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단순히 내적 관찰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할 때도 실제로는 항상 즉흥적인 이론화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희한할 정도로 잘 속 아 넘어가는 이론가인데, 바로 우리가 관찰할 대상은 거의 없으면서도 반박당할 두려움 없이 한껏 거들먹거리며 의견을 밝힐 거리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 Daniel Dennett)
-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인간의 생각을 추출하고 체계화해서 인공지능을 창조하려는 프로젝 트, 이를테면 우리 내면의 현자를 구슬려서 이론들을 끄집어내려는 시 도는 실패했다. 행동을 뒷받침해 주는 지식과 신념, 동기 등을 끌어내려 는 가장 첫 단계는 절망적일 정도로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말로 유려하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한 설명 중 질문을 던질 때마다 더 많은 언어적 설명과 정당화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길게 이어지든 간에 이러한 언어적 흐름을 분석해 보면 그저 느슨하게 연결된 파편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체스 달인은 자기가 어떻게 체스를 두는지 정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의사는 어 떻게 환자를 진단하는지 설명할 수 없으며, 우리 가운데 아무도 우리가 사람과 사물로 이뤄진 일상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조금이라도 설 명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설명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말을 이어나가면서 지어내는 끔찍한 혼란일 뿐이다.
- 꿈은 자세히 쓰인, 세부 내용이 거의 없는 즉흥적인 이야기다. 마음이 그 꿈을 만들어낼 때 우리는 몇 가지 정보의 단편들만 추적할 수 있으며, 그 외에 거의 모든 것은 완전히 공백으로 남겨진다. 내 꿈에서 루드비히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지 익숙한 타탄체크 바지를 입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호머 심슨의 간 모양이라든지 치티치티 뱅뱅 자동차의 기름 소비량만큼이나 진실이랄 게 없다.
- 인위적으로 아드레날린을 주입받은 참가자들은 그냥 위약을 주입 받은 참가자들보다 두 가짜 참가자들에게 더 강한 감정 반응을 보였다. '조증' 가짜 참가자와 마주했을 때 참가자들은 자신의 증가한 심박수와 가빠진 호흡,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자기 자신의 행복감을 의미 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분노한 가짜 참가자와 함께 있을 때 이 같은 증 상을 짜증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쿨레쇼프 효과를 볼 수 있다. 기쁨과 분노의 감정이 내면에서 샘솟는 것이 아니고, 대신에 그 순간의 감정을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의 생리적 상태를 기반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가짜 참가자가 약간 흥이 오른 행동을 하는데 실험 참가자가 높은 수준의 각성을 경험하는 경우, 참가자는 그 긍정적인 감정을 강한 감정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해야 심박수의 증가와 숨 가쁨 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이 약한 수준의 희열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와는 반대로 분노한 가짜 참가자와 마주 친 실험 참가자가 짜증의 감정을 표현할 때, (당연히 아드레날린이 유발한) 그 생리학적 반응의 순수 강도는 강력한 감정 반응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실험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저 약간 거슬린다기보다는 짜증이 많이 났다고 인식한다.
샥터와 싱어의 실험은 자신의 감정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뒤집어 놓 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희열과 분노 같은 감정이 별개의 생리학적 신호, 즉 특별한 '느낌'을 주는 신체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를 특정한 감정의 생리적 상태로 밀어넣을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따라 서 아드레날린 주사는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든 간에 조금 더 행 복하게 만들거나 조금 더 화나게 만든다고 추측할 수 있다. 대신에 아드 레날린의 영향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따라 정반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대략 아드레날린은 어떤 감정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든 지 그 감정을 강하게 느끼라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조증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노골적인 분노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강요한다. 우리는 무슨 감정을 경험해야만 하는지 파악하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신체 상태를 통해 그러한 파악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감정이 내면에서 솟아올라서 생리학적 반응을 유발한다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예를 들면, 나는 화가 났으니 내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생리적 상태를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무슨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지 알아내는 것 같다.
