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 자체

과학 2023. 10. 21. 17:25

-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 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 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나는 이론물리학자이며 수학을 활용해 우주의 토대를 탐 구하는 일로 먹고산다.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수학은 성공을 거둔 방법이며 우리가 우주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통합적 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물리학은 우리 주위의 세계가 보 편적 법칙을 따르는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의 역사가 태초까지 140억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 을 밝혀냈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에 도취해 쉽게 잊어버리긴 하지만, 수학적 모형과 실제 물리적 세계는 같지 않다.
수학은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 수학은 우리가 우주에 서 발견한 것을 기술하는 수단일 뿐이다. 자연법칙도 마찬 가지다. 항성들 사이에서나 원자의 가장 안쪽에서 작용하 는 자연법칙 같은 것은 없다. 자연법칙은 우주에 대해 우리 가 아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요약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생 물학적 유기체로서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최대한 이해하고자 애쓰지만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 모형을 실재와 동일시하는 이러한 오해의 바탕에는 인간의 의식이 세계 자체보다 우월하다는 이원론적 존재론이 깔려 있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우리는 필멸하 는 물질을 다스리는 영원하고도 초월적인 영역이 있을 것 이라고 상상하고는 한다. 과학이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을 밝 혀냈음에도, 우리는 사실상 종교적 세계관에서 스스로를 해 방시키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개념과 비유는 계속해서 우 리의 사고를 오염시키고, 물리학은 물질을 지배하는 독립적 이고 자율적인 존재를 상정한 채 아름다운 수학적 법칙을 발견하는 과학을 표방한다. 단순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법론은 많은 경우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따른다. 우주가 근본적 의미에서 아름답거나 단순하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 머지않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유전 부호를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전체에 들어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당 신의 염기 서열뿐 아니라 친구 여러 명의 염기 서열까지 USB 드라이브에 넣어도 드라이브에 공간이 남을 것이다. 머나먼 미래의 고등 문명이 우리의 염기 서열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염기 서열을 우 주로 보낸다고 상상해 보라. 외계 문명이 당신의 복제본을 만들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그것은 단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 로 불가능하다. 설령 염기 서열이 DNA 분자에 기반한 부호 라는 것을 외계인이 알았다 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마 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항성으로부터 부호를 받았는데 그 것이 유전 부호를 나타낸다는 짐작이 들었을 때 우리는 그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부호가 DNA와 관계가 있 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정보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변환하는 방법을 알아내기에는 부족하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없어도 될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없으면 안 된다.
열쇠는 부호를 해독해 물리적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로 구현하는 온전한 세포계에 들어 있다. 부호를 읽을 수 있는 세포가 없다면 DNA 분자는 그저 무의미할 뿐이다. 알맞은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유전자는 다른 분자에 비해 딱히 이 기적이지 않다. 마찬가지로 컴퓨터 코드(부호)는 모든 명령 을 컴파일하고 실행할 적절한 컴퓨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다. 애플 컴퓨터용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은 윈도 PC에서 돌 아가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적절한 케이블이 없으면 컴 퓨터 배터리를 충전할 수조차 없다. 실제 컴퓨터를 제작하 는 데는 코드를 작성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이 든다. 이를 테면 우리는 양자 계산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법을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 양자 컴퓨터를 제작하는 것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 이렇듯 물질에는 이중적 성격이 있어서, 어떤 때는 파동 으로 기술하는 것이 최선이고 어떤 때는 입자로 기술하는 것이 최선이다. 입자와 파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해결한 것이 양자역학이다. 조금 섣불리 말하자면 물질은 당신이 보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볼 때는 입자처럼 행동한 다. 파동은 존재하는 가능성들을 나타내는데, 당신이 측정 하는 순간에 그중 하나만이 실현된다. 나머지 가능성은 전 부 사라지고 실현된 가능성만 남는다. 파동의 크기는 각각 의 결과에 확률을 부여한다.
측정하기 전에는 어떤 선택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명심하 라. 파동성은 실제로 존재하며 수많은 현상을 낳는다. 낱낱 의 입자를 다룰 때는 이 현상들을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양자역학을 큰 물체에 적용할 때뿐이 다. 모든 큰 물체는 작은 물체들로 이루어졌으므로 양자역학 법칙이 큰 물체에도 적용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양이를 예로 들어보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유명한 사고실험에서 고양이가 죽은 동시에 살아 있는 상태에 놓 인 상황을 상상했다. 이는 원자핵 하나가 붕괴하는지 아닌 지에 따라 이 고양이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원자핵 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 있지만, 원자 핵이 붕괴하는 순간 고양이는 치명적 독극물에 노출된다. 원자핵은 관찰되기 전까지 두 상태(붕괴하거나 붕괴하지 않 거나)로 존재할 수 있으므로, 고양이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이 모든 현상은 상자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가 상자를 열어 안을 들여다볼 때만 비로소 어느 쪽인지가 결정된다. 고양 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양자역학은 둘 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상자를 열 때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현 상이 실재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 데카르트가 옹호한 이원론은 아직까지도 많은 종교인들 이 천명하는 믿음을 온건하게 반영한 것으로, 그다지 독창 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여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도 자신의 결론이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했다. 오늘날 과학 교육을 받은 이 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몸과 정신의 분리가 별로 인기를 끌 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그들이 남들 앞에서 말하는 바로는 그렇다. 많은 이들이 의식은 물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물 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뇌 같은 신체 적 장기에 깃들지 않은 채로 자유로이 떠다니는 자아는 존 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데카르트의 오래된 이원 론은 그 매력을 잃지 않고 현대 컴퓨터과학의 사고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별하는 방식은 몸과 정신을 바라보던 방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이 런 식으로 컴퓨터 기술은 대규모 연산을 효율적으로 하는 데 관심이 있는 이들뿐 아니라, 데카르트의 '나' 문제를 새롭게 포장하려는 이들을 위한 도구로도 발전했다. 

