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시대

사회 2020. 11. 11. 20:25

- 무덤덤하거나 냉담한 사람은 간혹 내적 공허함이 느껴질 때 자신의 삶을 더욱 실존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요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실수나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의심스러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전력을 다해 공허함에 맞서거나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신 한탄을 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린다. 공허함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 지 않고, 외부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공허함을 자신에게 안겨준 실존적 문제로부터 또 한 걸음 물러나버린다. 여기서 눈에 띄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대부분의 심리치료가 세상과의 동맹을 거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으며, 산업 및 소비 사회의 기만적인 책략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점점 만연해지는 실존적 공허와 무의미한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라는 불분명한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각종 심리치료 상품들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추적하는 대신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서만 다룬다면 우리는 증상과 원인을 혼동하게 된다. 이 세상을 실존적 고향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불안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불안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불안은 그가 지금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제 이기적인 상태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시 마음을 열고 능동적인 삶 속으로 들어올 시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공허함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만 한다는 데 있다. 온갖 다양한 대안들이 나오지만, 우리가 어느 곳에 필요하고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모를 때 생겨나는 삶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는 없다. 잃어버린 희망을 그저 심리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일은 없다.
- 나쁜 일을 할 때는 삶의 대부분이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는 삶의 가장 큰 부분이 멀어지며, 중요하지 않을 것을 할 때는 삶 전체가 멀어진다. ... 모든 시간들을 꽉 붙잡 아라. 오늘을 잘 붙잡으면 내일에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삶은 하루하루 더 빨리 지나간다.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지만, 시간만은 우리의 것이다.
- 우리는 환자에게 인생이 한 권의 소설이고 자신은 주인공이라고 상상해보라고 지시한다. 말하자면 그는 완전히 마음대로 사건의 흐름을 조종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꺼리고 회피하던, 표면적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진 책임감 대신에 무수한 행동을 결정하는 자유를 얻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인 책임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에게 자신의 행동에 전력투구할 것을 좀 더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다. 삶의 종점에 도달하여 전기를 작성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요구하고, 마침내 현재의 장章을 써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는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자신의 전기를 마음대로 수정할 것이며, 곧이어 벌어질 사건들도 완전히 자유롭 게 결정할 것이다. ... 이러한 비교 수단 역시 그가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동하도록 만들 것이다.
- 사람들이 유한성과 외부환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널리 퍼져 있는 인과적 접근 탓이다. 그릇된 세계관이나 잘못된 사고 습관이 어디에서 습득되었는지를 이해 하려는 인과적 접근은 언제나 이론적일 뿐이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친구 집으로 가다가 왜 길을 잃었는지를 이해한 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 집으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과적 접근은 임상적, 학문적 관점에서만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건의 본질을 말해주기보다 인과적으로 그저 자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주입되면, 그 순간부터 인과적 접근은 실존적 접근을 가로막는다.
- 고통과 냉혹함이 항상 최종결정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이 그 사람의 현재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충분히 협상 가능하다. 현재는 제한성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장소이기도 하다.
-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 증오와 좌절감을 마음에 품고 이에 상응하는 신호를 외부로 내보내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고통과 냉담함만을 유발한다. 부정적인 삶의 자세를 더 강화시키는 반응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 고, 장기간에 걸쳐 자신의 내면세계를 병들게도 한다. 자신이 표출하는 것으로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심리학 연구에서 밝힌 것 처럼 이런 현상은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않고 마음껏 표출해 야 한다고, 혹은 표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겨난다. 예를 들어 실험실에서 피험자들에게 모욕을 경험하게 한 다음 자신의 감정(주로 공격성)을 마음껏 표출할 기회를 준다고 하자. 그리고 자신의 좌절감과 공격성을 해소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 때 멈추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피험자들은 모욕을 당한 후 공격성을 해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대조 집단에 비해 전혀 무관한 사람에게 더욱 공격적으로 행동한다. 이 실험을 통해 나타난 결과는 공격성의 해소가 평화와 안정을 향한 내면의 갈망을 가라앉히기보다는 공격적 욕구를 돋운다는 것이다. 피험자들 중 한쪽 그룹에 화를 풀고 자신의 공격성을 마음껏 표출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건강할 거라고 사전에 말해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내용을 듣지 못한 그룹에 비해 감정 정화 이후에 더욱 공격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화를 해소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암시도 부정적 감정이 격해지는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 오히려 공격성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는 조언이 실험실 밖에서 얼마나 치명 적인지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자기통제가 되지 않는 황이 주어지고 실험자의 지시 없이 공격성이 억제되지 않고 강하게 표출된다면 전혀 상관없는 제3자도 희생자가 될 것이다.
