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뇌가 아니다

인문 2021. 5. 25. 20:59

- 이 책은 반자연주의 관점을 채택한 다. 즉, 모든 존재가 물질적이지는 않다는 것, 혹은 자연과 학적으로 탐구 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바꿔 말해, 나는 비물질적 실재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상식적 통찰이라고 본다. 내가 누군가를 친구로 여기고 적절한 감정과 행동으로 그 사람을 대할 때, 나는 그와 나 사이의 우정이 물질적인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을 단지 물질 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론 내가 적절한 몸을 가지 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일 수 없다는 것, 또한 우리 우주의 자연법칙들이 지금과 다르거나 생물학적 진화가 다르게 진행되었다면 내가 적절한 몸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말이다.
- 신경중심주의의 기본 사상에 따르면, 정신적인 생물이 라는 것은 적당한 뇌를 가졌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요 컨대 신경중심주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나는 뇌다〉로 요약된다. 《나》, 〈의식〉, 〈자아〉, 〈의지〉, 〈자유〉, 또는 정 신>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철학이나 종교, 또는 상식 따위 에 문의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 최선의 경우에는 신경생물학과 짝을 이뤄 ? 뇌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나는 뇌가 아니다!〉를 이 책의 비판적인 길잡이 명제로 삼는다.
-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의 뇌 혹은 중추신경계와 그것의 작동 방식을 다룬다. 뇌 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뇌는 우리가 의식 있는 삶을 살아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뇌가 우리의 의식 있는 삶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필요조건은 충분조건이 아니다. 두 다리를 보유하는 것은 자전거를 타기 위한 필요조건이 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혀야 하고 내가 자전거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하는 등의 조건들도 따로 갖춰야 하니까 말이다. 뇌를 이해하면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이해하리라는 믿음은 우리의 다리를 이해하면 자전거 타기를 완전히 이해하리라는 믿음과 유사하다.
- 뇌의 10년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의 종결이 뚜렷해진 직후에 조지 H. W. 부시에 의해 선포된 것은 과연 우연일까? 그 프로젝트는 오로지 의학 연구를 정치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생각하는 뇌를 - 따라서 시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전망은 감시사회를 (또한 군산 복합체를) 위한 새로운 통제 가능성을 의미하 지 않을까? 뇌에 관한 지식의 향상이 소비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의 발전을 약속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알 려졌다. 어쩌면 신경과학에 기초한 약물을(또한 광고를) 활용하는 새로운 여론 조작 메커니즘들이 개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펠릭스 하슬러가 저서 『신경 신화Neuromythologie에서 설득력 있게 서술했듯이, 뇌의 10년은 새로운 로비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로 현재 미국 대학교들에는 흡연하 는 학생보다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하는 학생이 더 많다. 해상도가 향상된 뇌 영상에 대한 더 세밀한 이해는 크리스 토프 쿠클리크가 통제 혁명Kontroll-Revolution)이라고 적절하게 요약한 사회적 변환을 약속한다. 통제 혁명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착취당할 뿐 아니라 개별적 으로 또한 정확하게 해독(解讀)〉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쿠클리크는 그런 상황을 알갱이 사회granulare Gesellschaft) 라고 칭했다.
- 저널 『뇌와 정신』에 실린 〈뇌 과학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선도적 신경과학자 11인의 선언문>의 말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설령 우리가 인간의 공감, 사랑에 빠져 있음, 도덕적 책 임감의 바탕에 깔린 신경학적 과정 전체를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 내면 관점Innenperspektive의 독자성은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바흐의 푸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더라도 그 음악의 매력이 조금도 손 상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뇌 과학자는 자기가 말할 수 있는 것과 자기의 관할 범위를 벗어난 것을 명확히 구분해 야 한다. 이는 ? 다시 위의 예를 들면 - 음악학자가 바흐 의 푸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더라도 그 음악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과 같다.
- 신경중심주의 - 곧, 《나》 = 뇌라는 주장 - 의 대표적 인 예로 네덜란드 뇌 과학자 디크 스왑의 저서 『우리는 우 리 뇌다Wir sind unser Gehirns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도입 글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고 방치하는 모든 것이 우리 뇌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 환상적인 기계의 구조가 우리의 능력, 한계, 성격을 결정한다. 우리는 우리 뇌다. 뇌 과학은 이제 더는 뇌 질병의 원인을 찾는 작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뇌 과학은 왜 우리는 이러이러한 우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작업, 우리 자신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의 이른바 실존주의까지 정신 철학의 핵심적인 생각 하나는, 인간은 사회적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이므로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특히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은 물론 사르트르의 소설들과 희곡들이겠지만, 당연히 카뮈의 문학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우선 자기를 단적으로 실존하는 놈으로서 발견하고 이어서 끊임없이 이 사태에 대해서 모종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과 구별된다. 바로 이 것, 곧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모종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사르트르는 유명한 에세이 실존주의는 인본주의다」에서 우리의 본질)로 칭한다. 그리하여 그는 실존주의를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 문장의 배후에 있는 근본 사상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 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칸트 윤리학의 중심 테마 이며, 특히 그 뒤를 이은 정신 철학의 중심 테마다. 또한 그 근본 사상은 오늘날의 철학에서도 다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컨대 크리스틴 코스가드, 스탠리 카벨, 로버트 피핀, 주디스 버틀러, 조너선 리어, 제바스티안 뢰틀의 철학에서 그러하다.