- 현대 컴퓨터의 발명자 앨런 튜링은 1950년에 발표한 중요한 논문에서 이렇게 물었다. "컴퓨터가 생각할 수 있을까?"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컴퓨터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튜링은 모방 게임을 상상했는데, 오늘날 '튜링 테스트Turing test'라고 불리는 이 게 임에서 컴퓨터는 인간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컴퓨터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상대방을 설득하려 애쓴다. 당신이 계 산주의 마음 이론을 믿는다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컴 퓨터에는 의식이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 지 않다면 당신은 철학적 좀비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 는데, 이는 기본 가정에 어긋난다. 존 설 같은 사람들은 이 렇게 콧방귀를 뀐다. 튜링 테스트가 지능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지는 몰라도 그 결과가 어째서 의식과 관계가 있다는 거지?

- 중요한 요점은 모형과 실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한가운데에 있으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서 최대한 많이 배우고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물리학자일지 는 몰라도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물리학을 우 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그럴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 우리는 병에 걸려서야 비로소 우리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세 계의 존재에 묶여 있으며, 어떤 심연이 우리를 그 존재로부터 갈라 놓아 그 존재는 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도 그 존재에게 자신을 이 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 존재가 바로 우리 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걱정 말라. 당신이 영혼에 짓눌리더라도 그것이 바라는 것은 깊고 꿈꾸지 않는 잠에 불과하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몸은 더는 어떤 고 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육, 뼈, 살갗을 비롯한 모든 것은 재로 돌아가고 뇌도 결국에는 생각하기를 멈출 것이다. 그것이 우리 가 신에게 감사하는 이유다.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걱정 말라. 모든 것은 헛되다. 당신 이전의 모든 이에게 그랬듯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다. (마를렌 하우스호퍼, 『오스트리아 먼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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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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