과제는 다음과 같은 문장입니다. “더러 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니체는 초인을 바다에 비유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 립을 내면에 품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초인입니다. 이것이 니체 가 초인 사상을 통해서 행복에 집착하는 마지막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에요.
진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러 진리가 있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해요. 따라서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견뎌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을 때 우리가 초인이 된다는 점, 이것이 이번 강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으려고 이웃에게로 가고, 또 다른 사람은 자 신을 잃고 싶어서 이웃에게로 간다. 그대들 자신에 대한 그대들의 그릇된 사랑은 고독을 감옥으로 만든다.”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는 사람은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너무 분리되어 자신의 내면 세계로 침전하며 성처럼 살아가는 사람 역시 진정한 의미의 고독을 향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 게 들려주는 교훈입니다.
- “벗은 그대들에게 이 대지의 축제요, 초인을 예감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대는 벗의 내부에 있는 초인을 그대의 존재 이유로서 사랑해야 한다.”
자기 극복에 도움이 되는 자, 함께 삶을 창조할 수 있는 자. 이런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고통스럽게 고독을 견뎌낼 줄 알아야 하죠. 이것이 우리가 시장을 떠나고 국가를 떠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 《차라투스트라》 1부에는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와 〈저편 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가 나오는데요. 이 부분은 철학적으 로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니체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천국을 꿈꾼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덕성을 갖추려면 고 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통 없이는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니체의 관점이죠.
“고통과 무능, 이것이 모든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가장 고통을 당하는 자만이 경험하는 저 짧은 행복의 망상이 그런 세계들을 만들어냈다.”
- 이제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세 가지 변 신은 몸을 가진 존재가 이 세상을 살며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서술합니다. 우리가 초인이 되는 과정은 '나는 어떻게 내가 되는 지'를 찾는 경로입니다. 1888년 니체가 정신적으로 몰락하기 직전 에 쓴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가 바로 '나는 어떻게 내가 되 는가?' 예요. 여러분은 본래의 자기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본래의 자기를 찾으려고 노력하시죠? 
니체는 2000년 동안 이어진 서양의 전통을 뒤틉니다. 널리 알려 진 것처럼 서양철학은 유명한 신탁으로부터 시작해요. '너 자신을 알라.’ 이 명제가 서양철학의 기원이거든요. 어떻게 나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인식론의 문제가 되죠. 그런데 니체는 이것을 기원전 5세기의 극작가 핀다로스의 말을 통해 살짝 바꿔놓습니다. 어떻게 사람은 본래의 자기가 되는가?' 어떻게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지를 다루는 거예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데,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핵심과 가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전혀 다른 문제에 도달하는 거죠. 자신이 되려면 끊임없이 바뀌어 야 한다는 점을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말합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 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 가 되는가를”
니체는 정신을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아이의 단계로 나눕니 다. 마치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모습 으로 변신하는 거죠. 몸이 완전히 바뀌고 전혀 다른 종류의 생명체 로 진화하는 모습을 세 가지 단계로 이야기합니다.
- 세 가지 변신 중 첫 번째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낙타가 스스로 던지는 질문은 '나에게 제일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입니다. 낙타가 어 떤 동물인지는 잘 알 겁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동물, 무거운 짐을 싣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동물, 복종하면서 황야를 걸어가 는 동물이 낙타입니다. 그래서 낙타는 강하고 인내력 있는 정신을 상징해요. 낙타 단계의 덕성은 바로 잘 참아내는 인내력입니다.
낙타 내면의 도덕적 법칙을 영어로 표현하면 you should'예요. 이것을 행해야만 한다는 도덕적 명령이죠.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등입니다. 하면 안 된다. 는 것이 너무 많죠. 도덕적 복종을 의미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많이 있다. 이 강력한 정신, 인내력 많은 정신의 내면에는 외경심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낙타의 단계를 극복하려면 이 단계에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인내력을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참을 줄 알 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정말 무거운 짐은 무엇인지 시험 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요? 노동일 수 도 있고, 주어진 과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삶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무거운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다 보면 각자 대답이 다를 수 있습니다.
- 그다음은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자유 정신을 의미하죠. 최고의 권력자,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야수, 원하면 약탈해서라도 갖고자 하는 정신이 사자입니다. 사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내가 중심이에요. 사자의 단계에 오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 다. 아이들도 성장하다 보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방문을 걸어 잠그잖아요. 그걸 절대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자의 단계로 진입하는 거예요. 이를 거부하고 문을 열라고 요구하면, 아이를 영원히 낙타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 단계를 거치고 나야 나중 에 스스로 문을 열어놓습니다.
