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식사

인문 2021. 2. 17. 20:02

- 17~18세기에 중국에서 국수를 빼는 국수틀이 한반도로 전해진 이 메밀국수로 만든 음식의 종류가 늘어났다. 18세기 이후 메밀국수 사리에 동치미 국물을 부은 물냉면이 평양과 해주에서 유행했다.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때가 되면 서울의 궁궐 근처에 메밀국수를 만들어 판매하는 국숫집이 여러 군데 생겼다. 한여름에 일부 지역에서만 수확하는 밀과 달리, 메밀은 여름에 파종해 2~3개월만 지나면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생육 기간이 짧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이처 럼 메밀이 밀보다 공급이 원활한 까닭에 18세기 후반이 되면 국수틀에 메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넣고 내린 메밀국수를 많이 먹었다. 겨울에 동치미나 배추김치가 있으면 그 국물에 메밀국수의 사리를 말았고, 다른 계절에는 간장·참기름과 후춧가루 혹은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해 비빔냉면을 만들었다. 소고기를 삶은 국물에 메밀국수의 사리를 말아서 온면을 만들기도 했다. 고종이 즐겨 먹었던 골동면을 대접받은 앨리스 루스벨트의 반응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이미 7월 27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는 도쿄로 가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桂太郞, 1848~1913)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인 정하는 비밀조약을 맺었다. 그런 상황을 잘 몰랐던 고종 황제는 앨리스 루스벨트가 귀국하여 그녀의 아버지에게 대한제국의 사정을 알려 “일 본의 마수를 떨쳐버리고 해방되길” 도와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고 종 황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국 대통령 딸과의 오찬은 단지 최초의 외국인 숙녀와의 식사로 끝나고 말았다.
- 1900년대부터 서울에는 온갖 음식점이 문을 열었다. 고급 음식점인 조선요리옥(조선요릿집)을 비롯해 술집·전골집 · 냉면집 · 장국밥집 · 설렁탕 집 비빔밥집 등이 있었다. 조선 음식점은 조선인 신사, 노동자 등 계층 과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했다. 심지어 술집과 중 하급 음식점의 손님들은 한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을 자리를 가리지 않 고 앉거나 서서 먹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 사회에서는 계층과 남녀 구분이 엄격 했기에 이런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20세기 초반 식민지 한반 도에서 기존의 사회적 관념이 무너져갔다. 서울의 중하급 조선 음식점 메뉴 중에서 인기가 많았던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하지만 일부 양반 출 신들과 근대적 취향을 가진 모던보이(modern boy)와 모던걸(modern girl)은 설 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것을 꺼렸다. 양반 출신들은 여전히 계층과 남녀 구분을 따졌고, 모던보이와 모던 걸은 자신들도 식민지 국민이면서 하층민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 설 렁탕집 출입을 삼갔다. 서울의 설렁탕집 주인 중에는 이런 '별난' 고객 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국밥집이 서민을 상징한 음식점이라면, 조선요리옥은 부유층과 권력자가 드나들던 고급 음식점이었다. 조선요리옥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이 있었다는 점이다. 
- 카페 vs 선술집 
1920~1930년대 도시의 모던보이들은 근대적 유흥 공간인 카페(cafe) 를 즐겨 찾았다. 일본을 통해 서울에 유입된 카페는 커피하우스이자 술을 마실 수 있는 바(bar)였다. 1920년대 말이 되면 웨이트리스를 두고 남 성 손님을 접대하는 카페가 성행하게 된다. 당시 카페의 주된 메뉴는 양주, 칵테일, 맥주였다. 카페의 웨이트리스는 조선요리옥의 기생 같은 남성 손님의 접대부였다. 1932년 9월 1일자 한 잡지 기사에서는 최근 몇 해 사이에 카페가 서 울 청계천 북쪽에 많이 생겼다고 하면서, 울긋불긋 단장한 2층, 3층 양옥에서 레코드의 재즈 음악이 울려 퍼진다고 했다. 1920~1940년대 초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카페와 선술집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 한 공존은 식민지 조선에 근대(modern)와 전통(tradition)이 마구 뒤섞여 있 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근대와 전통의 뒤섞임뿐만 아니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조선인과 일본인도 뒤섞여 살았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은 1910년 17만 명 정도에서 1920년대 중반에 40만 명, 1930년대 50만~60만 명, 1944 년 5월 약 71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국의 중심부에서 왔다는 의미로 내지인(內地人)'이라고 불렸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은 행정관료·군 인 경찰관 교사로 일하거나 각종 기업을 운영했다. 그중 농어업 · 식품 제조업·음식업 등에 종사하는 일본인은 조선과 일본 내에서의 유통은 물론이고,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으로까지 유통망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식생활은 점차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되 어갔다.
