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종의 탄생

인문 2023. 12. 7. 11:48

- 백색 동아시아인
요컨대 유럽의 '대항해시대' 초기에 동아시아 사람들은 한결같이 백 인으로 묘사되었고 황인종으로 묘사된 적이 없다. 상인들과 (그 뒤를 이 어) 선교사들이 신비한 동양의 놀라운 땅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은 당시 의 문헌들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글들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모두 백인으로 묘사한 예가 가득하다. 그중 몇 가지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우선 포르투갈 약제상인 토메 피르스의 기록은 이에 대한 최초의 기 록 중 하나다. 그는 1512년부터 1515년까지 말라카에 머물며 『동방제 국기(國記, Suma Oriental』로 알려진 긴 보고서를 작성해 마누엘 1세에게 바쳤다. 이러한 종류의 정보가 으레 그렇듯 그가 작성한 기록은 철저하게 가려진 비밀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엄청난 이익을 보장할 이 지역으로의 무역을 독점하길 원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이익이 더 는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피르스의 글 중 일부가 (라무시 오에 의해) 출판될 수 있었다. 이때 밝혀진 비밀 가운데는 중국인이 “우 리처럼 백인이며 상당수가 무명과 비단을 입고 다닌다"라는 정보도 포 함되어 있었다. 그의 글 전체를 보면 중국인은 독일인(당시의 상투적인 이 미지로서)에 비견되기도 했고 중국 여성들은 우리와 같은 백색이며 에 스파냐 귀부인 같다고도 했다."
장기간 인도에 파견된 포르투갈 관료였던 두아르트 바르보자가 쓴 비슷한 시기의 보고서 역시 축약본 형태로 라무시오에 의해 출판되 었다. 바르보자는 중국인을 피부가 흰 사람들로 설명했다. "거상들은 백인이며 풍채가 좋았다. 그 아내들 역시 미인이지만, 남녀 모두 눈이 작 았다. 남성들의 수염은 서너 가닥 정도가 났을 뿐이었다." 여기서도 사 람들의 외모는 철두철미 유럽인의 기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신발과 양말을 신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으며 독일인과 비교되었다. 그들의 언어는 이베리아 사람들의 귀에 자신들의 것과 대등하게 훌륭한 언어로 들렸다." 1514년 작성된 조반니 다 엠폴리의 미발표) 문서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백인이며 옷은 독일인처럼 입었고 신발은 프랑스인 같았다." 일본인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류큐 제도에 한정된 것 이었지만 그 보고서들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피르스는 일본인들이 "백인이고 옷을 잘 차려입었으며 중국인보다 훨씬 품위가 있다" 라고 말했다. 이는 아마도 일본인이 훨씬 부유하다고 믿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1517년이 "레퀴아Lequia"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어디인 지 알아내라는 지령이 내리기도 했다.
