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는 우리 삶에서 인식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을 그림언어로 이야기해준다. 언제나 인간의 영혼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이 힘은 인간이 수천 년 세월을 헤쳐나올 수 있게 해준 종의 지혜를 나타낸다.
- 대중 신앙의 통설에서 신화적 인물과 사건은 일 반적으로 사실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교육된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정말로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했고 그리스도는 정말로 부활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상으로는 이제 그런 '사실'이 과연 사실인지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터라 그 것이 뒷받침하는 도덕적 질서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역사상의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상상으로 꾸며내 역사에 투영한 에피소드로 해석한다면,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유카탄반도 등 세계 곳곳에 유사한 에피소드가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해진다. 비록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해도, 그 정도로 널리 사랑받은 신화적 상상이라면 그것은 '정신의 사실'을 나타내는 게 틀림없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친구 마야 데렌 Maya Deren은 종교적 신비를 “물질의 허구로 표현된 정신의 사실”이라고 정의했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선사학자는 당연히 신화가 사실로서는 거짓이며, 이렇 게 다양한 민족이 존재하는 세계에 유일한 선민도, 모든 이가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 진리도, 유일무이한 교회도 있을 수 없다는 것 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심리학자와 비교신화학자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들은 상징화된 '정신의 사실’을 밝혀내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한편 이것들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내, 과거의 옛 전통이 약화되는 가운데 인간이 우리 내면과 더불어 외부세계의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초월하려는 욕구는 신화로 이어지 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깨달음이 작용한다. 개인이 태어난 사회집단은 개인을 보살피고 지켜주며 개인 또한 거의 평생 사회집단을 보살피고 지키는 데 이바지해야 하지만, 그 집단은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개별적 존재로 의식하는 인간은 죽을 운명뿐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의 질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공동체는 개인의 질서에 우선하며, 인간은 이 초개체에 종속되어 참여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 삶을 알게 될 것이다. 유사시대와 선사시대를 아우르는 긴 시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나타난 어느 신화체계에서나 개인은 반드시 죽으며 사회질서는 그래도 계속될 것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깨달음이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례, 나아가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적 힘이었다.
-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아니라 대극이며, 인간은 조물주를 거역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됐다. 따라서 십자가의 대속蘭은 하나됨보다는 회개였다. 반면 불교에서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원과 분리된 것을 심리학적 시각에서 본다. 그것은 자신의 근원을 모르고 허상에 불과 한 것에 궁극적 실재를 부여하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한다. 성경의 설화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수준에서 불복종과 그에 대한 벌을 다루며 흡사 부모 자식 관계에서처럼 의존과 두려움, 공손함과 헌신을 심어준다면, 불교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들을 위 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실 이 둘에 공통되는 이미지는 구약성경보다, 불교보다, 심지어 인도보다도 더 오래됐다. 뱀과 나무, 영생의 정원 이미지는 초기 설형문자 문헌과 고대 수메르의 원통 인장, 전 세계 원시부족 촌락의 미술과 의례에 이미 나타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징에 관한 비교연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나 붓다가 실제로 살아 그들의 가르침과 연관된 기적을 행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세계의 종교 설화에는 이들의 위대한 삶과 유사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그 모두는 구세주, 영웅, 구 원받은 자들이 자기 안에 자리하는 공포의 담장을 통과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 이제는 잊힌 지 오래된 구석기 수렵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은 다양한 종의 동물이었고, 그들은 또한 인간의 스승이기도 했다. 인간은 동물의 생활양식을 보며 자연의 힘과 패턴을 배웠다. 부족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동물의 이름을 붙이고 의식에서 동 물 가면을 썼다. 