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언어를 넘어가는 콘텍스트를 건드려줘 야 그걸 잡아낼 수 있고, 그 콘텍스트가 그 사람의 내면일 수도, 심리 일 수도 있어요. 배우지 못한 어머니가 있다면 어머니가 했던 얘기 를 정서적으로 읽어내면 좋죠. '손좀 씻어라' 하고 역정을 내셨을 때 는 어머니 몸이 편찮으신 날일 수도 있어요. 어머니가 짜증낼 때 옆 집 할머니가 최신 에어컨을 샀을 수도 있고요.(웃음) 그때는 현상만 을 읽고 화를 내기보다는 이렇게 말하면 좋겠죠. '조금 있다가 에어 컨을 살걸 그랬어요. 그런데 저거 중고로 내놓으면 나름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바꾸냐' 그러 죠. 말이나 텍스트에 사로잡히면 안 돼요.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능력 을 기르는 거예요. 문자로 쓰인 것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이 세상 에서 가장 어려운 책은 배우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라는 책이고, 우 리는 그걸 잘 읽어내야 해요. 

-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질문을 할 때 고통을 전제로 하고 물어요.
뭔가 미지의 세상으로 간다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죽음 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고, 삶은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죽은 사 람은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아요. 고독도, 배고픔도, 거동의 불편함 도, 근심과 걱정도 없죠. 죽음에서 안타까운 것은 단지 하나일 뿐이 에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행복은 고통의 완화, 잠시 동안 고독이 사라지고 배고픔도 가시고 신체의 불편함도 줄어들고 근심과 걱정도 가시는 상태니까요. 죽어서 고통 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니 고통의 완화도 의미가 없다, 이것이 죽음 의 의미예요. 그래서 나이 든 어르신들은 죽음에 대해 물어보지 않 아요. 젊은 사람들이 물어보죠. 나이 드신 분들은 대부분 알아요. 고 통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것을요. 정말 아이러니하죠. 기력도 떨 어지고 거동도 불편하지만, 오히려 노쇠한 상태이기에 행복이 무엇 인지 정확하게 아니까요.


벚꽃은 마지막 순간에 제일 화려하게 피어요. 그리고 이삼일 정도 지나서 바람 불고 비 오면 떨어지죠. 어르신들이 많은 강연에서 제가 끝날 때쯤 가끔 이런 말을 해요. 자기를 벚꽃 다 떨어진 나무라 고 생각하고 다니시지 말라고, 지금이 벚꽃 마지막 단계라고, 숨넘 어가고 죽어갈 때 그때 꽃이 지는 거라고, 60~70 먹었다고 해서 꽃 잎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지금이 가장 예쁠 때라 고 그렇게 말해요. 소비를 많이 안 하니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미 죽은 것처럼 취급받는 것뿐이라고요. 당연하죠. 떨어지기 직전의 벚 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나요. 바람에도 비에도 애닯게 꽃잎이 흔들리니, 그만큼 이제 타자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기만 해요. 자신의 고통과 쾌락에만 매몰되는 이기적 개인이 더 이상은 아니죠. 이제 성숙한 거예요. 타자의 고통에도 민감할 수 있으니까요. 