이상의 초기 문건들을 일별한 뒤 필자가 받은 인상은 다소 산만하고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지역 사람들이 백인이라거나 혹 은 그렇게 추정된다는 말에는 인종적 함의가 결코 들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피부색을 묘사하는 부분조차 없었다. 중국인과 오키나와 사람들을 백인으로 표현한 것은 그들의 물질적 풍요, 국력, 높은 수준의 세련된 문화를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백색은 다른 색과 마찬가지 로, 사람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치평가적인 말이다. 동아시아 인 피부의 색소가 아프리카나 인도 혹은 말레이 사람들과 다르게 보였 지만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백인'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오래지 않 아 그들은 곧 진정 '문명화될 수 있는 능력, 즉 유럽의 기독교로 개종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인이 이웃한 중국인보다 더 백 인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16세기 말 일본인은 이미 수만 명이 개종했다 는 점이 부분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 일본에서 기독교는 1614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639년 일본 내에 머물던 마지막 서양인이 쫓겨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유럽인의 어조는 점차 냉랭해졌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안색도 차가워졌다. 1614년 일본 대사가 로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창백"하고 "구릿빛"이며, "올리브빛이 나는 황색"에 "번들거리는 흑 색"으로 묘사되었다. 심지어 1660년 기록된 공식적인 예수회 역사에 는 이들이 "올리브색"이라고 적혀 있다. 1715년에 나온 다른 예수회 문 건을 보면 여타 동아시아인에 비해 일본인은 적어도 덜 올리브색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20년이 지나 동일한 저자에 의해 뒤바뀌게 된 다. 이 시점에 이르러 그는 일본인의 피부색은 중국인과 똑같이 올리브 색이라고 선언했다. 한편 1727년 출간된 엥겔베르트 켐퍼의 일 본지History of Japan』는 19세기까지도 유럽의 일본 인식에서 일종의 기준 이었다. 여기서 일본인은 백색이 아니라 갈색braune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영어로는 황갈색tawny, 다시 프랑스어로는 구릿빛bazanez으로 옮겨졌다. 켐퍼의 표현은 '올리브색'이라는 단어와 함께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원주민을 일컫는 가장 흔한 말이 되었다. 
- (일부) 중국인의 피부가 검다고 이야기할 때는 필시 개종이 힘들다고 판단한 때인 듯하다. 일본에서 진행된 선교 사업은 (순식간에 이뤄진) 환상적인 성공처럼 보이지만, 중국은 사정이 달랐다. 개 종자의 수가 적은 현상에 당황한 선교사들은 그 원인을 정작 중국인에 게서 찾았다. 예컨대 1596년 마테오리치는 광저우 남부에서 15년 동 안 얻은 개종자 수가 100명에 그친 데 불만을 토로했다. 중국인에 대한 또 다른 전형적인 표현이 있는데 이는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이 일 과 무관하지 않다. 즉 중국인은 아이일 땐 백색이고 예쁜데 어른이 되면 못나고 뚱뚱하고 검은색이 된다는 표현이었다.
- 결국 중국인은 그들의 안색을 가장 잘 묘사하는 용어상의 혼란-황 색, 황갈색, 갈색, 검정색, 빨간색, 구릿빛, 암청색의 와중에 결국 백 색이 아니게 되었다. 달리 말해, 이제 더는 백색이 아니었다. 또 다른 보 기를 들면 17세기 초반 크리스토프 카를 페른베거"라는 오스트리아인 이 남긴 일지가 있는데, 이 일지는 1972년에야 발간되었다. 그는 푸젠 성 남부의 광저우를 여행할 때 그곳이 “중국에서 최악의 장소”라고 생 각했다. 사람들이 풍채는 좋지만 "약간 황색"이라고 평한 페른베거는 그들에게 남색男의 풍습이 있고 노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비난했다. 반면 일본의 서남 끝에 위치한 도시 히라도에는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유럽인보다 덩치는 작지만 “상당히 백색"이라고 했다. 게다가 이들은 중국인보다 훨씬 잘살며 "전시에는 남성적인 민족"(중국인은 "여성적 이다")이고 여성은 "백색이며 매력적이다”라고 했다. 색깔을 나타내 는 이들 용어 (그는 중국인을 황색으로 부른 여행자들 중 한 사람이다)에는 문 화, 종교, 도덕, 지위, 신분, 성차와 관련해 복잡하고 다양하게 구별하는 방식이 분명히 관계되어 있다. 머지않아 일본인들 역시 그들의 백색성 을 상실하고 이웃 나라 중국처럼 황색(또는 올리브색)이 될 운명이었다.