- 당신은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분명 감정은 내면 의 깊이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감정이 먼저 나오고, 생 리학적 결과가 두 번째로 나와야만 하는 거 아닌가? 우리의 심박수는 기 분의 맹렬한 힘 때문에 마구 뛰는 것 아닌가? 분명히 상식적으로는 그렇 다. 하지만 인과관계 역시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까? 다시 말해서, 내면의 소란함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는 심장이 뛰고 있으며 몸이 들썩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다는 지각에 의해 생겨나는 것 이라면? 완전히 뒤죽박죽된 생각을 두고 우리가 절망적이라거나 희망적이라거나 아니면 조용히 체념한 것으로 해석하게 하는 것은 몸 상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이러한 충격적인 상식의 반전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미국 심리학자이자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이미 복선을 깔아두었던 내용이다. 제임스는 심리학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교과서를 쓴 저자 로 곰에게서 달아날 때 우리는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아니라 벌벌 떨기 때문에 무서운 기분을 경험한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생리적 증상 자체는 굳이 두려움의 특성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똑 같은 아드레날린의 고조와 심박수 증가, 빨라지는 호흡 등을 100미터 달 리기 시합을 위해 출발선에 설 때나 무대에 오르기 직전 등에 경험한다.
사실 집중과 신체적 노력을 요구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가 신이 나서 준비 자세를 갖추는지, 또는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는지 여부를 말하기 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곰에게서 달아날 때 몸의 생리 반응을 신이 나서 전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피가 몸 전체로 건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미친 듯이 숨을 내쉬는 것은 분명히 공포의 지표라고 인식할 것이다.
- 감정에 대한 우리의 혼란에는 기나긴 역사가 있다. 플라톤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분과 감정에 대해 우리가 관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생각과 감정을 뚜렷이 구분하던 그는 이성과 감성이 서로 반대편으로 끌어당기는 두 마리 말과 같다는 은유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아주 처음부터 엇나갈 수밖에 없다. 감정을 품는 것은 어쨌든 해석의 전형적인 행위이며, 추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생리현상과 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된 빈약한 신호들을 바탕으로 신체적 느낌이 분노나 희열, 부러움이나 질투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의 얼굴을 비탄에 잠겼다거나 음탕하다거나 화가 났다거 나 의기양양하다고 보는 것처럼, 우리가 3을 숫자 한 쌍으로 만들어진 글자로 보는 것처럼, 애매한 그림을 토끼 또는 새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몸이 보내는 최소한의 신호를 분노나 희열, 조증, 아니면 거의 모든 것으 로 느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지닌 해석의 힘에 달렸으며, 그 힘은 인생과 세상의 다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힘이다.
따라서 감정은 사유와 해석에서 자라난다. 우리는 페이스북에 올라온 휴가 사진, 비행기표를 언뜻 본 것에 비춰 생리적 반응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질투를 느꼈다고 해석한다. 이 모든 것이 추론이며, 그것
도 굉장히 정교화된 추론이다.
물론 우리는 가끔 스스로를 플라톤의 은유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어 쩌면 우리는 다음처럼 억측할지도 모른다. 엘사의 마음은 “베트남으로 호화 여행을 떠나봐”라고 말하지만 머리는 “잠깐, 넌 그럴 돈이 없어!”라고 말했고, 마음이 싸움에서 이겨버렸나 보다고 말이다. 그러나 엘사 속 에서 서로를 끌어당기던 두 힘은 이성과 감성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이 성이다. 하나의 이성은 휴가의 매력을 기반으로 했고(혹자는 그 매력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부러움을 살 거라는 기대라고 짐작해 본다) 다른 이 성은 경제적 제약을 기반으로 한다(여기에는 빚에 대한 두려움과 청구서를 갚을 걱정이 포함된다). 그리고 각각의 이성은 기분과 감정(욕망, 희망, 두려움, 걱정)을 가득 짊어진다. 따라서 ‘머리’와 ‘마음’ 간의 충돌은 이성과 감성 간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의 이성과 감성 대 또 다른 이성과 감성의 싸움이다.
