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선택이라는 시스템의 굴레에 묶여 있는건 쇼핑할 때만이 아니다. 이성 교제나 웃음조차 시스템 속에 서 선택하도록 짜여 있다. 인생은 제공된 기회와 가능성 에 대한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릴 때는 학원이나 학 교를 선택하고, 목표로 삼은 학교에 가기 위해 지역을 선택한다. 졸업 후에는 직종과 회사를 선택하고, 그다음 에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나이 들어서는 퇴직 시기를 선 택하고, 암과 같은 질병의 치료법을 선택하며, 인생의 마지막에는 연명 치료 여부를 선택한다. 요컨대 우리는 항상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인 생이라는 게 뷔페에서 음식을 골라 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라는 행위가 인생을 온전히 살아가는 방법인 것처 럼 생각한다.
선택지가 다양하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이 다. 제아무리 선택지가 많다 해도 결국은 양옆이 담장으 로 막혀 있는 길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길에서 우리 는 무수한 선택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통치 체제나 시 대풍조, 그 시대 특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즉 에피스 테메 (episteme)"가 우리 삶을 조종하고 있는 셈이다. 만 약 그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간다면 비윤리적이라고 비 난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상이 아니라고 놀림을 받거 나 낙오자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담장 위 로 올라가 줄타기하듯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흔들면서 발을 내디뎌보는 것은 어떨까.
다시 말해 창조적으로 살자는 말이다. 그저 상품 진열 대 위에 놓인 물건을 선택하고 주어진 즐거움만을 누리 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담장 사이에 없었던 것을 스스 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것이 물건이든 생각이든 상관 없다. 삶의 방식이어도 좋다. 잘 창조하면 예술이 될 것 이고, 더 훌륭하게 창조해낸다면 담장 사이의 폭이 넓 어져 더 많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생길 것 이다.
설령 실패할지라도 이는 개성 있는 행위임에는 틀림 없다. 재탕, 삼탕하며 내놓는 뷔페 같은 요리에 만족하 는 사람은 창조의 재미를 알 리 없다. 창조적인 삶이야 말로 자신의 개성을 살려서 사는 삶일 테니까 말이다.

- 인생은 괴로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인생을 소홀히 하기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런 인생에선 '초라함'이라는 쾨쾨한 곰팡이만 날로 번식할 뿐이다.

- 재능은 이미 몸 안에 잠재되어 있거나 남모르 게 축적된 어떤 특별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다. 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며 막연한 것도 아니다. 재 능은 지극히 명확한 것,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이다. 즉 재능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
예컨대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화가가 되는 것이 아니 라,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화가가 되는 것이다. 소설을 썼다면 소설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고, 장사를 했다면 비즈니스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 된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 다. 재능이 없으면 재능을 심고 키우면 된다. 방법은 간 단하다. 무언가를 이루면 된다. 아니, 끝까지 완수하면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것이 자신의 재능이 된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든 강인한 실천력으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그 어디에서도 재능은 발견하기 어렵다.