사자에게 내면화된 도덕적 법칙은 'I will' 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어 해요. 파괴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파괴해야 하는가?' 입니다. 파괴의 대상을 올바르게 설정할 줄 알아야 사자의 덕성을 실현할 수 있어요. 아무거나 파괴하면 어떻게 될까 요? 소위 사춘기의 무조건적 반항이 가져올 부정적인 결과를 우리 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자의 정신은 자유를 원합니다.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신이 일어난다. 여기서 정 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 사자의 단계만 해도 우리는 상당히 많이 성장했어요. 하지만 니체의 요구는 한 단계 더 높습니다. 바로 아이의 단계입니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다. 그 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 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자가 자기의 의지를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님 때 비로소 도달하는 단계, 그것이 바로 아이의 단계입니다. 
아이는 삶의 시작이죠. 삶을 즐기듯이 놀아요. 특별한 놀이 기구가 없어도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놀이 규칙을 만드는 존재가 아이 입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놀이 기구가 없더라도 정말 재미있게 많은 놀이를 하면서 지냈잖아요. 그래서 아이처럼 유희하듯이 인생을 사는 게 제일 좋겠죠. 아이에게 내면화된 도덕적 법칙은 'I am 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존재.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자신 있는 태도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잘 보이려고 꾸미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죠. 자기에 대한 철저한 긍정, 이것이 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긍정의 힘'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창조해야 하는가?' 입니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 실제로 니체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수많은 갈등과 전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행복하게 삶을 살아갈 것인지가 그의 과제였습니다. 가장 힘든 문제예요. 나의 삶, 내가 사는 이 사회를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정신의 최고 단계는 아이입니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그리는 기독교야말로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킨다고 보고 있어요. 우리 삶은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고, 끊임없이 변해요. 오늘은 불행할지 몰라도 내일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죠.
신은 모순의 제거, 고통의 극복, 우연의 부정이지만, 이는 우리 삶 과 다릅니다. 어떻게 신의 구원 없이 고통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니체가 말합니다.
“나에게 그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이며 낙인찍힌 자들이다.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놓았다. 거짓 가치와 망상의 말이라는 굴레다! 아, 누군가가 그들을 그 구원자에게서 구원해줄 것인가!”
- 니체는 구세주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구세주가 고통을 대속하고 고통을 부정하면 우리는 마치 고통 없는 삶이 가능한 것처럼 착각 해요. 구세주 때문에 궁극적으로 삶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니체 의 생각이에요.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구세주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니체 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모든 구세주보다 더 위대한 자들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 그대들이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한다면 말이다! " 니체는 저세상을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서 겪는 수많은 고통의 의미를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통을 빼놓고 인간의 삶을 논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화해서 나만의 가치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죠. 니체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니체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에서조차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 삶에의 의지, 그것이 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이 비밀도 삶 자체가 내게 말해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물론 그대들은 이것을 생식에의 의지 또는 목적에의 충동, 좀 더 높은 것, 좀 더 멀리 있는 것, 좀 더 다양한 것에 대한 충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이 다름 아닌 권력에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생명체가 있는 곳 어디서든 항상 권력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초인이 되고 자기를 극복하려 한다면 반드시 권력에의 의지가 필요 해요. 권력에의 의지가 없으면 적도 없고, 전쟁도 할 수 없고, 자기 극복도 할 수 없어요. 초인이 되려면 자신에게서 무엇이 경멸할 만 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했었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입니다.
- 원한 감정은 언제 생길까요? 피해를 입고도 직접 복수할 능력이 없을 때 생겨요. 능력이 없기에 상상의 복수를 합니다.
니체는 이를 '무능의 간계'라고 표현합니다. 무력감에서 생긴 복 수심을 가진 사람들은 무능력한 자신의 특성을 오히려 좋은 것, 선 한 것으로 치장합니다. 이는 가치관의 측면에서 노예의 반란이에요. 노예도덕은 우리가 악한 인간과는 다른 존재, 즉 선한 인간이 되자 고 유혹하는데요. 여기서 악한 인간은 우리를 지배하는 자, 강한 자, 고귀한 자를 일컫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억압당한 자, 유린당한 자, 능욕당한 자가 복수심에 불타는 무력감의 간계에서 “우리는 악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즉 선 한 존재가 되게 하자! 그리고 선한 인간이라는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복수를 신에게 맡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긴 채 사는 자, 모든 악을 피하고 대체로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즉 우리처럼 인내하는 자, 겸손한 자, 공정한 자이다.”
