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을까? 어째서 난 그 질문을 받지 않았을까? 어째서 규칙과 규정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냥 사람들 속에 밀어넣어진 걸까? 현실이라고 하는 이 이 거대한 기획에 나는 어떻게 휘말리게 된 걸까? 어째서 휘말려야 하는 걸까? 그것은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이 휘말려야 한다면 관리인은 어디에 있나? 난 이 문제를 놓고 할 말이 있는데, 왜 관리인은 없나? 그럼 내 불만은 누구한테 이야기하지?” (쇠렌 키르케고르, 《반복》, 1843)
- 당신은 태어나겠다고 선택하지 않았다. 누구도 당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누구도 당신에게 지침서를 주지 않았지만 당신은 여기, 이 세상에 던져졌고, 당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존재의 시간 안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 필요가,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당신은 너무 늦기 전에, 그 뭔가를 빨리 생각해내는 게 좋다. 영화 〈파이트클럽에 나오는 에드워드 노튼의 내레이션처럼, “이건 당신 인생이고, 1분씩 1분씩 끝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 문득 무대장치가 무너지기도 한다. 기상, 전차,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네 시간, 식사, 수면, 똑같은 리듬을 따라 월, 화, 수, 목, 금, 토, 이 경로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수월하게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왜'가 고개를 쳐들고 권태와 경악이 뒤범벅된 상태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 1955)
- 물론 당신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인생에 많은 투자를 한다. 하지만 때로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당신의 인생은 작디 작고 우연적이고 특별한 가치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을지 모른다. 당신의 인생이 아주 소중하다는 기분과 그 기분의 근 거를 대지 못할 수 있다는 앎 사이의 불일치가 바로 부조리함 의 정체다. 철학자 토드 메이는 이를 “의미를 찾는 우리와, 그 걸 내주지 않으려는 우주와의 대결”이라고 부른다.12 당신의 행동이 또는 당신의 삶이 어째서 가치가 있는지 분명히 밝히 지 못할 때 당신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당신에게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지 알려주는 개인, 가족, 사회 차원의 - 기틀과의 유대가 끊겼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진다.
- 우리가 살아가는 세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함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음을, 한량없이 기나긴,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던 지질학적 시대를, 공간이 남아도는 은하계와 파악하기 힘든 아원자들의 행동을, 물질의 중심에 있는 일종의 터무니없는 수학적 폭력을 우리 앞에 펼쳐 보였고, 그 결과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 존 업다이크, 《진화에 대한 비판적인 에세이》, 1985)
- 당신은 하찮고, 유한하며, 자의적인 존재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 우주의 나이 - 약 140억 살 - 를 24시간으로 나타내면 우리 인간은 자정이 되기 15초 전부터 느릿느릿 진화를 시작했다. 당신의 인생은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끝나버릴 것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은 실존적으로 혼란스럽 기는커녕 정신이 번쩍 들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온 우주 행성 들과 은하계와, 그 속을 채우고 있는 반짝이는 무한한 별들과 장엄한 태양계가 무언가에 어떤 가치를 할당하는지를 알아 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닐 더그래스 의 말처럼 “우주는 당신을 이해시킬 의무가 없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웃길 것이다.
- 저 점을 다시 보세요. 저게 이곳입니다. 저게 집입니다. 저게 우리입니다. 그 위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들어본 적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재했던 모든 인간이 (...) 햇살 속에 떠다니는 먼지입자 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칼 세이건, 보이저 1호가 찍은 마지막 지구 사진에 대하여, 1994)
- 영원히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결국 자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파울로 코엘료, 《11분》, 2005)
- (내 생각에)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에, 인류의 진보에, 심지어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인 목적으로서 예술 그 자체를 추구하는 행위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만이 행복하다. 그러므로 행복은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1873)
- 이 세상에는 행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곳이 많다. 나는 중국인 심리학 교수와 이 문제를 놓고 오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 부모 세대에게 개인적 행복은 전혀 중요하 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다. 개인적으로 불행한 것은 명예의 상징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 희생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희생은 행복이라는 덧없는 기분보다 훨씬 더 가 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2004년부터 진 행된 한 연구는 미국인과 중국인 학부생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읽고 떠오르는 대로 짧은 에세이를 써달 라고 요청했다. 많은 미국 학생들이 행복은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 강조한 반면, 중국 학생들은 행복의 가치와 그것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한 그런 강렬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행복은 자명한 목표가 아니며 그 중요성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또한,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을 경우 역효과를 가져오기 쉽고 이미 손에 넣은 행복을 축소시킬 수 있다.
