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맛

인문 2021. 6. 13. 08:56

- 이케다 가쿠나에 박사와 스즈키 사부로스케 사장이 손을 잡고 만들어 낸 아지노모도는 단순히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라 서구화를 이루고자 하는 꿈의 상징이었다. 서구의 과학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것이기 도 했으며, 위생적이고 영양이 풍부했다는 점에서도 서구화로 가는 길 이라고 믿겼다.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에서 서구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영양과 체력 문제, 그리고 병사들에게 줄 영양가 있는 식품문제를 해결해야 했다는 점도 아지노모도의 탄생에 한 몫했다. 
- 결국 아지노모도의 명맥을 미원이 그대로 이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우리의 입맛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맛의 제국을 미원이 계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사이, 한국인들의 조미료 사용량은 크게 늘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음식 소비량 또한 자연스럽 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외식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음식점들이 생겨났는 데 짧은 시간에 맛을 내기 위해서는 조미료의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편 리함도 편리함이었지만 사람들의 입맛이 이미 아지노모도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원과 미풍의 전쟁은 1975년 다시다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다. 다시다는 쇠고기와 해물로 나눠서 제품을 출시했으며, 천연 재료를 사용한다.
- 다시다가 나오면서 아지노모도와 미원으 로 이어지는 맛의 제국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해물 다시다의 로고는 제일제당과 합작관계에 있던 아지노모도(옛 스즈키 상점)의 제품인 혼다시의 가다랑이 로고와 많이 닮았다. 쇠고기 다시다의 로고 역시 유사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화학조미료에 대한 거 부감이 생겨난다. 미국에서는 아지노모도를 대량으로 사용한 중국음식 을 먹고 구토와 어지러움을 느끼는 일이 반복되면서 1960년대부터 MSG 유해성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건강을 강조하는 시절이 되면서 '화학조미료'라는 타이틀은 '효율과 첨단' 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널리 퍼진 상황에서도 화학조미료의 사용량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특히 음식점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 로 화학조미료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미원 한 숟갈의 맛을 내기 위해서 는 비싼 재료들을 대량으로 사용해서 오랜 시간을 소모시켜가며 감칠맛 을 우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인건비와 재료비를 한 푼이라도 줄여야 경 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음식점들로서는 화학조미료가 주는 효율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또한 백 년 간에 걸쳐 대를 이어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화학조미료 의 맛을 대체하는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모험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렇게 아지노모도는 오늘날에도 우리 곁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수십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사람이 가지는 까다로운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를 뒤집어 얘 기하자면 일단 한 번 입맛으로 자리 잡게 되면 깊숙하게 뿌리를 내려 새 로운 전통이 된다는 의미도 된다. 덕분에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 하고 철수한 이후에도 일제가 손을 뻗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아지노모도 가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다. 정치가 음식의 전파와 이용에 얼마나 큰 영 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꼽아보라면 바로 아지 노모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스즈키 상점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팔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굴렀던 조 선은 광복과 함께 일본이라는 지배 권력을 몰아냈다. 하지만 아지노모도 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밀수품으로, 미원과 미풍 그리고 다시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대한민국에 계속 남았고, 이윽고 우리의 입맛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본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맛의 제국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 조선으로 건너온 중국인들 중에는 상인뿐만 아니라 '쿨리'라고 불리 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음식이 필요했 다. 낯선 조선 음식들에 당장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택한 음식 이 바로 짜지앙미엔이었다. 조선으로 건너온 중국인 대부분이 산둥 출신 이었는데 짜지앙미엔은 바로 그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밀가루로 만든 면에다가 춘장을 비벼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고, 대파의 아랫 부분 을 춘장에 찍어서 반찬 삼아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값도 싼 편이었다. 