반면 식물이 자연의 절대적인 요소인 열대 밀림 지역에서 생활하는 부족에게 모방의 대상은 식물이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기본 신화는 신을 죽여 시체를 해체하고 땅에 묻자 식용식물이 자라나 부족을 먹여 살렸다는 것이다. 모 든 식물문화에 공통되는 인신공양 의식은 이 원시신화를 충실하 게, 그리고 끝없이 재현한다. 식물계에서는 삶이 죽음에서 태어나고 푸른 새싹이 부패물에서 돋아나는데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죽은 자는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땅에 묻히고, 식물계의 순환은 인간의 신화와 의례에 본이 되어주었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도시국가 문명이 출현했던 중대한 시기에 사회의 시선은 땅에서 하늘로 옮겨갔다. 천체를 관측하는 신관들에 의해 일곱 천체, 다시 말해 태양과 달, 눈에 보이는 다섯 행성이 움직이지 않는 성좌 사이를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이 밝혀지면서였다. 우주의 경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가져온 우주적 질서 개념은 이내 사회 모델이 됐다.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은 왕은 달 또는 태양이며, 왕비는 여신의 행성 금성이고, 궁정의 고관들은 여러 별에 해당됐다. 서기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내려와서도 기독교 비잔틴 제국의 궁정에서 황제의 옥좌는 갖은 아름다운 천국의 이미지로 둘러싸 여 있었다. 황금 사자들이 꼬리를 흔들며 포효하고, 귀금속과 보 석으로 장식한 새들이 보석 나무에서 지저귀었다. 야만족의 사절이 반들거리는 대리석 복도를 걸어가 궁전 경비병과 요란하게 치장한 장군들과 신관들이 길게 늘어서서 낸 통로를 지나 태양의 관을 쓰고 휘황찬란한 옥좌에 위풍당당하게 꼼짝 않고 앉아 있는 황제 앞에 이르면, 그는 경외에 사로잡혀 납작 엎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머리를 들기 전에 기계장치가 옥좌를 공중 높이 들어올려, 경악한 사절이 마침내 일어서면 조금 전과는 다른 제의를 입은 황 제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에서 마치 신처럼 그를 내려다보고 있 을 것이다.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St. Cirillo of Alexandria는 황제를 지상에 현신한 신이라고 칭했다. 조금 과장됐을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제국 궁정이나 교황청 미사에서 벌이는 무언극도 크게 다르지 않다.
- 그럼 이제 오늘날 인류에게 적절하게 경외심을 일으킬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프로베니우스의 지적처럼 인간은 처음에 다양한 종이 존재하는 동물계를 신비하게 여기고 존경할 만한 가까운 이웃으로서 동물과 동일시하고 모방했다. 다음으로 인간이 주목한 것은 죽음이 생명으로 변화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식물계와 풍요 로운 대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대 근동에 대두된 초기 고도 문명과 더불어 인간의 관심은 움직이는 일곱 천체의 수학으로 옮겨갔다. 사신의 일곱 마리 회색 말과 부활이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또한 프로베니우스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에게 가장 가까운 신비로운 이웃은 동물도, 식물도, 빛이 이동하는 하늘 지붕도 아니다. 프로베니우스는 과학을 근거로 이들이 신화 적 힘을 잃었으며 신비의 중심은 이제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이때 말하는 인간은 이인칭의 이웃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도 '내가 알 고 관계한다고 상상하는 모습도 아니고, 그 자신의 모습이며 그렇기에 신비롭고 경이로운 존재다.
- 동양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부과된 지위의 가면이나 역할과 전적으로 동일시해야 하며, 주어 진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대양으로 스며드는 물방울처럼(유명한 이미지를 빌리자면) 자기 존재를 완전히 지워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재된 운명과 성격을 삶의 의미'와 '완성'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구와 달리, 동양에서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근대 공산주의 독재국가에서 그러하듯) 기존 사회질서이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개인은 그곳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되며, 소속된 사회집단의 원형과 동일시함으로써 복종할 것을 요구받는다. 동시에 개인적 삶을 향한 욕망은 모두 억제해야 한다. 교육은 주입 또는 오늘날 말하는 세뇌다. 브라만은 브라만이, 구두공은 구두공이, 전사는 전사가, 아내는 아내가 되어 야 하며 그 이상도 이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개인이 지워질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매우 평범한 역을 그럭저럭 연기하는 배우로만 알게 된다. 유아기에 두드러졌을지도 모르는 개성은 고작 몇 년 사이에 사라지고 사회적 전형 의 특징,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가면, 허상 또는 요샛말로 속을 채운 셔츠’ (영어에서 고리타분하고 젠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옮긴이) 가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가르침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권위 를 가진 교사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그의 성문화된 정보뿐 아니라 버릇, 판단 기준, 전반적인 페르소나의 이미지를 열심히 흡수하려 는 학생이 이상적인 학생이다. 학생 또한 이 페르소나가 말 그대로 '되어야 한다. 어차피 달리 될 것도 없고,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자 아라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적 의견도 호불호도 독창적인 생 각이나 목표도 없으니까.