- 린네의 분류법은 1758~1759년에 출판된 결정판인 제10판 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그동안 이 책은 10여 쪽의 2절판을 벗어나 마침내 1,300여 쪽을 넘어서는 두 권짜리 걸작으로 성장한다. 20여 년 에 걸쳐 수많은 수정과 증보를 거듭했지만 제10판에 이르기까지 인간 에 대한 설명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해진 수정은 '유럽 인Homo europaeus'을 첫째 자리에서 뺐다는 점이다. 린네가 이전의 계층 구조를 왜 수정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가 다른 중대한 변화-각각의 종에 다수의 서술형용사를 붙인 것ᅳ를 가할 때는 당시 사회의 전형적 인 인종주의에서 가져온 규범적 주장을 강하게 반영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어두운fuscus' 아시아인이 처음으로 luridus로 호칭되었다는 점이다. luridus는 황색yellow, 연황색pale yellow, 병색 sallow, 창백한pallid, 죽은 것 같은deathly, 섬뜩한ghastly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흔히들 이것이 바로 황인종이라는 관념의 진 정한 기원이라고 주장하지만,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 선 린네는 '황색flavus', '황갈색fulvus' 또는 '담황색gilvus' (물론 이 외에 다 른 단어들도 있다) 등과 같은 좀 더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 지 않았다. 고전 라틴어에서 luridus는 경멸적인 말이다. 보통은 영어의 lurid(끔찍한)처럼 끔찍함과 더러움과 핼쑥함을 함의한다." 이런 수정 에 대해 많은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한 것은 타당하지만, 그 선 택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필자는 luridus가 다분히 의도적이며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린네는 흑과 백의 '중간'을 의미하는 색이 아니라 특히 허약함과 질병을 암시하는 색을 말하 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베르니에가 인도 여성이 체현하는 황색은 아름 다운 황색이지 황달 걸린 자의 황색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을 때 그 역시 황색의 이중적 의미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린네는 '아시 아인Homo asiaticus'을 분류할 때 후자의 황색으로 규정했다. 이때 그는 분명히 의학과 식물학이라는 자신의 두 전문 분야를 토대로 생각하고 판단했을 것이다.
앞 장에서 필자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백색이 때론 누르스름함, 병약 함, 죽음의 창백함 따위로 인식된 점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영어의 jaundice (황달)라는 말이 황색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암시하듯 의학에서 황색 피부는 언제나 황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황색은 체액론에서도 중요한 색이다. 체액 론의 전통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로부터 시작한 이래 10세 기 이슬람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이븐시나'를 경유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담즙의 색깔로서의 황색은 일반적으로 불같은 다혈질의 기 질과 연결되었다. 담즙이나 쓸개의 질병으로 여겨진 황달에 대한 18세 기 의학 교재의 전형적인 설명은, 흐름이 막힌 담즙이 혈액으로 흘러들 어 피부까지 향해 결국 피부를 황색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질병의 증상은 무기력, 나태, 게으름이라고 했다.
- 이런 표현들은 우리에게 '게으른 중국인'이라는 중국혐오증의 초기 적 전형과 신기할 정도로 닮았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지 모 른다. 그러나 당시 유럽인들은 무기력이나 게으름 같은 개념은 다른 많 은(전부는 아니더라도) 비유럽인의 특징이며 기력과 활력의 결핍은 그들 신체의 다른 많은(전부는 아니더라도) 질병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맨더빌의 『맨더빌 여행기』 프랑스어판(1400년경)에는 인도를 이와 연관시킨 흥미로운 예가 나온다. 즉 인데inde 강가에 사는 주민들은 “마 치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녹색이 섞인 "황색" 피부를 하고 있다는 것 이다. 칸트는 1777년 출판된 인종에 관한 글(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 루겠다)에서, 인도인의 "올리브황색" 피부색은 쓸개가 막히고 간이 부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 인도인의 "태생적" 피부색 역시 "황달 걸린 사람의 피부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린네가 아시아인의 피부색을 fuscus에서 luridus로 바꿀 때 황달이나 특정 의학적 상태를 염두에 두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비록 luridus가 고전 라틴어로 황달에 걸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은 분명하지만). 