그래서 초창기 짜지앙미엔은 공화춘과 같은 식당이 아니라 손수레를 끌거나 지게를 짊어진 장사꾼들이 노동자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음식이 었다. 조선으로 건너온 화교들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도 이런 음식들을 판매하게 만들었다. 가족이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시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조선 사람들이 짜장면만을 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둥 지 역의 요리인 노채魯菜가 모두 바다를 건너와서 이 땅에 선보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짜장면만큼이나 익숙한 라조기와 깐풍기, 팔보채 같은 것들이 바로 산둥의 요리들이다. 1880년대 한양에 중국 요리를 판매하는 이태주 점과 호떡을 파는 곳으로 보이는 복성면포방이 생긴 것도 이런 이유 때 문이었다. 이태주점 같은 경우는 숙박업도 겸해서 혼자 조선에 온 화교 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 1948년 산둥 출신의 화교 왕송산은 서울 용산구 문배동에 영화장유라 는 회사를 차리고 춘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사자표 춘장에는 기존의 춘장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캐러멜을 섞은 것이다. 그 러면서 춘장은 검은 색을 띄고 달콤한 맛을 내게 된다.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춘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짜장면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후 짜장면의 운명은 화교들의 운명만큼이나 소용돌이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짜장면은 '청요리' 가운데 하나인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이미지는 광복 후에 극적으로 변한다. 이승만 정권과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지속적으로 화교를 탄압했다. 박정희가 의장으로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얻고자 1962년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화교들을 겨냥한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아울러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시켰다. 당시 대한민국에 외국 국적자의 대부분이 화교라는 점을 감안하면 명백하게 그들을 노린 조치였다. 덕분에 화교들에게는 큰 요릿집을 운영하면서 연 회와 혼례 등을 치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작은 규모로 쪼그라들면서 한 때 외식의 꽃이었던 청요릿집들은 이제 동 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이 되었다.
대신 그로 인해 짜장면은 뜻하지 않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앞서 소개한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함께 미국의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대량으 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쏟아져 들어온 밀가루는 수십만 톤에 달했지만 쌀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좀처럼 밀가루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이에 정부에서는 혼분식 장려 정책을 강력하게 펼쳐나간다. 쌀에 잡곡을 넣은 혼식과 밀가루 음식을 뜻하는 분식에는 쌀의 소비 량을 줄이고, 밀가루를 소비하게 만들려는 정부의 뜻이 담겨 있었다. 정 부에서는 학생들이 학교로 가져오는 도시락부터 음식점까지 강력하게 단속하며 혼분식을 준수하는지 감시했다. 설렁탕이나 추어탕에 국수를 넣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추정된다. 
다른 음식점들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중국집들은 호황을 맞게 된다. 구호물자로 들어온 값싼 밀가루를 원료로 쓸 수 있는 짜장면이 있었 기 때문이다. 그에 발맞춰서 중국집들의 숫자 또한 급속도로 늘어나서 1960년대 후반에는 전국에서 4,000여 곳을 넘어섰다.


- 약이라는 핑계로 소고기 육포를 띄엄띄엄 먹던 일본인들이 천 년 넘게 가까이 하지 않았던 고기를 다시 먹게 된 배경에도 역시 권력의 작용이 있었다. 1872년, 일왕이 육식 금지령을 해제한 것이다. 강력한 서구 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고기와 우유를 배불리 먹어야 한다고 봤기 때 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 전인 1868년 일어난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권력 구조를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 이처럼 고기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고기를 먹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덴뿌라와 커틀릿의 결합인 돈까스였다.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온 덴뿌라는 일본인들이 굉장히 좋아 하는 요리였다. 커틀릿은 프랑스 요리인 코틀레트 Cotelettes에서 유래되었 다. 코틀레트는 소나 양고기를 뼈채로 얇게 저며서 밀가루와 계란 노른자, 빵가루를 입혀 튀기는 방식의 요리다. 영어로 커틀릿이라고 했는데, 물고기나 채소를 튀기는 덴뿌라와 재료만 다를 뿐 가공 방식은 상당히 비슷했다. 따라서 육식에 익숙지 않아서 약으로 먹을 정도의 일본인들도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커틀릿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가쓰레스'가 된다. 하지만 커틀릿이 돈까스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정을 더 거쳐야만 했다. 우선 소나 돼지, 닭 같은 다양한 육재료들은 돼지고기로 통일되었다. 일본인들에게 처음 선보인 가쓰레스는 소로 만든 비프 가쓰레스, 돼지로 만든 포크 가쓰레 스, 닭으로 만든 치킨 가쓰레스로 나뉜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것은 포크 가쓰레스였다. 당시 돼지가 가장 구하기 쉽고 값이 쌌기 때문이다. 거기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로 서는 가급적 뼈가 없는 고기를 써야만 했는데 포크 가쓰레스에 들어가는 돼지고기에는 뼈가 없었다.