- 감정은 날것의 경험'의 어떤 기본특성이 아니라 우리 생각과 사회적 상호작용과 문화 속에서의 역할을 통해 의미를 가진다. 수치스럽고, 자랑스럽고, 화가 나고, 질투를 느끼는 것은 어떤 원시적인 감정이 솟아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 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특정한 성과를 자랑스러워하며, 구체적인 이유 로 인해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물론 그러한 감정들은 신체적인 상태와 연관되지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거나 심장이 쿵쾅거리는 신체적인 상 태를 감정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같은 패턴이 분명 우리 인생의 의미에서도 좀 더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꽤 많은 것의 의미가 내면이 아니라 광범위한 인과관계의 한 지점에서부터 나온다. 따라서 당신이 사랑에 빠졌는지, 신을 정말로 믿는지, 아니면 어떤 팝송이 매력적이라거나 메스껍다고 느끼는지 등이 궁금하다면 이는 당신의 생각과 느낌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그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당신의 행동과 다른 사람의 행동과 연결되는지, 당신이 과거에 경험했던 상황과 어떻게 비교되는지 등을 고심하도록 촉진할 것이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한 사람의 내면의 감각을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헛된 시도로는 찾을 수 없다. 훗날 되돌아보면, 감정이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순간순간마다 계속해서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면의 어떤 정신적 기반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마도 무엇을 느끼는지 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지를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선택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우리의 선택은 감정만큼이나 영향을 잘 받고 변덕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감정 표현은 그저 '부정확한 아무 말일 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기로 선택하는지와는 상관없는, 재미있는 사후 논평이다.
- 이야기로 만들어낸 미래
따라서 달변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옹호하고 설명하는 해석기'는 우리의 과거를 정당화할 뿐 미래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저 해설자에 불과 할까? 실제로 해석기는 단지 과거 행동을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형태를 잡는 데 도움을 준다. 다시 한번 얼굴을 생각해 보자. 몇 년 전 나는 거짓 피드백이 어떻게 미래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지를 보는 요한손과 할의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우리는 B의 얼굴보다 A의 얼굴을 더 선호한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으면 훗날 같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러한 선호를 표현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해석기는 우리가 내리지 않은 결정을 설명하지만(귀걸이 때문이다, 혹은 파마머리 때문이다), 바로 그 설명 자체가 미래의 결정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해석기가 정당화하고 옹호할 선택을 내리려는 일관된 목표다. 우리가 (옳든 그르든) 맨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 A 의 얼굴을 선호한다고 말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마음을 바꿨음 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해석기의 창의적인 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이야 기는 당연히 날조된다. “하, 세상에. 우리가 B의 얼굴에 있는 친근한 미소를 눈여겨보지 않았네... 잠시 정신이 팔렸었어. 실수로 처음에 잘못된 사진을 고른 거야.” 그러나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은 훨씬 더 쉽고 훨씬 더 설득력 있다. 그리고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두 번째로 질문을 받았을 때 A의 얼굴을 선택하는 것에 편향될 것이다.
- 우리의 숨겨진 깊이에 도사리는 위험에 대한 기존의 신념, 욕망, 동기, 태도는 지어낸 허구이며, 우리는 내면의 자아를 표현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의 도전을 다루기 위해 우리 행동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해야(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어느 쪽을 거부 하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이야기해 주는지 궁금해할 필 요는 없다. 이 세상에는 끝도 없이 많은 질문과 끝도 없이 많은 대답이 있다. 마음이 평면이라면, 시장조사와 가설, 심리치료, 뇌 촬영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이러한 질문에 답할 방법은 없다. 