- 4차 산업혁명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그냥 스마트폰 혁명이 라고 보면 돼요. 스마트폰, 즉 휴대용 인터넷 단말기 안에 세계 전체 의 시장이 들어온 거예요. 나아가 스마트폰에 어울리는 시장마저 만 들어졌죠. 이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려고 몸소 시장에 갈 필요가 없어요. 가상의 시장에서 결제를 하면 어느 사이엔가 상품이나 사람 이 문앞에 도착할 테니까요. 물론 과거 전통시장의 호객 행위도 사 이버화돼요.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 화하죠. 그래야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테니까요. 그 자극적 인 문자나 영상 사이사이에는 엄청난 광고가 붙죠. 광고의 유혹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구매하려면 다양한 상업 포털 사이트에 접속 하는 것이 이미 대다수 사람들의 행동 아닌가요? 스마트폰으로 흡 수되지 못한 시장이나 자본은 반대로 도태될 거예요. 스마트폰 사용 자에게 검색되지 않는 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 게임이라는 말의 어원 아세요? 파스칼의 《팡세》에는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나와요. 프랑스에서 근대사회가 발달하고 도시에 부르 주아 귀족들이 많이 생기잖아요. 파스칼이 살던 17세기에 상류층계 급의 수가 늘면서, 지금 골프 치는 것과 비슷하게, 나는 귀족입네 하 면서 여우 사냥을 즐겼어요. 그런데 여우가 한계가 있잖아요. 여우 를 너무 많이 잡아서 거의 전멸하는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어떻 게 했냐면 여우 가죽옷을 입힌 농노의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았어 요. 그리고는 아이들을 사냥하는 거죠. 그것을 '게임'이라고 한 거예 요. '사냥감'이라는 뜻으로요. 농노의 아이들을 출발시키고 개를 풀 어서 사냥을 했어요. 그러면 아이의 피가 묻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요. 사냥을 도와주는 농노들이 자기들과 같은 계급의 아이들을 근처 땅에 묻어주는 거죠. 그들의 가슴속에는 아마도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을 거예요.
도박판에서 막장으로 가면 손목도 걸고, 집문서도 걸고, 아내도 걸잖아요. 게임장이 거대해진 이유는 카지노와 주식시장을 생각해 보면 알죠. 그 안에 떼로 몰려서 돈을 따려고 혈안이 된 모습들을 보 면 알아요. 도박장은 도박꾼들이 몰려들어야 도박이 가능해져요. 수많은 도박꾼들의 돈을 몇몇 사람들 수중으로 몰아주는 거니까. 그런 데 결국 이득은 도박장 주인이 보는 거죠. 그게 게임이에요. 아이템 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잭팟을 노리는 것이 뭐가 달라요. 발터 벤야 민이 얘기했던 것처럼 합법적 투기가 투자고, 불법적 투자가 투기예 요. 그 경계선은 체제가 정하는 거죠. 도박장에 노름꾼들이 몰려들 어야 장사가 되는 것처럼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주식시장, 부동산시 장에 투자자들이 몰려들어야 돼요. 스마트폰 경제가 게임산업을 육 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게임을 하려고 스마트폰을 자주 켜야 게 임 이용자들이 소비시장이나 금융시장, 혹은 투기시장을 더 많이 그 리고 더 자주 접할 테니까요.

- 뭐든 할 수 있죠, 열심히 하면. 그런데 나머지는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부품화하면 그 부품이 꽂혀 있는 전체에 대해서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죠. 그 전체가 변한다든가, 아니면 버려지거나 하면, 그에 따라 부품도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요. 전문가들, 나아가 직장인들이 근본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죠. 분업에 길들여진 사람이 분업 체계를 옹호하는 거예요. 대부분 의 사람들이 그에 맞춰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요. 나머지 것을 버 리고 전문화되면 될수록 너는 회사에 잘 팔릴 거야,라고 강요하고 그렇게 믿으면서 말이죠.

- 전문가의 논리, 특화된 논리에 속지 말아야 돼요. 내가 알파고나 AI 같은 사람이 되면 이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 을 거라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 느낌 때문에 아이든 어른이든 경쟁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잊지 마세요. 전문가만 되면 삶이 부유해지고 안전하리라는 느낌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오 히려 사정은 반대라는 것을요.

- 간혹 가다가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지도 않는 집을 하나 더 가지고 있으면서 임대료를 얻어서 생활을 한다고 해 요. 그러고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노동을 하지 않 았는데도 수익이 생긴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한 거예 요. 임대료의 경우는 물론 주거가 불안한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거 죠. 작은 자본가고 작은 지주인 거예요. 그래서 속상하고 이런 사람 들하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큰 집에서 사는 건 상관이 없지만, 대 신 집으로 임대료를 받으면 안 돼요. 그런데요, 집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간혹 월세 등을 받아서 노후를 유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가 있죠. 이 경우는 조금 난감해요. 가족공동체가 외해되어서 돌봄 이 필요한 분들이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 요. 이런 서글픈 경우가 아니라면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 등으로 이윤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자본가 처럼 지주처럼 살면서 어떻게 노동계급을 아낀다고 떠들 수 있나요?