- 우동은 일본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말이 일본어이 기 때문에 '가락국수'라는 순화한 용어를 써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 나 우동'을 '가락국수'라 부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심지어 한국의 중 국 음식점 메뉴판에서도 가락국수가 아니라, 우동' 이라고 적힌 메뉴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한국의 일본 음식점 우동과 중국 음식 점 우동은 요리법에서나 맛에서 같은 음식이 아니다. 다만 밀가루를 반 죽해 만든 굵은 가락의 국수를 사용하고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맑은 국물을 낸다는 점이 같다.  일본에도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서 우동을 팔지는 않는 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중국 음식점에도 우동이란 메뉴는 없다. 그런 데 왜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만 우동이란 음식이 있을까? 그 이유는 식민지 시기 중국 음식점에서 국수류의 음식을 일본식 표현으로 우동이 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오늘날 일본 장유의 기초는 농학자 도가노 메이지로(梅野明三郞, 1882~1940)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913년에 거의 900쪽이 넘는 《최신 장유양조론(最新醫油諫造論)》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장유를 빠른 기간 에 발효하는 속양법(速法)을 제시했다.46 이 속양법의 바탕에는 제조공 장의 청결과 발효균의 제어, 그리고 기계적 생산이 있었다. | 조선의 간장은 대두(大豆)라고 불리는 황색의 큰 콩을 쪄서 직사각형 이나 원형의 메주를 만들어 실외에 두고 띄운 다음, 메주를 깨끗하게 씻어 소금물을 담은 항아리에 넣고 발효해 만든다. 5개월쯤 지나서 메 주 건더기와 간장을 가른 뒤 간장을 솥에 넣고 끓인 다음 다시 항아리에 담아 숙성한다. 일본 장유의 주재료도 대두이다. 그런데 도가노가 제 시한 속양법 공정에는 밀가루를 볶아서 찐 콩과 섞어 누룩실에서 발효 해 메주를 만든다. 이것을 발효 통에 넣고 숙성한 다음 짜서 생(生)장유를 추출한다. 생장유를 두 번에 걸쳐 끓이면 시판할 수 있는 장유가 완 성된다. 한편, 1887년에 결성된 노다장유양조조합(野田醬油壤造組合)에서는 온도 조절을 통해 황국(黃) 미생물을 배양해 대두와 밀로 만든 메주에 접종 한 후 석탄으로 불을 때서 온도를 높여 발효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1917년 노다장유주식회사로 전환되면서 장유 생산은 본격적 인 공업화의 길을 걸었다. 1920년대 도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대부 분 공장에서 생산된 장유를 구매했다.
- 《동아일보》 1935년 5월 16일자 석간 4면의 가정 일용품 상식이란 칼럼에 '진간장의 좋은 것을 가리는 법'이란 글이 실릴 정도로 이미 일본식 장유는 필수품의 위치에 올랐다. 조선의 부유층 주부들은 일본 식 장유를 '왜간장' 혹은 '진간장' 이라고 부르면서 일본 음식은 물론이 고 조선 음식에도 사용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장유회사에서는 주원료인 콩 과 밀의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개발된 장유가 산분해(酸分解) 장 유 혹은 아미노산 장유이다. 이 장유의 주재료는 콩과 밀이 아니라, 콩깻묵 ·땅콩깻묵·비지 등이다. 이 재료를 식용 염산으로 가수분해하여 단백질 성분인 아미노산을 추출한 다음 식용 수산화나트륨(caustic soda, 가성소다)이나 탄산나트륨(sodium carbonate, 탄산소다)을 넣어 중화한다. 여기에 기존 장유의 색과 맛과 향을 내는 화학약품을 추가하면 산분해 장유가 완성된다. 이 방식은 콩과 밀이 아닌 곡물의 부산물을 사용하고,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아 단기간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제조 원가가 저렴 하다. |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그 많던 일본식 장유회사는 한국인 손 에 넘어갔다. 그러나 일본인 장유 기술자들은 자신들 밑에서 일하던 조 선인 노동자들에게 산분해 장유의 생산 기술을 알려주지 않은 채 일본 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2년여가 지난 1948년 4월에야 일본인이 남겨 놓고 간 장유회사의 실험실에서 한국인이 산분해 장유 생산에 성공했 다. 식민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적산(敵産, 일본인이 남긴 재산)으로 남은 장유공장에서 한국인이 생산한 일본식 장유와 산분해 장유가 음식점은 물론이고 가정의 부엌으로 진하게 스며들었다. 