- 붓다Budhha’는 ‘깨어난 자'를 의미한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동사 budh에서 나왔는데, 깊이를 가늠하다, 바닥까지 꿰뚫어보다 또는 인지하다, 알다, 지각하다, 깨어나다'를 뜻한다. 붓다는 자신 이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아는 자,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아는 자, 다시 말해 의식임을 깨달은 이다. 나아가 전구의 가치는 빛을 발하 는 힘에서 비롯되듯이 자신의 가치는 의식을 발하는 힘에서 비롯 됨을 안다. 전구에서 중요한 것은 필라멘트나 유리가 아니라 전구 가 주는 빛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서 중요한 것은 육체와 신경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빛나는 의식이다. 전구를 보호하기 위 해서가 아니라 빛을 위해 살 때 사람은 붓다의 의식 안에 자리한다.
- 서양에도 그런 가르침이 있을까? 가장 잘 알려진 종교에는 없다. 성경에 따르면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을 창조했으며, 신과 그의 피조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동일하게 보면 안 된다. 실제로 주 류 기독교에서 합일은 최대의 이단이다. 예수는 “나와 하느님 아버 지는 하나다”라고 말한 탓에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 리고 그로부터 900년 뒤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 알할라즈al-Hallaj 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십자가형을 당했다. 동양 종교에서는 궁극적 으로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서양 종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신과의 합일을 경 험하는 방법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최대의 이단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름이 있는 신과 '관계'를 수립·유지하 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초자연적으로 선택되고 특별한 혜택을 받는 특정 사회집단에 속해야만 가능하다. 구약성경의 신은 역사상 존재하는 한 특정 민족, 지상에 하나뿐인 성스러운 민족과 계약을 맺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에 속할 수 있을까? 최근(1970년 3월 10일) 이스라엘에서는 종래의 답이 재확인된 바 있어,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시민권을 얻는 첫째 전제조건으로 정의됐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참된 신이요 참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기독교에서 이것은 기적이지만, 동양에서는 모든 사람이 참된 신이고 참된 인간이다. 다만 자기 안에 내재하는 경이의 힘을 깨달은 이가 아직 얼마 없을 뿐이다)의 부활이 그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성人性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神性을 통해 신과 우리를 이어준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이 유일무이한 신인God-Man과의 관계를 확인받는 방법은 세례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또다시 사회제도를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 너는 네게 주어진 운명을 상대할 수 있는가? 햄릿이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삶이라는 경험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고통 과 쾌락, 기쁨과 슬픔이 따로 뗄 수 없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세 상에 태어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태어날 수 없다. 동양의 환생 개념의 바탕에는 바로 이런 사상이 깔려 있다. 네가 네 깨달음을 위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너는 이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운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네가 지금 생각하는 '너'가 아니라,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었고 지금도 네 심장을 뛰게 하고 폐가 숨쉬게 하고 네 삶에서 온갖 복잡한 일을 해주고 있는 '너'다. 용기를 잃지 말고 겪어내라! 네 방식대로 게임을 즐겨라!