- 심리학 연구는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데 너무 전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인생을 즐길 줄 모른다는 점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행복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역시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기도 한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를 망쳐놓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는 지배적인 문화 규범은 실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불행한 순간들을 더 견디기 힘들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불 행한 기분은 이중부담이 된다. 당신은 불행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항상 행복을 앞세우는 문화적 규범에 맞춰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 우리 문화에는 행복해야 한다고 자꾸 일깨우는 메시지들이 너무 많아서 행복이라는 목표를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 기도 한다. 텔레비전을 켜보라. 특히 광고 시간대에, 거기에 는 행복을 패키지 상품으로 파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미소 짓 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런 거짓 예언자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헛된 희망 때문에 인생에서 좋 은 것들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행복은 감정에 불과하다. 그 이 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자체로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손에 넣었을 때 딸려오는 사은품 같은 것 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어떻게 우리 삶을 진 것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하다.
- 사람들이 새로운 부의 기준선에 적응 하고 나면 처음의 행복은 소멸된다. 안락함을 주는 새로운 물 건들이 표준이 되고 시간이 갈수록 당연시되다가 최신 기기나 사치품이 새로 출시되어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그쪽으로 쏠리 면 수명이 끝나는 것이다. 다들 겉으로는 소비주의와 물질주의를 삶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보통 우리는 질문을 받으면 그보다 더 원대한 무언가가 삶의 동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 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이 행복의 약속은 항상 손에 닿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쾌락의 쳇바퀴에 중독되어 있다. 척 팔라닉이 파이트클럽에서 썼듯이 “젊고 원기왕성한 남성과 여성들은 무언가에 자신의 삶을 바치고 싶어 한다. 광고는 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자동차와 옷을 사게 만든다. 세대가 바뀌어도 젊은이들 은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기 위해, 자신이 증오하는 일을 한다.
- 인생을 두려워하지 마라.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라. 그러면 당신의 믿음이 사실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 《인생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1897)
-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다른 많은 생명체와 유사할 수 있지만, 의미의 탐색은 우리를 인간으로, 아주 독특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로이 바우마이스터, 행복한 인생과 의미 있는 인생의 몇 가지 중요한 차이), 2013)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리고 그 이후 수천 년간의 서구 사상에서 인생에 대한 거대한 질문은 인간의 목적에 관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텔로스telos, 중세 기독교 사상가들은 '최고선 summum bonum'이라고 불렀던 이 문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가들의 중요한 관심사로서,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왜라는 물음에,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우리가 자전거나 칼이 존재하는 목적 을 물어볼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 는 질문이었다. 자전거의 경우 그 답은 타기이고, 칼은 자르 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그리스 사상가들과 기독교 사상가들을 공히 묶어주는 것은 이들 은 인간에게 목적이 있을 가능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서는 우주가 이해 가능했고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된 존재였다. 그러므로 사상가가 할 일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선 또는 인간의 목적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게 전부였다. 조슈아 혹실드 교수의 주장처럼 인간의 목적은 “대부분의 서구 역사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던졌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언젠가부터 과학을 근거로 한 세계관이 서구사회에서 서서히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세계관은 먼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갈라놓았고, 그다음에는 초자연계를 가장자리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과학은 200~300년 동안 우주를 마법에서 깨어나게 했다. 인본주의와 개인주의의 등장, 도시화, 이동성의 증가, 산업화, 민주주의, 정부의 관료화 같은 다른 원인도 있지만 전근대기의 마법에 걸린 우주를 겉으 로나마 마법에서 깨어난, 무의미한 기계적인 우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과학적인 세계관이었다. 마법에 걸린 우주에서는 인간의 목적에 대한 질문이 합리적이었지만, 사물들의 거대한 질서 안에서 더 이상 인간에게 명백한 자리 가 없는 기계적인 우주와는 맞지 않았다. 이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거대 질문을 던질 필요로 귀결되었다. 1834년에 토머스 칼라일이라는 한 남자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간단해 보이는 질문을 넌지시 던졌고, 그 이후로 우리는 전사회적으로 그 실존적인 후과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무엇보다 주어진 상 황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과학적 세계관이 퍼져 나가고 그로 인해 세계가 마법에서 깨어나면서 발명된 질문 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을 비롯한 우주 전체에는 자명한 목적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잃어버린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주 중 요해졌다. 그리고 한때 우리에게 있었던 것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이 발명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의미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존적 위기를 겪게 된 모든 책임을 과학에 떠 넘기지는 말자. 과학적 세계관이 인간의 의식에 진입한 이후, 누군가는 우리가 삶을 유의미한 어떤 것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을 발명해야 했다. 