- 명란젓은 조선시대 함경도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다. 조선시 대 사람들은 생선의 알을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반쯤 말린 어란(魚卵)을 만 들어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먹었다. 명란젓은 어란의 한 종류였다. 다만, 명란은 알집이 단단하지 않아 겨울이 아니면 상온에서 쉽게 썩어서 명 태를 잡자마자 명란을 소금에 절여두었다. 명태에 관한 기록은 17세기 문헌에서부터 나온다. 문헌에서는 북쪽 에서 나는 생선이라서 '북어(北魚)'라고 적었지만, 민간에서는 명씨(明氏) 어부가 잘 잡아서 명태라고 불렀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 후기 함경도 어부들은 초겨울에 명태를 대량으로 잡아서 관찰사에게 세금으로 냈 다. 함경도 관찰사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명태를 수레에 실어 서울의 왕실로 보냈다. 거의 한 달이 넘는 동안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지면서 명태는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고, 서울에 도착하면 꾸덕꾸덕 마른 상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태의 살이 연해져 맛이 좋았다.
- 멸치는 조선 후기부터 강원도의 동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혔던 생선 이다. 당시 조선 어민들은 멸치 떼를 횃불로 유인해서 그물로 떠내 통 째로 말려서 식재료가 아니라 거름으로 사용했다.14 1900년대 한반도 로 이주한 일본 어민들은 조선 어민과의 충돌이 적은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에서 멸치를 전문적으로 잡았다.15 일본 어민들은 멸치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말리거나 한 번 찐 뒤 말려서 유통했다. 또, 생멸치를 소금 에 절이거나 젓갈로 가공해 판매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은 반면, 일본인 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의 육수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김복인 은 일본인의 멸치 사용법을 가지고 와서 조선인도 소고기 대신에 찌개나 국에 넣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 어 먹거나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내어 먹지만, 이런 멸치 식용 방식은 해방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16 해방 이후 멸치 어획량은 날로 증가했지 만 일본 수출 길이 원활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언론에서 멸치의 영 양과 맛과 요리법을 소개하면서 멸치 소비를 장려했다. 멸치는 1970 년대 이후 한국 음식의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 식민지 시기와 해방 직후에 활동했던 국어학자 방종현(方鍾鉉, 1905~1952) 은 해방 후에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음식으로 빈대떡을 꼽았다. “그전 에는 거리에서 이것을 구해 먹을래야 힘들던 것인데, 해방 후에는 이것 이 방 안에서는 물론 노상(路上)에서까지 거의 도처 어느 곳에서나 아니 볼 수 없으리 만큼 성행하여졌다. 처음에는 골목 안에서 간혹 그 간 이라기보담은 그저 조그만 종잇조각에 '빈대떡' 이라는 석 자를 겨우 보 일 정도로 써 붙이었더니, 그 후 점차 일반의 환영을 받음인지 골목에 서 넘쳐서 큰 길 정면인 가두(街頭)에까지 뚜렷한 간판을 가지고 진출하 게 되었다.” 빈대떡은 녹두를 맷돌에 갈아서 부친 음식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돼지고기 · 숙주 · 고사리 등 다른 부재료를 더 장만하여 녹두 반죽 에 넣는다. 빈대떡은 다른 이름으로 빈재떡, 빈자(貧者, 가난한 사람)떡, 빈대(賓待, 손님 접대)떡’, 지짐, 문주, 녹두떡 등으로 불린다. 그중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빈자' 혹은 손님을 접대한다는 '빈대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 가 우세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 자료를 뒤져보면, 병저(?鮮)의 중국 어 발음 '빙져'에서 생긴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한자를 모르고 중국어 발음만을 흉내 내서 '빈대' 혹은 '빈재' 따위로 부르다가 음식 임을 밝히기 위해 끝에 '떡' 자를 붙여 '빈대떡'이 되었다는 것이다. 빈대떡집은 그다지 많은 자본이나 특별한 요리 기술이 없어도 차릴 수 있는 음식점이었다. 특히 빈대떡의 주재료인 녹두는 196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쌀보다 월등히 값이 쌌다. 그래서 수중에 돈이 얼마 없던 사람들은 번철을 하나 구해 골목 입구나 큰길가에 자리를 잡고서 빈대 떡을 지졌다. 특히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던 청계천 변에는 겨울뿐 아니 라, 여름에도 빈대떡을 파는 부인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빈대떡' 이란 이름을 써 붙인 음식점도 있었지만, 대포'라고 써 붙이고 막걸리와 함 께 빈대떡을 파는 곳도 있었다.