우리의 정신적인 동기와 욕망, 선호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설명해야 할 일련의 정보에 집중하는 것은 뇌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들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흑백 모양에서 '의미'를 찾는다든지, 연설의 흐름상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낸다든지, 한 꼭짓점에서 균형을 잡는 정육 면체를 시각화한다든지,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 갔던 때를 회상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뉴런 집단의 어떤 부분집합이 지닌 값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 의 순서상 각 단계는 그 '질문'에 가장 잘 맞는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외의 모든 것을 가장 의미 있게 조합한 것을 찾아내려는 협력적인 계산을 수반한다. 한 단계마다 걸리는 시간은 몇백만분의 일 초지 만, 지식에 기반해 얻은 계산력과 수십억 개의 뉴런이 만들어내는 신경망을 거치는 처리 능력은 어마어마할 수 있다. 그렇다면 뇌의 계산 능력은 심각하게 제한적이면서 놀랍게도 강력하다. 개입의 문제는 생각의 순환이 한 번에 한 단계만 진행하고 한 번에 단 한 문제만 해결하도록 제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상호 연결된 뉴런들을 협조적으로 이끌어냄으로써 생각의 순환에서 어려운 질문에 답할 잠재력을 가지되, 여기에서 각각의 뉴런은 당장의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해결책에는 아주 조금만 기여한다. 예를 들어 표정을 해독하고 복잡한 물리적, 사회적 상황에서 이다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하며, 빠르게 입력되는 말이나 글자를 통합하고, 시속 1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내리치는 테니스 서브를 넘기기 위해 굉장히 복잡한 일련의 행동을 계획하고 착수하기도 한다. 각각의 이러한 과정은 기존 컴퓨터에서 성공적으로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수백만 또는 심지 어 수십억 가지의 아주 작은 단계에 대응한다. 이는 거의 상상도 못할 속도로 하나하나씩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뇌는 다른 방침을 택한느릿느릿한 뉴런 단위는 문제를 수도 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누고 잠정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빽빽하게 상호 연결된 전체 신경망을 동시에 공유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뇌가 광활한 신경 회로망을 넘나드는 협력적인 계산을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신경망은 한 번에 하나씩 거대하고 통합 된 단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기존 컴퓨터에서처럼 거의 미량에 가깝도록 작은 정보처리 단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의미다. 나는 1초당 여러 차례 움직이는 이 거대하고 통합된 일련의 단계를 생각의 순환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 말하자면 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즉흥 시인이며, 감각적 입력으로부터 한 단계 한 단계씩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정신 기관에 의해 동력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만들어진 의미를 인식할 뿐, 그러한 의미가 생겨난 과정은 감춰져 있다. 한 땀 한 땀 만들어진 우리의 즉흥곡은 너무나 유려해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무엇이든 간에 그 답은 '항상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무엇을 말 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할 때 한 번에 생각 하나씩 우리 마음을 지어내는 것이다.
- 휴식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이 바로 정신적인 막다른 골목을 돌파해 나가는 힘이다. 상대적으로 또렷한 마음으로 상쾌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맑은 마음 상태에서는 부분적인 답과 제안들, 점차 좌절하면서 고군분투 하는 끝에 실패할 게 분명한 그런 것들로 가득 찬 마음 상태에서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리고 순전히 우연으로 우리를 도와줄 단서 를 찾을 수도 있다. 다만 문제를 잠시 제쳐두는 행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리가 다시 문제로 돌아왔을 때 잘못된 과거 시도의 방해를 받지 않 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관점이 과거와 비교해 딱히 성공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때때로 정답이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다.
- 사실 뇌는 많은 제약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어느 신빙성 있는 설명에 따르면 감각적 입력의 다양한 측면(과 요소들에 대한 가능한 해석)이 서로 다른 뇌세포에 연계되어 있으며 감각적 조각과 해석 사이의 제한은 그 뇌세포 간의 연결망에 의해 포착된다고 한다. 나중에 뉴런은 전기신호를 주고받으면서 감각적 데이터에 대한 ‘최선의 해석을 찾아내려고 협력한다(또는 적어도 뇌는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해석에 안착한다). 처리 과정의 세부 내용은 복잡하고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지만, 연결망처럼 생긴 뇌의 구조는 감각에서 얻은 여러 단서를 통일성 있는 사물로 엮어내는 데 필요한 협력적인 계산을 하도록 완벽하게 설계되었다.