-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쓰는 것은 부품 하나를 잃어버렸거나 사용 설명서도 없는 상태에서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표준적인 삼단짜리 빌리 책장을 가지고 정교한 마라커 캐비닛을 조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걸 기대하면 뭔가 허전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 (줄리언 바지니,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 2004)
- “만물에 목적이 있어야 하나?"
신이 물었다. "당연하죠.” 인간이 말했다. 
“그럼 이 만물의 목적을 생각하는 건 네게 맡기마.” 
신이 말했다. 그리고 신은 가버렸다.
(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 1963)
-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장치들만 가지고서는 인생에서 무엇에 가치를 둘지 또는 무엇을 좇을지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맨땅에서 우리 자신의 가치를 발명하는 것은 니체, 사르트르, 그 외 실존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일임 이 드러났다. 이들은 결국 전통의 족쇄에서 해방된, 자립적인 소위 초인 - 일반인의 쩨쩨한 도덕률을 초월한 개인은 스스 로 가치를 창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치의 기틀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제시하려는 이로부터 방향성과 지침을 구하곤 한다. 과거 성직자, 부족의 연장자, 공동체 지도자에게 주어겼던 사회적 지위는 자기계발 전문가, 자기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정치인, 광고업자, 가짜 예언자 같은 사람들에게 넘 어갔다. 낡은 세계관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이 교체를 신뢰하는 것은 고사하고 좋아하는지조차 자신이 없다. 중세 세계관의 마법에 홀린 확실성으로부터 마법에서 깨어난 근대의 인간 중심적이고 의심에 찌든 세계관으로 전환하는 문화적·역사적 과정은 몇 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개인은 이 정신적인 과정을 단 한 번의 생애에, 심지어는 자신 의 삶에서 단 한 번의 시기에 거친다. 하나의 문화적 과정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런 이행은 흥미로운 역사적 전개다. 반면 개 인 내부의 과정으로서는 비극적일 때가 있어서 완전히 압도당 하는 감정에 휩싸일 정도의 위기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 수렁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고, 당신이 알건 모르건 간에 당신은 이미 꾸준히 의미를 찾고 만드는 데 필요한 많은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 인생 전반에 대한 보편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인생은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하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인 의미는 없고, 우리 각자가 우리의 인생에 부여한 의미, 개별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한 명 한 명이 개별적인 소설책 한 권에 해당하는 개별적인 줄거리가 있을 뿐. (아나이스 닌, 《일기》 2권, 1967)
-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때 우주의 기원 같은 거대한 형 이상학적 문제에서 시작하지 마라. 대신 당신의 삶의 경험에서 시작하라.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시작하라. 최근 경험에 대해 잠시 성찰하라. 어떤 경험이 다른 경험보다 더 의미 있었는가. 그리고 어떤 경험이 별로 의미가 없었는가. 지금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나면 미래에 그런 경험을 더 많이 보장하는 선택을 하는 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 다. 어떤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이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순 간이라면 어떻게 하면 그 사람과 더 자주 함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 어떤 업무가 다른 일에 비해 당신에게 더 의미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그 재주를 더 잘 이용하는 경력을 쌓을 수 있 을지를 생각하라. 자신의 인생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유의미함과 충만함의 감각을 키워라. 그리고 만일 여전히 약간 막막한 상태라도 걱정하지 마라. 몇 가지 핵심 가치들은 우리 대부분이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의미를 얻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 당신이 2020년에 경험했던 유의미함은 2030년이 되었을 때도 당신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생은 의미의 정도가 제각각인 다양한 일시적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처럼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유의 미함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실 오래 지속되는 흰색 이 하루만 지속되는 흰색보다 더 흰색이 아니듯, 선은 영원하 다고 해서 더 선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더 일반적으로 인 생의 경우에도 그렇다. 당신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유의미함을 경험하는지는 먼 미래의 어떤 신비한 지점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당신의 삶을 통해 결정된다. 인생 안에서의 의미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인생이 의미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의미 있고 유일무이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당신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 을 알고 있으면 하루하루를 훨씬 값지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 이 된다. 이 때문에 존재의 유한함을 뼈아프게 느끼게 해주는 근사 체험 - 가령 불치병의 극복을 한 사람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재설정하고 극적인 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 자기결정이론은 기본적인 심리적 필요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자율성, 유능감, 관계 맺음이다. 27 이 세 가지 필요가 충 족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은 안녕과 고유한 동기를, 그리고 사실 상 인생 안에서의 더 많은 의미를 경험한다. 자율성은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선호에 따라 살아가기 위해 선택을 하고, 개인적으로 흥미롭 다고 여기는 자기표현 활동에 참여하며, 당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유능감은 당신 인생에서 통 제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능력 에 자신감을 갖고, 자신이 수행한 일에서 솜씨가 좋다는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리라고 믿는다. 유능감은 정적이지 않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기술을 더 연마할 때는 유 능감이라는 기분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관계 맺음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을 돌보고 돌봄을 받기도 한다는 기분을 말한다.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필요는 자기결정, 안 녕, 의미의 감각이 펼쳐질 수 있는 심리적 필요의 삼각편대를 구성한다. 하지만 의미 있는 삶과 관련해, 나는 이 등식에서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고 느낀다.