- 부산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이 풍부해서 길거리 에서 풀빵을 파는 사람도 많았다. 철로 된 틀에 묽은 밀가루 반죽과 팥 소 따위를 넣어 구운 풀빵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이 들여온 길거리 음식 이었다. 가난한 피란민들은 길거리에서 풀빵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부산에는 식민지 시기 대용식운동 때 생긴 소규모 식빵공장과 밀가루로 건면을 만드는 소규모 제면공장도 많았다.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영도의 어시장 근처에서는 어묵을 생산 하는 소규모 공장도 여러 곳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이 만들었던 가마보코(蒲鮮)는 흰살생선의 살을 가지고 수분을 짜내고 으깬 다음 소 금과 달걀흰자를 넣고 모양을 만들어 익힌 음식이다. 이에 비해 한국형 어묵은 생선의 살과 부산물에 밀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만든 다. 당시 사람들은 이 어묵을 일본어로 '오뎅(Th, 여러 가지 가마보코를 무·우무 등과 함께 국물에 삶아낸 일본 음식)' 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일본 음식 가마보코 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한국형 어묵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바로 미국과 유럽에서 구호물자로 들어온 밀이 결정적이었다. 한반도의 식생활 역사에서 1937년부터 1953년은 중일전쟁·태평양 전쟁·한국전쟁으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다. 이 시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조선총독부, 미국과 소련의 군정, 그리고 남북 한의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 자들은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선 정권들이 행했던 조치들을 그대로 따르는 선택을 자주 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절미운동, 혼식과 분식 장려운동, 대용식운동 같은 정책은 미군정기, 대한민국의 이승만과 박정희 통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 잉여농산물은 미국 농촌에서 대량으로 수확한 밀·보리·콩 같은 양 곡 중 자국에서 소비하지 못하고 남은 농산물을 가리킨다. 1954년 미국 정부는 자국의 농산물 가격을 유지하고 농산물 교역을 증진하는 한편, 저개발국의 식량 사정을 완화하기 위해 PL480(Public Law 480, 미공법 480호) 이란 국내법을 만들었다. PL480 법안은 미국 내 밀의 주생산지인 미네 소타(Minnesota)주 출신의 휴버트 험프리(Hubert Horatio Humphrey, Jr. 1911~1978) 상원의원과 세계적 곡물회사인 카길(Cargil)의 합작품이었다. 한국 정부 는 1955년 미국 농업 교역 발전 및 원조법 제1관(款)에 의한 협정'을 미 국 정부와 체결해 1956년부터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때, 도입 농산물의 판매액을 한국 통화로 적립하고, 그 중 일부는 한국에 있는 미국 원조기관의 비용으로 충당하며, 나머지는 한미 간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개발과 군사력 지원에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의 밀 생산 농민들은 폐기할 뻔한 남아도는 밀을 한국 같은 저개발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미국 정부는 원조 명분을 내세워 한국 정부와 군사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1950년대 혼분식 권장을 쌀 절약과 미국의 원조 밀을 통한 식생활 개선 정책으로 바꾼 박정희 정부는 밥만 쌀로 짓게 하고, 막걸리 · 청주·소주·떡볶이 등을 미국산 밀가루나 외국산 곡 물로 만들도록 강제했다. 강력한 행정력이 동원되어 시행되었던 혼분식 장려운동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의 분식 소비가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밀막걸리의 등장은 막걸리 제조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본래 양조장에서는 직접 제조한 재래식 누룩을 사용했는데, 1966년부터 일 본 누룩 코우지)와 비슷한 아스페르길루스균(Aspergillus shirousami)을 사 용하기 시작했다.46 주재료가 쌀에서 밀로 바뀌면서 막걸리 제조업자들 은 막걸리에는 재래식 누룩을 넣어야 한다는 인식을 버리고 편리성에 무게를 더 두게 되었다. 밀막걸리는 제조 시간도 짧은 편이었다. 쌀막걸 리를 제조하는 데 120시간이 걸렸지만, 밀막걸리는 70시간이면 가능했 다. 제조 시간 단축 등으로 제조 원가가 낮아지자 막걸리 제조업자들은 밀막걸리 제조를 더 반기는 분위기였다. 한편, 제조업자들은 밀막걸리의 단맛을 유지하기 위해 완전히 발효 되지 않은 술을 소매점에 팔았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상태였던 밀막걸리가 유통 과정에서 발효되면서 탄산이 생겨 예상치 못한 막걸리 맛을 내게 된 것이다. 소비자들은 쌀막걸리 맛을 잊어버린 듯 탄산의 톡 쏘는 맛에 금세 익숙해졌다. 정부의 쌀막걸리 금지 조치가 오히려 밀막걸리 붐을 일으켰다. | 1975년 가을, 새로 개발한 통일벼로 사상 최고의 쌀 수확량을 얻자, 정부는 1977년 12월 15일 막걸리 제조에 쌀을 넣지 못하도록 했던 행정 조치를 폐지했다. 그런데 부활한 쌀막걸리에서 탄산의 톡 쏘는 맛이 나지 않자, 소비자들은 사이다를 섞어 마셨다. 그만큼 밀막걸리의 맛이 강렬했던 것이다.