- 신실존주의는 사르트르의 생각, 곧 한 개인의 행위를 이 해하려면 반드시 그의 인생 계획Lebensentwurf(사르트르 의 표현으로는 〈프로젝트))을 이해해야 한다는 ? 이미 말한 대로 영향력이 큰 선배 철학자 칸트도 가졌던 ?? 생각을 이어받는다. 그 프로젝트의 수행은 개인이 다소 유의미 한 개별 행위들을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개 인이 자기의 삶을 어떻게 유의미하게 빚을 것인가라는 일반적인 생각의 틀 안에서 다양한 행위들 중에 일부를 선택 하는 것이 그 프로젝트 수행의 핵심이다.
-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 인간 속에 천성 적인〉 몸-영혼 이원론〉과 〈천성적인 목적론>이 존재한다. 고 지적함으로써 이런 형태의 영혼 미신을 설명한다. 내 눈 뒤에 《나》가 숨어 있으며, 그 《나》는 최소한 소설 속에서 다른 몸속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 모두의 속에 뿌리내려 있는지는 의심할 만하다). 그 유치 한 목적론〉은 〈모든 것의 배후에 의도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도킨스는 이 생각이 종교의 원천이라고 본다. 그에게 종교는 그의 유명한 저서의 제목대로 신 망상 God Delusion)*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 눈 뒤에는 《나》가 없고 뇌가 있다. 그런 한 에서 도킨스는 옳다. 유기체를 살아 있게끔 하는 영혼 실 체가 있다는 생각도, 우리가 생명의 화학을 이해할 수 있음이 명확해진 이래로 근대 생물학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 생명, 곧 생물학적 생명의 화학 외에 따로 생명력이 있어 야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들은 근대 자연과 학에 의해 시대에 뒤처진 것들로 전락한다. 이 통찰은 우 리의 자아상을 위해 전적으로 중요하다.
요컨대 실제로 뇌 과학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지침으 로 삼은 고유한 인식 관심의 틀 안에서, 목적론적 세계상 에서 유래한 과거의 생각들을 무력화한다. 예컨대 신경 세 포들 간의 신호 전달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온 통로들과 소수성(疏水性) 지방산 사슬들을 탐구해야 한다. 더 포괄적인 이해를 원한다면, 무수한 화학적 세부 사항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개별 뇌 구역들의 기능을 연구해야 한다. 이런 탐구 방법을 채택한 사람은 목적론적 행위 설명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특정 신경 세포들이 이를테면 멀리 떨어진 뇌 구역의 신경 세포들에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점화한다는 말은 오해를 유발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비록 뇌 과학자들은 이 표현의 목적론적 함의에 주의하지 않고 이 표현을 사용하지만 말이다. 
- 도킨스는 종교를 대대로 전승된 근거 없고 자의적인 확신들과 처방들로 격하한다. 또한 그는 모든 종교의 핵 심은 〈신이며 이 단어는 《우리가 숭배해야 마땅한 초자연적 창조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모 든 종교의 핵심은 <신>이며, <신>은 도킨스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는 통찰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세계 종교들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처럼 유일신을 상정하든, 불교의 일부 유파들처럼 궁극적으로 무신론이 든 간에) 근대적인 자연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에 발생했다는 점을 도킨스는 간과한다. 창세기」의 저자는 자연 개 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신을 초자연적 창조자로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도킨스가 시대착오 적으로 자연 개념을 과거로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적 사건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과 초자연적 설명을 시대 착오적으로 맞세우는 것은 도킨스가 지휘하는, 역사를 잘 모르는 신무신론의 일관된 특징이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패턴의 종교 비판이며 당연히 수백년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 · 출처 비판적 quellenkritisch 지식을 갖춘 ? 신학과 종교학이 이미 오래 전부터 채택해 온 ?? 관점에서 보면, 무릇 종교가 도킨스 의 종교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근거 없고 자 의적인 확신이다. 도킨스는 자신의 종교 개념을 틀로 삼아 인류의 계몽과 유치한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처방 들을 찍어 내지만, 그의 종교관은 그가 스스로 내린 종교적 미신의 정의에 여러 모로 부합한다. 설령 그가 신을 믿지 않으며 신을 자연으로 대체하더라도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식 획득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라는 질문은 철학적 인식론에 국한되지않으며, 수많은 광범위한 귀결들을 가진다. 모든 지식은 오로지 경험이라는 원천에서 나온다는 입장을 채택하면, 우리는 곧바로 여러 난관에 봉착한다. 모든 지식이 경험에 서 나온다면,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 경험이 우리에게 항상 더 나은 지식을 줄 수 있을 터이므로 - 확정적인 지 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컨 대 아이들을 고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나 정치적 평등 을 민주 정치의 한 목표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경험주의가 옳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고문하 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1 +2 = 3이라는 것도 확정적으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등식도 경험에 의해 단박에 수정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경험주의에 대한 반론을 더 쉽게 제기하려면 다음과 같 은 간단한 질문 두 개를 던지면 된다. 정말로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이라는 원천에서 나온다면,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지식은 어떠한가?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에서 나온다는 지 식을 우리는 감각 경험으로부터 얻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지식과 관련해서도 경험이 우리에게 더 나은 지식을 줄 수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해, 우리가 모든 지식 을 경험으로부터 얻는 것은 아니라는 지식을 경험으로부터 얻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해야 할 것이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능의 역사  (0) 2021.05.30
위험한 나비효과  (0) 2021.05.30
터지는 콘텐츠는 이렇게 만듭니다  (0) 2021.05.19
네이처 매트릭스  (0) 2021.05.19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0) 2021.05.07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