- 선종의 으뜸가는 목표는 개념의 그물을 끊는 것이다. 일부에서 선을 무심無心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심리 치료를 연구하는 많은 서양 학파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도움이 되는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도움을 받는 것은 지성뿐인데, 지성이 이름과 범주, 관계의 인식과 의미를 정의하는 것으로 삶을 다루기 시작하면 가장 내향적인 것을 금세 잃고 만다. 반면 선은 삶과 삶의 감각은 의미에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삶에 이름 을 붙이지 않고 그저 알아서 다가오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 이 이름을 갖는 곳 대신 당신이 사는 곳, 당신이 존재하는 곳으로 삶이 당신을 돌려놓을 것이다.
- 평화에 관한 신화보다 전쟁에 관한 신화가 더 쉽게 생각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집단 간의 갈등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경험인 데다 살상은 모든 삶의 전제조건이라는 잔인한 사실 때문이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어야 존재할 수 있다. 이 끔찍한 필연성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이따금 영구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화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나 다윈이 말하는 '보편적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대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을 수용한 사람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전쟁 신화를 들으며 자란 나라, 부족, 민족이 살아남아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뒷받침해준 신화를 물려준 것이다.
선사고고학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인류 진화의 초기 유적으로 보건대 180만 년 전에 이미 지상에 두 종류의 원인猿人 또는 인간과 비슷한 존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L. S. B. 리키 교수가 발견해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라고 명명한 원인은 채식을 했던 듯한데 이쪽 계열은 이미 소멸됐다. 리키 교수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라고 명명한 다른 하나는 육식과 살상을 했고 도구와 무기를 제작했다. 현재의 인류는 이쪽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인간은 육식동물이다”라고 썼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그런데 또 다른 섭리가 있으니, 온 동물계에서 육식동물은 그것이 포식하는 초식동물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강할 뿐 아니라 더 똑똑하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이 모든 위 대한 것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슈펭글러는 “망치가 될 용기가 없는 자가 모루 역할을 하다가 부서진다”라고 했다. 
- 이것이 동양 사상에서 모든 평화의 궁극적인 바탕이다. 행위의 영역(가령 인생)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평화를 얻으려면 집착하지 않고 해야 할 행동을 하는 것이 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젊은 왕자 아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배운다. “요가에 바탕을 두고 집착을 버리고 성공을 거둘 때나 실패할 때나 평정을 지키며 행동하라. 이 평정이 바로 요가라는 것이다. 단순한 행동은 평정을 지키며 한 행동보다 훨씬 못하다. 평정 안에서 피난처를 찾아라. 결과를 위해 행하는 이들은 불쌍하다. 마음의 평정을 지니는 이는 선한 행동도 악한 행동도 모두 벗어버린다. 따라서 요가를 얻으려 노력해라. 요가가 행동의 기술이다.” 행동의 결과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바람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이란 자신에게 주어 진 의무로, 왕자의 의무는 싸우고 죽이는 것이다. “왕자에게 정당한 전쟁만한 것이 없다. 운이 좋은 왕자는 그런 전쟁이 알아서 찾아와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역설적으로 이 문맥에서 평화 신화와 전쟁 신화는 같은 것이다. 나아가 힌두교뿐 아니라 불교(대승불교)에서도 이 역설은 근본적 이다. 피안의 지혜는 모든 이분법을 초월하기에 필연적으로 전쟁 과 평화의 이분법을 초월하고 포함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완전한 이 세상은 완벽한 황금 연꽃의 세계다"라고 말한다. 그런식으로 보지 못하거나 차마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잘못이 아니다.
또 세계를 악하다고 볼 수도 없다. 자연은 악한 것이 아니라 부처 의식의 '행위처action body'다. 따라서 분쟁은 악한 것이 아니며, 전쟁에서 어느 한편이 상대방보다 더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그렇기에 보살이 자비심에서 세상사에 관여하는 것에는 죄가 전혀 없으며, 여기에는 또한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부처 의식의 행위체'에 즐거이 참여한다는 대승불 교의 이상은 개인적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죄가 아니다.
정리해보자면 이런 이야기다. 인류 역사에는 처음부터 전쟁(종류를 불문하고)은 불가피하고 선할뿐더러 문명화된 인간에게 정상적이고 매우 흥겨운 사회적 행위라는 개념이 존재했다. 그리고 전쟁은 왕에게 의무일 뿐 아니라 즐거움이다. 전쟁을 벌이거나 준비하지 않는 왕은 어리석은 '종이호랑이'다.