- 막걸리와 함께 소주도 양곡관리법의 규제 대상이었다. 정부는 양곡관리법에 따라 1964년 12월 21일 “주정(酒精)과 소주 제조에 있어 백미 및 잡곡 사용을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절 금지하고 국산 서류(類, 감 자나 고구마처럼 덩이줄기나 덩이뿌리를 이용하는 작물)로 대체토록 결정했다.” 고려 말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는 멥쌀로 만드는 술이다. 멥쌀로 막걸리를 만든 다음, 항아리 위에 뜬 맑은 술을 떠내서 솥에 담고, 솥 위에 소줏고 리를 올린 뒤 알맞은 온도로 불을 때서 맑은 술에서 나온 수증기가 찬 물이 담긴 그릇 아래에 닿아 맺힌 이슬을 병에 모은 것이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멥쌀 대신에 감자나 고구마로 소주를 제조하라고 했다. 이미 1930년대 후반에 고구마로 알코올을 만드는 방법이 창안되었다. 먼저 고구마를 기계로 분쇄한 후 물을 붓고 소량의 염산을 혼합하여 삶아 풀처럼 만든 다음, 여기에 효모를 넣어 알코올 당화 발효를하면 흑갈색의 탁주가 만들어진다. 술지게미를 걸러낸 맑은 술을 연속식 증류기에서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 95~96퍼센트의 주정을 만들 수 있다. 이 주정에 물을 부으면 알코올의 농도가 묽어진다. 여기에 감미료를 첨가한 술이 희석식 소주다. 정부는 1964년 12월 21일의 조치에서 주세 행정 개혁과 외환 절약을 내세워 주정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당밀(糖蜜)의 수입도 금지했다. 당밀은 사탕무나 사탕수수에서 사탕을 뽑아내고 남은 검은빛의 즙액이 다. 이 당밀에 물과 효모를 넣어 발효해 밑술을 만든 다음, 연속식 증류 기에서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 40~94퍼센트의 '럼(rum)'이 완성된다. 50 이 '럼'에 물을 부어 알코올 도수를 30~40퍼센트로 낮추면 희석식 소주가 된다. 당밀은 국내산 고구마나 감자와 비교하면 값이 싸서 그동안 주정회사는 대부분 당밀을 수입해 사용해왔다.
- 1920년대만 하더라도 조선의 양계업은 산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했다. 주로 가정에서 닭을 키워 달걀을 시장에 내다 파는 수준이었 다. 조선총독부는 품질이 좋은 달걀을 생산하는 서양과 일본의 닭 품종을 보급했지만 성과가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1950 년대까지 쭉 이어졌다. 1960년대 들어와서도 사람들은 사료 값이 비싼 데 비해 달걀 값이 싸서 양계업을 하면 큰 이익을 내기 어렵다고 인식 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달랐다. 1960년대 후반부터 소고기 위주 육식 소비로 인해 소고기 값이 폭등하자,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 안으로 질 좋은 닭고기 생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양계업자들은 닭고기 판매를 목적으로 할 경우, 브로일러(broiler)라고 불리는 육계(肉鷄)를 키웠다. 브로일러는 부화한 지 8~10 주쯤 된 무게 15~2킬로그램의 닭을 가리킨다.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양계업자들도 정부의 닭고기 생산 장려로 브로일러를 키우고 있었다. 브로일러의 사료로는 미국산 옥수수, 페루산 어분(魚粉, 생선을 찌거나 말려서 만든 가루), 그리고 단백질을 강화하기 위해 대두박 등을 섞어서 만든 배합사료를 썼다. 다 자란 브로일러는 주로 통닭구이용으로 소비되었다. 1969년 소고 기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육류 파동이 일어나자 대체재로 브로일러 소비가 늘어났다. 마침 콩기름을 비롯하여 식용유 생산이 늘어나 이 전에 비해 식용유 가격이 낮아져 닭을 통째로 기름에 튀긴 통닭을 판매 하는 가게가 생겨났다. 일명 '통닭집'이 시장 안, 닭이나 오리를 판매하 는 가축전 근처 곳곳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고온의 기름에 튀긴 바삭한 식감과 부드러운 고기 맛을 즐겼다. 이 통닭 튀김은 국내에 주둔한 미군들이 즐겨 먹던 프라이드치킨을 모방한 음식으로, 한국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지만 실제로 그리 좋 은 음식이라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식용유 가격이 그리 싼 편이 아니어 서 통닭집에서는 2~3일 동안 같은 기름을 계속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 은 산패된 기름으로 튀긴 통닭을 먹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미 야유회나 가족 모임, 소풍이나 휴가를 갈 때 통닭을 싸가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퍼졌다.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콩기름이 식용유의 대표 자리를 차지했다. 길 거리에는 파배기를 비롯해 빈대떡, 호떡에 이르기까지 기름에 튀기거 나 지진 음식을 판매하는 노점이 늘어났다. 게다가 인스턴트라면이 선 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식용유 수요가 날로 증가했다. 국내산 식용유 공 급이 달리자 결국 정부는 외국산 식용유를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부터 미국 정부는 자국의 옥수수기름, 해바라기기름, 콩기름을 한국 수출 상품으로 내세웠다. 국내 식용유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입양은 해마다 증가했다. 냉전의 경계선에 있던 한국 사회는 미국산 식용유 수입과 함께 미국식 통닭을 한국 음식으로 진화시켜나갔다.