- 포크 가쓰레스는 1895년 도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가 안 돼서 파리를 날렸지만 인근에 사 는 외국인들에게 호평을 받으면서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포크 가쓰레쓰가 대세가 된 것은 20세기 초부터였다. 그러면서 몇 가지 변화 들이 추가되었다.
일단 가공 과정에서 포크 가쓰레스에 들어가는 고기가 커틀릿보다 두 툼해졌다. 고기가 두꺼워지면서 빵가루 또한 커틀릿보다 굵은 것으로 묻 혔다. 두꺼운 고기를 좀 더 오랫동안 익히고 식감을 좋게 만들려는 의도 였을 것이다. 버터를 녹인 프라이팬에 굽는 커틀릿과는 다르게 포크 가 쓰레스는 기름을 충분히 두른 다음 덴뿌라처럼 튀겼다. 이때 굵은 빵가루가 기름에 부풀어 오르면서 식감이 바삭해졌다.
포크 가쓰레쓰에 들어가는 소스 역시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영국에 서 만든 우스타 소스에 간장을 가미했다. 함께 제공되는 음식들 역시 예 사롭지 않다. 처음에는 삶았다가 나중에는 생으로 제공된 양배추의 경우 아삭하고 시원한 느낌을 줌으로써 포크 가쓰레스의 기름기를 날려버렸 다. 거기에 밥과 미소시루를 제공해서 포만감을 극대화시켰다.
일본식으로 제공되는 포크 가쓰레쓰는 엄청난 고열량을 가진 음식이다. 일본의 통치자들이 바랐던 것처럼 하루 빨리 일본인들이 서양인들과 비슷하게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 돈까스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그들과 같아지겠다는 근대 일본의 야망이 밑바탕에 깔린 음식이다. 천 년 넘게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국가를 서양처럼 발전시키겠다는 대의명분 아래 육식을 시작했다. 그렇게 돈까스는 우리의 짱장면처럼 일본에서 일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시험을 칠 때 미끄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미역국을 피하고 졸업식 때 짜장면을 먹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중요한 시험을 치기 전이나 운동 시합을 나가기 전에 돈까스를 먹는 풍습이 있다. '까스'가 승리를 뜻하는 '가츠勝)'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 경양식은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린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주머니 사정이 좋아진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외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뜬금 없는 곤경을 겪기도 한다. 
1970년대 초반 서울시가 돈까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려고 시도했 다. 소바가 메밀국수, 우동이 밀국수로 바뀌는 와중에 돈까스 역시 '포크 스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하지만 결국 돈까스라는 이름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서울시의 행정명령 정도로는 반세기 넘게 사용되었던 이름 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까스를 팔던 경양식의 전성시대는 1990년대 접어들면서 한풀 꺾이 게 된다.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맥도날드와 KFC를 비 롯한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왔고, 후라이드 치킨과 양념치킨 이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기름에 튀긴 고기라는 돈까스의 아성 을 결정적으로 흔들어버린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우후죽순처럼 들어 선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이들은 고급 레스토랑보다 싼 가격에 스테이 크를 비롯한 요리들을 제공해줬고, 통신사 할인 혜택이라는 공격적인 정 책을 펼치면서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낡은 느낌을 주는 경양식은 더욱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경양식의 쇠퇴와 더불어서 돈까스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하 게 된다. 경양식당에서 빠져나와 돈까스 전문점과 기사식당, 분식집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소스를 비롯해서 부재료들을 공급해주는 곳들도 늘어 났고, 워낙 잘 알려진 음식인데다가 외국에서 들어온 요리라고는 생각되 지 않을 만큼 익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까스는 정통 한식집만 아니 면 어디에서 팔아도 어색하지 않았고, 찾는 사람들도 더욱 늘어났다.
나아가 한국 음식과의 조합을 통한 변형도 이뤄졌는데 뚝배기 돈까스 나 돈까스 찌개가 대표적이다. 기사식당에서는 돈까스와 함께 풋고추와 쌈장을 준다. 또 다른 일본 음식인 카레와 합친 카레 돈까스를 파는 곳들도 늘어났다. 매운 소스를 이용해서 새빨갛고 매운 돈까스를 만들었다는 것 또한 한국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중국인들이 모든 요리를 기름에 볶는 것처럼 인도인들은 모든 요리에 향신료를 뿌렸다. 마살라는 향신료를 넣어서 만든 일종의 소스로 인도 지방에서 재배되는 인디카 종의 쌀에 잘 어울렸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화덕에 구운 빵의 일종인 난에 찍어먹기도 편했다. 영국과 일본으로 건 너오면서 요리라는 개념이 더해졌지만 본래 인도의 커리는 음식에 곁들 이거나 찍어먹는 케찹 같은 소스나 고추장 같은 장에 가깝다. 다만 다양 한 향신료를 써서 강한 맛이 났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는 신기하게 느껴 졌던 것이다.