반면 세계 역사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생각도 찾아볼 수 있다. 
- 내가 쓴 글은 인류 신화의 비교연구로, 꿈과 히스테리, 신비적 환상 등의 현상학에 관한 언급은 간혹가다 했을 뿐 주로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주제와 모티프를 정리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것들이 광기의 망상과 얼마만큼 상통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 생각에 그것들은 모든 전통적 신화의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그리고 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상징적인 주제와 모티프였다. 그런데 페리 박사의 논문을 보니, 동일한 상징들이 조현병을 앓는 현대인의 심리 상태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생활과 사고로부터 단절되어 순전히 자기만의 망상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겪는 통상적인 패턴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먼저 사회질서와 맥락으로부터 탈피하거나 벗어난다. 이어서 시간상 뒤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내면으로 깊숙이 물러난다. 그곳에서 잇따라 뒤죽박죽이고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고 나면 이윽고 (운이 좋을 경우) 중심을 잡아주고 충족감과 조화, 새로운 용기를 부여해주는 만남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돌아와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 난다. 그런데 이는 신화 속 영웅의 여정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공식이기도 하다. 내 글에서는 그것을 1) 출발seperation 2) 입문initiation 3) 귀환return 이라고 불렀다.
영웅은 평범한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초현실적 경이의 영역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화적 힘들과 조우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영웅은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해줄 힘을 얻어 그의 신비적인 모험에서 돌아온다.
- 페리 박사와 머피 씨는 내게 미국 국립정신건강학회의 줄리언 실버맨Julian Silverman 박사가 1967년 《아메리칸 앤스로폴로지스트》 에 발표한 〈샤먼과 급성 조현병이라는 논문을 소개해주었다. 거 기에서도 내 연구 및 생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내 저술에서 원시 수렵부족들 의 경우 의례의 신비적 이미지와 의식이 주로 샤먼의 심리적 경험 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샤먼(남자든 여자든)은 청소년 기 초기에 오늘날 정신증이라고 할 만한 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은 사람이다. 보통 아이의 가족이 걱정하며 나이 많은 샤먼을 불러 아이가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경험 많은 샤먼은 노래 등 적절한 수단을 써서 그렇게 해낸다. 실버맨 박사가 논문에서 언급하듯 “인생의 위기에 대한 독특한 해결책이 용인되는 원시 문화에서 상궤를 벗어나는 경험(샤머니즘)은 인지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개인에게 이득을 준다. 확장된 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같은 합리적 문화에서는, 또는 다시 한번 실버맨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종류의 위기 를 이해하는 데에 참고할 것을 주지 못하는 문화에서는 개인(조현 병 환자)은 원래 겪었던 불안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더욱 심화되는 경험을 한다.