- 통일벼의 재배지 확산은 정부와 농민이 앞장서서 한발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보온 못자리를 도입해 병충해를 예방한 결과였 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정부가 주도하여 통일벼와 통일벼 계통 의 재배를 확대한 데 있었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통일벼의 밥맛이 좋 지 않다며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다만 그 당시 유신헌법의 독재체제 아래에서 이런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인디카 계통의 쌀은 자포니카 계통의 쌀에 비해 밥을 지으면 찰기가 매우 적다. 그러다 보니 12분도의 백미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통일벼의 밥맛이 좋을 리가 없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통일쌀을 가정에 보급하기에 앞서 이미 1972년 10월에 통일쌀로 밥을 맛있게 짓는 요령을 홍보한 바 있었다. 쌀 1리터를 기준으로 일반미는 밥을 지을 때 물1.8리터를 넣지만, 통일쌀은 2리터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쌀은 물을 많이 먹기 때문에 일반미로 지은 밥에 비해 용량은 7퍼센트, 중량 : 은 3.6퍼센트가 늘어난다고 했다. 또 가볍게 씻어 비타민 B1의 손실을 막아야 하며, 끊을 때까지는 센 불에서, 일단 끓으면 약한 불에 뜸을 푹들인다는 점도 알렸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통일벼의 밥맛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1977년 초 새로운 벼 품종인 수원264호와 이리327호를 개발하여 재배 를 장려하고 기존 통일벼 계통의 벼는 재배지를 축소해나갔다. 통일벼는 수확량 면에서는 두드러졌지만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1981년 전두환의 군사정부는 통일벼 장려 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1992년 정부는 추곡 수매 품목에서 통일벼를 제외했다. 한편, 1965년경 도입된 일본 벼 품종 아키바레(秋晴)는 밥맛이 찰진 편이라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쌀이 되었다. 농민과 소비자 들은 통일벼와 아키바레벼의 밥맛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아키바레를 훨씬 높 이 쳐주었다. 심지어 통일벼는 '정부미라 낮춰 부르고 아키바레벼는 일반미'라고 부르면서 경기미의 대표'로 꼽았다. 농민들은 논에다 반 반씩, 즉 논의 반은 일반미를 심고, 나머지 논에 통일벼 계통의 개량종 을 심었다. 1970년대 중반경, 농촌에서는 “반은 내다 팔고 반은 (자신이) 먹을 것”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농촌진흥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자포니카계의 신품종 육성에 열중했고, 다수확이 가능한 품종을 계속해서 육성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아키바레와 함께 1956년 일본에서 개발된 고시히카리(越光)94 품종의 벼를 1990년대 이후 즐겨 먹고 있다.
- 1979년 10월 2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아케이드 에서 문을 연 일본 롯데그룹의 롯데리아(Lotteria) 1호점이 국내 첫 패스 트푸드 매장이다. 1983년 던킨도너츠(dunkindonuts), 1984년 버거킹 (Burger King),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 웬디스(Wendy's), 1985년 피자헛(Pizza Hute), 피자인(Pizza Inn), 1986년 배스킨라빈스(Baskin Robbins), 1988년 맥도날드 (McDonald's) 등 미국 패스트푸드 기업의 매장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대도시 번화가에 자리를 잡아갔다. 미국식 패스트푸드 기업의 국내 진출은 한국 소비자들의 넉넉해 진 주머니를 노린 외국 업체들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군사정권 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인이 모이는 체육행사에서 낙후된 한국 음식점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해 미국식 패 스트푸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식 문화를 소비했다