그리고 커리는 괴혈병에 시달리는 선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강한 향신료 덕분에 다소 상한 채소도 문제없이 먹을 수 있게 해줬고, 다른 재료들보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를 오가는 선원들이 자신들이 먹던 스튜에 넣는 것을 시작으로 커리는 영국에 발을 디뎠다.
공식적으로 커리를 영국에 가장 먼저 소개한 인물은 동인도 회사 직 원이자 훗날 인도 총독을 역임하게 되는 워런 헤이스팅스 Warren Hasing 였 다. 바다 건너에서 온 커리는 영국인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한 가지 문제 가 있었다. 커리에 들어가는 다양한 향신료들을 영국에서 구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그 재료들을 구했다고 해도 커리로 만드는 과정 자체가 꽤 복잡하고 낯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역시 자본이었다. 커리가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식품회사가 커리를 가루로 만든 파우더를 개발한 것이다. 간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커리는 영국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마치 우리의 짜장면처럼 말이다.
- 인도에서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변신한 커리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레로 또 다시 변신을 한다. 영국인들이 커리 를 먹은 것이 괴혈병 때문이었던 것처럼, 일본 역시 병사들이 앓고 있던 각기병 때문에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다. 후진적이고 낙후된 아시아에서 벗어나 문명화된 서구를 본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서구화에 대한 노력 중에서도 일본이 가장 급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군대였다.
- 1969년 오뚜기의 전신인 풍림상사가 국내 식품회사로서는 처음으로 분말카레를 개발해 본격적으로 판매하면서 한국인들의 카레 사랑은 더 욱 깊어졌다. 이제 카레는 가난한 고학생이 침을 흘리면서 바라봐야 하는 환상의 요리에서 혼분식의 상징이자 누구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요리가 되었다.
카레는 1981년 식품회사인 오뚜기가 전자레인지에 간단하게 돌려서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식품인 3분 카레를 내놓으면서 한국인들에게 더욱 가까워졌다. 재료를 넣고 볶은 다음에 카레 가루를 넣어야 하는 과정까지 생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맞벌이와 1인 가정이 늘어나면서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의 수요가 늘어났고, 한 끼를 간단하게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 먹던 카레 같은 요리를 선택했다. 그렇게 3분 카레와 같은 레토르트 식품 또한 카레가 가정식으로 정착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카레의 대중화는 카레데이로 이어진다. 빼빼로를 먹는 빼빼로데이나 짜장면을 먹는 블랙데이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매년 5월 14일은 노란 옷을 입고 카레를 먹는 카레데이다.


-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사람들을 통해 서양 빵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밀가루를 발효시켜서 굽는 빵은 쌀밥을 좋아하는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스프나 스튜와 같이 먹거나 버터를 발라서 먹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그런 것들 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 사람에게 빵이란 반찬 없는 맨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기무라 야스베는 서양 사람들이 먹는 빵에 일본인들이 좋아할 만한 뭔가를 넣는다면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 믿었다. 그가 생각해낸 해 답은 단팥이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이미 수백 년 동안 단팥을 넣은 만두인 만쥬를 오랫 동안 먹어왔다. 1341년, 원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류잔 선사의 곁에 임정인林剩이라는 중국인이 있었다. 일본에 온 그는 사찰에 머물면 서 중국에서 먹던 만두를 빚어서 팔았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육식 금지령이 시행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처럼 고기를 만두 속에 넣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기 대신 일본인들이 좋아하던 단팥 을 넣어서 만두를 빚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만두는 다들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단팥만두가 맛있다는 소문은 일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호기심을 느낀 일왕은 임정인의 단팥만두를 먹어보고는 크게 감탄해 궁 녀를 보내서 혼인을 시키기까지 했다. 이후 일본 왕실의 인정까지 받은 단팥만두인 만쥬는 일본의 전통과자인 화과자로 이어지게 되면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 이즈모야에서 만들었던 것과 이성당이 만드는 단팥빵은 재료부터 만드는 방식까지 여러 모로 다르다. 그럼에도 단팥빵이 근대를 지나 현대 까지 이어진 것은 일본을 통해 시작된 서구화와 근대화가 우리에게 정 착되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성당 외에도 1946년 태극당을 시작으로 1956년 대전의 성심당과 같이 전국 곳곳에 제과점들이 생겨났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쌀을 아끼기 위해서 정부에서 취한 혼분식 장려 정책의 영향으로 제과점들은 호황을 맞는다. 거기다 젊은 청춘 남 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을 받으면서 제과점과 그곳에서 파는 단팥빵 은 우리 곁에 완전하게 자리 잡는다.