- 샤머니즘을 다룬 논문에서 실버맨 박사는 조현병을 두 가지 매우 다른 유형으로 분류했다. 하나는 '본질적 조현병' 이고 또 하나 는 '망상형 조현병'인데, 내가 말하는 '샤먼적 위기'와 유사성을 찾 아볼 수 있는 것은 본질적 조현병뿐이다. 본질적 조현병은 외부세 계의 경험에서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전형적인 패턴이다. 관심사와 초점이 좁아지고 객체 세계가 후퇴하며 무의식의 침입에 압도된다. 반면 망상형 조현병을 앓는 사람은 세계와 그곳에서 일 어나는 사건을 매우 민감하게 인식하되, 모든 것을 자신의 환상과 공포에 비추어 해석하고 공격당할 것이라고 느낀다. 실제로는 내부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외부에 투영해 세상이 자신을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실버맨 박사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조 현병은 샤머니즘과 유사한 내적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망상 형 조현병은 자기 내면세계의 강렬한 공포를 이해하지도 견디지 도 못해 너무 일찍 외부세계로 주의를 돌리는 셈이다. 이런 유형 은 위기 해결 시도에 실패해 내적 혼돈은 끝까지 겪어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으며, 어쩌면 헤쳐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정신이상자는 자신이 투영한 무의식 영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와 반대되는 유형의, 보기에도 딱한 정신이상자는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는 뱀굴에 빠졌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관심과 존재를 바쳐 통제되지 않는 정신적 에너지의 공포스러운 형상들과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는 샤먼 후보가 신비적 여정을 하면서 하는 일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으로 '본질적 조현병' 환자가 처한 곤경과 트랜스 상태(일종의 '변
형된 의식 상태'로 몽환 상태라고도 한다 - 옮긴이)에 쉽게 빠지는 샤먼의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원시부족의 샤먼은 사회질서와 관례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사실상 이 관례들 덕분에 그는 이성적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 나 아가 그가 이성적 의식을 되찾고 나면, 그의 내적 · 개인적 경험이 대물림된 관례를 재확인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강화해준다. 그의 개인적 꿈 상징이 그가 속한 문화의 상징체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 정신이상자의 경우, 문화의 상징체계와 연결되기는커녕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조현병 환자에게 자신의 상상은 그저 생소하고 두려울 뿐이고 기존의 상징체계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원시부족 샤먼은 외적 삶과 내적 삶이 근본적으로 부합한다.
- 논문을 읽고 나는 LSD를 복용하여 내면으로 뛰어드는 것은 본질적 조현병에, 그리고 현대 젊은 세대의 반도덕주의는 망상형 조 현병에 비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 젊은이들 중 다 수가 이른바 기성세대(바꿔 말하면 현대문명)에게 전방위적으로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라 실제 심리 상태다. 단절은 사실이고 그들이 외부로부터 당하는 폭격은 내적 공 포의 상징인 것이다. 더욱이 모든 생각이 감정으로 격앙되다 보니 이성적 언어로는 그것에 붙일 이름이 없어 의사소통조차 여의치 않은 이들이 많다. 그토록 많은 젊은이가 간단한 평서문조차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러니까' 같은 무의미한 말을 자꾸 끼워넣다가는 결국 말없는 신호와 감정을 담은 침묵으로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한다. 그들을 대하다 보면 가끔 벽이 없는 정신병원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부르짖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은 (언론과 정치가들의 주장처럼)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학적인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LSD 현상이 좀 더 흥미롭다.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을 기대하며(꼭 그렇게 되지는 않는데) 의도적으로 조현병 상태를 만들어내는 셈이기 때문이다. 요가 또한 의도적인 조현병이다. 세계로부터 벗어나 내면으로 뛰어들고,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환 상은 사실 정신이상자의 환상과 똑같다. 그렇다면 정신이상 또는 LSD 체험과 요가 또는 신비적 체험은 어떤 차이가 있나? 양쪽 다 내면의 깊은 바다로 뛰어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곳에 서 마주치는 상징들은 많은 경우 동일하다(여기에 대해 조금 이따 더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헤엄칠 수 있는 다이버냐, 아니면 헤엄칠 수 없는 다이버냐의 차이다. 이런 것에 대해 타고난 재능이 있는 데다 스승의 지시에 따라 단계별로 차근차근 물에 들어가는 신비주의자는 자신이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았고 지도도 받지 못했으며 재능을 타고나지도 않은 조현병 환자는 어쩌다 물에 빠졌거나 의도적으로 뛰어들었지만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를 구해낼 수 있을까? 밧줄을 던져주면 잡을까?