- 19세기 말 소 도살과 소고기 판매가 자유로워진 이후에 사람들이 가 장 좋아했던 소고기 부위는 갈비였다. 갈비는 소·돼지·닭 따위의 가슴 통을 이루는 좌우 열두 개의 굽은 뼈와 살을 식용으로 부르는 말이다. 소비자들은 소갈비를 갈비의 으뜸으로 여겼고, 소갈비 요리 중에서 갈비찜을 특히 좋아했다. 1980년대까지도 서울의 부유층 가정에서는 설 날이나 추석, 잔치나 손님 초대에 갈비찜을 올리는 것이 일종의 문화였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부터 갈비구이가 갈비찜의 인기를 넘어섰다. 갈비구이는 일반 가정에서는 먹기 힘든 고급 음식점의 메뉴였다. 음식 점의 구이용 갈비는 소고기 부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워 서 먹기 편하게 다시 손질을 해야 하는데,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만들 었다. 하나는 1960년대부터 유명세를 떨쳤던 경기도 수원의 수원식 갈 비다. 수원식 갈비는 갈비의 뼈에 붙은 양쪽 살코기를 그대로 잘라낸 것처럼 뼈에 살을 양쪽으로 붙여서 요리했다. 그래서 '양쪽 갈비'라고 불렀다. 요사이는 '왕갈비'라고 부르는 수원식 갈비는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하다. 다른 하나는 갈비의 뼈를 두 쪽으로 잘라 뼈 한쪽에만 살코 기를 붙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갈비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의 강남 에 자리 잡은 갈비구이 전문점에서 이문을 많이 남기려고 갈비의 뼈를 나누어 사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 LA식 갈비'는 흔히 'LA갈비’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먹는 소갈비인 프랑켄 스타일 립(Flanken Style Ribs)을  리킨다. 앞에서 소개한 한국의 '양쪽 갈비'나 '한쪽 갈비'는 갈비 옆에 붙은 살을 칼로 넓게 펴낸 형태지만, 프랑켄 스타일립은 갈비뼈 전체 를 뼈의 직각 방향으로 잘라서 갈빗살 사이사이에 조그마한 갈비뼈가 붙어 있는 형태다. LA갈비의 유래에 관한 주장은 여럿이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그중 196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한국인 이 당시 유대인이 운영하는 정육점에서 판매하고 있던 프랑켄 스타일립을 좀 더 얇게 잘라 달라고 주문하여 한국식 소갈비찜과 소갈비구이 를 만들어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LA갈비의 요리법은 한국산 소갈비구이와 비교하면 매우 간단하다. 찬물에 30분 정도 담가서 핏물을 뺀 후 가볍게 물기를 없애고 양념장에 재웠다가 구우면 된다. 음식점에서 파는 LA갈비는 대체로 단맛이 강해 서 어린이나 젊은 층이 좋아한다. 그러나 LA갈비는 1990년대 초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해가 갈수록 값이 올라서, 지금은 한국산 갈비에 버금갈 정도로 비싸다.
-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마다 돼지가 한두 마리씩 있어서 전용 사료가 아닌 주로 음식물 찌꺼기를 먹여 키웠다. 이렇게 키운 돼지의 고기 에서는 고약한 비린내가 났다. 그래서 부유층에서는 돼지고기를 선호 하지 않았다. 그런데 1960~1970년대 소고기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정부에서는 육류 가격의 안정화를 위해 대체재로 닭고기와 함께 돼지 고기 식용을 적극 권장했다. 식품학자와 요리학자까지 동원하여 돼지 고기의 영양학적 가치와 요리법을 홍보했다.19 | | 그러나 한국인의 소고기 선호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농가에서는 홍 콩이나 일본에 돼지고기를 수출했지만, 품질 면에서 전문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비싼 값을 받지 못했다. 정부는 양돈업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업들에 축산업 진출을 권유했다. 1976년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지금의 CJ)은 경기도 용인(지금의 테마파크 에버랜드 자리)에 기업형 양돈장을 열었다. 제일제당과 롯데그룹의 롯데햄(지금의 롯데푸드)은 1980 년 대단위 육가공 공장을 건설하여 한국산 돼지의 뒷다리 고기로 햄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에 유통.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한국 양돈업체는 품질개선을 위해 돼지 품종을 식용에적당한 개량종으로 바꾸고, 배합사료를 먹이는 등 돼지고기생산에 많은 자본과 기술을 투여했음. 돼지고기 부위 중 안심과 등심은 주로 일본에 수출했고, 나머지부위는 국내에서 유통. 그중 삼겹살은 국내 소비자들이 구이로 즐겨 먹었음. 80년대 삼겹살구이의 유행에는 소고기보다 값이 월등히 싸다는 점이 중요한 원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80년 6월 한국에 출시된 일본의 휴대용 가스버너와 일회용 부탄가스가 큰 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으로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야외로 나들이를 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때부터 야외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로 삼겹 살을 구워 먹는 게 유행했다. 결국, 1990년대 이후 삼겹살구이는 한국 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 요리 중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삼겹살구이를 먹고 나면 남은 삼겹살을 잘게 썰 어서 배추김치, 그리고 취향에 따라 대파·양파·마늘 등과 쌀밥을 넣고 볶음밥을 만들어주는 음식점도 생겼다. 삼겹살구이는 양돈업의 현대화 와 외식업의 확대, 동물성 단백질에 대한 욕구 증가, 그리고 한국인의 고기구이와 비빔밥 선호 취향 등이 결합하여 198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 1980년대에도 강남의 아파트값은 폭등했고, 강남의 신흥 중산층은 그 어느 때보다 지갑이 든든했다. 