- 문헌 기록들을 보면 김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였고, 조선시 대에 들어서부터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종이처럼 펴진 형태의 김을 먹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보면 김을 가리켜 '해의海衣'라고 하면서 바다에서 나는 이끼 같은 것을 종이처럼 펴서 먹는다고 소개한다.
이끼 형태의 김을 굳이 번거로운 가공 과정을 거쳐서 종이처럼 만든 이유는 단 하나, 밥에 싸서 먹기 위해서다. 그 이전에는 채취한 그대로 간 을 맞춰서 반찬으로 먹는 형태였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밥 에 싸 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 사람들이 유독 좋아했던 상추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은 해의 말고도 바다의 이끼라는 뜻의 '해태海者’ 라고도 불렸으며 여러 이름으로 불린 만큼 밥에 곁들이는 반찬으로 흔하게 사용되었다.
- 순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김을 어떻게 먹었는 지가 상세하게 나온다. '세시기’란 계절의 변화에 따른 풍습들을 기록했 다는 뜻으로, 《동국세시기》는 조선 후기 풍습사를 연구하는 데 아주 중 요한 자료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귀밝이술이나 부럼 같은 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복쌈이다. 정월 대보 름이 되면 약밥을 만들어 먹고, 붉은 팥죽을 쑤어먹거나 부럼을 깨물면 서 일 년 동안 병치레가 없기를 기원한다. 이때 채소 잎이나 김에 밥을 싸 서 먹기도 하는데 이것을 복쌈이라고 부른다. 이 방식 말고도 김을 잘게 부숴서 밥과 함께 먹거나 주먹밥 형태로 뭉쳐서 먹기도 했다. 오늘날의 김밥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김에 밥을 싸서 먹는다는 바탕 자체는 같다.
- 대량 생산된 김은 초밥과의 만남을 통해 '노리마키海苔卷' 라는 새로운 요리로 나아간다. 노리마키는 초밥에서 비롯된 일종의 김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초밥의 시작은 보관용이었다. 물에서 잡은 생선을 오랫 동안 보관하기 위해 뱃속에 밥을 넣어 상하지 않도록 처리한 것이 초밥 의 기원이다. 나레 스시라고 불리는 이 음식은 원래 생선만 먹고 밥은 버 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밥도 먹기 시작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 시절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스시司의 전성시대 가 열린다. 이때 다양한 스시들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생선이나 해산물 대신 김을 이용한 노리마키다. 따라서 노리마키 또한 스시처럼 밥에 식초를 섞는다. 노리마키를 마는 대나무 발 역시 스시를 말 때 쓰는 것이 다. 대나무 발로 감아서 만든 이 독특한 스시는 굉장한 인기를 끌게 된다. 고급 요릿집부터 길거리 좌판까지 순식간에 퍼진 노리마키는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분화되었다.
- 노리마키의 영향을 받은 김밥은 격동기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다. 이재민들의 구호물품으로 김밥이 등장했고, 1970년 일본 JAL 항공의 보잉727기가 적군파에게 공중 납치되어서 김포공항에 착륙했을 때에도 승객 과 인질범들에게 김밥이 제공되었다. 1970년대 들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도박단들 또한 밥 먹을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김밥을 먹었다.
그리고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김밥 요리법에 변화가 생긴다. 박고지 대신 우엉이 들어가고, 고기와 어묵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 대부터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더욱 다양 해진다. 이처럼 점점 더 풍성해지는 김밥의 속재료는 한국인들의 형편이 시간이 지날수록 풍요로워졌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재료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풍부해졌지만 프랜차이즈 김밥 전문점 및 편의점 삼각김밥의 등장과 더불어서 소풍 때 주로 먹던 추억의 음식은 흔하고 대중적인 음 식으로 그 의미가 다시 바뀐다. 그렇게 김밥은 오늘날 분식집의 단골 메 뉴가 되었고, 노리마키의 그림자를 벗어버리면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다.