- 좋은 사회는 자신이 생산한 것으로 노동하기 힘든 약자를 돌보는 사회예요. 당연히 이런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존중을 받죠. 노동 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약자를 돌보는 힘이니까, 노동이 존중을 받아요. 역설적으로 말해서 노동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약자들 이 있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회였으면 좋겠어 요. 그런데 너무 많이 고마워하지 않는 사회였으면 하고요. 그 사람 들이 젊었을 때 가난한 아이나 노인들을 돌봤던 사회였기 때문에 그 래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게, 미래 세대에게 내가 노동한 대 가, 내가 다 먹지도 못할 것들을 맡겨뒀던 거예요. 그것이 나중에 돌 아오는 거죠. 높은 적립금을 부어서 나중에 받아먹으려는 것과 다른 거예요. 애초에 모든 보험은 공동체가 와해되어야 하고, 공동체가 돌보지 않아야 성립이 돼요. '자식들이 당신을 돌보는 시대는 지났어요. 스스로 노후를 관리하세요' 이렇게 홍보해야 돼요. 개인들을 깨알처럼 흩어지게 해서 내가 아파도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고, 내가 음식이 떨어져 집에서 죽어도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라는 느낌을 줘야 돼요. 그러면 계산을 하게 되는 거죠.
억압체제에서는 사회에 기생하는 계층이 있어요.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아요. 잡은 물고기의 반 이상을 선주가 가져가니까요. 배 가자본이라면 고용된 선장이나 어부들은 노동자가 되겠죠. 그런 구 조로 유지가 돼요. 선주나 지주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본가가 들 어온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어요. 그냥 억압체제가 세련되게 변한거죠.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벤담이나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에 이르러 완성된 이기적 개인주의예요. 결 국 사회 체제를 바꾸는 혁명과 함께 우리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이 기주의와도 싸워야 해요. 어떻게 해야 내 삶이 더 즐겁고, 어떻게 해 야 내 삶이 추위로부터 더 멀리 벗어날 것인가만 생각하는 이 집요 한 개인주의, 이기주의와 싸워야 해요. 불교적인 길일 수도 있어요. 소유 욕구에 대한 싸움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니까요.

-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인 피에르 클라스트르 Pierre Clastres, 1934~1977는 '국가가 없는 사회' 혹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 대해 연구를 해 요. 그래서 나온 책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La Société contre l'État, 1974) 예요. 농경사회 이전의 수렵채집을 하는 전통이 중남미 인디언 사회 에 남아 있잖아요. 1960년대에 거기 들어가 현지 조사를 진행한 거 예요. 클라스트르가 보니까 인디언들이 성인이 되면 잔혹할 정도로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통과의례를 거치는 거예요. 칼로 새기고 불로 지져서 몸에 문신을 만들어요. 여기서 클라스트르가 성인이 되는 통 과의례가 왜 이렇게 가혹할까, 의문을 품었던 거죠. 결국 클라스트 르가 이해한 것은 그 고통의 인내가 자유인의 공동체로 살아가겠다 는 강렬한 동의였다는 거예요. 타인이 약하다고 해서 지배해서도 안 되고, 타인이 강하다고 해서 복종해서도 안 되는 것이 자유인이에 요. 지배와 복종 관계가 없는 공동체가 그들이 생각하는 문명사회예 요. 복종하는 다수가 존재해야 유지되는 국가와는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타인을 얕보고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유혹에 빠지려고 할 때,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고 마음을 다잡는 거죠. 만약에 내가 몸이 아 프고 배도 고픈데, 부족의 누군가가 사냥감을 몰래 감춰놨다고 해봐 요. 그러면 그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 있잖아요. 그럴 때 몸에 문신을 새겼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인내하고 싸우는 거예요.