- 왜 인간은 후회하는가.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대답은 이렇다.
"인식이 변한 것이다. 행위를 했을 당시의 인식, 사물을 보는 견해와 사고방식, 가치관이 훗날 다르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예전대로 똑같이 인식하고 있다면 후회를 할 리 없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행하기 전과 행한 다음의 인식은 별개라는 뜻이다. 인간은 행위와 경험에 따라 인식과 가 치판단을 바꿔나간다. 쇼펜하우어의 설이 어디까지 타 당한지 모르겠으나, 경험은 생각과 견해, 가치관을 변하 게 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세상만사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 든 것에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걸까. 아니다. 세상만사와 연관된 내용이 의미 속에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어떤 일이나 사물일지라도 의미를 미리 헤아릴 순 없다.
이를테면 자녀 양육이나 결혼,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 는지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바로 이거야!" 하며 무릎 을 칠 만한 정답이 나올 리 없다. 취직 전에는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 업종과 기업을 연구하고선 취직을 한 뒤에 야 비로소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맞기 쉽다. 십중팔구 빈손으로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 깊이 생각하면 정답을 끌어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습 성은 오로지 성적으로만 진로를 결정하는 학교 교육 시 스템이 몸에 밴 탓일지도 모른다. 학교 시험이 아닌 실 제 인생에서는 미리 준비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 별한 의미를 지닌 일이나 사물이 있을 리 없다. 일은 일, 사물은 그저 사물일 뿐이다. 자신이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그제야 의미가 생성된다.
세상만사와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의미도 변한 다. 어설프게 관계를 맺으면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만사가 따분할 따름이다. 깊고 진지하게 관계를 맺어야만 의미를 풍성하게 찾아낼 수 있다. 그 의미는 자 기 인생의 의미이자 삶의 보람이 된다. 같은 일에 관계 를 맺었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저마다의 개성과 삶의 방식에 따라 의미의 색조가 바뀐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다른 사람이 그대로 이어받더라도 같은 성 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노하우나 스킬을 운운한다면 아직 의미나 재미를 제 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거기서 훌쩍 뛰어넘어선 지점에 도달해야 의미는 그 속살을 드러낸다. 산꼭대기에 올라 야 간신히 나무들 틈새로 먼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The Philosopher and the Wolf》에 이런 문장이 있다.
"영장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 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소유의 정도가 아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자신에게 속해 있고 자기 곁에 착 달 라붙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유자인 자신 을 특별한 사람으로 오해한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얘 기다. 무엇을 소유하든지 간에 언젠가는 빼앗기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적대 관계가 되고 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구두쇠'라는 표현이 이 에 딱 맞아떨어진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얽매인다면 무엇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계속 무언가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저 그런 평범한 사람도 아닌, 괴상한 생물에 불과할 것 이다.

-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은 생성한다'고 생각했다. 생성은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자기실현화(self-actualization)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정된 자기 자신 따위는 없다. 인간이란 무언가 가 되는 운동을 계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매 순간 생성함에 따라 변신하며, 일정한 계통을 갖고 변신 해야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린이는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이를 깨닫고는, 망설임 없이 눈을 반짝이며 무언 가가 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 현실도피를 꿈꾸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들이 무언가 특별한 기법이나 비법, 비밀, 요령, 노하우 등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사실은 그런 생각 자체가 자신을 구속하는 고정관념이며, 이를 걷어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상황이더라도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 병에 걸린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른바 '개념과다증'이란 병이다. 생각 속에 개념을 잔뜩 그러모아 그 무게에 눌려 버둥거리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형적인 예다. 사람들은 끝없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에 집착할수록 자 신이 불행하다고 굳게 믿는 꼴이 된다. 부자나 가난뱅이 하는 것도 묵중한 개념으로 우리를 짓누른다. 젊음과 늙 음,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 남자다움과 여성스러 움, 어엿한 어른, 일류와 이류, 가치매김과 관련된 대부분 의 개념이 우리의 삶을 괴롭힌다.
이런 개념어에는 알맹이가 없다. 시간이 흘러도 정의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저 막연히 빛나는 말로만 계속 존재할 따름이다. 어쩌면 개념어는 눈부시게 화려한 대문과 비슷할지 모른다. 대문 저편에는 한없이 이어지는 황야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얼핏 아름다운 것이 있는 듯 보이지만 모두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토록 공허한 말을 빛나게 하는 사람은 누굴까 개념어 속에 알맹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가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 바깥세상에 붙박아 놓은 절대 가치가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다.

-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이성이나 감정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 근대 이후부터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성적이어야 한다' 혹은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너무나 쉽게 이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한번 생각해보자. 도대체 이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감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토록 수많은 학문과 업적이 있 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성과 감정을 제대로 설 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경험을 기준 삼아 정리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성적이란 것은 냉정하게 손익계산을 할 수 있는 상태이고, 감정적이란 것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나 마음이 흔들려서 동요되는 상태라고 말 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적이 된 나머지 심한 말을 내뱉 고 이상한 행동을 할 때는 자존심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감정이 아닌 자존심이라는 놈이 골칫덩어리인 셈이다. 자존심의 실체는 자신에 대한 존 경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어 하는, 또한 자신의 능력을 높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허영일 뿐이다. 그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은 버려야 한다. 그 대신 가져야 할 것은 바로 긍지다.