- 국풍81 이후 충무김밥은 통영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행사 이후 신문에서 여름 휴가지로 통영과 인근의 한려수도를 소개할 때 항상 별미로 소개되면서 충무김밥은 더욱 유명세를 탄다. 충무김밥의 인 기가 높아지자 처음 만들어서 판매했던 세 할머니는 각각 음식점을 따 로 차렸고, 뒤따라 다른 사람들도 충무김밥을 판매한다. 그리고 1980년 대 중반에는 서울에도 충무김밥 전문점이 생겼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도 판매되기 시작한다. 노리마키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타면 서 김복쌈에 익숙했던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면 충무김밥은 어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지역 특산품이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진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 서양에서는 빙수와 비슷한 음식으로 셔벗Sharhet이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로 원정을 떠났을 때 더위에 지친 병사들을 위 해 눈과 얼음을 음료수와 함께 동굴에 넣어두고 차갑게 식힌 다음 나눠 먹 었던 것이 그 시작으로 전해진다. 이후 우리에게는 로마 시를 불태운 폭군 으로 익숙한 로마의 네로 황제가 알프스의 만년설을 포도주에 적신 과일 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이처럼 얼음을 먹으며 더위를 이겨내던 전통은 중세에 접어들어 변화를 맞는다. 11세기경, 십자군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중동을 침략하면서였다. 당시 유럽보다 선진적이었던 중동에는 신기한 문물 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먹던 샬바드였다. 십자군에 참전한 유럽인들은 이 신기한 샬바드에 매혹되어서 제조법을 고향으로 가져왔다. 이후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포도주와 주스를 얼려 서 먹었는데 곧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소르베borhet 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정찬 코스의 마지막 디저트로 자리 잡았다.
중국에서는 약 삼천 년 전부터 눈과 얼음에 과일즙을 섞어서 먹었다. 고 전해진다. 당시대 때에는 시장에서 얼음이 든 음료를 팔았고, 송宋시 대 때에는 얼음에 꿀과 다양한 과일들을 넣어서 마셨다. 특히 밀사빙 이라는 음식은 얼음을 간 다음 꿀과 팥을 넣어서 만든 것으로 오늘날의 팥빙수와 유사한 음식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일본 역시 오래전부터 얼음을 이용해 더위를 이겨냈다. 일본도 우리 나라의 석빙고 같은 얼음 저장시설을 예전부터 갖추고 있었다. 11세기 일본 궁궐의 모습을 담은 《마쿠라노소시子》를 보면 한여름에 얼음을 칼로 갈아서 쉽게 녹지 않도록 금속 그릇에 담고 칡즙을 뿌려서 먹었다 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얼음을 먹기 쉽게 칼로 갈았다는 점과 다른 맛을 내기 위해 칡즙을 뿌렸다는 점은 빙수 혹은 팥빙수의 원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조선이나 일본, 중국에서 한여름의 얼음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상품이었다. 따라서 얼음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적이었다. 
-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오랜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과 개방 정책을 취한다. 그러면서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시장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다시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해인 1869년, 오늘날 요코하마에 카키코오리를 파는 상점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대패로 얼음을 갈아서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오늘날 오키 나와인 류큐流球에서 가져온 설탕 시럽을 뿌려서 내놨다.