- 신화의 첫째 기능은 미성 숙한 정신을 길러 세계로 나갈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다. 따라서 따 져야 할 것은, 그것이 실제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인물로 길 러내고 있는지, 아니면 천국이나 가상의 사회 영역에서만 살 수 있 는 인물로 길러내고 있는지다. 그리고 둘째 기능은 준비가 된 젊은 세대가 제2의 자궁인 신화에서 나와 유년기를 뒤로하고 현실세계 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 제도에 대해 한 가지 더 흉을 보자면, 그들은 자신 들이 제공하는 자궁을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마치 새끼 캥거루에 게 어미의 주머니 속에 남아 있으라고 하는 것 같다. 그 결과 16세 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안다. 어머니 교회의 주머니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갈가리 찢어졌다. 그 탓에 이제는 아주 어린 캥거루가 들어갈 주머니조차 없다. 일종의 인공 대체물로 읽기, 쓰기, 셈하기가 있을 뿐이다.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무기물적 인큐베이터 안에서 마흔다섯 살까지 지내게 된다. 아마 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 나온 교수 에게 질문을 하면 다들 어찌나 “음,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하고 어 물거리는지 저 사람이 지금 뭔가 내적 위기를 겪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심오한 생각을 표현할 말을 못 찾고 있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반면 프로 야구선수나 축구선수는 꽤 복잡한 질문에도 대개 힘들이지 않고 대답한다. 그는 동네 공터 최고의 선수로서 열아홉 살에 자궁을 졸업했다. 하지만 가엾은 교수는 중년이 다 되도록 위로 층층이 쌓인 교수들 천장 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니 학위는 땄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감이라는 게 발달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 신화의 영웅, 샤먼, 신비주의자, 조현병 환자의 내적 여행은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그들의 귀환 또는 증세의 완화는 '재생'으로 체험된다. 다시 말해 현실의 지평에 더 는 구속되지 않는 ‘거듭난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큰 자아가 반사된 것으로, 원형적 본능체계의 에너지가 현대 시공간 의 일상적 상황에서 유익하게 작용하도록 기능한다. 이제 그는 자 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이 낳은 아이인 사회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사회도 자연처럼 무시무시한 곳일뿐더러 그렇지 않고서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새 자아는 이 모든 것과 합을 이루며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증언하듯 삶은 전보다 풍요롭고 튼튼하고 즐거워진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난파당하는 일 없이 항해를, 그것도 몇 번이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상을 용납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풍경을 보게 될지, 어떤 상대를 마주칠지 가르쳐야 한다. 또 정신이상을 인식하고 제압해 그 에너지를 흡수하 는 일종의 공식을 알려줘야 한다. 파프니르를 죽이는 과정에서 용 의 피를 마신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자연(내적 · 외적 자연 모두)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지크프리트는 용의 힘 만 얻었을 뿐 실제로 용이 되지는 않았지만, 보통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는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모험자에게는 언제나 심리학에서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위험이 따른다. 정신이상자는 자신을 환각의 대상 또는 환각을 보 는 주체와 동일시하는데, 여기서 비결은 그 속에 함몰되지 않고 의 식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친구 또는 적과의 관계에서 구원자가 될 수 있지만 구세주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성장기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꽃피는 여성성이 주위 사람들에게 끼치는 기분 좋은 영향을 깨닫고 그것을 자기 자 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이미 약간 미친 것이다. 동일 시를 잘못했다.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것은 그녀의 작은 자아가 아 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자라나는 멋진 새 육체다.
전에 인간의 성장을 다섯 단계로 나누는 일본 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열 살에는 동물이요, 스무 살에는 미치광이, 서른 살에는 실 패자, 마흔 살에는 사기꾼, 쉰 살에는 범죄자. 거기에 이렇게 덧붙 이고 싶다. 예순 살에는(그때까지 앞 단계를 모두 거쳤을 테니) 친구들에게 조언을 해주기 시작하고, 일흔 살에는(조언이 모조리 잘못 이해됐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 현자라는 말을 듣는다. 나아가 공자는 “여든 살에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을 알고 단호하게 버티었다”라고 했다.