-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치 있고 선한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것은 매우 유혹적이다. 좋은 것을 외면하거나 스스로에게 기 대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것을 세상에 발산하려는 노력조차 하 지 않는다. 이러한 방정식은 방어기제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 다. 어차피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과 믿음을 정당화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다. 왜냐하면 더 이상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조차 거 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빛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건물의 모든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빛이 밖에서 들어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빛이 들어오도록 행동을 개시하고 직접 빛을 끌어당겨야 한다.
- 인간이란 유기체는 결핍이나 기능장애를 알려주는 신호에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인다. 배고픔과 갈증, 고통, 불쾌한 상태, 피로감 등이 모두 지표가 될 수 있다. 이 지표들은 우리에게 결핍 을 알려주고 그에 맞서 무언가를 감행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제가 인생에서 좋은 것을 인식하고 높이 평가하는 우리의 능력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우리가 이미 달성한 것,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들은 겉보기에 상당히 훌륭히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요구를 하지 않는다.
- 그런 이유로 생물학적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이런 기제는 경험 하지 못한 기쁨' 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상의 기쁨 과 성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문제없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 는 우리의 영역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버린다. 특히 풍요로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가 습관적으로 자신의 욕구에만 관심 가질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의 영역 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조만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심지어는 인지조차 되지 않는다. 결핍 상태가 메워졌을 때에도 결핍이 제거되었다는 고마움이나 충족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태로 다시 돌아왔고 결핍이 해결되었기 때문 이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실존적 위 협을 먼저 느끼고, 그다음 과거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를 떠올리게 된다. 환자들을 면담하면 대체로 자신들이 특별한 소원, 이를테면 해외여행이나 비싼 명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일상이 위태로워진 지금에서야 비로소 일상에서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 즉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큰 행복을 누렸 는지 알겠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프랭클의 정의를 이렇게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에 너무 빨리 익숙해지고, 우리가 잘 지내기 위해서 가지려는 것 혹은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시선이 사로잡혀 있다.”
-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이유 혹은 하지 않는 이유는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의지나 더 나은 통찰력에 반해서 행동하며, 대부분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변덕스러운 기분을 따른다. 결과가 좋게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결국 우리는 편안한 감정을 경험하고 불쾌한 감정을 피하는 것만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러고는 곧 심리적 오류에 빠 진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좋은 것에 금방 익숙해지고 성 공하지 못한 것에는 더 집착하는 심리적 기제 때문이며, 둘째, 기분 좋은 감정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생겨나면서 통제하지 못하는 요인들에 또다시 의존하고 그것에 더 많은 결정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분 좋은 감정을 추구하고 불쾌한 감정을 피하는 행위 는 자유와 대립된다. 무엇보다 자유 속에서 전개되는 의미 있는 행동을 수행하지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해 쾌(快) - 불쾌(不快)'의 좌표 체계로는 인간이 지닌 수많은 가능성과 의미를 제대로 판 단하기 어렵다. 쾌불쾌'의 양극만 가진 나침반은 여행자의 자유를 빼앗고 의존으로 이끌 것이다. 양극 사이에 펼쳐져 있는 삶의 지도를 한 차원으로 축소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펼쳐진 삶의 지도는 이 세상을 단지 자신의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변덕스러운 공간으로 이해한다. 비극적이면서 모순적인 사실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신에 대해 실망하는 이유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비록 다르게 행동해야 했고, 그것이 더 낫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말이야.” 라고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고 체념적인 결론을 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모습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자기 성찰이나 자기 투영을 통해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몰두할 만한 일에 자신을 바치고 희생함으로써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자기 형성의 비밀이다. 이에 대해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만큼 적절하게 표현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이란 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을 통해 정의되는 존재다