1870년 독일에서 얼음을 만드는 냉동 기술이 개발되었고, 1887년에 는 손으로 돌려서 얼음을 가는 수동식 빙삭기가 개발되었다. 1895년 청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타이완을 손에 넣게 되면서 열대 과일들을 비 교적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설탕 시럽 정도만 올라가던 카 키코오리에는 망고,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들로 만든 시럽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 얼음과 설탕을 구하기 쉬워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빙수집 외의 가게들 에서도 빙수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신문을 보면 여전히 팥 빙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팥빙수'라는 표현은 그보다 더 시간이 흐른 19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후 어느 순간부터 빙수라는 말이 사라지고 팥빙수로 대체된다. 대략 이때부터 빙수에 단팥 을 올려서 먹은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얼음과 과일 시럽으로 만드는 일본의 카키코오리와는 달리 한국의 빙수는 단팥이 잔뜩 올라간 팥빙수로 변신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화사나 생활사 전문가들은 씹는 맛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민족 특유의 입맛을 그 원 인으로 꼽는다. 단팥은 달콤하기도 하고 씹는 감촉을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차츰 많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과일 시럽을 대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커피를 처음 본 조선 사람들은 검고 진한 색깔과 진한 냄새를 접하고 탕약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서양에서 온 탕약이라는 뜻의 '양탕국'으로 불 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커피는 조선인들과 쉽게 가까워지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이미 가마솥에서 얻을 수 있는 숭늉이라는 훌륭한 음료가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커피가 우리 곁을 비집고 들 어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음료의 고향이 바로 서구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서구 열 강과 잇달아 조약을 맺었다. 그러면서 서구 열강들의 강력한 힘과 마주 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과 스스로의 차이를 직시한 다음 한반도에서 전 통과 역사는 삽시간에 버려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고, 서구의 것은 뭐든 지 좋은 것이니 서둘러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커피는 그런 서구화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넘어왔다.
- 1970년부터 한국에서 도 자체적으로 인스턴트 커피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1976년에는 세계 최 초로 설탕과 프리마까지 한꺼번에 들어간 인스턴트 믹스커피까지 나오 면서 커피는 마침내 '외제 수입품'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이 시기에 가정에서 가마솥이 사라지 는 현상과 맞물리면서 커피의 소비량이 늘었다고 얘기한다. 우리나라 전 통 가옥의 아궁이에 걸어놓은 가마솥은 크고 무거워서 따로 빼서 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물을 붓고 끓이는 방법으로 세척했고, 그 과정에서 생 긴 숭늉을 식사 후에 차처럼 마셨다. 한국의 전통 밥상은 코스별로 요리 가 나오지 않고 반찬부터 입가심까지 한꺼번에 한 밥상에 모두 놓고 먹기 때문에 디저트라는 개념이 따로 없었다. 구수한 숭늉은 식후에 마시 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가마솥 대신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가정에서는 더 이상 숭늉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대체해야 할 만한 식사 후 마실 것을 찾아 야 했다. 여러 가지 음료들 중에서 낙점된 것이 가장 대중적인 음료인 커 피다. 때마침 국내에서 생산이 되면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물에 타서 바 로 먹을 수 있었고, 다방이나 회사에서 자주 마셔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했다.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 88올림픽이 열릴 즈음 한국에서는 오래전에 자취를 감췄던 원두커피가 다시 찾아온다. 물론 외국에서 생활했던 유학파나 부유층들은 이전부터 원두커피를 마셔왔지만 다시 대중에게 널리 소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었다. 그리고 1999년 스타벅스가 이화여대 앞에 한국 1호점을 내면서 본 격적인 원두커피 시대가 열린다.
이후 한국 커피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데, 여전히 사랑받 고 있는 인스턴트 믹스커피에 더해 커피 전문 체인점들이 내놓은 원두커 피가 새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고종이 배우자를 잃 고 아라사 공사관으로 피난 온 슬픔을 달래고자 마셨던 쓰고 진한 양탕국이 한 세기가 지나면서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일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세계 평균의 세 배를 넘을 정도가 되었다. 바야흐로 '커피 공화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외국에서 들어온 음식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야만 한다. 식민지가 되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고, 식재료 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당위가 존재해야 한다. 커피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 당시까지 서구 열강을 상징하는 음료였다. 이에 따라 커피를 마셔야만 문명인이고 서구화의 길을 걷 는다는 환상이 언론을 통해 심어지면서 너도나도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재료를 구하기 힘들었지만 국산화가 되면서부터는 가 정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커피가 가지 고 있는 그 불가사의한 씁쓸한 맛에 한국인들은 서서히 중독되었다.
진한 원두커피는 물론 인스턴트 믹스커피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그 정체불명의 쓴 맛에는 서구 열강을 좇고자 했던 '모던 뽀이'들의 욕망과, 잦은 야근에도 정신을 붙들어야 했던 노동자들의 고단함과, 다방에서 얼 굴을 붉히며 토론했던 장발 대학생들의 열기와, 여전히 남아 있는 서구에 대한 희미한 동경을 담은 낭만이 모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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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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