- 막다른 길을 만나거든 생각을 딱 끊는 것도 한 방법이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그저 눈으로만 보라. 먼발치 에서 보거나 멍하니 바라보라. 풍경을 보듯 훑어보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막다른 길에서 겪는 괴로움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웃는 사람을 보고 따라 웃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아니 면 동물원에 가서 해맑은 아이들과 동물의 모습을 보라. 헬리콥터를 타고 세상을 보거나 벌거벗은 채 바다에서 헤엄쳐보는 것도 좋다.
막다른 길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방법론에 관한 책을 섭렵한다 해도 딱히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 다. 방법론이나 노하우에 관한 책을 읽으면 그 자리에선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지 몰라도 돌아서면 말짱 도루묵이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변해야 한다. 문제에 가로막혀 경직된 머 리를 싹 뜯어 바꾸지 않으면 막다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때 몸을 이용하면 한결 수월하게 머리를 개조할 수 있다. 인간의 장(腸)은 머리에 해당되며, 넓적다리 근 육은 물리적으로 에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막다른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끝까지 물어지고 생각하라. 이러다 미쳐버릴 수 있겠다고 생각될 만큼 혼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라.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몇 주일이라도. 그러 다 보면 불현듯 무언가가 바뀔 것이다. 뭔가를 퍼뜩 깨 달을 수도 있고, 맞은편에서 어스레한 빛이 보일 수도 있다. "뭐야, 바로 이거였어!" 하며 피식 웃음이 나올 수 도 있다.
더구나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물방울 소리 나 새소리, 급격한 체감온도의 변화, 흔들리는 불빛, 무 늬, 바다 빛깔처럼 일상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일이 자신 안의 무언가를 일깨운다. 이것은 요행이라 부를 만 큼의 변화라 하겠다.

- 우리는 숱한 고민을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괴로움과 고통을 경험하며, 고민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고민을 마땅히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게 인간의 길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것이 정녕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면 '고민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리라'는 생 각은 길을 벗어나 어두컴컴한 골짜기 바닥으로 나동그 라지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고민은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한 발의 통증일지 모른다고, 한층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시련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일을 할 때는 언제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자신의 힘으로 시련을 극복하지 않으 면 소소한 기쁨도 얻기 힘들다.

- 만약 문제를 앞서 능가한다면 고통은 바로 사라질 것 이다. 능가한 단계에서 이미 경쟁과 서열은 삐걱거리는 범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의 오너 가 종업원의 출세 경쟁에 휘말려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 치다. 문제를 능가한다는 일이 어렵게 생각될 테지만 일 단 무엇이든 주변에 있는 작은 문제 하나를 능가해보라. 깊은 충실감과 상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불안정함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이라고 단단히 각오하라. 그러면 변화와 사건을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 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면역력을 갖는 것과 마 찬가지다. 어쩌면 이것이 안정과 평온을 바라는 인색한 삶 보다도 훨씬 더 대담하고 강인한 삶이라 말할 수 있다.

- 파도가 존재하려면 넘실거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움직여야만 세상에 존재한다. 주고, 다른 곳에서 받고, 꾀하고 도전하며, 망했다가 다시 재기하고, 쓰러졌다가 일어서고, 얼마간의 요행과 우연의 도움을 받고, 안간힘 을 다해 희망을 형상화한다. 그 행위는 어느 것 하나 불 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의 틈새에 있는 실낱같은 안심의 길을 짚어가면 그만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길은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있는지 없 는지도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다.
마음 푹 놓고 안심하며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어디 에 있을까. 어린 시절에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부모를 기다리는 일조차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또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패키지 여행일지라 도 불안한 마음은 말끔히 가시지 않는다. 우리들이 일을 하거나 살아가면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다. 인생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면 한 바탕 크게 웃을 수 있고 감동도 그만큼 깊어진다. 이것 이 진정 사람 사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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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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