- 인간은 단순한 인과적 모델로 파악하는 것보다 훨 씬 더 복잡한 살아 있는 존재다. 인과적 모델들은 심리학적 혹은 생리학적 특성만을 기술하고 인간을 거기에 가둬버린다. 인간을 누군가로서가 아니라 무엇으로서 기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파악하자고 하면서 결국에는 인간 자체를 잃어버리고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하위인격적subpersonal 요소만 기술한다. 어쨌 거나 인간 현상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이론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이론이 되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이론은 인간이 단순한 심리적 · 생리적 특성들의 총체라기보다 자의식, 자유, 책임을 지 닌 존재라는 사실을 따르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하위 인격적이지 않다. 반면, 인간을 하위인격적으로 설명하면, 이것 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 성적 노이로제 환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리고 정력과 오르가슴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성적 쾌감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쾌감이 중요해질수록 그 쾌감은 점차 사라진다. 말하자면 쾌감은 직접적으로 붙잡을 수 없다. 쾌감은 우리 행동의 실제적인 목적도 아니고 가능한 목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쾌감은 실제로 우리가 자기초월을 경험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어떤 일에 몰입할 때 저절로 생겨나는 작용 또는 부작용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를 더 이상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쾌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쾌감을 위한 우리의 의지 역시 자신에게 방해 요소가 된다. 자기 조작이 실패한 것이다. 쾌감과 자기실현으로 나아가는 길은 자기 몰입과 자기 망각을 통해서 이어진다. 이러한 길을 우회로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지름길을 선택하고 쾌감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 지름길은 막다른 길임이 입증될 것이다. 여기서 말해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즉, 가치 있는 삶을 실현 하는 모든 과정은 자기중심적 노력을 그만두고 삶에 개입하려는 의지의 부수적 효과이며, 강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 적 과정의 결과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일반적인 동기 이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무시한 채로 강제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결국 원했던 것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 순간적 감정만을 좇다가 행복을 놓치게 된다.
- 빅터 프랭클은 우리의 감정과 경험 방식의 구성 성분이 직접적으로 의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과잉 의도의 방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치료법을 투입했다. 즉, 그는 지나친 불안감이나 강박적 사고 및 충동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헛되이 이러한 충동과 맞서 싸우지 말고 그것을 스스로 소망해보라고 충고했다. 그렇게 할 경우, 그것과는 정반대의 것이 생겨날 수 있다. 즉, 증상이 나타나길 바라면 곧바로 증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프랭클의 역설적 의도Paradoxe Intention' 라는 이 방법은 오늘날 우리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처럼 단기간에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불안장애와 강박장애를 치료하는 다른 치료법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강력한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역설적 의도의 근본적인 작용 기제는 역설만이 아니다. 이보다 더 본질적인 요인은 당사자의 편안한 기분과 조소적 태도다. 이를 통해 과잉 의도를 근본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다.
-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는 여행 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면 그 대답도 이미 주어졌다. 즉, 우리가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그럴 수 있 는 것(자유), 그래야만 하는 것(의미와 책임)과 우리를 결합시킬 때 그 답을 찾게 된다. 우리는 사라졌다고, 혹은 망각되었다고 믿었던 꿈과 희망, 이상주의를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고 주요한 행동 요인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여전히 많은 것을 이해 하지 못하고 항상 의심을 품기는 하지만)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 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인용된 성악가 플 로렌스 포스터 젠킨스의 말처럼 우리가 노래를 못 부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시도는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다.
- 나이 든 한 의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아내는 1년 전에 죽었고, 그는 그 상실감을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몹시 우울해하는 그에게 만약 그가 아내보다 먼저 죽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상상할 수도 없어요. 아마 제 아내는 절망에 빠졌을 거예요."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 보세요. 당신의 아내는 당신 덕분에 고통을 면한 거예요. 당신이 아내의 고통을 면해준 겁니다. 그 대가로 당신은 살아남아 아내를 애도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 순간 그의 고통은 희생이라는 의미를 얻었다. 운명은 조금도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변화했다.
- 삶의 지혜를 담았다고 하는 베스트셀러들은 우리에게 상황적 삶의 자세를 취하라고 끊임없이 조언한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귀를 기울이라는 조언들은 꽤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전혀 효과가 없으며, 심한 경우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무관 심하게 만들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삶으로 우리를 이끌 수 다. 이처럼 기쁨, 사랑, 희망, 행복, 믿음에 적용되는 내용이 자의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자의식으로 이르는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대하는 상태에 이르는 길은 그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 지향적인 참여를 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참여와 노력을 통해 세상이 풍요로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이 모든 상황적 감정보다 더 확실해지고 진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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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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