- 어쩌다가 복잡한 정신적·감정적 구조물을 갖게 된 우리라는 존재의 유형에 대해 알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 《행복의 가설》, 2006)
- 기본적인 필요와 관련된 목표에 진척이 있을 때는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이런 필요와 관련이 없는 외부적인 목표의 성취에서 진척이 있을 때는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향상되지 않았다. 사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걱정이나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이 약간 증가했다. 그러므로 부, 명예, 외모를 추구하는 학생들은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진척을 보이긴 했지만 이런 진척은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좋지 않은 기분이 들게 했다. 목표를 현명하게 선택하라. 자율 성, 유능감, 관계 맺음, 그리고 이 경우에는 선의와 관련된 목표들 은 당신의 안녕함을 향상시킬 수 있다. 반면 이런 기본적인 필요와 무관한 목표들은 성취를 한다 해도 당신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다.
- 희망 사항에 대해 신중하라. 어느 날 문득 이루어질 수 있으니.
- 사랑, 우정, 의분, 공감을 통해 타인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는 한 당신의 인생은 가치가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1970)
- 자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 안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우주는 고요할 수 있지만 친구와 가족, 동료와 공동체는 우리의 인생을 그들의 목소리와 에너지, 생동감으로 채운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의 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리를 가장 아끼는 사람 이다. 철학자 안티 카우피넨의 주장처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들에게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어떤 아이에게 누구든 선물을 사줄 수 있지만 “부모가 손수 만들어준 선물과 같은 의 미를 가진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가까운 관계 에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고유하고 대체 불 가능한 역할을 하곤 한다.
-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든 본성에는 분명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것을 구경하는 즐거움 외에는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1759)
- 당신 자신을 믿으라. 모든 심장은 그 쇠줄에 맞춰 진동하나니 (랠프 왈도 에머슨, 《자기신뢰》, 1841)
- 가장 제약이 심한 환경에서도 우리의 힘 안에는 여전히 자유의 씨앗, 우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지를 선 택할 자유의 씨앗이 있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인간의 심장 에서 그 빛을 깜박이면 신은 그에게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인생에는 제약이 있다. 가령 죄수는 자기 마음대로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죄수라 해도 투옥 상태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쟁포로로 9개월을 보냈던 사르트르는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했다. 빅터 프랭클 역시 비슷한 정서를 글로 표현했다. “강제수용소에 살았던 우리는 막사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마지막 빵 조각을 내어준 남자들을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의 수는 몇 안 되었을지 몰라도, 인간에게서 모든 걸 다 빼앗아가더라도 한 가지는 가 져가지 못한다는 충분한 증거였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기만의 방식을 결 정할 최후의 자유였다. 