그러나 강남에는 신흥 중산층이 가족 들과 함께 여가를 보낼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이후 1981년 11월에 개 업한 신사동의 삼원가든을 필두로, 논현동의 늘봄과 서라벌, 서초동의 초성공원과 신라정 같은 초대형 고급 음식점은 휴일 가족 나들이의 명 소가 되었다. 주로 갈비구이와 냉면을 판매한 초대형 고급 음식점은 '호 화 갈비타운', '전원 갈빗집', '공원식 갈빗집'으로 불렸다. 공원식 갈빗 집이란 말에 어울리게 이런 음식점은 1,000여 평의 광대한 대지에 고급 관상수, 인공폭포, 구름다리, 물레방아, 정자, 석탑, 분수대, 연못, 수족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공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1983년 강남에는 공원식 갈빗집을 비롯하여 양식·한식·일식·중식 음식점이 무려 2,390여 곳이나 들어섰다. 이 중 주차장 시설을 갖춘 대 형 음식점도 100여 군데나 되었다. 3저 현상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갑자기 큰돈을 움켜쥔 거부들은 뚜렷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참에 “그래도 먹는장사가 제일이라는 경험적인 장사 원리에 편승해 음 식점 개업에 나섰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 땅 값이 오를 거라고 예측한 부자들이 200평이 넘는 땅을 사서 빈터로 두다 공한지세(空閑地稅, 이용하지 않고 내버려둔 대도시 내의 토지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를 물게 되자 이를 피하려 음식점 개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 초·중반 강남의 대형 음식점은 기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삼원가든은 강남의 대지주 K씨 소유의 땅 1,200평을 빌려 2억여 원의 시설비를 들여 개업한 곳이었다. 1983년 상반기 손님 수는 평일에는 200여 명, 휴일에는 350여 명이나 되었다. 삼원가든은 휴일 하루 동안 1,500만 원의 최고 매상액을 올릴 때도 있 었으며, 평일에도 하루 매상액이 400만~500만 원이었다. 1982년 한국은행이 집계한 음식숙박업의 성장률은 10.4퍼센트로, GNP 성장률 5.4퍼센트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당시 사람들이 먹는 데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쓴 셈이다. 이런 초대형 음식점의 번창은 한식음식점의 음식 맛과 서비스, 설비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데 이바지했 을 뿐 아니라 먹는장사가 제일'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  식민지 시기와 해방 직후만 해도 도시 생활 개선론을 강조한 지식인 들은 고추나 마늘처럼 자극적인 맛의 양념이 들어간 음식을 원시적 식 생활'이라고 하면서 비판했다.85 서양인과 일본인이 한국인의 입에서 나는 마늘과 파 냄새를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마늘과 파 냄새는 문명국의 냄새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일부 지식인들의 계몽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부터 고추와 마늘·파가 많이 들 어간 음식들이 음식점과 가정에서 많이 소비되었다. | 이후 설탕 가격이 내려가자 설탕과 고추를 주양념으로 한 음식들이 유행했는데, 그중 서울 무교동 낙지볶음과 길거리 음식인 떡볶이가 대 표적이다. 1970년대 무교동의 낙지볶음을 먹은 사람들은 맛이 칼칼 하다'라고 표현했다. 낙지볶음의 칼칼한 맛은 마늘·파와 함께 고춧가루 와 설탕이 만들어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무교동 낙지볶음의 양념 은 더욱 매워졌다. 마침 시중에 시판된 청양고추는 낙지볶음에 매운맛을 한층 더했다. 청양고추는 1983년 당시 한국 최대의 종묘회사인 중앙종묘에서 개 발한 품종이다. 중앙종묘에서는 커리(curry) 제조에 필요한 캡사이신 (capsaicin) 추출용으로 타이 재래종과 제주도 재래종을 잡종 교배하여 신품종을 만들었는데, 예상보다 캡사이신 추출률이 높지 않아 경제성이 없었다. 중앙종묘는 이 품종을 버리기 아까워 시험 재배에 참여한 경상 북도의 청송과 영양 농민들에게 무료로 씨앗을 주었다. 농가에서는 그 씨앗을 재배해 풋고추를 인근 횟집에 제공했는데, 횟 집에서 매운탕에 넣었더니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 사실이 중앙종묘에까지 알려져 신품종 고추는 청송의 '청'과 영양의 '양'을 따서 '청양고추'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러 나 중앙종묘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1998년 7월 멕시코 종자회사인 세미니스(Seminis)에 인수·합병되었다. 세미니스는 다시 미국 종자회사 몬산토(Monsanto)에 넘어갔다. 오늘날 청양고추의 재산권은 몬산토가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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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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