- 노동하는 사람에게 물적 생산수단이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진보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것,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은 대표자나 정신노동 자들은 숙련노동자의 평균임금 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일방적으 로 명령을 하는 상전을 뽑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대표자는 언제나 소환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자유인들이 꿈꾸는 공동체의 이념이었어요. 일을 하지 않고 어떤 결과물을 얻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일 을 시켜야 가능하잖아요. 사회성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거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사회를 꿈꿔야 하잖아 요. 노예나 소작농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가, 공동체가 어떻게 가 야 하는지 자기 발언을 하지 못해요. 그러면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지 는 거예요. 억압체제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생계 문제를 위협에 빠 뜨리니까 정치적 발언을 할 수가 없는 거죠. 노동자들이 생산 현장 까지 개입을 하고 결정을 해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거예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가 민주적이지 않은데, 이런 체제 안에서 민주주의가 어 떻게 실현되겠어요. 지금 자유는 소비의 자유, 자본가의 자유, 땅 가 진 사람의 자유밖에 없어요.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노동자 편을 든다고 하지만, 소작료를 낮추겠다는 수준밖에 안 돼요.

-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진짜 교육이에요. 내 말을 잘 듣도록 가르 치는 것이 교육일까요, 아니면 내 말을 거스르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일까요? 불교에서 제자를 키우는 것을 보면 진 정한 교육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결국 한 사람의 주인을 키우는 것 이 교육이잖아요. 불교에서는 그런 강력한 주체를 키우는 것이고,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거예요. 스승의 말을 어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주체가 된 거예요. 생각해보면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도 그래요. 자기가 죽더라도 내 딸 내 아들은 자기 인생을 심사숙 고해서 매 경우마다 스스로 결정을 하고, 또는 수정하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나요? 매번 부모한테 와서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야 돼요?' 이러면 잘못 교육한 거 아닌가요? 

- 19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서양의 대학은 중간관리자 양성소로 바뀌어요. 그 결과 우리가 3, 4학년 때 배우는, 흔히 전공이 라고 부르는 교육이 새롭게 들어왔어요. 어차피 전공은 노동계급의 것이라서 명령하는 사람은 전혀 배울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도 중세 대학의 아우라를 남겨둬야 되니까, 전자본주의 시대 지배계급이 배 웠던 철학, 문학 그리고 신학 등은 1학년 교양 과정으로 들어온 거고 요. 신입생들은 1년 동안 교양과목을 통해서 자신이 지배계급인 듯 한 착각에 빠지죠. 존재도, 우주도, 역사도, 사회도 고민하게 되니까 요. 하지만 그들도 그리고 그들의 부모도 모두 알아요.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대학은 중간관리자 양성소라는 사실을요. 마침내 전공으로 들어가면 지성인이라는 백일몽은 끝나요. 산업 체제가 요구하는 분화되고 전문화된 부품이 되는 교육이 시작되는 거죠.
대학 1년, 혹은 2년까지 사회와 역사 그리고 자신의 삶을 고뇌하 던 지성, 전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폭로했던 지성을 부정하면서 3, 4학년 대학생들은 자신이 왜 대학에 왔는지 다시 기억하게 돼요. 경쟁에 이겨서 남보다 안정된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죠. 자신의 모 든 것을 역사와 사회에 바치려는 생각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1980~1990년대에 대학교 1, 2학년들이 학생운동을 하고 술 마시고 고민했던 바닥에는 발버둥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대학생 내부에서 전향이라는 것이 벌어지는데, 묘한 전향인 거죠. 총체적으로 이 사 회가 어떻게 될까, 이런 반자본주의적인 꿈들을 꿨다가 3, 4학년이 돼서는 전공에 집중한 거예요. 부모들이 왜 애들을 대학에 보냈냐 면, 투자였다고요. 돈을 이만큼 투자하면 더 많이 버는 거라는, 바닥 에 투자의 논리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 대학의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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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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