-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3부 〈방랑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같 은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방랑자가 될 수 있어요. 니체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삶의 질곡과 불행이 없으면 평탄한 삶이죠. 평지에서 살아가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면 행복할 것 같지만,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되돌아온다. 그것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 나의 고유한 자아, 그리고 자신을 떠나 오랫동안 낯선 곳을 떠돌며 온갖 사물과 우연 사이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
서양문학, 서양철학의 핵심 모티브는 귀향입니다. 고향으로 돌아 오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요? 집으로 돌아오려면 먼저 집을 떠나 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고향이 있 어요.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환상과 망상에 불과하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자신을 알기 위해서 나와 다른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이 문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을 보라, ......... 그것은 두 개의 얼굴 을 갖고 있다. 두 길이 여기서 만난다. 지금까지 이 두 길을 끝까지 기본 사람은 없다. 뒤쪽으로 나 있는 이 기나긴 오솔길, 이 길은 하나의 영원으로 이 어진다. 그리고 밖으로 나 있는 저 기나긴 오솔길, 그것은 다른 하나의 영원이다. 그 두 길은 서로 모순된다. 그것들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 리도 여기 이 성문에서 두 길이 마주친다. 성문의 이름이 위쪽에 순간 이라고 쓰여 있다."
-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그 시작점은 어디일까요? 순간이죠. 지금 이 순간이에요. 우리는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이 순간까지 달려왔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과거는 어디에서부터 구성될까요?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과거로 투영해서 구성돼요.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낚시질하듯 모아요. 어떤 과거를 가질 것인가는 과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간이 결정하는 겁니다. 
- "새해에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아직 생각한다.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한다. 아직 생각해야만 하니까.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의 소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말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 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 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 순간을 사랑하라'는 것은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 입니다. 여기서 운명은 결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미래가 미 리 정해져 있고 나의 의지는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 다. 삶은 매 순간에 나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져요. 미래만이 아니라 과거도 달라집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의 핵심은 결국 이 삶의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바랄 정도로 충실하게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 니체는 우리가 특정한 시점에 이 땅에 태어나서 특정한 시점에 이 땅을 떠날 때까지, 내가 여기에 살았다는 것이 꼭 있어야만 하는 운명이 될 수 있도록 지금 그렇게 살라고 합니다. 그것이 '너의 운명 을 사랑하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 거죠.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다시 한번 기억해보겠습니다. “춤 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30 우리는 모두 자신의 별을 잉태하고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살아가 며, 고통 속에서도 동경과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조금 더 견뎌낼 수 있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며, 이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집니다.
- 니체가 초인으로서 그리고자 하는 인간의 유형은 간단해요. 이렇게 새롭고 비교불가능한 사람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스스로가 삶의 목적과 법칙을 설정할 수 있는 입법자가 되고, 스스로를 창조하는 인간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진정한 의 미에서 사랑할 수 있다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 는 것, 그가 바로 그런 상황과 바로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책임이 없다. 그의 존재의 운명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의 운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특정한 의도나 특정 의지나 특정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 차라투스트라가 3부 〈또 다른 춤의 노래〉4부 〈몽유병자의 노래〉에서 반복하여 들려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변화의 방향을 암시합니다. “쾌락은 모든 사물의 영원을 원하고, 깊디깊은 영원을 원한다!” 초인은 이렇게 고통의 극복이 쾌락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구절을 스스로 해석함으로써 세계가 어 떻게 완전해지는지 말해줍니다. “방금 나의 세계는 완전해졌고, 한 밤중은 또한 정오이기도 하다. 고통 또한 쾌락이고, 저주 또한 축복 이며, 밤 또한 태양이다." 한때 깊이를 알 수 없었던 바다가 융기하여 최고의 고산이 되는 것처럼, 삶의 심연에 대한 통찰이 삶의 높 이를 가져옵니다. 밤과 낮, 깊이와 높이,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 삶의 다양한 모습은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세계의 모든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회귀 사상입니다.
- “그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는 우리 웃는 자 들도 사랑했을 것이다”
누가 웃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합니까? 이 세상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론 웃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모든 성인, 모든 종교, 모든 위대한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니체는 이를 뒤집습니다
- “그대들 우월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가장 나쁜 점은 그대들 모두가 사람이 마땅히 춤춰야 하는 방식으로 춤추는 법을, 다시 말해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춤추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대들이 실패했다고 해서 무슨 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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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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