- 15년 전쯤 봄베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독일인 예수교 사제 H. 헤라스H. Heras 신부를 만났을 때, 그가 갓 출간한 인도 신화에 나타 나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에 관한 논문을 받았다. 동양 종 교의 권위자이자 편견이 없었던 그는 논문에서 고대 인도의 신 시 바와 시바의 아들 가네샤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하느님과 예 수에 상당한다고 해석했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영원성'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에 선행하고 역사를 지탱하며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 안에 (어느 정도)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어떤 정 통파 신자도 다른 세계의 성자와 신에서 기독교의 모습을 찾기 어 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테지만, 신 화와 신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 마음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상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신이 있었나? 우리는 신 들의 역사를, 그들이 어떤 단계를 밟아 발전해왔는지를 안다. 신화 에 등장하는 상징과 인물이 본질적으로 꿈의 성격을 띤다는 것은
프로이트와 융뿐 아니라 심리학과 비교종교학을 제대로 연구하는 이들도 인식하는 사실이다. 나아가 게자 로하임Geza Roheim 박사의 말처럼 잠을 자는 방법이 하나뿐이듯이 꿈을 꾸는 방법도 하나뿐이다. 모든 위대한 문명에는 동정녀의 탄생과 현현, 죽음과 부활, 재림, 최후의 심판 같은 신화와 전설이 존재한다. 그런 이미지들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마음을 나타낸다. 신화의 이미지는 마음의 구조와 질서,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 또는 인물은 보편적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은 의미가 있다 해도 부차적인 의미일 것이다. 가 령 불교에서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부처의 의식이 역사적으로 구현된 여러 사례 중 하나로 간주된다. 그런가 하면 힌두교에서는 비슈누의 화신이 무수히 많다. 오늘날 기독교 사상가들이 겪는 어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유일한 역사적 현현으로 보는 교리 때문이다. 유대교에는 세계를 창조한 보편적 신이 그중에서 선택된 한 민족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기독교 못지않게 성가신 교리가 있다. 오늘날 종교가 영적으로 빈약한 것 은 그 같은 자민족 중심주의적 역사주의의 결과다. 교회가 점점 더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음식 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문명 간의 교류가 없었던 과거의 작은 세상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에서 지구의 사진을 찍는 시대다!
- 하지만 그들 종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경험은 상징으로 표현될 때 가장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 서로 다른 종교의 상징들에는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공식 교리보다 더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참된 상징은 단순히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을 깨워 삶의 내적 의미과 현실을 새로이 이해하게 해주는 구조를 그안에 내포한다. 참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지, 둘레의 어느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상징에 의해 인간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는 자아와, 다른 사람과, 하느님과 정서적 · 의식적으로 접촉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사실 '상징이 죽었다'는 뜻이다 (토머스 머튼 신부)
- 내가 한 경험을 돌이켜볼 때, 나는 케임브리지의 저명한 철학자 C.D, 브로드 박사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기억과 감각지각에 관련해 베르그송이 내놓은 이론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뇌와 신경계, 감각기관은 대체로 생산이 아니라 소거하는 기능을 한다는 이론으로, 모든 사람은 어느 순간에나 지금껏 그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우주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지각할 수 있다. 뇌와 신경계의 기능은 우리가 어떤 순간에 기억하고 지각하는 것의 대부분을 차단함으로써 대체로 쓸모 없고 관계도 없는 이런 지식에 우리가 압도되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아주 작고 특별한 정보만이 남는다.” (올더스 헉슬리)
- 우리 신화는 이제 무한한 우주와 우주의 빛(안에 있는 동시에 바깥에 있는)의 신화여야 한다. 우리는 나방처럼 그에 매 료되어 밖으로, 달과 그 너머로 날아가지만, 그러면서 또한 안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지구에서는 우리를 갈라놨던 모든 지평이 무너 졌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에 사랑을 주고 다른 곳에 공격 성을 투사할 수 없다. 지구라는 이 우주선에는 이제 '다른 곳이 없 기 때문이다. 다른 곳과 '국외자'를 계속해서 가르치는 신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게 아니다.
이제 이 장을 열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 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새로운 신화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일 것이다. 그것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맞춰 다시 쓴 신화다. '민족'의 비위를 맞춰주는 게 아니라 개인을 깨워 그들 자신을 알게 해주는 것이 목적인 신화다. 새로운 신화는 우리가 이 아름다운 별에서 자리다툼을 벌이는 자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 람이 해방된 마음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의 방식으로 모든 것과 하나인 이 세계에 지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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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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