- 모든 인간 안에는 자연이 그를 빚어놓은 규모에 맞춰 스스로를 계발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가 있다. 자연이 그 사람 안에 넣어둔 것을 말로, 행동으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적절하고 건강하고 필연적이다. 아니, 그것은 의무, 심지어는 인간을 위한 의무의 축약본이다. 이곳 지구에서 인생의 의미는 이 안에 있다고 규정할 수 있다. 당신의 자아를 펼쳐내는 것, 당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토머스 칼라일, 《영웅숭배론》, 1840)
- 진화의 산물인 우리는 정확히 어떤 기술이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 관심 을 가진다. 만일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만한 기술을 개발하거나 연마 하는 것이 최고의 시간 활용법일 것이다. 게으름은 기술 습득보다 나쁜 생존전략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잘하는 데서 더 나은 기분과 만족감을 느끼고 새로운 기술을 학습할 기회를 물색하는 강력한 동기를 심어놓았다. 학습과 개인적인 성장은 높은 만족과 참여의 근원이고, 우리 인생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통달한 활 동에 몰두할 때는 거기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바깥세상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 일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알아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다. (톨스토이, 발레리야에게 보내는 편지, 1856)
-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의 저자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는 의미란 “어떤 거창한 드러냄이 아니”라고 주장한 다. “그것은 신문가판대 상인에게 잠시 멈춰 서서 '안녕하세 요' 하고 인사하는 것, 직장에서 시무룩해 보이는 동료에게 다 가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상태가 더 나아지도록 돕는 것이고, 아이에게 좋은 부모 또는 멘토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충족의 소소한 순간들이지만, 개인적 충족의 작은 순간들은 우리가 마치 지켜보는 이가 없다는 듯이 춤을 추거 나, 매일의 출퇴근시간에 어떤 책에 몰입할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여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우리의 과거 - 당신이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했던 어떤 것 - 에, 또는 우리가 품고 있는 미래의 어떤 값진 목표에 연결 시킬 때 이런 순간들의 유의미함은 훨씬 확장될 것이다. 당신 이 인생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당신 자신과의, 그리고 당 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사람들, 가치, 관심사와의 관계 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톨스토이가 인생의 최저 점에 있는 동안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심각한 실존의 위기에 시달리던 톨스토이는 깊이 파고들다 가 자기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게 뭔지를 분명히 밝히기 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을 이 세상에 붙들어매주는 “두 방울의 꿀” 덕분에 우울함을 안기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글쓰기에 대한 사랑" 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와 자신과의 관계였던 것이다. 당신의 두 방울은 무엇인가?
- 어떤 오래된 동유럽 이야기에 나오는 한 여행자는 평화롭게 스텝 지대를 걷다가 갑자기 호랑이와 마주친다. 목숨을 지키 기 위해 달리던 여행자는 벼랑 끝에 이르러 뛰어내린다. 경악 스럽게도 벼랑 밑에는 거대한 악어가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기 다리고 있다. 여행자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재빨리 벼 랑을 따라 자라고 있는 야생 관목의 가지를 부여잡는다. 여행 자는 두 가지 끔찍한 선택지 사이에 놓이게 된다. 위에 있는 호랑이에게 먹힐 것인가, 아래 있는 악어에게 먹힐 것인가. 설상 가상 그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쥐 두 마리가 쏠아대기 시 작한다.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 인생의 상황을 설명한다. 실존적 위기 상황에 놓인 톨스토이는 자신을 쥐와 악어에 만 집중하느라 인생이 주는 그 어떤 것도 즐기지 못하는 이 여 행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문답 같은 이 이야기에는 톨스토이가 도출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여행자는 피 할 수 없는 죽음에 집착하기보다 현재의 순간에 아직 유효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집중한다. 나뭇가지 옆에는 탐스러운 딸기 몇 개가 있고, 그는 다른 손으로 그 딸기를 집는다. 딸기를 먹는 순간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달콤할 수가 있나!!
- 인생은 어느 날 끝날 수 있다. 나머지 다른 모든 날에는 그렇지 않다. 그 다른 모든 날들에는 아름다움을 맛보고, 의미를 발 견하고, 달콤함을 맛볼 기회가 있다. 멋진 인생은 일상생활의 작은 경이로움의 진가를 아는 인생이다. 유명한 선불교 사상 가인 앨런 W. 와츠는 이 아이디어를 확장해서, 인생을 음악에 비유한다. 그는 음악에서는 작곡의 끝을 작곡의 핵심으로 여 기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어떤 노래를 연주할 때 그것을 더 빨리 연주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도 아니다. 음악에서 의미 있는 것은 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인생을 마지막에 진지한 목적이 있는 여행이나 순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것은 성공이든 뭐든, 어쩌면 사후의 천국 같은 그 마지막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되고 말았고, 거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핵심을 놓쳤다. 인생은 음악과 같은 일이고, 그러므로 당신은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노래를 하거나 춤을 췄어야 했다. 어느 날 음악은 끝날 것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침묵을 기다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아직 음악이 당신을 위해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가서 춤에 몸을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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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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