다만 필자가 아 는 한 식물학과 연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에 대해 아무도 지적한 바 가 없다. 린네는 『자연의 체계 초판의 「식물계에 대한 관찰 하단에서 (그리고 1736년 『식물학의 기초Fundamenta Botanica』에서 반복하여) 이를 설 명하는데, '색깔'이라는 표제가 달린 '식물의 힘'의 마지막 항목은 다음과 같다. "붉은색은 산을 의미한다. 그리고 식물 전체가 누런색luridus 이고 칙칙해 보이면 의심스럽다." 린네가 이 색을 '칙칙하고' '의심스 러운' 성질과 연결함으로써, 첫눈에도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식물이 흙 속 미네랄이 부족하거나 다른 질병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황백화 현상 (엽록소의 결핍으로 이파리가 황색으로 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 만 린네는 1751년에 초판이 발행된 『식물철학Philosophia Botanica』에서 Luridae라고 명명한 일단의 식물군을 "의심스러운" 성질이라고 규정 했다. 이 식물군에는 배풍등, 산사나무, 디기탈리스, 담배 등이 포 함된다. 달리 말해 '의심스러운'이라는 말은 병든 식물뿐 아니라 마약, 독, 혹은 독성과 관련 있는 식물도 가리키는 것이다. 린네가 1766년 출 간한 『의학의 열쇠Clavis Medicinae』에서는 이러한 범주가 Virosa (즉 악취 나는 것)라는 표제 아래 실려 있다.
- 마침내 1780년대가 되면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같은 보편사 학자들조차 “몽고족의" 야만성은 "아시아의 산마루" 지역에 사는 모든 민족의 특징이라는 이론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기형적이 고" 약탈적인 성격은 단순히 기후나 문화적인 탓만은 아니며 유전적인 원인 탓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몽고인종은 블루멘바흐의 인류 고유 의 다양성에 대하여』 제3판이 나올 즈음 이미 후진적이고 침체된 지역 으로 간주된 극동을 표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유 형의 고정관념에 기초한, 동아시아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기존의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호감은 18세기 후반부터 일 기 시작한 중국혐오증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동아시아 문명은 유대- 기독교의 서구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지만, 이제 는 정체된 문명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는 헤르더가 중국을 “상형문 자로 채색하고 비단으로 둘러 방부 처리한 미라"라고 혹평한 것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문명이 정체된 원인은 그것의 '몽고족' 특성 때문이 라는 것이다.
- 1950년대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질병이 염색체와 관련된 질병 이라는 새로운 지식이 등장했으며, 그에 따라 그동안 이 질병에 붙여 진 명칭의 인종주의적 성격에 대한 인식도 늘어났다. 명칭을 변경하자 는 제언이 1961년 의학지에 실렸고 1965년에는 몽고 정부가 세계보건 기구에 유사한 항의를 표시했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학자와 의사들은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다. 1966년 어느 학회가 발행한 자료집은 다운의 「백치의 인종 구분에 관한 고찰」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제호를 여전 히 '몽고증'이라 붙였다. 당시 기념식에 참석한 한 일본인이 현장의 청 중들에게 "이 전문적인 문제를 해결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 장을 펼쳤지만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는 단지 명칭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었다. 1978년 발표된 어느 중요한 논문은 부제에 '몽고증'이라는 말을 쓰면서,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이들은 어쨌든 '몽고인'처럼 생겼다"라고 주장했다.
다운증후군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기록을 아무 리 찾아봐도 동아시아인이 인종적으로 몽고인이다라는 개념에 도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몽고눈과 몽고점의 경우에서도 '몽 고인종성 자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서구인 누군가가 다 운증후군이나 특정한 눈 모양 혹은 피부의 반점 때문에 '몽고인'처럼 '생겼다'면, 그것은 코카서스인종의 골격에 나타난 대단히 이국적이고 외래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퇴행 이론 또한 결국 폐기되었을지 몰 라도, 이러한 이상 현상을 보이는 서구인의 몸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거 나 최소한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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