따라서 뇌가 수행해야 할 계산은 분명 상당히 복잡해진다. 뇌가 이러한 복잡한 계산을 모두 피해 가기 위해 영리한 단축키를 찾아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인공지능과 머신비전, 지 각심리학에서 현재의 전반적인 의견은 그러한 단축키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얼굴과 장면, 심지어 손 글씨도 알아볼 수 있는 컴퓨터 시 각 장치는 보통 방금 설명한 추론의 그물망적인 접근법을 사용한다. 그 어떤 계산도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을 '본다'고 생 각하고 싶은 더 큰 충동이 들 수도 있다. 이러한 지각의 뚜렷한 즉시성 으로 인해, 일부 심리학자들은 지각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미묘한 숨겨진 추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직접적인 것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 그렇다면 생각은 실제로는 '울툴불퉁한데도 매끄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더 나아가 위대한 착각에 대한 설명과 같다. 뇌의 목표는 우리에게 주변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지, 자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눈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뛰며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는 스냅숏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심하게 인식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 상 자체가 슬라이드 쇼나 하나로 구성된 장면에서 변화하는 이미지 모음 같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극도로 변화무쌍한 광경이 아 니라 오직 안정된 세계다. 어떻게 행동할지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분명 이 세상이 어떤 상태인지 알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뇌는 이 안정적인 세계를 모으고 엮는 복잡한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불완전한 암호 로 쓰인 메시지를 읽으려는 군인과 같다. 전투에서 다음번 움직임을 결 정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암호가 망가졌는지, 어떤 뛰어난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과 컴퓨터가 그렇 게 만들었는지는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상관도 없다. 요컨대, 보고 듣는 일이 연속적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은 뇌가 우리에게 시각과 청각 세계가 연속적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에 생겨나며, 주관적 경험은 마음의 작용이 아닌 주변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당연하게도 더 일반적으로는 생각의 순환을 감지하기 어려우며 생각의 순환 이 지닌 불규칙적인 박동에 따라 장단을 맞추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결 론에 이른다. 의식적 인식은 우리에게 (물론 자기 자신의 몸도 포함해) 세계 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만, 그렇게 지각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내면의 서술자는 우리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가능하다면 너무 주제넘게 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 기억 흔적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어떤 정보가 담겼을까?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기억 흔적이란 그저 과거의 지각적 입력에 대한 과거의 해 석의 잔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러한 잔해는 나중에 재구성되거나 걸러지거나 수정되거나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각 기억 흔적을 일관성 있는 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색인 을 다는 내면의 사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 처리에 대한 각 개별적인 사건의 잔해는 언제나 그렇듯 생겨난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 뇌는 다음 차례의, 또 그다음 차례의 생각의 순환 때문에 곧장 바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뇌는 경험으로부터 심오하고 추상적인 원리를 뽑아내려 하는 이론가가 아니다. 대신에 가능한 한 현재에 과거의 결합물과 변형을 연 관지어서 현재를 처리하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기억 흔적은 과거 처리 과정의 파편으로, 기억에 저장된 것은 날것 그대 로의 감각적 입력이 아니라 과거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치즈 강판을 얼굴로 본다면, 그러한 해석은 기억 속에 저장된다. 우리가 다음번에 비슷한 치즈 강판과 마주친다면 그 강판 역시 웃는 얼굴로 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해석을 기억하기 때문 이다.
정반대로, 해석되지 않은 감각적 세계의 측면은 잊힐 것이다. 지나치 게 읽기 어려운 손 글씨나 이해하지 못한 언어의 단편들, 또는 먼 곳에 있 어서 눈여겨보지 못했던 나무들의 윤곽 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기억 속에 저장되어 미래의 분석에 쓰인다거나 훗날의 지각을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영원히 잊힌다. 따라서 지각과 기억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친구와 말 그리고 멜로디를 알아차리는 일은 단순히 지각적 입력의 다양한 측면과 함께 연결된 것이 아니라, 얼굴과 말과 멜로디의 저장 기억의 파편들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는 얼굴이 보통은 막연하게 친숙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사람에 관한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다. 어느 단어에 대응되는 글자의 나열은 일반적으로 그 의미와 소리, 그 외에 많은 것 과 연결된다. 그리고 노래를 알아듣는 것은 그에 관련된 가사와 가수, 처 음 그 노래를 들은 시기 등을 떠오르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 감각을 타고 들어오는 정보의 해석은 기억된 정보의 거대한 몸체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물론 과거의 감각적 정보에 대한 과거의 해석을 기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기억은 어제의 지각적 해석이다.
- 뇌는 원리가 아닌 선례에 의해 작동한다. 매번 새로운 생각의 순환은 과거 관련된 생각들의 자투리를 재작업하고 변형해서 우리가 현재 주목하는 정보를 이해한다. 그리고 각 생각의 순환의 결과는 그 자체로 미래의 생각을 위한 원재료가 된다.
따라서 물리적, 사회적 세계에 대한 지식의 기반을 이루는 원리를 발 견하려는 초기 인공지능은 실패했고, 언어의 문법적 원리를 밝혀내려는 언어학도 실패했다. 진실과 선과 마음의 특성이 지닌 진정한 의미의 근 간을 이루는 원리를 정확히 표현하려던 철학도 실패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공통된 원인이 있다. 인간 지성을 뒷받침하려는 선례 체계는 모순적이고, 고도로 유연하며, 제한이 없다. 특히나 유사한 선례가 없는 경우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제한 없는 개방성이야말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지나치게 복잡한 이 세상을 다룰 때 필요한 것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